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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춘귀의 모든 챕터: 챕터 321 - 챕터 330

368 챕터

제321화

계연수가 가까이 다가서자 부드러운 향기가 은은히 번졌다.심서준은 시선을 낮추었다.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가늘고 길게 드러난 목선이 눈에 들어왔다. 눈처럼 흰 옆얼굴에 맑은 귓불. 그 귓불에는 여전히 아무 장식도 없었다. 아무것도 달지 않은 채 고요했다. 그러나 그 고요함이 오히려 상상을 부추겼다.그는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자신이 건넨 그 귀걸이를 그녀가 달고 있는 모습을 떠올린 적이 있었다. 그것은 곧 그녀가 자신을 마음에 두는 모습이기도 했으니.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설명하기 어려운 열기가 몸을 타고 올라왔다. 특히 밤이 깊어 고요해질수록 그것은 억누르기 힘든 본능처럼 일었다.지금 그녀는 바로 곁에 서 있었다. 이토록 가까이 선 적은 드물었다.그의 옆에 늘어뜨려진 손끝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탁자 아래로 늘어진 그녀의 연녹색 소맷자락을 스치듯 건드렸다. 늘 그랬듯, 드러내지 않는 시선으로, 어둠 속에서.한편, 계연수는 다소 초조했다.심서준이 수결을 하라 했지만 탁자 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인주가 보이지 않았다. 괜히 번거로운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 두 번이나 살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결국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심 대인… 인주가 없습니다.”심서준은 그녀의 눈을 마주했다.어딘가 난처해 보이는 표정, 또렷하게 빛나는 눈동자, 말끝에 실린 부드러운 숨결까지. 그녀는 온통 여린 기운으로 감싸여 있었다.가까이 있으면 품 안에 끌어안고 싶어질 정도였다.심서준은 탁자 아래로 손을 뻗어 인주를 꺼냈다. 그러나 탁자 위에 놓지 않고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계연수는 잠시 멈칫했다. 그의 손 위에 놓인 인주를 보다가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 역시 묻지 않았다.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조심스레 검지를 들어 인주에 찍고 소장 위에 지장을 남겼다.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계연수는 작은 숨을 내쉬며 물었다.“이제 더 할 일은 없습니까?”심서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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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2화

생각이 번쩍 스치자 계연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심 대인, 제가 주루로 모시겠습니다. 오늘 일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요.”심서준의 시선이 그녀가 꼭 끌어안고 있는 돈궤를 스쳤다. 마치 먹이를 지키는 듯한 모습이었다. 입가가 아주 미묘하게 비틀렸다가 이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먼저 밖으로 나섰다.계연수는 그의 등을 바라보다가 늘 그러했듯 그의 냉담함에 익숙해진 마음으로 급히 뒤를 따랐다.그녀는 분명 뛰어야만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심서준은 문 앞에서 멈춰 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앞서 걷는 이와 뒤따르는 이. 그의 걸음은 빠르지 않았다. 계연수는 조심스레 보폭을 맞추며 뒤를 따랐다.밖으로 나서자 심서준이 멈춰서 물었다.“어디로 갈 겁니까?”계연수는 잠시 난처해졌다. 오랫동안 주루에 간 적이 없었고 어느 집이 그의 입맛에 맞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의 신분을 생각하면 아무 곳이나 모실 수도 없는 노릇. 그렇다고 해서 초대한 사람이 되려 손님에게 행선지를 묻는 것도 어색했다.“성남 큰길 쪽으로요.”심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계연수가 눈을 크게 뜬 사이 아무렇지 않게 그녀가 타고 온 마차에 올라탔다.계연수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용춘도 입을 벌린 채 굳어버렸다.당당한 이품 좌도어사인 그가, 늘 호위에 둘러싸여 다니던 그가, 그의 눈에는 분명 소박하고 협소해 보일 이 마차에 오르다니.그때 옆 휘장이 다시 들렸다.“안 들어옵니까?”차분하지만 낮은 음성이었다.계연수는 그의 말을 따라 본능처럼 황급히 마차에 올랐다.마차 안은 그의 것만큼 넓지 않았다. 심서준은 키가 크고 다리가 길어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계연수는 구석에 바르게 앉았다. 자세를 단정히 하고 혹시라도 어색한 일이 생길까 숨결마저 조심했다.반면, 밖에 서 있던 용춘은 어찌할 바를 몰라 난처해하고 있었다. 그때 문하가 다가와 눈치를 좀 보라며 자신과 함께 마차 밖에서 따르라 했다.하녀가 밖에서 따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용춘은 늘 계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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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3화

계연수는 처음 그 품 안에 떨어졌을 때조차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손바닥에 닿은 것은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었고 눈앞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그때, 마차 밖에서 문하의 목소리가 들렸다.“앞에서 마차가 급히 멈췄습니다. 나으리, 괜찮으십니까?”심서준의 낮은 음성이 곧이어 울렸다.“괜찮다.”그의 가슴이 말소리와 함께 미묘하게 울렸다. 계연수는 그 떨림을 온몸으로 느꼈다. 문서와 먹향이 섞인 침향 냄새가 은은히 스며들었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와 눈을 들자, 검은 옷자락 위로 흐르는 어두운 문양이 보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자, 자신을 내려다보는 심서준의 시선과 마주쳤다.그의 눈빛은 놀랍도록 평정했다. 그녀가 갑자기 안겨들었음에도 아무런 동요도 드러내지 않는 눈. 그 차분함이 오히려 그녀를 더 부끄럽게 만들었다.황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다급한 탓인지 손이 미끄러졌고 다시금 그의 품으로 기울어지며 얼굴이 그의 어깨에 닿았다. 눈앞에는 그의 목덜미가 가까이 있었다. 고작 한 치 거리. 그 위로 또렷하게 드러난 목젖이 시야를 채웠다.그녀는 얼굴이 한순간에 달아올랐다. 급히 물러서려 했지만 서두를수록 더 엉켰다. 허둥대는 사이 어디를 눌렀는지, 그의 낮은 신음이 귀가에 닿았다.그녀는 그대로 굳어버렸다.“저… 저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닙니다.”숨결이 떨렸다. 향기 어린 숨이 그의 목을 스쳤다.심서준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귓바퀴를 보며 손을 들어 그녀의 등을 받쳤다. 음성은 한결 부드러웠다.“괜찮습니다. 잠시 그대로 계십시오.”그녀는 숨조차 죽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그는 조심스레 그녀를 세워 앉히고 허리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계연수는 차라리 이대로 땅속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그녀의 시선은 끝내 그의 눈을 피했다.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무슨 말을 덧붙여도 소용없을 것만 같았다. 어깨가 축 처치며 온몸이 부끄러움으로 젖어 있었다.심서준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 어둑한 촛불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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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4화

마차에서 내린 심서준이 곁에 섰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서 있었을 뿐인데도 큰 체구에서 묵직한 압박감이 흘러나왔다. 계연수는 몇 번이나 숨을 고르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저쪽 득미거로 가겠습니다.”그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덧붙였다.“혹시 심 대인께서 그 집 음식이 맞지 않으시면 다른 곳으로 옮겨도 됩니다.”심서준이 고개를 숙였다. 밤바람이 불어 그녀의 패모에 달린 흰 베일이 가볍게 흔들렸다.베일 끝이 마치 소박한 수묵화의 한 자락처럼 그의 소매를 스치고 지나갔다.그의 시선은 그녀를 지나 뒤편 인파로 흘렀다. 남녀가 나란히 걷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지금의 자신과 계연수 같았다.그의 눈매가 조금 누그러졌다.“그대가 정하십시오.”그 한마디에 계연수는 순간 낯설게 느껴지는 온기를 보았다. 예전에 사촌 오라버니의 벼루를 사던 날, 그가 잠시 보여주었던 부드러운 표정과 닮아 있었다. 높고 멀기만 하던 사람이 아니라 조금은 인간적인 빛이 스친 얼굴에 긴장으로 조여 있던 마음이 조금씩 풀렸다.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이 길을 건너려는 순간, 밝은 목소리가 날아왔다.“오숙부!”계연수가 돌아보니 심정우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푸른 원령포 차림에 수수한 복장이었지만 걸음은 경쾌했다. 가까이 와서야 계연수를 본 듯, 얼굴이 환해졌다.“연수….”오숙부의 시선이 스쳐오는 것을 느끼자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계 아가씨. 어찌 오숙부와 함께 여기 계십니까?”계연수는 심정우에게 고마운 마음이 남아 있었다. 그가 심서준에게 말을 꺼내주지 않았다면 일이 이렇게 빨리 풀리진 않았을 테니.그녀는 간략히 경위를 설명하고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했다.심정우는 괜히 귀가 붉어졌다. 사실 자신이 한 일은 많지 않았다. 결국은 오숙부의 말 한마디가 모든 걸 움직였으니.그래도 계연수에게서 고마움을 받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들떴다.“계 아가씨를 돕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말을 마치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슬쩍 오숙부 쪽을 보니, 심서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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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5화

계연수는 심정우가 내민 옥패를 보는 순간 잠시 멈칫했다. 둥근 고리에 두 마리 물고기가 맞물린 쌍어패였다. 빛깔만 보아도 좋은 옥임이 분명했고 오래 몸에 지녀 온 듯 윤이 났다.그녀는 곧장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이런 물건은 받을 수 없었다. 몇 번 마주한 사이에 이런 사사로운 물건을 주고받는다면 남의 눈에 띄었을 때 괜한 말이 돌기 쉬웠다.그러나 심정우는 물러서지 않았다.“값비싼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제게는 옥패가 여러 개 있지요. 계 아가씨께서 이혼했다는 소식을 어머니한테서 들었습니다. 지금 분명 어려운 일도 많으실 텐데 받아 두십시오. 혹시라도 꼭 써야 할 때가 있을지 모르지 않습니까.”그는 덧붙였다.“어릴 적 제가 아가씨를 괴롭힌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사과라 생각해 주십시오.”계연수는 그의 마음이 고마웠다. 어린 시절의 일은 이미 오래전에 잊어버렸다. 그럼에도 다시 고개를 저었다.그 순간, 두 사람 사이가 길게 뻗은 손에 의해 가로막혔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심정우의 옥패를 가볍게 집어 들었다.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앞에 서 있던 심서준이었다.그의 얼굴은 여전히 냉정했고 눈빛은 차게 가라앉아 있었다.“생각이 있느냐? 사사로이 물건을 주고받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느냐?”심정우는 또 한 번 오숙부에게 꾸중을 들었으나 감히 대꾸하지 못했다.군영에서 지내며 여인들과 깊이 얽힐 일도 없었고 평소 떠드는 벗들과 어울리긴 했으나 그런 자리의 여인들은 천한 신분일 뿐이었다. 계연수에게는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솔직하게 대했을 뿐, 다른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이제야 말뜻을 깨닫고 얼굴이 굳어지며 급히 계연수에게 사과했다.계연수는 그가 단순한 성정임을 알았다. 그와의 대화에는 계산이나 속셈이 없었으니 굳이 헤아릴 것도 없었다.그녀는 무심코 고개를 돌려 심서준을 보며 조심스럽게 한마디 덧붙였다. 심서준은 입술을 다문 채 그녀를 한 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옥패를 심정우의 손에 되돌려 던지듯 건넸다.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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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6화

심서준의 깊고 어두운 눈은 모든 장면을 놓치지 않고 담아내고 있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온 뒤, 복도 난간에 서서 아래층의 등불을 내려다보았다. 불빛이 겹겹이 흔들리는 밤이었다.문하는 주인의 등을 바라보았다. 저 고요한 뒷모습에 스며 있는 상실감은 아마 자신만이 알아챌 수 있을 터였다.밤바람이 천천히 스쳤다. 심서준의 눈동자는 잠잠했고 감정은 드러나지 않았다.계연수는 그의 곁에 있을 때 한 번도 심정우 앞에서 보이던 그 느슨한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 그에게는 늘 조심스러웠고 단정했으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그러나 심정우 앞에서는 달랐다. 가볍게 웃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나누고,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도 자연스러웠다. 그 장면 하나하나가 그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그는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곁에 다른 사내가 있는 모습을.문하가 조심스레 다가와 속삭였다.“나으리, 안에 두 분만 계시면 좋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심서준은 문하를 한 번 바라보았다.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문 앞에 이르렀을 때, 안쪽에서 심정우의 시원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이로 계연수의 맑고 가벼운 웃음이 스며 있었다.그는 문을 밀어 열었다.문이 열리는 순간, 방 안의 소리는 한순간에 멎었다.심서준의 시선이 곧장 계연수에게 닿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직 웃음의 잔상이 남아 있었다. 환한 등불 아래에서 눈처럼 흰 피부가 더 또렷해 보였다. 본래도 고운 얼굴이었지만 웃을 때는 더욱 빛났다. 그 미소가 심정우의 눈에는 또 어떤 의미로 비치고 있을까?심정우는 스무 살. 그녀와 비슷한 나이였다.질투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기 위해 그는 시선을 낮추며 일렁이는 감정을 눌러 담았다.자리에 돌아온 후 계연수가 음식을 먹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작은 입이 쉬지 않고 움직였고 볼이 살짝 부풀어 올랐다.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마치 오래 굶은 아이처럼 맛있게 먹고 있었다.그의 입가에 희미한 기색이 스쳤다.그녀가 어느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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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7화

심정우는 솔직히 조금 어리둥절했다.어쩐지 오숙부는 자신이 계연수와 말을 나누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듯했다. 얼굴에 스친 노골적인 불쾌와 성가심은 유난히 엄격해 보였다. 더 묻고 싶었지만 감히 그럴 수 없었다. 그는 계연수를 한 번 더 바라본 뒤, 못내 아쉬운 기색으로 몸을 돌렸다.길 건너편으로 건너가면서도 뒤를 돌아보았다. 계연수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확인하자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계연수가 시선을 거두는 순간, 마주한 것은 심서준의 눈빛이었다.그녀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심 대인께서… 오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셨습니까?”작게 물은 뒤, 고개를 숙였다.“오늘은 본래 제가 모시는 자리였는데….”심서준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장신구까지 전당에 맡긴 처지였다. 오늘 식사를 그녀가 계산했다면 또 무엇을 내놓아야 했을지 알 수 없었다.그는 대답 대신 짧게 말했다.“마차에서 이야기합시다.”계연수는 또다시 그가 자신의 마차에 오르는 모습을 보고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따라 올랐다.소박하고 다소 비좁은 마차 안, 그녀는 구석에 얌전히 앉아 그가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심서준이 물었다.“아직 떠나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계연수는 망설이다가 솔직히 답했다.“어머니께서 갑자기 병환이 깊어지셨습니다.”심서준은 별다른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지금은 좀 나아졌습니까?”“네, 조금은….”잠시 정적이 흐른 뒤, 그가 다시 물었다.“갑작스러운 중병이라 했는데 원인을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계연수는 그가 세세히 묻는 데 놀랐지만 성실히 답했다.“태의께서 울체가 쌓여 생긴 병이라 하셨습니다. 심병이 토혈로 이어진 것이지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로 줄곧 기운이 없으셨지만 피를 토하신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심서준의 눈빛이 한층 차가워졌다.“다른 가능성은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까?”그 말에 계연수는 멈칫했다. 그의 깊은 시선이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했다.“설마… 누군가 독을 썼을 거라 보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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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8화

심서준은 말을 마치고 더 머물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휘장을 걷고 냉담한 기색 그대로 마차에서 내렸다.계연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심장이 가늘게 떨렸다. 저도 모르게 휘장을 들어 올려 다시 한 번 그를 찾았다.화등이 막 밝혀진 거리, 사람들로 가득한 인파 속에 그는 길게 선 학처럼 서 있었다. 검은 옷자락이 밤빛과 겹쳐 더욱 차갑게 보였다.하지만 그는 매번 그녀가 막다른 길에 설 때마다 손을 내밀었다. 방금도 아무 말 없이 열쇠를 남겨두지 않았던가.그는 언제나 침묵했고, 그러면서도 늘 그녀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서툴게 그의 품으로 쓰러졌을 때도 단 한마디 나무람 없이 묵직하고 안정된 힘으로 모든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지금 이 순간, 계연수는 그를 불러 세우고 싶었다. 왜 자신을 돕는지, 자신이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자리인지 묻고 싶었다.그러나 그 냉정한 뒷모습은 점점 흐릿해졌다. 그의 화려한 마차 곁으로 호위들이 다가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휘장을 들어 올렸다.두 사람 사이에는 겹겹의 산맥이라도 놓인 듯했다.그는 고귀했고 단정했으며 높은 자리에 있었다. 자신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설령 답을 안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계연수는 자신이 심서준을 향해 품은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의 곁에 서 있으면 마음이 놓였다. 그가 있으면 무슨 일이든 결국은 평온하게 정리될 것만 같은 기묘한 안도. 그것이 두려우면서도 놓기 싫은 감정이었다.*계연수가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이미 저녁을 마치고 침상에 기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방에 들어서자 어머니는 손을 흔들며 그녀를 불렀다.“연수야, 네가 큰 외숙모가 보낸 그 두 계집아이를 곤란하게 했다고 하더구나?”계연수는 옆에 선 춘화를 바라보았다.춘화는 황급히 손을 저었다.“아가씨, 저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헌데 오늘 큰 부인께서 오셔서 빈정대는 말을 한참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그녀가 말을 이으려 하자 어머니는 단번에 끊어버렸다.“춘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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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9화

계연수는 지금 당장 어머니를 설득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득하지 못해도 상관없었다.어머니는 때로는 고집을 부렸으나 딸이 끝까지 밀어붙이는 일이라면 결국은 따라주곤 했으니 말이다.먼저 집을 구해버리면 된다. 일이 이미 굳어버린 뒤라면 어머니도 더는 어쩌지 못하실 것이다.계연수는 눈을 내리깔았다. 말없이 잠시 서 있다가 점점 여위어 가는 어머니의 몸을 바라보니 가슴이 저려왔다.“이 일은 나중에 다시 말씀드릴게요. 어머니, 오늘은 일찍 쉬세요.”고씨는 딸의 손을 꼭 잡았다. 더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계연수의 얼굴에 스친 피곤을 보고는 많은 말을 삼켰다.“그래….”계연수가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밤바람이 복도를 스쳤다. 그녀는 숨을 내쉬며 목소리를 낮추어 춘화에게 물었다.“큰 외숙모가 또 무슨 말씀을 하셨느냐?”춘화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작은 소리로 답했다.“큰 부인께서… 아가씨는 이제 큰 방에 기대어 사는 처지라 하시며, 은혜를 모른다 하셨습니다.”계연수는 밤빛 속에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한층 옅어졌다.얼굴에 스친 기색은 비웃음 같았으나 실은 깊은 씁쓸함이 더 짙었다.춘화는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과거 아버지가 계실 적, 고씨는 고가를 위해 아끼지 않았다. 두 외숙을 돕자고 늘 설득했던 이도 어머니였다.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냉대가 돌아왔다. 은혜를 모른다니, 그 말이야말로 아이러니였다.이 집안 두 사내의 입학에 힘쓴 이가 누구였던가? 계연수가 사옥현의 집에서 고단한 날을 보내면서도 명절마다 값비싼 물건을 보내왔던 일은 또 무엇이던가?그녀는 단 한 번도 계산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더 무엇을 바라란 말인가?초봄의 밤은 유난히 차가웠다. 계연수는 생각을 접고 다시 물었다.“오늘 새로 온 두 아이는 어떠느냐?”춘화가 재빨리 답했다.“훨씬 부지런합니다. 노부인 쪽에서 보낸 아이들입니다.”계연수는 비로소 안도했다.그러다 문득 오늘 밤 심서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마차 안에서 그가 단독으로 묻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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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0화

작은 식함이 계연수 앞에서 열렸다. 뚜껑이 들리는 순간, 달콤한 향이 번져 나왔다.안에는 사탕떡 두 조각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크기였다.그녀는 이 과자를 먹어본 적이 있었다. 맛이 좋았지만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라 값도 만만치 않았다.계연수는 상자를 받아 들고 고준안을 바라보았다.“오라버니, 앞으로는 이런 거 보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무로 바쁘실 텐데, 제 일까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고준안은 웃었다.“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다.”그 말에 계연수의 가슴이 순간 조여들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말을 잃었다.그러나 고준안은 대답을 바라지 않는 듯, 한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일찍 쉬거라. 나는 돌아가겠다.”그는 더 머물지 않았고 이 일을 핑계로 시간을 늘리지도 않았다. 계연수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겠다는 듯, 조용히 몸을 돌렸다.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계연수의 목이 묘하게 메였다.용춘이 그녀 손에 든 상자를 보며 낮게 말했다.“아가씨께서 처음 고가에 오셨을 때도 둘째 도련님께서는 늘 맛난 것을 보내셨지요. 이렇게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여전하시네요.”계연수는 아무 말 없이 손을 쥐었다가 고개를 숙인 채 돌아섰다.그녀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목욕을 마쳤다. 몸은 따뜻해졌지만 사탕떡에는 손이 가지 않았다.“네가 먹어라.”용춘에게 넘긴 뒤, 그녀는 침상에 기대앉았다.시선은 어느새 심서준이 내밀었던 열쇠에 머물러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상자에 넣어 두었다.언젠가는 반드시 돌려주어야 할 물건이었다.그 무렵, 고준안은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마당에 들어서자 하인이 전한 말이 귓가에 남았다. 오늘 어머니가 또 혜란원에 다녀왔다는 소식이었다.그의 발걸음이 멈추더니 얼굴이 서서히 식어 갔다.곧장 어머니의 처소로 향했다.그 시각, 장씨는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집안의 지출 하나하나를 꼼꼼히 계산하느라 밤마다 한참을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 시각에 아들이 찾아온 것이 의외였지만 반가운 기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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