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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1화

심서준의 손끝이 계연수의 입술 곁에 닿았을 때, 계연수는 미세하게 몸을 떨었다. 당장이라도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고개를 숙인 채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의 시선은 그저 소매 끝에 수놓인, 살아 움직이는 듯한 종달새에 머물렀다.“그런게 아니에요…”심서준은 지금 그녀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아 있었다. 그의 옷자락이 그녀의 옷과 스칠 만큼 가까워 계연수는 차라리 이 순간 마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을 지경이었다.심서준은 곁눈질로 계연수의 표정을 살폈다. 희고 깨끗한 귓바퀴 위로 번진 붉은 기운을 보고는 늘 냉담하던 눈매에 옅은 웃음이 스쳤다.그녀에게 번진 당혹의 홍조는 그녀 몸에 스민 부드러운 향기처럼 사람을 한없이 빠져들게 했다.둘 사이의 거리는 숨결이 닿을 듯 가까웠다. 심서준의 시선은 줄곧 계연수에게 머물러 있었다.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방금 전, 그녀의 입술에 닿았던 온기가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는 듯했다.그때 계연수가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고 먼저 입을 열었다.“심 대인, 그 약값은 얼마인가요?”말하며 그녀는 가지고 온 주머니를 꺼냈다.그 주머니는 어머니가 건네준 것이었다. 반드시 돈을 돌려주고, 이렇게 값비싼 것을 아무 대가 없이 받아서는 안 된다고 거듭 당부했었다.심서준은 눈썹을 찌푸린 채 그녀의 손짓을 바라봤다.“필요 없습니다.”하지만 계연수는 여전히 그의 손 위에 주머니를 올려놓았다.어머니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지금 그녀는 여유가 있었고, 가진 돈도 충분했으니 남의 도움에 의지해야 할 처지는 아니었다.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라면 이런 호의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부드러운 손끝이 심서준의 손바닥 위에 닿았다. 심서준은 입술을 다물고 고개를 들었다. 계연수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심 대인, 이 돈이 대인께 큰 금액은 아닐지라도 제 마음입니다. 저는 약값을 감당할 수 있어요. 그러니 부디 받아주세요.”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조용히 덧붙였다.“심 대인, 저는 이제 가보겠습니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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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2화

“그렇게 서둘러 나와 선을 그으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심서준의 말을 들은 계연수는 순간 멍해졌다. 그가 자신의 뜻을 오해한 것 같다는 생각에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해명했다.“그런 뜻이 아니에요. 가게와 그림도 팔았고, 지난번에 심 대인께서 이명유에게서 받아주신 돈까지 더해 지금 제 손에 있는 돈이 적지 않아요. 어머니 약값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말을 이어가며 계연수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물안개처럼 흐릿한 눈동자에 슬픔이 어렸다.“그저 이렇게 계속 도움만 받는 게 마음에 걸려서요. 더는 받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런 것입니다.”심서준은 그녀가 입술을 깨무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몸이 긴장되듯 굳어져 깊게 숨을 들이켰다.그녀의 말이 무엇이든,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그는 오직 하나만을 묻고 싶었다.“나와 혼인할 생각이 있습니까?”계연수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마주했다.심서준은 그녀의 눈에 담긴 당혹과 흔들림을 바라봤다. 촛불의 은은한 빛이 그녀의 단정하고 고운 얼굴 위로 스며들었다. 그의 심장은 숨이 막힐 듯 조여왔으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럽게, 천천히 그녀를 이끌듯 흘러나왔다.“아가씨, 저를 도와주겠습니까? 오직 당신만이 저를 도울 수 있습니다. 당신 어머니는 제가 책임지고 보살피겠습니다.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요. 모든 건 제가 맡을 테니까요. 그리고 앞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의 이후는 제가 지키겠습니다. 부귀와 영화는 모두 당신의 것이 될 겁니다. 예물 또한 전부 당신 명의로 둘 겁니다.”심서준은 지금, 이 순간 답을 알고 싶었다. 내일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단 한 순간도 더 미루고 싶지 않았다.계연수의 눈앞에는 그의 넓은 가슴이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 깊은 시선에 계연수의 마음은 가늘게 떨렸다.그녀는 그의 다급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날, 그가 말하던 급박한 사정을 떠올렸다. 황제가 하사혼을 빌미로 심가를 압박하려 하는 것은 그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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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3화

계연수는 멍하니 심서준의 말을 들었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얼굴에 닿았고 그 목소리에 담긴 차분한 안정감은 그녀의 불안과 망설임을 조용히 쓸어내렸다. 그녀는 어느새 그의 눈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밤바람이 마차의 발을 살짝 들어 올렸다. 밝았다 어두워졌다 하는 빛이 두 사람 위로 어른거렸다. 그제야 계연수는 서늘한 바람에 정신이 들었다. 지금 자신과 심서준의 자세가 얼마나 아슬아슬한지 깨달았다. 그는 거의 그녀를 구석에 밀어넣듯 가까이 두고 있었고 눈앞에는 그의 넓은 가슴뿐이었다.계연수는 아직 이런 가까움에 익숙하지 않았다.그와 혼인을 약속했지만 그 이상을 바란 적은 없었다.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그를 돕고 그의 부인이라는 이름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가며 짐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계연수는 조심스레 몸을 움직였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그렇게 한참이 흐른 뒤에야 머리 위로 다시 심서준의 낮고 쉰 목소리가 내려왔다.“돌아가면 괜한 생각 하지 마십시오. 제가 다 정리해두겠습니다. 모든 것은 저에게 맡기면 됩니다. 내일 다시 찾아오겠습니다.”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숨결을 가까이 두고 다시 물었다.“그때 가져온 강정도 먹고 싶습니까?”계연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심 대인께서 바쁘시다면 굳이 가져오지 않으셔도 됩니다.”심서준은 그녀가 여전히 습관처럼 거리감 있게 부르는 ‘심 대인’이라는 호칭을 들으며 고개를 내려 그녀의 살짝 돌아간 얼굴을 바라봤다. 아직도 이 가까운 거리에 익숙하지 않은 듯, 희고 단정한 얼굴에는 여전히 수줍은 긴장감이 어렸다.그녀가 한때 혼인했던 적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누구도 짐작하지 못할 만큼이었다.심서준은 소리 없이 웃음을 흘리고는 낮게 말했다.“괜찮습니다. 저도 당신을 보고 싶으니까요.”마차에서 내려섰을 때, 계연수의 마음은 여전히 어딘가 몽롱하고 현실감이 없었다.밤바람이 스쳤다. 고개를 들자, 여전히 마차 안에 앉아 있는 심서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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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4화

계연수는 살짝 몸을 틀어 어머니를 향해 앉았다. 곁의 작은 탁자 위에는 붉은 점토 화로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서는 매화차가 은은히 끓고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직접 차를 따르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어머니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번져 있었다. 계연수는 그 표정을 바라보다가 자신이 내린 결정을 조심스레 입 밖으로 꺼냈다.고씨는 찻잔을 계연수 앞에 내려놓고,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심가가 우리에게 베푼 은혜는 적지 않다. 연수야, 네 결정도 틀린 건 아니다. 심가의 가풍은 늘 훌륭했고, 심 후작 또한 인품이 뛰어난 분이다. 예전의 사옥현과는 감히 견줄 수 없지. 그가 너에게 도움을 청했다면, 분명 모든 것을 잘 마련해둘 것이다. 나도 마음이 놓이는 구나.”계연수는 어머니의 말을 들으며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어 둘째 숙부 쪽에서 온 답신 이야기를 꺼냈다.그녀의 마음 한켠에는 여전히 미안함이 남아 있었다. 이미 그쪽 집은 정리도 끝났고, 뜰에는 해당화까지 심어 두었으며, 여러 날을 들여 손을 봐 두었는데 이제 와 가지 않겠다고 하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러자 고씨가 말했다.“그 일은 걱정할 것 없다. 내가 네 둘째 숙부에게 편지를 보낼 것이다. 그 분도 너그러이 이해해주실 거야.”계연수가 다시 물었다.“그래도 숙부께 약간의 은자를 보내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분이 옆채를 손수 수리하고 뒤뜰까지 정리해두셨잖아요. 그 비용도 다 숙부께서 먼저 쓰신 것이니 그냥 넘어가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고씨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도 맞다. 가지 않더라도 드릴 것은 드려야지. 받으실지 말지는 그분의 몫이고. 그래야 우리 마음도 편할 것 아니냐.”두 사람이 이런저런 세부를 이야기하고 있을 때, 용춘이 밖에서 들어왔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계연수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계연수는 순간 말을 멈췄다가 어머니를 향해 먼저 쉬시라 이르고 잠시 밖에 나갔다.밖으로 나오자, 용춘이 여전히 목소리를 낮춘 채 말했다.“사씨 집안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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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5화

계연수는 큰 외숙모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늘 온화하던 그 눈동자는 지금 고요한 물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제가 알기로, 고씨 집안 마차는 늘 평범해서 따로 표식도 없었지요. 헌데 사씨 집안 사람들은 어째서 하필 외숙모의 마차를 따라온 걸까요? 문 앞에 도착해서 그들이 내릴 때까지도 눈치채지 못하시다가 문이 열려 그들을 들이고 나서야 알게 되셨다는 건가요? 이미 그렇게 하신 이상, 굳이 변명하실 필요가 있습니까?”장씨는 계연수의 말을 듣고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그녀의 눈빛은 아직 젊었지만,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한 치의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 이미 얇게 덧씌워진 거짓의 막을 그대로 찢어버린 셈이었다.사씨 집안 사람들을 데려온 것은 분명 장씨였다.자신의 아들이 더 이상 계연수에게 얽매이지 않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녀 때문에 앞날까지 버리고 외지로 떠나려 하는 것을 막고 싶었다. 그래서 사씨 집안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를 다시 데려가게 하려 했던 것이다. 그래야 아들도 단념할 것이라 여겼으니까.장씨는 애써 마음을 눌러 담고 억지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연수야, 어떻게 그런 모진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냐? 나를 믿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떳떳하니, 네가 오해하든 말든 상관없다. 나는 네 어머니 병이 걱정되어 좋은 제비집까지 가져왔는데 굳이 사씨 집안 사람들을 끌고 올 이유가 뭐가 있겠느냐?”계연수는 더는 이 문제로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이미 진실을 따지는 것 자체가 의미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마음속으로 알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그녀는 잠시 시선을 돌려, 앞채 안쪽에서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거만하게 앉아 있는 사금희를 한 번 바라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거두고 장씨를 향해 말했다.“외숙모의 제비집은 그대로 가져가세요. 어머니는 그런 건 이제 드시지도 못하세요.”장씨의 얼굴이 다시 한 번 일그러졌다.그녀는 계연수를 노려보며 더는 숨기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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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6화

“내가 보기엔 저 사람들도 진심인 것 같구나.”계연수는 장씨를 한 번 바라봤다. 가슴 한켠에 쌓인 실망이 막혀 은근히 아릿하게 저려왔다.그동안 집 안에서 장씨가 던지던 차가운 말들은 애써 이해하려고 해왔다. 어쨌든 한 집안의 일이었고 자신과 어머니가 고씨 집안에 얹혀 사는 처지였으니, 어느 정도 짐이 된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 말들을 원망하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사금희가 그렇게도 거만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앞에서 장씨는 오히려 사씨 집안을 두둔하고 있었다.한마디 한마디가 계연수를 점점 더 억지스럽고 무례한 사람으로 몰아넣고 있었다.곁에 서 있던 사금희는 장씨의 말을 듣자마자 기세를 얻은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들어보거라. 너의 외숙모조차 그렇게 말하지 않느냐. 어릴 적부터 교양을 받았다더니, 지금 보니 교양이라곤 눈곱만큼도 없구나.”계연수는 사금희의 말을 아예 받아주지 않았다. 그저 장씨를 바라보며 이미 거리감이 담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외숙모께서 하실 말씀은 다 끝나셨나요? 다 하셨다면 가져오신 것도 함께 들고 돌아가 주세요. 외숙모께서는 제 일 때문에 늘 피해를 보신다고 여기셨잖아요. 이런 일로 더 머물게 하는 건 감히 바라지 않습니다. 번거롭게 해드렸네요.”장씨는 계연수의 눈을 마주한 채 멍하니 굳어버렸다. 그 눈 속에 담긴 조롱이 너무도 노골적이어서 오히려 그녀 쪽이 마음이 덜컥 내려앉을 지경이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황급히 말했다.“그런 뜻이 아니다. 모든 일은 좋게 풀 수 있다고 생각했고 오직 너를 위해서 한 말이란다.”계연수는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지만 온기는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사씨 집안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아버지 일이 있고 난 뒤 외숙모께서 어떻게 하셨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습니다. 예전의 정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외숙모께서 저를 위해서라고 하신 말씀도, 감사히 듣겠습니다. 헌데 그런 ‘배려’는 저에겐 감당하기 어렵네요. 앞으로는 이곳에 무엇도 보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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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7화

계연수는 사금희와 더 말다툼을 벌일 생각이 없었다.사금희는 원래부터 눈이 높아 작은 모욕도 견디지 못하는 성정이었다. 게다가 요즘은 로원이 쥔 권세를 등에 업고 아첨을 받으며 지내다 보니 성미는 더욱 교만해졌다.지금 여기서 그녀와 말씨름을 시작했다가는 이 오후가 통째로 허비될 게 뻔했다.계연수는 아예 사금희를 다시 쳐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사씨 집안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찾아온 이상, 분명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을 터였다. 그녀는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문득 어제 심정우에게서 들은 사씨 집안 이야기가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그 또한 다 업보일 뿐이었다.계연수도 결국 평범한 사람이었다. 마음 한켠이 은근히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사금희는 그런 계연수의 태도에 얼굴이 굳어버렸다. 맞은편에 단정히 앉아 비웃듯 입을 열었다.“요즘은 아주 기세가 대단하구나. 나중에 감옥에라도 끌려가게 되면, 그때도 지금처럼 이렇게 태연할 수 있을지 궁금하네.”그 말을 듣고서야, 계연수의 손이 잠시 멈췄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사금희 얼굴에 깃든 그 오만함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그쪽 로 대인께서 그런 일을 꽤 많이 해왔나 보네요. 무고한 사람들을 진무사의 형방으로 끌고 가는 일 말입니다.”사금희는 비웃으며 말했다.“직접 겪어보면 알게 되겠지. 네 사촌이 어떻게 됐는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겠지?”계연수의 뒤에 서 있던 용춘은 그 말을 듣고 거의 기절할 듯 분노를 억눌렀다. 사금희의 뻔뻔함은 도를 넘고 있었다.사금희는 말을 하는 내내 계연수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지만 계연수의 얼굴에는 단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연한 달빛 옷자락에는 산과 달 무늬가 수놓여 있었고 옷깃 둘레에는 푸른 선이 둘러져 있었다. 그녀는 단정하고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창밖에는 빗줄기가 잔잔히 내리고 있었고 그 부드러운 빗소리는 그녀에게서 풍기는 고요한 기운과 닮아 있었다.희미하게 가라앉은 빛 속에서 그녀는 마치 옥으로 빚은 사람처럼 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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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8화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비록 자신의 아들이 지금은 관직에서 밀려났다고 해도 아직 젊었고, 앞으로의 길은 얼마든지 남아 있었다.계연수 따위가 감히 무엇을 믿고 마다할 수 있단 말인가.사씨 집안에서 다시 받아주겠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는 이미 과분한 복이었다.애초에 아들의 몸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면, 그 일로 더는 남자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고 날마다 방 안에 틀어박혀 계연수만을 떠올리며 야위어 가지만 않았더라면, 자신이 이렇게까지 나설 일도 없었을 것이다.비록 사옥현에게 일이 생기긴 했지만 사씨 집안이 쌓아온 인맥과 기반은 여전히 두터웠다. 문벌이 맞는 명문가를 찾지 못한다 해도 평범한 여인을 들이는 일쯤은 얼마든지 가능했다.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뒤, 장씨는 소매를 가볍게 정리하며 먼저 사금희에게 말했다.“그만하거라, 그런 말은 더 하지 않아도 된다.”이내 임씨는 다시 계연수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우리가 오늘 온 건, 너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다. 굳이 그런 태도를 취할 필요는 없다.”계연수는 아무런 표정도 바꾸지 않았다. 그저 눈을 내려, 손에 든 찻잔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임씨는 그런 그녀의 태도에 속으로는 불쾌함이 스쳤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귀부인의 체면을 지키며 얼굴빛만 살짝 식혀 말했다.“지금은 사옥현에게 조금 일이 생기긴 했지만 그건 큰 문제가 아니다. 그는 재능도 있고 능력도 있으니 앞으로의 앞날은 여전히 밝다. 이명유가 저지른 그 어처구니없는 일은… 너도 이미 들었을 것이다. 너와 사옥현 사이에 끼어들어 너를 삼 년이나 아이를 갖지 못하게 만들었지.”말을 이어가며 임씨는 일부러 너그럽고 자비로운 표정을 지었다.“지금은 모든 것이 밝혀졌고 오해도 풀렸다. 노부인과 나의 뜻은 이렇다. 네가 여전히 아이를 낳을 수 있다면 다시 사씨 집안으로 돌아오거라. 관아에 제출했던 화리서도 나중에 사옥현과 함께 가서 되찾아오면 된다.”말을 마친 임씨는 옆에 서 있던 하인을 한 번 흘끗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하인은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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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9화

계연수의 말이 떨어지자 방 안은 한동안 고요하게 가라앉았다.사금희도, 임씨도 이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사금희의 생각으로는 지금 계연수의 처지를 놓고 보면 다시 사씨 집안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하늘이 내린 행운이었다.화리한 여인이 다시 시집갈 수 있는 경우가 몇이나 되던가.임씨 또한 그렇게 여겼다.예전에 자신 앞에서 늘 고개를 숙이고 순종하던 계연수는 사씨 집안에 남고 싶어서 그렇게까지 애를 썼던 것이 분명하다고. 그렇다면 지금 자신이 다시 기회를 내어주었을 때, 그녀는 당연히 그 길을 따라 내려오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지금 임씨의 처지는 사씨 집안에서도 썩 좋지 않았다. 집안 살림을 맡던 권한은 노부인에게 넘어갔고 부군에게서는 편지가 와 꾸지람을 들었다. 심지어 부인을 내칠 수도 있다는 말까지 들은 터라 요즘은 늘 마음이 불안했다.이제 계연수가 돌아오기만 하면, 밖에서 떠도는 소문도 잠재울 수 있고,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를 찾을 터였다.요즘 들어 밖에서는 누가 퍼뜨렸는지 알 수 없는 말들이 떠돌고 있었다. 그녀가 며느리를 박대했다는 이야기, 예전에 약속까지 해놓고 아들에게 첩을 들이게 했다는 이야기, 며느리를 내쫓으면서 사씨 집안 물건 하나도 들려보내지 않았다는 이야기.심지어 그녀가 삼 년동안이나 사씨 저택에서 지냈는데 빈손으로 내쫓았다며 사씨 집안이 은혜를 저버리고 집안의 체면까지 떨어뜨렸다는 말들까지 흘러나왔다.게다가 옛날 혼사 이야기까지 들춰졌다. 그 혼사는 원래 사씨 집안 쪽에서 매달려 얻어낸 것이라는 소문이었다.이명유에 관한 말도 다시 떠돌았다. 그녀와 결탁해 며느리를 몰아냈고 지금은 그 조카 때문에 아들이 몸을 망친 것이 업보라는 말까지 돌고 있었다.임씨는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싶지 않았지만 그 말들은 틈만 나면 그녀의 귀로 스며들었다.하인들의 수군거림, 집안 며느리들의 비아냥, 노부인의 차가운 시선, 그리고 주변 여인들의 은근한 손가락질까지.그들은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마치 언제나 말하고 있는 것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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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0화

계연수는 말을 마치고 조용한 눈으로 임씨를 바라보았다.“사씨 집안에서 그걸 감당할 수 있습니까? 감당하지 못하겠다면 그만두시죠.”사금희는 그 말에 크게 놀라 계연수를 향해 외쳤다.“정신이 나간 것이 아니냐?”계연수는 시선을 옮겨 다시 사금희를 바라봤다.“제가 미쳤다고 생각하신다면 방금 본인이 하신 말도 얼마나 어처구니없는지 아시겠네요.”임씨의 얼굴이 굳어졌다.“지금 네 태도가 다 네 교양인 것이냐?”계연수는 담담히 임씨를 마주 보았다.“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순순히 사씨 집안으로 돌아가서 사씨 집안 돈은 한 푼도 쓰지 못하며 다시 그 엉망인 집안일을 묵묵히 떠맡는 게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쓰는 것은 전부 사씨 집안의 것이니 저는 언젠가는 되돌려 줘야 한다는 말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심지어 저는 항상 장부를 조사받을 준비를 해야 했고 친정에 조금이라도 보내려면 먼저 보고해야 했으며 혹여 사씨 집안 물건을 훔쳤다는 의심을 받지 않을까 싶어 모든 행동에 조심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대의를 알아야 한다며 누가 저를 해쳐도 오히려 그 사람을 위해 탄원해야 하는 것까지. 사씨 집안 큰 며느리 자리라… 저는 능력이 부족해서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사씨 부인께서는 다른 분을 찾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원하시는 분은 많을 테니, 저는 감히 넘볼 수도 없네요.”그 한마디 한마디가 임씨의 입을 틀어막았다.아무 말도 이어갈 수 없게 된 임씨는 결국 낮게 한마디를 내뱉었다.“지금 하는 말은 그때 사씨 집안이 너를 박대했다는 걸 원망하는 것이냐?”계연수는 아무 표정 없이 고개를 저었다.“원망할 것도 없습니다. 사씨 집안은 저에게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건, 그저 당신들이 착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신들은 항상 남이 높은 곳에 오르려 한다고 여기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 자리를 원하는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누구든 자기 분수를 아는 게 중요하니까요. 당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씨 집안의 문벌은 모두가 탐내는 것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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