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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 Chapters

제831화

백씨는 계연수에게 분명 만만치 않은 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무엇보다도 그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계연수가 갑자기 노부인의 약을 끊은 것이 혹시 무언가를 눈치챈 탓은 아닐까?그 생각이 드니 함부로 움직일 엄두도 나지 않았다.아쉬운 점이 있다면, 계연수가 한 달만 더 약을 먹었더라면 아이를 갖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는 것이었다.그 생각이 들자 오늘 노부인 앞에서 계연수가 했던 말까지 떠올라 속이 더욱 답답해졌다.하지만 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큰일을 그르치는 법.앞으로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 지금은 참고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계연수가 처소로 돌아오자 방 어멈이 곧장 찾아와 소식을 전했다.“그 어린 계집아이가 노부인께서 잘 쓰시지도 않는 오래된 손난로를 실수로 깨뜨렸답니다. 그래서 노부인 처소의 규 어멈이 복도 아래에 무릎을 꿇게 했다고 합니다.”계연수는 처마 밑에 서서 푸르게 우거진 뜰을 한동안 바라보았다.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녀는 용춘을 불렀다.“아직 따뜻한 대추마 산약떡 두 개와 내가 쓰던 손난로 하나를 가져가거라. 그 아이에게 조용히 전해 주고, 지나가다 안쓰러워 보여 준 것뿐이니 괜한 소문은 내지 말라고 해. 앞으로도 이 일은 굳이 입에 올릴 필요 없다고 전하고.”용춘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곧장 물러나 일을 처리하러 갔다.계연수가 그 아이를 본 것은 조금 전 노부인의 처소를 나설 때였다.그때부터 이미 마음 한편에 담아 두고 있었다.이 집에 막 들어온 그녀에게는 노부인 곁에서 소식을 전해 줄 사람이 한두 명쯤은 반드시 필요했다.동시에 백씨 역시 오래전부터 노부인 곁에 사람을 심어 두었을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게다가 그런 사람일수록 깊숙이 숨어 있어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집안 전체를 손에 넣고 싶다면, 지금부터 조금씩 판을 깔아 나가야 했다.잠시 더 서 있던 계연수는 사람을 시켜 임 관사와 장 관사, 그리고 진복만을 불러오게 했다.이제 장원 일을 본격적으로 정리할 차례였다.방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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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2화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아 계연수가 맡긴 일들은 하나둘 마무리되어 갔다.장 관사는 장부 담당과 진복만을 데리고 여러 장원을 돌며 새 규정을 시행했다. 장두들 가운데는 불평을 늘어놓는 이도 적지 않았지만, 새 규정은 이미 문서로 명확히 정해져 있었고 예전처럼 손을 쓰기도 어려워졌다. 몇 마디 투덜거릴 수는 있어도 결국은 모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물품이 창고에 들어오는 날, 계연수는 직접 현장을 둘러보았다.품목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기록 장부 역시 빈틈없이 작성되어 있었다.그 모습에 계연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보고를 마치러 온 진복만은 주위를 한번 살핀 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창고 사람들은 뒤에서 둘째 부인이 지나치게 꼼꼼하다고들 합니다. 그래도 일이 명확해지니 오히려 마음은 편하다고들 하더군요.”계연수는 그 말에 가볍게 웃었다.심씨 노부인 역시 계연수가 새로 정리해 올린 장부를 받아 들고는 한 장 한 장 꼼꼼히 넘겨보았다.언제 처리한 일인지, 누가 맡았는지까지 모두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정리된 장부였다.노부인의 얼굴에는 좀처럼 보기 드문 미소가 번졌다.그녀는 방 안에 있던 젊은 며느리들과 손아랫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앞으로 살림을 맡게 되면 모두 너희 숙모를 본받아라. 이런 것들이 다 경험이 되는 법이다.”계연수는 미소를 머금고 겸손하게 답했다.“저도 아직 하나씩 배워 가는 중입니다. 다만 집안 살림을 조금이라도 더 빈틈없이 꾸려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최씨는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애초에 그녀에게는 살림을 맡을 자격조차 없었다.자기 처소의 자질구레한 일마저 시어머니가 사사건건 간섭했으니 말이다.이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저것도 잘못됐다며 늘 흠을 잡았으니, 지금 이런 경험담을 배운들 자신에게 쓸 날이 올 리 없었다.반면 백씨는 노부인의 칭찬과 서녀들이 맞장구치는 웃음소리를 담담한 얼굴로 듣고 있었다.계연수는 본래라면 여기저기서 이득을 챙길 수 있는, 기름기 흐르는 일을 철저한 규칙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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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3화

다음 날 아침, 계연수는 이른 시각부터 몸을 일으켰다.마구회는 전후반으로 나뉘어 진행됐는데, 한낮의 더위를 고려해 여인들의 경기는 오전에 먼저 치러졌다. 계연수는 이미 최민정과 시간을 맞춰 두었기에 만나기만 하면 됐다.그날 아침은 심서준도 함께 심씨 노부인께 문안을 드리러 갔다.계연수가 마구회에 참가한다는 말을 들은 심씨 노부인의 얼굴에는 노골적인 못마땅함이 스쳤다.그런데 그 결정이 심서준의 뜻이라는 말을 듣자, 입술만 몇 번 달싹일 뿐 끝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찾지 못했다.결국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이어서 심소연도 마구회에 나간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노부인은 그녀를 계연수와 함께 다니게 했다.그리고 심정우를 향해 거듭 당부했다.“너는 무예를 익혔으니 두 사람 곁을 잘 지켜라.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된다.”심정우는 예전에 계연수가 마구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차마 그녀 쪽은 쳐다보지도 보지 못한 채 연신 고개만 끄덕였다.반면 심소연은 얼굴이 창백했다. 애초에 그녀는 마구를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어머니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가야 한다고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절대로 참가하지 않았을 것이다.오늘 이황자도 경기를 보러 온다고 했고, 어머니는 이황자가 마구를 잘하는 여인을 좋아한다고 말했지만, 심소연은 자신이 경기장에서 두각을 드러낼 재주가 있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그런데도 어머니는 그녀가 못하는 것은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노력이 부족하고, 이기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고만 했다.심소연은 문득 허탈한 생각이 들었다.설령 이겨 낸다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시집가서 남은 평생을 보낸다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한편 최씨는 옆에서 웃으며 말했다.“저도 함께 가서 구경이나 하겠습니다. 셋째 아가씨와 오숙모를 응원해야지요.”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심정민이 단호하게 꾸짖었다.“어머니께서는 집안일로 바쁘신데, 그 곁을 지키지 않고 어딜 가려는 것이냐. 마구회에는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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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4화

제비에는 홍패와 청패가 있었고, 뽑은 패에 따라 허리춤에 찰 패찰을 받아야 했다.진가옥은 연신 계연수와 같은 편이 되길 바랐는데, 다행히 둘 다 홍패를 뽑았다. 심소연 역시 홍패였다.계연수는 진가옥과 심소연을 데리고 먼저 데려온 말을 살펴본 뒤, 최민정을 찾아볼 생각이었다.그런데 막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궁녀 하나가 다가와 공손히 예를 올렸다.“황후 마마께서 부르십니다.”어쩔 수 없이 계연수는 두 사람을 먼저 보내고 혼자 황후를 찾아갔다.황후는 계연수의 차림새를 훑어보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준이도 참 너를 너무 오냐오냐하는구나. 네가 무슨 마구를 한다고. 혹여 말에서 떨어져 말굽에라도 밟힌다면 큰일이지 않느냐.”황후 곁에 앉아 있던 정여미도 계연수를 바라보았다.눈부시게 화사한 이목구비에,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빛나는 자태. 마치 가장 아름다운 청춘과 달빛이 모두 그녀에게만 내려앉은 듯했다.정여미는 자신도 모르게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문득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계연수는 황후의 말에서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을 느끼고 얼른 미소 지으며 답했다.“황후 마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치지 않을 거예요.”황후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계연수가 마구회에 나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심서준을 불러 만류했지만, 동생이 계연수를 지나칠 만큼 아끼는 이상 자신의 말이 통할 리 없었다.결국 조용히 한숨만 내쉬었다.“이리 와서 내 곁에 앉거라. 차나 마시며 경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면 된다.”하지만 계연수는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그전에 잠깐 연습을 좀 하고 오려고 합니다.”황후가 눈썹을 치켜올렸다.“무슨 연습을 또 하겠다는 것이냐. 지면 지는 거지, 그게 무슨 대수라고.”계연수는 순간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눈썹을 치켜드는 모습도, 말투도 심서준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제가 연습을 많이 못 해서요. 괜히 경기에서 실수할까 봐 그럽니다.”물론 계연수가 정말 연습을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황후 곁에 오래 앉아 있으면 아무래도 마음이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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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5화

계연수가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최은조가 서 있었다.이곳은 선수들이 출입하는 경기장 아래쪽으로, 일반 관람객이 드나드는 입구와는 다른 곳이었다.계연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여긴 어떻게 왔느냐?”최은조는 그녀의 의문을 알아챈 듯 웃으며 말했다.“둘째 사촌 오라버니께 부탁해서 사람을 통해 들어왔어요. 다만 늦는 바람에 큰언니를 직접 배웅하지는 못했네요.”계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여기가 시야도 좋으니 여기서 보는 것도 괜찮겠네.”최은조는 계연수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언니는 왜 아직 경기장에 안 들어가셨어요?”계연수는 황후에게 불려 갔다 왔다며 간단히 설명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최은조가 문득 말을 꺼냈다.“사씨 집안 일은 들으셨어요?”계연수는 일부러 알아본 적은 없었지만, 연회나 모임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다.얼마 전 사씨 집안의 큰며느리인 임씨가 쫓겨났다는 소문이었다.모양새도 몹시 좋지 않았다고 했다.임씨는 사씨 집안 대문 앞에서 울고불고 소란을 피웠고, 친정에서는 공개적으로 그런 딸은 없다고 선언하며 집으로 들이지도 않았다고 한다. 결국 사람을 시켜 그녀를 결박한 채 비구니 절로 보냈다는 이야기였다.계연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최은조는 속이 시원하다는 듯 말했다.“정말 자업자득이에요. 처음에는 화리 문서를 내줬는데도 받지 않겠다며 끝까지 버티더니, 결국 저렇게 망신만 당했잖아요.”계연수는 웃으며 말했다.“소식이 참 빠르네.”최은조도 웃었다.“어머니께서 이런 이야기를 워낙 좋아하셔서요. 옆에서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됐어요.”둘은 다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양쪽 선수들이 모두 준비를 마친 것이다.선두에는 최민정이 서 있었다.붉은 금사 비단의 좁은 소매 승마복에 허리에는 양지옥 띠를 둘렀고, 검은 가죽 장화의 살짝 들린 앞코는 금으로 장식한 등자 위를 단단히 딛고 있었다.그녀와 나란히 말을 몰고 있는 이는 손보경이었다.호수처럼 맑은 푸른빛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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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6화

이제 막 심서준이 영청 후작부를 손본 터였다.그가 태후 쪽 사람을 부인으로 맞을 가능성은 이미 없었다. 그래서 손보경도 자연스레 시선을 다른 집안의 혼처로 돌리고 있었다.경기가 절반쯤 흘렀을 무렵이었다.양쪽이 두 골씩 주고받으며 팽팽히 맞서던 순간, 돌연 변수가 생겼다.손보경과 진가옥이 하나의 공을 차지하려다 서로 부딪친 것이다.충격을 받은 두 필의 말이 놀라 크게 울부짖더니, 두 사람을 동시에 등에서 떨어뜨렸다.순간 경기장 안은 아수라장이 됐다.두 사람은 그대로 땅에 쓰러졌고, 주변에서는 말들이 계속 달리고 있었다.자칫 말굽에 짓밟히기라도 하면 목숨까지 위험할 수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다.심정우는 줄곧 경기장 가장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오늘은 심씨 집안의 두 규수가 출전한 만큼, 노부인에게서 무슨 일이 있어도 두 사람을 지키라는 당부를 수없이 들었던 터였다.원래는 심소연 가까이에서 그녀를 지킬 생각이었다.그런데 경기장 안에서 사고가 터졌고, 말들이 흥분해 마구 발길질하는 가운데 규수들의 비명까지 터져 나오자 심정우는 지체 없이 말에서 뛰어내려 경기장 안으로 달려들었다.그가 처음 달려간 쪽은 진가옥이었다.진가옥은 승안후부 사람이고, 승안후부는 명목상 계연수의 친정이었다.계연수가 걱정할 것이 분명했고, 심씨 집안과 승안후부의 친분을 생각해도 누구를 먼저 구해야 하는지는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다.하지만 막 손을 뻗으려는 순간이었다.누군가가 그보다 한발 먼저 진가옥을 번쩍 안아 들고는 급히 경기장 밖으로 향했다.심정우가 고개를 돌려 보니 최성군 곁을 따르던 부장 임풍이었다.오늘은 황제도 경기를 관람하는 날이라 최성군 역시 호위를 위해 함께 왔는데, 원래 그의 곁을 지켜야 할 임풍이 어째서 이렇게 빨리 달려왔는지 심정우는 의아했다.하지만 더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고개를 숙이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손보경이 그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다리를 다쳤습니다.”심정우는 태후 쪽 사람은 되도록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눈앞에는 다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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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7화

계연수가 방금 터뜨린 그 한 골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가녀린 여인의 몸이었지만 말 위에서 움직이는 동작은 더없이 날렵하고 매서웠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했고, 몸놀림은 놀라울 만큼 유연했다.무엇보다 공을 쳐낸 뒤 몸을 돌려 다시 안장 위에 올라앉는 순간이 가장 눈길을 사로잡았다.곧게 편 등에는 눈부신 생기와 자신감이 어려 있었고, 약간의 당당함마저 배어 있었다.그 모습은 누구라도 시선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강현은 조용히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계연수의 모습은 오늘 마구 경기 위로 문득 스쳐 지나간 한 줄기 경이로운 빛 같았다.곁에 서 있던 이황자 강성은 눈을 떼지 못한 채 흥분한 목소리로 강현에게 물었다.“형님, 방금 골을 넣은 저 흰옷 입은 규수는 어느 집안 아가씨입니까?”강현은 얼른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황제가 바로 곁에서 경기를 내려다보고 있었기에, 이황자가 괜한 실수를 하지 않기를 바랐다.막 입을 열어 ‘저분은 외숙모이니 괜한 마음 품지 말라’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곁에 있던 황제가 먼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네 외숙모다.”이토록 먼 거리에서는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인물을 잘 아는 사람뿐이었다.강현은 계연수를 몇 번 본 적이 있었기에 그녀의 몸짓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었다.스무 명이 넘는 사람이 경기장을 누비고 있었지만, 계연수는 언제나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는 예상하지 못했다. 황제까지 단번에 그녀를 알아볼 줄은.기억하기로 황제는 외숙모를 겨우 두 번 정도밖에 본 적이 없었다.더구나 황제는 국사 외에는 좀처럼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었다. 후궁도 많지 않았고, 정사와 무관한 일에는 더욱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저 멀리 있는 계연수를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강현의 등줄기를 타고 이유 모를 서늘함이 스쳐 지나갔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제야 강성도 자신이 방금 실언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황급히 말을 바꾸었다.“제가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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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8화

사옥현은 저도 모르게 몸을 깊이 숙였다. 숨이 막혀 제대로 호흡조차 이어지지 않았다.밀려드는 후회는 거대한 파도처럼 그를 집어삼켰고, 그대로 깊은 물속에 처박아 익사시킬 듯 몰아쳤다.그는 아무것도 몰랐다.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았다.계연수는 그저 답답하고 재미없는 여자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곁에 있던 사람이 사옥현의 안색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황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괜찮으시오?”사옥현은 힘겹게 손을 내저었다.이내 상대의 손을 뿌리치고 비틀거리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지금의 그는 계연수를 한 번이라도 더 바라볼 용기조차 없었다.사옥현이 군중을 밀치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밀려오는 구역질을 억누르며 고개를 들자, 눈앞에는 차갑게 식은 이명유의 시선이 기다리고 있었다.이명유는 사옥현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입가에는 싸늘한 미소가 어려 있었지만, 목소리는 오히려 다정했다.그녀는 그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부군, 계연수가 마구회에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따라오신 건가요? 그렇게까지 그녀를 잊지 못하시면서 왜 그때는 번번이 그녀를 버리고 저를 선택하신 겁니까?”사옥현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이명유는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그 눈 내리던 날도 마찬가지였잖아요. 그날 눈이 얼마나 쏟아졌는지 모르셨나요? 그런데도 부군께서는 계연수를 버려둔 채 저만 데리고 떠나셨죠. 그건 결국 제 편을 드셨다는 뜻이에요. 예전에는 저를 선택한 것도, 저를 편애한 것도 당당하게 인정하셨잖아요. 헌데 왜 계연수가 떠난 뒤에는 그 사실조차 인정하지 못하시는 겁니까?”사옥현의 몸이 사정없이 떨렸다.그는 그 눈 내리던 밤을 단 한 번도 떠올리려 하지 않았다. 감히 떠올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그는 역겨운 듯 이명유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돌아서려 했다.하지만 어느새 건장한 호위 셋이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사옥현은 분노에 찬 눈으로 이명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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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9화

계연수가 속한 쪽 경기는 어느새 막바지에 이르렀고, 홍패가 한 골 차로 승리를 거뒀다.최민정은 승복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내년에는 절대 안 봐줄 것이다.”계연수는 손을 내저었다.“우리 사이에 무슨 승패가 있겠어요. 그저 함께 겨뤄 본 것뿐인걸요.”“그것도 그렇네.”최민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승리한 팀은 관중석으로 올라가 하사품을 받아야 했기에, 계연수는 최민정과 먼저 인사를 나누며 다음에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자고 약속했다.심소연은 계연수와 같은 편이었기에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오늘 경기에서 가장 눈부신 활약을 펼친 사람은 단연 계연수였다. 반면 심소연은 애초에 마구를 제대로 칠 줄도 몰랐지만, 어머니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억지로 출전했다. 경기 도중 몇 번이나 말에서 떨어질 뻔했지만, 그때마다 계연수가 재빨리 붙잡아 준 덕분에 겨우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덕분에 이름을 떨치기는커녕 망신만 잔뜩 샀다.씁쓸한 감정이 가슴을 짓눌렀다.본래 재녀라는 명성만큼은 자신 있었는데, 이번 마구회가 끝나고 나면 그 명성마저 사라질지 몰랐다.더구나 이황자는 마구를 잘 타는 여인을 좋아한다는데, 자신 같은 사람을 눈여겨볼 리가 있을까.무거운 생각에 잠긴 심소연은 발걸음마저 흐트러질 만큼 넋을 잃고 걸었다.그 무렵 심서준은 계연수가 관중석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이번 하사품은 가장 많은 득점을 올린 계연수에게 옥여의 하나가 내려졌고, 다른 여인들에게는 비단 열 필씩이 내려졌다.상을 받은 뒤 물러난 계연수는 진가옥의 상태를 살펴보려고 휴식실로 향했다.휴식실은 대기 장소 뒤편에 있어 그리 멀지 않았고, 원래 마구회에 참가한 이들이 쉬도록 마련된 곳이었다.하지만 그곳으로 가던 길에서 심서준이 그녀를 막아섰다.그는 계연수 이마에 맺힌 잔땀을 바라보다가, 흰 기마복이 땀에 살짝 젖어 안쪽의 연분홍 속옷이 희미하게 비치는 것을 보고는 말없이 자신의 망토를 그녀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그러고는 낮게 말했다.“진가옥은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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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0화

계연수와 심서준이 자리를 뜨자, 황후는 곁에서 고개를 숙인 채 줄곧 말없이 서 있던 태자비를 차갑게 바라보았다.“듣자 하니, 어젯밤에도 또 소란을 피웠다지?”정여미는 순간 굳었다가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전하께서 한 달째 제 처소에는 발걸음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탕을 들고 찾아가도 만나 주지 않으셨고요. 그저 문밖에서 잠시 운 것뿐인데, 어찌 그것을 소란이라 하십니까?”정여미는 말끝을 흐리며 창가에 서 있는 태자에게 슬쩍 시선을 보냈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척했지만, 실상은 황후에게 일러바치려는 뜻이 역력했다.태자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냉랭하게 돌아보았다.애초에 이 태자비는 황조모가 억지로 떠맡기듯 정해 준 사람이었다. 좋아하고 싫어할 만큼의 감정도 없었다. 다만 쓸데없는 일을 벌이지 않는다면, 자신도 예를 지키며 대했고 결코 박대하지 않았다.하지만 요 며칠 태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영춘하 제방 문제를 부황이 직접 조사하라 명했고, 그는 불과 이틀 전에야 돌아왔다. 돌아온 뒤에도 산더미 같은 문서를 정리해 부황께 보고해야 했고, 태자비의 친정 일에 자신까지 휘말려 허점을 잡히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해야 했다.그런데도 정여미는 상황을 헤아릴 줄 모르고, 오직 다정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며 서운해하거나 고자질할 생각뿐이었다. 그런 모습은 태자의 짜증만 더욱 부추겼다.어젯밤에도 그는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 바빴고, 무슨 탕 따위를 마실 여유는 없었다. 그런데도 정여미는 기어코 들고 들어오려 했고, 막아 세우자 또 문밖에서 울음을 터뜨렸다.태자비로서 체면을 깎는 행동이었다.지금 당장 함부로 태자비를 폐할 수 있는 처지만 아니었다면, 정여미를 향해 겉으로나마 남겨 둔 정마저 진작 닳아 없어졌을 것이다.정여미의 말을 들은 황후의 얼굴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그리도 분별을 익히지 못하겠거든 네 외숙모가 어떻게 처신하는지 보고 배워라. 조용히 제 본분을 지키고, 괜한 소란도 피우지 않지 않느냐. 시키지도 않은 일에는 나서지 말거라. 어차피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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