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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1화

심서준의 목소리는 낮고 서늘했다. 엄숙하면서도 냉정한 기색이 어린 얼굴로 내뱉는 말에는 조금의 농담도 섞여 있지 않았다. 계연수는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심서준은 원래 농담을 입에 올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계연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인 뒤, 무심결에 말했다.“고마워요, 부군.”심서준은 잠시 말을 멈췄다.사실 그녀는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두 사람은 부부인데, 부부 사이에 무슨 감사 인사가 필요하겠는가.심서준은 말없이 계연수의 볼을 가볍게 꼬집은 뒤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가 떠난 뒤에도 계연수는 한동안 눈앞의 함을 바라보기만 했다.조심스레 뚜껑을 열자 안에는 두툼한 토지 문서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굳이 하나하나 세어 보지 않아도 얼마나 많은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심서준이 얼마나 막대한 재산을 지녔는지, 그녀로서는 도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심서준의 일 처리는 빨랐다.그날 오전이 되자 각 점포의 관사들이 장부를 들고 하나둘 찾아왔다.그들은 계연수를 대하는 태도부터 매우 조심스러웠고, 눈빛에는 조금의 경시도 없었다. 애초에 그들의 몸값 문서는 모두 심서준의 손에 있었고, 각 점포의 관사 역시 그가 직접 엄선해 뽑은 사람들이었다.오늘 이들을 부른 것은 각 점포의 기본적인 수입 상황을 계연수에게 파악시키는 한편, 관사들에게도 새로운 주인을 제대로 인사시키기 위해서였다.점포가 워낙 많으니 하루 만에 모든 장부를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하지만 이제 경영을 맡게 된 이상 계연수는 처음부터 기강을 바로잡고 싶었다. 주인이 바뀌었다고 해서 쉽게 속일 수 있다는 생각은 품지 못하게 해야 했다.그녀는 점포의 종류에 따라 장부 제출 날짜를 나누어 지시했다. 어떤 점포는 매달 초하루, 어떤 곳은 초사흘, 또 어떤 곳은 초닷새에 장부를 올리도록 했다.점포를 세 부류로 나누니 자신도 여유를 가지고 하나씩 살필 수 있었고, 실수를 줄일 수도 있었다.이어 적절한 당근과 채찍을 섞어 몇 마디를 덧붙였다.비록 얼굴은 아직 젊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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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2화

“내가 어떻게 너 같은 쓸모없는 딸을 키웠는지 모르겠구나!”백씨의 얼굴이 한층 더 창백해졌다.늘 강인하기만 하던 그녀였지만, 어머니 앞에서만큼은 애써 억눌러 온 피로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손가락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힘껏 움켜쥔 채 한참 침묵하던 그녀가 낮게 입을 열었다.“어머니 말씀이 맞습니다. 저는 정말 쓸모없는 딸이지요. 그런 쓸모없는 딸을, 어머니는 무엇 하러 찾아오셨습니까?”백씨 노부인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창백한 백씨의 얼굴을 바라보다 깊게 한숨을 삼킨 뒤, 목소리를 낮췄다.“내가 널 보러 온 줄 아느냐? 심씨 노부인과 정을 쌓아 네 동생 일이나 이야기해 보려고 온 것이다. 그리고 너한테 다시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고 일러 주기 위함이기도 하고.”“지금은 계연수가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다. 네 아버지 성정이 어떤지는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또 일을 벌었다가 화리를 당해 친정으로 돌아오는 일만큼은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가서 큰 화를 자초하면 평생 산에 들어가 비구니로 살아야 할 테고, 나 역시 널 찾아가지 않을 테다!”백씨는 고개를 돌려 어머니를 바라보더니 비웃듯 웃었다.“제가 심태숙에게 시집간 뒤 다섯째 도련님께서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와 아버지는 더 이상 저에게 기대를 걸지 않으셨지요. 점점 냉담해지셨고, 심태숙은 머지않아 심가에서 버림받아 돌려보내질 사람이라 여기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버려진 패가 되었어요. 총애받지 못하는 서자의 부인이었으니, 당연히 관심조차 받을 가치가 없었던 거겠죠. 친정에 처음 인사드리러 갔던 그날, 저를 마치 남이나 되는 사람처럼 차갑게 대하시던 얼굴을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그러고는 모든 기대를 제 여동생에게 걸었죠. 여동생은 이부상서 적장자에게 시집보내고, 혼수도 제 것보다 훨씬 넉넉하게 챙겨 주셨고요. 헌데 나중에 심태숙은 심가에서 내쳐지지 않았습니다. 대감께서는 의리를 중히 여기고 약속을 지키는 분이셨기에 심태숙을 족보에 올려주셨고, 이후에는 심씨 노부인께서 집안 살림까지 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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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3화

며칠 지나지 않아 계연수는 고씨 집안에서 보낸 편지 한 통을 받았다.편지는 외조모인 고씨 노부인이 직접 쓴 것이었다. 집안에 중대한 일이 생겼으니 반드시 고씨 부저로 와 함께 의논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어머니도 올 예정이라는 말도 덧붙여져 있었다.계연수는 부저를 다녀온 지도 꽤 오래된 터라, 마침 잘됐다 싶어 길을 나섰다.고가로 향하는 마차 곁에는 호위 무사 일곱, 여덟 명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모두 지난 일을 겪은 뒤 심서준이 그녀를 위해 새롭게 엄선해 붙여 준 사람들이었다.부저에 도착해 대청으로 들어서자, 안에는 이미 집안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계연수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방 안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쏠렸다.예전 사씨 가문에 시집가 있던 때와는 달리, 지금의 계연수는 얼굴빛부터 한결 윤기가 돌았다. 고귀한 가문의 귀부인들에게서나 볼 법한 차분한 기품이 눈매에 어려 있었고, 손에는 상아 부채를 쥔 채 금실로 짠 고급 유운사를 걸치고 우아하게 걸음을 옮겼다.그 단아한 자태에 방 안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했다.계연수는 모두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권한 뒤 한 사람씩 예를 갖춰 인사를 나누었다. 이어 어머니 곁으로 다가가 조용히 몇 마디를 속삭인 뒤, 고씨 노부인의 손짓을 받고 외조모 곁에 자리를 잡았다.주위를 둘러보니 고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모여 있었고, 고준까지 자리하고 있었다.오늘 모임이 결코 가벼운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고씨 노부인은 먼저 계연수와 안부를 주고받은 뒤에야 본론을 꺼냈다.며칠 전 영국공부의 백씨 큰부인이 직접 찾아와 많은 예물을 보내며 혼담을 꺼냈다는 것이었다. 상대는 지난해 진사에 급제한 영국공부의 둘째 도련님이었다.고씨 가문에서도 이미 사람을 보내 그를 알아보았다. 용모는 뛰어나고 인물도 훤칠했다. 비록 첩의 소생이기는 했지만, 영국공부 큰방 후손 가운데 유일하게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었다. 빈둥거리기만 하는 백씨 가문의 장남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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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4화

계연수는 이제 앞으로는 외가를 찾는 일이 거의 없을 것이며, 설령 와도 더는 예전 같은 마음으로 오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고씨 노부인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이 일은 제가 결정할 수 없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 큰외숙모의 일에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오늘 드린 말씀도 큰외숙모 댁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고씨 가문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괜한 화가 미칠까 염려됐을 뿐입니다. 헌데 지금에 와서 어떻게 할지는 결국 큰외숙모께서 직접 결정하셔야 합니다.”잠시 말을 멈춘 계연수는 외조모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덧붙였다.“사람은 직접 벽에 부딪혀 보기 전에는 좀처럼 돌아서지 않습니다. 더 말해 봐야 원망만 살 뿐입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예를 올렸다.“오늘은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 더 머물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할머니, 앞으로는 큰외숙모 댁 일은 제게 말씀하지 마세요. 저도 더는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조용하고 담담한 그 목소리에 고씨 노부인의 눈가가 붉어졌다.평생 친손녀들에게조차 크게 정을 주지 않았던 그녀였다. 오직 계연수만은 각별히 아끼고 사랑했다. 그런 아이의 눈빛에 깊은 실망이 어린 것을 보자 가슴이 저려 왔다.고씨 노부인은 떨리는 손으로 계연수의 손을 꼭 붙잡았다.“이 할미는 네 마음이 언제나 바르다는 걸 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은 더는 신경 쓰지 말거라. 너는 네 일이나 하렴. 앞으로 그들의 일로는 다시는 너를 번거롭게 하지 않겠다. 사람마다 타고난 운명이 있는 법이니.”계연수는 세월이 고스란히 새겨진 외조모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순간 마음이 저며 왔다.“앞으로 할머니께서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언제든 편지를 보내세요. 저는 할머니와 단 한 번도 마음이 멀어진 적 없습니다.”고씨 노부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고씨가 다가와 계연수의 곁에 섰다.“모처럼 왔는데 이 어미랑 조금 더 이야기하다 가지 않겠느냐?”계연수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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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5화

계연수는 심서준의 말에 서둘러 다시 마차에 올랐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마자 마차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마차 안에는 관복 차림의 심서준이 반듯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고귀하면서도 단정한 기품이 몸에 밴 모습이었다. 계연수는 그의 곁에 앉아 흐트러짐 하나 없는 옷매무새를 바라보다 문득 그의 품에 기대고 싶어졌다. 하지만 혹여 관복에 주름이라도 생길까 싶어 끝내 그 마음을 꾹 눌러 삼켰다. 심서준은 곧 다시 관아로 돌아가야 했다. 지금은 무엇보다 단정한 용모와 차림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문득 계연수는 자신이 많이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이제는 자꾸만 심서준의 품에 기대고 싶었고,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고 싶었다. 가끔은 그런 자신의 변화가 두렵기도 했다. 그녀가 가장 두려운 것은 언젠가 심서준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될까 봐, 또다시 한 사내 때문에 마음 졸이며 일희일비하게 될까 봐였다.조금 전 고씨 부저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심서준을 본 순간도 그랬다. 가슴 깊은 곳에서 기쁨이 밀려왔고, 당장이라도 그의 품으로 달려가 안기고 싶었다. 그래서 계연수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진심 열 가지가 있다면, 적어도 하나만큼은 자신을 위해 남겨 두고 싶었다.심서준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계연수를 보더니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 품으로 끌어당겼다.“고씨 부저에 간다는 말을 왜 하지 않았느냐? 나도 함께 갈 수 있었는데.”계연수는 그의 품에 기대며 오늘 있었던 일을 차분히 들려주었다.“오늘 오전에 편지가 왔어요. 영국공부에서 제 셋째 여동생과의 혼사를 의논하고 싶다고 해서, 그 일로 모두 모인 거예요.”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초지종을 이야기한 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저는 영국공부가 진심으로 이 혼사를 추진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어요.”심서준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무슨 가능성?”계연수도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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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6화

심서준은 계연수의 말을 듣고 눈썹을 치켜올렸다.“내가 보기엔, 너는 틈만 나면 게으름을 피우려는 것 같은데?”계연수는 괜히 뜨끔했다. 쉬고 싶은 마음도 분명 있었지만, 심서준의 짐을 덜어 주고 싶은 마음 또한 진심이었다.“가끔 그런 거예요…”심서준이 옅게 웃었다.“앞으로는 관사 몇 명을 더 붙여 주겠다. 내가 직접 고른 사람들이니 믿고 쓰면 된다.”계연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걱정 어린 말을 하면서도 심서준의 얼굴은 여전히 담담하고 냉정했다. 표정만 봐서는 그의 세심한 배려를 좀처럼 알아차릴 수 없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계연수의 마음이 문득 흔들렸다.그녀는 조심스레 심서준의 무릎을 짚고 몸을 기울이더니, 그의 옆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이런 행동을 먼저 한 것은 처음이었다.입술이 닿는 순간, 심장이 마구 요동쳤다. 긴장한 마음은 갈피를 잃고 흩어졌고, 얼굴마저 달아올랐다.급히 몸을 떼려는 찰나,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아 왔다.심서준은 그녀가 물러나지 못하도록 품 안으로 깊숙이 끌어당겼다.계연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시선은 갈 곳을 잃고 흔들렸고, 손에 쥔 상아 부채는 몇 번이고 꼭 쥐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손가락 마디가 희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갔다.차마 고개를 들어 지금 심서준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때 손 하나가 다가와 그녀의 턱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계연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눈을 마주했다.심서준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 시선은 마치 속마음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차분하고도 집요했다. 계연수가 기대했던 기쁨이나 미소는 어디에도 없었다.그 사실에 그녀의 눈빛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가느다란 눈썹도 힘없이 내려앉았고, 귓가에는 자신의 심장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심서준은 그렇게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를 만큼 긴 침묵이었다.계연수는 점점 어찌할 바를 몰랐고, 끝내는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그의 시선을 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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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7화

손끝이 조심스레 닿자 품 안의 사람이 가늘게 몸을 떨었다. 닿은 곳이 아직도 아픈 것이 분명했다.심서준은 계연수를 품에 꼭 끌어안고 나직이 달랬다. 원래라면 다시 관아로 돌아가야 했지만, 이번만큼은 처음으로 예외를 만들었다. 책상 위에는 처리해야 할 공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으나, 지금은 그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오히려 집으로 돌아온 뒤 계연수가 먼저 걱정을 내비쳤다.“아직 정오도 안 됐는데 일은 괜찮으세요? 이렇게 시간을 비워도 되는 건가요?”심서준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되물었다.“내가 곁에 있어 주는 건 싫은 것이냐?”평소 심서준이 계연수와 함께하는 시간은 턱없이 적었다. 낮에는 얼굴 보기도 어려울 정도였고, 그만큼 그는 늘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물론 계연수도 그가 곁에 있어 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의 손에 얼마나 많은 일이 쥐어져 있는지 알기에, 자신이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그녀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오후에만 조금 일찍 돌아와 주세요.”심서준은 말없이 그녀를 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사람을 시켜 연고를 가져오게 한 뒤, 직접 계연수에게 약을 발라 주었다.*그날 밤.서재 의자에 앉은 심서준은 계연수를 품에 안은 채 앞에 놓인 공문을 훑어보고 있었다. 한참 그의 품에 기대어 있던 계연수는 문득 떠오른 듯 고개를 들었다.“헌데 부군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빨리 고씨 부저에 와 계셨던 거예요?”심서준은 시선을 공문에서 떼지 않은 채 담담히 대답했다.“네가 어디를 가든 나는 알고 있다.”잠시 말을 멈춘 그는 고개를 숙여 품 안의 계연수를 내려다보았다.“다 너를 위한 일이다. 영청 후작부 사람들은 모두 형부에 압송됐지만, 사건이 완전히 종결된 건 아니다. 태후께서 대놓고 손을 쓰지는 않으시겠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움직임은 경계해야 한다.”계연수는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지난번 경축연에서 위씨 가문의 둘째 부인… 그러니까 최 세자의 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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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8화

심서준은 손에 들고 있던 문서와 붓을 내려놓고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그리고 품에 안긴 계연수를 내려다보았다.그녀는 품에 안을수록 가볍고도 부드러웠다. 품 안 가득 전해지는 온기는 마음마저 느슨하게 풀어 주었다. 그는 어느새 그 온기를 탐하게 되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날마다 품에 안고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그가 조용히 물었다.“가고 싶으냐?”계연수는 잠시 말이 없었다.오래전 그녀는 마구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실력을 자랑했다. 말 등에 올라타는 순간이면 마치 천하를 구할 협객이라도 된 듯 가슴이 벅차올랐고, 공을 골문에 넣을 때마다 세상을 다 얻은 사람처럼 의기양양했다.그 시절의 계연수는 마구를 누구보다 좋아했다.아버지는 그런 딸을 위해 뒷마당에 일부러 마장을 마련해 주었고, 그녀는 그곳에서 마음껏 말을 달리며 실력을 갈고닦았다.하지만 계씨 집안에 변고가 닥친 뒤로는 다시는 말에 오른 적도, 마구채를 손에 쥔 적도 없었다.그때의 패기와 의기 또한 세월 속에 묻혀 버렸다.최민정이 마구회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녀의 마음이 흔들렸던 것은 사실이었다.하지만 그녀를 설레게 한 것은 마구회 자체가 아니었다.다시 말 위에 올라 바람을 가르며 달리고, 손에 마구채를 쥐는 순간. 그때의 마음을 되찾을 수 있을까? 한때 무엇도 두렵지 않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물론 지금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아버지의 말처럼, 세월이 쌓이고 수많은 풍파를 지나온 지금의 자신 역시 온전한 자신이었다.하지만 이제 그녀는 심서준의 부인이었다.그가 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여기는 일이라면, 자신도 그의 뜻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설령 이번 마구회에 나가지 않는다 해도 지금의 삶이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지금처럼 평온하고 안정된 나날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으니까.계연수는 여전히 심서준의 속내를 가늠할 수 없었다.“위씨 둘째 부인께서 권하셔서 여쭤본 것뿐이에요. 아직 답은 드리지 않았습니다. 부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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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9화

계연수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괜찮다. 먼저 타 보마.”그녀는 고삐를 잡고 능숙한 몸놀림으로 말등에 올라탔다. 그제야 심서준을 내려다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그의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계연수가 고른 말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심서준도 곧바로 자신의 말에 올라탔다. 혹시라도 계연수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을 생각이었다.계연수는 그의 굳은 얼굴을 보며 잠시 웃음을 거두었다.그래도 오늘만큼은 그에게 자신의 실력을 보여 주고 싶었다.열한두 살 무렵부터 아버지와 함께 말을 타고 산과 들을 누볐던 그녀였다.그리고 다시 말 위에 오른 지금, 잊고 있던 감각이 서서히 몸속에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계연수는 고삐를 단단히 움켜쥔 뒤 말의 배를 가볍게 찼다.검은 말은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내달렸다. 선명한 붉은 기마복을 입은 계연수는 바람을 가르며 질주했고, 휘날리는 옷자락은 바람을 머금은 깃발처럼 힘차게 펄럭였다.심서준이 시선을 좇는 사이, 그녀는 어느새 마장 반대편까지 달려가 있었다.그도 곧 말을 몰아 뒤따랐다.멀리서 계연수가 다시 그의 쪽으로 달려왔다.말을 다루는 손길은 막힘없이 능숙했고,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그녀는 자랑이라도 하듯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부군, 보셨습니까? 저 아직 할 수 있어요.”심서준은 그제야 처음 보는 듯한 계연수를 마주했다.자유롭고 거침없었다. 눈동자에는 햇살처럼 반짝이는 빛이 어려 있었는데, 후원에서 다른 부인들과 어울릴 때의 단아하고 고요한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마치 뒤편으로 펼쳐진 산과 구름, 흐르는 물까지 그녀와 하나가 된 듯했다.그 모습은 조용하지만 깊게 심서준의 가슴을 두드렸다.그 순간, 심서준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문득 계연수를 붙잡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들었다.마치 그녀가 그대로 말을 달려 저 멀리 떠나 버릴 것만 같았고, 언젠가는 구름과 산속으로 홀연히 사라질 것만 같았다.계연수는 그가 내민 손을 보자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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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0화

며칠 뒤, 최민정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다. 마구회에 함께할 생각이 있는지 묻는 내용이었다.그동안 심서준은 틈만 나면 계연수를 장원의 마장으로 데려가 함께 말을 탔다. 계연수도 예전의 감각을 빠르게 되찾았고, 자신감 역시 조금씩 되살아났다.결국 그녀는 최민정에게 승낙의 답장을 보냈다.편지를 보낸 지 하루 만에 최민정은 다시 사람을 보내 계연수를 저택으로 초대했다.계연수가 심서준의 뜻을 묻자 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위씨 집안과 심씨 집안은 원래 가까운 사이니, 밖에 나가 사람들도 만나고 바람도 쐬는 게 좋겠다. 돌아올 때는 내가 데리러 가마.”요즘 들어 심서준은 계연수의 변화를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느끼고 있었다.그녀의 얼굴에는 전보다 웃음이 많아졌고, 자신을 대할 때도 더 이상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조심스러워하지 않았다.부부 사이의 정을 나눌 때조차 예전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마음을 열어 주었다.심서준은 그런 변화를 기쁘게 바라봤다.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녀를 자신의 곁에 묶어 두는 일이 아니었다.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그녀가 더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아가도록 해 주는 것.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벗을 사귀고,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뒤에서 묵묵히 지켜 주는 것. 그리고 비바람이 몰아칠 때면 언제나 가장 먼저 그녀 앞에 서서 막아주는 것. 그런 것들이 바로 심서준이 되고 싶었던 모습이었다.그리고 그는 이제야 비로소, 누군가를 아낀다는 법을 하나씩 배워 가고 있었다.*이튿날 계연수가 위씨 부저에 도착하자, 대문 앞에는 이미 마중 나온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최민정은 직접 그녀를 맞이하며 다정하게 손을 잡았다.“이따가 몇 사람 소개해 주겠네. 모두 마구회 사람들인데, 다들 그대를 꼭 만나 보고 싶어 했거든.”두 사람은 수상 정자와 긴 회랑, 고즈넉한 골목길을 지나 작은 화청으로 들어섰다.화청은 크지 않았지만 단정하고 품격이 있었다.안으로 들어서자 정면에는 오래된 화리목 병풍이 놓여 있었고, 병풍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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