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전 심정민의 태도를 보고 나니, 계연수는 새삼 심서준이 참으로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심정민은 명문가의 자제로, 가문을 짊어져야 할 장남 특유의 엄숙함과 고지식함을 지니고 있었다.그는 타고난 본성까지 나쁜 것은 아닐 터였다. 다만 지나치게 융통성이 없고 자부심이 강했을 뿐. 자신을 하늘처럼 여기며, 천지 귀한 공자 특유의 오만함으로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하찮게 보았다. 안채의 일은 지극히 단순하여 여인들이나 하는 것이라 여기는 듯했다.그런 부군과 살아가는 일은 분명 고될 수밖에 없었다.부인이 안채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헤아리지 못할뿐더러, 이해하려는 마음조차 품지 않을 테니까.심서준 역시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계연수 앞에서도 곧잘 체면을 세우며 높은 곳에 선 사람처럼 냉담하게 굴었다.그러나 계연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심서준은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주었다. 그녀가 하기 싫은 일을 피하려고 애교를 부리거나 게으름을 피우면, 속셈을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받아 주곤 했다.사실 요즘 심씨 노부인도 계연수를 제법 살갑게 대했다. 그녀를 일부러 괴롭히거나 가혹하게 대한 적도 없었다.심서준은 휴무일이면 계연수가 노부인에게 아침 문안을 드리러 가는 것조차 만류했다. 몸도 약한데 푹 쉬라며 보내지 않았지만, 심씨 노부인 역시 그 일을 두고 한마디도 나무라지 않았다.그에 비해 백씨가 최씨를 대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최씨의 삶은 분명 하루하루가 고달플 터였다.*처소로 돌아온 계연수는 다른 생각을 오래 이어 갈 틈도 없이 다시 그림을 그릴 준비를 했다. 책상 위에 종이를 펼쳐 놓고 새하얀 화선지를 바라보자, 좀처럼 느껴 본 적 없는 짜증이 마음속에서 울컥 치밀었다.그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지 않을 수도 없었다.계연수는 한참 동안 붓을 들고 종이 앞에 앉아 있었으나, 끝내 한 획도 내리지 못했다.*밤이 되어 목욕을 마친 계연수는 침상에 기대어 주방에서 올린 혼례 음식 목록을 살펴보고 있었다.추위를 많이 타는 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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