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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춘귀》全部章節:第 881 章 - 第 890 章

900 章節

제881화

고하운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셨다.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 처음부터 줄곧 알고 있었다.그저 계연수 앞에서만큼은 어떻게든 자존심을 세우고 싶었다. 자신도 남부럽지 않게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 그토록 조급하게 제 행복을 떠벌린 것이었다.그러나 계연수는 불과 몇 마디만으로 그녀가 공들여 지켜 온 체면을 무너뜨렸다. 그보다 고하운을 더욱 견디기 힘들게 한 것은, 그 모든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흘려듣는 계연수의 무심한 태도였다. 마치 자신이 그토록 애써 자랑한 것들이 애초부터 견줄 만한 가치조차 없다는 듯했다.계연수는 고하운이 누리고 있는 지금의 삶을 굳이 망가뜨릴 생각이 없었다. 창가로 스며든 늦은 햇살이 장부 위에 엷게 내려앉은 가운데, 그녀는 한동안 말없이 고하운을 바라보다가 진심을 담아 입을 열었다.“나는 네가 잘 살기를 바란다. 너와 나를 견주어 본 적도 없고.”나지막한 목소리에는 조롱도 노여움도 묻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담담해서, 고하운은 더욱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내가 대체 너와 무엇을 비교해야 하느냐? 네가 잘못 산다고 해서 내가 너를 비웃고 조롱하기라도 할 것 같으냐? 내 손으로 처리해야 할 일만 해도 산더미인데, 어디에 그런 일까지 신경 쓸 겨를이 있겠느냐?”계연수는 손끝으로 장부 가장자리를 가볍게 누르며 말을 이었다.“너는 단 한 번도 나를 제대로 알려고 한 적이 없구나. 어려서부터 함께 자랐으면서도 말이다.”방 안에는 향로에서 피어오른 은은한 침수향만이 고요히 감돌았다. 계연수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했으나, 이어지는 한마디 한마디는 고하운의 가슴속 가장 아픈 곳을 어김없이 파고들었다.“처음부터 지금까지 내가 너에게 무슨 잘못을 했느냐? 오히려 네가 내게 한 일을 돌아봐야 하는 것 아니냐? 네 어머니가 예전에 저지른 일들을 네가 정말 하나도 몰랐다고 할 셈이냐?”고하운의 낯빛이 다시 한번 새하얗게 질렸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지만, 그녀는 옷자락을 움켜쥔 채 넋이 나간 듯 계연수만 바라보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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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2화

백씨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형수님은 자신보다 훨씬 독한 사람이었다. 특히 집안의 소실을 다루는 일에는 한 치의 인정도 없었다.명씨는 차가운 기색을 거두고 백씨를 바라보며 웃었다.“그러고 보니 고하운은 정말이지 속 빈 허수아비나 다름없더구나. 매사에 남의 눈치만 살피며 쩔쩔매니, 어디 내세울 만한 구석이 있어야지.”그녀는 찻잔을 들어 맑은 찻물을 가볍게 흔들며 말을 이었다.“선혁이 제게 마음을 주지 않는다며 전에는 내 처소까지 찾아와 울더구나. 헌데 울어서 무엇 하겠느냐? 여자가 자꾸 눈물을 보이면 사내의 마음만 더 멀어지는 법인데.”명씨의 입가에 얇은 미소가 스쳤다.“그래도 덕분에 그 부부를 한바탕 꾸짖을 구실은 생겼다. 요즘은 그나마 눈치가 생겼는지 더는 내 앞에 와서 울지 않더구나. 그래도 나는 그 아이가 어리석어서 마음에 든다.”백씨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차츰 짜증이 일었다. 그녀는 말없이 명씨를 한 번 바라보았다.백선혁은 그래도 백씨 가문에서 제법 장래가 촉망되는 후손이었다. 그런데 명씨가 고하운 같은 여자를 부인으로 들여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으니, 결국 손해를 입는 것은 백씨 가문의 기반이자 큰오라버니의 자손이었다.생각해 보면 자신도 그때는 무언가에 홀렸던 모양이었다. 계연수를 견제하고 셋째 동생을 구해 내겠다는 생각에 이 혼사를 받아들였으나, 이제 와서는 후회가 밀려왔다.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백씨는 더 길게 말하지 않고 찻잔을 내려놓으며 명씨를 바라보았다.“형수님도 이제는 조금 자중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큰오라버니는 호락호락 속아 넘어갈 사람이 아니니까요.”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선혁의 혼사가 잘못되었다는 건 분명합니다. 고하운이 더는 이용할 가치조차 없다면, 저도 나중에는 큰오라버니께 그녀를 내보내고 선혁에게 더 나은 부인을 맞아 주라고 권할 생각이에요.”명씨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말을 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속내를 지나치게 드러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방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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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3화

계연수는 요 며칠 황제에게 바칠 매화도를 그리고 있었다.계연수는 서재의 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책상 한편의 화병에는 정원에서 갓 꺾어 온 매화 가지가 꽂혀 있었고, 갓 피어난 꽃잎에서는 맑고 그윽한 향이 흘러나와 방 안 구석구석을 은은하게 채웠다.그러나 계연수는 몇 번이나 붓을 들었다가도 좀처럼 마음속에 그리던 운치를 잡지 못했다. 대충 그려 끝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황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을 찾아내면 그 또한 골칫거리였다.그렇다고 정성을 다해 그리고 있자니, 황제를 위해 그만한 마음을 쏟을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이처럼 상반된 마음을 품어 본 것도 실로 오랜만이었다.계연수는 먹향과 매화향이 뒤섞인 서재 안에서 오전 내내 하릴없이 앉아 있었다. 허비한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즈음에야 마침내 붓끝을 종이 위에 내렸다.어찌 되었든 제대로 그려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귀찮은 일이 생길 테니까.그녀는 꼬박 하루 동안 그림에 매달렸다. 붓을 놓은 뒤에도 한참 동안 그림을 들여다보며 꽃잎의 농담(濃淡:색·먹의 농도 변화)과 가지의 흐름을 거듭 살폈다.위운필에게 가르침을 받은 뒤로 그녀의 화공은 예전보다 한층 깊어져 있었다. 계연수 스스로 보기에도 제법 흡족한 그림이었다.이튿날 심서준에게 부탁해 그림을 궁으로 들여보낸 계연수는 그것으로 황제의 분부를 무사히 마쳤다고 여겼다.그러나 고작 하루가 지난 뒤, 궁에서 다시 그녀를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황제를 다시 마주한 곳은 어서재가 아니라 매원이었다.계연수가 매원에 들어섰을 때, 황제는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행매나무 아래에 홀로 서 있었다. 희디흰 설원 위로 밝은 황색 곤룡포가 유난히 선명하게 빛났다.계연수는 눈을 내리깔고 소리 없이 다가가 공손히 예를 올렸다.황제는 그녀를 한 번 바라보았다. 온화하고 단아한 이목구비를 지닌 여인은 눈밭에 서 있으니 어딘지 서늘하고 고고해 보였다.그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물었다.“행매의 향을 어찌 생각하느냐?”계연수는 속뜻을 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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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4화

계연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눈 위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깊이 숙였다.“폐하께서는 하늘이 내리신 존귀한 옥체입니다. 천추만세토록 강녕하실 폐하께 감히 충성을 다하지 않고 공경하지 않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황제는 고개를 숙여 계연수를 말없이 바라보았다.두려움에 질린 듯 창백해진 얼굴과 깊이 내리깔린 눈매, 흐트러진 곳 하나 없이 정갈하게 틀어 올린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찬바람이 불어와 연노란 망토 자락을 가볍게 흔들었다. 목둘레를 감싼 새하얀 여우털 속에 파묻힌 얼굴은 본래보다도 한층 작아 보였다.황제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이내 몸을 조금 굽혀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는 듯 손을 내밀었으나, 손끝은 닿지 않았다.“심씨 부인은 어찌 이리 겁을 먹었느냐? 짐은 그저 한담을 나누었을 뿐이다.”그가 담담히 덧붙였다.“일어나거라.”계연수는 눈앞에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았다. 황제의 몸에서 풍기는 용연향에는 얼음처럼 차갑고 냉혹한 기운이 배어 있었다. 살을 에는 한겨울의 냉기와 뒤섞이자, 그 향은 숨조차 함부로 쉬지 못하게 할 만큼 위압적으로 느껴졌다.계연수는 몸을 일으켰다. 무심코 고개를 든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감정이라곤 좀처럼 읽히지 않는 냉담한 눈이었다.심서준보다도 한결 더 차가웠다.계연수가 황제의 얼굴을 이토록 똑바로 바라본 것은 처음이었다. 이전에도 천안을 볼 기회는 여러 번 있었으나, 그때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피했다.그녀 자신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황제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그 얼굴만 외면하면 아버지에게 벌어진 일도 애써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황권 앞에 고개를 숙인 채 과거를 마음 깊이 묻어 두고, 지금의 평온한 삶을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이어 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그러나 뜻하지 않게 마주한 황제의 모습은 그녀가 상상해 온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키가 크고 몸은 늘씬했으며, 마른 얼굴에는 날카로운 선이 살아 있었다.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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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5화

계연수는 황제가 여전히 자신을 떠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그러나 그가 어째서 이토록 집요하게 자신의 속내를 확인하려 드는지는 알 수 없었다.그녀는 심장이 요동치는 와중에도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눈을 내리깔고 고분고분한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더없이 공손하고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신첩이 폐하의 마음에 들도록 최선을 다해 그리겠습니다.”황제는 눈을 내리깔고 계연수의 얼굴에 떠오른 기색을 다시 한번 찬찬히 살폈다.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느긋하게 곤룡포 자락에 묻은 눈을 털어 낸 뒤, 계연수의 곁을 스쳐 천천히 멀어졌다.밝은 황색의 뒷모습이 매화나무 사이로 한참 멀어진 뒤에야 계연수는 자신을 짓누르던 압박감에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그녀는 곁에 있던 용춘의 손을 붙잡았다. 손바닥에는 온기 한 점 없이 차가운 식은땀만 배어 있었다.매화 숲에 바람이 가지를 스치는 소리만 남고서야 계연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행매나무에는 희고 여린 꽃이 소복이 피어 있었다. 옅은 향기가 바람결을 따라 코끝을 스쳤으나, 조금 전 황제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리니 그 맑은 향마저 서늘하게 느껴졌다.그녀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몸을 돌려 매원을 나가려 했다.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검은 옷을 입은 태자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곁을 따르는 궁인 하나 없이 홀로였다.계연수는 태자가 어째서 혼자 이곳에 왔는지 의아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려 먼저 인사를 건네려 했으나, 태자가 한발 앞서 입을 열었다.“부황께서 외숙모를 이곳으로 부르신 겁니까?”계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지난번에 그린 매화도가 폐하의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봅니다. 그래서 다시 그리라고 하셨습니다.”태자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내 두 손을 등 뒤로 모은 채 고개를 들어 눈앞의 행매나무를 바라보았다.“부황께서 만족하시는 일은 본래 드뭅니다. 그러니 외숙모께서도 너무 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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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6화

그뿐만이 아니었다. 백씨는 최씨에게 재수 없는 계집이라는 모진 말까지 내뱉었다.최씨는 그동안 겪은 일을 계연수에게 모두 털어놓고 싶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시어머니의 귀에 들어가 또다시 큰 소동이 벌어질까 두려웠다. 백씨는 본래부터 계연수를 못마땅하게 여겼으니, 자신이 그녀에게 하소연했다는 사실을 알면 당장이라도 산 채로 삼키려 들 터였다.최씨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계연수의 눈빛을 마주하자, 애써 참아 온 설움이 한꺼번에 북받쳤다. 결국 고개를 푹 숙인 채 계연수의 어깨에 기대어 울음을 터뜨렸다.계연수의 마음에도 황제와의 일로 무거운 근심이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최씨가 품에 안겨 흐느끼자 자신의 걱정은 잠시 뒤로 밀어 두고, 가늘게 떨리는 등을 다독여 주었다.한 부저에서 함께 지냈으니 요 며칠 백씨가 최씨를 어떻게 대했는지 계연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다만 큰방의 일에 자신이 섣불리 끼어들면 오히려 일이 커질 수 있었다. 가뜩이나 백씨가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터라, 괜히 나섰다가 최씨의 처지만 더욱 곤란해질지 몰랐다.그 때문에 그저 몇 마디 위로만 건네려던 찰나였다.품에 기대어 울던 최씨가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몸을 떼어 냈다. 곧이어 쉰 목소리가 두려움에 떨렸다.“어머님…”계연수가 고개를 들자, 옆길에서 백씨가 싸늘한 눈빛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백씨는 계연수를 차갑게 바라보다가 입가에 억지 미소를 걸었다.“동서는 이제 우리 큰방의 일까지 관여하려는 모양이구나?”계연수는 얼굴에 온화한 기색을 잃지 않은 채, 부드럽고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형수님께서 오해하셨습니다. 요 며칠 복아가 고뿔을 앓는다고 하여, 걱정스러운 마음에 제게 몇 마디 했을 뿐입니다.”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자연스럽게 덧붙였다.“며칠 전 장원에서 가죽을 여럿 보내왔는데, 그중에 잿빛 담비 가죽 한 장이 있었습니다. 두툼한 데다 털도 촘촘하여 복아에게 망토를 지어 주면 제격이겠더군요. 날씨도 몹시 추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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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7화

조금 전 심정민의 태도를 보고 나니, 계연수는 새삼 심서준이 참으로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심정민은 명문가의 자제로, 가문을 짊어져야 할 장남 특유의 엄숙함과 고지식함을 지니고 있었다.그는 타고난 본성까지 나쁜 것은 아닐 터였다. 다만 지나치게 융통성이 없고 자부심이 강했을 뿐. 자신을 하늘처럼 여기며, 천지 귀한 공자 특유의 오만함으로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하찮게 보았다. 안채의 일은 지극히 단순하여 여인들이나 하는 것이라 여기는 듯했다.그런 부군과 살아가는 일은 분명 고될 수밖에 없었다.부인이 안채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헤아리지 못할뿐더러, 이해하려는 마음조차 품지 않을 테니까.심서준 역시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계연수 앞에서도 곧잘 체면을 세우며 높은 곳에 선 사람처럼 냉담하게 굴었다.그러나 계연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심서준은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주었다. 그녀가 하기 싫은 일을 피하려고 애교를 부리거나 게으름을 피우면, 속셈을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받아 주곤 했다.사실 요즘 심씨 노부인도 계연수를 제법 살갑게 대했다. 그녀를 일부러 괴롭히거나 가혹하게 대한 적도 없었다.심서준은 휴무일이면 계연수가 노부인에게 아침 문안을 드리러 가는 것조차 만류했다. 몸도 약한데 푹 쉬라며 보내지 않았지만, 심씨 노부인 역시 그 일을 두고 한마디도 나무라지 않았다.그에 비해 백씨가 최씨를 대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최씨의 삶은 분명 하루하루가 고달플 터였다.*처소로 돌아온 계연수는 다른 생각을 오래 이어 갈 틈도 없이 다시 그림을 그릴 준비를 했다. 책상 위에 종이를 펼쳐 놓고 새하얀 화선지를 바라보자, 좀처럼 느껴 본 적 없는 짜증이 마음속에서 울컥 치밀었다.그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지 않을 수도 없었다.계연수는 한참 동안 붓을 들고 종이 앞에 앉아 있었으나, 끝내 한 획도 내리지 못했다.*밤이 되어 목욕을 마친 계연수는 침상에 기대어 주방에서 올린 혼례 음식 목록을 살펴보고 있었다.추위를 많이 타는 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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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8화

심서준은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황제가 벌이는 일은 결코 단순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계연수가 전한 이야기는 자신도 황제에게서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황제가 그녀를 떠본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누군가를 떠본다는 것은, 그에 앞서 그 사람의 속내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는 뜻이었다.계연수는 그저 깊은 안채에서 살아온 여인에 불과했다. 그런 그녀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심서준 역시 여인 하나의 말에 휘둘릴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황제가 계연수의 아버지와 얽힌 과거 때문에 그녀가 심씨 가문의 마음을 흔들까 염려하는 것이라면, 그의 의심 많은 성정을 생각할 때 아주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하지만 심씨 가문은 태자와 관련된 일만 아니라면 황제에게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도 바로 황제였다.생각을 마친 심서준은 계연수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걱정하지 말거라. 폐하께서는 그저 너와 한담을 나누신 것뿐이다. 그림이 완성되면 이번에는 내가 직접 폐하께 올리겠다.”그 말에 계연수는 심서준의 허리를 더욱 꼭 끌어안고 품 안에서 살며시 몸을 비볐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품속의 몸은 이불 속 온기를 머금어 말랑하고 따뜻했다. 계연수가 토끼처럼 두어 번 몸을 비비자 심서준의 몸이 순간 미세하게 굳었다.그는 두 손으로 계연수의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 입안에 남아 있던 곶감의 달콤한 향이 두 사람 사이로 번졌다.심서준이 낮게 웃었다.“이제는 살찔까 봐 두렵지 않은 모양이지?”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겨울만 되면 부쩍 먹을 것이 당겼다. 특히 잠자리에 들 무렵이면 어김없이 허기가 찾아왔다.장원에서 보내온 곶감은 유난히 달고 부드러웠다. 계연수는 자칫 손이 가는 대로 먹을까 봐 하루에 하나만 먹기로 스스로 정해 두었다.그녀는 심서준의 손을 잡아 제 아랫배 위에 올려놓았다.“한번 만져 보세요. 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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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9화

침상 안의 움직임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겨우 잦아들었다.이튿날은 휴무일이었다. 심서준은 이튿날 조정에 나갈 일이 없으면 으레 절제하지 않았고, 오늘처럼 계연수가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왔을 때는 더욱 쉬이 놓아주지 않았다.결국 계연수는 온몸에 힘이 풀린 채 그의 품에 축 늘어졌다. 그러면서도 앞서 약속받으려던 일을 잊지 않고 힘겹게 물었다.“부군, 내일 진찰받으실 거지요?”충분히 만족한 사내는 무엇이든 들어줄 듯 너그러웠다. 심서준이 낮고 나른한 목소리로 응답하자 계연수는 그제야 흡족해하며 몸을 일으켜 씻으러 가려 했다.그러나 심서준이 그녀를 눌러 붙잡았다.“목욕은 아침에 하거라.”예전에는 늘 심서준이 직접 안아다 씻겨 주었다. 계연수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어째서요?”심서준은 그녀를 품 안에 더욱 깊이 끌어안았다. 아직 거친 숨결이 가라앉지 않은 목소리가 낮고 쉰 음색으로 울렸다.“아이를 갖고 싶지 않느냐? 조금 더 이대로 있거라.”계연수는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비로소 그 말의 뜻을 알아차렸다.그녀는 심서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되물었다.“아이를 원하는 사람이 어찌 저뿐이겠습니까? 부군은 갖고 싶지 않으세요?”심서준도 아이를 원하기는 했다. 다만 서두를 생각은 없었다.혼인한 지 아직 일 년도 되지 않았다. 지금의 그에게 아이는 있어도 좋고, 조금 늦게 생겨도 상관없는 존재였다.더구나 요즘 들어 계연수와의 사이는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었다. 심서준은 두 사람만이 누리는 지금의 나날이 몹시 좋았다. 자신도 아직 젊었으니, 벌써부터 아이 때문에 그녀를 가까이하지 못하는 때가 생기는 것은 달갑지 않았다. 훗날 두 사람 사이에 조그마한 아이가 끼어들어 계연수의 관심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못내 심술궂어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아이가 없다는 이유로 그녀가 주위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모습을 두고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심서준은 끝내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기만 했다.*이튿날, 황후가 보낸 이름난 의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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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0화

방 안에서는 한동안 이야기가 더 이어졌다. 계연수는 머리가 조금 어지러워 바람을 쐬려 밖으로 나왔다가, 회랑 아래에 홀로 서 있는 손보경을 발견했다.조금 전 분명 처소로 돌아가 쉬라고 했는데, 뜻밖에도 손보경은 줄곧 이곳에 머물러 있었던 모양이었다.계연수가 나오자 손보경이 희미한 미소를 띠며 불렀다.“오숙모.”계연수는 대답 대신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 밤하늘 아래로 흰 눈송이가 소리 없이 흩날리고 있었다.“그래.”그 짤막한 대답 뒤로 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손보경은 어둠 속에서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을 바라보았다. 지금 자신의 처지는 꼭 이 풍경과도 같았다.몸은 심씨 가문에 들어와 있었지만, 마음과 신뢰는 그들 밖으로 철저히 밀려나 있었다. 등 뒤의 따뜻한 방 안에서는 어쩌면 자신을 어떻게 경계하고 막아 낼지를 의논하고 있을지도 몰랐다.그렇다고 물러설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앞에서는 태후가 한 걸음씩 다가오며 혈육의 정과 핏줄을 빌미로 그녀를 옥죄고 있었다.손보경은 태후의 수단만으로 백 년 동안 뿌리를 내린 심씨 가문을 단숨에 무너뜨릴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양쪽이 끝까지 맞서 싸운다면 어느 한쪽이 승리하기보다 함께 상처 입고 무너질 가능성이 컸다.그녀는 두 세력이 싸우기를 바라지 않았다.지금 태후의 뜻을 따르는 듯 보이는 행동도 그저 눈을 속이기 위한 거짓에 불과했다.그때 등 뒤에서 다시 발소리가 들려왔다.방에서 나온 사람은 심한율이었다.회랑 아래에 서 있는 손보경을 발견한 그의 얼굴에도 옅은 놀라움이 스쳤다. 마침 자신이 먼저 자리를 빠져나와 손보경을 찾아갈 생각이었기 때문이다.진심이 아니더라도 당분간은 다정한 척하며 그녀의 속내를 알아내야 했다. 손보경이 대체 무엇을 하려는지부터 확실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잠시 멈춰 섰던 심한율은 이내 손보경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처음으로 팔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내가 데려다주마.”그는 계연수에게도 낮은 목소리로 먼저 물러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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