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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1화

심정민은 본래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사람됨은 올곧았다. 다만 조정의 일을 지나치게 중히 여긴 나머지 집안일에는 도통 관심을 두지 않았고, 여인 역시 그에게는 그리 중요한 존재는 아닌 듯했다.초닷새가 되자 계연수는 심서준과 함께 어머니를 찾아갔다.고씨는 이제 안색이 제법 좋아져 있었다. 딸을 보자 무척 반가워하며 손을 붙잡고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이 집은 다 좋은데, 혼자 지내다 보니 아무래도 적적하구나. 그래서 전에는 고씨 가문에 자주 들르곤 했는데, 요즘은 그마저도 잘 가지 않는다. 네 큰외숙모가 워낙 분수를 모르고 구니 말이다.”계연수는 어머니가 이제야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 주는 듯해 안도했다. 예전처럼 걸핏하면 서신을 보내 ‘그래도 한 가족이지 않느냐’는 말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놓였다.고씨는 계연수의 손을 더욱 꼭 쥐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제야 알겠구나. 사람마다 저마다 타고난 인연이 따로 있는 것을. 이제 어미는 너만 생각하며 살련다.”그러고는 속에 쌓아 두었던 말을 풀어놓듯 계속해서 말했다.“네 큰외숙모는 하운이가 영국공부에서 호강하며 산다고 입버릇처럼 떠들지만, 정작 백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이 언제 한 번 그 아이를 찾아오기라도 했느냐? 제 돈으로 산 물건을 시댁에서 보내 준 것처럼 떠벌리며 애써 허세를 부리지 않느냐. 네 둘째 외숙모가 그 거짓말을 알면서도 들추지 않은 건, 큰 명절을 앞두고 괜히 집안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였을 뿐이다. 그러니 보아라. 이쪽에서 매달려 성사시킨 혼사가 어디 그리 좋기만 하겠느냐?”계연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으나, 큰외숙모네 이야기를 더 보태지는 않았다. 대신 어머니에게 부족하거나 필요한 것은 없는지 물었다.고씨는 고개를 저었다.“내 걱정은 하지 말거라. 이곳에서는 부족한 것 없이 잘 지내고 있다.”그러다 문득 눈시울을 붉히며 계연수의 손을 다정히 쓸어내렸다.“무엇보다 네가 후작과 정답게 지내는 모습을 보니, 이제야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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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2화

어느덧 심정우의 혼례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그날 오전, 계연수는 방 안에 앉아 문지기가 가져온 청첩들을 살펴보다가 뜻밖에도 사씨 가문에서 보낸 것 하나를 발견했다.의아한 마음에 꺼내 자세히 읽어 보니, 사옥현이 이명유를 정실로 맞는다는 청첩이었다. 혼례 날짜는 공교롭게도 심정우의 혼례 바로 다음 날이었다.계연수의 머릿속에 문득 지난번 보았던 이명유의 불룩한 배가 떠올랐다.용춘이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사씨 가문에서 감히 이런 청첩까지 보내다니요. 낯짝도 두껍습니다.”계연수는 청첩 위에 정갈하게 적힌 글씨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단아하고 고운 필체로 보아 여인이 쓴 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이명유가 일부러 자신에게 보이려고 직접 쓴 모양이었다.아무리 사씨 가문이라 해도 굳이 청첩을 보내 자신을 도발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을 터였다.계연수는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사씨 가문의 일 따위에는 진작부터 관심을 끊은 지 오래였다.그녀는 시녀에게 청첩을 가져다 버리라 이른 뒤, 용춘을 바라보며 담담히 웃었다.“어찌 되었든 두 사람은 참 잘 어울리지 않느냐?”용춘은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그 말에 담긴 뜻을 알아차렸다.과연 더없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한쪽은 눈도 마음도 먼 위선자였고, 다른 한쪽은 총애를 다투기 위해서라면 온갖 수단을 마다하지 않는 여인이었으니. 차라리 두 사람이 혼인하는 편이 나았다. 그래야 애꿎은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을 테니까.그렇게 생각하니 용춘의 속도 조금은 풀렸다. 다만 두 사람이 마땅한 벌을 받게 되리라 상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결말이라,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개운치 않았다.계연수는 용춘이 분을 삭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옅게 웃었다. 사옥현과 이명유는 이미 그녀의 마음속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이 지금 어떻게 살아가는지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사실 사씨 가문의 처지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사옥현은 좌천되었고, 그의 어머니는 쫓겨났으며, 경성 사교계에서도 사씨 가문의 존재감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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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3화

계연수는 멀어져 가는 심정우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저토록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그녀는 복사나무 숲에 오래 머물지 않고 이내 천천히 주방으로 향했다.사실 계연수는 오늘 아침 눈을 뜰 때부터 머리가 무겁고 어지러웠다. 정신이 안개에 잠긴 듯 온종일 몸이 나른하고 몽롱했다.이런 증상은 이틀 전부터 아침마다 되풀이되고 있었다. 요 며칠 부쩍 바쁘게 지낸 탓이려니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지금은 속까지 메슥거리고 가슴도 이유 없이 두근거렸다.그래도 주방만큼은 직접 살펴야 했다. 집안의 큰 경사를 앞둔 만큼 어느 한 곳에서도 실수가 생겨서는 안 되었다.이튿날 심정우의 혼례가 열렸다.계연수는 화청에 앉아 손님들을 맞이하던 중 등에 차가운 땀이 배어드는 것을 느꼈다. 곁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와도 대꾸하기조차 버거울 만큼 정신이 아득했다.그런 줄도 모르는 부인들은 연신 그녀를 칭찬했다.“부인께서 이토록 많은 연회를 도맡아 치르면서도 작은 실수 하나 없다니, 참으로 대단합니다. 노부인께서 늘 칭찬하시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군요.”계연수는 얼굴에 봄볕처럼 온화한 미소를 띤 채 평소와 다름없이 나긋나긋하게 응대했다. 그 많은 칭찬 속에서도 조금도 들뜨거나 거만해하지 않고, 시종 고요하고 차분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본래도 빼어난 미모를 지닌 여인이었으나, 온갖 찬사 앞에서도 눈썹 끝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은 사람들의 호감을 더욱 깊게 했다.손보경은 계연수와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예전 같으면 이런 자리에서도 누구보다 능숙하게 사람들과 어울렸을 그녀였으나, 오늘은 유난히 말이 없었다. 그 곁으로 다가가 말을 거는 이도 없었다.점심 연회가 한창일 무렵, 계연수는 최민정을 비롯해 평소 가깝게 지내던 부인 몇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그러던 찰나, 눈을 한 번 깜박였을 뿐인데 돌연 시야가 새까맣게 물들었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계연수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다행히 곁에 있던 최민정이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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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4화

부의의 말이 끝나자 방 안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계연수를 끌어안은 심서준의 손이 알아차리기 어려울 만큼 가늘게 떨렸다.그는 아이를 애타게 기다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계연수가 두 사람의 아이를 가졌다는 말을 듣는 순간,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쳤다.그 아이가 자신과 계연수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라는 생각만으로도 벅찬 감정이 거센 물결처럼 밀려들었다.그제야 심서준은 깨달았다. 자신 역시 두 사람의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그럼에도 얼굴에는 평소와 같은 침착함을 유지한 채, 미간을 찌푸리고 부의에게 물었다.“혹시 진맥을 잘못한 것은 아니냐?”부의가 황급히 대답했다.“희맥만큼은 소인이 절대로 잘못 짚지 않았습니다.”심서준은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다시 물었다.“부인의 몸은 어떠하냐? 언제쯤 깨어날 수 있는 것이냐?”부의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고 답했다.“부인께서 정신을 잃으신 것은 심신을 지나치게 소모하신 데다, 회임으로 기혈이 아래로 몰리면서 태기가 다소 불안정해졌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쉬면서 심신을 안정시키고 태를 보하는 약을 몇 첩 드시면 차츰 회복하실 것입니다. 몸에 큰 이상은 없으시니 오늘 안에는 깨어나실 듯합니다.”심서준은 계연수의 서늘한 손가락을 꼭 쥔 채 부의에게 서둘러 약을 달이라고 명했다. 이어 방 안의 시녀들까지 모두 물러나게 했다.사람들이 빠져나가자 방 안은 금세 적막해졌다.심서준은 품에 기댄 계연수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모든 일이 꿈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자신에게도 곧 혈육이 생긴다는 사실이 좀처럼 실감 나지 않았다.길고 단정한 손가락이 계연수의 온기 어린 뺨에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그러나 창백한 얼굴에 고통스러운 기색이 남아 있는 것을 보자, 가슴 한구석이 다시 저릿하게 아파 왔다.계연수가 아이를 품고 겪어야 할 고통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견디기 어려웠다.기쁨인지 두려움인지, 심서준 자신도 지금의 감정을 분명히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의 눈에는 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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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5화

계연수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백씨가 뒤에서 또 무슨 말을 지어내며 소란을 피우는 일이었다.사람이 많은 집안의 생리를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잘한 일이 있어도 입에 올리는 사람은 드물지만, 조금이라도 부족한 점이 보이면 순식간에 온 집안으로 퍼지는 법이다.그 말을 들은 심서준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계연수가 집안 살림을 맡은 지도 제법 오래되었다. 그사이 그녀의 성정도 많이 달라져, 이제는 무슨 일을 하든 빈틈없이 처리하고 앞뒤 사정을 두루 헤아리게 되었다.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설령 자신이 계연수를 응석받이에다 제멋대로 구는 여인으로 만들었다 한들, 누가 감히 그의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겠는가. 또 누가 감히 계연수의 잘못을 지적하겠는가.모두 자신이 허락하고 받아 준 일이었다.오히려 심서준은 계연수가 조금 더 응석을 부리고 제멋대로 굴기를 바랐다. 하찮은 평판에 신경 쓰느라 날마다 제 몸을 고단하게 하지 않았으면 했다. 어차피 세상의 비바람은 자신이 그녀의 앞에 서서 모두 막아 주면 그만이었으니까.지금의 계연수는 지나치게 철이 들고 사려가 깊었다. 무슨 일이든 실수 없이 해내려 했고, 누구에게든 만족을 주려고 애썼다. 그러니 지칠 수밖에 없었다.심서준은 계연수의 눈가에 남은 물기를 손끝으로 닦아 주며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응석받이면 또 어떻느냐. 내 부인이 조금 응석을 부리는 게 무슨 큰일이라고.”계연수는 그가 떠먹여 주는 약을 단숨에 삼키고는 서둘러 매실 하나를 입에 넣었다. 입안에 번지는 쓴맛을 달래며 심서준을 가볍게 흘겨보았다.“그러다가는 앞으로 누구든 제 허물을 잡으려 들 거예요.”심서준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그럼 분가해서 네가 안주인이 되면 되지. 그 집에서는 네가 가장 윗사람일 테니.”계연수는 뜻밖의 말에 잠시 굳었다가 다급히 물었다.“그럼 어머님은요?”“어머니께서는 이곳에 계시게 하고, 우리는 내 부저로 나가 따로 살면 된다.”심서준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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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6화

이튿날 이른 아침, 심서준은 계연수를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홀로 심씨 노부인의 처소로 향했다.계연수도 내심 반가운 마음으로 늦잠을 즐겼다.삼월이라 해도 아직 봄바람 끝에는 찬 기운이 남아 있었다. 몸은 한없이 나른한데 방 안은 포근하고 따뜻했으니, 굳이 이불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계연수는 다시금 몽롱한 잠에 빠져 안심한 채 푹 잠에 들었다.심서준이 미리 단단히 일러 둔 것인지, 이날은 누구도 찾아와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 덕분에 계연수는 모처럼 아무 일에도 쫓기지 않고 한가로운 하루를 보냈다.그러다 밤이 되어 용춘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계연수는 그날 오전에 있었던 일을 전해 들었다.용춘은 본래부터 이수옥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주방의 시녀들과 허물없이 어울린 덕분에 집안 소식에도 제법 밝았다.원래 남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아이이기도 했으니, 부 안에서 사소한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든 귀동냥해 와 계연수에게 들려주곤 했다.용춘의 말에 따르면, 이날 일가친척들에게 인사를 올리는 자리에 심정우는 이수옥과 함께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사흘간 말미를 받았는데도 심정우는 이른 아침부터 갓 혼인한 부인을 집에 홀로 남겨 둔 채 경교대영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그 때문에 아침 문안 자리에는 이수옥 혼자 외롭게 서서 일가친척들을 맞아야 했다. 심씨 노부인과 대감도 난처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몇 번이나 그녀를 달랬다. 심정우가 군무를 마음에 두고 있으니 좋은 일이라며, 너무 서운해하지 말라고 위로했다고 했다.용춘은 계연수의 귓가로 바싹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듣기로는 셋째 부인께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답니다. 눈까지 새빨개졌는데도 도련님의 좋은 점만 이야기하며 끝까지 흐트러짐 없이 차를 올렸다지 뭐예요.”그러고는 계연수에게 먹일 밤을 까면서 덧붙였다.“솔직히 소인은 그분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조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계연수는 잘 익은 밤을 먹고 벽라춘을 한 모금 마신 뒤 물었다.“무엇이 그리 대단하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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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7화

계연수에게 회임은 처음이었고, 배 속의 아이 역시 그녀의 첫 아이였다.과거 사옥현과 막 혼인했을 무렵에도 아이가 생기기를 간절히 바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에는 그와의 사이에 아이가 없었다는 사실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겼다.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아이를 품게 되었다.아직은 실감조차 나지 않았지만, 가슴 깊은 곳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조용히 차올랐다. 계연수는 이 아이가 세상에 태어날 날을 진심으로 기다리고 있었다.그녀는 나한탑에 앉아 천천히 경문을 베껴 쓰고 있었다. 어깨에는 짙은 보람색 겉옷을 걸쳤고, 길고 윤기나는 머리카락은 뒤로 느슨하게 묶어 은비녀 하나로 고정했다.등잔불이 고요히 흔들릴 때마다 그녀의 나른하고도 고운 자태가 은은한 빛 속에 아른거렸다.그때 심서준이 바깥의 냉기를 온몸에 두른 채 방으로 들어왔다.그는 제 몸에 밴 찬 기운 때문에 계연수가 불편해할까 염려해 곧장 다가가지 않았다. 화로 앞에 잠시 서서 손과 옷자락을 따뜻하게 덥힌 뒤에야 계연수의 곁으로 다가갔다.계연수는 붓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심서준이 곧바로 어깨를 눌러 막았다.그는 허리를 굽혀 계연수를 품에 받쳐 안은 뒤, 조금 전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에 대신 앉았다. 계연수는 자연스레 그의 품 안에 자리를 잡았다.심서준의 시선이 작은 탁자 위에 놓인 경문으로 향했다. 단정하고 고운 글씨에는 한 자 한 자 정성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했다.그가 품속의 계연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몸은 좀 나아졌느냐?”계연수는 그가 무엇을 묻는지 알았다.실제로는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아침에는 머릿속이 안개에 잠긴 듯 어지럽고 몽롱했으며, 오후가 되어서야 조금씩 괜찮아졌다.그 말을 들은 심서준은 안쓰러운 마음에 그녀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앞으로 집안의 인사치레와 손님맞이는 넷째 형수님께 맡기거라. 지금은 몸이 불편하니 그런 일까지 직접 챙길 필요 없다. 평소처럼 주방 일만 살피되, 연회가 있을 때는 방 어멈에게 맡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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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8화

말을 마친 심서준은 고개를 숙여 계연수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느리고도 깊게 이어지는 입맞춤에 계연수는 어느새 정신이 아득해졌다. 달뜬 숨을 고르며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언제 옮겨졌는지도 모르게 침상 위에 누워 심서준의 몸 아래 갇힌 뒤였다.그때 눈앞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계연수는 괴로운 듯 욕망을 참아 내는 심서준의 얼굴과 이마에 맺힌 가느다란 땀방울을 보고서야 상황을 알아차렸다.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지 못한 그녀는 결국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심서준은 눈이 휘도록 웃는 계연수를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의 뺨을 가볍게 꼬집고는 양팔로 몸을 받쳐 천천히 일어났다.“먼저 자고 있거라. 나는 옷을 갈아입고 목욕을 하고 오겠다.”계연수는 서둘러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불 속으로 얼굴을 파묻고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잠시 후 돌아온 심서준은 몸을 깨끗이 씻어 한결 산뜻한 모습이었다. 그는 곁눈으로 계연수를 바라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조금 전 그녀가 무엇 때문에 웃었는지 모를 리 없었다.심서준은 계연수를 품으로 끌어당겨 옆으로 안고 물었다.“그렇게 재미있었느냐?”계연수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그렇게까지 재미있었던 건 아니에요.”심서준은 눈을 감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어머니께는 이미 말씀드렸다. 아이를 가진 동안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 문안을 드리지 않아도 된다.”계연수가 놀라 물었다.“어머님께서 허락하셨어요?”심서준이 짧게 대답했다.“그래.”“그리 쉽게 허락하실 분은 아니잖아요?”심서준은 다시 눈을 뜨고 계연수를 바라보았다.“어머니께서 때로 예법을 지나치게 중히 여기시기는 하지만, 네 배 속에 있는 아이만큼은 몹시 기다리고 계신다. 내가 말씀드렸을 때도 별다른 반대는 하지 않으셨다.”계연수는 심씨 노부인이 그토록 선뜻 허락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곰곰이 생각해 보니 심씨 노부인은 다른 집안의 모진 시어머니들보다는 훨씬 나은 사람이었다.*이튿날 계연수가 아침 식사를 막 마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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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9화

심씨 노부인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서준이가 직접 찾아와 부탁하더구나. 네가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다면서, 날씨도 아직 추우니 문안을 드리러 오게 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생각해 보니 그 말도 옳았다. 너는 본래 몸이 썩 튼튼하지 못해 걸핏하면 앓으니, 오지 않는 편이 낫겠구나. 괜히 오가다가 뱃속의 아이에게 무슨 탈이라도 생기면 어쩌겠느냐.”심씨 노부인은 말을 마치고 곁에 앉은 백씨를 바라보았다.“너는 내가 편애한다고 생각하지 말거라. 예전에 태숙이가 찾아와 똑같이 부탁했다면, 너 역시 문안을 면제해 주었을 게다.”백씨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말이야 그럴듯하고 공평하게 들렸지만, 자신이 배가 남산만큼 불러서도 노부인을 시중들던 때에는 언제 한 번 안쓰럽게 여겨 준 적이 있었던가.그녀는 다시 계연수를 바라보았다. 붉은 입술과 흰 치아, 혈색이 곱게 오른 얼굴은 어디 한 군데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저런 모습이 대체 어디가 몸이 약하다는 것인가.문득 심태숙까지 떠올랐다.그는 늘 자신만을 마음에 품고 있다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러나 심서준과 비교하고 나니 그 차이가 선명하게 보였다. 심서준은 계연수를 아끼는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 주었지만, 심태숙은 듣기 좋은 애정 표현만 늘어놓았을 뿐이었다.이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깨달았다.한 사내가 여인을 진정으로 아끼는지는 그가 얼마나 달콤한 말을 하는가가 아니라, 그녀를 위해 무엇을 해 주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을.심태숙은 지금까지 백씨를 위해 무엇 하나 해 준 적이 없었다. 심씨 노부인 앞에서 부인을 감싸며 제 뜻을 강하게 내세운 적도 단 한 번 없었다.가슴 깊은 곳에 씁쓸한 감정이 차올랐지만, 백씨는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동서는 귀한 몸이고, 도련님께서 동서를 아끼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제가 어찌 어머님께서 편애하신다고 말씀드리겠습니까. 저 역시 동서가 몸조리를 잘하여 건강해지기만을 바랍니다.”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심씨 노부인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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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0화

계연수는 슬며시 백씨의 안색을 살폈다. 얼굴에는 분명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주방을 맡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사실 심서준도 전날 밤 이 일을 꺼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계연수는 굳이 백씨에게 맡기자는 말을 하지 말라고 만류했다.그녀는 본래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무엇을 차지하려 다투지도 않았고, 자신의 일로 다른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게다가 지금 주방에는 온통 자신이 들인 사람들만 있었다. 백씨가 주방을 넘겨받았다가 다시 사람을 바꾸기라도 하면, 그 뒤처리 또한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닐 터였다.계연수가 필요 없다고 말하려던 찰나, 백씨가 먼저 환하게 웃으며 받아들였다.“동서는 아무 걱정 말고 태교와 몸조리에만 힘쓰거라. 주방 사람들은 손대지 않을 테니, 지금까지 해 오던 대로 두면 된다. 일 처리 역시 동서가 세워 둔 규정에 맞추어 하마. 지금은 동서와 뱃속의 아이가 가장 중요하니, 다른 일은 마음에 담아 두지 말거라.”계연수는 뜻밖이라는 듯 백씨를 바라보았다.혹시 심서준이 따로 불러 단단히 경고하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백씨도 이제는 정말로 온 집안이 화목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것일까.그러나 후자만큼은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심씨 노부인은 백씨의 대답을 듣고 제법 만족스러워했다. 한편으로는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요즘 보니 네 안색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구나. 혼자 감당하기 벅차거든 큰며느리에게 맡겨도 된다. 그 아이도 이제 집안일을 배울 때가 되었지.”갑자기 이름이 언급된 최씨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다가 백씨의 눈치를 살폈다.백씨가 웃으며 말했다.“어머님 말씀이 옳습니다. 그 아이에게 주방을 맡겨도 괜찮겠지요. 제 맏며느리이니 이번 기회에 집안일을 배우게 하는 것도 좋겠습니다.”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심씨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최씨를 바라보았다.“그러면 당분간 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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