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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춘귀》全部章節:第 871 章 - 第 880 章

900 章節

제871화

아침 일찍 따끈한 납팔죽으로 속을 데운 여인들은 곁채로 자리를 옮겨 담소를 나누었고, 남자들은 앞채에 따로 모여 있었다. 겨울 볕이 창호지를 희미하게 밝히는 가운데, 방 안에는 아직 달큰한 죽 냄새와 따뜻한 온기가 은은히 남아 있었다.손보경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계연수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그녀의 곁으로 모여들어 저마다 말을 건넸고, 상석에 앉은 심씨 노부인마저 흐뭇한 표정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계연수가 심서준을 도와 점포를 꾸려 온 덕분에 올해는 배당금도 두둑했고, 각 처소에 좋은 옷감까지 빠짐없이 보내왔다며 사리에 밝고 예의 바른 데다 효심까지 깊다고 입이 마르도록 치켜세웠다.심씨 노부인의 곁에서 조용히 시중을 들던 백씨는 그 말을 들을수록 가슴 한구석이 쓰라렸다. 그러나 얼굴에 내색할 수도, 그렇다고 반박할 수도 없었다.계연수가 일 처리를 빈틈없이 해내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심씨 부저 안에서 그녀를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백씨의 두 아들마저 오숙모가 좋다며 입을 모았다.계연수가 이 집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노부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집안사람들의 마음까지 모조리 사로잡았단 말인가. 시종들 사이에서도 그녀를 칭찬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워낙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선행을 베풀기 좋아하는 사람이니, 백씨로서는 아무리 속이 뒤틀려도 흠잡을 구석을 찾을 수 없었다.게다가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심서준과 계연수의 금실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이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는 무력감마저 밀려들었다.몇 년만 기다리면 된다는 말도, 한때의 열기가 식을 때까지 두고 보자는 말도 이제는 모두 부질없이 들렸다. 두 사람 사이에 감도는 애틋함은 한철의 신선함이 아니라, 평생이 지나도 좀처럼 바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지난 몇 달 동안 계연수는 장원부터 주방에 이르기까지 집안일을 두루 살피며 어느 한구석 소홀히 하지 않았다. 노부인이 저토록 그녀를 치켜세우는 판에, 훗날 아이까지 낳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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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2화

계연수가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탄다는 사실은 심서준도 일찌감치 알아차렸다. 그는 그녀가 추위를 조금이라도 느낄까 염려해, 온각의 구들불이 한시도 꺼지지 않도록 늘 따뜻하게 데워 두었다.대문 앞에는 손보경이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어둑한 겨울 저녁, 마차 곁에 홀로 선 모습이 유난히 외로워 보였다. 그녀는 심서준의 품에 폭 감싸인 채 걸어 나오는 계연수를 바라보다가 순간 넋을 잃었다.자신은 평생토록 계연수처럼 마음 편하고 다정한 나날을 누리지 못할 것만 같았다.짤막한 인사가 오간 뒤, 손보경은 심서준에게 공손히 오숙부라 불렀다. 그러나 심서준은 들은 체도 하지 않은 채 계연수의 팔을 받쳐 조심스레 마차에 태웠다. 손보경의 낯빛이 옅게 질렸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술을 다문 채 뒤편의 마차에 올랐다.입궁한 뒤에는 심서준과 계연수가 서로 갈라져야만 했다. 심서준은 외전으로 향하고, 계연수는 곤녕궁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밤이 내려앉은 궁궐에는 바람이 더욱 거세졌다. 길게 뻗은 궁도를 타고 불어온 찬 바람이 계연수의 망토 자락을 세차게 흔들었다. 두툼한 옷감이 바람에 펄럭이며 연신 파르락거리는 소리를 냈다.심서준은 그런 계연수에게 몸을 조금 기울이고 나직이 당부했다.“이따가 내가 찾아가겠다. 함께 돌아갈 테니 황후마마 곁에서도 너무 어려워하지 말고, 집에 있을 때처럼 편히 있으면 된다.”계연수는 망토 자락을 여미며 작게 대답했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훑고 지나갈 때마다 살갗이 따끔거릴 정도였다.심서준이 떠난 뒤, 계연수는 손보경과 함께 곤녕궁으로 향했다. 손보경은 이미 후궁의 길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궁인이 앞장서지 않아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 훤히 알고 있었다.두 사람의 발소리가 고요한 궁도 위로 나란히 이어졌다. 양옆에서는 시종들이 말없이 등롱을 들고 따랐고, 바람에 흔들리는 불빛이 길 위에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걷는 내내 손보경은 자꾸만 곁에 있는 계연수의 옆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이해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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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3화

계연수의 말은 진심이었다. 꾸밈을 벗은 손보경이 어떤 사람인지는 오직 그녀 자신만이 알 터였다.손보경은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마음속은 여전히 막막하기만 했다.곤녕궁에 이르자 태후가 상석에 앉아 있었다. 태후는 안으로 들어서는 계연수와 손보경을 한 번 바라보더니, 이내 얼굴에 웃음을 띠고 손보경에게 손짓했다. 가까이 오라는 뜻이었다.손보경이 곁으로 다가가자 태후는 그녀를 앉혀 두고 심씨 가문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이것저것 물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후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그러나 곧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감정을 감춘 채 손보경을 조용히 살폈다.다행히 손보경은 눈을 내리깔고 얌전히 태후의 곁으로 다가갔을 뿐, 겉으로는 심씨 가문에서 힘들게 지낸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태후는 손보경의 손을 잡고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심씨 가문에서 너를 박대하는 일이 있다면 반드시 돌아와 말하거라. 내가 너를 위해 바로잡아 줄 테니.”손보경은 태후가 일부러 황후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임을 알았다.듣기로는 봄이 시작되면 영청 후작부의 사건도 완전히 매듭지어질 예정이었다. 지금 태후는 황후를 위협하고 있었다. 영청 후작부를 건드린다면 태후 역시 심씨 가문을 옭아맬 명분을 찾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불씨로 이용될 사람이 바로 손보경 자신이었다.그제야 손보경은 심씨 가문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하는 이유를 뼈저리게 깨달았다.지난 몇 달 동안 태후는 끊임없이 서신을 보내 심씨 가문을 탄핵할 구실을 마련하라고 재촉했다. 심지어 모반을 꾀한 것처럼 꾸민 서신까지 만들어 심한율의 서재에 몰래 가져다 놓으라고 했다.그러나 심한율은 손보경을 경계하여 서재에는 한 발짝도 들이지 않았다. 설령 기회가 있었다 해도 손보경 자신이 두려워 차마 실행하지 못했을 것이다.일이 뜻대로 성사된다면 심씨 가문에는 모반이라는 대죄가 씌워진다. 그렇게 되면 자신 역시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태후는 몇 번이고 반드시 무사하게 지켜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정말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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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4화

황후는 태자와 계연수가 함께 들어오는 모습을 보더니 미소를 띠며 물었다.“앞전의 일은 모두 끝났느냐?”강현은 황후 앞으로 다가가 예를 갖추며 답했다.“네, 끝났습니다. 부황께서는 외숙부와 함께 어서재에서 의논하실 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쪽에도 함께 오시겠다고 하셔서, 제가 먼저 와 모후께 말씀드리고 차와 다과를 준비해 두려 했습니다.”황후는 곁에 있던 여관에게 눈짓해 준비를 시킨 뒤, 다시 강현을 바라보았다.“너는 어서재에 함께 있지 않았느냐?”강현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외숙부께서 말씀하시길, 개춘 후 영청 후작부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관한 일이니 먼저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끼어들 일이 아니라고 하셨지요.”황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외숙부의 말이 옳다. 너는 이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하더라도 옳은 선택이 되기 어려울 터이니, 차라리 모른 척하고 묻지 않는 것이 가장 나은 방법이다.”그러고는 계연수에게 시선을 돌렸다.“몸은 좀 괜찮아졌느냐?”계연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조금 나아졌습니다.”황후는 다시 사람을 시켜 청현환 몇 알을 가져오게 했다. 그러고는 작은 상자에 담긴 약을 계연수의 손 위에 올려 주었다.“겨울에는 날씨가 차서 따뜻한 방 안에 오래 머물면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쉽단다. 나도 젊었을 때는 이런 증상이 있었지. 지금은 내가 추위에 익숙해져서, 하루 종일 있어도 답답하지 않단다.”계연수는 손에 놓인 작은 상자를 내려다보았다.황후가 자신에게 점점 더 깊은 호의를 베풀고 있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심서준의 아내이기에 베푸는 배려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황후는 자신을 남이 아닌 가족으로 대하고 있었다. 그 따뜻한 변화는 계연수의 마음에도 조용히 와닿았다.그러나 그 평온한 순간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밖에서 궁인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폐하께서 드십니다.”계연수는 순간 정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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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5화

황후는 계연수와 심서준이 돌아갈 채비를 하자 태자에게 두 사람을 배웅하라 이르고, 궁인들에게는 등롱을 밝혀 앞길을 비추게 했다.두 사람이 떠난 뒤, 황후는 황제에게서 풍기는 짙은 술 냄새를 맡고 걱정스레 물었다.“폐하, 오늘도 술을 많이 드셨습니까?”그러고는 곁에 있던 상궁에게 해장탕을 가져오라 일렀다. 황제는 눈앞의 황후와 그녀가 내민 그릇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말없이 받아 들었다.“짐은 오늘 밤 이곳에서 묵겠다.”뜻밖의 말에 황후의 눈빛에 놀라움이 스쳤다.젊은 시절, 두 사람의 금실은 더없이 깊었다. 그때 황제의 곁에는 오직 황후 한 사람뿐이었다. 후궁을 들여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쳤지만 황제는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황후가 연이어 두 황자를 낳아 지위가 굳건해진 뒤에야 비로소 후궁을 들이는 일을 고려했을 정도였다.그러나 아무리 깊었던 정이라 해도 세월이 흐르면 빛이 바래기 마련이었다. 황제의 후궁은 여전히 몇 되지 않았지만, 황제가 황후의 처소를 찾지 않은 지도 이미 오래였다.그러니 황후로서는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곧바로 궁인들을 불러 황제가 머물 채비를 갖추게 했다.*한편 계연수는 심서준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난각 안이 덥게 느껴졌건만, 찬 밤공기를 맞으며 한동안 걸은 탓인지 이제는 온몸에 한기가 스며들었다.손에 쥔 화로도 일찌감치 온기를 잃어 손가락 끝까지 차갑게 식어 있었다.심서준은 계연수의 손을 잡았다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끝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말없이 그녀의 두 손을 품속에 넣어 따뜻하게 감싸 주었다.계연수에게서는 은은한 매화 향과 달큼한 과실주의 향기가 한데 어우러져 풍겼다. 술기운에 발그레해진 얼굴과 부드럽게 풀린 눈매가 더없이 곱고 사랑스러웠다. 심서준은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만히 맞댄 채, 애틋함이 밴 한숨을 나직이 내쉬었다.부저로 돌아온 두 사람은 목욕으로 차가워진 몸을 녹였다. 이윽고 침상에 나란히 누운 뒤, 계연수는 오늘 밤 황후에게 들은 이야기를 심서준에게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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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6화

심서준의 목소리는 느릿하고 차분했다. 나직하게 이어지는 말에는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사람 특유의 침착함이 배어 있었다. 계연수는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는 동안 가슴을 짓누르던 불안이 조금씩 풀려나가는 것을 느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음 한구석이 못내 뒤숭숭했지만, 이제는 그의 품에 몸을 맡긴 채 편안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심서준은 계연수를 품속으로 한층 깊이 끌어안았다. 맞닿은 몸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서늘했던 마음까지 천천히 녹여 주었다. 그는 그녀의 미간에 입을 맞춘 뒤, 눈가와 뺨을 따라 부드럽게 내려가더니 마침내 붉은 입술을 가만히 머금었다.그 다정한 입맞춤에는 말로 다 전하지 못한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자신이 언제나 그녀의 앞을 지키고 있을 거라고 속삭이는 듯했다.*한편, 부저로 돌아온 손보경은 처소에 발을 들이자마자 시어머니인 만씨의 부름을 받았다.이미 밤이 깊어 바깥은 적막에 잠겨 있었지만, 만씨는 아직 의관도 풀지 않은 채 방 안의 상석에 앉아 있었다. 탁자 위 촛불이 간간이 흔들릴 때마다 굳게 다문 입매와 어두운 낯빛 위로 짙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손보경을 기다리는 동안 한 번도 자리를 뜨지 않은 듯, 방 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다.손보경은 만씨 앞으로 다가가 눈을 내리깔고 공손히 문안을 올렸다.만씨는 그런 며느리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단정하게 고개를 숙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더욱 답답해졌다. 오늘 손보경이 궁에 다녀왔다는 사실은 날카로운 가시 하나가 박힌 듯 줄곧 마음을 찔렀다. 태후를 만나 심씨 가문에 관해 무슨 말이라도 꺼냈을까 염려스러웠다.손보경이 입궁한 뒤, 만씨는 이미 집안의 어른들과 이 일을 의논해 두었다. 대감의 뜻도 분명했다. 지금은 영청 후작부의 사건이 매듭지어지는 중요한 시기였다. 만에 하나라도 뜻밖의 변고가 생기는 일을 막으려면 당분간 손보경을 부저 안에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만씨는 한동안 손보경을 바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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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7화

마음속에서 타들어 가는 고통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었다. 곁에는 의지할 혈육조차 없었으니, 그 모든 괴로움을 홀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손보경 역시 이 팽팽한 틈바구니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그녀는 손안에 힘을 주어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얼굴에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평온하게 대답했다.“태후마마께서는 그저 집안의 소소한 일들을 물으셨을 뿐입니다.”그 말을 듣는 순간, 심한율의 눈 깊은 곳에 희미한 실망이 스쳤다. 워낙 짧은 순간이라 손보경은 알아차리지 못했다.심한율은 한때 손보경에게 마음이 움직인 적이 있었다. 만약 그녀가 태후의 속셈을 솔직히 털어놓았다면, 자신도 마음을 열고 이 여인을 받아들이려 노력했을 것이다.어찌 되었든 손보경은 이미 그의 부인이었다. 부부간의 정리로 보나 도리로 보나, 어려서부터 익혀 온 가르침으로 보나 심한율은 그녀를 박대할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손보경은 여전히 태후의 사람이었다.어쩌면 지금도 태후와 함께 심씨 가문을 해칠 계책을 꾸미고 있을지 몰랐다. 그런데도 손보경은 끝내 단 한마디의 진실조차 털어놓지 않았다.심한율은 더 묻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곁을 스쳐 지나가자 옷자락이 가볍게 흔들리며 바람을 일으켰다. 몇 걸음 옮기던 그는 잠시 멈춰 선 채 손보경에게 말했다.“일찍 쉬거라. 내일 아침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절에 가서 요양하도록 하고.”손보경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부군께서는 오늘 밤 머물지 않으십니까?”심한율은 끝내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아무런 대답도 없이 처소를 나섰다.차가운 밤바람이 옷자락을 파고들었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해 문득 발길을 늦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등불이 켜진 처소는 고요했고, 희미한 불빛만이 닫힌 창호 너머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그때 어둠 속에서 호위 하나가 소리 없이 다가왔다.심한율이 목소리를 낮추어 명했다.“내일부터 사람을 붙여 한시도 눈을 떼지 말거라. 그녀가 절 밖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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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8화

계연수는 이 시각에 황제가 매원에 나타날 줄은 미처 몰랐다. 눈발 너머로 선명한 명황색 옷자락이 가까워지자, 그녀는 정여미와 함께 황급히 몸을 낮추어 문안을 올렸다.황제는 두 사람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은 계연수 곁에 피어난 원앙매에 잠시 머물렀다. 하나의 꽃받침에서 두 송이가 나란히 피어나는 까닭에 원앙매라 불리는 꽃이었다. 소복이 내려앉은 흰 눈 아래, 맞붙어 핀 두 송이의 매화가 찬 바람에 가볍게 흔들렸다.이윽고 황제는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는 계연수와 정여미를 차례로 훑어본 뒤 일어나라 명했다.“짐은 행매를 가장 좋아하니, 심씨 부인은 행매를 그리면 될 것이다.”계연수는 시선을 내리깔고 공손히 대답했다.“폐하의 분부를 받들겠습니다.”그녀의 눈길은 시종 황제의 얼굴까지 올라가지 못한 채, 눈 위로 길게 드리워진 명황색 옷자락에만 머물렀다.황제가 지닌 기세는 심서준과 견주어도 조금도 뒤지지 않았고, 목소리에도 온화함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오랜 세월 만백성 위에 군림해 온 자만이 지닐 수 있는 위엄이 말 한마디와 작은 몸짓 하나하나에 깊이 배어 있었다. 그 앞에 서 있자 차가운 바람과는 또 다른 서늘함이 등줄기를 스치는 듯했다.잠시 후 황제가 다시 물었다.“이곳의 매화가 마음에 드느냐?”계연수는 곧바로 대답했다.“예, 신첩도 무척 좋아합니다.”황제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마음에 든다면 몇 가지 꺾어 가져가거라.”계연수가 황은에 감사를 표하려 다시 무릎을 굽히자, 황제는 손을 가볍게 내저어 예를 만류했다. 그러고는 더 말하지 않은 채 두 사람 곁을 지나 눈 내리는 매화 숲 너머로 걸어갔다. 애초에 잠시 들렀을 뿐인 듯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황제의 모습이 눈발 속으로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계연수와 정여미의 굳어 있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차갑게 식은 숨이 그제야 길게 흘러나왔다.정여미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오늘은 운이 좋으시네요. 이 시각에 부황을 뵙는 일은 좀처럼 없거든요.”그녀는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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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9화

황후의 말에는 계연수가 섣불리 답을 보탤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황후의 말벗이 되어 한동안 담담히 이야기를 나누었고, 점심 수라까지 함께한 뒤에야 궁을 나섰다.그런데 궁문을 막 나서던 순간, 문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서 있는 심서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 모습을 보는 순간, 계연수의 가슴 한구석이 또다시 조용히 흔들렸다.아마 태후가 이 시기에 자신을 노릴까 염려해서였을 것이다. 지난 몇 달 동안은 계연수가 어디를 가든 심서준은 한 번도 빠짐없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이제는 그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상이 되어 있었다.문득 그녀는 생각했다. 언젠가 심서준이 그저 일이 바빠 나오지 못하는 날이 온다면, 이유를 알면서도 마음 한편이 허전하고 서운해질 것 같다고.사람은 결국 익숙함이라는 것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는 모양이었다.마차에 오르자마자 계연수는 심서준의 품에 몸을 기댔다. 그제야 잔뜩 긴장했던 몸에서 힘이 스르르 풀려나갔다.그녀는 궁에 들어가는 일이 조금도 좋지 않았다.집으로 돌아가면 아무리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도 이미 익숙한 공간이니 차분하게 하나씩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궁은 달랐다. 말 한마디, 걸음 하나까지도 예법을 살펴야 했고,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곳이었다.계연수는 눈을 감은 채 심서준의 품에 더 깊이 몸을 묻었다. 나른한 한숨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역시 그의 품은 따뜻했다.심서준은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쓸었다. 차갑게 식은 볼이 손끝에 닿자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돌아가면 한숨 자거라 아직 못 끝낸 일은 미뤄 두고, 방 어멈과 내가 거둬들인 관사들에게 맡기면 된다.”원래부터 계연수는 부지런한 성정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자리에 있는 이상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왔을 뿐이었다. 더구나 겨울만 되면 몸도 마음도 한층 게을러지곤 했기에, 심서준의 말은 오히려 바라던 제안이었다.“알겠습니다.”계연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그 느릿하고도 순한 대답에 심서준은 입가를 살짝 휘어 웃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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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0화

계연수는 용춘에게 물러나 있으라는 눈짓을 보냈다.아이 소식이 없다는 말은 고하운만 꺼낸 것이 아니었다. 심서준과 혼인한 지도 어느덧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여태 태기가 없으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편이 오히려 이상했다.일전에 태의가 찾아와 진맥한 적도 있었지만,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 계연수 역시 조급해하지 않았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몸을 돌보다 보면 언젠가는 자연스레 소식이 찾아올 터였다.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런 일은 인연이 닿아야 하는 법이다. 어쩌면 머지않아 소식이 올지도 모르니, 네가 걱정할 일은 아니구나.”지나칠 만큼 평온한 계연수의 얼굴을 바라보던 고하운은 입가의 미소가 잠시 굳었다.지금 자신이 사촌 언니보다 나은 것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기껏해야 자신이 먼저 아이를 가졌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정작 계연수는 그 사실을 조금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고하운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저와 사촌 언니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잖아요. 그래서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저도 언니가 걱정되어서 그래요.”계연수는 할 말이 있으면서도 선뜻 꺼내지 못하는 고하운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우스운 마음이 들었다.“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거라.”그러자 고하운이 계연수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요즘 심 후작께서 언니 처소에 잘 들지 않으신다는 말이 있던데… 그래서 아직 아이가 생기지 않는 거예요?”계연수는 들고 있던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누가 그런 말을 하더냐?”고하운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밖에서 들었어요.”“밖의 누구에게?”계연수의 거듭된 물음에 고하운은 손에 쥔 손수건을 단단히 움켜쥐었다.“잘 기억나지 않아요.”그렇게 대답하면서도 고하운의 시선은 집요하게 계연수의 눈매를 좇았다.사실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고하운이 제멋대로 짐작한 것에 불과했다.계연수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든, 심서준의 총애를 잃은 것이든,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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