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맨스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 Chapter 1071 - Chapter 1080

All Chapters of 가짜 결혼, 진짜 신분: Chapter 1071 - Chapter 1080

1092 Chapters

제1071화

“자기야,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바로 처리하러 나왔어. 아까는 얘기할 겨를도 없었네. 먼저 집에 가서 기다려 줘.”“도운 씨, 어떻게 아무 말도 없이 절 혼자 두고 갈 수 있어요...”“미안해. 이번엔 내가 잘못했어. 집에 가서 제대로 설명할게.”이서는 가슴이 답답해져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전화가 먼저 끊겼다.이도운에게 이런 대접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언제나 이해해 주고 배려했더니 나를 만만하게 보는 걸까?’휴대전화를 쥔 채 한참을 서 있어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평소에는 감정 기복이 크지 않았지만 지금은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이서는 운전 기사에게 집으로 가자고 하지 않았다. 대신 혼자 해원시에서 가장 번화한 술집 거리로 향했다.Y국에서도 스트레스가 쌓이면 친구들과 가볍게 술을 마시곤 했다.하지만 해원시에는 의지할 사람 하나 없어 기분이 좋지 않아도 혼자일 수밖에 없었다.이서는 별도의 룸이나 테이블을 잡지 않고 바에 앉아 달콤한 칵테일을 연달아 마셨다.그런데 아무리 달콤한 술을 마셔도 달게 느껴지지 않았다.‘잠꼬대는 원래 아무 말이나 하는 거잖아.’‘집에 가서 제대로 설명할게.’‘가짜 결혼을 하고, 다른 여자랑은 진짜 결혼해서 아이까지...’‘...’그 말들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맴돌았다.해원시로 돌아온 뒤 이도운이 달라졌다는 건 사실 느끼고 있었다. 예전처럼 온화하게 이서에게만 집중하지 않고 점점 초조하고 불안정해졌다.이서는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급해서 그렇다고 여기며 이해해 주었다.하지만 이런 이야기까지 듣고서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그렇다고 자신과 이렇게 잘 맞고 오직 자신만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던 남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을 수도 없었다.“미녀분, 혼자 왜 이렇게 청승맞게 술을 마셔요?”갑자기 능글맞은 남자의 목소리가 상념을 끊었다. 한참 전부터 이서를 지켜보던 남자가 술이 제법 들어간 걸 확인하고서야 옆 의자를 빼 앉았다.이서는 무시하고 계속 술을 마셨다.남자는 피식
Read more

제1072화

“넌 뭔데 끼어들어? 네가 뭔 상관이야?”남자는 화가 나 젊은 남자에게 주먹을 휘둘렀지만 상대는 날렵하게 몸을 피했다.젊은 남자는 싸움에 제법 익숙했다. 상대의 두 손목을 손쉽게 붙잡고 다리를 걸어 차자 남자가 순식간에 무릎을 꿇었다.소란이 커지자 이서도 놀라 비명을 질렀고, 술집 직원들이 달려와 둘을 떼어 놓았다.매니저가 나서서 이서에게 정중히 사과하고 안전한 곳으로 안내했다. 싸운 두 사람은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했다.이서는 멈칫하다 아까 도와준 젊은 남자는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서로 싸우기는 했지만 그는 자신을 도와주려다 휘말린 것뿐이었다.이서는 지갑을 열어 돈을 꺼냈다. 남자가 곤란해지지 않도록 도울 생각이었다.하지만 매니저가 서둘러 말렸다.“아, 그분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이 가게의 공동 사장님이나 마찬가지거든요.”그러고는 매니저가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때 이도운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시간을 보니 벌써 늦은 밤이었다.하지만 이서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끄고 술집에서 조금 더 기다렸다.소란을 피운 남자가 끌려나가고 나서야 젊은 남자가 다시 나타났다.“벌써 간 줄 알았는데.”남자가 맞은편에 앉더니 탁자에 놓인 칵테일을 한 잔을 집어 단숨에 마셨다.이서는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어두운 조명 아래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드러났다.꽤 잘생긴 바람둥이 같은 인상이었다.“저기요, 제가 술을 사 드린다고 한 적은 없는데요.”“술 사 줄 생각도 없으면서 이렇게 오래 기다렸어요?”남자가 가볍게 웃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열린 셔츠 사이로 탄탄한 가슴 근육이 언뜻 보였다.하지만 이서는 이런 유형의 남자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그런데 오늘은 기분이 좋지 않았으니 말동무가 생기는 건 나쁘지 않았다.“여기 사장님이에요?”이서가 물었다.“그런 셈이죠. 지분을 조금 갖고 있거든요.”남자가 웃으며 품에서 명함을 꺼내 이서의 앞에 놓았다.“인사나 할까요? 주단우라고 합니다.”“주단우...”어딘가 익숙한 이름이었다
Read more

제1073화

주단우가 어깨를 으쓱했다.“사장이라지만 사실 가게나 좀 봐 주면서 먹고사는 처지죠. 여기까지 없어지면 어디 가서 일자리를 구할지도 모르겠네요.”이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을 걸친 주단우를 살폈다. 손목에는 한정판 시계, 소매에는 맞춤 제작한 단추까지 달려 있었다. 이서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주단우 씨, 농담하시는 거죠? 실직 걱정을 할 분처럼은 안 보이는데요.”이서의 시선을 따라 자기 차림새를 내려다본 주단우가 웃으며 대답했다.“아, 이거 다 빌린 거예요. 여자 꼬시려고요.”이서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눈앞의 남자가 특별히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재미있는 사람인 건 분명했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밤은 점점 깊어 갔다.같은 시각, 강지현도 서운각으로 돌아왔다.두 시간 전 강지현은 이도운을 전화로 압박해 천해 그룹이 작성한 계약서 한 부를 받아 냈다.계약서에는 이미 회사 직인이 찍혀 있었다. 앞으로 천해 그룹은 미래 그룹과의 경쟁에서 완전히 손을 떼기로 했다. 또한 이도운은 자신이 아는 공회 정보의 절반을 넘겼다.나머지 절반은 강지현이 김태하와 이혼한 다음에 주겠다고 했다.강지현은 공회와 관련된 정보를 즉시 경찰에 전달했다.임지태 사건 이후 국내 공회 세력은 완전히 소탕됐다. 국내 경찰과 국제 수사기관도 공회의 움직임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하지만 워낙 연루된 사람이 많고 조직도 철저히 숨어 움직여 수사하기가 쉽지 않았다.지금 강지현이 집중하는 대상은 주시언을 해친 일당, 바로 임지태의 옛 부하들이었다.이도운이 공회와 연결될 수 있는 건 틀림없이 엄경미 때문일 것이다. 그들 또한 강지현 쪽을 끝까지 몰아붙여 없애려는 세력이었다.육운성도 주시언을 해친 사람들을 찾고 있었지만, 주시언이 상태가 좋지 않아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려는 탓에 아직 단서조차 잡지 못했다.주시언은 지금 하원영조차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날 밤 일을 마주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강지현은 지금은 주시언이 혼자 마음을 추스를 시간
Read more

제1074화

역시 이런 곳은 밤에 와야 스트레스가 풀리는 법이다.“어땠는지 얘기해 봐요.”강지현이 담담하게 말했다.“이서라는 여자야. Y국 왕실 친척 집안의 딸이고, 현재 천해 그룹에서는 직함만 있지 실권은 없어.”주단우가 말을 마치자 강지현의 휴대전화로 사진 한 장이 전송됐다.강지현은 오늘 이도운이 동창들과 모임을 열어 새 여자 친구를 소개하리라 예상했다. 그 순간 이도운을 불러내면 두 사람 사이에 틈을 만들 수 있었다.이도운의 성격을 잘 알았다. 여자가 완전히 자기에게 빠졌다고 확신하면 행동이 점점 제멋대로 변했다.아무리 눈치 없는 여자라도 남자가 자신을 소홀히 하면 알아차리기 마련이었다. 하물며 갑자기 혼자 남겨진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주단우는 강지현에게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여자가 갈 법한 술집 밀집 지역을 추렸다.거기에 새로운 손님, 외국인, 높은 소비력이라는 특징까지 더하자 목표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주단우에게는 처음부터 계획이 있었다.바로 곤경에 빠진 여자를 구해 주는 흔하디흔한 방법이었다. 그래도 이런 접근법은 언제나 통했다.그다음에는 일부러 조금 허술하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사람처럼 행동하며 말을 걸었다.이서처럼 어리고 사회 경험이 적은 부잣집 아가씨는 사람을 너무 단순하게 판단한다. 오히려 스스로 주단우의 됨됨이를 평가하게 놔두는 편이 경계심을 풀기에 좋았다.대화가 트이고 나니 그다음부터는 더욱 수월했다.주단우는 사람을 떠보는 데 능숙했다. 그는 어렵지 않게 이서의 신원과 천해 그룹에서 맡은 역할까지 알아냈다.“얘기하다가 내가 이서 씨 같은 돈 많은 아가씨가 꼭 필요하다고 했지. 나한테 관심이 있으면 언제든 뭐든 해 드리겠다고도 했고. 그런데 의외로 원칙이 확실하더라. 약혼자가 있다면서 대신 일자리를 소개해 줄 수는 있대.”강지현이 코웃음을 쳤다. 이서가 말하는 약혼자가 이도운이라는 건 뻔했다.이미 이도운에게 단단히 홀린 모양이었다. 지금은 사랑에 푹 빠져 있을 시기였다.강지현도 한때 그 함정에 빠졌으니 이도운이 여
Read more

제1075화

강지현의 냉랭한 말에 주단우는 그제야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뭘 해야 할지 알겠어.”이서는 이미 이도운에게 세뇌당해 있었으니 강지현과 주단우가 직접 접근하면 반감을 살 게 뻔했다. 그러니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이서가 스스로 진실을 보게 만드는 게 최선이었다.“그럼 주 대표님께 맡길게요.”“내가 하는 일인데 믿어야지. 강 대표.”주단우가 장난스럽게 말끝을 늘였다.일 이야기가 끝나자 강지현도 마음이 조금 가벼워져 농담을 던졌다.“당연히 믿죠. 전 제 안목을 믿거든요. 주 대표님은 이런 일에 재능이 있어요.”“너 진짜...”빈정거림에 움찔한 주단우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물었다.“그런데 이 일, 김태하도 알아?”아무리 나쁜 남자라 해도 이도운은 한때 강지현과 사귄 사람이었다.‘남편이라면 질투하지 않을까?’강지현이 멈칫한 순간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김태하가 위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이만 끊을게요.”강지현이 서둘러 통화를 종료했다.곧 김태하가 눈앞에 섰다. 강지현의 표정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한 눈빛은 뭔가 살피는 것 같기도, 캐묻는 것 같기도 했다. 너무 뜨거워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강지현은 차마 눈을 맞추지 못하고, 얼른 한 번 쳐다보고는 웃으며 말했다.“앞으로 이렇게 늦으면 기다리지 마.”그러고는 김태하의 손을 잡으려 했다. 김태하는 손을 꼭 잡은 채 꼼짝하지 않았다.“왜 그래? 나 너무 졸려. 올라가서 자자.”강지현은 달래듯 말했지만 어딘가 건성인 말투였다.김태하를 끌어당겼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김태하가 강지현을 강하게 품속으로 끌어당겼다.김태하는 표정이 완전히 굳은 채 매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강지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김태하...”“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야? 왜 내 메시지에 계속 답을 안 해?”김태하가 목울대를 움직였다. 오랫동안 참았던 말을 마침내 낮고 또렷하게 내뱉었다.그 눈빛에 찔린 강지현이 고개를 숙였다.“말했잖아. 오늘 회사에서...”“회사에서는 진작 나왔잖아.
Read more

제1076화

“무슨 일인지 말해 주면 안 돼? 제발.”김태하가 너무 세게 껴안아 강지현이 감히 벗어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가까이 붙은 가슴에서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몸도 뜨거웠다.그토록 초조하고 불안해하면서도 김태하는 강지현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그 순간 강지현의 마음을 지탱하던 방어막이 무너져 내렸다.미세하게 떨리는 등을 보니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쓰다듬고 싶어졌다.하지만 마지막 순간, 이성이 손을 멈춰 세웠다.강지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김태하, 이러지 좀 마. 나 정말... 조금 피곤할 뿐이야.”한 마디 한 마디는 차분하고 단호했고, 사람을 절망의 나락으로 밀어 넣을 만큼 냉정했다.김태하의 몸이 또 한 번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팔에 힘이 풀리자 강지현은 망설임 없이 그를 밀어냈다.김태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강지현의 차가운 말과 행동에 허를 찔린 듯 잔뜩 찌푸린 미간 아래 낯빛이 더욱 나빠졌다.며칠째 강지현이 일부러 일찍 나가고 늦게 돌아오며 자신을 피하는 것 같아 김태하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이제 눈에는 옅게 핏발이 서 있었고 입술은 하얗게 트고 갈라져 몹시 수척해 보였다.가까이서 그런 모습을 보니 강지현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하지만 T7을 구하지 못하면 김태하의 몸 상태가 날마다 악화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강지현이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됐어. 이제 가서 쉬자.”“일부러 날 피하고 있지?”김태하는 여전히 길을 비켜 주지 않았다.“강지현, 날 속일 수 있을 거로 생각하지 마. 난 널 누구보다 잘 알아...”“세상에 다른 사람을 완벽하게 아는 사람은 없어!”강지현이 날카롭게 외쳤다.다시 올려다본 눈은 살짝 붉어져 있었지만 표정에는 짜증이 가득했다.김태하는 굳어 버렸다. 입을 열었지만 목이 꽉 조인 듯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린 채 믿기지 않는다는 듯 강지현을 바라보았다.“지현아...”“가끔은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 그런데 다른 사람이 어떻게 날 다 안다고 할 수 있어?”“네 말이 맞아
Read more

제1077화

“김태하, 아직도 내 말이 이해가 안 돼?”강지현이 모질게 말을 끊었다. 목소리는 더욱 차갑고 매정했다.“아픈 사람한테... 도움받고 싶은 사람은 없어.”김태하는 오히려 차분해졌다. 그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물었다.“아픈 사람? 네 눈에는 이제 내가 짐이 된 거야?”“김태하, 나 지쳤어. 정말 지쳤어.”강지현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나 혼자 시간을 갖고 생각을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김태하의 몸이 휘청했다. 배에 손을 댄 걸 보니 또다시 통증이 시작된 모양이었다.강지현은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김태하가 비틀거리며 옆의 술 장식장에 기대어 모서리를 짚는 게 보였다.“네 말은...”김태하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쉬어 있었다.“날... 떠나고 싶다는 거야?”강지현은 대답하지 않았다.침묵이 날카로운 칼처럼 두 사람 사이에 걸렸다.김태하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그는 입술을 꽉 깨문 채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강지현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늘 꼿꼿하던 김태하의 어깨가 축 처졌다. 고개까지 떨군 채 강지현이 곁을 지나쳐도 더는 손을 잡지 않았다.강지현은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그의 옆을 지나치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심장을 칼로 베는 것 같았다.하지만 멈출 수도, 다시 돌아볼 수도 없었다.무슨 일이 있어도 김태하를 살리기로 이미 결심했다.설령 T7을 손에 넣는다고 해도 김태하가 자신을 사랑하는 한 그는 어떤 타협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특히 이도운 같은 인간에게 굴복하는 방식이라면 더더욱 말이다.강지현과의 이혼...김태하의 자존심으로는 강지현이 자신을 희생해 구해 온 약을 받아먹을 수 없을 터였다.김태하가 못 한다면 자신이 악역을 맡으면 됐다.그 대가가 아무리 크더라도...두 사람이 영원히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더라도 말이다.“콜록, 콜록...”강지현이 멀리 가기도 전에 거센 기침 소리가 들렸다. 무시하고 가려 했지만 몇 걸음 못 가 밤을 지키던 고용인들이 놀라 달려와 김태하를 부축해 옆
Read more

제1078화

“지현아.”김태하는 약한 목소리로도 한없이 다정하게 말했다.“내가 잘못했어.”강지현은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이내 고개를 작게 저었다.“그런 생각 하지 마. 일단 쉬어.”하지만 김태하는 말을 계속했다.“네가 그렇게 힘든 줄 몰랐어. 난 우리 약속만 생각했거든... 무슨 일이 생겨도 함께 이겨 낼 수 있다고 했던 네 말만 기억했어... 절대 날 떠나지 않겠다고 했던 말도.”“김태하...”“널 탓하는 게 아니야.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어. 널 제대로 지켜 주지도 못하면서 약속을 지키라고만 했으니까. 그래서 네가 이렇게 괴로운 거야.”김태하는 두 손으로 강지현의 손을 감싸 쥐고 고개를 숙였다. 슬픈 표정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듯했다.강지현은 목이 꽉 막힌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김태하가 천천히 강지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뜨겁고 촉촉한 숨결이 느껴졌다.“약속할게. 앞으로 널 걱정하게 하거나 곤란하게 하지 않을게... 내 요구를 강요하지도 않을 테니까... 날 떠나지만 않으면 안 될까?”김태하의 목소리가 울먹임으로 떨렸다.거의 애원에 가까운 그 말은 김태하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이 아니었다.언제나 침착하고 강인하게 모든 걸 짊어지던 남자가 지금은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처럼 용서받으려고 필사적으로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강지현은 누군가 심장을 꽉 움켜쥔 것처럼 숨을 쉴 때마다 아팠다.그때 마침 의사가 달려왔다.은주희와 김무언도 함께였다.강지현은 김태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가족들도 바로 올 수 있도록 의사와 두 사람의 숙소를 가까이 배치해 뒀다.원래는 김태하가 차츰 익숙해질 시간을 준 뒤 서서히 떠날 생각이었다.하지만 지금 보니 우유부단하게 굴수록 두 사람 모두 더 큰 고통을 겪을 뿐이었다.사람들이 도착하자 강지현은 곧장 김태하의 곁에서 물러났다.김태하가 붙잡으려 했지만 손이 닿지 않았다.진찰을 마친 의사가 진통제를 추가로 처방했다. 가족들이 김태하를 돌보는 걸 확인한 강지현은 먼저 자리
Read more

제1079화

그제야 정신을 차린 김태하는 은주희의 손목을 놓고 돌아섰다.“태하야, 지현이는... 이미 떠났어.”다급해진 은주희가 결국 사실대로 말했다.강지현은 새벽에 짐을 챙겨 떠났다. 떠나기 전 은주희를 찾아와 혼자 지낼 시간이 필요하다며, 김태하를 잘 달래 주고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곁을 지켜 달라고 부탁했다.처음에는 은주희도 깜짝 놀랐다. 강지현이 하필 이런 시기에 떠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금 김태하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 강지현이라는 사실은 누구보다 강지현이 잘 알고 있을 터였다.하지만 아무리 이유를 물어도 둘 모두를 위한 선택이라는 말만 반복했다.강지현도 임신 중인 몸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은주희는 아들만큼이나 강지현도 안쓰러웠다.그래서 말 못 할 사정이 있든, 정말로 김태하의 곁을 지키는 게 버거워졌든 강지현이 내린 결정을 존중하기로 했다.두 아이의 인품을 믿고 있었다.김태하는 가슴이 철렁했다. 이미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은주희의 말을 듣자 눈에 두려움이 번졌다.“떠났다니... 무슨 뜻이에요? 어디로 갔는데요?”은주희는 가슴이 아팠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지현이가 혼자 있고 싶대. 넌 치료 잘 받으라고 했고. 어디로 갈지는 말 안 했어.”김태하는 넋이 나간 듯 서 있다가 방으로 뛰어 들어가 옷장과 서랍을 거칠게 열어젖혔다.물건은 대부분 그대로 있었지만 자주 입는 옷 몇 벌이 사라졌다.김태하가 거의 미쳐 가는 것처럼 보이자 은주희가 걱정스러워서 달래려 했다. 하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김태하가 어깨를 붙잡았다.“떠난 지 얼마나 됐어요?”“새벽에 갔어...”은주희가 조용히 대답했다.“왜 안 말렸어요?”김태하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격한 감정에 입을 확 틀어막았다.은주희가 놀라 부축하려 하자 또 팔을 붙잡고 캐물었다.“어머니는 떠날 걸 알고 계셨잖아요. 왜 저를 깨우지 않았어요...”“강지현은 자기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야. 떠나겠다는데 누가 강제로 막을 권리가 있어!”김무언은 보다 못해 김태하의
Read more

제1080화

“여보! 그만 해요!”은주희가 즉시 김무언을 제지했다.말이 너무 심했다. 몸과 마음이 모두 다친 김태하가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가혹했다.김무언도 말이 심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다가가서 달래려는 순간 김태하가 나직하게 한마디 내뱉었다.“나가요.”목소리는 차분해졌지만 두 사람에게 등을 돌린 채 한 발짝도 다가오지 말라는 듯했다.김무언은 분이 풀리지 않아 한마디 더 하려 했다. 이번에는 은주희가 먼저 입을 틀어막고 필사적으로 눈짓했다.전에 아내에게 했던 약속을 떠올린 김무언은 결국 물러섰다.은주희가 아들을 다정하게 달랬다.“태하야, 일단 진정하자. 건강이 가장 중요해. 네 몸이 완전히 망가지면 나중에 지현이와 뱃속 아이를 어떻게 보려고 그래?”“...”김태하는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커다란 몸을 덮은 어두운 기운에 보는 사람까지 오싹해질 정도였다.지금은 억지로 설득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고 은주희는 김무언을 데리고 방에서 나왔다.방 안이 다시 조용해지자 김태하가 갑자기 힘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다.침대 발치에 몸을 기대자 위에서 은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심한 통증은 아니었지만 속을 태우는 듯 아팠고 구역질까지 치밀었다.‘그래. 강지현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맞는 말을 한 거야. 내가 무능한 탓이야. 이 쓸모없는 몸뚱이 때문이야.’김태하는 주먹을 꽉 쥐고 아랫배를 힘껏 눌렀다. 더는 깊이 누를 수 없을 만큼 세게 눌러 목에 핏줄이 터질 듯 솟아오르고서야 멈췄다.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은주희는 서운각을 몇 번이고 드나들며 강지현이 돌아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김태하는 종일 방에 틀어박혀 의사도 들이지 않고 식사도 전혀 하지 않았다.은주희는 강지현에게 전화를 걸까 망설였다.지순옥과 김윤석도 여러 차례 문을 두드린 끝에야 겨우 들어가 얼굴을 볼 수 있었다.두 어른의 체면 때문인지 내내 누워 있던 김태하도 일어나 가족들과 간단히 저녁을 먹었다.식사 중에 김무언은 감히 많은 말을 하지
Read more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