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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화

강지현은 살짝 놀란 눈치였다.“할머니...”“다 안다. 아까 식탁에서 그 녀석 얘기 나오니까 너 음식도 제대로 못 먹더라. 여기선 괜히 숨길 필요 없어. 누굴 걱정하는 게 뭐가 이상하니. 게다가 너희 곧 부부 될 사이잖아. 아내가 남편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안 그래?”그 말에 강지현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그녀는 얼른 몸을 일으키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아유, 그만 놀리세요. 그냥 태하 씨가 너무 무리할까 봐 그래요. 몸 상하면 안 되잖아요.”“알았다, 알았어. 그만 놀리마. 할미가 지금 바로 전화해 볼게.”지순옥은 강지현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휴대폰을 꺼내 김태하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연결음이 울리자, 강지현은 무의식적으로 옷매무새를 고쳐 잡았다.한참이 지나서야 영상이 연결됐다. 화면 너머로 낮게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할머니, 이렇게 늦게 무슨 일이세요?”김태하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그동안 강지현과 통화할 때는 늘 짧고 담담해서 잘 몰랐지만, 지금은 확연히 이상했다. 단순히 쉰 소리가 아니라 코막힘까지 섞인, 무겁게 잠긴 음성이었다.“우리 손자, 어디 아픈 거 아니냐? 안색이 안 좋아 보이네?”지순옥은 화면을 보자마자 이상함을 눈치챘고, 강지현도 체면이고 뭐고 할 겨를 없이 곧장 곁으로 다가섰다.화면 속 김태하는 큰 체구를 의자에 기댄 채 앉아 있었다. 얼굴은 유난히 창백했고 손바닥을 코 밑에 가볍게 대고 있다가 몇 번 기침을 터뜨렸다.강지현이 화면에 비친 순간,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는 갑자기 몸을 바로 세웠고 그 바람에 기침이 더 심해졌다.“태하야, 괜찮아?”이렇게 힘없이 약해 보이는 그의 모습은 처음이라, 강지현의 가슴이 저릿하게 아려왔다.지순옥이 얼른 상황을 설명했다.“오늘 내가 지현이를 불러서 같이 밥 먹었어. 네 쪽에서 일 터졌다는 얘기 듣고 얼마나 걱정하던지. 너도 참, 아무리 바빠도 안부는 전해야지. 너희 이미 약혼한 사이야. 지현이는 네 약혼녀라고. 괜히 걱정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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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2화

강지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것저것 물었고, 그 다정한 질문들이 이어질수록 김태하는 점점 버티기 힘들어졌다.“지현아.”그가 문득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나 정말 괜찮아.”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강지현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이 너무 지나치게 간섭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미안해. 내가 말이 너무 많았지. 괜히 부담됐을 수도 있겠다.”“그래도 이 말은 해야겠어. 태하야, 몸이 제일 중요해.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먼저야. 너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건... 난 못 보겠어. 왜냐하면...”말을 하다 말고, 강지현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왜?”남자의 목소리가 한결 낮아졌다. 물기 어린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잔뜩 찌푸려진 미간을 놓치지 않고 붙들었다.“왜냐하면...”강지현은 입술을 깨물었다가 쓸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덧붙였다.“네가 아프면 내 마음도 아프니까.”마지막 말은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지만 김태하는 또렷이 들었다.“지현아...”그의 쉰 목소리가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 젖은 현 하나가 그녀의 가슴을 살짝 건드리며 울렸다.“아픈 남자한테 그런 말을 하는 게 무슨 뜻인지, 알고는 있어?”강지현은 잠시 말을 잃었다. 대답하려던 순간, 김태하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지현아, 네가 보고 싶어.”거칠게 내려앉는 그의 숨소리. 화면 너머인데도 뜨거운 숨결이 귓가에 닿는 것처럼 느껴졌다.김태하는 문득 강지현이 곁에 있었으면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옆에 있어 주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간절히 그리워해 본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그 감정이 낯설어, 김태하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태하야, 지금 어디야?”뜻밖에도 강지현이 곧장 물었다.“금윤에 있어... 콜록...”입을 떼자마자 다시 목이 불편한 듯, 그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미간을 찌푸렸다.숨을 고른 뒤 옅은 미소를 지었다.“이렇게 걱정해 주니까 고맙네. 나 그냥 감기야. 약도 먹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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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화

“최 비서...”김태하가 쉰 목소리로 불렀다.목은 여전히 아팠다. 어젯밤 내내 서재에서 일했던 건 기억이 나는데, 대체 언제 방으로 들어와 누웠는지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태하야!”이불을 젖히고 막 일어나려던 순간, 시야에 익숙한 그림자가 들어왔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잠시 멍해졌다.‘헛것을 보는 건가...’“지현아?”“응. 열도 막 내렸는데 움직이지 말고 누워 있어.”강지현은 담백한 죽 한 그릇을 들고 침대 곁으로 다가와 내려놓았다. 그리고 곧바로 그의 팔을 붙잡아 다시 침대에 눕혔다.키도 크고 체격도 있는 김태하는 몸이 쇠약해도 강지현이 감당하기엔 벅찼다. 서로 몸이 엇갈리는 순간, 그가 살짝 힘을 주자 그녀는 순식간에 그의 품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강지현은 고양이처럼 그의 넓고 단단한 가슴 위로 쓰러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그대로 마주쳤다.김태하의 눈동자에는 엷은 안개가 낀 듯했고 충혈된 기운이 어른거렸다. 반면 강지현의 눈은 밤하늘에 떨어진 별처럼 반짝였고 뺨에는 옅은 홍조가 번졌다.“미안.”혹시라도 그를 아프게 했을까 봐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쥐고 있었다.“여긴 어떻게 왔어?”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귓가와 목덜미를 스치자, 온몸이 저릿하게 떨렸다.“걱정돼서 왔어. 네 프로젝트 데이터는 내가 익숙하잖아. 일부는 내가 대신 처리해 뒀어. 조금 더 쉬어도 일정엔 지장 없을 거야.”강지현이 조용히 말했다.여전히 혈색이 돌지 않는 그의 얼굴과 미간에 남은 잔주름이 눈에 밟혔다.어젯밤 통화를 끊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최동윤에게 전화를 걸어 상태를 다시 물었다. 그제야 단순한 감기가 아니라 며칠째 열이 나면서도 일을 붙들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그래서 바로 금윤으로 내려왔다.새벽에 도착했을 때 김태하는 이미 체력이 바닥나 책상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최동윤과 함께 그를 방으로 옮겨 눕히고, 열이 내린 뒤에야 남은 일을 대신 처리했다.그 말을 듣자 김태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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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4화

“최 비서님이 그러시는데, 너 며칠째 제대로 못 먹었다면서. 목 아프면 우선 이런 담백한 것부터 먹어. 좀 나을 거야.”“...고마워.”입술 앞으로 내민 죽을 보며 김태하는 잠시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목울대가 부자연스럽게 한 번 움직였다가, 결국 몸을 살짝 기울여 숟가락을 물었다.따뜻한 죽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눈앞에 비친 강지현의 다정한 얼굴이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우자, 심장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그가 한 그릇을 다 비우자 그녀는 그제야 안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김태하가 더 잤으면 했으니까.그때 그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요즘 떨어져 지내면서 내 생각은 좀 했어?”쉰 목소리인데도 묘하게 사람을 무장 해제시키는 힘이 있었다.“태하야...”강지현은 얼굴이 달아올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데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기도 전에 김태하가 낮게 덧붙였다.“보고 싶은 사람을 바로 볼 수 있다는 거, 생각보다 좋네.”점점 깊어지는 그의 눈빛에, 강지현은 심장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온몸도 화끈 달아올랐다.“지현 씨, 이젠 공항 가셔야 합니다.”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최동윤이 들어왔다.시간을 알려 주러 온 건데,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속삭이는 장면을 보고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괜히 시선을 둘 데가 없어 입술만 꾹 다물었다.“아, 맞다. 나 가야겠다. 태하야, 푹 쉬어.”강지현은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일어섰다.문 앞까지 갔다가 그녀는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고개를 반쯤 돌려 조용히 말했다.“급하게 온 거긴 한데 나도 마찬가지야.”말을 마치고는 부끄러운 듯 서둘러 방을 나갔다.김태하는 고개를 돌려 최동윤을 바라봤다.“뭐 해. 공항까지 데려다줘.”“네!”최동윤은 정신을 차리고 급히 물러났다.김태하는 강지현의 당부가 떠올라 일어나려던 몸을 다시 침대에 기대었다.방 안에는 아직도 그녀의 은은한 향기가 남아 있는 듯했다. 옆에 놓인 빈 그릇을 보며,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가끔은 아픈 것도 나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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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화

겉으로는 차분한 목소리를 유지했지만 이도운의 속은 이미 어지러워지고 있었다.권미숙은 조용한 삶을 좋아했다. 몇 년째 인근 도시 외곽, 산을 등진 저택에서 홀로 지내고 있었다. 명절이 아니면 가족의 방문조차 사양할 정도였다.그런 그녀에게서 직접 전화가 온다는 건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게다가 이씨 가문에서 강지현을 그나마 인정해 준 사람은 권미숙뿐이었다.예전에 이도운이 강지현을 집으로 데려왔을 때, 가족들의 반대가 거셌다. 그 와중에 유일하게 앞장서서 결혼을 밀어붙인 사람이 바로 권미숙이었다.이철호가 세상을 떠난 뒤, 그녀는 이씨 가문을 떠나기 전 두 사람의 손을 꼭 잡고 엄하게 말했다.“지현이는 명문가 아가씨도 아니고, 뒤에서 받쳐 줄 가족도 없지만 너는 절대 그 아이를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 할미가 살아 보니 알겠더라. 요즘 세상에 지현이처럼 정 많고 일 잘하는 아이는 드물어. 꼭 소중히 여겨라. 너희는 분명 오래 갈 거다.”지금 그 말을 떠올리니, 이도운은 괜히 마음이 켕겼다.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허전함까지 스쳤다.“소문을 좀 들었는데, 너희 둘 사이에 무슨 일 있는 거냐?”권미숙의 목소리는 노쇠했지만 여전히 힘이 있었다.이도운은 잠시 망설이다가 답했다.“어디서 그런 말씀을 들으셨어요. 저희 잘 지내고 있습니다.”“잘 지내는데 지현이가 왜 집을 나간 거야?”얼버무리려던 말이 목구멍에서 막혔다.할머니가 생각보다 알고 있는 게 많은 것 같았다. 결국 그는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그냥 작은 다툼입니다. 부부가 싸움 한 번 안 하겠어요? 지금은 많이 풀렸고 며칠이면 괜찮아질 겁니다.”“지현이는 함부로 화낼 아이가 아니다. 전화로는 안 되겠다. 내일 집으로 갈 거니까 그때 자세히 얘기해. 지현이도 부르고. 내가 중간에서 말 좀 해 보마. 부부가 밤 넘겨 싸우는 법은 없다. 요즘 젊은 애들은 감정 다루는 법을 몰라.”“할머니, 괜찮습니다. 저희가 알아서...”말을 잇기도 전에 권미숙은 단호하게 통화를 마무리했다.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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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화

강지현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이도운의 메시지에 답장을 보냈다.[나 일정 있어. 할머니 기다리시게 하지 마.]거절은 이미 익숙했다. 그래도 ‘할머니’라는 말에 답이 온 것만으로도 이도운은 곧장 여러 통의 메시지를 더 보냈다.어쩌면 권미숙의 방문이 두 사람 사이를 다시 풀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강지현은 처음 보낸 답장 하나뿐이었다. 그 뒤로 이도운이 무슨 말을 더 보내든, 답은 오지 않았다.다음 날 정오, 권미숙은 약속한 시간에 맞춰 이도운의 별장에 도착했다.이도운은 미리 가정부에게 집 안을 정돈하라 지시해 두었고 할머니를 맞을 준비도 모두 끝낸 상태였다.“지현이는?”현관에 들어서자마자, 1년 만에 보는 손자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강지현부터 찾았다.“할머니, 말씀드렸잖아요. 지현이는 요즘 집에 없어요. 요즘 많이 바빠서 밥 먹으러도 못 와요. 일단 좀 쉬세요. 식사하시고 천천히 얘기해요.”아이 달래듯 부드럽게 말하며 눈짓을 하자, 가정부가 경호원이 들고 있던 짐을 받아 방으로 옮겼다.강지현이 아직 마음을 풀지 않은 건 사실이었지만 이도운은 딱히 조급하지 않았다.그는 강지현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부모 없이 자란 아이였기에, 어른에게는 누구보다 공손했다. 더구나 권미숙은 이 집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아껴 준 사람이었다.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하면 결국은 돌아올 수밖에 없다고 믿고 있었다.오히려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신이 더 참고 배려하는 사람처럼 보일 터였다.그럼 권미숙도 전부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진 않을 것이고 강지현 역시 언젠가는 미안해하며 돌아올지도 모른다.그런 계산을 하며 더욱 다정한 태도로 권미숙을 부축하려는 순간, 손이 거칠게 뿌리쳐졌다.“나는 오늘 지현이 보러 온 거다. 그 애 안 부르면 오늘 밥상엔 아무도 못 앉아!”강지현이 정말 집에 없다는 걸 확인하자, 권미숙의 얼굴에 분명한 노기가 어렸다.지팡이를 짚고 있었지만 누구의 부축도 받지 않은 채 곧장 2층 강지현의 방으로 향했다.이도운이 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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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7화

“전화 걸어. 내가 직접 얘기하마.”이도운의 설명이 먹혔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권미숙은 휴대폰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강지현의 번호가 눌렸고 이도운은 자연스럽게 스피커를 켰다.잠시 후, 통화가 연결됐다.“여보세요? 할머니?”권미숙의 번호를 보고 강지현은 전화를 받았다.이씨 가문의 일로 할머니까지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권미숙은 연세도 많고 심장도 약했다. 혈압도 높아 의사에게 감정이 격해지는 게 가장 위험하다고 여러 번 주의를 들은 상태였다. 작은 화에도 큰일이 날 수 있었으니까.“지현아, 오늘 집에 왔는데 왜 네가 없니? 할미 보기 싫어진 건 아니지?”강지현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권미숙의 말투는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방금 전의 날 선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그게...”강지현이 말을 꺼내려는 순간, 이도운이 재빨리 끼어들었다.“지현아, 할머니가 네가 집 나갔다는 말을 듣고 많이 걱정하셨어. 요즘 네가 많이 지쳐 있고, 잠깐 혼자 있고 싶어서 나간 거라고 말씀드렸는데도 자꾸 마음 쓰셔.”강지현은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그녀가 괜한 말로 할머니를 자극할까 걱정되는 거겠지. 동시에 자신에게 책임이 쏠릴까봐 두렵기도 할 테고.하지만 덕분에 그녀에게도 말하기 좋은 구실이 생겼다.“할머니, 도운 씨 말 맞아요. 지난 2년 동안 너무 바빴고 좀 지쳤어요. 잠깐 혼자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서요. 오늘도 밖에서 친구 만나고 있어서 바로 들어가긴 어려워요. 걱정하지 마세요.”예전과 다르지 않은, 부드럽고 단정한 목소리였다.그 말에 권미숙의 미간이 조금은 풀렸고 이도운의 표정도 한결 누그러졌다. 역시나, 강지현은 결정적인 순간엔 판을 깨지 않았다.6년을 함께 지내는 동안 그녀가 화를 낸 적이 없던 건 아니지만 정말 중요한 순간엔 늘 자리를 지켜 줬다.문득, 50% 지분이 그렇게 아깝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이 더 많이 빚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무리 그래도 꼭 집을 나가야 하니?”권미숙이 조용히 한숨을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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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화

백하린의 전화였다.이도운이 계속 연락을 주지 않자,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걸어온 것이다.이윤후까지 데려갔는데도, 이도운은 마치 모자 둘을 통째로 잊은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이도운은 전화를 받기 싫어 한 번 끊었지만 곧바로 다시 울렸다.권미숙이 눈을 가늘게 떴다.“누구냐? 왜 저렇게 계속 전화가 오지?”“회사 직원입니다. 아마 일 때문일 거예요.”이도운은 어색하게 둘러댔다.“일이면 받아라. 우리가 남이냐. 뭐가 그렇게 불편하다고.”그러다 문득 뭔가 떠올린 듯 물었다.“윤후는 어디 있니?”핏줄은 아니어도 이씨 가문의 증손자였다. 강지현을 받아들였던 권미숙에게 혈통은 더 이상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었다.“아, 할머니께서 오셨는데 시끄러울까 봐 잠깐 밖에 데리고 나갔습니다.”권미숙은 더 묻지 않고 식당으로 향했다.저녁이 되자 문수정과 이민지도 급히 도착했다.권미숙의 방문은 갑작스러웠다. 두 사람은 어제까지만 해도 여행을 떠나 있었고 그녀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돌아온 참이었다.권미숙은 이씨 가문에서 염라대왕이라 불렸다.이규진이야 회사 일 외에는 가족에게 비교적 관대한 편이었지만 권미숙은 규율이 엄격했다.그녀가 1년간 집을 비운 동안, 문수정과 이민지는 숨통이 트였다고 느꼈다. 그런데 돌아오자마자 분위기는 단숨에 얼어붙었다.인사도 채 끝나기 전에, 권미숙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지현이랑 도운이 사이에 무슨 일 있었느냐?”결국 먼저 입을 연 쪽은 이민지였다. 그녀는 곧장 불만을 터뜨렸다.“저희가 강지현을 괴롭힌 게 아니라니까요? 오빠가 너무 오냐오냐해서, 이제는 엄마랑 저 위에 올라타려 해요! 밥 한 끼 해 달라는 게 그렇게 큰일이에요? 오히려 그걸로 트집 잡아서 회사 일까지 들먹이며 사과하라지 뭐예요!”“민지야!”이도운이 날카롭게 제지했다.권미숙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방금 뭐라고 했니?”“할머니, 솔직히 그 일은 민지가 좀 지나쳤습니다.”이도운이 본능처럼 강지현을 감쌌다.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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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화

이도운도 빨리 정리하고 나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문을 여는 순간, 부드러운 몸이 그대로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하린아...”몸을 피하려던 찰나, 그녀의 입술이 얼굴을 타고 내려왔다. 그는 미처 막지 못했고 백하린은 익숙한 손길로 그의 셔츠 깃을 느슨하게 풀어 내렸다. 오늘 그녀는 비칠 듯 얇은 붉은 시스루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속옷과 스타킹까지 모두 그가 좋아하던 스타일이었다.이도운은 애써 이성을 붙들고 버텼지만 몸의 반응까지 억누르진 못했다.“이러지 마. 윤후 데려가야 해...”“아직 자고 있어. 잠깐이면 돼. 요즘 나랑은 거의 못 봤잖아...”백하린이 귓가에 속삭이더니, 말을 마치자마자 그의 입술을 그대로 막아 버렸다.최근 내내 억눌려 있던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는 결국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안아 들었고 두 사람은 문 앞에서부터 침대까지 뒤엉켰다.겉으로는 단정해 보이던 백하린은 막상 가까워지면 누구보다 요염했다. 그 대비가 늘 그를 자극해 왔다.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얼굴은 강지현이었다.강지현은 겉으로는 화려하고 도도해 보여도 막상 가까워지면 한없이 맑았다. 눈을 마주치면 차마 함부로 손대지 못하던 기억이 스쳤다.강지현이 떠오르자 오히려 더 욕망이 치솟았고 온몸의 혈관이 팽팽히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아, 아파... 도운아, 좀 살살해... 못 참겠어!”백하린이 갑자기 신음 섞인 소리를 내며 그를 밀어냈다.평소에 이도운은 그녀에게 늘 다정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손길이 지나치게 거칠었다. 그녀의 감정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마치 그녀를 그저 분풀이의 대상으로 대하듯 했다.여자가 비명을 지르자 그제야 이도운은 정신이 들었다. 자신이 백하린을 다치게 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출혈도 생각보다 심했다.“미안해. 많이 아파?”“말해 뭐 해... 너 오늘 왜 이래?”백하린은 어이가 없었다. 일어나 보려 했지만 제대로 걷기도 힘들 정도였다.이도운은 몹시 죄책감을 느끼며 그날 밤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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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화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하는 거야?”백하린은 억지로 밀어붙여 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고, 그저 코를 훌쩍이며 서운한 기색을 보였다.이도운은 요즘 머릿속에 온통 강지현 생각뿐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가 그를 정말로 강지현 쪽으로 밀어버리는 꼴이 될까 봐, 그녀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조금만 참아줘.”이도운은 백하린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말투는 다정했지만 그의 마음속엔 이미 잔물결 하나 일지 않았다.지금 그가 떠올리고 있는 사람은 여전히 강지현이었으니까.병원에서 결제할 때였다. 카드 내역을 보던 그는 의료카드에 ‘프리미엄 종합검진 패키지’가 추가돼 있는 걸 발견했다.자신이 신청한 적은 없었다. 병원에 문의해 보니, 한 달 전 강지현이 대신 등록해 둔 것이었다.예전에 그는 일이 몰려 며칠째 제대로 끼니도 못 챙기고, 접대 자리에서 과음까지 한 탓에 위경련으로 입원한 적이 있었다. 그때 강지현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이후로는 어떤 자리든 꼭 따라다니며 대신 술을 마셔 주었다. 그러다 보니 주량도 오히려 그보다 더 세졌다.그의 건강 상태를 늘 확인하겠다며, 몇 달에 한 번씩은 정기 검진도 함께 받았다.항상 그녀가 먼저 예약을 잡아 두고 그를 붙잡아 병원으로 데려가곤 했다.그 기억들이 스치자, 이도운의 가슴 한편에서 은은한 온기가 번졌다.문득, 강지현이 곁에 있던 시간이 유난히 그리워졌다....다음 날 저녁, 국회센터 연회장.전부터 따내고 싶어 하던 프로젝트 관계자들이 오늘 이곳에서 식사를 한다는 연락을 중간인에게 받고, 이도운은 서둘러 자리에 참석했다.그가 막 룸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옆쪽 VIP 룸에 연보랏빛 고운 쉬폰 원피스를 입고, 큐빅 장식이 박힌 작은 클러치를 든 강지현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오늘 오전, 지순옥에게서 전화가 왔다.김씨 가문에서 소규모 가족 모임을 연다며, 은주희의 친정 식구들이 해원시에 왔다는 것이었다.은주희의 친정 역시 국내에서 손꼽히는 대기업 집안이었지만 사업 기반은 대부분 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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