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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가짜 결혼, 진짜 신분: Chapter 111 - Chapter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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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화

김태하는 그녀를 아래층으로 데리고 간 게 아니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옥상으로 향했다.강지현은 의아했다. 한밤중에 자신을 옥상으로 데리고 가서 별이라도 보려는 건가?하지만 그 생각은 찰나에 사라졌다. 김태하는 그런 낭만적인 사람이 아니었고 또 그런 유치한 짓을 할 리도 없었다.아니나 다를까 옥상에서는 별이 보이지 않았고 대신 빌딩 가장자리에 헬리콥터 한 대가 착륙해 있었다.휘몰아치는 강풍에 두 사람의 옷자락이 날렸고 강지현은 놀라서 김태하를 바라보았다.“태하 씨... 이건?”최동윤이 헬리콥터에서 뛰어내리더니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강지현 씨, 얼른 타시죠. 타 보시면 다 알게 될 겁니다.”그는 눈가에 웃음기를 머금고 김태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모든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김태하는 아무 말 없이 어깨에 걸쳤던 외투를 벗어 강지현에게 덮어주었다.“추워요?”외투에서는 오직 남자에게서만 나는 싸늘한 기운과 은은한 침향 냄새가 묻어났다.강지현은 두 볼이 빨개지고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남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근데 우리 어디 가요? 난 아직 아무 준비도 못 했는데...”“준비할 것 없어요.”김태하가 나직이 대답했다.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이었다.이에 그녀도 고개를 끄덕이곤 더 캐묻지 않았다.헬리콥터가 이륙한 후, 김태하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는데 현재 국내 시간으로는 12시 반이었다.비행기 안에는 정성껏 준비된 저녁 식사가 놓여 있었다. 방금 데워진 따뜻한 음식은 물론이고 강지현의 취향에 맞춰 준비된 형형색색의 정교하고 예쁜 디저트까지 있었다.다만 이 늦은 시간에 디저트를 먹는 것이 그녀에게는 죄책감으로 다가왔다.“태하 씨, 이렇게까지 수고하실 필요 없는데... 그래도 너무 고마워요. 덕분에 진짜 기쁘게 보내는 것 같아요.”이 남자가 헬리콥터 안에서 실버데이를 함께 보내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꽤 창의적이고 나름 낭만적이었다.김태하는 그녀 맞은편에 앉아 살짝 수줍어하는 여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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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화

김태하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따라 웃었다.“우리 이제 편하게 말 놓을까, 지현아?”갑작스럽지만 또 나름 자연스러운 제안에 강지현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태하야.”“네가 고른 선물이 완전 사람 설레게 하네!”강지현이 막 몸을 일으키려는데 남자가 가볍게 손목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균형을 잃고 그의 품에 쓰러지듯 안겨 무릎 위에 앉아버렸다.김태하의 숨결이 그녀를 덮쳤다. 남자의 뜨거운 숨결이 귓가에 스치자 강지현은 자신도 모르게 목덜미를 움츠렸다. 고개를 들어 그의 눈빛과 마주쳤을 때,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팔이 저절로 그의 목덜미를 감쌌다.김태하는 그녀의 붉어진 귓불을 응시하며 본능적으로 앞으로 몸을 기울여 귓속말을 속삭이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남자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입술이 그녀의 뺨을 살짝 스치고 말았다.강지현은 온몸이 굳었고 귓불에 뺨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김태하 역시 흠칫하며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지만 더는 다가서지 않았다. 그는 살짝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제대로 못 피했나 봐?”강지현은 예상치 못한 터치에 멈칫했다. 머릿속이 순간 백지장이 돼버렸다.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당황한 듯 짙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태...”김태하는 그녀의 팔을 놓아주었지만, 여전히 그윽한 눈길로 그녀를 응시했다. 커다란 손을 들어 화끈거리는 여자의 뺨까지 감쌌다.“너 오늘따라 유독 사람 설레게 한다?”이 광경을 본 최동윤은 냉큼 고개를 돌리고 자리를 물러났다.‘여색은 가까이하지 않겠다던 대표님이 대체 왜?’“나 좀... 배고픈데?”강지현은 여전히 머리가 멈춰버리고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댔으며 호흡마저 가빠졌다.그녀는 혼잣말로 웅얼거리며 쏜살같이 김태하에게서 벗어나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이프와 포크를 집으려다가 허둥지둥 그 모든 것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몸을 숙이고 다시 주우려는데 남자가 또 그녀의 손을 꾹 눌렀다.“직원들 치우게 그냥 둬.”김태하는 자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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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3화

바로 그때, 최동윤도 숨을 헐떡이며 가까이 다가왔다.그는 환하게 미소 짓는 얼굴로 김태하에게 눈빛을 보낸 뒤에야 강지현을 향했다.“지현 씨, 대표님, 실버데이를 함께 보내시게 된 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강지현이 영문을 몰라 김태하를 쳐다보았다. 이에 남자가 시선을 내리깔고 그녀에게 휴대폰을 보라고 손짓했다.고개를 숙여 화면을 켜는 순간, 놀랍게도 날짜가 어제로 돌아가 있었다.12시가 지난 시각에서 어느새 11시 반 무렵으로 바뀐 것이다.이것은 바로 시차, 김태하는 비행기에서 기념일을 보내려고 한 게 아니라 지역 시차를 이용해 그녀와 함께 하루 전으로 돌아갔다.지금 이 시각, 두 사람은 결코 실버데이를 놓치지 않았다.“태하야...”강지현은 감격스러운 마음에 입을 가리고 눈가도 금세 촉촉해졌다.난생처음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흘리는 말 한마디에 이렇게까지 공들여 준 것이...그녀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만 미터 상공을 나는 비행기 아래로 도시의 불빛들은 마치 눈부시게 쏟아지는 은하수 같았다. 그 장엄한 광경에 온갖 상처로 얼룩진 그녀의 마음이 봄날처럼 소생하는 듯했다.“우리가 함께 보내는 첫 기념일이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어. 앞으론 매년, 아니 매달마다 꼭 너랑 함께 보내고 싶어, 지현아.”김태하가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한편 그녀는 비행기 창문에 비친 남자의 옆모습을 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서둘러 손으로 눈가를 훔치며 대답하는 그녀...“고마워, 태하야.”“왜 그래? 내가 뭐 실수했어?”김태하는 그녀의 수상한 낌새를 바로 눈치채고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드러났다.오늘 약속 시각을 어긴 것을 만회할 방법은 이뿐이라고 생각했다.“아, 아니야 그런 거.”강지현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지만, 몸을 돌리지는 않았다.남자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이 너무 쑥스러웠으니까.김태하는 더욱 걱정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옆에 앉았다. 듬직한 체구로 그녀의 얇은 몸을 감쌌고 뭐라 위로하고 싶었지만 하도 조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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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화

두 사람의 엇갈린 얕은 숨결 사이로 욕망이 소리 없이 번져나갔다.하지만 김태하는 마지막 선을 지키며 정말로 다정하게 그녀를 안아주기만 했다.다시 손을 내려놓고 그녀의 붉어진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바다처럼 깊은 눈동자에는 억제된 열망이 가득했다.“너무 겁먹지 마. 내가 원하는 건 오늘 밤만이 아니야. 앞으로의 여생은 우리에게 길고 긴 여정이 될 거잖아.”중저음의 뚜렷한 목소리가 깃털처럼 강지현의 심장 끝에 내려앉아 온몸의 피를 끓어오르게 했다.김태하의 의도는 분명했다. 그는 진심으로 강지현과 결혼하고 싶어 했고 또한 진심으로 그녀를 존중했다.강지현의 마음이 완전히 뒤흔들렸다.오늘 밤 이전까지 김태하에게 다른 감정이 아예 없었지만, 이제는 달랐다. 이 남자를 마주하면 의외로 가슴이 저릿하게 뛴다....월요일, 강지현은 약속대로 이경 그룹으로 돌아왔다.이규진을 비롯한 임원들은 이미 대표이사실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오늘 그녀는 짙은 로열 블루색 체크 무늬 정장을 입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을 자아냈다. 분위기 자체가 예전에 이경 그룹에 있을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이규진조차 잠시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지현아, 드디어 왔구나. 아빠가 널 한참 기다렸어.”이도운 역시 강지현을 보자 흥분을 금치 못하고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이번에도 여자는 가볍게 그 손길을 피했다.강지현은 곧장 이규진의 맞은편에 앉아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 회장님.”“그새 못 봤다고 호칭이 다 서먹서먹해졌네?”이규진은 표정 변화 없이 그녀를 찬찬히 살폈다.어쩐지 다들 강지현이 달라졌다고 하더라니.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이도운의 옆에 서서 순진하게 웃던 예전의 소녀가 아니었다. 내뿜는 아우라가 확 달라진 것이다.“회장님께서 늘 말씀하셨잖아요. 회사에서는 공과 사를 잘 구분해야 마땅한 자리에 앉을 수 있다고요.”강지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지만 내뱉은 말 때문에 사무실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냉랭하게 얼어붙었다.이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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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5화

하지만 이규진이 쥔 주식만큼은 강지현에게 절대 넘겨줄 수 없었다. 그 주식 일부는 선대인 이철호 회장의 몫이 걸려 있고 이규진이 멋대로 처분할 권한이 없다. 게다가 노부인의 마음 먹기에 따라 언제든 회수될 수 있는 부분이었다.강지현은 양도 계약서를 힐끗 쳐다보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도운이가 저한테 절반을 주겠다고 해서 특별히 새로운 프로젝트를 들고 회사로 돌아온 겁니다.”말을 이어가던 그녀는 놀랍게도 정말 가방에서 프로젝트 제안서를 하나 꺼냈다. 그건 바로 이경 그룹이 몇 번이고 공들였으나 끝내 손에 넣지 못했던 프로젝트였다.프로젝트 규모가 거의 2천억에 달했는데 만약 이경 그룹이 이 거래를 성사시킬 수만 있다면 지금까지의 손실은 눈 녹듯 사라질 터, 주식 상장 절차도 크게 가속화될 것이다.이규진과 이도운은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눈빛이 번뜩였다. 또한 이규진은 손을 뻗어 당장이라도 프로젝트 제안서를 받아 들려고 했다.하지만 강지현이 순식간에 거둬들이며 눈썹을 치켰다. 그녀는 옅은 숨을 내쉬었다.“다만 이제 보니 조금 아쉽네요. 서로 간의 진심의 무게가 다른데 더 이상 시간 낭비할 필요도 없겠어요. 오늘 헛걸음한 건 아니고 지금 부로 이경 그룹에서 정식으로 퇴사하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의 사원증 등 회사 물품을 전부 이규진 앞에 내려놓았다.이규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강지현은 그에게 대답할 기회도 안 주고 가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이때 이도운이 즉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지현아, 왜 이렇게 충동적으로 굴어? 서로 좋게좋게 이야기할 수도 있잖아. 다 가족인데 아빠를 앞에 두고 이렇게까지 인정사정없이 굴어야겠어?”“같은 말 반복하고 싶지 않아. 협력은 진정성을 바탕으로 해야 해. 너 분명 나한테 지분 50%를 주겠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앞뒤가 안 맞잖아! 이번에 순순히 넘어가 주면 앞으로 이 회사에 모든 걸 걸고 충성했을 때 또다시 속고 이용당하지 않을 거란 보장은 있을까?”정곡을 찌르는 강지현의 말에 남자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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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6화

이도운은 마치 철없이 구는 강지현을 생각해주는 척하며 착잡하게 타일렀다.한편 강지현은 피식 웃으며 그의 말을 듣는 척도 안 했다.“이 회장님, 제가 50% 지분을 고집하는 건 결코 감정적으로 나온 게 아닙니다. 지금 회사의 핵심 사업들이 줄줄이 멈춰 섰고 전면적인 돌파가 절실한 상황이죠. 만약 의사 결정권이 분산되어 보고와 견제가 겹친다면 우리는 또 한 번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게 될 겁니다. 제가 절대적인 주도권을 원하는 것은 이 전략을 끝까지 관철하기 위함이며 2천억 규모 프로젝트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입니다.”“저의 비전을 받아들이실 수 없다면 더는 함께할 의미가 없어요. 이제 결정해주시죠. 이 큰 그림을 함께 완성할 것인지 아니면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정리하고 나가게 할 것인지 말입니다.”강지현의 태도는 강경했지만, 그 안에 확실한 근거와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이규진 역시 그녀의 기세에 눌려 주도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강지현의 주장은 일리가 있었다. 2천억에 달하는 프로젝트는 누가 봐도 놓치기 아까운 카드였다.아버지 앞에서 체면을 완전히 구긴 이도운은 더 이상 화를 참을 수 없었다.“야, 강지현! 몇 년 동안 내가 널 너무 오냐오냐 키웠나 보네? 고작 이까짓 이익 때문에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이는 거야? 가족들까지 마음 상하게 해야 속이 후련하냐고?”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강지현이 벌떡 일어서서 차분하면서도 냉랭한 어투로 대답했다.“난 여태껏 이경 그룹과 이씨 가문을 위해서 전력을 다했어. 너까지 날 그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못한다면 그냥 퇴사하는 게 낫겠다.”이도운이 늘 쓰던 수사법을 그녀가 그대로 되돌려주자 남자는 대뜸 가슴이 답답해졌다.마침내 이규진이 입을 열었다.“그래, 좋아. 마지막 남은 10% 지분은 어떻게든 마련해주마.”“회장님, 역시 통쾌하시네요.”강지현의 입가에 딱딱한 미소가 번졌다.“그럼 저도 이쯤에서 물러나겠습니다. 주식 이전 절차가 모두 마무리되면 그때 다시 뵙고 상세히 이야기 나누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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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화

이도운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 두 사람의 지나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경 그룹에 중요한 프로젝트들이 연달아 들어왔을 때, 강지현은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심지어 이도운이 곤란해하는 기색을 알아채고는 허니문 여행도 선뜻 포기했다.이후에도 강지현은 프로젝트 때문에 밤늦도록 홀로 남아 고군분투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도운의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 그녀는 스스로 옆방으로 옮기면서 부부가 각방을 썼다.이도운은 천천히 침대 옆에 앉아 손바닥으로 평평하게 정리된 침구를 쓸어내렸다.침구는 은은하면서도 안락한 느낌이었는데 무슨 브랜드인지 알 수 없었다. 전에 가정부가 말하기를 이 집 안의 자잘한 살림살이가 전부 강지현이 짬을 내서 직접 발품 팔아 고른 것이라고 했다.이도운의 방에 놓인 모든 장식품까지 다 포함해서 말이다.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마치 강지현이 눈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던 모습이 환영처럼 나타났다.그때 그녀의 눈빛은 백설을 담은 듯 맑고 영롱했고 아무리 어려운 일에 부딪혀도 이 남자 앞에서 약한 모습을 절대 드러내지 않았다.그녀만 있으면 아무런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사모님?”이도운이 한창 넋 놓고 있을 때, 가정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평소 사모님의 침실은 늘 어두컴컴했는데 오늘 갑자기 불이 켜져 있어 강지현이 돌아온 줄 알았던 모양이다.하지만 이도운을 보자 가정부의 표정에도 순간 놀라움이 스쳤다.“지현이가 집을 비운 지 얼마나 됐죠?”이도운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심한 듯 물으며 방안을 천천히 걸었다.그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방안의 모든 수납장을 열어젖혔다. 마치 사라진 여인의 흔적이라도 찾으려는 듯 평소와 다르게 세심하고 인내심 있게 행동했다.“대표님, 사모님은 집 나가신 지 벌써 한 달이 되었습니다.”가정부의 대답에 이도운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한 달이라니? 날 떠난 지 그렇게 오래됐다고? 왜 난 우리가 갈등을 겪은 게 며칠 전 일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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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화

가정부가 급히 뒤따랐다.“네, 다 되었습니다. 대표님께서 오늘 돌아오신다고 해서 입맛에 맞춰 저녁을 차렸어요.”“윤후는요?”이윤후가 오늘따라 통 인기척이 없었다. 평소에는 그가 돌아오면 쪼르르 달려와 재롱을 부렸는데 말이다.“윤후 도련님은... 하린 씨가 데리고 나갔어요.”이도운은 흠칫하더니 그제야 기억났다. 윤후 녀석이 오전에 백하린에게 가고 싶다고 떼를 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잠시 그녀에게 맡겨둔 참이었다.한편 백하린은 또 이도운에게 무슨 심통이 났는지 이윤후를 데리고 가면서 한마디 말도 없었다.다만 그는 지금 백하린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식탁 위에는 음식이 다섯 가지가 세팅되었는데 죄다 이도운이 평소 좋아하던 요리였다.특히 뽀얀 국물의 사골곰탕이 한눈에 들어왔다.이도운은 가정부가 건넨 곰탕을 한 모금 맛보았다. 나름 먹을 만 하지만 국물이 진하지 않고 소고기도 푹 익히지 못했다.그는 미간을 찌푸렸다.“평소랑 맛이 좀 다르네요?”“그래요?”가정부가 잠시 멈칫하더니 곧 깨달았다.“실은 사모님께서 대표님이 좋아하시는 음식들마다 몇 번이고 공들여 연구하시고 맛의 디테일까지 완벽하게 잡아내셨어요. 이 사골곰탕은 유난히 손이 많이 가죠. 사골만 해도 사모님께서 새벽같이 먼 곳에 있는 특정 가게까지 가시곤 했거든요. 그 집 사골이 해원시 최고라 하시면서도 구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고요. 저희는 국 하나 끓이는 데 이렇게 세세한 공을 들이는지 몰랐어요. 사모님 그 맛을 따라 하긴 역부족인 것 같아요.”이도운은 다시 멈춰 섰다. 귓가에 강지현의 다정한 목소리가 맴도는 것만 같았다.“도운아, 지난번에 네가 그 식당의 사골곰탕이 맛있다고 했잖아. 나 오늘 비슷하게 재현해봤어. 맛 좀 봐봐.”“음, 괜찮네. 앞으로 자주 해줘.”집에 밥하는 가정부가 따로 있으니 강지현이 사골곰탕을 완벽하게 따라 한다 해도 별다른 노력이 필요 없을 거라 여겼다. 그래서 잔뜩 기대하던 그녀의 모습에도 이도운은 건성으로만 대답할 따름이었다.그럼에도 강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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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화

한 시간 후, 강지현은 두 분께 드릴 영양제와 과일을 들고 김씨 가문의 별장으로 차를 몰고 갔다.혹여나 김태하를 만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녀는 일부러 신경 써서 연분홍색 롱스커트를 입고 옅은 화장까지 했다.별장에 들어서자 지순옥이 곧바로 반갑게 마중 나왔다. 강지현이 챙겨온 선물들을 보더니 눈살을 약간 찌푸리셨다.“아이고, 그냥 몸만 오지 뭘 이렇게 많이 들고 왔어? 가녀린 팔로 이것들 다 드느라 얼마나 힘들었겠어! 작정하고 할미 속상하게 할 셈이야?”지순옥의 몇 마디 말에 강지현은 쑥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할머니, 저 그렇게 여린 사람 아니에요. 게다가 할머니도 저한테 자주 선물 보내주시잖아요.”“그게 같아? 나는 네 할미야. 넌 내게 보물 같은 존재라서 부족한 게 없다 해도 뭐 하나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란다.”지순옥의 말은 언제나 마음을 울리기 마련이다. 강지현은 결국 또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녀는 어르신의 팔짱을 끼고 살짝 투정을 부렸다.“할머니 저한테 너무 잘해주시는 거 아니에요?”“당연한 거 아니니? 일하느라 많이 피곤했지? 어서 가서 좀 쉬렴. 밥 금방 다 될 거야.”지순옥은 그녀를 소파에 앉아 쉬게 해주고 싶었지만, 주방에서 맛있는 냄새가 난다며 소매를 걷어붙이고 곧장 부엌으로 가서 돕기 시작한 그녀였다.김윤석 할아버지는 앞치마를 두른 채 수많은 가정부들 틈에서 불 조절을 지시하고 능숙하게 웍을 돌리며 냄비를 살피고 있었다. 영락없는 전문 요리사의 풍모였다.“할아버지, 요리 솜씨가 정말 대단하신데요! 멀리서도 냄새가 진동해요!”“하하, 이 할애비가 허풍 떠는 게 아니라 김씨 가문 사람들 중에 요리 솜씨는 단연 내가 으뜸이란다. 지현이 오늘 잔칫상 제대로 맛보겠네.”김윤석의 얼굴은 열기로 붉어졌지만, 말을 할 때는 여전히 힘이 넘치고 유머러스했다.할아버지가 웃자 모두가 따라 웃으며 연신 칭찬을 쏟아냈다.지순옥은 몰래 강지현에게 귀띔했다.“저 영감은 칭찬받는 걸 제일 좋아해. 네가 그렇게 칭찬해대니 오늘 꽤 으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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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화

“태하 씨한테 무슨 일 생겼어요?”할머니의 말을 들은 그녀는 내심 걱정스러웠다.“새로 계약한 리튬 광산 쪽에 비상 상황이 생겼는데 인명 피해도 있다고 하더구나.”지순옥은 말을 꺼낼지 말지 망설였지만, 김윤석이 곧장 깊은 한숨을 쉬며 받아쳤다.“태하 그 아이는 책임감이 너무 강해. 미래 그룹의 모든 부담을 혼자 짊어지고 있으니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지.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언제나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려 드니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밤낮없이 일에 매달려 있을 거야...”“그렇게 일하면 몸이 버틸 리가 없죠!”강지현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났다.김태하는 며칠 전 교통사고를 당했다. 비록 찰과상이라 해도 푹 쉬어야 할 텐데...“우리도 그게 제일 걱정인데 태하 그 녀석은 우릴 안심시키느라 무슨 일이 생겨도 상황조차 제대로 말해주질 않아. 며칠째 집에 안 들어오길래 사람을 시켜 수소문한 끝에야 알아냈단다.”지순옥도 근심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김태하는 일 앞에서 남에게 걱정 끼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도리어 그를 가장 측은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그는 만능이라 모든 일을 해결할 것 같지만 정작 자신을 아끼는 법을 모르는 것 같았다.이대로 가다가는 언젠가 번아웃이 올 게 뻔하다.강지현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마치 무언가에 심장을 옥죄인 기분이라 입맛까지 사라졌다.며칠 전 그가 서둘러 전화를 끊었을 때, 단지 일이 바빠서 자신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거로 여겼는데 이렇게 큰일을 겪었을 줄이야.집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니.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때 그의 목소리도 심하게 잠긴 듯 매우 수상했다.지난번 교통사고 때도 그녀를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다른 볼일이 생겼다’라고만 했을 뿐이었다.지금은 상황이 더 심각하거나 혹은 자신이 짐이 될까 봐 일부러 말을 아끼는 걸까?강지현의 기분은 걷잡을 수 없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하지만 두 어르신의 심리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그녀는 애써 두 분을 위로하고 화제를 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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