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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1화

강지현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달콤했고 외모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진심이 담긴 몇 마디 말만으로도 한자리에 모인 어른들의 마음을 금세 사로잡았다.그날 식사는 분위기 좋게 흘러갔고 강지현은 정성을 다해 어른 한 분 한 분께 술을 올렸다. 어느새 얼굴이 살짝 붉어질 만큼 취기가 올랐다.“지현이가 술 잘 마시는 줄은 몰랐네.”은주희는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친정 식구들과 술자리를 함께해 줄 사람이 있다는 것도 고마운데, 그게 예비 며느리라니 더없이 체면이 섰다. 강지현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만족이 가득했다.하지만 지순옥은 조금 걱정스러웠다.“지현아, 이제 그만해도 돼. 많이 마시면 힘들어.”“괜찮아요, 할머니.”강지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 많이 마시긴 했지만 완전히 취한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기분이 좋아서인지 평소보다 웃음이 훨씬 많았다.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강지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화면을 확인했다.김태하였다.“태하야, 이제야 끝났어?”목소리엔 설렘이 묻어났고 평소보다 한층 더 다정했다.김태하는 곧바로 이상함을 눈치챘다.“술 마셨어?”“응. 오늘 주희 아줌마네 가족들이랑 할머니랑 함께 있었는데 너무 즐거워서 조금만 마셨어. 태하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오늘 음식도 정말 맛있었어. 나 너랑 같이 밥 먹고 싶어.”강지현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긴장이 풀린 탓에, 생각을 거치지 않은 말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지현아.”가슴이 쿵쿵 뛰었고 목소리도 덩달아 낮게 가라앉았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덧붙였다.“거기 시끄러우니까 밖으로 나와서 받아.”“응? 알겠어, 잠깐만.”강지현은 옆자리 어른들을 힐끗 바라봤다. 대화에 한창인 틈을 타 휴대폰을 가리고 자리에서 조심스레 일어났다. 그녀는 은주희와 할머니에게 눈짓으로 양해를 구한 뒤 서둘러 룸을 나섰다.“나 나왔어...”복도로 비틀거리며 나와 막 말을 꺼낸 순간, 맞은편 끝에 서 있는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역광 속에 서 있었지만 어쩐지 김태하와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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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화

하지만 이도운이 다가가 확인해 보기도 전에, 뒤에서 누군가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이 대표님, 역시 많이 취하셨네요. 화장실은 저쪽입니다. 제가 모시고 갈게요.”같은 룸에서 나온 비즈니스 파트너였다. 마침 자신도 화장실에 가려던 참이었는데, 이도운이 비틀거리는 걸 보고 얼른 옆으로 끌어당긴 것이다.이도운은 미간을 찌푸린 채 헛기침을 했다.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다시 고개를 돌려 보니 방금 전까지 복도 끝에 서 있던 두 사람의 그림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착각이었나? 아니면 요즘 머릿속이 온통 강지현 생각뿐이라 헛것을 본 걸까?’그래. 강지현이 다른 남자와 입을 맞출 리가 없었다. 그녀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니까.이도운이 완전히 자리를 뜬 뒤에야, 복도 모퉁이의 강지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썹을 치켜올렸다.“왜 그래?”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태하는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전류처럼 짜릿한 감각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시야에서 가려지는 복도 안쪽으로 몸을 돌려 버렸다.복도 끝 창문으로 스며든 달빛이 사라지자, 두 사람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은 듯했다.강지현의 뒤통수는 남자의 따뜻한 손바닥에 받쳐 벽에 닿아 있었다.김태하는 제 몸으로 그녀를 꽉 감싸안았다. 두 사람의 숨결이 얽히자 은은한 술 향과 차가운 솔향이 뒤섞였다.모든 빛이 사라지자, 그의 입체적인 얼굴 윤곽은 오히려 더 도드라져 보였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달아오를 만큼 긴장감이 치솟았다. “방금 누가 있었어.”김태하가 낮게 말했다.어둠 속에서도 강지현의 눈동자는 유난히 또렷하게 빛났다. 곧장 그의 마음 깊숙이 파고드는 시선이었다.남자의 목울대가 천천히 움직였다. 아직 여운이 남아 있는 듯, 숨결 또한 짙어졌다.“지금은? 아무도 없지?”강지현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응.”김태하는 다시 천천히 그녀의 입술 가까이 다가갔다.시간이 멈춘 듯 주위가 고요했다.강지현은 천천히 눈을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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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3화

김태하가 말을 마치고는 무심코 강지현을 바라봤다. 마침 강지현도 웃으며 그를 보고 있었다.시선이 맞닿는 순간, 김태하는 괜히 귓가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술이 오른 강지현은 그를 빤히 바라보는 걸 좋아하는 듯했다. 얼굴엔 홍조가 번졌고 눈가엔 웃음기가 어려 있었는데 괜히 나쁜 생각이 들 만큼 사랑스러웠다.김태하는 문득 조금 전 복도에서 강지현이 그의 가슴에 기대어 속삭이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곧장 시선을 거두었다.“자, 태하야. 외삼촌이랑 한잔해야지! 오늘 지현이가 우리랑 얼마나 많이 마셨는데. 아내가 주량이 이렇게 좋은데, 네가 지면 되겠어?”은희철이 말하며 곧바로 김태하에게 술잔을 내밀었다.“외삼촌.”김태하는 잠시 망설였다. 오늘은 직접 차를 몰고 왔기에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거절의 말은 결국 삼킨 채 잔을 받아 들었다.옆에 강지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상하게도 그는 누구의 부탁도 쉽게 거절하지 못했다.김태하는 잔을 들고 어른들께 한 바퀴 인사를 돌 생각이었지만 강지현이 그의 팔을 꼭 붙잡은 채 좀처럼 놓지 않았다.막 잔을 입에 대려는 순간,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손을 덮었다.“아저씨, 제가 태하 대신 한잔 올릴게요. 태하가 열이 내린 지 얼마 안 돼서 술은 아직 안 돼요.”취기가 올라 부드럽게 풀린 그녀의 목소리에 김태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심장이 금세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지금의 강지현은 반쯤 취한 상태였다. 몸과 마음이 한껏 풀려, 말과 행동이 거의 본능처럼 튀어나오고 있었다.“열이 막 내렸다고? 그럼 술은 안 되지! 약혼자라고 챙기는 거 봐. 태하야, 지현이가 이렇게 널 생각해 주는데, 너도 꼭 잘해야 한다!”은희철의 말에 강지현의 얼굴은 더 붉어졌다.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는데, 듣고 보니 너무 앞서 나간 것 같았다. 김태하의 가족들 앞에서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대신 술을 마신단 말인가.긴장한 강지현이 그의 팔을 놓으려는 순간, 김태하가 오히려 그녀의 손을 다시 꽉 잡아당겼다.“외삼촌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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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화

김태하의 발걸음은 묵직하고도 흔들림이 없었다.그의 품에 안긴 강지현은 이상할 만큼 편안했다. 가슴에 얼굴을 기댄 채 숨을 고르다 보니, 어느새 눈꺼풀이 스르르 무거워졌다.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김태하는 차에 오를 때도, 내릴 때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때도 그녀를 놓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서야 소파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처음엔 부끄러웠다. 그런데 한참을 안겨 오다 보니 점점 익숙해졌다.김태하가 몸을 숙이는 순간, 그의 뺨이 그녀의 목덜미를 스쳤다. 간질거림에 강지현은 반사적으로 그의 허리를 붙잡았다.낮게, 숨 섞인 신음이 흘렀다. 그리고 이마 위로, 짧은 입맞춤이 내려앉았다.실내는 불을 켜지 않은 채였다. 등 뒤의 통유리창 너머에서 스며드는 희미한 야경 빛이 공간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지현아, 나...”김태하가 잠시 말을 멈췄다.그녀의 시선이 그의 목으로 향했다. 도드라진 목울대가 천천히 오르내렸다. 풀어진 셔츠 사이로 드러난 가슴선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나 있었다.괜히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아, 미안.”강지현이 화들짝 손을 떼었지만 시선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김태하가 몸을 일으키자 그녀도 따라 앉았다.“태하야, 오늘 왜 갑자기 온 거야? 열은 다 내렸어? 일은 괜찮고?”“응. 다 정리됐어. 네가 도와줘서 생각보다 빨리 끝났어.”그가 등을 보인 채 대답했는데 어쩐지 목소리에 조급함이 묻어났다.“오늘 밤에 돌아왔는데, 할머니가 너 불러서 식사했다는 얘기 듣고 그냥 얼굴 보러 왔어. 그리고 그날, 우리 얘기하다가 끊겼잖아.”그제야 떠올랐다. 그날 김태하와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중, 권미숙이 돌아왔다는 연락에 대화가 끊겼던 일을.그때 두 사람은 영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강지현은 공포영화를 좋아했지만 혼자 보는 건 무서웠다. 어릴 적 보육원에서는 친구들과 이불을 뒤집어쓰고 같이 볼 수 있었으나 커서는 그러지 못했다.이도운과 처음 사귈 때, 그녀가 공포영화를 보고 싶다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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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5화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차갑고 단정한 얼굴로 귀신도 가까이 못 올 것처럼 굳건히 앉아 있는 김태하를 보고 있으면 괜히 더 놀리고 싶어졌다.예전 같으면 공포영화를 보며 짜릿한 자극을 느끼고 싶어 했을 텐데, 오늘은 아니었다.오늘은 그냥 김태하가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난 귀신 같은 건 안 믿어.”김태하가 낮게 말했다. 스크린을 향해 있던 그의 시선이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얼굴 위에 가볍게 내려앉았다.푸른 화면빛이 그녀의 얼굴을 물들이고 있었다. 살짝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직 다 가시지 않은 취기 어린 눈빛. 그 모습이 정말 눈을 떼기 어려웠다.“그럼 태하가 나보다 담력은 더 세겠네. 나 조금 있다가 무서워서 소리 지르면 꼭 좀 지켜줘.”“그래.”짧게 답한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자연스럽게 끌어당겼다.“불편하면 기대. 이러면 좀 덜 무서울 거야.”정말 그랬다.김태하가 곁에 있으니 영화 내용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니 무섭다는 생각 또한 들지 않았다.그녀는 완전히 긴장이 풀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몸이 스르르 기울었다. 그의 옆에 기대 있던 몸이 그대로 내려앉아, 어느새 그의 포개진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김태하는 순간 멈칫했다.“강지현.”낮게 불러 보았지만 깊이 잠들었는지 대답은 없었다.스크린에서는 귀신이 모습을 드러내고, 주인공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장면이 흘러가고 있었다.김태하는 재빨리 리모컨을 들어 소리를 껐다....다음 날 아침.눈을 떴을 때, 그녀는 부드러운 침대 위에 웅크린 채 누워 있었다.곧바로 김태하가 떠올랐다. 어젯밤, 거실에서 나란히 앉아 영화를 봤는데...영화 내용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지만 그가 곁에 있었던 감각만은 또렷했다. 방을 나와 거실로 향한 그녀는 뜻밖의 장면을 마주했다.김태하가 소파에서 잠들어 있었다.‘이미 돌아갔을 거라 생각했는데...’그는 셔츠 단추를 느슨하게 풀고 옆으로 몸을 웅크린 채 얇은 담요 하나만 덮고 있었다. 소파가 작은 건 아니었지만 그의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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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화

“욕실 좀 빌릴게. 씻고 나와서...”김태하가 말을 잇다 잠시 멈추고 주방 쪽을 바라봤다.“조금 배가 고픈데, 네 요리 또 한 번 맛볼 수 있을까?”가볍게 던진 농담이었지만 어딘가 진심이 섞여 있었다.“물론이지.”강지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새 수건을 꺼내 건넸다.잠시 뒤, 김태하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마침 아침도 완성되어 있었다. 우유에 적셔 구운 토스트와 달걀프라이, 토마토를 곁들인 단출한 메뉴였지만, 단정한 접시에 담기자 괜히 근사해 보였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햇살까지 더해지니 분위기는 지나치게 따뜻했다.그 순간, 강지현은 두 사람이 마치 오래전부터 함께 살아온 부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결혼하면 매일 이렇게 같이 아침 먹고 싶어.”김태하가 낮게 말했다. 담담한 어조였지만 그 한마디가 강지현의 마음을 조용히 흔들었다.“좋아.”생각할 틈도 없이 대답이 나왔다.그녀 또한 김태하와 함께하고 싶었다. 정략결혼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지낼 수 있다면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식사를 마치자마자 김태하의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으며 서둘러 셔츠 깃을 정리하던 그는 단추를 제대로 찾지 못해 잠시 손이 멈췄다. 그걸 본 강지현이 자연스럽게 다가가 대신 단추를 잠가주었다.전화를 끊은 뒤, 그는 그녀의 귀 가까이로 몸을 기울였다.“어제 영화 괜찮더라. 다음엔 네가 덜 피곤할 때 끝까지 같이 보자.”“재미있었어?”“응. 생각보다 구성도 괜찮고.”대충 넘기는 말투가 아니었다. 그는 장면 몇 개를 짚어가며 짧게 이야기를 덧붙였다. 강지현의 얼굴이 환해졌다.“좋아.”“근데 안 무섭겠어?”“네가 옆에 있는데 뭐가 무서워. 부적보다 훨씬 든든한데.”그 말에 김태하가 낮게 웃었다. 부드러운 웃음소리에 강지현의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나 가봐야겠다.”그는 현관 앞까지 갔다가, 문을 열기 전 돌아서서 배웅하러 나온 강지현을 바라보았다.“아침 잘 먹었어.”“응.”고개를 끄덕이던 강지현은 그가 돌아서려는 순간 무심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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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화

문수정은 집안 사람 하나하나를 불러다 분명히 못을 박아두었다.백하린이 이 집에 머물렀던 일은 절대, 단 한 마디도 밖으로 새어 나가선 안 된다고. 누구에게도 알려져선 안 된다고.“사모님, 정말 아닙니다.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가정부가 다급하게 해명했다.그때 이윤후가 가정부의 손을 뿌리치고 이도운에게 달려갔다.“아빠! 왜 이모를 내보냈어요? 다시 오게 해주세요. 나 엄마 보고 싶...”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도운이 아이의 어깨를 세게 움켜쥐더니 버럭 화를 냈다.“그만해.”문수정 역시 아이의 손목을 거칠게 붙잡았다. 힘이 과했는지 이윤후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곧 울음이 터져 나왔다.“쓸데없는 소리 하지마. 네 증조할머니가 들었다면 너 가만 안 둔다.”문수정은 애초에 입양 자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핏줄이 아니면 결국 마음이 붙지 않는다고, 괜히 관리만 힘들다고 생각해 왔다.“으앙...”이윤후가 울음을 터뜨리자, 이도운이 재빨리 아이를 제 뒤로 끌어당겼다.“어머니, 애한테까지 그러지 마세요.”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간호사가 나왔다.“들어오셔도 됩니다. 어르신이 두 분을 보겠다고 하세요. 다만 절대 자극하지 마세요.”이도운과 문수정은 잠시 눈빛을 교환한 뒤, 이민지에게 이윤후를 맡기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특실 병실 안.권미숙의 침대 곁에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오랫동안 곁을 지켜온 경호 겸 비서였다. 노인의 눈짓에 그는 고개를 숙이고 먼저 밖으로 나갔다.“어머니, 대체 무슨 일로 이렇게까지 화를 내신 거예요?”문수정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며 가져온 선물 상자를 옆 수납장 위에 내려놓았다.“직접 봐라.”권미숙의 목소리는 약간 힘이 빠진 상태였지만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녀는 손을 들어 서류봉투를 이도운 쪽으로 내던졌다.이도운이 다급히 받아 들더니 떨리는 마음으로 봉투를 열어 사진을 꺼냈다.문수정이 곧바로 다가와 그의 손에서 사진을 낚아챘다.“도운아, 너 설마...”사진 속에는 여자의 옆모습이 담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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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화

“할머니,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저랑 백 교수는... 업무 때문에 만난 겁니다. 지현이가 요즘 회사에 나오지 않아서 프로젝트를 맡을 사람이 없었고, 마침 백 교수가 인맥으로 도움을 줬어요. 그 일은 아버지도 알고 계십니다. 어젯밤에 만난 것도 일 때문이었고요. 몸이 안 좋다고 해서 병원에 데려다준 것뿐입니다.”이도운은 빠르게 표정을 정리하고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말투도, 표정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가 슬쩍 문수정을 바라보자, 문수정 역시 지금은 감정을 폭발시킬 때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권미숙의 손에는 아직 집안의 자산 일부가 쥐어져 있었다. 우선은 그녀의 마음부터 가라앉혀야 했다.“어머니, 사실 저도 알고 있던 일이에요. 이미 도운이도 크게 혼냈어요. 도와줄 사람이 그렇게 없어서 하필 그 여자를 끌어들였냐고요. 하지만 이 사진은 정말 오해예요. 도운이랑 지현이는 부부 사이도 좋고요. 그러니 백하린이랑 얽힐 이유도 없죠. 전부 회사 일 때문이에요.”“그럼, 규진이도 알고 있었다는 거냐?”권미숙은 화를 가라앉히려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백하린이 다시 이도운 곁에 나타났다는 큰일을, 가족들이 서로 입을 맞춰 숨기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문수정은 원래도 못 미더웠고 이도운은 여자 문제에 약한 아이였다. 그래도 이규진만큼은 믿고 있었는데...“할머니, 아버지께도 이미 혼났습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백 교수가 도움을 줬던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이미 회사를 떠났습니다.”이도운은 재빨리 다가가 권미숙의 팔을 부축하며 고개를 숙였다. 꾸중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태도였다.그 모습에 권미숙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하지만 여전히 이도운의 어깨를 세게 한 번 내리쳤다.“도운이 너 정말 실망이다. 그래서 지현이가 집을 나간 거 아니냐? 예전 일들까지 다 들킨 거 아니고?”“할머니, 지현이는 저와 백 교수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이도운이 즉시 대답했다.“그걸 어떻게 알게 해요. 겉보기엔 순해 보여도 고집이 보통이 아닙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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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화

강지현은 권미숙의 몸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비록 권미숙은 번거로운 걸 싫어했지만, 그녀는 정기적으로 사람을 시켜 좋은 보양식을 사서 이도운 이름으로 어르신께 보내곤 했다.“어휴, 나이 들면 다 그렇지 뭐. 오래 살 것도 아닌데 무슨 큰 병이겠니. 다 마음병이래. 내가 성질이 급해서 화가 치밀어 오른 거라더라. 의자가 며칠 입원해서 경과를 보자고 했어. 그런데 나는 요 며칠 계속 지현이 네 생각이 나더구나. 시간 되면 병문안 좀 와줄 수 있겠니?”권미숙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고 기운도 많이 빠진 듯했다.강지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자신이 집을 나간 일 때문에 무리하신 건 아닐까 하는 죄책감이 스쳤다.여든이 넘은 나이지만 권미숙의 정신은 또렷했다. 이도운의 서툰 변명이 과연 통했을지, 강지현은 확신할 수 없었다.“네. 그런데 지금은 조금 일이 있어서요. 늦지 않게 찾아뵐게요. 병실 번호 보내주세요.”예전 자신을 살뜰히 챙겨주던 모습이 떠올라, 그녀는 망설임 없이 약속했다.전화를 끊자마자 비서를 불러 어르신께 드릴 선물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주상 그룹 일정이 끝나자마자 선물을 챙겨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차를 몰면서도 만나면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 사이 김태하에게서 온 메시지는 확인조차 하지 못했다.병원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선물을 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려던 순간, 익숙한 아이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귓가를 파고들었다.“나쁜 여자! 맨날 다른 사람 괴롭히기만 하고! 하린 이모 돌려줘!”고개를 돌리자, 이도운의 비서와 함께 내려온 이윤후가 보였다. 시간이 늦어 집으로 데려가려는 모양이었다.이윤후는 강지현을 보자마자 비서의 손을 뿌리치고 달려왔다.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작은 물건을 집어 들어 그녀의 팔에 던졌다.강지현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윤후가 욕을 퍼붓고 도망치려는 순간, 재빨리 다가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이윤후, 내가 널 못 건드릴 거라고 믿는 거야? 지난번에 말했지. 나, 사람 다룰 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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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0화

“윤후가 백하린을 엄마로 원한다잖아. 그렇다면 나도 더 붙잡을 생각 없어. 선택해. 백하린을 들이든가, 아니면 윤후와 내 입양 관계를 정리해서 완전히 그쪽으로 보내든가.”강지현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몇 마디로도 남자의 숨통을 정확히 조였다.차갑게 식은 눈빛에, 그는 순간 뜨끔해 급히 반박했다.“무슨 소리야. 내 아내는 너야. 내가 어떻게 다른 여자를 들여?”말을 마친 그는 상황을 대강 파악하더니, 바닥에서 울며 버티고 있는 이윤후를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이를 악문 채 엉덩이를 몇 대 세게 때렸다.“그만 울어!”이윤후는 여전히 훌쩍였지만, 이도운의 노기에 눌려 더 크게 울지는 못했다. 아이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눈물만 뚝뚝 흘렸다.“잘 들어. 강지현이 네 엄마야. 벌써 잊었어? 백하린 이모랑 며칠 지냈다고 상황 파악이 안 된 거야? 이씨 가문 나가서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가고 싶어?”마지막 말은 이를 악물며 내뱉은 것이었다.그래도 제 아들이었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모습을 보자, 그의 목소리 끝이 미묘하게 갈라졌다.강지현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스쳤다.이 부자의 연극을 더 볼 생각은 없었다.권미숙을 만나야 했다. 그녀는 이도운이 아이를 다그치는 사이 조용히 몸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갔다.병실 복도에는 이민지와 문수정이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강지현이 다가오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멈췄고 묘한 눈짓이 오갔다.“어머, 웬일이래. 언니 왔어요? 앞으로는 우리 같은 시댁 식구들 얼굴은 안 볼 줄 알았는데.”이민지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지만 말투엔 노골적인 비아냥이 묻어 있었다.옆에 서 있던 문수정은 강지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그녀는 전보다 더 화려해진 차림이었다. 명품 슈트에 단정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 마치 재벌가 아가씨 같았다.요 며칠 회사는 어수선했다는데, 정작 본인은 호화롭게 지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이씨 가문의 돈으로. 뻔뻔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다.“그러게 말이야. 요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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