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맨스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 Chapter 281 - Chapter 290

All Chapters of 가짜 결혼, 진짜 신분: Chapter 281 - Chapter 290

304 Chapters

제281화

김태하는 부드럽게 말했다.“네가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최 비서가 안 들을 리가 없지.”잠깐 말을 멈췄다가 그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이제는 내 말보다 더 잘 먹히는 것 같고.”가벼운 농담이 섞였지만 그 안에는 은근한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강지현은 입술을 살짝 다물고 웃다가, 손을 거두고 의자에 앉아 라면을 비비기 시작했다.“아, 그리고 오늘 집에 잠깐 들렀다가 왔어. 할머니랑 어머님께 선물도 드렸고.”“두 분 다 너무 좋아하시더라. 계속 칭찬만 하시고... 나, 진짜 좋았어.”사소한 일이었지만 강지현은 자꾸만 그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다.가족에게 인정받는 기분을 이제야 처음 느껴본 것 같아서. 이렇게 작은 일 하나로도 그렇게 오래 칭찬을 들을 수 있다는 게 낯설면서도 따뜻했다.선물을 꺼냈을 때, 할머니가 눈시울을 붉혔던 모습도 아직 선명하게 떠올랐다. 소소한 일상 이야기였지만, 그 안에는 삶의 온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걸 듣고 있는 김태하도 자연스레 마음이 따뜻해졌다.그는 그녀가 이런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걸 좋아했다.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자신의 일상을 나눠 주는 그 모습이 좋았다.그녀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오랫동안 고독함에 익숙해져 있던 그의 몸과 마음을 서서히 데워 갔다.“네가 좋은 사람이니까, 다들 그렇게 널 좋아하시는 거야.”김태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강지현은 고개를 숙인 채 살짝 웃으며 젓가락으로 면을 가볍게 뒤적였다. 피어오르는 김이 그녀의 눈매를 한층 더 부드럽게 감싸안았다.감정이 북받칠 때면 그녀는 늘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괜히 코끝이 시큰해질까 봐서.“아, 맞다. 오늘 일은 잘 됐어?”김태하가 다시 물었다.강지현은 젓가락으로 면을 뒤적이던 손을 천천히 멈췄다.그녀는 잠시 말없이 있다가, 다시 고개를 들며 옅게 웃었다. “잘됐어. 생각보다 훨씬.”“이도운이랑 그 아버지, 회사에서 완전히 밀려났어. 나도 내가 하려던 건 다 했고. 속 시원해.”하지만 곧 말끝이 흐려졌다.“나 정말
Read more

제282화

그가 그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는지, 강지현은 순간 멈칫했다.그녀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화면 속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바로 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그럼 넌 나 속이거나, 배신할 거야?”“아니.”김태하는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럴 일은 절대 없어.”강지현은 살짝 웃었다. 얼음이 녹듯 부드럽게 풀린 그 미소에는 온전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나도 안 그래.”짧고 단호한 대답이었다.그녀는 한 박자 쉬었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내가 모질어지는 건 나를 배신하거나 상처 준 사람들한테뿐이야. 그리고 너는...”잠시 멈췄다가, 한층 더 부드럽게 말했다.“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이야.”달콤한 말장난이 아니었다. 수많은 일을 겪고 나서야 겨우 꺼낼 수 있는, 진심 어린 다짐이었다.김태하의 가슴이 묵직하게 차올랐다. 설명할 수 없는 안정감과 따뜻함이 천천히 번져 갔다.그가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시선이 강지현 앞에 놓인 컵라면에 닿았다. 붉은 기름이 둥둥 떠 있는 국물을 보자, 그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그게 저녁이야?”말투는 부드러웠지만 어딘가 못마땅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영양도 없잖아. 최 비서한테 말해서, 괜찮은 요리사 좀 알아보게 할까?”갑자기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는 다정하게 굴던 사람이, 순식간에 보호자 모드로 넘어온 느낌이었다.강지현은 피식 웃었다.“괜찮아. 혼자 있는 게 더 편해. 가끔은 이렇게 막 먹고 싶은 날도 있는 거고. 김 대표님,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그녀는 젓가락을 들고 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한 입 먹었다.그 모습에 김태하의 원칙은 금방 무너졌다.그는 숨을 살짝 고르며 낮게 말했다.“가끔만이야.”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그 붉은 국물 위에 머물러 있었고, 미간도 완전히 펴지지 않았다. 마치 혼잣말처럼, 그러면서도 그녀의 반응을 살피듯 낮게 말을 이었다. “내가 돌아가면 모자란 영양 다 챙겨 먹여야겠네.”강지현은 입안의 음식을 삼키고 고개
Read more

제283화

거울 속에는 화면 너머 남자의 진지한 눈빛이 희미하게 비쳤다. 공기에는 묘하게 고요하고 편안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김태하는 서류 한 페이지를 마무리하고 나서야 시선을 들어 화면을 바라봤다. 그 순간, 거울 앞에서 에센스를 바르고 있는 강지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고개를 살짝 젖힌 채, 부드러운 목선을 드러내고 있었다. 젖은 머리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쇄골을 타고 잠옷 안으로 스며들었다.김태하의 눈빛이 미묘하게 짙어졌다.목울대가 무의식적으로 한 번 크게 움직였다.“다 씻었어?”그가 파일을 덮으며 물었다. 목소리는 오래 말을 하지 않은 탓인지 한층 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응.”강지현은 그를 향해 살짝 웃었다.“일은 다 끝났어?”“거의.”그는 서류를 옆으로 밀어두고 시선을 완전히 그녀에게로 옮겼다.“머리는 꼭 말려. 안 그러면 머리 아파.”“알겠어~”입으로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손은 여전히 느긋하게 얼굴을 두드리고 있었다.김태하는 재촉하지 않고 그저 의자에 기대앉은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가 어떻게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눈가를 부드럽게 눌러주는지, 어떻게 긴 머리를 한쪽으로 넘겨 희고 매끈한 피부를 드러내는지.그런 평범한 동작들이 지금 그의 눈에는 유난히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말없이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왜 그렇게 봐?”강지현이 결국 참지 못하고 거울 너머로 그와 눈을 맞췄다.볼끝이 은근히 달아올랐다.“예뻐서.”그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시선은 솔직하면서도 뜨거웠다.“넌 어떻게 봐도 예뻐.”심장이 순간 반 박자 늦게 뛰었다. 예쁘다는 말은 자주 들어왔지만 김태하의 칭찬은 이상하게 더 무겁게 와닿았다.강지현은 그를 힐끗 흘겨봤다.수줍게 번지는 그 표정이 마치 갈고리처럼, 김태하의 시선을 단단히 붙잡았다.“그럼 나 머리 말릴게. 좀 시끄러울 수도 있으니까 음소거 해도 돼.”“응.”김태하는 대답만 했을 뿐 아무것도 누르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머리를 말리는 소리마저도 그냥 흘려
Read more

제284화

다음 날 이른 아침, 주병찬은 주시언에게 일이 생겼다는 연락을 받았다.어제 주시언은 M국으로 출장을 가 계약을 진행 중이었는데, 귀국을 앞둔 밤 갑자기 현지 당국에 억류됐다는 것이다.상대측은 그가 해외에서 상업 기밀을 불법으로 취득한 혐의가 있다며, 조사를 위해 출국을 막았다고 주장했다.주병찬은 아들이 그런 일에 연루됐을 리 없다고 확신했다. 곧바로 M국에 있는 사람들을 동원해 상황 파악에 나섰다.오후가 되어서야 돌아온 답은 뜻밖이었다. 주시언이 누군가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이었다.그 상대는 M국 상무 부문의 고위 인사였다.“시언이가 M국 사람을 건드릴 이유가 있나?”주병찬의 회사는 주로 국제 무역을 하고 주상제약의 수출도 일부 맡고 있었지만 M국과는 거의 거래가 없었다.이번 출장도 협력사가 협상 장소를 M국으로 정하면서 어쩔 수 없이 가게 된 경우였다.“연씨 가문 쪽일 가능성이 큽니다.”비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며칠 전, 도련님이 연세영 아가씨와 파혼하셨습니다.”그 말을 듣는 순간, 주병찬의 표정이 굳었다.그 일은 주시언에게서 이미 들은 바 있었다. 연씨 가문의 딸이라면 충분히 괜찮은 혼처였지만 그는 아들의 선택을 존중했다.맞지 않으면 다시 선을 보면 될 일이라 생각해, 이유조차 깊이 묻지 않았다.주시언은 그동안 늘 신중하게 행동해 왔고 주병찬은 그런 아들을 믿고 있었다. 파혼을 결정했다면 상대와도 원만히 정리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그는 곧바로 연씨 가문을 찾았다.그날 연씨 가문에는 연세영 혼자 있었다.그녀는 위층에서 통화를 이어가다가, 주병찬이 왔다는 말을 듣고도 일부러 한참을 더 기다리게 한 뒤에야 내려왔다.그 사이 주병찬은 집안 사람을 통해, 아들의 파혼 경위를 대략 들을 수 있었다.그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연세영의 성격이 아무리 까다롭다고 해도, 이번 일에서 주시언의 처신이 옳바르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무엇보다 마음에 걸린 건 이번에도 또 하씨 가문의 그 양녀 때문이라는
Read more

제285화

그 말을 듣자 연세영은 더 불쾌해졌다.그녀는 코웃음을 쳤다.“보상이요? 저희 연씨 가문은 부족한 게 없습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리고 주시언 씨가 지난번에 두고 간 선물도 같이 가져가 주세요.”“그건 시언이의 마음입니다. 세영 양, 훗날 두 집안이 사돈을 맺지 못하더라도, 친구로는 지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주병찬은 연세영이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다는 걸 알고, 굳이 그 이야기를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해원시에서 주씨 가문이 아주 힘없는 집안은 아닙니다. 나를 삼촌이라 불러 준다면, 나도 세영 양을 딸처럼 아낄 수 있지요. 시언이 그 녀석 때문에 괜히 마음 상하는 것보다 그게 훨씬 낫지 않겠어요?”주병찬은 한눈에 봐도 노련한 여우였다. 연세영도 그가 말을 돌려 가며 이해득실을 들이밀고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주씨 가문이면 어떻단 말인가.그녀는 주시언에게 당한 그 모욕을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더구나 지금의 주씨 가문은 자기 집안 문제 하나 수습하지 못해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주승호가 떠난 뒤로는 사실상 모래알처럼 흩어진 상태나 다름없었다.주병찬 역시 주상 그룹 지분을 많이 쥔 사람도 아니면서, 여기서 뭘 믿고 저런 식으로 구는 건지 우스울 따름이었다.연세영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아저씨,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주시언 씨가 저를 그렇게까지 모욕했는데, 제가 그 사람과 다시 얽힐 일은 없을 거예요. 아저씨도 잘 아시잖아요?”연세영이 회유에도, 압박에도 꿈쩍하지 않자 주병찬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겉으론 웃고 있었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없었다.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세영 양, 조건을 말해봐요. 우리가 어떻게 해야 시언이를 돌려보낼 생각입니까?”연세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아저씨,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네요. 시언 씨를 돌려보낸다니, 그게 무슨 뜻이죠?”“서로 무슨 말인지 모를 사람들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까지 매정하게 나오면, 나중에 감당하
Read more

제286화

엄경미가 회의실을 나오자 집사가 곧바로 뒤를 따랐다.그녀는 연씨 가문 쪽 일에 대해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최대한 빨리 처리해. 내일까지는 결과를 보고받고 싶네.”“알겠습니다.”집사가 고개를 숙여 답한 뒤, 문득 떠오른 듯 덧붙였다.“아, 그리고 단우 도련님께서 아직 밀실에 계십니다. 벌써 네 시간째 무릎 꿇고 계시는데, 한번 가보시겠습니까?”그제야 엄경미는 주단우를 떠올렸다.강지현이 돌아온 뒤부터 그는 마치 일 처리 능력까지 함께 사라진 사람처럼 굴었다.몇 번이나 강지현을 상대하겠다며 자신만만하게 나섰지만 결과는 번번이 초라한 실패뿐이었다.이번에는 더 심한 실수를 저질렀다.자기 일만 망친 게 아니라 그녀의 사업에까지 손해를 끼쳤으니, 엄경미도 인내심이 바닥날 지경이었다.엄경미는 원래 주단우를 보러 갈 생각이 없었다.하지만 아직은 그가 쓸모가 있다는 점을 떠올리자 발길을 돌려 밀실로 향했다.밀실은 저택이 처음 지어질 때 함께 만들어진 지하 방공호였다.평소에는 잡동사니를 쌓아두는 공간이었지만 엄경미가 주씨 가문에 들어온 뒤 그 안에 방 두 개를 따로 꾸몄다.하나는 침실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재였다.방은 밀폐돼 환기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여름에는 숨이 막힐 만큼 덥고 겨울에는 뼛속까지 시렸으며, 늘 축축하고 퀴퀴한 곰팡내가 밴 곳이었다.사람을 벌주기에는 더없이 알맞은 공간이었다.어릴 적 주단우가 말을 듣지 않을 때면 늘 이곳에 갇혔다.엄경미는 어릴 때부터 제대로 규율을 익혀야, 커서도 통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여겼다.그래서 주단우는 어릴 때부터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이곳에 끌려와 벌을 받았다.고용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릎을 꿇고 벌을 선 뒤, 그대로 갇혀 반성하는 시간이 이어졌다.가장 길었던 때는 보름이었다.그래도 주단우는 제법 기특한 구석이 있었다. 한번 호되게 혼이 나고 나면, 같은 실수는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았다.성인이 된 뒤로는 엄경미도 그를 거의 벌주지 않았다.밀실 문이 열리자 주단우의 모습이 드러났다
Read more

제287화

“가서 일 하나 처리해.”엄경미는 방금 출력한 서류 한 부를 주단우에게 내밀었다.그는 서류를 받아 훑어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설마 김씨 가문을 건드리시려는 겁니까?”“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알려고 하지 마.”엄경미가 차갑게 잘라 말했다.“넌 시키는 일만 하면 돼. 이번 일까지 제대로 처리 못 하면 난 너한테 완전히 실망할 거다.”엄경미의 기대를 잃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주단우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가 오랜 시간 공들여 겨우 얻어낸 인정도, 주씨 가문의 자리도, 주상 그룹 안에서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것도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 있었다.“하지만 회사 일은 제가...”주단우는 잠시 머뭇거렸다.이번 일은 그저 중간에서 처리만 하면 되니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문제는 김씨 가문을 건드리는 순간, 자칫 불길에 휘말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그런 위험까지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회사 쪽은 며칠 정직 처리될 거다. 마침 강지현에게도 명분을 줄 수 있겠지.”엄경미는 그에게 어떤 여지도 주지 않았다.“네가 일을 제대로 못 했으니, 나도 언제까지고 널 감싸줄 순 없다. 회사 규정대로 처리하면 돼. 강지현도 그 이상은 못 할 거야.”엄경미는 주단우가 강지현의 부하 직원 하나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되레 문제만 잔뜩 떠안고 돌아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이번만큼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했다.“알겠습니다.”주단우는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걸 알고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그럼 먼저 회사에 들러 맡은 일부터 정리하겠습니다.”“가봐.”엄경미는 턱만 살짝 들어 보였을 뿐, 더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주단우가 나간 뒤, 그녀는 노트북을 열어 암호화된 메일 속 김무언 관련 자료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김무언은 10년 전, 한 암흑 조직과 원한을 산 적이 있었다.아버지의 빚은 자식이 갚는 법이니까....저녁 무렵, 주단우는 회사로 돌아가 일을 정리한 뒤 막 퇴근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사무실 안쪽에서 사람 그림자가 얼핏
Read more

제288화

“제가 언제 대표님을 싫어한다고 했어요?”현다영은 눈을 몇 번 깜빡였다.얼굴엔 여전히 억지로 꾸며낸 티가 역력했지만, 목소리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부드러웠다.그 순간 주단우는 그녀가 일부러 자신을 유혹하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의 착각마저 들었다.“어젯밤엔 당장이라도 날 내쫓을 것처럼 굴더니. 전에도 보기만 하면 경찰 부르겠다고 하지 않았나?”주단우는 일부러 그녀의 입술 가까이로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나른한 목소리 끝에 장난기 어린 기색이 묻어났다.“현다영, 대체 무슨 꿍꿍이야?”“저는...”현다영이 움찔하며 고개를 조금 빼려 했지만, 주단우가 한 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큰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존재감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은데, 그의 숨결마저 귓가를 스치듯 내려앉았다.“아니면...”그가 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어젯밤 내가 완전히 정신을 잃었을 때, 너한테 뭐라도 했나? 그래서 아직도 자꾸 생각나는 거야?”“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현다영의 귓불까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그녀는 황급히 손바닥으로 주단우의 가슴을 밀어냈다.“저는 그냥 지난번 일, 그거 갚으려는 것뿐이에요. 이번 식사만 끝나면 우리도 그걸로 끝이에요.”말을 하면 할수록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시선도 자꾸 흔들려 그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다.핑계치고는 너무 허술했다.현다영 본인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주단우는 한동안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속내를 끝까지 들여다보려는 것처럼.다만 그 역시 현다영이 먼저 제 쪽으로 다가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하필 오늘은 기분도 영 좋지 않았는데 마침 잘됐다 싶었다.이 계집애를 좀 놀려 기분이나 풀 겸,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도 한번 지켜볼 생각이었다.주단우가 고른 곳은 주상 그룹 본사에서 멀지 않은 일식집이었다.셰프의 명성이 꽤 높았고 룸도 잘 갖춰져 있어 프라이버시가 철저한 대신 가격은 만만치 않았다.한 끼 식삿값으로 현다영 월급의 절반 가까이가 날아갈 법한 곳이었다.그런데도
Read more

제289화

그 말을 듣자 현다영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주단우는 그런 그녀의 반응을 놓치지 않고 전부 지켜봤다.어이가 없었다.정말 숨길 생각도 안 하는구나.하지만 사실 그가 강지현을 견제했던 것도 전부 엄경미 때문이었다.강지현이 그날 그런 말을 내뱉은 뒤로, 오랫동안 팽팽하게 조여져 있던 그의 신경이 어느 순간 뚝 끊어진 것 같았다.주단우는 마음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의심을 애써 눌렀다.강지현의 말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고 그녀 뜻대로 흔들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억지로 누르려 할수록, 오히려 의심은 더 선명해졌다.하지만 그는 차마 확인할 용기가 없었다.만약 정말 강지현 말대로 부모님의 죽음에 엄경미가 얽혀 있다면...그렇다면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삶도, 자신이 붙잡고 버텨온 모든 것도 결국 한낱 우스운 농담이 되어버릴 테니까.주단우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어느새 꽉 쥔 손에서는 뼈마디가 우두둑 소리를 냈다.현다영은 그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채고는 때를 맞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사실 주 대표님, 꼭 지현 언니랑 적으로만 지내실 필요는 없잖아요. 언니도 대표님이랑 평화롭게 지낼 수 있어요.”“네가 뭘 안다고 그래.”주단우가 피식 웃었다.“난 네 지현 언니처럼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쥐고 사는 사람이 아니야.”그는 손을 뻗어 앞에 놓인 주스를 집으려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다시 밀어냈다.“차라리 술 드실래요?”현다영이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러고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술을 주문했다.“시키지 마. 여기 술 비싸.”주단우가 느긋하게 말했다.“나중에 계산 못 할까 봐 걱정되네.”“대표님도 계시잖아요.”현다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주단우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비스듬히 웃었다.“네가 산다며, 난 계산할 생각 없어. 감당 못 하겠으면 알아서 해.”“저 낼 수 있어요. 그러니까 편하게 드세요.”현다영이 옅게 웃었다.“대표님 술 좋아하시는데, 제가 밥을 산다고 해놓고 술도 안 드리면 너무 성의
Read more

제290화

그녀는 마치 한 줄기 빛 같았다.가장 어둡고 막막했던 시절, 현다영의 세계를 환하게 비추며 수많은 악몽의 밤을 함께 견뎌줬고, 다시 버틸 힘과 용기를 건네준 사람이었다.그런데 어느 날, 그 빛은 그녀의 세상에서 영영 꺼져버렸다.현다영은 그녀가 아무 이유 없이 삶을 포기했을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 실연 때문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그럴 리 없었다.주단우는 술잔을 든 손을 잠시 멈췄다. 흐트러져 있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번뜩였지만 이내 다시 취기에 가려졌다.그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그 사람 말이야? 그냥 전에 알던 여자야.”“알던 여자라고요?”현다영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세게 주먹을 쥐었다.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물었다.“많이 소중한 사람이었어요? 그럼 지금은 어디 계세요?”주단우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고개를 젖혀 잔에 남은 술을 단숨에 비웠다.술기운이 마음속 감정을 더 크게 흔든 탓인지, 늘 계산적이고 빈틈없어 보이던 그의 눈빛에 드물게 복잡한 아픔이 스쳐 지나갔다.“죽었어.”그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그런데도 말투만큼은 이상하리만치 담담했다. 마치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을 말하는 것처럼.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그 말을 정말 주단우 입으로 듣는 순간 현다영은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서늘한 기운이 치솟는 걸 느꼈다.심장이 욱신거릴 만큼 아팠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억지로 참아낸 채, 그녀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이럴 수가... 병이라도 있었어요?”주단우는 비웃듯 짧게 웃었다.“병? 뭐, 그런 셈이지. 모든 걸 남한테 걸어놓고는 끝내 산산조각 나버렸으니까. 그 정도면 문제 있는 거 아니야?”그가 그 여자를 두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그 말을 빌려 다른 누군가를 겨누는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그 말을 들은 현다영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그럼 누군가 그 사람을 망가뜨린 거네요. 그런 인간은 죽어 마땅한 거 아닌가요.”현다영은 이를 악문 채 겨우 한
Read more
PREV
1
...
262728293031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