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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1화

이제는 공익 활동도 국가 단위까지 올라온 셈이었다.최동윤은 서지아가 드디어 완전히 털고 일어난 줄 알았다.누가 알았겠는가. 정말 무슨 수를 써서던 길을 만들어 내는 사람 같았다. 도무지 막을 도리가 없었다.“...”김태하는 한동안 서지아를 바라봤다. 미간은 금방이라도 짙게 가라앉을 듯 깊이 찌푸려져 있었다.주변 공기는 얼어붙은 듯했고, 최동윤은 목까지 긴장이 차올랐다. 자칫하면 김태하가 다음 순간 그냥 안 가겠다고 말할까 봐 겁이 났다.그 남자 성격상 억지로 밀어붙이면 걷잡을 수 없는 결과만 돌아올 게 뻔했다.하지만 이번 일은 단순히 미래 그룹의 초대형 프로젝트에 그치지 않았다. 국가 차원의 중점 사업이기도 했다. 아무리 김태하가 내키지 않아도, 이 정도 책임에서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서지아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내밀었던 손을 거두고 김태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카키색 작업복 스타일의 점프슈트를 입고 있었고, 긴 머리는 산뜻한 높은 포니테일로 묶어 두었다. 화장도 옅었다. 평소의 화려하고 정교한 이미지와는 달리, 조금 더 단정하고 친근하면서도 야무진 분위기가 느껴졌다.“나는 그냥 영상이랑 문자 자료만 기록하면 돼. 네가 나 불편해하면, 네 앞에 나서는 횟수는 줄일게. 그러니까 이번 일은 무사히 같이 끝냈으면 좋겠어.”“서 대표 말이 과하네. 프로젝트가 우선이지, 개인적인 감상은 중요하지 않아. 말한 대로 기록 업무에만 집중해 줬으면 해.”남자가 일부러 그렇게 부른 호칭에 서지아의 마음이 순간 가라앉았다. 그래도 얼굴에는 티를 내지 않았다.그녀는 손목시계를 한번 보고는 곧바로 촬영용 거치대를 꺼내 카메라를 켰다.“출발까지 아직 조금 남았는데 먼저 프로젝트 관련해서 간단히 인터뷰해도 될까?”김태하는 거절하지 않았고, 서지아는 바로 인터뷰를 시작했다.이번 일을 위해 준비를 꽤 많이 해 온 게 분명했다. 질문은 전문적이고 효율적이었고, 전부 업무적인 범위 안에 머물러 있었다.정말 그녀가 말한 그대로 일만 하러 온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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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2화

그다음부터는 걷잡을 수 없는 손실이 이어질 터였다... 상황이 심각해지면 회사가 무너지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이도운이 이 시점에 강지현에게 지분을 넘긴 건, 단지 이씨 가문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더 중요한 건 강지현을 다시 회사로 돌아오게 만드는 것이었다.지금 프로젝트가 터진 것도, 상당 부분은 그 일을 넘겨받은 사람들이 허점을 제대로 메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반면 강지현은 프로젝트와 데이터를 살려 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예전에 이경 그룹이 지금보다 더 큰 위기를 맞았을 때도, 결국 상황을 뒤집은 건 강지현이었다.상황은 순식간에 나빠졌고, 시간도 많지 않았다. 이규진 역시 더는 버틸 수 없어 결국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적어도 당분간은 회사가 강지현 없이 굴러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뭐 해?”이도운이 방으로 돌아왔을 때, 백하린이 자기 서류가방 안을 뒤지고 있는 걸 발견했다.“아무것도 아니야.”백하린은 흠칫 놀라더니 얼른 서류 가방을 집어 들었다.“좀 정리해 주려고 했어. 근데 마침 작은 벌레 같은 게 보여서.”“내 물건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이도운은 지금 백하린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는 곧장 소파에 털썩 앉아 셔츠 깃을 풀어 헤치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그가 생각해야 할 건, 내일 어떻게 강지현의 마음을 돌리고 다시 신뢰를 얻어낼지였다.백하린은 손에 들고 있던 걸 내려놓고 이도운의 안색을 살폈다. 아무래도 또 강지현 때문인 듯했다.사실 그녀도 지난 며칠 내내 불안했다.강지현이 두 사람의 일을 밖으로 터뜨릴까 봐 두려웠고, 그렇다고 이도운이 강지현에게 휘둘리고 회사까지 강지현의 손에 넘어가는 꼴도 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녀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며칠 사이 회사에 갑자기 큰 문제가 터졌고, 이규진도 따로 그녀를 불러 여러 번 설득했다.큰 그림을 생각하라고, 이도운을 생각하라고, 우선은 강지현부터 달래야 한다고 했다.게다가 오늘 이도운이 돌아오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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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3화

백하린의 그 말을 듣고도, 이도운은 예전처럼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건성으로 웃어 보였을 뿐이었다.예전에는 분명 백하린이야말로 자기와 진짜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자기를 위해 이 정도까지 참고 견딜 수 있는 여자였으니까.하지만 그녀가 아이와 두 사람의 일을 들먹이며 이씨 가문을 협박한 뒤부터는, 이도운 마음속에서 강지현은 이미 백하린을 훨씬 앞질렀다.적어도 강지현은 사랑도 미움도 뜨거웠고, 사랑하면 사랑하고 미우면 미워하는 사람이었다. 반면 백하린은 몹시 위선적이었다.이토록 자기를 원망하면서도, 입만 열면 사랑이라는 이름을 내세우고 있었다.“그러고 보니, 전에 강지현 연구 논문 몇 개 저장해 둔 거 있지?”백하린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이도운은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되물었다.“왜?”“별건 아니고, 그냥 좀 보고 싶어서.”백하린은 이도운의 옆에 앉았다.“나도 원래 데이터 쪽에 관심 많잖아. 이번 기회에 좀 더 공부해 보려고.”“책 보면 안 돼? 꼭 걔 논문을 봐야 해?”이도운은 조금 난감했다.강지현의 논문들은 전부 발표된 적 없는 것들이었다. 특수 연구 자료에 가까웠다.두 사람이 막 결혼했을 무렵, 강지현은 그를 믿고 그 자료들을 혼수처럼 그에게 넘겼다.그는 그걸 계속 소중히 간직해 왔고, 누구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부탁할게. 나도 강지현이 대체 어디가 그렇게 대단한지 궁금하단 말이야. 나도 계속 공부하면 걔보다 못할 건 없을 거야.”백하린은 이도운을 끌어안고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여자가 계속 매달리며 조르는 걸 끝내 버티지 못한 이도운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USB 하나를 가져왔다.그건 꽤 가치 있는 물건이라, 그는 어딜 가든 늘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마워, 여보!”백하린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그녀는 곧바로 이도운의 뺨에 입을 맞췄다.“너무 오래 보지 마. 밖으로 유출도 하지 말고, 일주일 안에 돌려줘.”“알겠어.”...새벽녘이 되자 갑자기 비가 세차게 쏟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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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4화

‘대단하기도 하지.’엄경미는 지금 한창 화가 나 있는 상태였고, 주단우가 집에 돌아가 봤자 현관 앞에서 밤새 무릎 꿇고 있어야 할 판이었다.그런데 하필 오늘 강지현이 했던 말들이 자꾸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아무 데나 좀 머물고 싶었고, 누군가 옆에 있어 줬으면 했다.아는 사람은 많았지만, 막상 곁에 있어 줄 친구가 필요해지는 순간 그런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주변 사람들은 죄다 이익을 바라거나, 욕정을 품거나 둘 중 하나였다.속마음조차 털어놓을 수 없었다.적어도 현다영은 자기를 싫어하니까, 그 앞에서는 차라리 화라도 낼 수 있었다.“남을 해치려다가 결국 대가를 치른 거죠. 저는 그냥 회사에서 조용히 일만 하고 싶었어요. 부대표님이 지현 언니를 겨냥하지도 않고, 저를 협박하지도 않고, 또... 저를 괴롭히지만 않았어도, 부대표님답게 지내셨으면 저도 존중해 드리고 그 빚도 갚았을 거예요.”현다영은 주단우가 그날 밤 기회를 틈타 자기를 희롱했던 일, 심지어 둘이 관계까지 했다고 속였던 일까지 떠올리자 마지막 남은 측은한 마음도 싹 사라졌다.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주단우가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끝내 열어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예 여지를 안 남긴 건 아니어서, 바로 경찰에 신고하지도 않았다.한참 뒤 문밖이 조용해지자 현다영은 나가 볼까 싶었다. 그런데 문구멍 너머는 새까맣기만 했다.‘이미 간 거겠지?’현다영은 조심스럽게 문을 살짝 열었다. 막 안도하려던 순간, 남자의 몸이 갑자기 앞으로 쓰러지며 그대로 바닥에 쿵 하고 떨어졌다. 그녀는 놀라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주... 부대표님?”복도 센서등이 켜지고 나서야 현다영은 상황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주단우는 자기 집 문 앞에서 그대로 잠들어 버린 상태였다.주단우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옷차림도 흐트러져 있었다. 손에는 겉옷까지 꼭 끌어안고 있었다.현다영은 바닥에 떨어진 그의 다른 손을 보자마자 눈길이 멈췄다. 손바닥의 흉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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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5화

하지만 그 순간, 이도운은 낯설다는 감정을 느꼈다.그의 착각이었을까? 강지현이 언제 이렇게 눈부시고도 닿을 수 없을 만큼 높아진 걸까?“안녕하세요. 강지현입니다. 아마 주주분들은 이미 회사 지분 변동 소식을 들으셨을 거예요. 회사도 최근 여러 일을 겪었고요. 여러분 시간을 오래 뺏고 싶진 않아요. 중요한 몇 가지만 말씀드리면, 그 뒤로는 다들 돌아가셔도 됩니다.”강지현은 이도운의 곁을 곧장 지나쳤다. 상석에 앉아 그녀가 예의를 갖춰 한마디 인사해 주길 기다리던 이규진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그녀는 회의실 맨 앞자리로 걸어가 앉지도 않은 채, 곧장 변호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변호사 한 명이 앞으로 나서서 사람들을 향해 또렷하게 선언했다.“법적 효력을 갖춘 지분 계약서와 회사 정관에 따라, 강지현 씨는 현재 이경 그룹 지분 50퍼센트를 보유한 최대 단일 주주입니다. 확인 결과, 강지현 씨는 그에 상응하는 의사결정권과 경영권을 갖습니다.”회의실 안 사람들은 도무지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강지현은 그냥 회사 직원 아니었나? 그런데 왜 지금 이씨 가문의 지분이 그녀의 손에 들어가 있는 거지?게다가... 지금 이게 무슨 뜻이라는 걸까?낮은 웅성거림이 번져 나갔고, 이도운의 얼굴도 순식간에 굳어졌다.“지현아! 이러지 마. 네가 회사 최고 권한을 갖게 됐다고 해도, 뭘 하려면 먼저 아버지랑 상의해야지.”강지현이 오랜 세월 회사를 위해 헌신했고, 이제 진짜 주주가 된 이상 한 번쯤 자기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마음은 그도 이해했다.하지만 사람이 이렇게 많은 자리에서 너무 나가면 안 됐다. 그러면 이씨 가문의 체면은 대체 어디에 두란 말인가?이규진도 차가운 얼굴로 강지현을 똑바로 바라봤다.기분이 좋을 리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강지현 하나가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키겠냐는 생각도 있었다.그제야 강지현의 시선이 이도운과 이규진에게 닿았다.하지만 그녀가 두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옅은 조롱이 배어 있었다. 낯설고도 차가웠다.이도운은 갑자기 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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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6화

“헛소리 마!”이규진이 분을 못 이기고 몸을 떨었다.“강지현, 주식 좀 있다고 해서 경영진을 마음대로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아? 이경 그룹은 우리 이씨 가문이 키워 온 회사야. 반제 절차 들어가면, 나가는 건 네 쪽이야.”“해보시죠.”강지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옆에 선 사람을 가볍게 힐끗 보며 덧붙였다.“마침 최근 3년 치 장부를 전부 다시 볼 생각이거든요. 두 분 다 자리에서 물러나는 선에서 끝나면 다행일 겁니다.”회사에서 회계를 건드리는 건 아주 큰 일이었다.이경 그룹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도운이 회사를 맡은 뒤로 백하린 쪽으로 빠져나간 돈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이규진 역시 깨끗할 리 없었다.제대로 털면 감방에 들어가지 않는 것도 다행인 셈이다.이도운은 강지현이 여기까지 밀어붙일 줄은 몰랐는지, 얼굴이 굳었다. “...지현아, 그만하자. 불만 있다면 그냥 나한테 풀어. 때리든 욕하든 다 받아줄게. 아버지가 너한테 못되게 군 적은 없잖아.”이규진은 손가락으로 강지현을 가리키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러다 다급하게 임원들을 향해 소리쳤다.“이건 명백한 권력 찬탈이야! 임시 주주총회 열어서 결정 뒤집을 수 있어! 법무팀 뭐 하고 있어? 당장 소송 준비해!”평소 같았으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움직였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나서지 못한 채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강지현! 네가 뭘 원하든 다 해줄 수 있어. 하지만 회사까지 끌어들이면 안 되잖아. 게다가 이경 그룹이 고작 그 정도 지분으로 흔들릴 만큼 만만한 곳이야? 우리 인맥이랑 자원이 어떤 수준인지, 넌 상상도 못 할 거야!”이도운은 감정을 억누른 채 말했다. 말은 분명 위협이었지만 표정과 말투는 이미 완전히 밀려 있었다.거의 애원에 가까웠다.속으로도 적잖이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강지현에게 쏟아부었던 자신의 마음이 이런 식의 모욕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으니까....저렇게까지 자신을 증오하는 건가.강지현은 더는 이 두 사람을 상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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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7화

애초 이씨 가문의 핵심 프로젝트들은 모두 강지현이 직접 따낸 것이었다.이번에 주상 그룹이 투자금을 빼면서 회사 프로젝트 절반이 줄줄이 무너졌고, 결국 강지현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다시 불려 온 것이었다.“강지현 씨, 이경은 저에게 기회를 줬습니다. 이씨 가문과 개인적인 감정이 있다 해도, 그걸 회사 일에까지 끌어들이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결국 한 주주가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일단 분위기라도 가라앉혀 보려는 의도였다.하지만 강지현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 그녀가 손을 들어 올리자 옆에 있던 변호사가 태블릿을 건넸다.강지현은 화면을 사람들 쪽으로 돌렸다.“다들 아직 뉴스 못 보셨죠? 이런 상황일수록, 각자 이익부터 따져보셔야 합니다. 지금 이경 그룹이 무너지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게 누구겠어요?”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회의실 안이 순식간에 술렁였다. 몇몇 임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두 주주의 얼굴도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졌다.이도운은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였고 이규진은 화면에 뜬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눈이 뒤집힐 듯 일그러졌다.“강지현, 이 배신자! 정말 독하구나!”강지현이 내민 화면에는 오늘 아침 막 터진 속보가 떠 있었다.[해원시 모 기업 대표, ‘중혼’ 의혹. 여직원과 2년간 사기 결혼, 이미 가정까지 있어...]기사 내용은 지나치게 자세했다. 이도운과 백하린의 행적을 거의 전기 수준으로 풀어낸 수준이었다.내용 자체가 워낙 자극적인 데다 배경까지 재벌가이다 보니, 기사 공개 3시간도 채 안 돼 온라인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지금은 주요 매체들이 전부 퍼 나르고 있었고 조회수는 계속 치솟는 중이었다.이도운과 백하린의 실명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눈 부분만 가린 사진이 함께 실려 있어 누군지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기사 속 학교와 회사 역시 가명만 썼을 뿐,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노골적이었다.해원시 재계 사람들은 물론이고 당사자 주변 인물이라면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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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8화

다른 한 주주도 상황을 보더니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저도 찬성입니다! 강 회장님, 바로 집행해 주십시오!”“은혜도 모르는 것들!”이규진은 분노에 차 두 사람을 손가락질하다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얼굴은 붉은 기운이 돌다가 이내 푸르게 질려 갔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웠다.이도운이 급히 그를 붙잡았다. 그의 얼굴 역시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강지현, 우리 몇 년을 알고 지냈는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나한테 복수하면 네 속이 풀리겠냐고!”“도운아, 이제 좀 알겠지? 네가 그렇게 감싸던 그 여자가. 네가 그렇게 믿었던 사람이 널 어떻게 대하는지... 얼마나 악독한 사람인지...”이규진은 이를 악물며 겨우 버티고 서서, 이도운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이번에는 강지현이 나서기도 전에, 눈치 빠른 임원이 경비를 불러 두 사람을 내보내도록 했다.몇 명의 경비원이 이도운과 이규진을 에워쌌다. 망설이는 기색은 있었지만 태도는 단호했다.“이 대표님, 이 회장님. 먼저 돌아가시죠. 이대로면 경찰을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비켜!”이규진은 강지현을 노려본 뒤, 이도운의 부축을 뿌리치고 스스로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평생을 재계에서 군림해 온 그였기에 이런 치욕은 처음이었다. 목구멍 끝까지 피비린내가 올라오는 듯했다.이도운은 그 자리에 서서 힘이 빠진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강지현을 바라보면서도, 미워해야 한다는 생각과 달리 머릿속에는 함께했던 시간들만 떠올랐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어떻게 저렇게 단번에 마음을 끊어낼 수가 있지? 함께할 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같이 가겠다고 했으면서.하지만 아무리 바라봐도 강지현은 끝내 그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두 사람이 회사에서 쫓겨나오자마자, 이규진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이도운이 놀라 달려가 그의 몸을 받아냈다.“아버지, 아버지!”...한 시간 뒤, 응급 처치를 마친 이규진은 중환자실로 옮겨졌다.평소에도 고혈압이 심했던 그는 이번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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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9화

회사 상황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이씨 가문 사람들만큼이나 분노가 치밀었지만 지금 그녀는 이경 그룹 안주인이었다. 집안과 이도운을 지켜야 하는 입장이었기에 절대 흔들릴 수 없었다.권미숙은 연세가 있어 병원에 계속 머물기 어려웠고, 이규진이 응급 처치를 마치자 문수정이 노인을 먼저 모시고 돌아갔다.병원과 이도운 곁을 지키는 건 자연스럽게 백하린의 몫이 됐다.백하린은 몇 번이나 깊게 숨을 고르며 마음을 다잡았다.강지현이 이씨 가문과 이도운에게 한 짓을 떠올리면 속이 뒤틀릴 만큼 분했지만 도저히 감정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그녀는 관련 기사를 두 번 다시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화면을 가득 메운 댓글들은 하나같이 그녀와 이도운을 향한 비난뿐이었다. 입에 담기 힘들 정도로 거친 말들이 쏟아졌다.이런 사람들은 늘 남의 일에는 쉽게 돌을 던진다. 도덕적인 잣대는 누구보다 높게 들이대면서, 정작 자기 삶은 들여다볼 생각도 하지 않는다.그 짧은 오전 사이에, 백하린의 개인 계정과 SNS는 모조리 털리다시피 했다.학교와 업계에서 쌓아온 좋은 이미지, ‘여신’이라 불리던 평판도 한순간에 무너졌다.지인들과 제자들은 사실 여부를 묻는 메시지를 보내왔고 그동안 공들여 쌓아온 인맥 중 일부는 아무 말 없이 연락을 끊어버렸다.그녀가 입은 타격 역시, 이도운이나 이씨 가문 못지않았다.백하린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이도운을 부축해 일으켰다.이도운은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눈빛은 흐릿하게 풀려 있었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그녀를 바라봤다.목이 메인 듯 그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넌 집에 가 있어. 아버지는 내가 지킬게. 요즘 분위기도 안 좋으니까, 당분간 밖에 나다니지 마.”“이럴 때일수록, 우리 둘이 같이 버텨야지.”백하린은 그의 몸을 감싸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도운아, 걱정 마. 너 혼자 두지 않을게.”이도운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긴 했지만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적어도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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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0화

다만 그 전에, 이씨 가문이 쥐고 있는 지분부터 완전히 희석시킬 필요가 있었다.이경 그룹은 앞으로 이씨 가문과 완전히 선을 긋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말이다.이경 그룹을 나서자, 주변에서 시선이 쏠려왔다. 대부분은 경계와 두려움이 뒤섞인 눈빛이었다.온라인에 퍼진 뉴스를 다들 이미 본 상태였다. 겉으로 보면 이도운이야말로 최악의 인물이었지만 강지현의 방식 역시 만만치 않게 냉혹했다.배신한 남자를 향한 복수라 해도 그 여파는 결국 이경 그룹 전체를 흔들고 있었다.게다가 모두가 강지현처럼 단호하게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건 아니었기에, 자연스럽게 두려움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강지현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했지만 마음 한편은 묘하게 복잡했다....그날 밤, 집에 돌아오자마자 강지현은 김태하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하루 종일 정신없이 바빴고 아침에 잠깐 오늘은 바빠서 영상통화 못 할 수도 있다고 미리 말해둔 게 전부였다.하루 세 번 통화하자는 약속까지 어긴 셈이라, 조금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하지만 전화를 걸었을 때 김태하는 바로 받지 않았다.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나 싶어, 강지현은 먼저 라면부터 끓이기로 했다.집에는 먹을 것도 많고, 지순옥이 늘 좋은 음식들을 챙겨주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은 오랜만에 라면이 당겼다.라면이 막 완성될 즈음, 김태하에게서 영상통화가 걸려 왔다.강지현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휴대폰을 주방 바 테이블에 세워 두고 갓 끓인 라면도 함께 들고 왔다.화면이 켜지자 호텔방에 있는 김태하가 눈에 들어왔다. 막 돌아온 듯했고 손에는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옆에서는 최동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문을 닫으라고 지시한 뒤, 그는 강지현을 향해 말했다.“미안해. 방금 엘리베이터 안이었어.”“괜찮아. 다음부터는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돼. 쉬고 나서 천천히 받아도 되니까.”말을 하던 강지현이 문득 화면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김태하의 화면은 거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상태였다. 조명도 썩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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