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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1화

강지현의 고발에 증거가 없다는 건 둘째 치고, 계약서의 절반만 엄경미 손에 들어가면 주상 그룹의 주인은 사실상 바뀌게 된다.엄경미는 강지현이 김태하 생각에 애가 타고 직접 나서지도 못하니 판단력이 흐려진 모양이라고 여겼다.그래서 오늘까지 산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경찰이 강지현과 주고받은 계약서를 전부 내밀며 강지현이 어디 있느냐고 추궁하자 그제야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달았다.강지현의 목적은 김태하가 아니었다.처음부터 엄경미를 노리고 벌인 일이었다.그녀는 일부러 증거를 남겨 두었다. 모두 엄경미가 재산을 노리고 강지현을 해쳤다고 의심하게 만드는 것들이었다.강지현의 행방이 확인되지 않는 한 계약 절차는 일단 중단되고, 엄경미도 조사를 위해 구금될 처지였다.그러나 몇 시간 동안 이어진 경찰의 질문에도 엄경미는 능글맞게 같은 말만 반복했다.지난 이틀 동안 휴가를 보내고 있었고, 산장 직원들이 모두 증명해 줄 수 있으며 강지현은 본 적도 없다고 잡아뗐다.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탓에 엄경미는 우선 경찰에 연행돼 조사를 받게 됐다.현다영은 엄경미가 떠나기 직전 끝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엄경미 씨! 하늘이 보고 있다는 말도 모르세요? 정말 벌 받을 일 없을 것 같아요?”엄경미가 코웃음을 쳤다.“벌? 정말 그런 게 있다면 나한테 잘못한 인간들은 왜 아직 멀쩡하지?”엄경미는 도발적으로 현다영과 최동윤을 차례로 훑어봤다.“명색이 지현이 어머니인데 딸이 사라졌으니 나도 걱정은 되지.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어쩌면 원래 그런 팔자인지도 모르지. 정말 다시는 못 돌아온다 해도 누구를 탓하겠니?”“당신...!”“다영 씨, 진정하세요!”현다영이 당장이라도 엄경미에게 달려들 듯하자 최동윤이 팔을 단단히 붙잡았고 경찰이 엄경미를 데리고 사라질 때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현다영과 달리 최동윤은 지나칠 만큼 침착했다.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처음부터 강지현이 위험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도 최동윤은 꼬박 하루를 기다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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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2화

주단우는 새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있었다.셔츠 목 부분을 시원하게 풀어 길고 하얀 목선이 드러나 있었고, 턱을 살짝 치켜든 채 주변에서 연이어 들리는 ‘대표님’이라는 호칭을 즐기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현다영이 멈칫했다. 곧장 다가가려는데 옆에 있던 동료가 붙잡았다.“주단우 지금 무기한으로 주상 그룹 대표 직무를 대행하고 있어. 괜히 건드리지 마.”팀원 대부분은 강지현이 직접 데리고 일하던 사람들이었다. 주단우가 돌아온 이유가 좋을 리 없다는 것쯤은 모두 알고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강지현이 없었다. 상황이 달라진 만큼 현다영까지 피해를 입는 건 막고 싶었다.강지현이 엄경미에게 넘기기로 한 자산 계약은 아직 동결된 상태였지만, 주상 그룹의 권한 자체는 엄경미에게 넘어가 있었다.엄경미는 수사를 받느라 회사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지만 주단우에게 자신을 대신할 권한을 줬다.엄경미에게 정식으로 권한을 위임받은 만큼 주단우는 이제 명실상부한 주상 그룹 대표였다.물론 그가 이 시점에 돌아온 이유가 강지현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었다.엄경미가 미리 주단우를 보석으로 빼낸 것도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주상 그룹 정관에는 최고 권한을 대행할 수 있는 사람이 반드시 주씨 가문 사람이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엄밀히 따지면 엄경미 입장에서도 주단우 외에는 회사를 대신 맡길 사람이 없었다.두 모자가 무슨 계산을 하는지는 생각할 것도 없었다.엄경미는 주승호가 평생 일군 주상 그룹을 텅 비워 버릴 생각이었다.이대로라면 자산과 사업이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빠르게 다른 곳으로 넘어갈 테고, 강지현이 엄경미에게 넘긴 계약서 역시 순식간에 아무 의미가 없어질 수 있었다.그렇게 되면 강지현이 다시 나타나든 말든 엄경미의 승리였다.주단우는 현다영 곁을 지나가다 일부러 걸음을 늦췄다.“대표님.”주변 사람들이 마지못해 인사를 건넸다.현다영만 이를 악문 채 아무 말 없이 주단우를 노려봤다.“이야, 이게 누구야. 강지현이 제일 믿는 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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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3화

현다영은 분노로 온몸이 떨렸다. 아까운 직장이긴 했지만 강지현도 없는 회사에 자신이 남아 있을 이유는 없었다.그녀는 곧바로 사원증을 벗어 주단우에게 던졌다.“해고하실 필요 없어요. 제가 알아서 나갈 테니까요. 그리고 원영 씨 말이 맞아요. 주단우 씨를 개라고 하면 개가 억울하겠네요. 줏대도 없이 남이 시키는 대로 사는 모습, 정말 한심해요.”이를 악물고 뱉어 낸 말에 주단우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곧 코웃음을 쳤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보안 요원을 불렀다. 하원영과 현다영을 억지로라도 끌어내려는 분위기였다.그때 주단우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누가 해고한댔어? 상사랑 직원 사이에 작은 마찰 좀 있었다고 이렇게까지 호들갑 떨 일인가?”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졌다.하원영과 현다영도 예상 밖이라는 얼굴이었다.주단우는 현다영을 한 번 힐끗 보더니 손끝으로 입가를 닦았다.“때릴 만큼 때렸고 욕할 만큼 욕했잖아. 난 다 넘어가 주겠다는데, 그래도 그만두겠다면 굳이 붙잡지는 않지.”그 말을 끝으로 주단우는 몸을 돌려 느긋하게 자리를 떠났다.주단우가 사라지자 모여 있던 사람들도 흩어졌다.권력의 눈치를 보는 직원들도 있었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먼저 다가와 현다영과 하원영을 위로했다.주단우는 예전에도 회사에서 평판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적어도 이 정도로 노골적이지는 않았다.강지현이 없으니 이제는 아예 가식조차 떨지 않았다.현다영은 더 구경거리가 되고 싶지 않아 하원영과 함께 회사를 빠져나왔다.하원영도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다. 그러나 지금 주상 그룹을 도울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곧바로 떠올랐다.주병찬.주병찬은 주상 그룹의 주주 중 한 명이었다. 주단우를 억누를 수 있는 사람도 사실상 그뿐이었다.하지만 강지현은 하원영과 주시언을 위해 주병찬과 대립한 상태였다. 그가 사정을 안다 해도 선뜻 나서 줄 가능성은 낮았다.방법이라면... 주시언이 직접 부탁하는 것뿐이었다.주시언은 아직 서경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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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4화

육운성은 김태하의 성격을 잘 알았기에 계속 전화를 걸어 왔다.김태하는 아예 휴대폰을 꺼 버리고 혼자 계속 차를 몰았다. 조금만 더 가면 인적이 완전히 끊기는 구역이었다.육운성이 데려온 사람도 많지 않았다. 상대가 일부러 함정을 판 게 아니라 해도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육운성은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다.김태하도 그 점은 이해했다. 육운성은 친구이기 전에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책임져야 했다.결국 그는 중간에 육운성 쪽 사람들까지 길가에 내려 버렸다.이제부터는 혼자 가야 했다. 앞에 어떤 위험이 기다리든, 함정이 놓여 있든 상관없었다.강지현이 위험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한 번을 운에 맡길 생각은 없었다.한 시간을 넘게 더 달리자 김태하의 몸도 한계에 가까워졌다.그는 손바닥을 세게 깨물었다.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번질 만큼 강한 통증이 밀려들자 멋대로 떨리던 몸이 가까스로 진정됐다.그때 앞서가던 차가 좁은 비포장 샛길로 사라졌다.김태하는 곧바로 속도를 높여 따라붙었다.하지만 길은 얼마 가지 않아 끊겼다. 끝에는 버려진 낡은 흙벽 건물 하나가 서 있었다.어둠 속에서 갑자기 강한 빛이 차창을 뚫고 들어왔다. 김태하는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눈앞을 가렸다.잠시 뒤 누군가 차 앞으로 다가왔다. 눈이 빛에 익숙해지고 나서야 차 밖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평범한 옷차림의 건장한 남자 몇 명이었다. 눈에 띄는 무기는 들고 있지 않았지만 온몸을 빈틈없이 가린 탓에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다.김태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몸속에서 치받는 메스꺼움과 어지럼증을 억누른 뒤 곧장 차문을 열고 그들 사이로 걸어갔다.서늘한 산바람이 김태하의 창백한 얼굴을 스쳤다.창백한 얼굴과 달리 그는 여전히 꼿꼿하게 서 있었다. 겉으로만 보면 조금도 약해 보이지 않았다.김태하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혼자 차에서 내리자 앞에 서 있던 남자들도 잠시 당황했다.‘혼자 여기까지 쫓아왔다고? 겁도 없나?’“어디 있어.”김태하가 차갑게 물었다.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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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5화

칼날이 조금 더 앞으로 밀려왔다.날카로운 끝이 금방이라도 피부를 뚫을 듯했다. 서서히 통증이 번졌지만 김태하는 미간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지현이가 보고 싶어 하는 거라면 뭐든 할 수 있어.”뜻밖의 대답에 뒤에 있던 남자가 순간 멈칫했다.그 말의 의미를 생각할 틈도 없었다. 갑자기 어깨를 세게 얻어맞아 팔 전체가 순식간에 저렸다.손에서 힘이 풀리는 순간 김태하가 재빨리 몸을 돌렸다. 어느새 단검은 뒤로 묶여 있던 김태하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언제 풀었는지 두 손을 묶고 있던 줄도 이미 느슨해져 있었다.김태하는 순식간에 단검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남자는 칼이 자신에게 날아올 거라 생각해 다급히 뒤로 물러서며 팔을 들어 막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날카로운 여자의 외침이 방 안을 갈랐다.“김태하!”모두가 눈앞의 광경을 보고 굳어 버렸다. 김태하가 든 단검의 끝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목을 향하고 있었다.하얀 목선을 따라 가느다란 피가 길게 흘러내렸다.등 뒤의 작은 창으로 스며든 달빛이 김태하의 곧게 선 몸을 길게 바닥에 드리웠다. 그 그림자는 그대로 강지현의 발끝까지 이어졌다.강지현은 거의 달려들다시피 김태하 앞으로 뛰어왔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 김태하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단검이 바닥에 떨어지며 맑은 쇳소리를 냈다.김태하가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잠시 넋을 잃고 강지현을 바라보다 겨우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람에게 손을 뻗기도 전에 강지현의 손바닥이 먼저 날아왔다.짝!힘껏 내리친 소리가 텅 빈 폐건물 안에 울렸다. 너무 세게 맞아 몸이 순간 휘청할 정도였다.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화끈한 통증에 김태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강지현은 손을 허공에 든 채 멈춰 있었다.손끝이 가늘게 떨렸고 숨도 거칠게 차올랐다.강지현은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채 김태하를 노려봤다. 분노와 함께 깊은 공포와 뒤늦은 두려움이 뒤엉켜 있었다.몇 초 뒤 눈물이 차올랐지만 끝까지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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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6화

강지현의 목소리는 더 차갑게 굳어졌다.참고 있던 눈물이 결국 뺨을 타고 흘렀다.김태하 역시 눈가가 붉었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한 걸음씩 강지현에게 다가갔다.거리가 좁혀지자 강지현은 고개를 돌리려 했다. 아직 감정이 가라앉지 않아 김태하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그런데 다음 순간 김태하가 손목을 붙잡아 자신 쪽으로 세게 끌어당겼다. 다른 팔이 허리를 감싸며 꼼짝 못 하게 품 안에 가뒀다.강지현은 반사적으로 몸을 빼려 했지만 김태하가 그대로 입술을 막았다.순간 멍해졌던 강지현은 곧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세게 두드렸다.그럴수록 김태하의 입맞춤은 더 깊어졌다. 강지현이 세게 밀어낼수록 김태하는 악에 받친 사람처럼, 미쳐 버린 사람처럼 더 깊게 입을 맞췄다.입안의 상처에서 배어 나온 비릿한 피 맛을 머금은 혀가 강지현의 입술 사이를 거침없이 파고들었다.쇠 맛에 강지현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김태하의 익숙한 체온과 숨결이 닿자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결국 눈물이 또 흘렀다.이번에는 강지현만의 눈물이 아니라 김태하의 눈물까지 뒤섞였다.두 사람의 입맞춤이 차츰 누그러지자 피비린 단맛과 눈물의 씁쓸한 짠맛이 뒤섞였다.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눈치껏 밖으로 물러났다.김태하의 입맞춤은 끝날 줄 몰랐다. 되찾았다는 안도와 뼛속까지 사무친 그리움, 미안함과 애틋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김태하는 강지현의 입술을 세게 눌러 맞추며 몇 번이고 깊이 파고들었다. 숨결이 얽힐 때마다 그녀를 한순간에 전부 삼켜 버리고 싶은 사람처럼 다급했다.두 사람은 벽에 기대 있다가 천천히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낡은 나무 의자가 넘어지며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김태하가 강지현을 아래에 둔 채 마지막 선을 넘으려던 순간, 갑자기 몸을 떨었다. 그리고 힘이 다 빠진 사람처럼 강지현을 끌어안은 채 바닥에 누워 버렸다.강지현의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고 입술에는 얼룩진 입맞춤의 흔적이 남아 달빛 아래 유난히 야릇해 보였다.김태하는 손을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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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7화

물론 김태하도 완전히 확신한 건 아니었다.강지현이 꾸민 일이라면 이렇게까지 일을 벌여 자신을 만나려 한 만큼 실망시킬 수 없었다. 그녀가 꾸민 일이 아니라 해도, 망설이지 않고 그녀와 함께 죽을 각오였다.“지현아, 일부러 화나게 하려던 건 아니야.”김태하가 조금 다급한 목소리로 한마디씩 설명했다.“네가 일부러 사람을 시켜 나를 납치하게 한 걸 보고, 정말 많이 화가 났나 싶었어. 이걸로 네 화가 풀릴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기꺼이 할 생각이었어.”“네가 죽으라고 해도... 난 그럴 수 있어. 진심이야.”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지현이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막았다.“누가 그런 말 듣고 싶댔어!”강지현이 화를 냈다.“우리가 이혼하고 완전히 남이 된다 해도 네가 죽을 필요는 없어.”“이혼...?”김태하가 굳었다. 죽으라는 말보다 이혼이라는 두 글자가 더 아프게 꽂혔다.그동안 강지현의 마음이 자신에게서 멀어진 걸까? 심지어 이혼해서 완전히 갈라설 생각까지 한 걸까?“나랑... 이혼하고 싶어?”강지현도 순간 당황했다.화가 난 나머지 생각 없이 튀어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지난 며칠 동안 김태하가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는데, 정작 그는 해원시로 돌아와서도 일부러 모습을 감췄다고 생각하니 다시 화가 치밀었다.강지현은 굳이 말을 거두지 않았다.“난 나 속이는 거 싫다고 했어. 배신하는 건 더 싫고.”“네가 더는 나랑 같이 있고 싶지 않다면 억지로 붙잡을 생각 없어. 좋게 끝내면 돼. 이혼하면 되잖아.”“내가 언제 너랑 끝내고 싶다고 했어?”김태하가 몸을 일으켰다.“언제 헤어지고 싶다고 했는데?”차분하게 말하려 했지만 짧은 문장 몇 개를 뱉는 동안 목이 몇 번이나 메었다.강지현도 마음이 흔들렸다.옆눈으로 슬쩍 본 김태하의 표정은 연기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쉽게 봐 줄 생각은 없었다.“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잖아. 얼마나 절망했고, 얼마나 힘들었는지도 다 알면서... 해원시에 돌아와 놓고 나를 안 만났잖아.”“지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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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8화

김태하는 허둥지둥 강지현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자책감이 치민 그는 강지현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을 세게 치게 했다.“내 잘못이야. 내가 죽어도 싸!”“그 말 하지 마!”그 말을 들은 강지현은 더 다급해졌다. 손을 빼내 김태하를 밀자, 그는 그대로 벽에 등을 기대게 됐다.창문 아래로 흘러든 달빛이 두 사람을 희미하게 감쌌다.“알았어. 안 할게...”김태하는 미간을 찌푸린 채 강지현을 바라봤다.미안함과 안쓰러움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김태하, 넌 내 남편이야.”강지현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작은 몸으로 김태하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마치 품을 파고드는 고양이 같았다.눈은 아직 붉었지만 기세만큼은 김태하에게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강지현이 한마디씩 또렷하게 말했다.“다시 말할게. 내가 원하는 남편은 아프기도 하고 지치기도 하고, 나를 필요로 하면서 나도 그 사람을 필요로 할 수 있는 사람이야.”“혼자 희생하는 것밖에 모르는, 뭐든 다 해낼 수 있는 히어로가 아니야.”“언제 또 사라질지 몰라서 내가 계속 불안하고 무서워해야 하는 사람도 싫어.”“그런 사랑이라면... 차라리 안 할 거야.”김태하는 충격에 몸을 떨었다. 강지현이 이렇게까지 단호하고 진지하게 경고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이 모든 걸 쏟아붓는 방식이 이렇게 잔인하고, 심지어 받아들이기 힘든 사랑이 될 수도 있다는 건 생각해 본 적 없었다.사랑 앞에서 자신은 스스로 생각했던 것만큼 단단하거나 태연하지 못했다. 강지현보다 자신이 더 겁이 많았다.“지현아.”“나 버리지 마.”한없이 낮아진 목소리였지만, 이번만큼은 솔직하고 담담했다.강지현을 믿는다고 말했지만 사실 김태하는 줄곧 두려워하고 있었다. 예전처럼 늘 강지현의 곁에 서서 뒤를 받쳐 주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강지현은 대답하는 대신 김태하를 똑바로 바라봤다.“이거 정말 우리 끝이 될 수도 있어.”“죽어서 헤어지는 게 아니라... 마음이 죽어서 끝나는 거야.”마지막 말이 조용히 떨어졌다.그런데도 김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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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9화

강지현은 말없이 김태하의 이야기를 들었다.김태하가 담담하게 말할수록 가슴은 더 아려 왔다.이번에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 M국에서 있었던 일부터 해원시로 돌아온 뒤까지, 자신이 겪은 일과 그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차근차근 털어놓았다.김태하는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몇 마디로 지나갔지만 강지현에게는 어느 하나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결국 눈물이 또 흘러 김태하의 손끝을 적셨다.“왜 진작 말 안 했어...”떨리는 목소리로 묻던 강지현이 그의 팔을 조심스레 걷어 올렸다.어디를 얼마나 다쳤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드러난 팔에 울퉁불퉁하게 남은 흉터를 보는 순간 더는 손을 댈 수가 없었다.몸 때문에 자신을 피한 게 아닐까 생각해 본 적은 있었다.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김태하는 원래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침착했고, 무엇이든 완벽해야 직성이 풀렸다. 그런 겉모습과 달리 마음 한구석에는 늘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살았다.어쩌면 죽음은 받아들여도 망가진 자기 모습만큼은 견디지 못했을지도 몰랐다.강지현도 문득 자신이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어느 날 갑자기 몸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게 된다면, 과연 아무렇지 않게 다시 살아갈 수 있을까.스스로조차 믿을 수 없게 된 사람에게 무조건 버티라고 할 수는 없었다.강지현은 아무리 절망해도 마지막에는 자신을 믿었지만 김태하는 달랐다. 절망에 빠진 순간, 스스로에 대한 희망부터 놓아 버렸다.그 생각이 들자 더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강지현은 김태하를 힘껏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미안하고, 또 가슴이 아팠다.김태하가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알았어. 앞으로는 정말 다시는 너 두고 혼자 가지 않을게.”잠시 후 낮게 덧붙였다.“지현아,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줘.”“바보.”강지현이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왜 이렇게 바보 같아.”이제 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사람을 만난 걸까 싶었다.자기 사정을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었으면서도,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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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0화

얼마 지나지 않아 육운성이 사람들을 데리고 도착했다.김태하와 강지현은 아직 방 안에 기대 앉아 서로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닫힌 문을 본 육운성은 굳이 사람들을 들여보내지 않았다. 문을 가볍게 두드려 도착했다는 것만 알린 뒤 일행과 함께 밖으로 나와 기다렸다.지금 김태하에게는 방해받고 싶지 않은 시간일 터였다. 친구로서 굳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는 않았다.지난 며칠 동안 육운성이 알던 김태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처음에는 자신과 비슷한 부류라고 생각했다. 감정보다는 이해득실을 먼저 따지고, 누구에게도 쉽게 정을 주지 않는 사람.그런데 아니었다. 김태하는 한 사람에게 이토록 깊이 빠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솔직히 조금 부럽기도 했다. 평생을 살아도 이렇게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강지현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까지 판을 벌여 김태하를 끌어낼 정도라면 그녀 역시 그를 놓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육운성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한 모금 깊이 들이마시다 문득 피식 웃었다. 생각해 보니 김태하가 혼자 여기까지 온 것도 진작 상황을 눈치챘기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정말 서로를 지독하게 잘 아는 두 사람이었다. 자신이 그렇게 말려도 꿈쩍하지 않던 김태하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도 결국 강지현뿐이었다.얼굴을 보지 않고도 서로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방 안에서도 밖의 인기척을 들은 모양이었다. 김태하가 강지현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했다.“친구 한 명 소개해 줄게. 육운성이라고 해.”“널 구해 준 사람이야?”“응. 내 동창이야.”김태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낮게 웃었다.“하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겼나 봐. 그때는 정말 다시는 널 못 볼 줄 알았거든.”“그럼 나도 제대로 감사해야겠네.”강지현은 가만히 김태하의 얼굴을 바라봤다.그동안 살이 많이 빠져 윤곽이 전보다 선명해져 있었다. 달빛이 비스듬히 내려앉자 또렷한 얼굴선이 더욱 도드라졌다.서늘할 만큼 잘생긴 얼굴이었다.김태하가 웃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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