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기억을 잃은 척할 때는 언제고: Chapter 101 - Chapter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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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화

“음... 근데 수진이 어머니가 좀... 뭐랄까, 날 보며 우시는 데 진짜 마음이 안 좋더라고. 만약에 도수진 감옥 가버리면 그 집 아빠는 분명 엄마 치료 안 해줄 텐데, 그러다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어떡해.”안혜슬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동정심은 있어도 남을 구해줄 능력은 없었다.강하율은 그녀의 뜻을 이해했다.이내 생각에 잠기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도수진 어머니 통해서 전해. 원한에는 다 주인이 있는 법이라고. 만약 수진이가 꼭 감옥에 가야 한다면 원망해야 할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고 말이야.”안혜슬이 말끝을 늘어뜨리며 감탄했다.“역시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먼저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잖아. 이 정도는 인지상정이지.”강하율이 영악하게 눈을 깜빡였다.“맞아, 맞아.”안혜슬은 고개를 끄덕이며 멀지 않은 곳에 늘어선 차들을 가리켰다.“그 사람들이 곧 나올 것 같아. 너 얼른 가봐, 난 다른 데 청소하러 가야 해.”강하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호텔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때마침 헬렌 로어가 밖으로 나오던 참이었다.인사를 하려던 찰나, 뜻밖에도 그곳에 배윤호도 함께 있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차 뒤편에 몸을 숨겼다.“역시 배 대표님은 앞날을 내다보는 눈이 탁월하시군요. 내가 당신 어머니 가문과 손 잡는 걸 알면 배씨 가문 사람들이 가만 있지 않을 테니, 차라리 나랑 배진 그룹이 협력하는 것처럼 꾸며서 동생분이 판을 깨도록 유도했잖아요.”“덕분에 난 헤라스 가문과 자연스럽게 협력을 이어가게 됐고, 대표님은 별장을 되찾았으니 여기 표현으로 ‘일석이조 ’인 셈이네요.”배윤호가 눈을 내리깔며 답했다.“헬렌 씨께서 잘 협조해주셔서 가능한 일이죠.”대화를 듣는 순간 강하율은 흠칫 놀랐다.자신의 추측은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했다.소위 협력이라는 건 처음부터 끝까지 배윤호가 설계한 덫이었다.그렇다면 자신 또한 이용당한 처지였다.강하율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복잡한 감정의 파동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이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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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화

“분명 뭐요?”강하율이 되물었다.배윤제는 묵묵부답했지만 얼굴에 가득 서린 분노까지는 속이지 못했다.아마도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지 않냐고 말하고 싶었던 거겠지.하지만 거듭된 이용과 함정 끝에 이제 그와 확실히 결판을 내기로 마음먹었다.차라리 이번 기회에 각자 갈 길 가고, 관계를 끊고 싶었다.배씨 가문의 은혜는 갚아도 배윤제라는 사람은 절대 다시 받아주지 않으리라.“이렇게 꼬치꼬치 물으시는 의도가 대체 뭐예요? 직원 강하율한테 묻는 건가요, 아니면 전 여자친구한테 묻는 건가요?”“그게 무슨 소리야?”배윤제가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직원으로서 전 모든 고객에게 최선을 다했고, 단 한 번도 선을 넘은 적 없어요. 2년 넘게 평점도 제가 가장 높았고 관리하는 고객도 제일 많았죠. 이미 승진 기회까지 날아갔는데 왜 남의 잘못까지 뒤집어써야 하죠?”“그럼 전 여자친구로서 말해줄까요? 대표님이 기억 잃고 헤어지자고 했던 그 날, 우리 사이는 끝났어요. 앞뒤 사정도 모르면서 무작정 나 가르치려 들고 몰아세우기만 하는 전 남친을 굳이 도와줘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겉으론 내가 매달릴까 봐 겁내면서 속으론 계속 자기 뒤꽁무니나 쫓아다니길 바라는 거예요?”“그것도 아니면... 사실은 기억이 다 돌아와서 저를 추궁하기 위해 묻는 건가요?”마지막 말을 내뱉을 때 강하율의 눈빛에는 떠보는 기색과 함께 일말의 기대가 서려 있었다.배윤제가 기억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기억상실인 척하며 바람을 피웠던 것쯤은 조윤서가 그동안 베풀어준 정을 봐서라도 모르는 척해주려 했다.오늘을 끝으로 그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을 생각이었으니까.적어도 한때 사랑했던 남자가 마음속까지 처참하게 썩어 문드러진 인간은 아니길 바랐던 마지막 배려였다.배윤제의 손에 힘이 점점 더 들어갔고, 안색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마침내 비릿한 비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기억 안 나.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 날 자극해서 기억 되살리려고 애쓰지 말라고. 나도 양보할 만큼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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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화

그녀를 지켜주겠다고 맹세했던 소년은 결국 변해버렸다.강하율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러든지 말든지.”말을 마치고는 뒤돌아서 자리를 떠났다....강하율은 사무실로 돌아가는 대신 부모님이 심은 나무 앞으로 향했다.그리고 아래에 앉아 흩날리는 붉은 리본을 올려다보았다.바람이 불어서 그런지 눈이 따가웠다.절대 우는 게 아니었다. 단지 건조할 뿐이었다.이내 손을 들어 눈을 비비는 순간,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메시지를 확인하니 뜻밖에도 배윤호였다.[언제로 할까?]‘응?’강하율은 찔끔 흘러내린 눈물을 대충 훔쳤다.그제야 배윤호에게 슈트 한 벌 배상해줘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곧이어 휴대폰을 빤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배윤호가 그녀를 이용했던 건, 결국 고백 영상 때문에 본인이 피해를 볼 뻔했기 때문이었다.슈트 값을 치르고 나면 이제 정말 서로 빚진 게 없는 셈이었다.[일요일 어때요?][알았어.]남자의 대답은 매우 간결했다.잠시 후, 강하율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을 떠났다.그녀가 멀어진 뒤, 나무 뒤에서 키가 큰 실루엣 하나가 걸어 나왔다.입에 문 담배에서 피어오른 하얀 연기가 얼굴을 가렸고, 검은 눈동자는 속을 알 수 없이 어둡게 가라앉았다....사무실.강하율은 자리에 앉자마자 고객의 상담 전화를 받았다.한창 진지하게 응대하고 있을 때, 안쪽 유리문 너머에서 한 쌍의 눈동자가 독기 서린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정다인은 어금니를 꽉 깨물더니 시선을 거두어 맞은편의 허지연을 바라보았다.“방금 뭐라고 했어?”“도수진 엄마가 연락이 왔어요. 도수진이 자기 엄마한테 2억 안 보내면 우리 둘 다 불어버리겠다고 한대요.”허지연이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그녀는 실적이 나쁘지 않은 편이었지만, 버는 족족 다 써버리는 ‘욜로족’이었기에 2억은커녕 당장 2천만 원을 내놓기도 어려운 처지였다.정다인이 콧방귀를 뀌며 차갑게 내뱉었다.“겁도 없군. 감히 나를 협박해?”“게다가 배진 그룹이랑 헬렌 로어 협업 깨진 것까지 이미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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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4화

하루가 지났다.강하율은 마침내 일주일간의 업무를 모두 끝마쳤다. 온몸의 뼈마디가 다 쑤시고 으스러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숙소에 돌아오자마자 짐부터 챙기기 시작했다.이번 달은 당장 급하게 응대해야 할 중요한 고객도 없었다.그녀는 곧장 차를 타고 시내에 있는 아파트로 돌아갈 생각이었다.산속 날씨는 도시보다 훨씬 추워 벌써 겨울이 시작된 듯한 착각이 들었다.익숙해지지 않는 이 서늘함에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정리를 마치고 막 출발하려던 찰나, 휴대폰이 울렸다.저장된 이름은 없었지만 유독 눈에 익은 번호였다.그녀는 지체 없이 전화를 받았다.“태석 씨, 무슨 소식이라도 있는 건가요?”장태석은 강하율이 고용한 세 번째 탐정이었다.앞서 고용했던 두 사람은 추적이 너무 힘들다는 이유로 중도에 포기해버렸다.그중 한 명은 강하율에게 이제 그만 포기하라고 권하기도 했다. 아직 한창 젊은 나이인데, 10년 전 사건에 돈과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지 않냐면서.10년이란 세월은 너무나 많은 것을 바꿔놓기에 충분했다.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긴 싫었다. 반드시 아버지의 결백을 밝혀내야만 했다.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찾아낸 사람이 바로 업계의 실력자로 소문 난 장태석이었다.수임료가 좀 비싸긴 했지만 지난 2년 동안 나름의 수확도 있었다.예를 들면 사진이라든가, 간간이 파악되는 행적들까지.다만 매번 한 발짝씩 늦곤 했다.“죄송합니다, 하율 씨. 고인의 유가족이 시골구석에 숨어 있다는 걸 알아내긴 했으나 워낙 영악한 놈들이라 제가 도착했을 땐 이미 출국하고 없더라고요.”“출국이요? 지난번에 사람 시켜서 받아온 사진을 보면 그렇게 형편이 좋아 보이지 않았는데, 해외로 나갈 돈이 어디서 났죠?”강하율이 의아한 듯 물었다.장태석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수소문을 좀 해봤더니, 지난 2년 사이에 갑자기 돈이 좀 생겼나 봐요. 해외여행도 자주 다닌다고 하더군요.”“갑자기 돈이 생겼다라... 그럼 배후에 있는 사람이 조만간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는 뜻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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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화

안 그래도 좁아터진 동네에서 이런 차에 타는 걸 누가 보기라도 하면 재벌이라도 꼬셨냐는 둥 온갖 말도 안 되는 소문이 파다하게 날 게 분명했다.그런데 웬걸, 그녀가 돌아서자마자 뒤편에서 경적이 울렸다.한 발짝 움직일 때마다 빵 하고 소리가 났다.이미 몇몇 사람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강하율을 쳐다보기 시작했다.강하율은 가방으로 얼굴을 가린 채 빛의 속도로 차에 뛰어 올라탔다.운전석의 양승아가 백미러로 그녀를 힐긋 쳐다보았다.“아까는 왜 안 타고 그냥 가신 거예요? 설마 대표님이 직접 내려서 모셔 가길 바랐어요?”“아니에요.”강하율은 고개를 저었다.옆자리에서 싸늘한 시선이 느껴지자 횡설수설하며 변명을 늘어놓았다.“차가 안 보이길래...”“푸흡.”양승아가 웃음을 터뜨렸다.차가 보이지 않았다니?도로 위에 그들이 탄 차보다 더 눈에 띄는 게 어디 있다고.강하율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멍청한 핑계라 실소가 터져 나왔다.배윤호의 시선을 느낀 양승아는 즉시 웃음기를 거두고 운전에 집중했다.차는 텅 빈 도로 위를 거침없이 질주했다.바깥도 조용했지만, 정적이 감도는 차 안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강하율은 고개를 숙인 채 가방끈만 만지작거렸다.지난번처럼 양승아가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을까 봐 이번에는 거의 차 문에 몸을 밀착시킨 채 앉아 있었다.“나 피하는 건가?”남자는 다리를 꼬고 앉아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짚은 채 그녀를 그윽하게 쳐다보았다.강하율은 흠칫 놀라 무심결에 배윤호를 바라보았다.호수 같은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 순간, 그가 헬렌 로어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결국, 그녀도 이용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이내 서둘러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요.”배윤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역시, 들었군.”강하율은 속마음을 들켜버린 아이처럼 당황한 나머지 가방끈을 쥔 손가락이 빨개질 정도로 힘을 주었다.배윤호는 손끝으로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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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화

숙소 근처에 다다를수록 정다인의 미소는 점점 더 부자연스러워졌다.배윤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강하율을 시내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무심코 한마디 던졌을 뿐인데, 덜컥 동의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어떤 직원에게도 강하율과 배윤제의 관계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잠시 생각에 잠긴 찰나, 정다인이 창밖 거리를 가리켰다.“윤제 씨, 여기 생각 보다 북적이네요? 다들 사진 찍느라 정신없고. 얼른 하율 씨 태우고 가야겠어요. 괜히 도촬 당해서 인터넷에 올라오면 또 이상한 소문이 퍼질 수도 있어요.”배윤제가 차창 밖을 슬쩍 내다보자 사람들이 꽤 많았다.강하율의 현재 신분상 그와 엮이는 것은 확실히 적절치 않았다.결국 예전 방식을 쓰기로 했다.이내 정다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적당한 곳에 차 세워. 사람 좀 줄어들면 그때 강하율 데리러 가자.”정다인이 머뭇거렸다.“그럼 하율 씨는...”“어차피 이미 적응됐어.”말을 마치고는 휴대폰을 꺼내 강하율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내려와서 기다려.]강하율이라면 그의 뜻을 알아들을 것이다.예전에도 회의차 왔다가 퇴근길에 그녀를 시내로 데려다줄 때면, 건물 아래 구석진 곳에서 대여섯 시간씩 얌전히 서서 기다리곤 했다.그리고 그는 주변에 사람이 거의 사라질 때쯤에야 뒤늦게 나타났다.그녀가 딱 한 번 불평한 이후로 두 사람 사이의 암묵적인 약속이 되었다.당시의 강하율은 정말이지 착했다.예쁘기도 하고, 말도 잘 듣고.결코 지금처럼 이렇게 고집스럽지 않았는데...또한, 그가 기억을 조금씩 되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강하율에게 희망을 주는 방식이기도 했다.차가 길가에 멈춰 서자 정다인의 마음속에는 기쁨이 차올랐다.막 입을 떼려던 찰나, 채팅창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배윤제를 발견했다.‘또 강하율이야?’정다인은 속으로 이를 갈다가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이내 배윤제의 팔짱을 살며시 끼며 말했다.“윤제 씨, 저 여기 처음 와보는데 거리가 복고풍이라 정말 예쁘네요. 우리 같이 내려서 좀 걷다 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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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화

그리고 다시 문자를 보냈다.[싫으면 말고.]상대방은 답장이 없었다. 아마도 화과자 사러 갔을 것이다.본인이 먹을 게 아니라면 또 누가 있겠는가.당연히 배윤제겠지.그녀에게 점수 딸 틈을 줄 리 없는 정다인이었다.따라서 스스로 그 기회를 잡으려 할 것이다.‘아주 볼만해지겠는걸?’강하율은 몰려오는 잠을 쫓으려고 눈을 거슴츠레 뜬 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그러나 졸음만 더 쏟아졌다.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숏츠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2분도 채 안 되어 옆으로 스르르 쓰러졌다.‘음, 기분 좋아.’조금 딱딱하면서도 말랑하고, 따뜻한 온기까지 느껴지는 무언가.그녀는 몇 번 주물럭거리더니 다시 끌어안고는 잠에 빠져들었다.배윤호는 흠칫 놀랐다.이내 고개를 숙여 자기 무릎을 베고 잠든 여자를 내려다보았다.길게 늘어진 속눈썹이 그림자를 드리웠지만, 눈동자 속에 소용돌이치는 짙은 어둠까지 가리지는 못했다.“강하율.”“...네.”한참 만에 돌아온 대답은 입안에 머문 듯 나른했다.남자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채 더 이상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거리.정다인은 강하율이 급하게 삭제한 메시지를 보고 곧바로 그녀의 의중을 파악했다.이내 실소를 터뜨리더니 배윤제가 휴대폰을 보는 사이 몸을 돌려 화과자를 사러 갔다.“윤제 씨.”남자를 향해 뛰어오는 정다인의 모습은 마치 한 마리의 순진무구한 사슴 같았다.“저랑 같이 구경 다니느라 지루할까 봐 미리 인터넷으로 찾아봤거든요. 마침 이 집 디저트가 딱 윤제 씨가 좋아할 스타일이길래 얼른 가서 사 왔어요. 어서 드셔보세요.”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얼굴에 옅은 홍조가 돌았으며 눈빛은 유난히 애틋했다.천진난만함 속에 이성을 향한 동경이 담긴, 세상 어떤 남자라도 좋아할 법한 모습이었다.배윤제의 시선이 단번에 그녀에게 사로잡혔고, 목소리도 한결 부드러워졌다.“그래.”“제가 먹여줄게요.”정다인은 눈을 깜빡이며 배윤제의 입가로 화과자를 가져갔다.잔뜩 기대하는 여자의 표정에 그는 한입 크게 베어 물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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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화

아파트 입구.강하율은 하품하며 눈을 떴다.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몸에 걸친 정장 재킷이었다.순간 깜짝 놀라 정신이 번쩍 들었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다행히 이번에는 배윤호의 품속으로 돌진하는 실수는 범하지 않았다.옆자리의 남자는 실내등을 켠 채 서류를 살피고 있었다.그리고 눈길조차 안 주고 침을 꿀꺽 삼키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깼어? 집 앞이야.”강하율은 창밖을 힐긋 쳐다보다가 서둘러 재킷을 툭툭 털었다.“윤호 오빠,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네요.”그의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곧이어 여유로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오빠라고 하면 넘어갈 줄 알아?”강하율은 흠칫 놀라더니 무의식중으로 무릎에 놓인 재킷을 바라보았다.‘자면서 침이라도 흘려 옷이 더럽혀졌나?’배윤호는 보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덧붙였다.“내일 뭐 먹을지나 생각해 둬.”그제야 강하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알겠어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배윤호가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왔다.강하율은 본능적으로 물러나다 차 문에 몸이 바짝 밀착되었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게 되자 눈앞에 가득 찬 잘생긴 얼굴을 마냥 쳐다보기만 했다.남자의 뜨거운 숨결이 쏟아져 내렸고,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강하율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인 채 눈을 내리깔았고, 심장은 목구멍까지 튀어나올 듯 요동쳤다.배윤호는 정장 재킷을 가져가며 말했다.“내일 봐.”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살짝 갈라져 있었고, 마치 깃털이 뺨을 쓸고 지나가듯 간질거렸다.“아, 네...”강하율은 후다닥 문을 열고 차에서 뛰어내려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갔다.기분 탓인지, 배윤호의 자세가 어딘지 모르게 이상해 보였다.차 안.양승아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배윤호를 바라보았다.“대표님, 정말 한 끗 차이였어요. 그냥 확 키스하시지. 제가 보기엔 강하율 씨도 예전만큼 대표님을 피하지 않는 것 같던데.”배윤호는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다리를 두어 번 주물렀다.“다리에 감각이 없어.”강하율이 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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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화

이때, 휴대폰이 진동했다.모르는 번호로 걸려 온 전화라 고객인 줄 알고 받았는데, 들려오는 목소리는 다름 아닌 장천우였다.“강하율 씨, 도련님이 몸이 좀 안 좋으시니까 지금 바로 죽 좀 써서 병원으로 가져와요. 도련님 취향은 본인이 제일 잘 알 거 아니에요. 아, 그리고 정다인 씨 것도...”뚜, 뚜, 뚜.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하율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예전 같았으면 장천우가 뒤에서 자기 험담할까 봐 전전긍긍했겠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병원.배윤제는 기운이 다 빠진 채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장천우가 들어서자 미간을 문지르며 물었다.“강하율 언제 온대? 다인이 것도 한 그릇 더 챙겨오라고 말해뒀어?”“그게...”장천우는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배윤제는 무언가 짐작한 듯 눈을 가늘게 떴다.“왜? 뭐라는데?”“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어요.”배윤제의 가슴이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답답해졌다.장염으로 인해 생긴 불쾌감인지, 아니면 강하율의 태도 때문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장천우는 점점 어두워지는 배윤제의 안색을 보고 얼른 다가가 말을 거들었다.“도련님, 제 생각에 강하율 씨는 약속을 바람맞혀 단단히 삐친 모양이에요.”그제야 배윤제는 기분이 한결 누그러졌다.이내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생각에 잠겼다.하긴, 강씨 가문이 몰락한 뒤로 강하율은 줄곧 그에게 의지해 왔다.그동안 쌓아온 감정을 어떻게 한순간에 놓아버릴 수 있겠는가?결국 지금의 행동도 그저 치기 어린 투정일 뿐이라고 확신했다.하지만 이런 식의 반항을 마냥 묵인해 줄 생각은 없었다.배윤제는 장천우에게 손짓하며 명령했다.“사람 몇 명 보내서 강하율 당장 데려...”말을 마치기도 전에 정다인이 창백해진 얼굴로 보온통을 든 채 들어왔다.“윤제 씨가 배고플까 봐 제가 직접 죽을 좀 만들어 왔어요.”죽을 따르는 정다인의 손등이 퉁퉁 부어 있었다.배윤제가 물었다.“손이 왜 그래?”정다인은 얼른 소매를 끌어 내렸고, 서러움이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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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0화

정다인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강하율이 급히 방문을 열자, 의자에 앉아 안절부절못하며 당황해하는 강진철의 모습이 보였다.그 맞은편에는 정다인이 그의 입안으로 무언가를 억지로 밀어 넣고 있었다.“아버님, 제가 아침 일찍 특별히 가서 사 온 케이크예요. 이곳 생활이 고달프다는 거 잘 알거든요. 가끔 달달한 음식도 먹어줘야 마음도 편해지시죠.”강진철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정다인의 접근을 거부했다.정다인은 수갑 때문에 옴짝달싹 못 하는 그를 안중에도 없다는 듯 몰아붙이며 숟가락을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입가에 생크림이 잔뜩 묻은 강진철의 모습은 무척이나 우스꽝스러웠다.정다인은 웃음을 터뜨렸다.“정신병 환자들은 원래 다 이래요? 아, 진짜 웃기네.”“읍, 읍!”케이크를 뱉어내려 몸부림치는 와중에 강진철은 본능적으로 옆에 서 있는 배윤제를 바라보았다.강하율이 몇 번이고 데려와 공들여 소개한 덕분에 유일하게 기억에 남은 얼굴이었다.그는 지금 배윤제에게 소리 없는 구조 요청을 보내고 있었다.정작 당사자는 못 본 척 무심히 대꾸했다.“아버님, 다인이가 좋은 마음으로 챙겨주는 거니까 그냥 드세요.”그 말을 듣는 순간, 강하율은 며칠간 억눌러왔던 분노와 서러움이 물밀듯이 밀려왔다.사람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성큼성큼 다가가 접시에 담긴 생크림 케이크를 정다인의 얼굴에 뭉개버렸다.“악!”깜짝 놀란 정다인이 비명을 질렀다.강하율이 입을 떼지도 않았는데, 배윤제가 그녀를 거칠게 밀쳐냈다.“너 미쳤어? 다인이는 좋은 마음으로 아버님 뵙겠다고 온 거야. 어제 널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간 게 미안해서 사과하겠다고...”“그만해!”강하율은 서슬 퍼런 눈으로 배윤제를 차갑게 쏘아보았다.“관심 없다고! 대체 몇 번을 말해? 당신이랑 저 여자가 뭘 하든 내 알 바 아니니까 당장 꺼져.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기어들어 와?”“그 입 다물어. 투정에도 정도가 있지. 오늘 아버님 뵈러 오라고 먼저 메시지 보낸 건 너잖아. 일부러 시간 내서 와줬더니 대체 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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