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기억을 잃은 척할 때는 언제고: Chapter 111 - Chapter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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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화

정다인은 몰래 이를 악물더니 가방 안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물건을 꺼냈다.그리고 배윤제의 팔을 홱 잡아끌었다.“윤제 씨, 저 때문에 싸우지 마세요. 제가 잘못한 거예요. 하율 씨 아버지께 사과드릴게요.”말을 마치고는 와인 한 잔을 따르더니 강진철에게 내밀었다.“아버님, 예전 생활이 정말 그리우시죠? 제가 특별히 좋은 와인을 준비해 왔어요. 이거 한 잔 드시고 우리 화 풀어요.”오랜 투병과 약물 복용으로 야윌 대로 야윈 강진철은 정다인의 힘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그가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며 피하려 했지만 정다인에게 붙잡혀 옴짝달싹 못 했다.강하율이 버럭 외쳤다.“그 손 놔! 아빠는 지금 환자야, 술 마시면 안 된다고!”보호사가 다급히 제지하려 앞으로 나섰으나 배윤제의 서늘한 눈길과 마주치자 결국 문가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배윤제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한심하다는 듯 강하율을 바라보았다.“다인이가 간호사한테 물어봤어. 술 조금 마시는 건 상관없대. 왜 이렇게 속 좁게 구는 거야? 너 만나려고 오전 내내 정성껏 준비해 온 사람한테.”대수롭지 않은 말투는 마치 아무 일도 아닌 듯했다.하지만 강진철이 정신병원에 입원할 당시 의사는 술은 절대 안 된다며 세 번이나 신신당부했었다.그때, 배윤제도 분명 함께 있었다.이제 와서 저렇게 쉽사리 정다인의 말을 믿어버리다니.정다인이 강진철에게 억지로 술을 들이부으려는 찰나, 강하율의 눈동자가 급격히 수축했다.대체 어디서 그런 괴력이 솟구친 건지 뼈마디가 우두둑거릴 정도로 손목을 비틀어 빼내고는 배윤제를 밀쳐냈다.그러고는 쏜살같이 달려가 아버지를 향하는 술잔을 온몸으로 가로막았다.“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여기서 얼쩡거리지 말고 당장 나가!”“전 정말 하율 씨랑 잘해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제가 그렇게나 싫어요?”정다인의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가득 묻어났지만, 고개를 돌려 강하율을 바라보는 얼굴에는 승리감에 도취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강하율은 정다인이 결코 좋은 의도가 아님을 직감하고 즉시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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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화

강하율이 달려가 급히 아버지를 부축했다.강진철의 목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온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 숨을 헐떡였다.강하율은 사색이 되어 울부짖었다.“우리 아빠 좀 살려줘요! 제발 도와주세요!”보호사가 즉시 벨을 눌렀다.그 모습을 본 배윤제가 도와주기 위해 앞으로 다가가려 했다.하지만 품에 안긴 정다인이 갑자기 머리를 감싸 쥐며 끼어들었다.“아! 갑자기 너무 어지러워요. 아까 머리를 부딪쳤나 봐요. 윤제 씨, 나 병원 좀 데려다주면 안 돼요? 머리 다치면 큰일 나잖아요.”배윤제는 발걸음을 멈추고 정다인을 유심히 살폈다.과거 자신을 구하다 머리를 다쳤던 그녀였다. 두 번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게 둘 수는 없었다.강하율은 두 사람 따위 안중에도 없는 듯 품 안의 아버지만 연신 불렀다.그러다 곁눈질로 탁자 위 케이크 속에서 아주 잘게 썰린 망고를 발견했다.이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정다인! 지금 우리 아빠한테 망고 먹인 거야? 알레르기가 심한 거 뻔히 알면서?”눈물이 기다렸다는 듯 툭 떨어졌고, 정다인은 머리를 감싸 쥐며 고개를 가로저었다.“모르겠어요. 기억 안 나요. 아, 머리가 너무 아파!”말이 끝나기 무섭게 배윤제의 품 안으로 쓰러졌다.배윤제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는 강하율을 내려다보았다.“만약 다인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너 절대로 가만 안 둬!”이내 무언가 생각난 듯 발걸음을 멈추고 덧붙였다.“강하율, 네 아버지는 범죄자일 뿐이야. 이제 그만 현실을 받아들여. 다인이가 괜찮은 거 확인하고 나서 다시 올게.”강하율의 몸이 흠칫하더니,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어갔다.배윤제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거나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니까.현실 파악이 안 되는 만큼 반항이라도 하면 그가 마음을 돌려 결혼해 줄 거라 믿는 모양이었다.그리고 떠나려는 찰나,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지 보호사를 불러 세웠다.“여기 의사들 전부 불러와요.”“네.”...정신병원에는 간단한 응급 처치 장비가 구비되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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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3화

“윤호 오빠, 고마워요.”“그래.”그녀의 착각인지, 등을 받친 손이 가볍게 두어 번 토닥여지는 것이 느껴졌다.잠시 후, 응급실 문이 열렸다.강하율은 벌떡 일어나 달려가서 물었다.“저희 아빠는요? 어떻게 됐나요?”“이제 괜찮습니다.”의사가 마스크를 벗으며 대답했다.“감사합니다, 정말 고마워요.”강하율은 벅찬 감격을 이기지 못하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배윤호는 의료진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덤덤하게 말했다.“기사에게 지시해 뒀으니 편히 돌아가십시오.”“네, 알겠습니다.”보호사는 의료진의 소지품을 다시 한번 꼼꼼히 확인한 뒤에야 밖으로 내보냈다.갑작스러운 소동 때문에 강하율에게 아버지 곁을 지킬 수 있는 시간을 더 주어졌다.한 시간 뒤 의사가 다시 검사했을 때, 강진철의 상태는 이미 안정되었다.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강하율은 결국 자리를 떠났다.그녀는 보호사에게 다가가 몇 마디 건넨 뒤, 몸을 돌려 배윤호를 향해 걸어갔다.떠나기 직전, 배윤호의 시선이 양승아를 훑고 지나갔다.양승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리 없이 사라졌다....차에 올라탄 강하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배윤호의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찰나의 순간, 주변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고 오직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들렸다.강하율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윤호 오빠, 정말 고마워요.”“그 말은 벌써 했잖아.”남자는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눈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날카로운 턱선이 팽팽하게 당겨졌고, 깊은 눈동자에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부담스러운 시선에 강하율은 몰래 손가락을 움츠리며 화제를 돌렸다.“그나저나 여긴 어쩐 일이세요?”“친구 만나러 가던 길에 마침 지나치다가 배윤제를 봤어. 양승아한테 알아보게 했더니 아버님이 응급 처치 중이라더군.”친구와 약속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귀국 후 줄곧 바쁘게 지낸 탓에 친구들 사이에서는 도대체 무엇이 그의 정신을 쏙 빼놓고 있는지 의구심이 피어오르던 참이었다.강하율은 철석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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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화

정다인은 조금 전까지 배윤제의 보살핌을 받으며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마치 구름 위에서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듯한 기분에 이불 아래 숨긴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행여나 들통이라도 날까 두려웠다.이내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오더니 비틀거리며 배윤제의 품으로 쓰러지듯 안겼다.그녀는 고개를 살짝 들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올려다보았다.“전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하율 씨랑 그렇게 가깝게 지낸 윤제 씨도 잊어버린 걸 제3자인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물이 배윤제의 몸 위로 툭 떨어졌다.더없이 가련하고 연약한 모습이었다.배윤제는 잠시 침묵했다.하긴, 범죄자의 취향 따위를 누가 그렇게 세세히 기억하겠는가.그동안 강진철을 면회 갈 때 챙겼던 물건들도 전부 강하율이 준비했기에 그는 딱히 신경 쓴 적이 없었다.자신이 동행해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적어도 성의는 보여준 셈이니까.배윤제는 정다인을 품에 안았지만 마음은 뒤숭숭했다. 마치 무언가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듯한 기분이었다.정다인은 일부러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가까이 대며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곧이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윤제 씨, 이제 그만 화 풀어요. 하율 씨한테 아무 연락이 없다는 건 아버님도 괜찮다는 뜻 아니겠어요? 게다가 우리 나올 때도 하율 씨만 난리였지, 아버님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잖아요. 그분 정신 상태에 진짜 아프셨으면 어떻게 그리 얌전히 계셨겠어요?”자신이 실언이라도 했다는 걸 깨달은 듯 정다인은 그를 꽉 껴안더니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고개를 가로저으며 덧붙였다.“다른 뜻으로 한 말 절대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배윤제는 정다인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았다.강하율이 연기를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그제야 조금 전 정신병원의 모든 상황이 납득이 갔다.고작 망고 케이크 두 입과 더러워진 원피스 한 벌 때문에 그렇게까지 유난을 떨 이유는 없었다.강하율이 그토록 격한 반응을 보인 건, 결국 자신의 관심을 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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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5화

얼마나 걸었을까, 종아리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에 그제야 병원을 찾은 이유가 떠올랐다.레스토랑으로 가던 길, 강하율은 다리가 찢겨 상처가 난 것을 발견했다. 피가 흘렀는지 양말까지 붉게 적셨다.아까는 아버지가 걱정되어 통증조차 느끼지 못했던 모양이었다.배윤호는 곧장 양승아에게 병원 응급실로 차를 돌리라고 했다.상처를 처치한 뒤, 급히 화장실을 찾던 강하율은 예기치 못한 광경을 목격했다.다른 응급실 안에 함께 있는 정다인과 배윤제였다.그녀는 도망치듯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거울 속에는 와인 얼룩으로 엉망이 된 자기 모습이 비쳤다.칸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나서야 비로소 무장해제 했다.배윤제 같은 사람 때문에 상처받을 필요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저도 모르게 스스로 되물었다.‘난 대체 뭘 잘못한 거지?’‘왜 나한테 이런 일이...’‘정말로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걸까?’화장실 밖.두 그림자가 앞뒤로 나란히 서 있었다.양승아가 걱정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대표님, 배윤제 씨도 여기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사람을 불러서 강하율 씨 상태 확인해 볼까요?”“됐어. 혼자 진정할 시간이 필요할 거야.”“하지만 아까 안색이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던데... 배윤제 씨가 뭐라고 왜 그렇게 목을 매는 건지, 참.”양승아는 은근히 배윤호를 대신해 분통이 터지는 모양이었다.자신이 모시는 상사가 저토록 그리워해 마지않는 배윤제보다 못한 게 무엇이란 말인가.배윤호가 양승아를 힐긋 쳐다보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정다인 쪽은...”“네, 알겠습니다.”10분 뒤, 강하율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얼굴로 화장실을 나섰다.로비에 도착하자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배윤호가 보였다.훤칠한 몸매, 손가락 사이에서 타오르는 붉은 담뱃불, 그리고 입술 사이로 피어올라 얼굴을 살짝 가린 하얀 연기까지.멀리서 마주한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도저히 읽어낼 수 없는 은밀한 감정들이 일렁이고 있었다.강하율이 서둘러 걸음을 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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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6화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정다인이 배윤제를 끌어안았다.“윤제 씨, 어디 가려고요?”배윤제는 대꾸하지 않고 정다인의 손을 떼어낸 뒤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문밖에는 환자 몇 명뿐이었고 강하율은 보이지 않았다.배윤제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면서 자조하듯 웃음을 터뜨렸다.‘강하율이 이곳에 왔다면 틀림없이 안으로 들어와 나를 찾았겠지.’배윤제는 휴대폰을 꺼내 문자 한 통 들어오지 않은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어찌 됐든 강하율의 아버지가 예전에 그에게 잘해주었던 걸 생각해서라도 한 번 가봐야 할 듯싶었고, 내친김에 강하율에게 일을 크게 키우지 말라고 경고도 해야 했다.병실로 돌아간 배윤제는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말했다.“다인아, 너는 일단 쉬고 있어. 나는 볼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겠어.”정다인은 배윤제가 강하율을 찾아가려고 한다는 걸 직감했다.비록 내키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배윤제의 아내가 될 사람으로서 반드시 사려 깊고 온화한 여자처럼 행동해야 했기에 정다인은 아쉬운 표정으로 나긋나긋하게 말했다.“알겠어요.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요. 저는 잠시 뒤에 알아서 돌아갈게요.”배윤제는 정다인의 태도에 매우 흡족해하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잠시 뒤에 데리러 올게. 조금 더 자.”“네.”배윤제가 떠난 뒤 정다인은 테이블 위에 세워두었던 휴대폰을 들며 미소를 지었다....정신병원.배윤제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장천우가 옆에서 보고하기 시작했다.“도련님, 강하율 씨가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됐어. 여기까지 왔잖아. 걔가 언제까지 숨을 수 있겠어?”배윤제는 고개를 저었다.그는 강하율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갈피를 잡지 못했다.문 앞으로 걸어간 배윤제는 신분증을 꺼내서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경비원이 그를 말렸다.“죄송합니다. 배윤제 씨께서는 들어가실 수 없어요.”“저 방금 안에서 나왔어요. 그리고 면회 리스트에 제 이름도 있어요.”“배윤제 씨, 강하율 씨께서 배윤제 씨 이름을 명단에서 삭제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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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화

“알잖아. 걔 신분에 어울리는 거면 돼.”말을 마친 뒤 배윤제는 성큼성큼 떠났다.“병원으로 가자.”...레스토랑.강하율은 힘들게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예약 시간보다 늦게 도착해서 예약을 취소당했는데 일반적으로 가격대가 좀 높은 레스토랑들은 당일 예약이 불가능했다.결국 강하율은 어쩔 수 없이 배윤호를 데리고 자신이 자주 가던 단골 가게로 향했다.다행히 배윤호는 별말 하지 않았다.차에서 내리기 전, 강하율은 와인이 튄 치마를 힐끗 보았다. 조금 전 병원 화장실에서 씻은 뒤 말렸지만 와인 때문에 생긴 얼룩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결국 엄마가 남겨주신 치마를 망쳤다는 생각에 강하율은 슬픈 눈빛을 하며 치마를 만지작거렸다.그러는 와중에 갑자기 어깨에 옷이 걸쳐졌다.“입어.”말을 마친 뒤 배윤호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배윤호가 걸쳐준 정장에서는 그의 향기와 온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옷을 여미자 등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사실 강하율은 배윤제와 연인이었을 때 그의 정장을 입어본 적이 있었는데 지금과는 느낌이 달랐다.아마도 배윤제가 배윤호처럼 그녀에게 옷을 걸쳐주는 대신 그녀의 품에 옷을 던지며 알아서 입으라고 한 탓일지도 몰랐다.배윤제라면 정장의 가격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그리고 그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아마도 그녀를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일지도 몰랐다.강하율은 정신을 차린 뒤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자 계산하고 있던 가게 사장이 고개를 숙인 채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어서 오세요. 메뉴판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어요. 주문은... 어머, 하율아. 이게 얼마 만이야?”사장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녀의 시선은 배윤호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역시 인간은 모두 아름다운 걸 좋아했다.강하율은 웃으며 대답했다.“요즘 많이 바빴거든요. 마침 여유가 생겨서 사장님 얼굴 뵈러 왔어요.”사장은 그제야 강하율을 바라보았다.“하율이는 말을 참 예쁘게 한다니까. 어서 앉아. 내가 과일 내올게. 청년, 청년도 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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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화

강하율은 정다인의 도발에 그저 짜증이 날 뿐이었다. 그러나 정다인이 상사라서 차단할 수가 없었다.잠시 고민하던 강하율은 뭔가 떠올랐는지 갑자기 영어로 메시지를 작성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메시지를 보냈다.[강하율, 왜 영어로 보내? 내가 영어를 못하는 줄 아는 거야?][이해했으면 됐어. 나는 네가 한국어뿐만이 아니라 영어도 못하면 어쩌나 싶었거든. 안 그러면 소통할 수 없을 테니 말이야.][그 말 무슨 뜻이야?][무슨 뜻이긴. 말 그대로지. 둘이 뭘 하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자꾸 귀찮게 메시지 좀 보내지 마. 아니면 또 크림 마스크 한번 해보고 싶어서 그래?]정다인은 절대 배윤제에게 둘의 메시지 내용을 보여줄 수가 없었기에 강하율은 편하게 말했다.[강하율,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 마. 윤제 씨가 너한테 시선을 한 번 더 준다고 해도 결국은 너한테 아무 관심 없으니까.][그래, 그렇겠지. 배윤제는 너를 가장 신경 쓰니까 말이야. 둘이 아주 천생연분이네.]강하율은 조롱의 의미로 미소 짓는 이모티콘을 보냈다.그 메시지를 보내자 한동안 정다인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았다.강하율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휴대폰을 내려놓은 뒤 시선을 들었다. 이때 그들이 주문한 음식들은 모두 나왔고, 배윤제는 음식에 손을 대지 않고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강하율은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오빠, 죄송해요. 얼른 드세요.”“응.”배윤호는 별말 하지 않고 수저를 들었다.평범한 가게라서 인테리어를 포함한 모든 것이 한없이 평범했다.그러나 배윤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면 마치 고급 레스토랑에 있는 것 같았고, 더없이 자연스러운 그의 행동에서는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졌다.강하율은 그가 고기를 한 점 집자 왠지 모르게 조금 긴장했다.그건 사장님이 가장 추천하는 가게 메뉴였는데 강하율은 그 요리를 굉장히 좋아해서 예전에 배윤제를 위해 그 음식을 포장해서 가기도 했었다.그러나 배윤제는 음식을 맛보고 구역질을 한 뒤 말했다.“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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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화

잠시 뒤, 강하율이 시선을 들었다.테이블 위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음식의 열기가 배윤호의 뚜렷하면서도 준수한 얼굴을 흐릿하게 만들며 신비로움을 더해주었다.“그러면 걔는?”배윤호는 열기 너머 강하율과 시선을 마주하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강하율은 그 질문에 쉽게 대답했다.“저는 이미 지나간 것들에 미련이 없어요.”“그럼 됐어.”“...”뭐가 됐다는 걸까?강하율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배윤호의 시선에서 열기와 소유욕을 느꼈다.식사를 마친 뒤 강하율은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하러 갔고 사장은 웃으며 말했다.“하율아, 저런 남자 친구는 어디서 찾은 거야? 정말 좋은 남자 친구를 만났네.”“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남자 친구 아니에요.”강하율이 해명했다.“그럴 리가. 나는 살면서 수많은 남자들을 봐왔어. 아까 하율이 너를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던데?”사장이 자신의 눈을 가리키며 말했고 강하율은 웃음을 터뜨렸다.“사장님, 만약 사장님이 오빠 눈빛을 꿰뚫어 봤다면 오빠 회사에서 바로 고액의 연봉을 제시하며 사장님을 고용했을 거예요.”사장은 잠시 뒤 강하율의 말뜻을 이해하고는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야.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은 숨긴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거든.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는 금방 알 수 있어. 일부러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강하율은 멈칫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수많은 장면들이 지나갔지만 여전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뒤에 있던 사람이 재촉하자 강하율은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계산을 마친 뒤 사장에게 인사를 건네고 떠났다.밖으로 나갔을 때 강하율은 배윤호가 차 옆에 서 있고 지나가던 여자들이 몰래 배윤호를 힐끔거리는 걸 발견했다.그중 한 여자가 용기를 내어 배윤호에게 다가갔다.강하율은 걸음을 멈추고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여자의 입을 바라봤다.“혹시 어디 가세요? 저 좀 태워다주실 수 있을까요?”여자는 그렇게 말한 듯했다.배윤호는 별말 하지 않고 한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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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화

병원.정다인은 강하율의 답장을 보는 순간 기분이 잡쳤다.강하율 같은 패자가 무슨 자격으로 그녀를 비웃는단 말인가?휴대폰을 내려놓은 정다인은 방 안 가득한 소독약 냄새가 거슬려 잠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 마침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장천우를 발견했다.배윤제가 그녀가 걱정돼 그녀를 데리러 온 모양이었다.‘강하율은 절대 나를 이길 수 없어.’정다인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 인사하려던 순간, 장천우가 통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명품 원피스 한 벌 준비하세요. 아주 비싼 걸 살 필요는 없고, 그냥 적당한 거면 돼요. 도련님이 선물로 쓰실 거예요. 참, 정다인 씨께 드리는 게 아니니 그분 사이즈에 맞출 필요는 없어요.”그 말에 정다인의 표정이 굳었다.원피스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정다인은 본능적으로 오늘 옷이 더러워진 강하율이 떠올랐다.너무 비싼 게 아닌 적당한 가격대의 원피스라고 해도 정다인은 불쾌했다.배윤제는 강하율과 함께 있을 때도, 정다인이 전화 한 통만 하면 곧장 그녀의 곁으로 돌아왔다.이제야 겨우 그와 떳떳한 사이로 거듭나게 되었는데 배윤제는 여전히 강하율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정다인은 이를 악물고 걸음을 재촉해 장천우를 따라잡았다.“장 비서님, 윤제 씨가 누구한테 원피스를 선물하려는 거예요?”장천우는 눈에 띄게 당황했지만 눈치가 빨라 이내 표정을 관리했다.“정다인 씨, 오해하지 마세요. 정신병원 쪽에서 연락이 왔는데 강진철 씨가 알레르기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울 뻔했다고 해요. 도련님께서는 강하율 씨가 이 일을 문제 삼을까 염려해 선물을 준비하신 겁니다.”뻔한 대답이었다. 정다인은 물론 그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굳이 트러블을 일으키지도 않았다.배윤제 곁에 오래 있은 그녀는 장천우가 강하율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걸 알고 있었다.아무래도 배윤제의 비서이다 보니 배윤제의 지위가 곧 그의 미래 지위와 직결되기 때문이다.배윤제가 범죄자의 딸과 얽힌다면 배윤제의 후계자 자리가 위태로워질 뿐만 아니라 장천우의 미래까지 위험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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