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기억을 잃은 척할 때는 언제고: Chapter 151 - Chapter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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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1화

정다인은 인터넷에 떠도는 주작 영상 때문에 심기가 몹시 불편한 상태였다.아무리 여론을 잠재우려고 애를 써도 희한하게 인기를 끌었다.얼핏 보기에는 웃기는 내용이지만 실상은 그녀의 얼굴을 깎아 먹는 것과 다름없었다.게다가 ‘대인배' 이미지를 유지해야 했기에 배윤제에게 도움도 청하지 못했다.그런 와중에 강하율이 배윤제를 가로채려 한다는 소식까지 들려오자, 결국 참아왔던 울분을 터뜨렸다.정다인이 이성을 잃기 일보 직전, 휴대폰으로 배윤제 할머니의 메시지가 도착했다.내용을 확인한 순간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그녀는 수화기를 향해 차갑게 내뱉었다.“네 속셈이 뭔지는 알겠어. 하지만 증거도 없는 말을 내가 어떻게 믿겠니?”“제가 반드시 증거를 찾아다 드리죠.”...장을 보고 나서 강하율은 안혜슬과 함께 숙소로 돌아갔다.씻고 침대에 누워 잠시 휴대폰을 하려던 찰나, 생각지도 못한 기사를 접했다.[재벌 2세 박도윤, 술집에서 시비 붙어 중상!]사진 속 박도윤은 누군가에게 부축받아 밖으로 끌려 나오고 있었는데, 얼굴은 온통 피떡이 된 데다 양다리는 뼈가 없는 것처럼 흐느적거렸다.맞춤 제작한 외투를 알아본 게 아니었다면, 이 처참한 모습이 한때 기고만장하던 남자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문득, 레스토랑 밖에서 양승아의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던 살려달라는 비명이 들리는 듯했다.분명 박도윤의 목소리와 무척 닮아 있었다.어쩐지 귀에 익다고 했더니.강하율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잠기다 저도 모르게 양승아가 삭제했던 메시지를 떠올렸다.‘배윤호였을까? 아니, 그럴 리 없어.’강하율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더니, 이제는 아주 작은 가능성조차 감히 넘겨짚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설령 그가 한 일이라 해도 그저 배씨 가문을 지키기 위함일 테니까.그녀는 동영상 앱을 종료하고, 주의를 돌리기 위해 인스타 피드를 넘기기 시작했다.그런데 뜻밖에도 배윤호가 올린 사진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별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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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2화

술집 앞.배윤제가 막 접대를 마치고 나오는데, 친구의 여자친구가 하늘을 가리키며 새된 비명을 질렀다.“별똥별이다! 얼른 소원 빌어, 빨리!”여자는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이때, 친구가 찬물을 확 끼얹었다.“지금이 어느 시댄데 아직도 이런 걸 믿냐?”여자가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어차피 자기한텐 선택권이 없어. 의심하는 거 보니까 나 사랑 안 하네?”그러자 친구는 여친의 곁으로 다가가 마지못해 소원을 비는 척했다.“무조건 믿지. 별똥별은 몰라도 우리 자기 말인데 내가 어찌 토를 달겠어?”그 모습을 지켜보던 배윤제가 콧방귀를 뀌었다.여자를 보니 강하율이 생각났다. 둘 다 똑같이 유난스럽기는.강하율도 별이라고 하면 환장했다. 시도 때도 없이 그의 귓가에서 우주에 관한 이야기를 재잘거리곤 했다.유성우라도 내리는 날이면 꼭 그를 불러내 별똥별을 보며 소원을 빌자고 졸라댔다.당시는 무척 번거롭고 짜증이 났다. 그저 억지로 화젯거리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생각했다.배윤제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친구를 향해 무심하게 내뱉었다.“싫다는 티 딱 한 번만 내봐. 그럼 다신 저런 짓 안 할걸.”남자는 배윤제의 대학 동창으로 꽤 절친한 사이였다.다만 친구네 집안 사업이 울산시로 옮겨가는 바람에 두 사람이 얼굴을 보는 건 참 오랜만이었다.친구가 배윤제를 의아한 듯 쳐다보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여친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우리 나중에 결혼할 거야. 소원 비는 것쯤이야 뭔 대수라고. 그냥 해준다고 어디 덧나는 것도 아니잖아. 여자친구 기분도 좋아지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오히려 나한테 아무 말 안 할까 봐 그게 더 걱정인데? 여자가 소원 빌 때 누구랑 같이 있고 싶어 하겠냐?”배윤제는 어안이 벙벙했다.소원을 빈다는 건 아름다운 순간을 뜻한다. 당연히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길 바랄 것이다.가족, 연인, 혹은 친구.문득 정신을 차린 그는 무의식중으로 휴대폰을 꺼냈다.지금 이 순간까지도 강하율이 예전처럼 메시지를 보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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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3화

이런 두 사람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프로젝트가 비록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금융 사기나 입막음을 위한 살인 같은 극단적인 상황까지 치달을 리는 없었다.제일 수상한 건 당시 프로젝트를 재조사하며 발견한 서류들이 거의 다 강진철의 서명뿐이었다는 것이다.분명 부모님이 여러 인물의 이름을 언급했던 기억이 나는데 결과적으로 모두 완벽하게 자취를 감췄다.아쉽게도 당시엔 그저 노는 게 좋았고 비즈니스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탓에 그 이름들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생각에 잠긴 와중에 휴대폰 문자음이 울리자 그녀는 상념에서 벗어났다.배윤제가 보낸 메시지였다.기억이 좀 더 돌아왔다고?설마 뭐 하나 떠올렸다고 해서 그녀가 감격이라도 할 줄 아는 걸까?강하율은 자료를 가방에 챙겨 넣었다. 내일 시내로 가져갈 생각이었다.그러고는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눈을 감는 순간, 그녀는 배윤제를 향한 마지막 미련까지도 깨끗이 사라졌음을 알게 되었다.밖.강하율의 답장을 기다리던 배윤제는 방 안의 불이 꺼진 걸 발견했다.장천우는 의아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물었다.“도련님, 사람 불러서 데려오게 할까요?”“훗.”배윤제는 콧방귀를 뀌었다.“버릇을 잘못 들였군. 돌아가자.”“네, 알겠습니다.”장천우는 오히려 안도하는 기색이었다.별장으로 돌아오자 정다인이 문을 열고 마중 나와 그의 겉옷을 받아주었다.“오셨어요? 죄송해요,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서 친구분들 뵙는 자리에 같이 못 갔네요.”“괜찮아.”배윤제는 짧게 대답했다.그녀의 고분고분한 태도에 딱히 나무라지는 않았다.어쨌거나 오늘 친구들 만나는 자리에 데려가기 싫은 건 매한가지였다.혹시라도 그 주작 영상들에 대해 누가 물어본다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난감했기 때문이다.자리에 앉자 정다인이 숙취 해소에 좋은 차를 가져왔다.“욕조에 물 받아놨어요. 이거 마시고 나서 씻으면 좀 개운해질 거예요.”그 말을 듣자 배윤제의 가슴을 짓누르던 답답함이 조금은 가시는 듯했다.강하율도 정다인처럼 사리 분별이 밝고 속이 깊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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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4화

아침.세수를 마치고 막 숙소를 나서려던 찰나, 강하율은 오늘 위생 점검이 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하아.’대학교도 졸업했는데 아직도 점호라니.하지만 모든 황당한 규정 뒤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얼마 전, 한 여직원이 남자친구를 몰래 데려와 보름 동안이나 머물게 했는데 밤중에 다른 사람을 훔쳐보다가 들통이 난 사건이 있었다.당시 경찰까지 출동하며 며칠간 소란이 일었고, 결국 호텔 측이 나서서야 겨우 사태가 진정되었다.이후 호텔 지원팀에서는 정기적으로 숙소 위생 상태를 불시에 점검하겠다는 통보를 내렸다.겉으로는 위생 점검이라지만, 진짜 목적은 외부인의 무단 거주 여부를 가려내기 위한 조치에 가까웠다.다행히 강하율은 평소 숙소에 상주하지 않아 짐이 별로 없었고, 5분도 채 안 되어 정리를 끝낼 수 있었다.이내 시간을 확인하고는 안혜슬과 함께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서둘러 내려갔다.하지만 그녀가 자리를 뜨자마자 반대편 계단실에서 두 그림자가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한 명은 이번 위생 점검을 담당한 여직원이었고, 다른 한 명은 바로 허지연이었다.“지연 씨, 정말 고마워요. 지연 씨가 아니었으면 계단에서 굴러떨어질 뻔했어요.”“별말씀을요. 동료 사이에 이 정도도 못 도와주겠어요? 아까 발목 삐끗하신 것 같은데, 제가 위생 점검 같이해드릴게요.”허지연이 손을 내밀어 그녀를 부축했다.“아... 셔틀버스 놓치면 어떡해요.”“괜찮아요. 마침 근처에서 고객이랑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 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좀 있거든요.”허지연이 손목시계를 슬쩍 확인하며 대답했다.그 말에 여직원은 감동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운도 지지리 없지, 누군가 계단에 흘린 구슬 때문에 하마터면 굴러떨어질 뻔했다.다행히 허지연이 제때 나타나 잡아준 덕분에 최악의 상황은 면했지만 끝내 발목을 접질렸다.십여 분 후, 두 사람은 강하율의 숙소 안으로 들어섰다.여직원은 방 안을 대충 훑어보고는 체크리스트에 표시를 남겼다.“가요.”하지만 허지연은 미간을 찌푸린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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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5화

허지연은 숙소 밖으로 뛰쳐나오며 자연스럽게 문을 닫았다.“이제 괜찮아요. 도망간 것 같아요.”여직원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즉시 휴대폰을 꺼냈다.“매니저님께 말씀드려야겠어요. 분명 어디 위생 관리가 잘못돼서 쥐가 나온 걸 거예요.”허지연은 얼른 그녀를 붙잡으며 미소를 지었다.“일단 진정해 봐요. 방금 보니까 진짜 조그만 생쥐더라고요. 여기가 산 근처라 쥐가 좀 나올 수도 있죠. 게다가 다 여자들만 사는 곳인데, 괜히 소문냈다가 사람들 겁만 주는 거 아니겠어요? 일단 이틀 정도 지켜보고, 또 쥐가 나왔다는 말이 들리면 그때 보고해도 늦지 않아요.”여직원은 잠시 생각하더니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괜히 소란을 피울 필요는 없었다.두 사람은 남은 숙소 점검을 마친 뒤 함께 자리를 떠났다....이 모든 상황을 전혀 알 리 없는 강하율은 기존 고객과 계약을 마치고 막 사무실로 돌아오던 길이었다.그때, 허지연이 정다인의 사무실에서 나오는 모습을 포착했다.허지연은 강하율의 옆을 지나치며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강하율 역시 예의상 마주 웃어주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왠지 모를 불안함이 피어올랐다.팀장 자리를 놓고 경쟁하다 실패한 이후로, 단 한 번도 좋은 기색을 내비친 적이 없던 사람이었다.심지어 정다인을 도와 그녀를 곤란하게 만든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그런데 어떻게 웃음이 나오겠냐는 말이다.의구심이 들던 찰나, 정다인이 사무실에서 나와 손뼉을 치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그녀는 강하율을 훑어보더니 미안한 기색을 띠며 입을 열었다.“여러분도 인터넷에 떠도는 기사 다 보셨을 거예요. 저와 강하율 씨 때문에 호텔 이미지에 타격을 줘서 정말 죄송하게 생각해요.”‘뭐지?’강하율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나는 대체 왜? 이 모든 게 정다인이 자초한 일이 아니었나?’배윤제와 정말 끼리끼리였다. 책임 전가 하나는 기가 막히는군.강하율은 이런 식의 모함과 물귀신 작전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하지만 입을 떼기도 전에 정다인이 말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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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6화

강하율이 정다인과 손을 잡는다는 소리에 배윤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어젯밤 바람맞힌 이후로 왠지 모르게 잠을 설쳤다.지금 고분고분 대답하는 모습을 보니 강진철의 일로 심술을 부렸던 것이라 더욱 확신했다.하지만 강하율의 생각은 달랐다.배윤제가 협박하기 전부터 정다인의 제안을 어떻게 수락할지 고민하고 있었다.왜냐하면 아주 익숙한 이름 하나를 들었기 때문이다.제건 그룹.부모님이 나누던 대화 속에 등장했던 이름이라 기억은 희미했지만, 이를 듣는 순간 그녀는 직감했다.당시 프로젝트에는 분명 제건 그룹의 기씨 가문이 연루되어 있었다.그러나 동료들의 말을 들어보면 기씨 가문의 위상은 지금도 여전히 독보적이었다. 즉, 당시의 사건이 그들에게는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는 뜻이다.그럴 리가 없었다.얼마나 많은 사람이 휘말렸는데, 대체 무슨 수로 기씨 가문만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단 말인지?어쩌면 기소정의 결혼식을 통해 정보를 캐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한창 머리를 굴리던 와중에 정다인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강하율 씨, 잘 부탁해요.”“네, 잘 부탁드립니다.”강하율이 악수하자마자 정다인은 쌀쌀맞게 손을 뺐다.그러고는 배윤제의 곁으로 다가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제가 얘기했죠? 강하율 씨는 그렇게 속 좁은 사람이 아니라고. 굳이 저 보러 여기까지 안 와도 된다니까.”배윤제는 강하율을 힐긋 쳐다보더니 정다인의 손을 잡았다.그의 목소리는 무심한 듯하면서도 다정했다.“어제 퇴원했는데 벌써 출근하면 어떡해. 걱정하는 게 당연하지.”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깨달았다. 배윤제가 이곳에 나타난 진짜 이유는 정다인의 기를 살려주기 위함이라는 것을.참으로 부러운 광경이었다.정작 강하율은 별다른 동요 없이 몸을 돌려 책상으로 향했다.배윤제의 눈빛에 어두운 기운이 서렸다.“강하율, 어디 가?”강하율이 솔직하게 대답했다.“기소정 씨 자료 준비하러. 뭐 따로 지시하실 사항이라도 있나요?”배윤제는 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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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7화

결국, 회의 내용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내보냈다.대략적인 요지는 일부 직원의 지나치게 눈에 띄는 행동이 호텔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누구를 지칭하는지는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사람들의 시선이 이미 모든 걸 증명했다.바로 강하율과 정다인이었다.배윤호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앞으로 이런 사례는 인사고과에 반영할 것이며, 문제 발생 시 호텔 규정에 따라 처분하겠습니다.”강하율의 펜 끝이 멈칫했다.역시나 지독한 워커홀릭다운 처사였다.그나마 다행인 건 배윤호의 만년설 같은 차가운 마음이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았다는 점이다.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규정은 오히려 자신에게 유리해 보였다. 어차피 늘 먼저 시비 거는 쪽은 정다인이었으니까.아니나 다를까, 정다인의 온화하고 너그러운 미소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워졌다.그녀에게는 배윤제의 여자친구라는 또 다른 신분이 있지 않은가.배윤호는 배씨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이면서도 대중 앞에서 이런 규정을 명시했다.정다인의 체면을 눈곱만큼도 봐주지 않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이번 일은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회의가 끝나고 강하율이 막 자리를 뜨려는데 양지원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총괄님, 무슨 일이세요?”양지원은 서류철을 내밀었다.“이것 좀 대표님께 가서 결재받아 줄래? 갑자기 배가 아파서 화장실부터 가야겠어.”강하율이 거절할 틈도 없이 양지원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결국 그녀는 마지못해 걸음을 옮겨 배윤호의 곁으로 다가갔다.“대표님, 결재 부탁드립니다.”“그래.”배윤호는 서류를 건네받더니 한 장 한 장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강하율은 속으로 의아했다.차 안에서 볼 때는 거의 훑어내리듯 읽던 사람이 아니었나? 그런데 왜 오늘은 이렇게 느린지 모를 일이었다.그때, 배윤호의 곁에 서 있던 양승아가 그녀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강하율은 무슨 뜻인지 당최 알 길이 없었다.양승아는 눈을 흘기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대표님, 차에 두고 온 서류가 있어서 다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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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8화

안혜슬이 말한 그 여직원은 강하율도 본 적이 있었다.사람은 나쁘지 않았지만 워낙 ‘공주님’ 타입이라 쥐는커녕 파리만 봐도 비명을 지를 위인이었다.그런 여자가 어떻게 쥐를 본 상황을 세세하게 묘사한단 말인가?강하율은 직감적으로 상황이 수상함을 느꼈다.그녀는 얼른 안혜슬을 붙잡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혜슬아, 가서 좀 알아봐 줄 수 있어? 누구 방에서 쥐가 나왔다는 건지. 최대한 빨리.”안혜슬은 객실팀 소속이라 손님 물건을 전달한다는 핑계로 이 부서 저 부서 드나들어도 눈에 띄지 않았다.따라서 그녀보다 움직이기가 훨씬 수월했다.“응, 알았어.”안혜슬은 강하율을 전적으로 믿었기에 대답하자마자 기척을 죽이며 자리를 떴다.신경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기분에 강하율은 발걸음을 재촉했다.그런데 건물 밖으로 막 나선 순간, 누군가 그녀를 낚아채 정원 구석으로 끌고 갔다.확인해 보니 배윤제였다.강하율이 힘껏 손을 뿌리쳐 보았지만, 그는 오히려 더 꽉 움켜쥐었다.도저히 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라는 생각에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악, 아파! 손목 부러지겠네.”배윤제는 발갛게 달아오른 강하율의 손목을 슬쩍 보더니 그제야 손을 놓아주었다.“너 언제부터 그렇게 엄살이 심했냐?”씩 웃어 보이는 모습은 마치 두 사람 사이가 예전 그대로인 듯 자연스러웠다.강하율은 욱신거리는 손목을 문지르며 무덤덤하게 대꾸했다.“내가 엄살 피우던 시절을 기억하긴 해요?”“그냥 때려 맞춘 거야.”배윤제는 기억상실증인 척 연기하는 걸 들키지 않으려 얼른 말을 바꾸었다.물론 어느 정도 예상한 대답이었다. 오히려 애초에 기대조차 안 했다는 게 맞을 것이다.“용건이 뭐예요? 저 바빠서 일하러 가야 하거든요.”강하율은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으나 배윤제에게 그저 화가 나 잔뜩 곤두선 말투로 비쳤다.배윤제는 지난 며칠간 있었던 일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의 차가운 눈빛이 자꾸 떠올랐다.무언가를 애타게 증명하고 싶은 심정 때문이었을까, 강하율이 선물했던 슈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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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9화

“윤제 씨? 아직 사무실 안 들어갔어요?”“뭔 일인데 그리 급하게 뛰어와?”배윤제가 물었다.“기소정 씨에 대해서 좀 더 물어보고 싶어서요. 윤제 씨 친구잖아요. 행여나 실수라도 해서 윤제 씨 체면 깎아 먹으면 어떡해요.”정다인은 눈을 깜빡거리며 사사건건 배윤제를 위하는 척 굴었다.배윤제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너무 걱정하지 마. 결혼식은 전담팀이 알아서 할 테니까 옆에서 잘 맞춰주기만 하면 별문제 없을 거야.”“알아요. 하지만 앞으로 자주 보게 될 사이잖아요. 제가 근사한 결혼식을 치를 수 있게 도와주면 나중에 집안끼리 왕래할 때도 훨씬 편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오늘 하율 씨랑 같이 밤샐 각오까지 하고 왔는걸요.”“강하율이랑 같이 밤을 새운다고?”배윤제는 정다인이 이렇게 빨리 앙금을 털어내고 먼저 다가갈 줄은 몰랐다.정다인은 그의 팔짱을 끼며 속삭였다.“윤제 씨 곤란하게 만들기 싫거든요. 마침 오늘 밤이 하율 씨랑 친해질 기회인 것 같기도 하고. 근데 하율 씨가 좋아해 줄지 모르겠네요.”그녀를 바라보는 배윤제의 눈빛에 만족감이 서렸다.모든 일을 자신과 배씨 가문 위주로 생각하는 여자이고서야 안주인이 될 자격이 있다.반면, 강하율은 신분이 격에 맞지 않는 건 둘째치고 지난 몇 년간 시장 바닥의 천박하고 좀스러운 기질이 너무 많이 배어버렸다.마침 이번 기회에 정다인을 보고 좀 배우라고 일러둘 참이었다. 어차피 앞으로는 둘 다 제 여자가 될 테니까.“나도 같이 밤새워 줄게. 그럼 감히 싫다고는 못 할 거야.”정다인은 까치발을 들고 그에게 입을 맞췄다.“윤제 씨, 최고!”...강하율은 통화를 마치고 서둘러 사무실로 돌아왔다.자리에 앉자마자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그렇게 뒤숭숭한 마음으로 오후를 보내던 중, 드디어 안혜슬에게서 소식이 왔다.[하율아, 네 방이래! 그리고 알아보니까 오늘 위생 점검하러 간 사람이 한 명이 아니었다나 봐. 다만 누구인지는 아무도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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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화

물론 그녀가 맞춤 제작한 옷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것임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하지만 정다인이 선물했다고 말할 정도로 뻔뻔할 줄이야.정다인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이내 배윤제의 팔을 꼭 끌어당기며 기세등등한 눈빛으로 강하율을 훑어보았다.거의 대놓고 승리감을 과시하는 모양새였다.하지만 동료들의 눈에는 그저 전형적인 재벌가 로맨스의 한 장면처럼 보일 뿐이었다.강하율은 미간을 찌푸리며 속으로 분노를 삭였다.그때 쇼핑백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 배윤제에게 옷을 빼앗긴 것이 못내 아쉬웠다.중고 앱에 20% 싸게 올리기만 했어도 거금을 벌 수 있었을 텐데.‘됐어.’현재로서 기씨 가문 일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강하율이 몸을 돌려 자리로 돌아가려던 찰나, 사람들이 정다인에게 몰려든 틈을 타 배윤제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하율아, 먹을 것 좀 챙겨왔어.”또 병 주고 약 주는 식이었다.강하율은 덤덤하게 대답했다.“괜찮아요. 좀 이따 구내식당에서 먹을게요.”배윤제가 갑자기 픽하고 웃음을 터뜨렸다.“화났냐? 다인은 내 공식적인 여자친구잖아. 남들 앞에서는 체면 좀 세워줘야지. 어차피 네가 준 선물인 거 알고 있는데 뭐가 문제야? 그런 겉치레에 너무 연연하지 마. 너한텐 내가 있...”“아, 네.”강하율은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장난하나?’정말 자신이 왕이라도 된 줄 아는 모양이었다. 양손에 떡을 쥐고 흔들겠다는 건가?돈을 좀 손해 보더라도 그와 이런 지저분한 관계에 얽히고 싶지 않았다.배윤제는 강하율이 이렇게 순순히 수긍할 줄은 몰랐다.마치 이 옷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혹은 그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든 상관없다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꼭 말을 그런 식으로 해야겠어? 나도 나름대로 설명했잖아.”배윤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불쾌한 눈빛과 더불어 이해하기 힘들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자신의 신분상 애초에 해명은 불필요했고, 강하율 역시 그에게 설명을 요구할 자격 따위 없었다.정다인이 있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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