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기억을 잃은 척할 때는 언제고: Chapter 261 - Chapter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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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1화

“그게 말이 돼? 이런 중요한 자리에 대충 입고 갔다간 사람들이 널 우습게 볼걸? 게다가 장담하는데 정다인이 네 차림새 보고 어떻게든 꼬투리 잡으려고 혈안이 될 거야.”안혜슬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김혜은이 직접 초대장을 보낸 자리인 만큼 격식을 갖추는 게 예의였고, 어쩌면 연회장에서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잡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정다인에 대해서도 대비는 필요했다.“드레스 대여할 만한 곳 좀 알아봐야겠다.”“그래! 가서 아주 현장을 씹어먹고 와.”안혜슬이 잔뜩 기대하며 말했다.전화를 끊고 나서 강하율은 소파에 누워 인터넷으로 드레스 대여 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했다.그런데 두 페이지쯤 넘겼을까, 갑자기 배윤제의 메시지가 튀어나왔다.[어디야? 할 말 있어. 일 얘기야.]이 늦은 시간에 업무라니?설령 진짜 일 때문이라 해도 강하율은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강하율, 나한테도 김혜은이랑 대화할 권리는 있다고 생각하는데.]말이 좋아 대화지, 사실상 협박이나 다름없었다.강하율은 김혜은을 통해 어머니의 과거를 알아내야 하는 처지였기에 마지못해 답장을 보냈다.[알았어. 위치 보내.]...강하율은 약속대로 택시를 타고 한 레스토랑에 도착했다.늦은 시간이라 손님이 별로 없었다.배윤제는 테이블 앞에 앉아 손에 든 와인잔을 흔들고 있었다.이내 강하율을 발견하자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대충 묶어 올린 머리에 편안한 운동복 차림. 압도적인 미모가 아니었다면 주변의 화려한 상류층 사이에서 그야말로 눈 뜨고 봐주기 힘든 수준이었다.하지만 강하율은 사람들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아주 여유롭게 걸어왔다.“업무에 또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꼭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야겠어? 기억이 좀 돌아오긴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우리 엄마 앞에서는 이런 말투가 아니었거든.”배윤제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주위를 쓱 훑었다. 경고의 의미가 다분한 눈빛이었다.강하율은 속으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창피당할까 봐 걱정되면서도 굳이 자신을 불러내다니.그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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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2화

강하율이 상자를 품에 안으며 되물었다.“아직 할 말이 남았나? 없으면 먼저 가서 자도 돼? 내일 또 출근해야 하거든.”배윤제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강하율의 속내를 읽어내려 애썼지만 표정은 그저 평온하기만 했다.“데려다줄게.”그는 자신과 강하율의 관계를 탐색하듯 쳐다보는 주변의 시선들이 여전히 거슬렸다.강하율 역시 느끼고 있었지만, 어차피 결론도 나지 않을 일로 더는 입씨름하기 싫었다.“됐어, 이미 택시 불렀어. 설마 내 뒤를 밟을 생각은 없겠지? 안 그래?”이토록 선을 긋는데도 주소를 묻는 건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 일이었다.“그럼. 알아서 가.”“갈게.”강하율은 짐을 챙겨 택시를 타고 돌아갔다.그런데 가는 길에 생각지도 못한 윤성태의 전화를 받았다.“아저씨, 옷 만드는 데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아니야. 나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오후에 있었던 일을 깜빡했지 뭐야. 자려고 누웠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전화했다. 오늘 배윤제가 여기 다녀갔는데, 그 원단을 봤어.”강하율이 긴장하며 물었다.“뭐 허튼짓이라도 하던가요?”“그런 건 아니고, 돈은 얼마든지 더 줄 테니까 그 원단을 자기한테 팔라고 하더구나.”강하율은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배윤제가 자신을 위해 그 정도로 돈과 공을 들일 줄은 몰랐다.“그래서 사 갔어요?”“아니. 내가 원단 주인하고 직접 상의해 보라고 했거든. 배 대표님이 형이라고 하지 않았어? 다만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됐다고 하면서 그냥 가버리더구나.”“알겠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강하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만약 배윤제가 정말로 어머니의 원피스를 완벽히 재현해냈다면 거절할 구실을 찾느라 꽤 골머리를 앓았을 터였다.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를 과대평가하고 말았다.배윤제는 본인이 결정하는 걸 좋아할 뿐, 누군가와 상의하고 타협할 위인이 아니었다.전화를 끊은 강하율은 손에 들린 상자를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지었다.어차피 입고 갈 드레스도 없었는데, 제 발로 굴러 들어온 셈 아닌가?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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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3화

심플한 드레스는 압도적인 아름다움에 아주 작은 흠집을 내는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멀리서 배윤호와 눈이 마주치자 강하율은 민망한 기색이 역력했다.하지만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당당하게 사람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그러다 길목에서 배윤제와 정다인을 딱 마주쳤다.강하율의 차림새를 보고 배윤제는 넋을 잃고 말았다.정다인을 돋보이게 하려고 일부러 고른 단순한 디자인이었다. 매번 강하율에게 밀려 속상해하던 그녀를 위해.그런 허울뿐인 명성 따위 사치이자 불필요한 것이라 치부하면서.하지만 드레스가 아무리 평범한들 강하율의 미모까지 죽일 수는 없었다.늘 무채색의 유니폼과 수수한 일상복에 가려져 있어 미처 몰랐다.기억 속의 어린 소녀는 어느새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여인이 되어 있었다.배윤제는 강하율을 이렇게 눈부시게 만든 것을 내심 후회했다.그녀는 분명 온전히 자신의 것이어야만 했으니까.정다인은 정신을 못 차리는 배윤제를 보고 일부러 강하율의 앞을 막아섰다.“어머, 하율 씨! 이런 우연이 있나? 드레스가 나랑 같은 라인이네? 근데 디자인이 좀... 너무 밋밋한 거 아니에요?”“제 말이요. 보는 눈이 이렇게 없어서야.”강하율은 배윤제의 이글거리는 시선을 무시한 채 뼈 있는 농담으로 받아쳤다.그러자 주변 사람들도 하나둘 몰려와 은근슬쩍 강하율을 비웃기 시작했다.“옷이 사람 날개라지만, 태생부터가 다른데 껍데기 바꾼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기품은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강 팀장님, 다음부턴 이런 옷 입지 마세요. 이도 저도 아닌 게 보기 안쓰러워 죽겠네.”“그러게. 감히 누굴 따라 하려 들어? 아무리 분칠하고 꾸며봐야 부총괄님 발끝도 못 미칠 텐데. 원래 뱁새가 황새 따라가면 가랑이만 찢어지는 법이지.”여직원들이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이토록 안하무인으로 굴 수 있는 건, 강하율을 언제든 짓밟아도 좋을 만만한 상대로 여기기 때문이었다.연회에 발을 들인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처지니, 제아무리 몰아세운들 감히 반박조차 못 할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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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4화

강하율은 배윤제의 손을 뿌리치더니 속으로 미친놈이라고 중얼거리고는 뒤돌아섰다.점점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배윤제는 왠지 모를 짜증이 밀려왔다.어차피 다시 연회에 참석하긴 글렀으니 나중에 다시 찾아가서 얘기를 나눠볼 참이었다.그렇다.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강하율은 철저히 뒷전이었다.강하율도 이를 예상했다는 듯 곧장 방으로 돌아가 드레스를 벗고 옷장을 열었다.그 안에는 드레스 두 벌이 걸려 있었다.하나는 강하율이 미리 빌려둔 여분용이었다.정다인이 순순히 연회 참석을 허락하지 않으리라는 점, 특히 배윤제가 보내준 드레스라면 더더욱 방해할 것임을 이미 간파했기 때문이다.두 사람의 목표가 같은 이상 계략에 넘어가 주는 척 이용하면 그만이었다.다만 배윤호의 드레스는 전혀 예상치 못 했다.잠시 시선이 머물던 끝에 그녀는 결국 배윤호가 보낸 드레스를 집어 들었다.한편, 연회장.김혜은이 한 바퀴 인사를 돌다가 배윤제와 정다인을 마주쳤다.“다인 씨, 혹시 강하율 못 봤어요? 방금까지 여기 있었던 거 같은데.”“아, 하율 씨는 아마 연회에 참석 못 할 거예요. 아까 실수로 와인을 드레스에 쏟았거든요. 아무래도 상황이...”정다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혜은이 두 사람의 뒤쪽을 바라보며 말을 끊었다.“하율아.”배윤제와 정다인이 흠칫 놀라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멀리서 은하수처럼 촘촘히 박힌 다이아몬드 장식의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은 강하율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눈처럼 하얀 피부 위로 대충 묶어 올린 머리카락이 몇 가닥 흘러내려 화려한 이목구비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우아한 몸짓과 형형하게 빛나는 아우라, 그야말로 살아 움직이는 인형 같았다.“세상에! 저 드레스를 강하율이 입고 나타날 줄이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이아몬드로 도배했네요. 틈 하나 없이 꽉 채워진 거봐요. 저리니까 물결치듯 반짝거리는 효과가 나지.”“저 드레스 출시되자마자 물어봤는데 이미 예약한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디자인팀 전체가 달라붙어서 주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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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5화

하지만 김혜은은 급하게 설명할 생각이 없는 듯, 강하율과 기소정을 데리고 다니며 손님들을 한 명 한 명 소개하기 시작했다.강하율은 인사를 나눈 사람들이 대부분 사진 속에서 보았던 인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다들 남편이나 자녀 곁에 서 있다가, 강하율을 마주하는 순간 눈빛에 미묘한 당혹감을 내비쳤다.그녀는 비로소 김혜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어머니와 관련이 있었다.그중 단발머리를 한 중년 여성이 불쾌한 기색으로 말했다.“혜은아, 얘는 왜 데리고 온 거야? 재수 없게.”마치 무슨 바이러스라도 되는 양 대놓고 무시하는 말투였다.김혜은은 강하율을 슬쩍 바라보더니 웃으며 대답했다.“이번 연회 책임자야. 날 도와준 게 고마워서 거래처 몇 군데 좀 소개해 주려고 데려왔지.”단발머리 부인이 콧방귀를 뀌며 비아냥거렸다.“거래처? 얼굴이랑 몸으로 꼬시게? 그럼 우리 같은 여자들 찾아봤자 소용없을 텐데.”상대의 노골적인 악의를 느낀 강하율이 미간을 찌푸리며 맞받아쳤다.“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씀인가 보네요?”“뭐? 이게 어디서 눈을 똑바로 뜨고...! 내가 컴플레인이라도 걸면 어쩌려고?”“컴플레인이요? 저한테 직접 얘기해보시죠.”강하율의 등 뒤로 차갑고 위엄 있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단발머리 부인 일행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즉각 고개를 숙였다.“배 대표님.”“지금 저희 호텔에서 부적절한 거래가 오가고 있다고 의심하시는 겁니까?”배윤호가 되물었다.“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그럼 기소정 씨가 조익현 같은 남자를 만난 걸 꼬투리 잡아 비꼬시는 중입니까?”배윤호가 서늘하게 대꾸했다.“아닙니다! 죄송해요, 배 대표님. 제가 말실수했네요.” 단발머리 부인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사과했다.잠시 후, 한 남자가 급히 다가와 부인을 붙잡았다.그는 강하율을 보고 깜짝 놀라더니 이내 배윤호에게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배 대표님, 너그러운 마음으로 한 번만 봐주십시오. 제 집사람이 술이 과했나 봅니다.”배윤호가 차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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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6화

강하율은 생각을 멈추고 서둘러 배윤호를 바라보았다.“대표님,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그래.”배윤호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강하율과 기소정은 파티장을 빠져나갔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하율은 옆 정원에서 기소정을 발견했다.기소정은 손에 담배를 들고서 복잡한 눈빛으로 강하율을 바라봤다.“내가 하율 씨를 미워해야 할까요, 아니면 하율 씨에게 고마워해야 할까요?”“마음대로 해요.”강하율은 기소정이 자신을 좋아하건 싫어하건 전혀 개의치 않았다.기소정은 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우리 엄마가 하율 씨를 보고 긴장했던 이유가 있었네요. 나는 하율 씨가 그 사람 딸이라는 걸 최근에야 알았거든요.”“기소정 씨, 할 말 있으면 해요.”“나는 하율 씨 어머니를 만난 적이 있어요. 같이 밥도 먹고 애프터눈 티도 마셨죠.”기소정이 본론을 꺼냈다.강하율은 그제야 기소정이 자신보다 세 살 더 많다는 걸 떠올렸다. 그러니 기소정은 그녀보다 더 많은 것들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그래서요?”“솔직히 말해서 나는 하율 씨 어머니가 좋았어요. 다른 재벌가 사모님들처럼 고리타분하거나 거만하지도 않았고, 예전의 우리처럼 별 볼 일 없는 집안 사람들에게도 잘해줬거든요. 하율 씨 어머니는 어디를 가나 늘 주목받았고 또 중심이 되었죠. 우리 아빠를 유혹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하율 씨 어머니를 지금까지도 좋아했을 거예요.”“기소정 씨, 저는 기소정 씨가 한 말을 믿지 않아요.”강하율이 단호하게 말했다.기소정은 담배를 피우며 대꾸했다.“우리 엄마가 하율 씨에게 자기가 다 봤다고 얘기했을 텐데요. 사실 나도 봤어요. 그런데 엄마는 그 사실을 모르죠. 하율 씨 어머니는 우리 아빠 다리 위에 앉아 있었고 우리 아빠는 하율 씨 어머니를 끌어안고 있었어요. 우리가 그곳에 가지 않았더라면 아마 두 사람은 잤을지도 몰라요.”강하율은 기소정의 표정을 살폈다. 거짓말을 하는 얼굴은 아니었다.그렇다면...강하율은 주먹을 꽉 쥐면서 감정을 추스른 뒤 가능한 모든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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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7화

강하율이 말했다.“기소정 씨 어머니가 잠을 잘 자지 못하는 게 저 때문이라고 확신할 수 있나요? 기소정 씨, 시간이 있을 때 어머니랑 자주 같이 있도록 해요. 우리 어머니 일은 제가 계속 조사할 테니까 이번에 제가 도와준 걸 생각해서 새로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꼭 저한테 얘기해줘요.”기소정은 거절하지도, 그렇다고 확답을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강하율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좋은 시작이었다.잠시 뒤, 기소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엄마가 안으로 들어와서 손님을 맞으라고 하네요. 먼저 가볼게요.”“저도 들어가려던 참이었어요. 같이 가요.”두 사람은 드물게도 평온하게 대화를 나누며 걸었다.그리고 안으로 들어가기 전, 기소정이 말했다.“아까 그 사모님들을 주시하도록 해요. 그 사람들이 사적인 자리에서 하율 씨 어머니 얘기를 하는 걸 들은 적이 있거든요. 다들 겉으로는 친한 척해도 사실 서로 못마땅해하는 경우가 훨씬 많아요. 다만 구체적인 건 우리 엄마한테 물어봐야 알 수 있어요.”“알겠어요.”홀 안에는 이미 모든 손님이 도착해 있었다.파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서 춤을 췄다.강하율은 파티에 별로 흥미가 없었지만 사람들이 계속해 그녀에게 같이 춤을 추자고 했다.앞으로 고객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보니 강하율은 춤을 못 춘다며 에둘러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그중에는 자기가 가르쳐 주겠다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 때문에 강하율은 적당한 핑계를 찾을 수가 없었다.한 번 예외를 두면 앞으로 모든 사람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에, 강하율은 김혜은이 대신 나서서 상황을 정리해 주길 바라며 그녀를 찾았다.그런데 뜻밖에도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배윤제와 시선이 마주쳤다. 술잔을 든 그의 옆에는 정다인이 서 있었고, 두 사람은 여러 재벌가 자제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배윤제는 강하율을 향해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자신을 찾아와도 된다고 신호를 보냈다.마치 그녀에게 벌을 주려는 듯한 모습이었다.강하율이 곧바로 시선을 거두고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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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8화

임현서의 엄마는 말하는 와중에 은근히 강하율을 옆으로 밀어냈고, 임현서는 배윤호의 옆에 섰다.세원시 사람들은 배윤호가 사적인 파티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는데, 배윤호가 이번에 기씨 가문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한다는 사실을 알고 적지 않은 집안에서 결혼 적령기인 딸을 불러들였다. 그들이 이 자리에 딸을 데려온 건 자신의 딸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주목받기를 바라서였다.그러다 운이 좋으면 배윤호의 마음에 들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배윤호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다소 차갑게 말했다.“죄송하지만 저한테는 파트너가 있습니다.”임현서의 엄마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누가 그런 영광을 누리게 됐는지 궁금하네요.”강하율도 궁금해져 좌우를 둘러보았다.그런데 다음 순간 배윤호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고 댄스홀로 향했다.강하율이 댄스홀 한가운데서 가만히 서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자 배윤호는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렸다.“내가 한 번 도와줬으니까 너도 한 번 도와줘야지.”‘그런 거였어?’강하율은 곧바로 긴장을 풀고 다른 손을 그의 어깨 위에 올렸다.“좋아요.”사실 강하율의 부모님은 주말에 집에 있으면 음악을 틀어 놓고 둘이서 춤을 추는 걸 좋아했다.그 모습을 자주 보다 보니 강하율도 자연스럽게 따라 배우게 되었다.비록 정석은 아니지만 춤이라는 건 원래 기분 좋자고 추는 것이었기에 즐겁게 추면 될 뿐, 잘 추는지 못 추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그런데 뜻밖에도 배윤호가 춤을 굉장히 잘 춰서 전혀 어렵지 않았고, 강하율은 어느샌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춤에 푹 빠졌다.다른 사람들은 두 사람을 보고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주었다.선남선녀가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을 싫어할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물론 배윤제를 포함한 일부 사람들은 내키지 않을 것이다.조금 전 강하율이 시선을 거두었을 때 배윤제는 살짝 화가 났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며 정다인의 손을 놓고 강하율을 도와주러 가려 했다.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이다 보니 끝내 마음이 약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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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9화

허리에 둘린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가자 드레스에 박힌 큐빅들이 남자의 체온을 머금은 듯 그녀의 피부를 달구었다.곁눈질하니 배윤제와 정다인이 낮은 목소리로 언쟁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강하율이 막 웃으려던 순간,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율아.”강하율은 바로 몸을 돌려 반가운 얼굴로 상대를 바라봤다.“이모!”그 여자는 바로 배윤제의 어머니, 조윤서였다. 흰색의 긴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우아하고 온화해 보였다.조윤서는 고개를 돌려 배윤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윤호도 왔구나.”배윤호는 조윤서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피를 나눈 사이가 아니다 보니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기에 이 정도 반응이면 양호한 편이었다.“윤호 네가 귀국했다는 얘기를 듣고 일부러 일찍 온 거야. 안 그래도 너희 둘을 서로에게 소개해 주려고 했는데 이미 친해진 것 같네.”강하율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배윤호가 먼저 말했다.“요즘 호텔에 일이 좀 많았거든요.”조윤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잘됐네. 주말에 가족끼리 식사하기로 한 거 알고 있지? 너희 둘 다 빠지면 안 돼. 내가 사람을 시켜서 이미 다 준비해 놓았어.”강하율은 원래 기회를 봐서 거절하려 했으나 조윤서가 살갑게 구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네, 알겠어요.”“네.”배윤호도 무덤덤하게 대답했다.조윤서는 반대편에 있던 배윤제를 향해 손짓했다.“윤제야, 여자 친구가 생겨도 여동생은 챙겨야지. 네 형도 하율이랑 춤을 췄는데 너도 와서 하율이랑 같이 한 곡 춰.”배윤제는 정다인의 손을 놓고 곧바로 강하율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가자.”배윤호는 강하율을 도와주려고 했지만 강하율이 그를 막았다.배윤제와 춤을 추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조윤서를 괜히 난감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괜찮아요, 대표님. 제가 잘 처리할 수 있어요.”배윤호는 그 말을 듣고 신사답게 길을 비켜 주었다.강하율과 배윤제는 댄스홀로 들어갔다.“형이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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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0화

김혜은은 강하율을 한 번 바라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어디 조용한 데서 이야기 좀 하자.”강하율은 순간 설레면서도 긴장됐다. 하지만 두 사람이 파티장을 벗어나기도 전에 한 직원이 급히 달려왔다.“강 팀장님, 사모님께서 몸이 좀 안 좋으셔서 잠깐 와 주셨으면 합니다.”조윤서가 몸이 약하다는 건 강하율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절친이었던 강하율의 어머니까지 세상을 뜬 이후로 조윤서의 몸 상태는 줄곧 좋지 않았다.의사는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했다.강하율은 김혜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죄송해요. 다음에 다시 얘기를 나눌까요?”김혜은이 고개를 끄덕였다.“가 봐. 내가 의사를 불러줄게.”“감사합니다.”강하율은 직원과 함께 휴게실로 향했다.방 안에는 배윤제와 정다인도 있었다.조윤서는 약병을 열어 약을 먹으며 강하율을 바라봤다.“애들이 너까지 불렀나 보네. 나는 괜찮아. 그냥 사람 많은 곳이라 적응이 안 돼서 그래.”강하율이 막 말을 꺼내려는 순간, 정다인이 재빨리 조윤서에게 다가가 컵에 물을 따르고 그녀의 등을 두드려 숨을 고르게 도왔다.“물 좀 드세요.”조윤서는 고개를 끄덕인 뒤 컵을 건네받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강하율은 다가가려다가 멈췄다. 정다인은 배윤제의 약혼녀나 다름없는 사람이니 이런 일은 정다인이 하는 편이 나았다.그러나 동시에 강하율이 호텔 직원으로서 고객을 살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이모, 말씀 아끼세요. 제가 사람을 시켜서 패딩을 가져오게 했고 방도 잡아뒀어요. 잠시 쉬세요.”조윤서는 두어 번 기침을 하더니 말했다.“역시 하율이는 세심하다니까. 여기가 이렇게 추운 줄은 몰랐어. 나도 몸이 예전 같지 않네.”“별말씀을요. 제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에요.”강하율이 말을 마치자 정다인과 배윤제가 동시에 그녀를 바라봤다.조윤서는 몸이 좀 괜찮아지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다인과 배윤제가 그녀를 부축하려 했지만 조윤서는 하필이면 강하율의 손을 잡았다.“하율이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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