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e Kapitel von 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Kapitel 361 – Kapitel 370

562 Kapitel

제361화

최수나에게 그런 생각이 있다면, 해인은 도와야 했다.동현이 아직 살아 있었다면, 분명 최수나를 위해 방법을 찾아줬을 터였다.해인이 물었다. “손톱은 왜 그래요? 이 가야금에는 왜 피가 묻어 있는 거예요?”최수나는 힘없이 웃었다. “한 회장이 나를 곁에 둔 건 내가 서정란 사모님을 닮아서이기도 하지만, 내 가야금도 세상에 하나뿐이거든. 한 회장은 그마저 혼자 차지하고 싶어 했어.”“그래서 사흘 밤낮으로 가야금을 탔어. 이 손을 망가뜨려서라도, 한 회장이 나를 놓아주게 만들고 싶었어.”순간 멍해진 해인이 놀란 눈으로 최수나를 바라봤다. “언니, 미쳤어요?!”최수나는 누구보다 가야금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가야금은 어릴 적부터 몸에 밴 공력이 중요한 악기다. 그런 가야금을 다섯 살부터 익혀 왔으니, 거의 평생을 가야금과 함께 살아온 셈이었다.손이 망가지면 다시는 가야금을 탈 수 없게 된다. 그건 최수나에게 목숨을 끊는 일이나 다름없었다.“안 미쳤어. 해인아, 네가 믿어줄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이 보름 동안이 몇 년 사이 내가 가장 또렷하게 살아 있는 시간들이었어.”“그동안 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 괴로웠어. 그 두 여자는 날마다 서로 죽이네 살리네 하며 물고 뜯고 싸웠지만, 난 더는 저 여자들처럼 되고 싶지 않았어.”해인의 눈가가 젖어 들었다. “제가 한 회장님께 말씀드릴게요. 제가 방법을 찾아볼게요. 언니를 여기서 내보내 달라고 꼭 말씀드릴 테니까, 더는 그런 짓 하지 마세요.”“그러지 마.”최수나가 해인을 붙잡았다. “해인아, 너는 동현이 동생이잖아. 그동안 강씨 가문 사람들의 보살핌도 없이 혼자 살아오느라 원래부터 많이 힘들었을 거야.”“난 네가 또 남들 비위나 맞추면서 아부하러 다니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 동현이도 그건 바라지 않았을 거야. 나는 네가 네 자신을 잘 아껴줬으면 좋겠어.”최수나의 마음속에서 해인은 이미 오래전부터 가족이었다.예전 강씨 가문에서 가족의 사랑을 한몸에 받던 작은 공주님이, 언젠가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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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2화

왕단영은 모르는 척했다. “해인아,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는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는데?”해인은 왕단영을 똑바로 바라봤다. “아버님이 세 분 가운데 누구와도 결혼하실 생각이 없다는 건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잖아요. 그런데 이렇게까지 서로 물어뜯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최 여사님 두 손이 다 피투성이예요. 손이 망가지면 더는 가야금도 못 타는데, 그건 최 여사님의 목숨을 끊는 거나 다름없잖아요.” “같은 여자끼리 왜 이렇게까지 모질게 구세요?”“아버님은 한 사람에게 머무를 분이 아니에요. 최 여사님이 사라져도 또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도 있고, 유호 씨 어머님을 닮은 더 젊은 여자도 나타날 수 있어요.”“아버님이 마음만 먹으면, 그 정도 지위로 못 찾을 이유가 없잖아요. 그럼 두 분은 또 몇 사람이나 몰아내실 건데요? 최 여사님은 애초에 그런 데 뜻이 없었어요...”해인의 말에 왕단영은 잠시 멍하니 굳어 있었다.바로 그때, 멀리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가사도우미 하나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해인은 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봤다. 다락방 쪽 같았다.‘설마...!’표정이 바뀐 해인이 곧장 위층으로 뛰어올라갔다.그리고 눈앞에 들어온 광경에, 서늘한 기운이 발바닥부터 등줄기를 타고 치솟았다.바닥에는 새빨간 피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고, 최수나는 그 핏물 한가운데 힘없이 누운 채 천장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핏물과 함께 줄이 끊어진 가야금이 나뒹굴고 있었고, 가야금 줄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최수나의 목에는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원래 여리고 고왔던 피부는 가야금 줄에 깊게 쓸려 찢겨 있었고, 안쪽의 붉은 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짙고 선명한 그 색은 최수나가 살아온 눈부신 삶을 닮아 있었다. 이렇게 된 뒤에도 최수나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보는 사람의 숨이 막힐 만큼... 처연하도록 아름다웠다.밥을 들고 올라왔던 가사도우미는 그 광경을 보고는 겁에 질린 채 주저앉았다.한원랑이 아무도 자기 서재에 들이지 말라고 명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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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3화

해인은 한씨 저택에서 병원까지 가는 길이 너무도 멀게만 느껴졌다.이토록 길게 느껴졌던 길은, 지난번 이후 처음이었다.그때도 벌써 몇 년 전이었다.그날 강동현도 꼭 이렇게, 온몸에 피를 묻힌 채 해인의 품에 누워 있었다.눈앞의 최수나의 얼굴 위로 동현의 얼굴이 서서히 겹쳐 보이는 듯했다.최수나의 손은 차가웠고 몸에서도 점점 온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해인의 두 손은 온통 선명한 피로 물들어 있었다. 해인은 얼른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최수나의 몸을 단단히 감쌌다.하지만 최수나 목의 상처에서는 피가 계속 솟아났다. 해인이 아무리 애를 써도, 도무지 피를 막을 수 없었다.피는 천천히 해인의 바지 쪽으로 번져 내렸다.허벅지에 들러붙는 축축하고 미끈한 감각이 전해지자, 해인의 가슴은 더 심하게 흔들렸다.뜨거운 눈물이 해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해인은 최수나를 바라보며 울먹였다. “왜 이렇게까지 어리석은 짓을 하셨어요? 조금만 더 버티셨어도, 제가 분명 방법을 찾아서 언니를 꺼내드릴 수 있었을 텐데요. 왜 조금만 더 기다리지 않으셨어요?”최수나는 힘겹게 웃었다. “소용없어. 가야금을 타지 못하는 최수나는, 날개 하나가 꺾인 새나 다름없어.” “나한테 남은 다른 한쪽 날개는 동현이였는데, 이제는... 나는 정말 쓸모없는 사람이 됐어.”해인은 눈물에 젖은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가슴 안쪽이 시큰하게 아려 왔다.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언니처럼 훌륭한 분이 어떻게 쓸모없는 사람이에요... 지금 언니는 제 가야금 선생님이세요. 중간에 그만두는 선생님이 어디 있어요.”그 말을 하며 해인은 휴대폰을 꺼냈다. 병원 쪽에 연락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하지만 손이 너무 떨려서 휴대폰조차 제대로 잡을 수 없었다.마침 그때, 우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팀장님, 출근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아직 회사에 안 오셨네요?]“이쪽에 일이 좀 생겼어. 오늘은 못 갈 것 같아.”우진은 곧바로 해인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아챘다. [팀장님,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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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4화

해인은 눈이 시려오면서 따가웠다. 목이 메인 채 겨우 말을 이었다. “기운 좀 아끼시면 안 돼요? 요즘 의학이 얼마나 발달했는데요. 의사 선생님들이 분명 언니를 고쳐주실 거예요.”“언니는 그저 조금... 정말 작은 상처를 입은 것뿐이에요.”끝으로 갈수록 해인의 목소리는 힘없이 잦아들었다.최수나는 창백하게 웃었다.가볍게 떠오르는 듯한 그 기분, 영혼이 금방이라도 몸을 빠져나갈 듯한 감각만으로도 최수나는 자기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최수나는 해인의 눈을 바라봤다. “해인아, 사실 너한테 계속 숨겨 온 일이 하나 있어.”해인은 잠시 멍해졌다가 본능적으로 물었다. “뭔데요?”“그때 동현이 교통사고 나고 나서 나한테 걸었던 전화 있잖아. 내가 그때 동현이 목소리가 하나도 안 들렸다고 했었지...”최수나의 숨이 가늘게 떨렸다. “그런데... 사실은 들었어.”해인은 핏기 하나 없는 최수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가슴이 꽉 조여드는 걸 느꼈다. “우리 오빠가 언니한테 뭐라고 했어요?”최수나는 낮게 답했다. “세 글자였어... 녹음기.”해인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녹음기?’‘녹음기 안에 대체 무엇이 들어 있다는 뜻일까?’‘협력업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러 가면서 오빠가 녹음기까지 챙겨 다녔단 말이야?’왜인지 해인의 등골을 서늘하게 훑고 지나가는 불길함이 밀려왔다. 곱씹을수록 더 무서웠다.해인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그때 구급차 안에는 저랑 오빠 둘뿐이었어요. 오빠는 제게 녹음기를 건네주지 않았어요.”최수나는 처연하게 웃었다. “그게 내가 이 얘길 바로 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해. 강씨 가문 사람들 죽음에 정말 무슨 음모가 얽혀 있었다면, 동현이는 고작 십 대였던 너까지 그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을 거야.”그래서 동현도 최수나도 모두 해인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그 사실을 알게 되자 해인은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막상 입을 열려고 해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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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5화

“팀장님?”우진은 원래부터 일처리가 빈틈없는 사람이었다. 해인이 부탁한 말 한마디에 회사에서 병원까지 곧바로 달려왔다.해인은 멍한 눈으로 차 바깥을 한 번 바라보더니, 아주 가볍게 입을 열었다. “우리 언니, 이미 숨이 멎었어.”차 밖에는 의사와 간호사만 해도 다섯, 여섯은 되어 보였다.우진이 사람을 살리려고 급히 불러 놓은 의료진이었다.그 말을 들은 우진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해인을 바라봤다.해인은 품 안의 여자를 꼭 끌어안은 채, 느린 손길로 자기 목에 둘렀던 스카프를 풀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최수나의 목에 감아 주었다. 깊게 패인 흉한 상처를 가려 주려는 듯한 몸짓이었다.해인은 그 일에만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최수나의 얼굴에 묻은 피까지 손수 닦아주었다.마치 해인 혼자 다른 세계에 갇혀 버린 듯했다. 밖에서 오가는 소리도,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도, 이제 해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우진은 눈을 내리깔았다.해인에게서 짙은 슬픔이 배어 나오는 게 또렷이 느껴졌다.우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팀장님,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해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우진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아주 살짝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그런데 우진은 그 웃음이 너무도 창백하게만 느껴졌다.“팀장님, 아직 임신 중이시잖아요. 너무 무리하시면 아이한테 안 좋습니다.”해인은 고개를 내려 자기 배를 바라봤다.‘임신...’그렇다. 방금 전에도 최수나가 몇 번이나 말했다.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아이한테 해롭다고.곧 병원 직원들이 다가와 최수나를 들것에 옮겨 실었다.김 집사는 그 뒤를 따라가며 장례 절차를 처리하려고 했다.해인은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먼저 가.” 해인이 우진에게 말했다. “오늘 일은 내가 빚졌어.”그 말을 남긴 해인은 곧장 병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해인의 안색이 너무 좋지 않았던 탓에 우진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결국 우진은 해인 모르게 뒤를 따라갔다.해인은 너무 눈에 띄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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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6화

“유호 씨는요? 상태는 어때요?”운전기사가 곧바로 답했다. “방금 진료실에서 나오셨습니다. 의사 말로는 요즘 계속 제대로 못 쉬셔서 그런 것 같다고 하더군요.”“소염진통제 처방을 받으셨고, 지금은 수액 맞고 계십니다. 수액을 다 맞으면 바로 가실 수 있다고 했습니다.”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곧장 병실 쪽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여보, 수나 언니...”해인이 유일하게 믿는 사람인 유호에게 가슴속에 쌓여 있던 말을 다 털어놓고 싶었다. 유호에게 기대고 싶었다.그런데 문이 열리자마자, 해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병실 안에 있는 희정이었다.희정은 이미 몇 분 전에 와 있었다.희정은 유호를 향해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고 있었다. “많이 아파? 어떻게 이렇게까지 심해졌어?”희정은 병상 곁에 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유호를 바라봤다.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며칠은 그냥 입원해서 지켜보는 게 낫지 않을까? 마침 내 친구 중에 이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어.”“어디가 불편한지만 말하면 내가 바로 연결해 줄 수 있어. 통증 쪽으로는 아주 잘 보는 사람이거든.”병상에 앉아 있던 유호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었다.수액을 맞고 있는데도 조금도 나아진 기색이 없었다.유호는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희정의 얼굴을 봤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슴 한쪽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익숙함이 피어올랐다.마치 기억 속 가장 깊은 곳에 이 얼굴이 오래 숨어 있었던 것 같았다.낯설어야 맞는데, 어딘가 이미 알고 있던 사람처럼 느껴졌다. 마치 어떤 프로그램이 머릿속 어딘가에 저장돼 있기라도 한 것처럼, 유호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묘한 친근함까지 느꼈다.‘왜 이렇게 낯설지가 않지?’“왜 그래?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희정이 눈을 깜빡였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희정은 유호 쪽으로 몸을 조금 더 기울였다. “갑자기 내가 좀 예뻐 보이기라도 해?”유호는 대답하지 않았다.희정은 웃으며 물을 따라 주었다. 유호가 손을 뻗지 않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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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7화

“유호야, 지금은 곁에 사람이 있으니까 내가 더 방해하지는 않을게. 다음에 다시 보러 올게.”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눌러 삼킨 희정은 유호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곧장 병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희정에게는 시간이 많았다.굳이 지금 당장 결과를 볼 필요도 없었다.어차피 칩은 언젠가 작동할 테니까.희정은 정말 발을 다친 듯했다. 걸을 때마다 한쪽 다리를 절었고, 표정에도 통증이 느껴졌다.유호의 시선은 희정의 분명히 이상한 걸음걸이를 따라갔다.희정이 눈물 자국이 밴 눈으로 유호를 돌아보자, 유호는 괜히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불쑥 물었다. “차 몰고 왔어?”희정은 잠깐 멈칫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집 기사님이 마침 휴가라서, 택시 타고 왔어.”유호가 말했다. “그럼 내가 기사 보내 줄게.”그 한마디에 병실 안의 두 여자는 나란히 굳어 버렸다.해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유호를 쳐다봤다.‘내가 지금 뭘 들은 거야? 다른 여자를 데려다 주라고 기사까지 붙여주겠다고?’반면 희정의 속은 환하게 들떠 올랐다.희정은 입꼬리를 올리면서 활짝 웃더니, 일부러 해인을 힐끗 바라봤다.“넌 나한테 진짜 잘해 준다.”해인은 가슴 한쪽이 답답하게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다만 유호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해인은 괜히 말을 보태지 않았다. 유호가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이마를 짚은 채 쉬고 싶어 하는 걸 보자, 해인은 혼자 병실 밖 복도로 나가 바람을 쐬었다.밖에는 희정이 아직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다.턱을 살짝 치켜든 희정이 마치 이미 이긴 사람처럼 해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강해인 씨, 제가 직접 보여드릴게요. 유호가 어떻게 저를 사랑하게 되는지...”희정의 눈빛에는 반드시 손에 넣겠다는 확신이 가득했다.그런데 해인은 그 말을 들은 사람 같지 않았다.해인이 자극을 받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자 희정은 더 견딜 수 없었다. 희정은 한 걸음 다가섰다. “제가 지금 말하고 있잖아요. 들리세요?”해인은 희정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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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8화

“해인아, 울지 마. 나한테 죽음은 해방이야. 이 집에 발을 들인 날부터 최수나는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었어.” “지금의 나는 그저 껍데기만 남은 채, 혼이 빠진 사람처럼 버텨 온 것뿐이야.”“네가 나를 가족처럼 여겼다는 거 알아. 그래서 더 미안해. 너한테 또 한 번 가족을 잃는 아픔을 남기게 됐으니까.” “그래도 나는 정말 더 이상은 이렇게 숨만 붙은 채 버티고 싶지 않았어.”“그동안 나는 정말 너무 지쳤어. 가면을 뒤집어쓴 채 살아왔으니까. 네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최수나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나조차 잊고 살았을 거야.”“고마워. 네가 내 처음 마음을 다시 찾아줬어.”“...”최수나가 남긴 말이 해인의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천천히 주먹을 쥐면서 해인의 눈에도 다시 물기가 어렸다.“해인아, 꼭 기억해. 세상에서 누구보다 네 자신이 가장 소중해. 무엇보다 먼저 너를 아껴야 해. 그다음이 아이고, 남편이야.”“그동안 너 혼자 버텨 오느라 정말 힘들었지. 동현이 대신 네 버팀목이 되어 주지 못한 건 내가 이기적이었기 때문이야.”“그래도 한 번만 이해해 줘. 내가 평생을 살아오면서, 마지막만큼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싶었을 뿐이야.”“...”사방으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해인에게는 아무런 온기도 닿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속에 깔린 냉기만 더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해인은 손끝까지 싸늘하게 식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그 냉기는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천천히 번져 올라오고 있었다.해인은 알고 있었다.최수나의 죽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손이 닿아 있었다.한씨 저택에 있는 그 두 여자도 이 일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이건 사고가 아니야. 누군가 수나 언니를 여기까지 몰아붙였어.’“팀장님...”우진은 줄곧 해인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동안 말없이 해인을 지켜보고 있었다.우진은 방금 편의점에서 사 온 담요를 해인의 어깨 위에 조심스럽게 덮어주었다. “일단 집에 먼저 가셔서 옷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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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9화

“그때 와세라 면접에서 저한테 물으셨잖아요. 이렇게 좋은 이력을 갖고도 왜 고작 비서 자리에 만족하느냐고요.”“그때 저는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올라가고 싶어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건 겉으로 내놓는 말이었을 뿐입니다. 진짜 이유는...”“해인 누나 때문이었습니다.”“강씨 가문에 일이 생겼을 때는 제가 너무 어렸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저도 해인 누나를 지킬 수 있습니다.”우진의 눈은 맑게 빛나고 있었다.그 진심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은 채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얼굴 가득 진지함이 묻어났다.해인은 우진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았다.다만 지금 해인의 마음은 너무 복잡했다. 우진이 내민 마음까지 받아 낼 여유는 도저히 나지 않았다.“우진 씨가 은혜를 잊지 않은 건 정말 고마운 일이야. 그건 분명 좋은 일이기도 하고. 그런데 우진 씨가 나한테 이만큼 관심이 있다면, 하예주 일도 알고 있겠지.”우진이 곧바로 말했다. “그래도 저는 하예주 씨와 다릅니다.”“아니, 내가 우진 씨랑 하예주가 같다고 말한 건 아니야.” 해인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내 말은... 우진 씨한테도 자기 삶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야.” “우진 씨를 후원한 건 그때 강씨 가문 입장에선 그저 손 한 번 내민 정도였어. 우리는 처음부터 우진 씨한테 어떤 보답도 바란 적 없어.”해인의 목소리는 아주 옅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희미하게 흩어졌다.“원래 후원하는 사람과 도움받는 사람은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게 맞아. 그래야 서로에게 좋아.”해인은 한 박자 쉬었다가 다시 말했다. “게다가 나 임신했잖아. 몇 달 뒤면 아마 출산휴가도 들어갈 거야.” “우진 씨의 경력을 생각해서라도, 우진 씨는 다른 일자리 알아보는 게 맞아. 내 옆에 있어 봤자 배울 수 있는 것도 많지 않아.”우진의 이력이라면 굳이 해인 곁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성적도 좋았고, 일도 빈틈없이 해냈다. 앞으로 자기 몫을 충분히 해낼 사람이었다.해인이 붙잡아 둘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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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0화

유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해인의 손을 덥석 잡아 끌었다.주위를 한 번 둘러보던 유호가 기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우리 집 기사님은?”해인은 눈을 내리깔았다. “당신이 차희정 씨 바래다주라고 보냈잖아. 벌써 잊었어?”유호는 뚜렷하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눈에는 의문이 떠올랐다. “내가? 희정이를 데려다 주라고 사람을 보냈다고? 그게 언제 있었던 일인데?”해인이 조용히 답했다. “30분 전쯤. 지금쯤이면 아마 집에 도착했겠지.”유호의 미간이 더 잔뜩 일그러졌다.유호 자신도 그 일에 대해 아무 기억도 없다는 사실이 놀라웠다.‘이상해. 왜 이 일만 뚝 끊긴 것처럼 기억이 없지?’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이유를 알 수 없이 계속되는 두통과, 이 일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았다.유호는 눈앞의 해인을 바라봤다. 혹시라도 해인이 이 일로 마음이 상했을까 봐 조심스러웠다. “여보, 화났어?”해인은 숨기지 않고 말했다. “조금 놀라긴 했어. 그렇다고 속상하진 않았고.”그때 해인은 최수나의 죽음이 남긴 슬픔에 깊이 잠겨 있었다.다른 생각을 붙잡고 있을 힘조차 없었다.유호는 뜻밖이라는 듯 되물었다. “속상하지 않았다고?”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옅게 웃기까지 했다. “나는 이제 더 잃을 것도 별로 없어. 언젠가 정말 당신 마음이 변하게 된다면, 나는...”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호가 해인을 확 끌어당겼다.유호는 해인을 단단하게 자신의 품 안에 안으면서 말했다.“그런 일은 없어. 나는 절대 마음 안 변해. 내 마음은 언제나 너한테만 있어.”해인은 고개를 들었다.정작 유호는 해인이 왜 다시 그 화제로 돌아왔는지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그러면 당신이 기사님을 시켜서 차희정 씨를 데려다 주게 한 건 뭐야?”유호는 몇 초 동안 말을 잃었다.유호 자신도 도무지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해인의 눈은 분명히 말해 주고 있었다. 그 일이 실제로 유호 자신이 한 행동이라는 걸.유호가 조용히 말했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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