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Chapter 381 - Chapter 390

562 Chapters

제381화

[엄마는 원래 몸도 건강하셨잖아. 나도 얼마 전에 뵀는데, 어떻게 갑자기 중풍이 와?]해인은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다.유호의 전화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해인은 마음의 준비를 할 틈조차 없었다.얼마 전 모녀 사이에 불편한 말이 오간 건 사실이었다.그래도 유호는 알고 있었다. 해인의 마음 한편에는 언제나 주여진이 자리하고 있다는 걸.“정확한 상황은 나도 아직 잘 모르겠어. 여보, 내가 차 가지고 데리러 갈까?”[아니, 나 지금 이미 나왔어.]해인 쪽에서는 현관문이 거칠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그녀는 정신없이 밖으로 뛰어나가고 있었다.[일단 끊을게.]유호가 바로 말했다. “조심해서 가. 임신 중이잖아. 너무 뛰지 말고.”해인은 가는 내내 넋이 나가 있었다.심장은 제멋대로 쿵쿵 뛰었고, 불길한 예감이 자꾸만 목을 조여 왔다....병원에 도착했을 때, 병상에 누운 주여진의 얼굴은 창백했다.불과 몇 시간 사이에 훨씬 늙어 버린 사람처럼 보였다.주여진은 초점 잃은 눈으로 천장만 멍하게 바라보면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예철진과 태상이 그런 주여진 곁을 지키고 있었다.물도 떠다 주고, 이것저것 손을 보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의사 말로는 네 어머니 상태가 이제 막 조금 안정된 거라고 하더라.” “지금은 미음 같은 유동식만 먹을 수 있고, 물도 많이 마시면 안 된다고 했어. 잘못하면 사레가 들릴 수 있다고.”예철진은 태상의 손에 든 물컵을 보며 말을 이었다.“태상아, 바쁘면 먼저 가 봐도 된다. 여기는 내가 보고 있을게.”태상은 고개를 저었다.“아버지도 연세가 있으신데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제가 있겠습니다.”그 말을 들은 예철진은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여진이가 이렇게 됐는데 내가 집에 간들 잠이 오겠니...”예철진의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다 내 잘못이야. 내가 그때... 조금만 더 빨리 붙잡았으면 여진이가 바닥에 넘어지면서 머리까지 부딪히진 않았을 텐데...”그동안 두 사람 사이가 어
Read more

제382화

“결국 남편인 내가 내 역할을 못 한 거야.”예철진은 주여진의 손을 더 세게 감쌌다. 목소리에는 짙은 자책이 묻어 있었다. “여보, 내가 미안해. 당신 원래 몸도 괜찮았잖아. 분명히 다시 좋아질 거야.”해인은 맞잡은 두 사람의 손을 보는 것조차 불편했다.괜히 속이 뒤틀렸다.‘또 저래. 왜 저 사람은 늘 연기하는 것처럼 보일까?’해인은 시선을 거뒀다. 눈가에는 희미한 냉소가 떠올랐지만, 말투는 단호했다.“제가 여기 남아서 엄마가 회복하실 때까지 돌볼 거예요. 아까 의사 선생님도 말씀하셨잖아요.”“엄마는 조용히 쉬셔야 한다고요. 예씨 집안에서 제대로 못 모실 거면, 앞으로는 괜히 들쑤시지 말아 주세요.”예철진의 얼굴이 바로 굳어지면서 목소리도 차갑게 내려앉았다.“뭐라고 했니?”예철진은 해인을 노려봤다. “여진이는 우리 예씨 집안 사람이야.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가라고 해? 고작 양녀 주제에.”해인은 이 상황이 너무 수상하다고 느꼈다.낮에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주여진은 멀쩡했다.그런데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서 저렇게 병상에 누워 말도 못 하는 상태가 됐다.최수나의 죽음 이후, 해인은 전보다 훨씬 더 경계하게 됐다.가장 가까운 사람이 휘두르는 칼이 오히려 더 깊이 박힌다는 걸 이미 봤으니까.한원랑만 봐도 그랬다.겉으로는 최수나를 애지중지하는 것처럼 굴었지만, 정작 사람이 사라지자 장례조차 제대로 치러 주지 않았다.예철진은 주여진의 중풍이 사고라고 했다.그런데 세상에 그렇게 우연이 많을 리가 있을까?해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예철진을 똑바로 바라봤다.예철진보다 수십 년은 어린 해인이었지만, 기세에서는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서서히 예철진을 눌러 버릴 듯한 힘이 실려 있었다.“엄마 바로 옆에 계셨으면서도 저렇게 크게 다치게 하셨잖아요. 지금도 중병으로 누워 계시고요.”해인의 목소리는 차갑고 또렷했다. “왜요? 본인이 제대로 못 지켰다는 말을 들으니 찔리세요? 무능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다른 사람이 나서는 것도 싫으
Read more

제383화

희정이 불쑥 들어오자 해인은 멈칫했다.해인은 본능처럼 유호를 돌아봤다.“당신이 말한 거야? 우리 엄마 아프다는 소식을.”희정이 해인보다도 더 빨리 병실에 나타난 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유호는 곧바로 부인했다. “당연히 아니지.”그러자 희정이 화사하게 웃었다. 확 드러나는 꾸민 웃음이었다. “난... 그냥 병원 아래를 지나가다가 해인 씨가 엄청 급하게 뛰어가는 걸 봤거든.”해인의 목소리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우리 엄마 병실에서 나가 주세요.”해인과 희정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두 사람 모두 너무 잘 알고 있었다.해인은 희정이 저렇게 선뜻 호의를 베풀 사람이라는 걸 믿지 않았다.희정은 상처받은 사람처럼 눈을 내리깔았다. “제가 모셔온 분은 이 병원에서 제일 잘 보는 전문의인데요. 그래도 진짜 안 보시겠어요?”해인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필요 없어요.”희정이 소리 없이 웃었다.그 웃음에는 얄미운 비꼼이 배어 있었다.“그래요? 저는 또 해인 씨가 얼마나 효녀인가 했네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도 아니었나 봐요.”희정은 일부러 말을 끊었다가, 해인의 반응을 살피듯 다시 입을 열었다. “생모가 저렇게 죽어 가는데도 찾아가 보지도 않던 사람이니까요. 하긴, 그쪽은 양어머니일 뿐이니 더할 나위도 없겠네요.”“그럼 저는 갈게요. 도 여사 숨이 끊어지면, 제가 연락을 드릴게요. 그때 와서 절이라도 하세요.”그 말을 듣는 순간, 해인의 눈이 흔들렸다.‘그분이... 정말 많이 위독한 거야?’해인과 도수희 사이에 모녀의 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그래도 죽고 사는 이야기 앞에서는 지나칠 수 없었다.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많이 위중하신가요?”희정은 그 질문이 우스운 듯 옅게 웃었다. “그분 안 보겠다고 한 거 아니었어요? 그럼 사느냐 죽느냐가 해인 씨랑 무슨 상관이죠?”희정은 해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봤다. “아니면... 이거였어요? 도 여사와 우리 아버지가 계속 해인 씨를 생각하게 만드는 방법... 바
Read more

제384화

희정은 유호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분이 치밀어 오른 희정은 그대로 달려가 뒤에서 유호를 끌어안았다. “너도 사실 강해인 안 사랑하잖아. 나 좀 제대로 봐. 내가 네가 좋아할 만한 모습 아니야?”유호는 희정을 떼어 내려고 했다.그런데 머릿속이 갑자기 하얗게 비어 버렸다.눈가에 눈물을 머금은 희정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오자, 유호의 몸이 그대로 굳어졌다. 마치 누가 혈을 눌러 버린 사람처럼 꼼짝할 수가 없었다.유호가 뿌리치지 않자, 희정은 더 대담해졌다.희정은 발뒤꿈치를 들어 유호에게 입을 맞추려고 했다.바로 그때, 병실에서 나온 해인이 두 사람을 봤다.“왜 그러세요, 차희정 감독님? 뒤에서 몰래 안 되는 것 같으니까, 이제는 대놓고 유혹하시게요?”해인은 핸드폰을 들어 희정의 얼굴을 겨눴다.희정은 불쾌한 얼굴로 쏘아붙였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왜 저를 찍으세요?”“왜긴요.” 해인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감독님 더 유명해지시라고요. 차희정 감독님이 남의 남자를 어떻게 빼앗으려 드는지, 다들 똑똑히 보게 만들어 드리려고요.”“미쳤어요?” 희정이 성큼 다가와 핸드폰을 낚아채려 했다. “초상권 침해예요. 제가 찍으라고 했어요? 당장 지워요. 고소할 수도 있어요!”이게 정말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희정은 업계에서 버티기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해인은 정확히 희정의 급소를 밟고 있었다.희정이 기를 쓰고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해인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고작 한 마디만 내뱉었다.“꺼져 주세요.”...희정은 울면서 병원을 떠났다.유호는 멀어지는 희정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봤다.그 모습을... 바로 뒤에 선 해인도 말없이 보고 있었다.해인은 다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5분이 지나도 유호는 들어오지 않았다.이상해서 다시 밖으로 나가 봤을 때, 복도 어디에도 유호가 없었다.해인은 미간을 찌푸린 채 엘리베이터를 바라봤다.무슨 일이라도 보러 아래층에 내려간 건가 싶었다.
Read more

제385화

유호의 이마에는 굵은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한눈에 봐도 몹시 괴로워 보였다.희정은 얼른 유호를 붙잡았다.그런데 유호는 그대로 희정의 어깨에 몸을 기대더니, 통증에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축 늘어졌다.희정이 몇 번이나 이름을 불렀지만, 유호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희정은 다급해졌다.유호에게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겁이 났다.무엇보다 칩 개발팀조차 이 물건에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원래라면 유호는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아야 했다. 그래야 칩의 각종 수치를 추적할 수 있었다.그런데 수술이 끝난 뒤로, 연구팀은 유호 몸에 이식된 칩 상태를 한 번도 제대로 확인한 적이 없었다.어쩌면 오늘이 기회일 수도 있었다.지금 유호는 의식을 잃은 상태라서 감각도 없었다.희정은 유호를 부축한 채 걸음을 옮겼다.죽을힘을 다해 겨우 유호를 병원 꼭대기 층 휴게실까지 끌고 올라갔다.서진은 눈앞의 유호를 보자 표정이 굳어졌다. “너... 얘를 왜 여기까지 데려왔어?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희정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보면 어때. 너는 의사고, 유호는 환자잖아. 환자가 너한테 진료받으러 오는 게 뭐가 이상해?”희정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게다가 무슨 일이 생겨도 내가 다 막으면 되는데, 네가 뭘 그렇게 무서워해?”희정은 휴지로 유호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 냈다.눈에는 아직 걱정이 남아 있었다.“통증 좀 잡을 방법 없어? 너무 힘들어 보여.”서진은 미간을 좁혔다.자기가 마음 둔 여자가 다른 남자를 걱정하는 모습이... 서진에게는 달갑지 않았다.그래도 서진은 통증 완화제를 가져와 유호에게 주사를 놓았다.과연 15분쯤 지나자, 깊게 찡그렸던 유호의 미간이 서서히 풀렸다.희정 얼굴에서도 근심이 조금 걷혔다.희정은 자리에 앉아, 통유리창 너머의 야경을 내다봤다. “국내에 칩 팀 꾸린다고 하지 않았어? 네가 부른 그 전문가 말이야. 지금 유호 상태가 어떤지 부작용은 없는지, 와서 한번 보게 할 수는
Read more

제386화

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불과 몇 분 전, 해인은 유호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유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그런데 정말로 희정과 함께 있었다니.요즘 들어 유호는 조금 이상했다.가까이 있는 것 같다가도 어느새 멀어져 있는 듯한, 묘한 거리감이 자꾸만 느껴졌다.해인도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다.그래도 해인은 함부로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이건 고태겸의 입에서 나온 말일 뿐이야.’‘유호 씨와 나는 부부야. 문제가 있으면 직접 물어보고 확인하면 돼.’‘남의 말에 휘둘릴 필요는 없어.’해인은 고개를 들고 태겸을 바라봤다.“우리 엄마 문병하러 온 거면 고마워. 그런데 고 대표가 내 앞에서 유호 씨랑 나 사이 흔들 생각으로 이런 말 하는 거라면, 그만했으면 좋겠어.”말을 마친 해인은 그대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그런데 태겸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해인의 앞을 막았다.“난 그냥 사실대로 말한 거야.”태겸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해인아, 너 하예주 때문에 날 버렸잖아. 그런데 왜 지금은 한유호한테는 기회를 주는 건데?”해인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고 대표는 유호 씨랑 다르니까.”태겸은 해인을 뚫어지게 보다가 씁쓸하게 웃었다.“설마 한유호를 덜 사랑해서 그런 건 아니고? 덜 신경 쓰는 사람한테는 더 너그러워지니까.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 사람이 뭘 하든 별로 상관없는 거잖아.”해인은 피식 웃었다.“상상력은 참 좋네.”해인의 말투는 가벼웠지만, 눈빛은 싸늘했다. “그럴 거면 차라리 이렇게 생각하지 그래. 내가 유호 씨를 너무 사랑해서 미칠 정도로 못 놓겠다고.” “그래서 다른 여자랑 한 남자를 나눠 가져야 해도 유호 씨 옆에 있고 싶다고.”그 말은 태겸의 가슴 한가운데를 정면으로 찔렀다.태겸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리면서 눈썹도 깊게 일그러졌다.마치 영혼마저 얻어맞은 사람 같았다.‘완전히 끝이야.’해인은 태겸의 멍한 표정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태겸이 받은 충격을 모른 척 지나갔지만, 태겸도 더 이상 얘기
Read more

제387화

유호가 다가오는 걸 보자, 태겸은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한 눈으로 유호를 바라봤다.태겸은 해인과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기에 해인을 잘 알았다.해인은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할수록, 오히려 더 깊이 담아 두는 사람이었다.특히 마음이 얽힌 일에서는 더 그랬다.해인은 감정 안에 모래 한 톨도 섞이는 걸 못 견디는 사람이었다.그러니 그때도 끝까지 미련 두지 않고 태겸을 떠난 것이었다.“먼저 올라가서 어머니 뵙고 올게.”태겸은 셔츠 깃을 한 번 정리한 뒤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둘만 남을 수 있게 자리를 비켜 줬지만, 돌아서기 직전 유호를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남겼다.유호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태겸이 무슨 뜻으로 그런 눈빛을 보냈는지 모를 리 없었다.기회만 생기면 태겸이 바로 해인을 다시 빼앗아 가겠다는 뜻이다.하지만 유호가 애지중지하는 사람을, 어떻게 태겸이 날름 빼앗아 가게 두겠는가?해인이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걸 본 유호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해인의 어깨를 감싸려고 했다.그런데 뜻밖에도 손끝은 허공만 스쳤다.유호는 의아한 얼굴로 해인을 바라봤다.“왜 이래? 몇 시간 비운 것뿐인데, 설마 진짜로 고태겸한테 내 자리를 뺏긴 거야?”해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본인도 아는구나. 말 한마디 없이 몇 시간을 사라졌다는 걸.’해인은 유호를 좋아했다.그러니 질투도 났다.해인은 자기 감정을 꽤 잘 눌렀다고 생각했다.다른 여자였다면 진작 감정이 터져 나와 울고불고 난리를 쳤을지도 몰랐다.몇 시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그 사이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었다.하필이면 엄마가 쓰러진 날이었고, 해인이 가장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던 때였다.그런데 유호는 희정과 함께 있었다. 아무 설명도 없이.그대로 길가로 걸어간 해인이 택시를 잡으려고 손을 들었다.유호는 해인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여보, 진짜 나 상대 안할 생각이야?”해인이 돌아섰다.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눈빛은 싸늘했다.“데이트 끝나니까 이제
Read more

제388화

유호는 조금 전 돌아오는 길에 따로 전문가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기도 했다.그런데 상대도 처음에는 유호가 농담하는 줄 알았다.전문가도 쉽게 단정하지 못하는 일이었다.그걸 지금 해인에게 털어놓는 건, 해인의 마음만 더 어지럽히는 일일 뿐이었다.잠시 망설이던 유호가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 밤, 나 진짜 스파이 노릇을 하고 온 건 맞아.”유호는 해인이 뭐가 마음에 걸리는지 잘 알고 있었다.해인이 쓸데없는 상상으로 더 괴로워하지 않게 하려면, 어느 정도는 미리 말해 두는 편이 나았다.“여보, 나한테 조금만 시간 줘.”유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힘이 있었다. “그동안 내가 차희정하고 어떻게 엮여 보이든, 그걸 그대로 믿지는 마. 내가 처리해야 할 일을 끝내고 나면, 다 있는 그대로 말해 줄게.”지금 유호는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자신의 두통이 칩과 관계가 있다는 정도만 알 뿐, 그보다 더 구체적인 건 아무것도 몰랐다.희정은 자세한 말을 하지 않았고, 유호도 병원이나 전문 연구실에서 다시 살펴보기 전까지는 알 길이 없었다.해인은 그 말을 듣고 유호의 옆얼굴을 바라봤다.차창 밖 불빛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유호의 얼굴에는 명암이 번갈아 바뀌었다.그런데도 표정만큼은 한없이 진지했다.부부 사이라면 믿음은 있어야 했다.무엇보다 지금 해인은 다른 쪽으로 마음을 더 쏟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아직 병상에 누워 있었고, 사람의 마음이란 한꺼번에 너무 많은 걸 붙잡을 수는 없었다.해인은 우선 주여진의 전원 문제부터 준비해야 했다....다음 날 아침, 해인은 와세라에 사직 의사를 밝히러 갔다.개인적인 일이 너무 많았다.휴가도 자주 냈고, 얼마 뒤에는 아이도 낳아야 했다.해인은 자신의 사정 때문에 회사 일에 차질이 생기는 걸 원치 않았다.와세라 사람들은 다들 괜찮은 이들이었고, 맡은 일이 분명한 곳이었다. 해인이 해야 할 일을 해내지 못하면, 그 부담은 결국 아래 사람들에게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한두 번쯤
Read more

제389화

해인은 진심으로 우진의 앞날이 창창하다고 믿고 있었다.다만 지금의 우진은 한쪽으로만 파고들고 있었다.우진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뿐인 듯했다.물론 그 마음 안에는 연민도 조금 섞여 있을지 몰랐다. 지금 강씨 가문은 사실상 해인 혼자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해인은 우진의 선의를 느끼고 있었다.그렇다고 해서 우진을 자기 곁에 붙잡아 둘 만큼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내가 도움이 필요한 건 맞아.”해인이 차분히 말했다. “그런데 우진 씨가 나한테 뭘 해줄 수 있는데? 명의를 찾아서 우리 엄마를 낫게 해줄 수 있어? 아니면 내 앞으로의 생활까지 다 정리해 줄 수 있어?”“그 다음은? 우진 씨는 자기 미래를 생각해 본 적 없어? 그리고 진로는, 커리어는?”해인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우리 집안에서 우진 씨를 후원한 건, 우진 씨가 평생 내 주위를 맴돌라고 한 게 아니야.” “우진 씨 스스로 자기 삶을 잘 살고, 더 강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게 훨씬 제대로 된 보답이야.”우진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기에 해인은 여기까지 말한 뒤 더 이상 덧붙이지 않았다.해인은 간단히 짐을 챙긴 뒤 주여진을 보러 병원으로 향했다.우진은 멀어지는 해인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봤다.마치 머리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우진은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드는 기분이었다.우진도 알고 있었다. 지금의 자신은 아직 충분히 강하지 못했다. 그래서 해인에게 실질적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도.해인에게 필요한 건 유호처럼 혼자서도 자기 몫을 해내는 남자였다.곁에서 잔심부름이나 하는 ‘어린 동생’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해인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병실 안에는 태상이 주여진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태상은 간병인에게서 수건을 건네받아 주여진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닦아주고 있었다.친아들도 아닌 태상이 저 정도까지 해주는 모습이 해인에게는 뜻밖이었다.해인이 들어서자 태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해인 씨, 아버지는 오늘 오전 내내
Read more

제390화

병실을 나온 해인은 사람들 눈을 피해 전화를 걸었다.지금 주여진은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상태였다.환자를 데리고 있는 해인으로서는 저쪽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건 좋지 않았다.[해인아, 왜 그래?]전화기 너머로 권영자의 목소리가 들렸다.“할머니, 제가 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요. 댁에 경호원들 다 있어요?”해인이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권영자가 코웃음을 치듯 말했다. [그게 무슨 부탁이냐? 너는 한씨 가문의 사모님이야. 한씨 가문 경호원들이 너를 위해 움직이는 건 당연한 거지.]주여진이 갑자기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권영자도 사람을 보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런데 해인 쪽에서 먼저 전화가 온 것이었다.“할머니, 이쪽 일이 마무리되면 제가 다시 가서 뵐게요.”[서두르지 마. 네 어머니 몸부터 나아지는 게 더 중요하지.]통화를 마친 해인은 그제야 조금 숨을 돌렸다.‘이제 됐다.’해인은 다시 병실 쪽으로 돌아갔다.그런데 뜻밖에도 예철진이 이미 와 있었다.더 황당한 건, 예철진이 병실 문 앞을 떡하니 막아선 채 해인을 안으로 들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가.”예철진의 목소리는 딱 잘라 끊겼다. “앞으로 여진이 간호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네가 애쓸 것 없다.”해인의 미간이 좁아졌다. “제가 엄마를 돌보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저를 못 들어가게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예철진이 곧바로 받아쳤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구나. 그렇게까지 서둘러 전원을 시키겠다는 이유가 뭔데?”해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혹시... 저한테 들키면 안 되는 일이라도 있어서 그러는 겁니까?”“무슨 헛소리야?”예철진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으면서 오히려 해인을 몰아붙였다. “수상한 건 너지. 여진이 곁을 지켜 온 사람은 나야. 네가 뭔데, 고작 수양딸 주제에 어른들 일을 멋대로 결정하려고 들어?”두 사람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복도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봤다.태상은 분위기가 더 나빠지는 게 보이자 곧장 끼어들었다.
Read more
PREV
1
...
3738394041
...
57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