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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1화

이해리는 소리 내어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정도원이 단지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경비원의 허락을 받았을 터, 이제 경비원들도 아무런 이상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그녀는 과연 스스로를 구할 방법이 있을까?이해리는 눈앞이 캄캄해지고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몸을 파르르 떨면서도 어떻게든 멘탈을 다잡으려 애썼다.이 남자의 의도를 알 순 없지만 절대 따라가선 안 된다. 좋은 꼴을 못 볼 테니까.정도원은 그녀를 살펴보더니 주변 환경이 이 여자에게 썩 유리하지 못하단 걸 알아채고 불현듯 미친 듯이 웃어댔다.이내 이해리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정도원은 웃으면서 손에 든 비수를 흔들었다.두 사람의 거리가 매우 가까웠고 주변에 아무도 없던 터라 그의 손에서 반짝이는 비수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오직 이해리만이 끊임없이 칼끝을 바라보며 불안감에 휩싸였다.“도원아, 일단 진정해. 우리 차분하게 말로 할 수 있잖아!”“닥쳐!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 말 믿어주고 차분하게 대화하려 했을 거야. 근데 이제는 아니야. 모든 게 달라졌어.”정지안이 그녀를 감싸주던 모습, 병실에서 내뱉은 말까지 되새기자니 이유 모를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그는 차갑게 웃으며 다시 한번 이해리에게 다가갔고 그녀는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오늘 에드워드를 만나러 가기로 했지만, 대략적인 시간만 약속했을 뿐이라 설령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더라도 교수님은 딱히 의심하지 않을 터, 경찰에 신고하는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그저 그녀가 지각하나 보다 여기고 이상한 낌새를 알아챌 리가 없다.아무도 이해리를 도울 수 없는 상황, 보안이 삼엄한 아파트 단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정도원은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더니 더욱 거리낌 없이 말했다.“해리야, 전에는 네가 우리 형이랑 붙어먹은 걸 전혀 몰랐어. 진작 알았더라면 너한테 그렇게까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그거 알아? 나 예전에 진짜 너한테 너무 미안한 거야. 대체 왜 윤유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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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2화

정도원은 말하면서 또다시 한 걸음 나섰다.그는 들고 있던 칼을 이해리에게 들이밀며 말했다.“널 협박하겠다고 이거 들고 온 건 아니야. 나도 참을 만큼 참았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야. 우린 서로 눈감아주고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어. 난 너랑 이혼하지 않을 거고 우린 여전히 잘 지낼 수 있었을 거야. 회사 주가도 이런 일로 하한가를 치진 않았겠지...”남자의 말을 듣고 있자니 이해리는 왠지 비현실적인 감정이 들었다.이 모든 일이 마치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먼 곳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느껴졌지만, 급선무는 이 상황에서 자신을 지켜내는 것이었다.순간 정신이 맑아진 그녀는 정도원의 종아리를 향해 가차 없이 발길질을 날렸다.하이힐이 다리뼈에 그대로 닿자 정도원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야, 이해리!”비명을 지르는 동시에 손에 쥐고 있던 칼마저 챙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이해리는 그의 외침에도 뒤돌아보지 않았다.정도원을 걷어차서 바닥에 주저앉는 걸 본 그녀는 빨리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이해리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황급히 앞을 향해 달려갔다.뒤에서 남자의 고통스러운 외침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일어서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나 보다...이해리는 허둥지둥 한참을 달린 후에야 고개를 돌렸다. 다만 그 순간, 브레이크가 밟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귀청을 때렸고 이어서 차 한 대가 그녀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이해리는 재빨리 뒤로 한 발짝 물러섰지만, 완전히 피하지는 못하고 그대로 휘청이며 땅바닥에 쓰러졌다.다행히 차는 멈춰 섰고 차주가 다급하게 뛰어왔는데 여자였다.그녀는 자기 일이 늦어질까 걱정하는 것보다 우선 보험사에 전화했다.“이봐요, 아가씨, 얼른 병원에 모셔다드릴게요. 일단 검사받아보시고 상의해요, 우리.”그녀는 이해리가 내상이라도 입었을까 봐 걱정했다.한편 이해리는 거절하려다가 가까운 곳에 정도원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떠올라 그 여자에게 구조를 요청하듯 말했다.“고마워요. 그럼 저 좀 병원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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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3화

정지안은 침착함을 유지하며 침대 옆에 앉아 이해리의 발목을 바라보았다.별안간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정지안을 쏘아보았다.“어떻게 오셨어요...”“아까 전화에서 아무 말 안 했더니 진짜 잘못 걸었다는 걸 몰랐나 봐?”남자가 답답한 듯 말했다.좀 전에 전화를 받았을 때, 이해리가 울먹이며 방금 큰 교통사고를 당할 뻔했고 지금은 병원에 실려 왔다고 했다.그러면서 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초아야, 나 보러 와줄래?”정지안이 자세히 물어볼 겨를도 없이 그녀가 전화를 끊어버렸다. 남자는 곧바로 주소를 따라 이 병원에 찾아왔다.얘기를 전해 들은 이해리는 미안한 듯 코를 매만졌다.“진짜 몰랐어요. 정신이 하나도 없나 봐요. 마지막 통화가 지안 씨라서 그런 것 같아요.”“내가 걸었던 그 전화 말이야?”어젯밤에 정지안은 무언가 생각난 듯 이해리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두 사람의 통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정지안에게 급한 일이 생겨 비서의 전화에 툭 끊겨버리고 말았다.이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아까 사실 교수님 만나러 가던 길이었어요.”별안간 교수님과의 약속이 떠올라 부랴부랴 휴대폰을 꺼내서 에드워드에게 문자를 보냈다.예상대로 에드워드는 딱히 의심하지 않고 괜찮다는 답장을 보냈다.“그나저나 왜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한 거야? 길을 제대로 못 본 거야? 아까는 왜 밖에 아무도 없었는데? 경찰에 신고는 했어?”정지안이 간만에 말이 엄청 많아졌다. 쏟아지는 남자의 질문에 그녀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그... 그게 실은...”이해리는 말하면서 오늘 아침 정도원의 미치광이 같은 모습을 떠올리자 눈물이 또다시 앞을 가렸다.“됐어요... 그만 얘기할래요. 난 오늘 병원에 있고 싶지 않으니까 먼저 돌아갈게요.”이해리는 코를 훌쩍이며 스스로 침대에서 내려와 의사를 찾아가려 했다.하지만 몸을 살짝 움직였을 뿐인데 발목이 찢어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정지안이 다시 그녀를 침대로 되돌려놓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도원이 만난 거지?”오는 길에 이미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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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4화

이해리는 그런 가능성을 생각하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두 팔로 자신을 꼭 껴안고 내키지 않은 듯 말했다.“그럼 초아네로 갈래요.”“그 변호사 친구?”정지안이 되물었다.“아까도 원래 초아한테 연락하려던 건데 잘못 걸었어요.”이해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이때 정지안이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맞아, 그쪽 변호사팀에 전해. 오초아 변호사 당분간 외지로 출장 보내라고 말이야.”이 남자가 전화를 끊은 뒤 이해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지안 씨 회사랑 초아네가 사업적인 관계가 있었어요?”“당연하지. 우리 집안의 산업은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훨씬 더 커.”이해리는 갑자기 분노가 치밀었다.“근데 왜 초아를 외지로 보내요? 저 지금 집에도 못 돌아가는데 초아 집까지 안 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거야 당연히 나한테 와야지. 내가 옆에 있는데 불안할 게 뭐야?”그녀는 화나서 고개를 홱 돌렸다.“솔직한 말 듣고 싶어요? 실은 그게 더 불안해요.”“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오초아 씨 네 친구라며? 둘이 같이 있다가 도원이한테 들키는 건 걱정 안 돼? 저번에 걔 오 변호사 회사까지 찾아가서 협박한 일, 그새 잊었어?”이해리는 화도 나고 기가 막혀 다시 고개를 돌렸다.“하... 진짜! 전부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바로 나서지 않았어요? 그 잘난 동생을 왜 그냥 내버려 뒀냐고요!”말을 내뱉고 나서야 이해리도 자신이 막무가내로 나온 걸 깨달았다. 그녀는 입을 삐죽거리며 정지안의 시선을 피했다.곧이어 온몸이 허공에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이해리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목을 감쌌다.“뭐 하는 거예요!”다만 정지안은 그녀의 저항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의사를 찾아가서 퇴원 절차를 밟았다.두 사람의 자세가 몹시 이상했음에도 의사는 태연하게 임하며 안경을 고쳐 썼다. 몇 가지 주의사항을 당부한 뒤, 정지안이 계속 그녀를 안고 나가게 내버려 두었다.차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이해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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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5화

이른 아침부터 시어머니가 정지안을 찾아오다니?게다가 이해리의 이름까지 언급하면서 말이다.그녀는 심장이 마구 쿵쾅댔다. 이제 막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안방 문이 벌컥 열렸다.심여진은 안에 들어서자마자 침대 앞에 서 있는 이해리를 보더니 화가 나서 등을 돌렸다.“하! 진짜 여기 있었네.”그것도 방금 일어난 모양새로!이해리는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뒤따라 들어온 정지안을 흘끗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남자의 눈빛에서 안도감을 읽어냈다.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시어머니께 말했다.“저 지안 씨 만나는 거 진작 알고 계셨잖아요.”이 일로 심여진이 충격을 받아 입원까지 했다는 소문이 들렸다.이해리가 당당한 태도를 보이자 그녀는 화가 더 치밀었다.“지금 그게 무슨 태도야? 아직 우리 도원이랑 이혼도 안 했으면서 아주버님 되는 지안이까지 꼬시려 들어?”이때 정지안이 이해리 앞으로 다가와 그녀를 보호하듯 몸을 돌렸다.“어머니, 이 일에 관해서는 그때 병실에서 분명하게 말씀드렸을 텐데요. 저 해리랑 사귀는 거 맞습니다. 다만 제가 먼저 대시했고 모든 건 제 책임입니다.”정지안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뒤에 서 있던 이해리는 그의 등을 지그시 바라봤다.평소에도 유난히 키가 커 보였는데 오늘의 모습은 마치 비바람을 막아줄 존재처럼 느껴졌다.예전에 정도원과 함께 있을 때 결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이해리는 헛기침하며 말했다.“그렇게 말하지 마요.”두 사람이 함께하는 것은 분명 쌍방의 결정일 터.이해리는 자신이 이미 막 나가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전에 윤유나가 그렇게 많은 소동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이해리와 정도원은 사실 합의이혼으로 순조롭게 끝낼 수 있었다.다만 지금은... 정도원이 아파트 단지로 찾아와 그녀를 협박하고 심지어 칼까지 들이댔다.다시 떠올리자 이해리는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결국 그녀는 균형을 잃고 걸음을 비틀거렸다.정지안이 마침 몸을 돌리고 휘청이는 그녀를 보더니 허리를 부축하여 천천히 침대 옆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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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6화

이해리는 정도원과 복잡하게 얽힌 관계를 떠올리자 냉큼 입을 열었다.“지안 씨가 정말 도와줄 수 있다면 저 그냥 여기서 지낼게요. 하지만 전에도 얘기했다시피 아직은 그런 일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어요. 이 점만은 존중해주셨으면 좋겠네요.”정지안은 그녀의 말에 진심으로 수긍하며 자상한 어투로 답했다.“알았어. 알았으니까 일단 푹 쉬어.”시간이 흐르면서 이해리는 점차 깨닫게 되었다.자신을 향한 정지안의 보살핌이 지나치리만큼 세심하다는 것을 말이다.그녀가 방에서 목이 마르거나 배가 고플 때, 정지안은 항상 제때 알아차리고 모든 요구를 만족시켜주었다.게다가 하루에만 배달 음식이 여러 개나 도착했다.발이 다 나았는지 확인하려고 침대에서 잠깐 일어나려 해도, 정지안이 옆에서 꼭 부축했다.결국 참다못한 이해리가 쏘아붙였다.“지안 씨 대기업 대표님 맞아요? 할 일 없어요? 종일 저랑 같이 집에서만 시간 보내실 건가요?”이에 정지안은 피식 웃으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내가 곁에서 지켜주는 게 뭐가 그리 불만이야? 잊지 마, 넌 아직 환자야.”“이렇게까지 신경 안 써줘도 돼요! 진짜 적응 안 돼서 하는 소리예요. 뭐랄까... 꼭 마치 폐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에요.”마음에 걸린 무거운 짐들 때문에 이해리의 말투가 평소보다 날이 서 있었다.순간 정지안의 동작이 멈칫했다.그녀도 방금 내뱉은 말이 지나쳤음을 깨닫고 변명하려던 참인데 정지안에게 또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전화를 끊은 뒤, 남자는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번엔 진짜 회사에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겨서 잠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전에 약속한 대로 여기서 조용히 지내면 나도 더 이상 귀찮게 안 할게.”이 말을 끝으로 정지안은 집 밖을 나섰다.침대 옆에 웅크리고 앉은 이해리는 삐죽 입술을 내밀며 결국 손에 잡힌 베개를 날려버렸다.이 남자와의 관계가 계속해서 묘하게 신경 쓰였지만, 막상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생각해보려 해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그때, 이해리의 휴대폰이 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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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7화

만약 여기서 물러선다면 이혼은 이해리에게 씁쓸한 여운만을 남길 것이다.그녀는 이 사건에서 자신이 손해를 보았다고 계속 느낄 것이고 이는 앞으로의 감정에도 영향을 미칠 게 뻔하다.곰곰이 생각한 끝에 이해리는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시선은 더없이 맑고 또렷했다.오초아에게 전화를 걸어서 의견을 물었더니 그녀 역시 더 많은 재산을 분할 받고 싶다면 이혼 전에 주가를 먼저 끌어올리라고 했다.주가가 오를 때 변호사에게 말해서 그 가격으로 분할 받고 빨리 소송을 진행해 이혼하면 그만이다.이렇게 하면 앞으로 정도원 쪽에서 어떤 변동이 생겨도 전부 그가 홀로 감당해야 할 몫이 된다.전화를 끊고 이해리는 휴대폰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가 결국 정도원에게 연락했다.연달아 몇 통의 전화를 끝낸 그녀는 피로에 지쳐 몸을 웅크렸다.발목 부상은 이틀에서 사흘은 걸려야 나을 터였다.넷째 날, 이해리가 외출 준비를 마치고 막 문을 열었을 때, 정지안이 떡하니 문 앞에 서 있었다.그녀는 깜짝 놀라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쳤다.“지안 씨 회사 간 거 아니었어요?”정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발목이 겨우 나았는데 어디 가려고?”이해리는 찔린 듯 감히 그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주가를 끌어올리기 위해 그녀는 사실 정도원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공식발표회에 함께 참석하는 일...그래야만 그들의 불화설을 잠재울 수 있으니까.결국 이해리는 다리가 다 낫고 정지안이 집에 없을 때를 골라 나섰지만, 문을 열자마자 들켜버릴 줄이야.그녀가 자꾸 피하려 하니 정지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내 추측대로라면 지금 정도원 만나러 가는 거지? 두 사람 함께 발표회에 참석하려고?”부부로서 발표회에 참석하는 것은 분명 유리한 수단이었다.만약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발표회 중간에 주가가 바로 오를 수도 있다.이해리는 이제 더는 숨길 수 없다는 걸 직감했다.“맞아요. 우리 함께 애틋한 부부인 척 연기해야 서경 그룹 주가가 회복할 테니까요.”“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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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8화

속이다니...이해리의 말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정지안의 가슴에 깊숙이 박혔다.그는 도저히 믿기 힘들다는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를 바라봤다.정지안의 눈가에 허탈감이 스쳤다.“결국 날... 그 정도로밖에 생각 안 한 거야?”이해리는 방금 자신이 실언했다는 것을 깨닫고 뭐라 해명하고 싶었지만,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고 한순간 방 안의 분위기가 매우 기묘해졌다.이해리는 그래도 먼저 사과하고 싶었다.상대가 어떤 목적을 가졌든 자신의 양보가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으니까.정지안을 바라보며 그녀는 나지막이 말했다.“방금 한 말은 진심 아니에요.”단지 정말 조급했을 뿐이었다.사실 정지안이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그녀는 마음이 흔들렸다.하지만 이런 호감은 오래갈 수 없을 터였다.그녀 자신도 어느 정도 묵인하는 뜻이 있었고 게다가 그날 밤 이해리는 정말로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기에 상대에게 책임지는 것 또한 하나의 선택이었다.거기에 정지안과의 약속 때문에 그와 이런 관계를 유지하면 정씨 가문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다.하지만 이제야 모든 게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 정지안은 처음부터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단지 이 관계를 점점 심화시켜 그녀를 묶어두려 했을 뿐이었다.그래서 끊임없이 계략을 꾸몄던 거고...이해리는 자신의 다친 다리를 바라보았다.며칠 동안 요양하면서 솔직히 말해 정지안은 그녀에게 정말 잘해줬다.하지만 이런 호의는 그녀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이해리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오늘은 이미 약속 시간 놓쳤으니 도원이한테 행사 취소하라고 말할게요.”“마음대로 해.”정지안의 말투는 극도로 차가웠다.이 남자가 다시 한번 진지한 대화를 이어갈 거로 여겼는데 좀전의 대답을 끝으로 이해리를 흘끗 본 후 자리를 떠나버렸다.방문이 닫히자 쏟아져 들어오던 그 빛도 순식간에 사라졌다.이해리는 문 앞에 서서 순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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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9화

지난번 술집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을 떠올리자 이해리는 약간 망설여졌다.혼자 있을 땐 괜한 일을 벌이지 않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하지만 뒤에서 손님 두 명이 들어오며 이해리가 길을 막자 나직이 무언가 속삭였다. 그녀는 등 떠밀려 앞으로 나아갔고 결국 구석 자리를 찾아서 앉았다.지난번 교훈을 섭취한 그녀는 술 대신 주스를 한 잔 주문했다.보라색 과일 주스가 나온 후, 이해리는 한동안 주스 병을 바라보며 침묵했다.요즘 삶이 왜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걸까?곰곰이 생각해보는 그녀,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안 잡혔다.대부분 짐은 푸르지오 주택 단지로 옮겨졌고 지금은 서경 그룹의 주가를 올리기 위해 정도원과 함께 노력하기로 했다.오늘 갑자기 약속을 펑크냈지만, 정도원은 당장 그녀에게 해명을 요구하러 달려오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이해리는 그렇게 생각했다.그렇다면 곧바로 집에 돌아가야 할까?머뭇거리고 있을 때,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저기 혹시 혼자 오셨어요?”고개를 들자 곱슬머리의 젊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스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앳된 얼굴, 막 졸업한 사회초년생의 훈훈한 비주얼이었다.그런데 왜 이렇게 눈에 익은 느낌이 드는 걸까?‘요즘 핫하다는 신인 배우?’남자는 이해리가 자신을 훑어보는 시선을 느끼고는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혹시 저 알아보셨어요?”“연예인이세요?”그녀는 솔직하게 물었다.곱슬머리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저었다.“연예인은 아니지만 그렇게 봐주시니 칭찬으로 들을게요... 저는 그저 소소하게 계정 하나 운영하는 인플루언서에요. 가끔 광고 촬영도 하고 있고요.”‘베이글남이었네!’이해리는 눈썹을 치키며 자신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 했지만, 상대방은 이미 휴대폰을 내밀었다.“카톡 추가할 수 있을까요?”결국 연락처를 물어보는 것이었다.순간 이해리는 놀라움에 휩싸였다.그녀는 오늘 기자발표회에 입고 갈 옷을 고르느라 차분하고 단정한 카키색 정장 세트를 선택했었다.액세서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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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0화

이해리는 줄곧 딴생각에 잠겨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정지안이 옆에 서 있었다. 이 남자에게 들켜버린 듯한 상황에 괜히 마음이 찔렸다.재빨리 해명에 나서려 하는데 곱슬머리 남자가 어느새 정지안과 대화를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쓸쓸한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해리는 이마를 짚었다. 문득 정지안이 입을 열었다.“왜? 서로 연락처 교환하지 못해서 아쉬워?”소유욕에 절은 남자의 말을 듣고 있자니 반박하지 않고서야 못 배겼다.“저 사람 마음도 소중한 건데 아무리 돌려보낼지라도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예의 아닌가요?”“지금 우리 관계, 그리고 아직 끝내지도 못한 네 결혼 생활까지 제발 좀 염두에 두고 있을래? 뭔 연락처 교환할 생각을 하고 있어?”정지안이 바짝 다가섰다.“내 앞에선 새로운 감정을 시작하고 싶지 않고 그런 걸 고민할 겨를도 없다더니 연락처 교환하자는 말에 바로 솔깃한 거야?”‘하... 이 남자는 왜 이렇게 잔소리가 많은 걸까?’이해리는 조용한 곳에서 머리를 식히려고 바에 왔는데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남자의 잔소리에 짜증이 확 밀려왔다.“애초에 연락처 교환할 생각 없었어요! 그저 잠깐 딴생각 좀 한 것뿐이라고요! 지안 씨가 갑자기 달려온 바람에 저 사람 다 가버렸잖아요. 좋게 말해드리지도 못했는데...”정지안이 미간을 찌푸렸다.“어차피 거절할 거였으면 좋게 말하는 거나 단칼에 거절하는 거나 뭐가 달라?”그 말을 들은 이해리는 돌연 침묵했다.그녀는 짜증 섞인 얼굴로 앞에 놓인 주스를 벌컥벌컥 마셨다.“아직 내 질문에 대답 안 했어, 너. 몰래 술집 온 이유가 뭐야?”이해리가 입을 열었다.“일거수일투족을 지안 씨한테 설명해 드릴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요!”그 한마디에 정지안은 말문이 턱 막혔다.옆에서 남자의 옅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이해리는 원래 그냥 무시하려 했지만 잠시 후, 정지안이 갑자기 혼잣말을 해댔다.“그거 알아, 해리야? 사실 그때가 널 처음 본 게 아니었어.”“그때가 언젠데요?”이해리는 두서없이 말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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