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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1화

“그러면서 그게 다 제 잘못이라고 하더라고요.”말을 이어가던 그녀는 눈가가 붉어졌다.“그런데 그날 제가 아니었으면 그 사람들은 훨씬 더 큰 돈을 배상해야 했어요. 전 오히려 사정을 봐달라고 부탁했던 사람인데...”이해리의 불안한 모습을 본 정지안은 곧바로 침대 곁에 앉아 그녀의 손을 감쌌다.“그 애가 그렇게 말한 건 단순해. 원래 강한 사람에게는 약하고, 약한 사람에게는 강한 유형이니까. 허영심도 강했고. 자기 어머니를 장애인으로 만든 건 술주정뱅이 아버지였어. 하지만 그 사람에게 맞설 용기는 없었지. 어머니를 해고한 건 나였고, 넌 오히려 그 가족을 위해 선처를 부탁했어. 그런데도 그 애는 그 사실은 전부 외면했어.”은소월은 아직 가치관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어린 소녀였다. 문제가 생기면 원인을 직시하기보다 더 만만한 상대에게 책임을 떠넘겼다.그리고 이해리는 그녀가 공격하기 가장 쉬운 대상이었다. 그래서 아무런 망설임 없이 이런 복수극을 꾸민 것이다.정지안의 차분한 위로를 듣던 이해리는 천천히 진정됐다.“알아요. 제 잘못이 아니라는 걸. 그래도 조금은 속상하네요.”정지안은 부드럽게 말했다.“그런 사람 때문에 마음 아파할 필요 없어.”그 말을 들은 이해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저 얼마나 누워 있었어요?”“반나절 정도. 재판이 끝난 게 점심 무렵이었고, 지금은 저녁이야.”이해리는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또 며칠씩 의식을 잃은 줄 알았다.그런데 정지안은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이해리, 퇴원하면 나랑 사귀자.”질문이 아니라 확답을 기다리는 고백에 가까운 말이었다.이해리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왜 하필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정지안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네가 사라졌다는 걸 알았을 때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어. 이 며칠 동안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넌 모를 거야. 머릿속엔 오직 어떻게든 널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그런데 이상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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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2화

그런데도 이해리는 마지막 선을 남겨 두었다.그 정도 결과만으로도 이해리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그 정도면 됐어요. 조금은 남겨줘야 저도 덜 괴롭힘당할 것 같거든요.”악의는 종종 한순간에 폭발한다.이해리는 문득 예전 일이 떠올랐다. 정도원이 칼을 들고 자신을 찾아왔었다.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했다.그런 남자는 건드리고 싶지도,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정지안도 그녀의 생각에 동의했다.“나도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네 재산 정리는 내가 미리 다 해놨어. 목록도 준비해 뒀는데, 지금 볼래?”이해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볼게요. 저도 이제 제가 얼마나 가진 건지 궁금하네요.”그 말에 정지안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가 참 귀엽다고 생각했다.그는 곧 옆에 있던 태블릿을 가져와 이해리의 재산 목록을 하나하나 보여주기 시작했다.사실 이해리는 처음에는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자신이 이제 꽤 부유해졌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감이 없었다.그러다 끝없이 이어지는 자산 목록과 계좌 잔액을 확인했다. 수많은 숫자와 0들이 눈에 들어왔다.이해리는 두 손으로 자신의 볼을 감싸며 눈을 크게 떴다.“이게 정말 전부 제 거예요?”마치 부모님이 남겨 주었던 모든 것이 다시 그녀의 품으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이제야 부모님께 죄송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결국 전부 되찾았잖아요.”말을 이어가던 이해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이해리는 급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지금 이 모습을 정지안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정지안은 눈물을 흘리는 이해리를 보며 가슴이 저렸다. 그는 몸을 숙여 그녀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됐어. 지금은 기뻐해야 할 때잖아. 울지 마. 좋은 소식 하나 더 알려 줄까? 정도원은 외도가 확실하게 인정됐고, 결국 재산도 4분의 1밖에 가져가지 못하게 됐어. 게다가 회사 지분 가치도 크게 떨어졌지.”현재 정도원의 현금 흐름은 이미 엉망이었다. 회사는 여기저기 구멍이 나기 시작했고,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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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3화

정도원의 연락 테러는 감쪽같이 사라졌다.곧 정지안은 이해리를 데리고 한 요양원으로 향했다.이해리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가 설명했다.“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야.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는 게 좋겠어. 그리고 아마 정도원이 곧 사람들을 데리고 나를 찾아올 거야. 우리 집도 이제 안전한 곳은 아니야.”이해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그렇게 자세히 설명 안 해도 돼요. 지금 제 몸 상태로는 무조건 쉬어야 하니까 지안 씨가 시키는 대로 할 생각이었어요.”“몸 회복되면 초아랑 상의해서 집도 하나 알아보고려요. 새 프로젝트도 해 보고 싶고...”이해리는 진지하게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했다.정지안은 잠시 망설였다. 사실 자신이 가진 빈집 몇 채 중 하나에 들어와 살라고 말하고 싶었다.지금 정도원은 가족들과 함께 거의 미친 사람처럼 그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그래서 결국 꾹 참고 말하지 않았다.무엇보다 이 요양원은 정지안이 직접 신중하게 고른 곳이었다.입소자의 대부분이 노인이었고, 외부인의 출입도 적었다. 인터넷에 사진을 올리거나 소문을 퍼뜨릴 젊은 사람도 거의 없었다.요양원은 환경이 고요하고 그윽하며, 대부분이 노인들이다 보니 평소에 매우 조용하고, 각종 잡다한 일도 없을 것이었다.이해리의 폐렴은 거의 나았지만 몸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바람만 조금 쐬어도 쉽게 지쳤다.그래서 정지안은 아예 그녀와 함께 요양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동선 역시 철저하게 숨겼다. 혹시라도 자신 때문에 이해리의 위치가 알려질까 걱정했다.요양원 사람들은 모두 이해리를 좋아했다. 문제는 대부분이 정지안과 그녀를 부부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특히 옆 병실에 있는 할머니가 그랬다.“해리야, 오늘은 남편이 안 왔네?”이해리는 웃으며 대답했다.“오늘은 회사 일 때문에 잠깐 나갔어요... 그런데 남편은 아니에요.”그녀는 방금 이혼한 사람인데 어떻게 남편이 있겠는가.하지만 할머니는 이해리의 설명을 전혀 듣지 못했다.심한 난청이 있는 할머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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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4화

그 말을 듣자 이해리는 곧장 눈을 흘겼다.그저 요즘 정지안이 매일 곁을 지켜 주고 있으니, 당연한 마음으로 안부를 물은 것뿐이었다.그런데 정지안의 귀에는 전혀 다른 의미로 들린 모양이었다.“가끔은 정말 말하고 싶어요. 굳이 매일 여기 있을 필요 없다고. 지안 씨 일 보러 가도 되잖아요.”이해리는 침대 위로 올라가 따뜻한 이불 속에 몸을 묻었다. 금세 만족스러운 표정이 얼굴에 떠올랐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정지안의 목소리도 자연스레 부드러워졌다.“네가 여기서 요양하는 동안은 매일 곁에 있고 싶어. 물론 회사 일도 처리해야 하지. 네 재산 분배 문제도 마무리 단계야. 마지막 세부 사항들을 내가 직접 챙기고 있어.”이해리가 혀를 내둘렀다.“며칠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안 끝났어요? 전 이미 다 정리된 줄 알았는데.”“거의 끝났지. 그래도 생각만큼 그렇게 깔끔하게 끝나는 일은 아니야.”그는 자연스럽게 이해리의 손을 잡고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손바닥을 살며시 문질렀다.부드러운 감촉에 마음마저 따뜻해졌다.“밖에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이렇게 많지만 않았다면, 우리 둘만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 이런 식으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갑작스럽게 감상적인 말을 꺼내자 이해리는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전 그런 외진 곳 가기 싫어요.”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사업도 시작해야 했고, 프로젝트도 진행해야 했다. 모든 게 안정되면 에드워드를 찾아 해외로 갈 계획도 있었다.매일 바쁘게 살아도 모자랄 판에 정지안과 한가롭게 세월을 보내기만 할 수는 없었다.그녀의 대답에 정지안은 피식 웃었다.“그냥 해 본 말인데 그렇게 바로 반박할 필요는 없잖아. 그래도 그동안 너를 보호하면서 그런 삶이 어떤 건지는 충분히 경험한 것 같아.”확실히 그렇긴 했다.“그럼 즐거웠어요?”이해리가 묻자 정지안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안 즐거울 리가.”특히 이해리와 정도원이 마침내 이혼에 성공한 지금은 더더욱 그랬다.그 후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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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5화

이해리는 힘없이 정지안의 품으로 기울어졌다.의식을 잃기 직전, 마지막으로 떠오른 생각은 하나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자신을 장애인이라고 오해했는데, 이제는 눈앞에서 쓰러지는 모습까지 보여 줬으니 그 오해가 완전히 굳어지겠다는 것이었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정오가 가까운 시간이었다.침대 곁을 지키고 있는 정지안을 보자마자 이해리는 울컥했다.“다 지안 씨 때문이에요. 안 배고프다고 했잖아요. 굳이 내려가서 먹자고 해서.”사실 이해리는 아침을 먹는 것보다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자는 편이 훨씬 좋았다.정지안은 웃으며 말했다.“눈 뜨자마자 나한테 이렇게 화부터 내는 거야? 남들이 뭐라 하든 그냥 둬. 네가 진짜 불구가 된 것도 아니잖아. 몸만 다 나으면 다들 축하해 줄 텐데.”“제가 아직 요양 중만 아니었어도 진짜 한 대 쳤을 거예요.”‘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수작이람.’이해리는 볼을 부풀린 채 정지안을 노려봤다.“내일부터는 더는 저 밥 먹으러 끌고 다니지 말고, 사람들 앞에서 먹여 주지도 말아요.”“그럼 너는? 요양원에 있는 동안 뭘 하면서 지낼 생각이야?”정지안이 갑자기 몸을 가까이 기울이며 진지하게 물었다. 그 질문에 이해리는 잠시 멍해졌다.‘내가 뭘 할 수 있을까?’병원에서 몸을 잘 회복하고, 상처를 치료하면서 앞으로 진행할 프로젝트를 고민하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가끔 절친 오초아와 통화하고, 다른 병실의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아래층 정원에 내려가 꽃과 나무를 구경할 수도 있었다.그 정도가 전부였다. 이해리는 다른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가며 차근차근 말했다.정지안은 끝까지 듣고는 눈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난 매일 여기서 네 곁에 있는데, 왜 나랑 같이할 일정은 하나도 없는 거야?”이해리는 정지안을 흘겨보며 말했다.“우리 둘이서 뭘 해요? 지안 씨도 매일 일하러 나가야 할 수도 있고, 계속 병원에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말하던 중, 이해리는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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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6화

입술이 맞닿은 순간마다 이해리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숨소리를 흘렸고, 정지안은 그 소리에 잠시 멈춰 섰다.이해리는 입술을 깨물며 혹시 자신이 너무 가볍게 보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그녀는 조용히 입을 가리며 더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했다.하지만 정지안은 곧 그녀의 손을 내려 주었다.“참지 마.”그가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해리야.”나지막한 목소리가 마치 주문처럼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해리는 어느새 그의 흐름에 휩쓸리고 있었다. 그러자 정지안이 다시 부드럽게 말했다.“그래도 너무 크게는 안 돼.”이해리는 난처한 표정으로 몸을 움찔하며 정지안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일부러 놀리는 거죠...”아까 참을 때는 계속 부추기더니, 소리를 내니 이제는 조심하라고 한다.“옆방엔 다 어르신들인데 깨우고 싶은 건 아니지?”정지안은 낮게 웃으며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도망가지 마.”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한마디씩 떨어졌다. 이해리는 뭔가 대꾸하려 했지만 욕망이 그녀를 점점 집어삼켰다.결국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 채 그녀는 그를 더 꼭 끌어안았다.얼마 후 정지안이 다시 부드럽게 말했다.“해리야. 몸 돌려”이해리는 부끄럽게 느꼈다. 하지만 창밖에서 비쳐드는 은은한 달빛에 병실 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이해리는 조금 안도하며 그의 품에 몸을 맡겼다.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몰랐다. 이해리는 온몸에 힘이 빠진 채 손가락조차 움직이기조차 어려웠다“자기야...”정지안의 입에서 나온 다정한 호칭은 이상하게도 거부감보다 설레게 느껴졌다.이해리는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그만하라고 부탁했다.“자기야, 조금만 더 참아.”병실은 조용했고 가끔 복도를 지나가는 간호사의 발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왔다.어둠 속에서는 다른 감각들이 유난히 선명해졌다.그의 움직임이 조금 더 다급해지고 목소리마저 낮고 거칠어졌을 때, 이해리는 고개를 돌려 조용히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그리고 한참 뒤, 정지안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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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7화

이해리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체력 하나는 진짜...’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화면에는 오초아의 이름이 떠 있었다.이해리는 얼른 전화를 받으며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초아야, 아침부터 웬 전화야?”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오초아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쾌활했다.“아니,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전화해? 나 지금 출장 갔다가 막 비행기 내렸어. 요양원 생활이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날 것 같아서 전화한 거야.”두 사람은 항상 즐겁고 편안하게 대화를 나눴다. 이해리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오 변호사님은 맨날 그렇게 바쁘네. 언제쯤 은퇴해서 나 데리고 부자 생활시켜 줄 거야?”“내가 더 바라는 건데? 듣자 하니 넌 이혼하고 나서 완전 부자 됐다며?”두 사람은 깔깔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이해리는 고개를 들다가 누군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정지안이 돌아왔다.그는 아침 식사가 담긴 트레이를 들고 들어왔다. 이해리를 위해 직접 식사를 가져온 모양이었다. 침대에 기대 전화 통화를 하는 이해리를 보자 정지안은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다.이내 침대 곁으로 다가온 정지안은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게 속삭였다.“어제 내가 너무 봐준 건가?”비록 오초아는 못 들었겠지만 이해리는 화들짝 놀라 휴대전화를 가렸다.“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말과 동시에 다리를 들어 정지안을 툭 찼다.정지안은 피식 웃었다.“아침부터 전화하는 거 보니까 또 오 변호사?”이해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둘러 오초아와 몇 마디를 더 나눈 뒤 통화를 마무리하려 했다.그런데 전화기 너머에서 오초아가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그런데 너 이제 이혼도 했겠다, 정지안이랑은 슬슬 확실해지는 거 아니야? 다음에는 좋은 소식 들려주길 기대할게.”통화가 끊긴 뒤에도 그 말이 한동안 귀에 남았다.사실 오초아는 전부터 몇 번이나 그런 이야기를 해 왔다. 하지만 이해리는 아직 결심하지 못했다.적어도 그녀가 보기엔 자신과 정지안의 관계는 아직 그 단계까지는 아니었다.그리고 딱히 서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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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8화

마침 요양원에서는 매주 한 번씩 장기자랑 겸 친목 행사를 열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정지안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이해리는 간호사를 몰래 불러 대신 신청했다.정지안이 돌아왔을 때도 이해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며칠 뒤 요양원에서 열릴 친목회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정지안에게 함께 가서 구경하자고 권했다.요양원에 들어온 이후로 정지안은 한 번도 이해리의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었고,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다음 날 저녁, 해가 질 무렵부터 요양원은 친목회 준비로 분주해졌다.이곳에 머무는 사람들 대부분은 노인들이었다. 중병을 앓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다만 건강이 썩 좋지 않아 늘 곁에서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지만 자녀들은 일에 바빴기에 부모를 이곳에 모셔둔 경우가 많았다.그래서 매주 열리는 친목회 때면 일부 노인들은 자녀들을 특별히 초대해 함께 어울리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친목회 자체는 사실 학교 행사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각자 공연할 프로그램을 신청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은 무대에 올라 자신의 장기를 선보이는 방식이었다.대부분의 노인은 나이가 많음에도 정신이 또렷했고, 어떤 이들은 전통극 노래까지 부를 수 있었다.그러다 간호사가 말했다.“다음은 정지안 씨를 모시겠습니다...”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정지안에게 쏠렸다.정지안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저요?”하지만 옆에 있던 이해리가 그를 슬쩍 밀었다.“가요, 가요. 어떤 걸 보여줄지 보고 싶어요.”이해리는 몰래 웃고 있었다.정지안은 주변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서야 상황을 눈치챘다. 그는 이해리를 한 번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올라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는 헛기침한 뒤 무대로 올라갔다.이해리는 정지안이 곤란해하는 모습을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었다.사실 두 사람이 알게 된 이후로도 이해리는 정지안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그의 취미나 평소 좋아하는 것조차 몰랐다. 이번에 몰래 정지안을 참가자로 등록한 것도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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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9화

낮고 깊은 그의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노래는 성숙한 남자의 매력을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특히 노래를 부르던 중 정지안은 마이크를 든 채 곧장 이해리의 앞으로 걸어왔다.그리고 그 노래 속에서도 유난히 애절하고 애정이 짙은 가사를, 그녀의 눈앞에서 한 소절도 빠짐없이 불러주었다.이해리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며 순간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자신이 누군가의 가장 소중한 사랑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정도원이 그녀를 쫓아다니며 구애할 때 그런 착각을 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나중에야 그것이 그저 행복이라는 이름의 거품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정도원은 애초에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누구도 사랑한 적이 없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녀가 고작 3년 동안 해외에 나가 있었을 뿐인데, 어떻게 다른 여자와 얽힐 수 있었겠는가.심지어 이미 윤유나와 함께하기로 해 놓고도, 이해리의 돈 때문에 이혼은 하지 않으려 했다.그래서일까, 지금 눈앞의 이 남자가 조금도 숨김없이 자신의 사랑을 노래하는 모습을 보자, 이해리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주변 사람들은 그저 이해리가 부끄러워하는 줄 알고 곳곳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하지만 이해리만은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과거 정도원이 자신을 쫓아다니며 사랑을 고백하던 그 시절의 기억이라는 것을.그때 그녀는 생각했었다. 이 남자가 이렇게 열렬히 자신을 사랑하니, 앞으로 두 사람은 다시는 헤어질 일이 없을 거라고.하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것은 이해리를 실망하게 했다.그리고 지금, 정지안이 그녀의 앞에 나타나 자신과 함께하고 싶다고 말했음에도, 이해리는 여전히 누군가가 자신을 그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이해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사랑을 믿지 않았다.그런데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정지안을 바라보자, 이해리의 마음속에는 이상한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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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0화

“아가씨, 원래 장애가 있는 게 아니었어?”“그러게. 우린 다 그런 줄 알았는데...”“그래도 아니어서 다행이네. 다행이야.”주변의 말을 들은 이해리는 멋쩍게 코를 만졌다.“죄송해요. 어르신들, 며칠 전에는 몸이 너무 약해서 아침에도 잘 못 일어났거든요. 그런데 남편이 꼭 식당에 가서 밥을 먹어야 한다면서 저를 데리고 갔어요. 그래서 여러분을 놀라게 했나 봐요.”방금 노인이 했던 말도 사실 이해리는 전부 들었다.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상대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그 사람은 정말로 그녀가 장애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녀가 정지안의 짐이 되고 있다고 여겼기에 그런 말을 했을지도 몰랐다.굳이 같은 수준으로 맞설 필요는 없었다.그녀는 말하면서 자연스럽게 정지안의 팔을 끼었다.“여보, 다 당신 때문이에요. 사람들이 많은 데서 밥 먹여주지 말라고 했는데도 기어이 그랬잖아요.”정지안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알겠어.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게. 그래도 다들 오해하게 만든 건 미안해.”그 일은 친목회에서 있었던 작은 해프닝에 불과했다.하지만 그날 밤 병실로 돌아온 뒤, 정지안이 갑자기 이해리를 침대 위로 눌렀다.조금 전 친목회에서 이해리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는 모습을 본 순간부터 정지안의 심장은 쿵쾅거리며 뛰고 있었다.이해리가 자신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 건, 두 사람이 알게 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아마도 그 노인의 말이 그녀를 자극했을지도 몰랐다.두 사람은 최근 같은 병실에서 매일 함께 지냈고, 몇 차례 가까운 접촉도 있었다. 하지만 이해리의 태도는 좀처럼 분명하게 변하지 않았다.그래서 정지안 역시 조금씩 확신을 잃고 있었다.‘정말로 이해리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걸까? 그래서 관계를 확실히 하려 하지 않는 걸까?’정지안은 몸을 조금 숙여 이해리의 귓가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그리고 천천히 볼, 코끝을 지나 마침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오늘 그렇게 말해줘서 정말 기뻤어.”정지안이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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