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8년의 짝사랑을 폐기 처분합니다: Chapter 151 - Chapter 160

176 Chapters

제151화

컵이 워낙 커서 꼬맹이가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으면서도 위태위태하게 흔들거렸다.그 모습을 보던 정루아는 마지못해 컵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쌀쌀맞기 그지없었다.구하준은 조금 겁먹은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조잘거렸다.“작은엄마, 아직 고맙다는 말씀 안 하셨어요.”정루아는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다.이내 눈을 가늘게 뜨고 아이를 내려다보았다.“너, 이제 내가 안 무서워?”구하준은 그녀의 차가운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예전 같으면 지레 겁부터 먹었겠지만, 이상하게 지금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아이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안 무서워요.”“흥.”정루아가 코웃음을 쳤다.“내가 커다란 늑대 불러와서 너 잡아가라고 해도 안 무서워할지 두고 보자.”그러자 구하준은 고개를 저었다.“작은아빠가 커다란 늑대쯤은 단숨에 때려눕혀서 쫓아내 주실 거예요.”정루아는 문득 자신이 미쳤나 싶었다.이 밉상이랑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거람.곧이어 구태윤을 노려보며 말했다.“비켜, 나 집에 갈 거야.”“밥을 안 먹어서 힘이 없네.”한편, 구하준은 따뜻한 물수건으로 작은 손을 꼼꼼히 닦고는 밥을 먹기 시작했다.녀석은 무척이나 얌전했다.조그만 입으로 오물오물, 동작은 느릿했지만 음식을 낭비하거나 마구 헤집는 법이 없었다.그 모습이 제법 기특해 정루아는 저도 모르게 시선이 갔다.구태윤은 그녀를 유심히 관찰하더니, 아래를 슬쩍 훑어보고는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넌지시 입을 열었다.“나, 구하준 양육권 가져올 생각이야.”정루아가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조카를 아들로 만들겠다고? 재주도 좋네.”구태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이내 한숨을 내쉬며 한 마디 덧붙였다.“양육권을 가져오겠다는 거지, 내 아들로 삼겠다고 한 적은 없어. 하준은 우리 형 아들이야.”“훗.”정루아가 다시 한번 코웃음을 쳤다.“그게 그거지. 어차피 저 꼬맹이 눈엔 당신이 아빠나 다름없을 텐데.”구하준은 태어나서 아버지를 본 적이 없었기에,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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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2화

“태윤아,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까지 해선 안 된다. 하준이는 이미 아빠를 여의었데, 엄마까지 잃게 만들 순 없어.”장옥경이 신신당부하며 말했다.정시연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그녀였지만, 어린아이의 유년 시절에서 아빠의 사랑이 사라진 마당에 엄마까지 앗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단지 정시연과 구태윤이 더는 얽히지 않도록 영원히 갈라놓고 싶었을 뿐이었다.구태윤은 냉담한 어조로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담담히 읊조렸다.장옥경은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말했다.“알았어. 그리 해결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야. 전화로는 좀 그러니까, 일단 병원으로 와. 만나서 확실하게 얘기하자.”“네.”구태윤은 짧게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법 없이, 여전히 느긋하고 우아한 손길로 식사를 이어갔다.그때, 정루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나 화장실 갈래.”구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같이 가자.”정루아는 머리가 지끈거렸다.“대체 나한테 뭘 원하는 거야?”구태윤이 말했다.“이따가 나랑 병원에 좀 가자. 그러고 나서 집에 데려다줄게.”정루아는 그의 진심을 파악하려는 듯 의심쩍은 눈초리로 가만히 쳐다보았다.“거짓말 아니야.”그제야 정루아는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 시간이나 지난 후였다.두 사람이 나란히 나타나자, 장옥경은 다소 의외라는 듯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어머님.”정루아가 인사를 건넸다.장옥경이 물었다.“일은 좀 어떠니? 할 만해?”“네.”덤덤한 대답에 장옥경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살짝 지어 보였다.“앞으로는 더 괜찮아질 거다.”그러고는 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정시연은 감기에 걸린 탓에 열이 났던 모양이었다.지금은 겨우 열이 내린 듯했으나, 창백한 안색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하준아...”아들을 본 그녀는 곧바로 손을 뻗으며 눈물을 흘렸다.“엄마!”구하준 역시 다급히 뛰어가 그녀의 품에 안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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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3화

구태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정시연의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직장은 그대로 유지될 겁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다른 방식으로 보상해 드릴게요. 하준이를 빼앗아 가는 일도 없어요.”정시연은 그를 바라보며 애원했다.“태윤 씨가 하준이 걱정해서 그러는 거, 저도 잘 알아요. 하지만 난 하준이 엄마잖아요. 자기 자식 걱정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어요? 어젯밤 일은 정말 사고였어요. 내가 미쳤다고 애를 일부러 내버려 두겠어요? 태윤 씨, 정말 오해에요.”구태윤이 대답했다.“오해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형수님, 이런 일은 두 번 다시 없어야 합니다. 하준이는 이제 겨우 세 살이에요.”정시연은 구하준을 품에 꼭 껴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걱정 마요, 내가 잘 돌볼 테니까.”그러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가련한 목소리로 슬며시 본론을 꺼냈다.“그 사파이어 귀걸이, 정말 돌려받을 방법이 없는 건가요? 루아만 양보해 준다면 어떤 것이든 내놓을 수 있어요.”구태윤이 말했다.“정 원하신다면 그에 상응하는 다른 걸로 제가 보상해줄게요.”정시연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홱 돌렸다.“그 사파이어 귀걸이가 아니면, 나한테 아무 의미 없어요.”병실 안은 순식간에 침묵에 휩싸였다.구태윤의 눈빛이 한층 더 가라앉았다. 온몸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서늘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장옥경이 물었다.“루아야, 너 태윤이랑 화해한 거니?”“아니요.”정루아가 고개를 저었다.“저희는 절대로 화해할 수 없어요.”장옥경이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희도 참 인연이 닿지 않는구나. 하지만 태윤이 그 녀석 성미가 워낙 고집스럽잖니. 한번 마음 먹은 건 쉽게 바꾸지 못해. 오죽하면 나한테까지 둘 사이에 참견하지 말라고 경고하겠니. 나로서도 이젠 어쩔 도리가 없구나.”정루아는 맑고 투명한 눈동자로 담담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머님,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주셔야 해요. 저랑 구태윤이 계속 이렇게 엮여 있다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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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4화

정루아는 곧바로 손을 거두었다.그녀의 눈동자에 그 어떤 다정함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한결같은 냉담함만이 서려 있을 뿐이었다.“내가 왜 당신을 기다려야 해?”나지막한 반문은 구태윤의 머리 위에 얼음물을 끼얹은 듯, 조금 전까지 요동치던 심장을 순식간에 얼어붙게 했다.감당하기 힘든 온도 차에 당장이라도 이성을 잃을 것 같았다.이내 정루아의 손을 붙잡으려 한 걸음 다가섰다.하지만 정루아는 몸을 돌려 그의 손길을 피했다.구태윤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다 돌연 그녀의 양어깨를 붙잡고 벽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정루아는 옴짝달싹할 수 없이 갇히고 말았다.“루아야.”구태윤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그리고 점점 더 거리를 좁혀오며 품에 안으려 했다.하지만 정루아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거절 의사가 너무나도 명백했다.“볼일 끝났으면 이만 가줘.”“우린 부부야. 계속 이렇게 별거할 순 없어.”구태윤은 그녀의 옆얼굴을 응시하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정루아는 슬며시 시선을 내리깔았다.“적어도 나한테 있어선, 우리 관계는 진작에 끝났어.”“아직 이혼서류에 도장 안 찍었잖아.”구태윤이 낮게 읊조렸다.“그러니 이 관계를 부정할 순 없어.”그리고 다시 밀착해 오며, 정루아를 벽과 자기 가슴 사이에 가두었다.“루아야, 문 열어. 들어가게.”뜨거운 숨결이 그녀를 덮쳤다.뒤이어 한겨울처럼 시린 공기가 밀려들자, 얼어붙기라도 한 듯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정루아는 손을 뻗어 남자를 밀어냈다.“싫어. 그냥 가.”하지만 구태윤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며 속삭였다.“네가 지문 찍을래, 아니면 내가 비밀번호 누를까?”“장난해? 당신이 우리 집 비밀번호를 어떻게 알아!”정루아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구태윤이 입꼬리를 올렸다.“루아야, 우리 무려 8년을 함께했잖아. 난 너에 대해 모르는 게 없어.”말이 끝나기 무섭게 늘씬한 손가락으로 도어락 패드를 누르기 시작했다.곧이어 잠금이 해제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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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5화

“루아야, 나 밤새우느라 한숨도 못 잤어.”나지막한 목소리에 짙은 피로가 묻어났다.“아쉽네. 그냥 이대로 평생 잠이나 들지.”정루아는 무쇠처럼 단단한 팔에 갇혀 옴짝달싹 못 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나가기는커녕 숨만 차오를 뿐이었다.입으로는 연신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하지만 구태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제 품에 더 깊숙이 끌어안았다.정루아만 곁에 있어 준다면, 비로소 마음이 안도감으로 채워졌으니까.뜨거운 숨결이 귓가에 닿자 정루아는 고개를 돌려버렸다.체력을 아끼기 위해 무의미한 반항을 멈추었다.구태윤은 정말로 피곤했는지, 이내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그녀를 단단히 옭아매던 팔도 서서히 풀려갔다.정루아는 입술을 깨물며 착잡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그러고는 남자의 팔을 조심스럽게 치워낸 뒤, 소리 없이 침실을 빠져나와 문을 닫았다.거실로 나온 그녀는 안소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사모님?”수화기 너머로 안소희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밤중에 무슨 일이세요?”“주소 보낼 테니까, 와서 구태윤 좀 챙겨요.”정루아는 할 말만 내뱉은 채 전화를 끊어버렸다.기회는 던져줬다. 그걸 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오롯이 안소희의 몫이었다.한 시간 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안소희가 걸어 나왔다.살짝 열려 있는 문틈을 바라보는 그녀는 긴장한 나머지 손바닥에 땀이 배어났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무도 없었고, 침실만 문이 닫힌 상태였다.이내 침실 앞으로 걸어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침대 위에 옆으로 누워 깊은 잠에 빠진 구태윤이 눈에 들어왔다.안소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섣불리 발걸음을 옮기지는 않았다.지금은 때가 아니었다.천천히, 더 신중하게 움직여야만 했다....온통 정루아의 향기로 가득한 공간에서 구태윤은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눈을 떴을 때는 이미 다음 날 아침이었다.텅 빈 침대 위, 그 어디에도 정루아의 온기는 남아있지 않았다.구태윤은 한쪽 팔을 눈가에 얹은 채 나지막이 한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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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6화

정루아는 어젯밤 곧장 이연희의 집으로 향했다.초인종을 누르자 문이 열렸지만, 이연희는 한 손으로 휴대폰을 두드리는 중이었다.정루아를 쓱 훑어본 그녀가 황급히 액정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이 밤중엔 웬일이야?”정루아가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보고 싶어서 왔지.”이연희는 화면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입술을 삐죽 내밀며 뽀뽀하는 시늉을 했다.“우쭈쭈, 그랬어? 나도 사랑해.”정루아는 할 말을 잃었다.성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자취 중인 이연희는 게임 중독자라 집 안 곳곳에 굿즈로 가득했다.거실 한구석에는 게임 캐릭터를 그대로 박제해 놓은 듯한 고퀄의 거대 피규어가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정루아는 익숙하게 냉장고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 마시며, 소파에 기대앉아 친구가 게임을 다 할 때까지 기다렸다.얼마 후, 온갖 욕을 뱉어내며 마침내 매치를 끝낸 이연희가 소파로 풀썩 뛰어들었다.“자, 이제 말해봐. 대체 뭔 일이야?”그러자 정루아가 답했다.“구태윤이 우리 집에서 자고 가겠다고 진상을 부려서 꼴 보기 싫어 피신 왔어.”“쯧, 미친놈.”이연희의 미간이 단숨에 구겨졌다.“그 새끼는 형수랑 조카로 부족하대? 왜 자꾸 너한테 집착하고 난리야.”정루아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그렇게 궁금하면 네가 가서 직접 물어보든가.”“됐거든. 나 그 인간 얼굴 보면 뺨부터 갈길 것 같아.”이연희가 손사래를 쳤다.“게다가 피지컬로 상대가 안 되잖아. 괜히 덤볐다가 나만 손해인데, 사서 고생을 왜 해?”정루아는 잠시 침묵에 빠졌다.“아, 맞다. 너 오늘 잘 왔네, 안 그래도 내일 찾아가려고 했어. 예전에 지진 사건 조사해 달라고 했던 거 있잖아. 방금 연락이 왔는데, 당시 현장에서 네가 사람 구하는 걸 본 목격자가 단 한 명도 없대.”이연희의 표정이 제법 진지해졌다.그 말에 정루아의 안색이 돌변했다.“장난해?”“나도 안 믿겨서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는데 똑같은 대답이었어. 심지어 네 사진 들고 당시 그 학교에 있었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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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7화

정시연 하나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인데, 정루아까지 속을 썩이면 차라리 이 사업을 접는 게 나았다.게다가 정호는 정루아의 실력을 워낙 높이 평가하고 있었기에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정루아는 말문이 막혀 머쓱하게 코끝을 긁적였다.“그렇게까지 과장할 일은 아니잖아요.”정호가 엄한 목소리로 받아쳤다.“루아 씨가 휴가 쓰면 현실이 됩니다!”“알겠어요. 지금 바로 출근할게요.”결국 정루아가 한발 물러섰다. 이번 프로젝트를 무사히 끝내놓고 나서 개인적인 일을 처리하는 수밖에 없었다.그제야 화가 좀 풀린 정호는 한결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그래요, 오는 길 조심하고.”전화를 끊은 정루아는 이연희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당분간은 꼼짝없이 묶이게 됐어.”이연희는 하품을 크게 했다.“그럼 얼른 출근해. 난 좀 더 잘래.”“응.”정루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씻고 준비를 마친 뒤 집을 나섰다.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앞에 서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구태윤의 안색은 극도로 어두웠고, 검은 눈동자에는 흉흉한 기운이 가득했다.그는 정루아를 집어삼킬 듯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깜짝 놀란 정루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쏘아붙였다.“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대? 이래도 날 미행한 게 아니라고?”“미행한 게 뭐 어때서?”구태윤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한 짓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지 않아?”정루아의 얼굴 역시 싸늘하게 굳어졌다.“왜? 마음에 안 들어?”“정루아!”남자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툭 불거졌다.이내 이를 악물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더니, 단숨에 손목을 낚아채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나한테 여자 붙여줘 놓고 지금 마음에 안 드냐고 묻는 거야? 난 네 남편이고, 너랑 결혼한 사람이야! 그런데 어떻게 이딴 짓을 해?”구태윤은 화가 폭발할 것만 같았다.분노와 배신감, 그리고 비참함까지.게다가 평온하기만 한 맑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분노는 극에 달했다.손목을 틀어쥔 악력이 어찌나 강한지 뼈가 으스러질 듯한 통증이 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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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8화

구태윤의 서늘한 시선이 이연희의 얼굴에 닿았다.피부로 와닿는 지독한 한기와 숨 막히는 압박감에 이연희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 떨었다.하마터면 손에 쥔 야구 배트를 떨어뜨릴 뻔했다.“네가 시킨 짓이야?”구태윤은 정루아가 늘 이연희와 붙어 다녔다는 사실을 상기했다.단짝인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온종일 무슨 해괴한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그가 며칠간 출장을 다녀온 날이었다.정루아는 손에 가죽 채찍을 든 채, 제 손바닥을 툭툭 치며 다짜고짜 옷을 벗으라 명령했다.다른 여자의 흔적을 묻혀왔는지 몸 검사를 하겠다는 요량이었다.그날 밤, 그는 오히려 정루아의 온몸에 제 흔적을 남겼다.가죽 채찍도 침대 밑에 처박혔다.그녀가 기절하듯 잠들었을 때 머리맡에서 휴대폰이 울렸다.이연희가 보낸 메시지였다.[루아야, 재밌어? 그 자식 무릎 꿇었어? 잘못했다고 빌었어?]순간, 구태윤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전부 이연희가 낸 아이디어였다니.감히 그를 장난감 취급하는 건가?따라서 지금 이연희를 마주한 순간, 구태윤은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친구의 이혼을 돕겠답시고 또 얄팍한 잔머리를 굴렸다는 것을.다른 여자를 보내 수발을 들게 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정루아의 머리에서 나올 리가 없었다.“애먼 사람 잡고 모함하지 마!”그때 정루아가 앞을 가로막아 섰다.“연희랑 상관없는 일이야. 전부 내가 생각해낸 거야.”구태윤의 시선이 다시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맑고 투명한 눈망울에는 여전히 분노가 일렁거렸고, 숨결은 거칠게 흐트러져 있었다.소파 위로 짓눌린 채,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붉은 눈시울은 지독하게도 아름다웠다.구태윤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이윽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설마 나한테 여자 붙여주면 순순히 이혼이라도 해줄 줄 알았어?”정루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구태윤은 허리를 숙여 그녀에게 바짝 다가갔다.뜨거운 숨결이 귓가에 닿았다.곧이어 들려오는 잔인한 말은 그녀가 붙들고 있던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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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9화

근처에 편의점이 보이자, 이연희는 군것질을 좀 사 오겠다며 차에서 내렸다.그사이 정루아는 장옥경에게 전화를 걸었다.“어, 루아야.”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말투는 무척이나 다정했다.정루아는 조금 쉰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어머님, 지난번 계획은 무산됐어요. 구태윤이 제 속내를 다 꿰뚫어 보고 있더라고요. 자기가 정말 다른 여자와 만나더라도 이혼만큼은 절대 안 해준다고 대놓고 못 박았어요.”장옥경은 깜짝 놀란 눈치였다.“그 녀석이 정말 그렇게까지 얘기했다고?”정루아는 씁쓸함이 가득한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네.”“이 고약한 녀석 같으니라고.”장옥경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수화기 너머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루아야, 당장은 나도 딱히 좋은 수가 떠오르지 않는구나.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는 건 어떻겠니? 네가 태윤이랑 함께한 세월이 자그마치 8년이야. 이렇게 이혼해 버리기엔 너무 아깝잖아.”정루아는 휴대폰을 힘주어 꽉 쥐었다. 그리고 단호한 어조로 받아쳤다.“지난 8년의 감정이 아깝다고 주저앉아 있느니, 지금이라도 손해를 줄이고 끝내고 싶어요.”“후우...”장옥경이 무거운 탄식을 내뱉었다.“하지만 우리 다 태윤이 성격 알잖아. 그놈이 싫다고 버티면, 너희 이혼 절대로 못 해.”그러자 정루아가 단호하게 쐐기를 박았다.“상관없어요. 어머님이 도와주기 힘들다면 저 혼자서라도 방법을 찾아낼 거예요. 그 인간이 누구랑 붙어먹든 이제 눈 하나 깜짝 안 해요. 정시연이든, 안소희든, 이혼만 할 수 있게 해주세요. 그럼 돼요.”“루아야, 그러지 마.”장옥경은 덜컥 겁이 난 듯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태윤이랑 정시연은 절대 엮여서는 안 돼. 둘은 시동생과 형수 사이 아니더냐. 이게 남들 귀에 들어가 봐라, 우리 집안이 아주 세상의 비웃음거리가 될 거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렴,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 테니. 응?”안절부절못하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정루아의 날 선 어조도 한결 누그러졌다.“어머님, 그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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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화

정루아는 과연 자신을 좋아하는 걸까.아니면 당시 구해줬던 그‘남자'를 좋아하는 걸까....점심 무렵, 정루아는 안소희의 전화를 받았다.두 사람은 회사 맞은편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안소희는 그녀를 보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사모님, 저 잘렸어요.”정루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구태윤이 이렇게 빨리 손을 쓸 줄이야.안소희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정루아를 쏘아보았다.“혹시 이혼하기 싫은 거 아니에요?”“하고 싶죠, 당연히.”정루아가 곧바로 반박했다.“하지만 그이가 소희 씨를 해고한 것까지 내가 막을 수는 없잖아요.”안소희가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이제 그 사람한테 어떻게 접근하란 말이에요?”말투에는 정루아를 향한 원망이 고스란히 묻어났다.‘어젯밤 나한테 전화만 안 했어도 좋았을 텐데.'그랬다면 계속 구태윤의 곁에 비서로 남아서 능력을 증명해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씩 그의 시야에 스며들 계획이었다.하지만 어젯밤 정루아가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바람에 공들인 계획이 모조리 뒤틀려 버렸다.안소희는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사모님이 먼저 판을 깔아주셨잖아요. 이제 와서 나 몰라라 하시면 안 되죠. 어떻게든 해결 방안 내놓으세요.”제 잘못을 남에게 떠넘기는 태도가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정루아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피식 웃었다.“그 사람 옆에 따라다닌 지도 꽤 된 걸로 아는데, 두 사람 관계는 좀 진전이 있었나요? 단둘이 밖에서 식사라도 한번 해봤고?”안소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그건... 전 이제 막 입사한 신입이잖아요. 대표님이 중요한 식사 자리에 저 같은 사람을 데려갈 리 있겠어요?”“식사 자리 한 번 같이 못 해보고, 이제 와서 내가 소희 씨 계획을 망쳤다고 탓하는 거예요?”정루아는 그녀의 속내를 들춰냈다.“기회는 줬는데, 본인이 무능해서 날려 먹은 거잖아요.”순간, 수치심이 밀려든 안소희가 얼굴을 붉히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지금 무슨 뜻이에요?”“말 그대로예요.”정루아는 덤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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