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8년의 짝사랑을 폐기 처분합니다: Chapter 171 - Chapter 180

312 Chapters

제171화

남자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기운에 정루아는 숨이 턱 막혔다.정체 모를 압박감이 온몸을 짓누르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루아야, 설마 만난 지 고작 며칠 만에 그 새끼가 특별해지기라도 했다는 헛소리 하려는 건 아니겠지?”구태윤의 어조가 한층 더 서늘해졌다.정루아 역시 차가운 얼굴로 받아쳤다.“그럼 당신은 왜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대뜸 해고한 건데? 강 팀장님이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네 주위를 서성거린 것만으로도 이미 큰 죄를 지었어.”구태윤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내가 분명 말했을 텐데. 네 주변에 다른 남자가 알짱거리는 거 보기 싫다고. 그런데 넌 기어코 그 새끼 일자리를 지켜줬어. 나 지금 굉장히 불쾌하거든?”이유 모를 분노가 가슴속에서 요동쳤다.사방에서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귓가에는 오직 그의 서늘한 경고만이 날아와 꽂혔다.정루아는 몇 번이고 깊은숨을 몰아쉬며 감정을 억눌렀다.이내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당신 진짜 내로남불의 정석이구나. 형수 일이라면 그렇게 발 벗고 나서면서 왜 나한테만 이러는 거야? 주변에 아는 남자 하나 있는 것조차 용납 못해?”그녀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걸렸다.구태윤을 바라보는 눈빛은 차가움을 넘어 소름 끼칠 정도로 낯설었다.“나 때문에 애꿎은 피해를 본 사람이라,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를 한 것뿐이야. 그런데 당신은? 형수와 조카를 살뜰히 챙기며 억 소리 나는 경매품을 턱턱 사 주질 않나, 비즈니스 협업까지 주선해 줘? 이 짐승만도 못한 새끼야.”둘 사이의 거리는 아주 가까웠기에, 타인의 시선에는 영락없는 잉꼬부부의 모습처럼 비쳤다.하지만 당사자들은 뻔했다. 서로의 마음이 아득히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구태윤은 그녀의 말을 가볍게 묵살하며 여전히 손을 꽉 맞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감정을 수습하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어느새 언제 싸웠냐는 듯 평온하고 무심한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그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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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2화

“우선 손부터 놓지?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못 먹어.”정루아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구태윤이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내가 먹여주면 되잖아.”“하.”정루아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터뜨렸다.“그럴 바엔 그냥 당신 허리춤에 나를 매달고 다니지 그랬어? 그럼 내가 꼼짝없이 묶여 있을 텐데.”구태윤의 눈빛이 한층 깊게 가라앉았다.“싫어서 안 그러는 줄 알아?”“꺼져.”정루아는 남자의 손을 힘껏 뿌리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구태윤은 가냘프고 아름다운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그녀가 입은 와인빛 드레스는 워낙 강렬해서 어디를 가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이내 발걸음을 옮겨 나란히 걸으며 마치 소유권이라도 주장하려는 듯했다.“안녕하세요, 대표님.”바로 그때, 연회장 직원이 다가와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구씨 가문 큰 사모님께서 대표님을 급히 뵙고자 하십니다. 중요하게 전할 말씀이 있다고 하네요.”구태윤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어갔다.“어디 있죠?”직원이 안내했다.“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정시연은 휴게실에 앉아 있었다.구태윤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정시연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번졌다.“태윤 씨, 루아는요?”구태윤이 담담하게 대답했다.“혼자서 놀고 있어요.”정시연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루아가 분명 또 오해했을 텐데 걱정이네요. 이따 만찬 끝나면 우리가 잘 풀어줘요. 루아 마음 상하지 않게.”구태윤은 그녀의 옆에 앉으며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형수님, 무슨 일이십니까?”정시연이 한층 진지해진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아까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만약 내가 정원 그룹을 대표해서 배성 그룹과의 협업을 성사할 수만 있다면 그동안 부모님이 키워주신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 될 것 같아서요. 태윤 씨, 저 좀 도와주면 안 될까요?”나긋한 어조는 물론, 내세우는 명분 역시 제법 설득력이 있었다.“그 사파이어 귀걸이도 이미 포기했고, 부모님이 주시겠다는 지분도 전부 거절했잖아요. 나 정말 더는 바라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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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3화

이연희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얼굴로 정루아의 손을 꽉 쥐었다.“루아야, 그렇다고 해도 절대 포기하면 안 돼. 원래 다 네 것이었는데, 정시연이 갑자기 나타나서 뺏어간 거라고! 그년은 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정루아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들끓어 오르는 감정을 간신히 억눌렀다.이내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응, 네 말이 맞아. 난 괜찮아. 금방 다 제자리로 돌려놓을 거야.”이연희가 다가와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걱정하지 마. 난 언제나 네 편이니까.”친구의 어깨에 턱을 기댄 정루아는 포근한 온기를 느끼며 활짝 웃었다.“네가 있어서 참 다행이야.”구석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감정을 추스른 두 사람은 다시 연회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축사를 마친 배진욱이 배성 그룹의 향후 비전을 발표하자, 연회장에 모인 정재계 인사들이 순식간에 구름처럼 몰려들었다.하지만 그는 형식적인 미소로 화답할 뿐, 미련 없이 2층으로 향했다.배성 그룹이 진짜 협력하려는 대상은 위에 있는 그룹사들이다.아래층에 모인 중소기업들은 머릿수나 채우기 위해 부른 들러리에 불과했다.그때, 정시연을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가는 구태윤의 모습이 정루아의 눈에 포착되었다.그녀는 술잔을 꽉 움켜쥐었다.이때, 임혜숙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루아야, 너도 봤지? 배성 그룹은 시연이를 통해서 우리 집안과 협력할 거야. 네가 이 타이밍에 눈치 없이 끼어들면 정씨 가문 이미지만 깎아 먹는 셈이야. 그렇게 되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제발 나대지 말고 얌전히 있어, 알겠니?”정루아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응시했다.맑은 눈동자는 호수처럼 잔잔했다.“나대지 말라니요? 저도 엄연한 이 집안 자식으로서 힘을 보태고 싶을 뿐이에요.”기어코 쫓아가겠다는 뜻이었다.임혜숙이 그녀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루아야...”하지만 정루아는 매정하게 뿌리치고는 위층을 향해 걸어갔다.임혜숙이 다시 가로막으려는 순간, 이연희가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이모, 진짜 오랜만이에요! 우리 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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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4화

‘배성 그룹 장남? 아까 무대 위에서 축사하던 그 배진욱이라고?’정루아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아까 전 온갖 해괴한 일들에 정신이 팔렸던 탓에, 정작 오늘 연회의 주인공 얼굴을 제대로 눈에 담지 못했다.“안녕하세요, 정루아라고 합니다.”그녀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민망한 듯 악수를 청했다.배진욱은 정루아의 손을 가볍게 맞잡았다가 이내 예의 바르게 거두었다.그리고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장난스레 말했다.“내가 오늘 연회의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모르는 사람도 있군요.”정루아는 민망함에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었다.“죄송해요, 제가 다른 데 정신이 팔려서...”“정루아 씨, 정말 고맙습니다.”배진욱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안경렌즈 너머의 깊은 눈동자가 유달리 진지하게 그녀를 담아냈다.“루아 씨가 아니었다면, 난 아무도 모르게 여기서 숨을 거두었을지도 모릅니다.”예상치 못한 극단적인 말에 정루아는 깜짝 놀랐다.“아, 아니에요. 무슨 그런 말씀을... 대표님이 안 보이시면 아래층에서 난리가 나서 누군가 금방 찾으러 왔을 거예요.”“글쎄요.”배진욱은 자신의 명함을 꺼내서 건넸다.“혹시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이 외딴곳에서 제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었다. 무슨 수를 쓰든 이 거대한 빚은 갚아야만 했다.정루아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명함을 만지작거리며 슬며시 눈길을 내렸다.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사실... 지금 당장 바라는 일이 하나 있긴 한데요.”배진욱이 고개를 끄덕였다.“말씀하세요.”정루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배성 그룹과의 협력 제안을 전달했다.묵묵히 듣고 있던 배진욱은 흔쾌히 수락하더니 서영훈을 바라보았다.“서 비서가 이 건을 맡아서 진행해. 정원 그룹과 협력할 만한 적절한 프로젝트를 선별해서 즉시 추진하도록.”서영훈이 허리를 숙였다.“알겠습니다, 대표님.”정루아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적어도 최소한의 검토는 거칠 줄 알았다.그녀는 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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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5화

배다인의 미간이 순식간에 찌푸려졌다.“우리 오빠가 지금 누구랑 얘기를 나누고 있다고?”비서는 저도 모르게 구태윤의 눈치를 슬쩍 살피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그게... 구 대표님의 부인이십니다.”배다인은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멍해졌다.‘우리 오빠랑 정루아가 대체 언제부터 알던 사이였지?’옆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정시연은 그 말을 듣자마자 즉시 구태윤을 바라보았다. 이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태윤 씨, 루아가 정말 대단하네요. 배 대표님과 벌써 안면을 텄을 줄이야.”구태윤은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해 왔었다.하지만 ‘정루아’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의 짙고 수려한 눈썹이 단숨에 구겨졌다.그리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룸을 빠져나갔다.“태윤 씨...!”정시연이 황급히 뒤를 쫓아 나갔다.배다인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정말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대체 무슨 일인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하지만 막상 그들이 밖으로 나갔을 때, 야외 테라스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서영훈이 배다인을 발견하고 다가와 정중하게 말했다.“아가씨, 대표님께서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자리를 뜨셨으니, 남은 행사는 아가씨께서 주관하면 됩니다.”배다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캐물었다.“우리 오빠 어디 갔어?”서영훈이 대답했다.“잘 모르겠습니다.”배다인은 기가 찼다. 배진욱의 손발이나 다름없는 수석 비서가 행방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는가.보아하니 배진욱이 입단속을 단단히 시킨 게 분명했다.배다인은 애써 여유로운 척 입꼬리를 올렸다.“알았어. 가서 일 봐.”“네.”그녀는 곧바로 구태윤을 돌아보며 말했다.“구 대표님, 아까 저희 배성 그룹이랑 협력하는 건에 관심 있으셨잖아요. 오빠가 잠깐 자리를 비웠으니까, 그 얘긴 저랑 계속 나누셔도 돼요.”짐짓 담담하게 말을 건넸지만, 손바닥은 이미 긴장감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구태윤과 비즈니스를 논하며 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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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6화

장옥경의 미간이 찌푸려졌다.‘이 자식이 미쳤나?’옆에 있던 안소희가 어깨를 바르르 떨며 슬그머니 말문을 열었다.“어머님, 저 더는 못 하겠어요. 너무 무서워요...”장옥경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쏘아보았다.“전에 태윤이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니? 고작 이 정도로 포기하겠다는 거냐?”안소희는 입술을 깨물었다.“정말 무서워서 그래요, 어머님. 저 머리도 식힐 겸 외국에 나가서 며칠만 쉬다 오면 안 될까요? 돌아와서 다시 말씀드릴게요.”그리고 대답도 듣지 않은 채 허겁지겁 몸을 돌려 가버렸다.장옥경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얘도 참 쓸모가 없네.’...밤이 깊어 가며 도심 속 화려한 불빛들이 하나둘 번지기 시작했다.레스토랑 안에는 맑고 우아한 바이올린 선율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테이블마다 놓인 자그마한 조명이 빛을 발할 뿐, 넓은 공간은 대개 아늑한 어둠에 잠겼다.참 낭만적인 공간이다.정루아는 예전에 구태윤과 함께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때마침 정전되는 바람에 주변 사람들은 모두 자리를 떴고, 둘은 어둠 속에서 입을 맞추었다.“루아 씨, 더 먹고 싶은 거 없어요?”맞은편에서 배진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정루아는 생각을 떨쳐내며 미소를 지었다.“이걸로 충분해요.”배진욱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종업원을 먼저 보냈다.그리고 진지하면서도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벌써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전하고 싶네요. 오늘 밤은 정말 고마웠어요.”정루아가 물었다.“어쩌다 혼자 그런 곳에 계셨던 거예요?”배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잠깐 숨 돌리려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는데, 하필 그 타이밍에 발작이 일어날 줄은 몰랐네요.”정루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외국에 계실 때는 이런 적이 없으셨나요?”배진욱이 어깨를 으쓱했다.“네, 아무래도 여기서는 격식을 차려야 할 일이 많다 보니 신경이 곤두섰나 봐요.”정루아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외국에서 꽤 잘 나갔다고 들었는데, 왜 굳이 돌아오기로 결심하신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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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7화

구태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그거 참 우연이네요.”배진욱은 노골적인 적의를 느꼈다. 서늘한 한기가 감돌며 정체 모를 압박감이 숨통을 조여왔다.구태윤은 정루아를 바라보며 한결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루아야, 나 배고픈데. 같이 먹어도 될까?”정루아는 그를 무심하게 바라보았다.‘내가 허락할 거로 생각하나? 기가 차서 원.’그녀의 기분이나 부탁은 평소에 안중에도 없던 인간이지 않은가.정루아는 시선을 거두고 무시로 일관했다.구태윤은 씁쓸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가락을 움켜쥐었다.“루아야.”“이거 놔. 물 마시게.”정루아의 어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구태윤의 눈빛이 한층 어둡게 가라앉았지만, 결국 그녀를 놓아주었다.맞은편에 앉아 있던 배진욱은 두 사람을 유심히 관찰했다.딱 봐도 파탄 직전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부부 관계였다.이윽고 음식이 서빙되자 구태윤은 종업원에게 수저를 추가해 달라고 요청한 뒤, 자연스럽게 정루아가 좋아하는 요리를 몇 가지 더 주문했다.식탁 위를 감도는 공기는 여전히 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웠다.그때, 배진욱의 휴대폰이 울렸다.전화를 확인한 그가 미안함이 역력한 얼굴로 정루아를 바라보았다.“죄송해요, 루아 씨.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아요.”정루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어서 가보세요. 급한 일부터 처리하셔야죠.”배진욱이 일어나 구태윤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돌아서 방을 나갔다.그가 자리를 비우자 정루아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비아냥거렸다.“그렇게 좋아하는 형수님은 팽개치고 여긴 왜 왔대?”구태윤은 검은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하며 해명했다.“마지막으로 도와줬을 뿐이야. 과거의 일은 이걸로 전부 청산했어.”정루아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굳이 그럴 필요가 있어? 당신이 형수랑 끝냈다고 쳐. 그럼 구하준은 어쩔 건데? 평생 모른 척이라도 하려고? 둘은 엄마와 아들이고 한 몸이나 다름없어. 당신은 영원히 그 굴레에서 못 벗어나.”이내 젓가락을 내려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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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8화

주위는 온통 어두컴컴했다.식탁 위 조명이 은은하고 부드러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지만, 복잡한 감정이 일렁이는 남자의 깊은 눈동자까지는 닿지 못했다.구태윤은 눈가가 붉어진 정루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상처받은 기색이 너무도 선명해 그의 마음 역시 무겁게 가라앉았다.이내 침을 꿀꺽 삼키며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루아야, 그 여자가 끔찍한 고통 속에서 분만실로 실려가는 걸 봤어. 찢어질 듯한 비명도 들었지. 아이 하나를 낳기 위해 지옥 문턱까지 다녀오더라고. 난 그때 생각했어. 만약 저 분만실 안에 있는 게 너라면 어땠을까... 아마 난 미쳐버렸을 거야.”그가 시선을 내리깔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앞으로 남은 인생, 우리 둘만으로도 충분해. 구씨 가문에는 이미 하준이가 있잖아. 나까지 대를 이을 필요 없어. 그러니까 너한테는 그런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아.”“내 생각은 물어보긴 했어?”정루아가 차갑게 식어버린 어조로 되물었다.“미안해.”구태윤의 목소리가 한층 더 가라앉았다.“내가 잘못했어. 너한테 먼저 물어보고 정관수술을 해야 했는데.”“하...”정루아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내가 당신이랑 똑같은 생각이었을 거라고 믿었나 보네?”구태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아니었어? 루아야, 네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잖아.”그에게 아이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두 사람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식이라는 존재 또한 필요 없었다.지난 8년 동안, 오직 서로만을 온전히 사랑해 왔으니까.“당신 정말 무서운 사람이구나.”정루아의 몸이 팽팽하게 굳어졌다. 투명한 눈동자에는 그를 처음 마주한 듯한 낯선 경계심이 감돌았다.“당신은 어떨지 몰라도 난 아이 갖고 싶어. 둘이서만 지내는 것도 좋다고 말하긴 했지만 자의인지, 타의인지는 엄연히 다른 문제야.”그러자 구태윤이 받아쳤다.“하준이를 보고 나서 아이를 갖고 싶어진 건 아니고?”정루아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싸늘하게 대꾸했다.“이제 와서 꼬치꼬치 따져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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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9화

“루아야, 오늘 진짜 예쁘다.”구태윤은 정루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커다란 정장 속 가냘픈 몸매를 눈에 담았다.붉은 드레스는 그에게 유독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정루아는 차가운 낯빛으로 앞만 보고 걸어가 차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걸치고 있던 옷을 밖으로 던져 버렸다.그 모습을 본 구태윤은 허리를 굽혀 재킷을 주워 올리며 물었다.“이거 별로야? 그럼 다시는 안 입을게.”말이 끝나기 무섭게 곧장 쓰레기통에 처박았다.정루아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당신도 별로인데, 앞으로는 내 눈앞에 얼씬거리지도 마.”“싱거운 소리 하기는.”구태윤은 웃기만 할 뿐,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이내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지시한 뒤, 다시금 정루아의 손을 붙잡았다.하지만 정루아는 그의 손길을 피하며 휴대폰으로 게임을 시작했다.구태윤의 눈동자가 한층 더 어둡게 가라앉았다.차가 한참을 달린 후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배진욱이랑 거리 둬. 겉모습에만 현혹되지 말고.”정루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게임에만 열중했다.“루아야.”원하는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구태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그리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정루아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당신은 뭐 얼마나 대단한 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네.”구태윤의 가슴이 답답해졌다. 날카롭게 꽂히는 차가운 시선이 못 견디게 거슬렸다.“난 네 편이잖아. 배진욱 그 자식은 겉보기처럼 그렇게 호락호락한 놈이 아니야.”구태윤이 나직이 경고했다.정루아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다시 게임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침묵이 내려앉은 차 안은 묘하게 싸늘한 기류가 감돌았다.운전기사는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했다.얼마 후, 차는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정루아는 문을 열고 내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구태윤은 차에 앉아 휴대폰을 꺼내 한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배성 그룹 감시해. 루아한테 접근하는지 잘 지켜보고.”한민혁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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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0화

정시연은 정루아를 발견하자마자 손목을 움켜잡고 비상계단으로 끌고 갔다.정루아의 안색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뭐 하는 짓이야? 이거 놔!”하지만 정시연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악착같이 손을 놓지 않았다.비상계단에 들어서고 나서야 정루아의 팔을 거칠게 내동댕이쳤다. 그러고는 핏발이 선 눈으로 쏘아붙였다.“너지? 네가 먼저 선수 쳐서 배진욱 만난 거지?”정루아는 팔짱을 끼더니 코웃음을 쳤다.“선수 치다니? 각자 능력껏 움직인 건데, 본인이 무능해서 날려 버린 기회를 왜 남 탓으로 돌려?”정시연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태윤 씨가 약속했단 말이야! 정원 그룹과 배성 그룹의 협력은 내가 성사하게 해 주겠다고. 그런데 네가 무슨 권리로 가로채?”정루아의 눈빛이 점차 싸늘하게 변했고,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혐오감이 짙게 배어 나왔다.“그럼 구태윤한테 가서 따져야지. 얼마나 쓸모가 없으면 그 사소한 기회조차 네 손에 쥐여 주지 못 하냐고.”그리고 쌀쌀맞은 한 마디만 남긴 채 뒤돌아서 자리를 뜨려고 했다.이런 유치한 신파를 더 들어줄 여유 따윈 없었다.하지만 정시연은 또다시 그녀를 붙잡고 늘어졌다.“루아야, 넌 왜 맨날 내 걸 빼앗아 가지 못해 안달이야? 난 그저 입양아일 뿐이잖아. 엄마 아빠가 키워준 은혜에 보답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런 기회조차 주기 싫은 거야?”“이거 놓으라고!”정루아가 세차게 손을 뿌리쳤다. 정시연의 살갗이 닿는 것조차 끔찍하게 싫었다.“아악!”그 찰나, 날카로운 비명을 들려왔다.이어서 무언가 둔탁하게 굴러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정루아가 고개를 돌렸을 땐, 정시연은 이미 계단 아래로 떨어진 뒤였다.바닥에 쓰러진 정시연은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고통으로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세상에! 이게 무슨 난리래?”마침 담배 피우러 비상구로 들어서던 아래층 직원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는 다급히 뛰어왔다.그러자 정시연이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정루아를 가리켰다.“왜... 날 밀었어...?”말을 마치기도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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