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8년의 짝사랑을 폐기 처분합니다: Bab 281 - Bab 290

306 Bab

제281화

구태윤이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때, 혼자 테이블에 앉아 요리를 음미하는 정루아가 보였다.잔뜩 굳은 그의 표정이 문득 풀어지더니 성큼성큼 걸어가 물었다.“약속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정루아는 남자를 힐끗 쳐다보았다.“어떻게 알았어?”구태윤은 의자를 끌어당겨 그녀와 나란히 앉았다.“그 강우현이라는 녀석한테 구린 구석이 있더라고. 뒷조사를 좀 시켜봤더니 최근에 본가 사람들하고 꽤 가깝게 지냈어.”정루아는 태연하게 국을 몇 숟가락 떠먹었다.배가 부르자 수저를 내려놓고 맑고 투명한 눈망울로 그를 무덤덤하게 바라보았다.“당신 할머니가 윤미자 시켜서 강우현이랑 짜고 나한테 약을 먹여 순결을 망치려고 했어.”평온한 어조는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이 사태, 어떻게 할 거야?”구태윤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그는 위아래로 정루아를 훑어보며 물었다.“지금 몸은 좀 어때?”“내가 순순히 당할 것 같아?”정루아의 어조는 덤덤했다.구태윤의 매서운 눈빛에 스산한 기운이 스치더니, 말투까지 섬뜩하게 가라앉았다.“내가 확실하게 매듭지어 줄게.”정루아가 말했다.“할머니 속셈이야 뻔하지 뭐. 처음부터 우리 결혼 반대하셨던 분이니까. 구태윤, 우리가 이혼 도장 안 찍는 한 할머니는 끝까지 나를 표적으로 삼을 거야. 당신이 종일 내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면서 지켜줄 수 있어?”말을 마치고는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동시에 두 여자를 지키기엔 너무 힘들지 않을까?”구태윤의 안색이 싸늘해졌다.“루아야, 할머니가 널 해코지하는 일은 더는 없을 거야.”“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무섭더라.”정루아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정말 날 위하는 거라면 이혼해 줘. 깔끔하게 갈라서는 거야. 그래야 나도 당신 집안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테니까.”구태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이내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루아야...”쿵!바로 그때, 안쪽 휴게실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구태윤이 고개를 홱 돌렸다.곧이어 잘생긴 눈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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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2화

정루아는 피식 웃으며 박정란을 바라보았다.“연기에 참 소질이 있으시네요.”그러고는 1인용 소파에 앉아 여유로운 태도로 구태윤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박정란의 표정이 대뜸 일그러졌다.“이 근본 없는 년이, 어디서 감히 어른한테 눈을 똑바로 뜨고 이따위로 말해!”“할머니.”구태윤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얼굴 위로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졌다.“어떻게 된 일인지 다 알아 봤으니까 핑계 대지 마세요. 할머니가 무슨 짓을 꾸몄는지 내가 모를 줄 알아요?”박정란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절대 인정할 수 없는지라 여전히 강경한 태도로 밀고 나갔다.“태윤아, 그게 무슨 소리야? 네 마누라가 이토록 안하무인인데,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야?”구태윤은 매서운 눈빛으로 할머니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할머니가 강우현을 궁지로 몰아넣어 숨도 못 쉬게 만들어 놓고는 정작 선심 쓰는 듯 나타나 돈까지 쥐여주며 루아 뒤통수 치라고 했잖아요.”말을 마치고는 크게 심호흡했다.“제가 평생을 존경해 온 분이신데, 어찌 이런 낯부끄러운 짓까지 벌일 수가 있습니까?”“이 자식이!”박정란은 손주한테서 이런 막말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아까만 해도 화난 연기를 했지만, 지금은 진짜 분노가 치솟았다.그녀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구태윤을 가리켰다.“이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라고! 어디서 눈을 똑바로 뜨고 할머니한테 이딴 소리를 지껄여? 내 말이 우습게 들리냐?”그러고는 윤미자를 째려보았다. 일 처리가 미흡한 탓에 결국 손주의 입에서 저런 소리까지 나오게 만든 그녀가 너무 미웠다.이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네가 지껄인 그딴 소리, 난 모른다. 낱낱이 알아봤다고 큰소리치는데, 진짜 내가 시켰다는 물증이라도 있는 거야?”절대로 인정할 리 없었다.엉엉 울던 윤미자는 그녀의 말에 흠칫 놀랐다.하지만 박정란의 매서운 눈빛과 마주치는 순간,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꿀꺽 삼켜버렸다.“아주머니, 혹시 할머니한테 무슨 약점이라도 잡힌 거 아니에요? 솔직하게 다 털어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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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3화

구태윤은 박정란을 전담하는 도우미를 돌아보며 물었다.“약은요?”눈앞의 벌어진 광경에 넋이 나간 도우미는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약을 찾아 박정란의 입에 털어 넣었다.잠시 후, 노인의 얼굴에 간신히 혈색이 돌아왔지만 여전히 흙빛이었다.구태윤이 단호하게 말했다.“진짜로 기절해 봤자 소용없어요. 저는 한번 뱉은 말은 무조건 지킵니다.”곧이어 도우미에게 시선을 돌렸다.“할머니 짐 전부 챙겨요. 모레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내일은 재산 이전 절차를 진행해야 하니 당장 움직이기에 적합하지 않았다.“이 짐승만도 못한 놈아! 차라리 그때 네가 죽어야 했었어.”박정란은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구태윤을 노려보았다.“우리 승태는 그렇게 번듯하고 착한 아이였는데, 어째 팔자가 그 모양인지... 지금 살아있었다면 나한테 절대 이럴 리 없어. 아주 지극정성으로 떠받들었을 거야. 너처럼 매정하게 굴진 않았겠지.”구태윤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더더욱 매섭게 얼어붙었다.“안타깝게도 형은 이미 죽고 없죠.”“이 원수 같은 자식아!”박정란은 울음을 터뜨렸다. 구태윤은 물론, 정루아도 치가 떨리게 미웠다.결국 악에 받친 듯 두 사람을 향해 거친 욕설을 쏟아냈다.구태윤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정루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가자.”정루아는 마치 방관자처럼 내내 구경하다가, 그의 손을 뿌리치며 비아냥거렸다.“할머니가 당신 때문에 숨넘어가기 일보 직전인데, 나랑 같이 가겠다고?”구태윤의 칠흑 같은 눈동자가 그녀를 집요하게 응시했다.“응. 이제 난 불효막심한 패륜아 소리를 듣게 생겼으니까, 너마저 나 버리면 안 돼.”“훗.”정루아가 냉소를 지었다.“당신이 패륜아로 찍히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지? 애초에 내가 뒤통수 맞은 것도 따지고 보면 다 당신 때문이잖아. 이딴 꼴값 떠는 쇼를 벌인다고 내가 그동안 겪은 수모까지 싹 잊어줄 거로 생각해?”구태윤의 미간이 일그러졌다.“그럼 대체 뭘 어떻게 해야 속이 풀리는데?”정루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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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4화

김철웅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한 주먹 거리도 안 돼서 손쉽게 처리했죠.”호통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정루아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그제야 실감이 났다. 앞으로는 그 누구도 함부로 자신을 짓밟지 못할 거라는 사실이....얼굴이 시퍼렇게 멍이 든 경호원 두 명이 구태윤의 앞에 서서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구태윤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더니, 서늘한 눈매로 그들을 바라보았다.알 수 없는 압박감이 두 사람을 짓눌렀다.경호원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사모님 운전기사가 저희를 발견하는 바람에, 미처 손쓸 겨를도 없이 당했습니다.”구태윤이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나가 봐.”두 사람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니?이내 절뚝거리는 다리로 쏜살같이 줄행랑을 쳤다.구태윤은 차가 완전히 사라진 도로의 끝을 응시했다. 정루아의 곁에 대체 언제 저런 숨은 고수가 붙은 거지.이 정도 실력을 갖춘 인물을 왜 그동안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단 말인가.그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곧바로 번호를 눌렀다.신호음이 몇 번 울리더니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구태윤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시킨 일, 언제 끝나?”“이미 보냈지.”상대는 늘어지듯 여유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벌써 동성에 도착했을 텐데, 아마 지금쯤 네 마누라랑 접선했을 거야.”구태윤은 무심하게 말했다.“그 사람 좀 만나 봐야겠어.”“하... 뭐냐? 나 못 믿겠다는 거야?”상대는 뺀질거리며 말했다.“그럼 쓰질 말든가.”구태윤이 대답했다.“어쩌면 이미 만났을지도 몰라. 확인 좀 해보고 싶어서 그래.”“뭐?”상대가 흠칫 놀라더니 이내 킥킥 웃었다.“흥미롭군. 그 사람 프로필 보낼 테니까 직접 연락해 봐.”“알았어.”구태윤은 전화를 끊고 남은 담배를 마저 태웠다.잠시 후 휴대폰이 진동하며 상대가 보낸 자료가 도착했다.화면에 뜬 프로필 사진 속, 험상궂은 사내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김철웅.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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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5화

점심때가 될 무렵, 허도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목소리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루아야, 너 언제부터 이런 괴물 같은 변호사팀과 손을 잡은 거야? 그쪽 전문가들이랑 조율하는데 부족한 점을 쏙쏙 짚어내더라고. 원래 30%밖에 안 되던 승소 확률이 단숨에 80%로 수직 상승했어.”그 말을 듣자 정루아의 기분은 날아갈 듯 기뻤다.“진짜?”“내가 이런 걸로 거짓말하게 생겼냐? 빨리 불어봐, 대체 무슨 수로 그런 어마어마한 인물들을 끌어들였어?”허도준은 초조한 반면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도대체 언제부터 그녀의 주변에 이렇게 무시무시한 실력자들이 나타났단 말인가.괜스레 묘한 경계심이 드는 순간이었다.정루아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우리 외할머니가 소개해준 사람이야.”허도준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구나. 이 양반들까지 가세했으니 승기는 이미 떼놓은 당상이야. 앞으로 재판 날짜만 느긋하게 기다리면 되겠어.”정루아가 물었다.“그런데 왜 아직도 출석하라는 말이 없어? 첫 재판은 언제 열리는 거야?”허도준이 대답했다.“조정 기일 끝나고 대략 보름쯤 걸릴 테니까, 아마 곧 소환장 날아올걸?”“알았어.”정루아의 맑은 눈동자에 결연한 빛이 서렸다.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혼을 할 것이다.해 질 무렵, 퇴근길에 병원으로 향하던 그녀는 병실에서 또다시 찾아온 임혜숙을 마주쳤다.정루아는 쌀쌀맞게 쏘아붙였다.“여긴 굳이 엄마가 올 필요 없으니까 그만 가봐요. 내가 따로 간병인 붙여서 할머니 돌보게 할 테니까.”임혜숙의 모습은 어딘가 초췌해 보였다. 며칠 밤낮을 뜬눈으로 새웠는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그녀는 정루아를 멍하니 올려다보더니, 이내 눈물을 터뜨렸다.송문애는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울긴 왜 울어.”임혜숙은 목이 메어 흐느꼈다.“자식 낳았으면 제대로 키워주기라도 했어야지. 진짜 내 어머니 맞아요? 고작 딸 소원 하나 들어주는 것조차 안 돼요?”그녀의 말에 정루아가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또 그 타령이에요? 사파이어 귀걸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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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6화

정루아는 어깨를 으쓱했다.“그렇게 생각한다면 뭐, 할 수 없죠.”말을 마치고는 일어나서 송문애의 곁으로 다가갔다.아까만 해도 잔뜩 날이 서 있던 태도는 온데간데없고 목소리가 한결 누그러졌다.“할머니, 오늘 컨디션은 어때요?”송문애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손녀를 바라보았다.“며칠 전보다 훨씬 낫네.”정루아는 탁자에 놓인 사과를 집어 들고 능숙하게 껍질을 깎기 시작했다.옆에서 분통을 터뜨리는 임혜숙을 완전히 투명 인간 취급했다.지독한 무관심에 임혜숙은 서러운 반면, 분노가 치솟았다.한 명은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이고, 한 명은 자신이 낳은 자식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진짜 정시연의 털끝만도 못 미쳤다.결국 씩씩거리며 병실을 나섰다.그녀가 떠나자, 싸늘하게 얼어붙었던 병실 안의 공기가 금세 훈훈해졌다.“할머니, 저를 탓하시는 건 아니죠?”정루아는 시선을 내리깐 채 조용히 물었다.“바보야.”송문애가 주름진 손으로 손녀의 뺨을 쓸어내렸다.“다 너 살려고 악쓰는 건데, 이 할미가 왜 널 탓하겠어? 네 엄마가 나 챙긴답시고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속셈을 모를 줄 알아? 머릿속엔 온통 그년이랑 양딸밖에 없어서 정작 우리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뭐 하러 저런 사람한테 장단 맞춰주겠어.”정루아가 고개를 들었다. 맑은 눈동자는 봄바람처럼 따사로웠다.“네! 우리 앞날을 위해서라도 제가 최선을 다할게요.”이내 넌지시 물었다.“참, 저 주기언이랑 김철웅 만났어요. 이렇게 대단한 사람들을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동안 왜 한 번도 언급 안 하셨어요?”송문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어넘겼다.“내 나이가 몇인데, 진작에 일선에서 물러난 지 오래야. 그 녀석들은 전부 보육원 출신이야. 예전에 내가 후원해 줬더니, 졸업하고 나서 찾아왔길래 거둬주었지. 회사 경영도 맡기고 재산 관리도 시켜봤는데 아주 믿음직하더라고.”“그렇군요.”정루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그 사람들 만나자마자 엄청 큰 도움이 되었어요.”“이게 다 내 탓이다.”송문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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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7화

정씨 가문도 이제 갈 데까지 갔다....임혜숙의 계획을 듣던 정석주는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그렇게까지 할 거야? 아무리 그래도 당신 엄마인데.”하지만 임혜숙은 콧방귀를 뀌며 받아쳤다.“그 사람은 날 한 번도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어. 늘 성적표 들먹이며 닦달하기 바빴지, 내가 진짜로 공부하고 싶어 하는지 관심도 없었거든. 그때 날 진심으로 챙겨준 건 은영 이모뿐이었어. 솔직히 말해서, 옛날에는 차라리 은영 이모가 내 진짜 엄마였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란 적도 있어.”정석주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졌다.임혜숙은 남편의 팔을 꽉 움켜쥐며 밀어붙였다.“그 늙은이가 쥔 재산이 얼만 줄 알아? 이번 일만 성공하면 그깟 보석 귀걸이 따위는 눈에 차지도 않을 만큼 엄청난 유산이 다 우리 손에 들어올 거야. 그럼 회사 자금줄도 숨통이 트일 테고, 구태윤도 우리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거라고. 언제까지 그 자식한테 목덜미 잡혀서 휘둘리고 살래?”정석주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내 어두운 낯빛으로 입을 열었다.“일단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보자. 워낙 판이 큰일이라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어.”임혜숙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천천히 생각해봐.”...외할머니와 한참 동안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눈 정루아는 병원을 나와 김철웅을 불러냈다.“루아 씨, 무슨 일이에요?”김철웅이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물었다.정루아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조사할 게 좀 있어서요.”“말씀만 하세요.”김철웅의 표정이 단숨에 진지해졌다.“일단 첫 번째는, 8년 전에 미래 마을에서 지진이 났을 때 제가 사람을 구한 적이 있었거든요? 당시 구조 대상자의 신상을 정확하게 좀 알아봐 줘요.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당연히 구태윤이라고 믿고 살았는데, 최근에 알고 보니 아니라고 하더라고요.”정루아는 숨을 한번 크게 몰아쉬며 속내를 털어놓았다.앞서 이연희가 뒷조사를 해봤지만 도무지 꼬리가 잡히지 않았다.원래는 직접 파고들려고 했지만, 눈코 뜰 새 없이 터지는 일들에 발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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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8화

룸 안, 소파에 깊숙이 기댄 남자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우리 아직 이혼 안 했어.”김철웅이 콧방귀를 뀌었다.“곧 재판까지 갈 건데, 이혼이야 시간문제지 뭐.”그는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구태윤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배후랑 아는 사이일 줄이야. 그 자식도 참 눈썰미라곤 없네, 쯧쯧!”구태윤은 그의 도발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칠흑 같은 눈동자로 그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지금 루아 경호 전담하는 게 당신인가?”“맞아. 왜?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신지?”김철웅은 대꾸하면서도 속으로는 대체 왜 자신을 불러냈는지 머리를 굴렸다.구태윤의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일거수일투족이 기품이 흘러넘쳤다.단지 상대방을 쳐다보기만 했을 뿐인데, 공간을 짓누르는 무형의 압박감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괜스레 등골이 오싹했다.“당신이 누구 밑에서 일하든 상관없어. 다만 루아를 지키기로 한 이상, 목숨 걸고 움직여. 그리고 루아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나한테 싹 다 보고하고.”숨 막히는 분위기에 김철웅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끝까지 따져 물었다.“내가 왜 그쪽 말을 들어야 하지?”“신배후가 당신 목숨값에 대한 은혜를 나한테 넘겼거든. 그러니까 내 말 따르는 게 좋을 거야.”구태윤의 말투가 한층 더 서늘해졌다.“난 절대 루아 안 다치게 해. 그 누구도 내 여자 해치는 꼴은 못 보니까.”김철웅이 혀를 찼다.“아주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시네. 이렇게 순애보인 양반이랑 루아 씨는 왜 이혼하려 했을까. 결국 그 잘난 사랑이란 것도 다 가짜였나?”“그건 우리 부부 사이의 일이야.”구태윤의 말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김철웅이라는 남자는 작정하고 자기 신경을 긁어대고 있었다.하지만 신배후가 직접 보증하고 붙여준 놈이니 실력 하나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겠지.그때, 김철웅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더니 곧바로 신배후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배후야.”“그래, 구태윤 만났냐?”수화기 너머로 장난기가 묻어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응,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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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9화

구태윤은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시종일관 여유로운 자세로 담배 한 개비를 조용히 태웠을 뿐이다.희뿌연 연기가 자욱하게 퍼져나가더니 이내 허공으로 흩어졌다.하지만 김철웅은 묘하게 등골이 서늘했다.온몸의 근육이 바짝 굳으며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바로 그 순간, 방금까지 늘어져 있던 남자가 먼저 선수를 쳤다.엄청난 기세로 눈 깜짝할 사이에 그를 향해 돌진했다.기겁한 김철웅이 급히 방어 태세를 취하며 맞받아쳤다.그러나 고작 몇 번의 공격 만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상대는 압도적으로 강했다.게다가 구태윤의 루틴과 보법이 어딘지 익숙했다.치열한 몸부림 끝에 김철웅은 결국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구태윤이 구둣발로 그의 가슴팍을 짓누르고 싸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겨우 그 실력으로 루아 지키겠다고?”거친 숨을 몰아쉬며 헐떡이는 김철웅의 눈에서 조금 전의 경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건 탐색과 의문이었다.“당신, 대체 정체가 뭐야?”구태윤이 발을 들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이제 내 말 따를 마음 좀 생겼나?”김철웅이 일어나 앉아 복잡미묘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난 절대 루아 씨한테 해 안 끼쳐.”“그건 나도 마찬가지야.”구태윤이 다시 소파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던 무시무시한 살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다시 귀공자 같은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지금부터 내가 딱 두 가지만 지시할 테니까 똑바로 들어. 첫째, 최근에 루아 주변에 꼬인 새끼들, 신상 싹 다 털어와. 둘째, 우리 말고 또 다른 세력이 루아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어. 숨어서 움직이는 놈들이니까, 네가 옆에 붙어 있는 동안 이 부분 특히 눈에 불을 켜고 예의 주시해.”김철웅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더니, 한참을 뜸 들이다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알았어.”하지만 이대로 물러서긴 찝찝한지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당신, 대체 정체가 뭐야?”그러나 구태윤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곧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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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0화

박정란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이내 다가온 경호원들이 그녀를 사정없이 밀어붙이며 강제로 차에 태우려 들었다.악을 쓰며 발버둥 치고 울부짖어 봤자 아무 소용 없었다.그제야 뼈저린 후회가 밀려왔다.애초에 구태윤과 정루아의 결혼을 허락하는 게 아니었다.그랬다면 구씨 가문이 이 지경까지 나락으로 떨어지진 않았을 텐데.이게 다 그 발칙한 년 때문이었다.결국 박정란은 억지로 차에 실려 외국으로 쫓겨나듯 떠났다.장옥경은 구태윤에게 전화를 걸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태윤아, 할머니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건 좀 너무하지 않니?”구태윤의 목소리는 무덤덤했다.“그 노인네가 루아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난 이유가 뭔지, 왜 그런 더러운 수작까지 부렸는지 반성이나 하라고 하세요.”장옥경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하지만 루아는 멀쩡하잖아...”“엄마, 그런 소리는 입에 올리지도 마세요.”구태윤의 말투가 더없이 차가워졌다.“설마 할머니랑 같이 외국에서 노후를 보내고 싶으신 건 아니겠죠?”장옥경은 입을 꾹 다물었다.‘얘가 드디어 미쳤구나.’그리고 한참을 침묵한 뒤 불쑥 물었다.“친할머니도 내치는 마당에 왜 네 형수한테는 그렇게 약해빠진 건데? 태윤아, 툭 까놓고 얘기해 봐. 너 설마 정시연 좋아하니?”“제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잖아요.”구태윤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묻어났다.“그때 정시연 아니었으면 난 지진 더미에 파묻혀서 진작에 죽었어요.”장옥경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정루아는 점심때가 다 되도록 바쁘게 일하다 녹음실을 나섰다.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 서서 웃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는 한민혁이 눈에 들어왔다.이내 싸늘한 안색으로 물었다.“무슨 일이죠?”한민혁이 입을 열었다.“대표님이 사모님이랑 같이 점심이라도 한 끼 했으면 하시더라고요. 본가 쪽 일도 전해드릴 겸 해서요.”정루아는 대본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물었다.“그 노인네, 쫓겨났어요?”“네.”한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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