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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사랑해 줘 のすべてのチャプター: チャプター 11 - チャプター 20

45 チャプター

11화

현실감은 이미 안개 너머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여기서 비명을 지르고 도망쳐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이미 자신의 손은 이 아름다운 재앙에 붙잡혀 있었으니까.‘차라리 판타지 소설의 여주인공이 됐다고 믿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겠다.’“그 계약 말인데….”서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운을 뗐다.“너랑 계약하면, 정확히 너와 나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 거야?”“단순해. 나는 너의 소원을 들어주고, 너는 소원을 이룬 대가로 나에게 네 영혼을 넘기는 거지. 그게 전부야. 특별할 건 없어.”펠은 마치 아주 공정한 거래를 제안하는 사업가처럼 무심하게 대꾸했다.하지만 서아는 그 전부라는 말 속에 담긴 섬뜩함을 놓치지 않았다.“그럼, 소원이 이루어지면 어떻게 되는 건데? 도깨비방망이처럼 금 나와라 뚝딱! 하고 소원이 이루어지자마자 바로 죽는 거야? 그러면 소원을 누릴 새도 없잖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서아의 날카로운 질문에 펠의 미간이 단번에 구겨졌다.“도깨비?”그가 불쾌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고작 그런 하급 정령이랑 날 비교하다니, 자존심 상하게. 소원이 즉시 이루어지는 건 맞아. 그 정도 능력도 없으면 인간의 영혼을 가질 자격도 없지. 나 정도 되니까 가능한 일이야.”거만하게 턱을 치켜든 펠의 얼굴에는 태생적인 오만함이 가득했다.신의 곁에 머물던 자의 위엄이 서늘한 광채가 되어 뿜어져 나왔다.서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그래서, 내 영혼은 언제 가져갈 건데…?”“…….”펠이 잠시 말을 멈췄다.그러고는 테이블 너머로 서아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그의 깊은 눈동자가 서아의 시선을 집요하게 옭아맸다.“네가 정해.”“어? 뭘 정해?”“영혼을 내줄 타이밍 말이야.”서아가 멍하니 입을 벌리자, 펠이 나직하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네가 원할 때, 그때 가져가겠다고. 네 영혼.”그것은 자비인 동시에 지독한 유혹이었다.소원을 이루고 난 뒤, 죽음의 공포에 떨며 살 필요가 없다는 뜻인 동시에, 죽음을 선택하는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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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그, 그게 무슨 소리야?”서아는 당황한 나머지 찻잔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악마와의 계약이라면 당연히 영혼을 회수해 가는 기한이 정해져 있을 줄 알았다.그런데 날짜를 본인이 정하라니. 이건 자비라기엔 지나치게 기묘한 제안이었다.“말 그대로야.”“보통 계약은 기한이 있는 거 아니었어? 뭐, 며칠 뒤라든가, 소원이 이루어진 직후라든가!”“맞아. 지금 네가 듣고 있는 게 바로 우리의 계약 기간이야.”펠이 턱을 괸 채 무심하게 대꾸했다.서아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빤히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다른 계약자들한테도 이랬어? 네 영혼을 가져갈 날을 네가 직접 정하라고?”“아니.”단호한 부정이었다.“그러면 왜 나만 예외인 건데?”“넌 소원부터가 이미 예외니까.”펠이 상체를 테이블 쪽으로 좀 더 밀착시켰다.그의 눈동자에 서린 어둠이 서아의 시선을 깊게 파고들었다.“네 소원은 ‘금 나와라 뚝딱’처럼 바로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지금까지의 계약과는 다르게, 이건 내 힘뿐만 아니라 내 ‘노력’이 필요해. 내가 만족하는 수준의 진심과 네가 만족하는 수준의 진심이 똑같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펠이 잠시 말을 멈추고 서아의 반응을 살폈다.“그러니 계약 기간을 미리 정한다는 건 무의미해. 소원이 ‘완성’되는 시점 자체가 유동적이니까.”서아는 반박하려 입을 달싹이다가 이내 말문이 막혔다.그의 말은 지독하게 합리적이었다.물질이 아닌 마음을 거래하는 소원.설령 그가 자신의 모든 진심을 쏟아부었다고 주장한다 해도, 정작 받아들이는 서아 본인이 ‘난 아직 사랑받는 기분이 아니야’라고 한다면 소원은 성립되지 않는다.결국, 이 계약의 마침표를 찍는 권한은 루치펠이 아닌 서아에게 있는 셈이었다.‘그럼 내가 만족하지 않는 이상, 내 영혼은 안전한 건가? 내가 뭘 해야 하는 게 있어? 계약자로서 지켜야 할 의무 같은 거 말이야.”서아는 침착하게 물었지만, 속으론 영혼을 바치는 것 외에 또 다른 끔찍한 대가가 있을까 봐 전전긍긍했다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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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10년이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정말 짧은 시간이긴 하네.”“내가 사는 시간에 비하면 10년은 눈 깜빡임보다도 짧아. 난 내가 언제 태어났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만큼 오래 살아왔거든. 천사로서 지냈던 시간과 지금 이렇게 지내는 시간을 모두 합친다면 수백 년, 아니 수천 년일지도 모르지. 태초에 신이 세상을 빚을 때 우리도 같이 만들어졌다면 말이야.”수천 년.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아득한 세월의 무게가 카페의 평화로운 공기를 짓눌렀다.신이니 세상의 창조니 하는 장엄한 단어들에 압도된 서아는 홀린 듯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그 순간, 펠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단호하고 당당한 눈빛.그 깊고 어두운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서아는 발끝부터 온몸이 저릿해지며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공포와 경외심,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이질적인 매력이 뒤섞여 심장을 옭아맸다.서아는 멍하니 생각했다.‘아… 사람이 무언가에 홀린다는 건, 바로 이런 기분이구나.’악마의 눈에 담긴 태초의 고독이 서아의 마음속으로 소리 없이 침투하고 있었다.“서아. 넌 왜 사랑을 받고 싶은 거지? 단순히 외로워서?”정적을 깨는 펠의 낮은 목소리가 공기 중을 유영했다.서아는 자신을 옭아매는 듯한 그의 깊은 눈동자를 피하지 않았다.아니, 오히려 그 시선 속에 자신을 온전히 던져 넣듯 마주 보며 대답했다.“응. 외로워서.”펠 역시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서아를 응시했다.서아는 떨리는 숨을 삼키며, 누구에게도 꺼내어 본 적 없는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펼쳐 놓았다.“난 고아였어. 부모님이 누군지도 모른 채 보육시설에서 자랐지. 하지만 그 안에서도 나는 늘 혼자였어. 입양을 가서 새 가족을 찾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누구의 선택을 받아본 적이 없었거든. 시설을 나온 뒤에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어.”서아의 덤덤한 목소리가 카페의 낮은 조명 아래로 가라앉았다.“사회에 나와서도 난 눈에 띄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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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그 미소를 마주한 순간, 펠은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수천 년을 살아오며 수많은 인간의 환희와 절망을 지켜보았지만, 이렇게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지는 미소는 처음이었다.‘슬픈 미소란 이런 것을 말하는 건가.’그 엉망진창인 얼굴을 보며 펠은 생각했다.그리고 뇌리를 스치는 단 하나의 단어.‘예쁘다.’그것은 악마의 이성이 내린 결론이 아니라, 본능이 내뱉은 감탄이었다.펠은 두 손을 깍지 껴 턱을 괴더니, 서아의 얼굴 가까이로 천천히 상체를 기울였다.테이블 사이의 거리가 단숨에 좁혀졌다.“무, 무슨 짓이야?”당황한 서아가 몸을 굳혔지만, 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그는 숨결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서아의 눈동자, 붉어진 코끝, 그리고 애써 떨림을 참는 입술을 하나하나 눈에 담듯 빤히 쳐다보았다.마침내 펠의 입술이 열렸다.“예쁘다.”나직하게 깔리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서아의 귓가를 간지럽혔다.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아니, 쿵 하고 바닥 밑으로 내려앉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서아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을 느끼며 펠의 깊은 눈동자 속에 갇혀버렸다.조금 전까지 자신의 초라함을 고백하던 여자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악마의 찬사에 온몸이 달아오른 한 여자만이 그곳에 있었다.“우리의 계약 이행을 위해 연애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데, 넌 어때? 아니면 이렇게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사랑하는 감정이 저절로 생기나?”잘생기면 저런 낯간지러운 말도 부끄럼 없이 뻔뻔하게 내뱉을 수 있는 걸까?서아는 코앞까지 다가온 펠의 얼굴을 피하고 싶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 움직일 수 없었다.마치 강력한 마법에 걸린 것처럼 몸이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펠의 서늘한 숨결이 닿는 거리, 서아는 그 압도적인 미모에 질식할 것 같았다.“너, 넌 그런 부끄러운 말을 참 잘도 한다.”서아는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뺨에서 시작된 열기가 귓불을 타고 목덜미까지 번졌다.분명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개졌을 텐데, 펠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서아를 빤히 응시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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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내가 계약한 인간 중에서 날 이렇게 웃게 만든 건 아마 네가 처음일걸?”펠은 웃음을 멈출 생각이 없는지 계속해서 킥킥거렸다.그가 웃을 때마다 눈가에 서리는 생소한 온기가 서아의 마음을 간질였다.“나 웃기게 한 적 하나도 없어. 도대체 뭐가 그렇게 웃긴다는 거야?”서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뾰로통하게 쏘아붙였다.하지만 펠은 여전히 즐거운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테이블 너머로 몸을 숙여 서아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원하는 소원부터 이미 평범하지 않았거든. 나의 귀여운 계약자님.”펠의 장난스러운 명칭에 서아의 얼굴이 다시금 붉게 물들었다.평화롭고도 기묘한, 두 사람만의 시간이 숲속 카페의 공기 속으로 녹아들고 있었다.***한편, 정적이 감도는 펠의 거처.집사 달봉은 부지런히 거실 청소를 마치고 저녁 준비를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앞치마 끈을 질질 끌며 냉장고 문을 열려던 찰나, 시야 끝에 낯선 그림자가 걸렸다.“아이고! 깜짝이야!”달봉이 가슴을 부여잡으며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식탁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한 남자 때문이었다.“뭘 그렇게 놀라?”“아니, 갑자기 그렇게 나타나면 사람이 안 놀랍니까? 심장 떨어질 뻔했네!”“나 갑자기 나타난 거 아닌데. 조금 전부터 여기 계속 앉아 있었어.”남자는 제멋대로 냉장고에서 꺼낸 사과를 ‘아삭’ 소리 나게 베어 물었다.그의 이름은 엘.펠과는 정반대의 기운을 뿜어내는 존재였다.“엘 님! 오시는 거 반기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 왜 자꾸 멋대로 들어오시는 거예요? 멀쩡한 현관문은 장식입니까?”“네가 창문을 활짝 열어놨길래 그냥 들어왔지.”엘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등 뒤의 날개를 활짝 펼쳤다.펠의 검은 날개와는 대조적으로, 눈이 시릴 만큼 새하얗고 깨끗한 깃털이 주방의 조명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그 화려함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고개를 숙이게 할 만큼 성스러웠으나, 달봉에게는 그저 ‘청소 거리’일 뿐이었다.“이봐, 봉봉. 내가 올 줄 알고 일부러 창문 열어 둔 거 아니었어?”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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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서아는 미동도 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가로등 불빛이 규칙적으로 차창을 스치며 서아의 얼굴 위로 빛과 그림자를 번갈아 드리웠다.‘이게 정말 현실인 걸까.’적막함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감각이 무뎠다.어젯밤, 낯선 남자와 마주쳤을 때부터 이미 현실의 궤도는 어긋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악마의 날개, 타락 천사 루시퍼, 그리고 영혼을 대가로 한 연애 계약까지.비현실적인 정보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진 탓에 뇌는 아예 사고를 정지해 버린 듯했다.멍하니 시선을 던지고 있었지만, 빠르게 뒤로 밀려나는 야경은 서아의 눈동자에 그 어떤 잔상도 남기지 못했다.펠은 그런 서아를 가만히 내버려두었다.억지로 대화를 시도하거나 장난을 치지도 않았다.평범한 인간인 그녀에게 오늘 하루가 얼마나 가혹한 충격이었을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펠의 긴 손가락이 오디오 다이얼 위를 부드럽게 스쳤다.이윽고 조용한 차 안을 채운 것은 이루마의 ‘River Flows In You’였다.잔잔하면서도 애잔한 피아노 선율이 강물처럼 흘러와 차 안의 정적을 메웠다.규칙적인 건반의 떨림이 서아의 날카로워진 신경을 보듬듯 차분하게 내려앉았다.음악 소리만이 가득한 공간 속에서, 서아는 비로소 얼어붙었던 숨을 작게 내뱉었다.여전히 모든 것이 꿈만 같았지만, 옆자리에서 핸들을 잡은 펠의 존재감만큼은 음악의 선율보다 더 생생하게 전해져 오고 있었다.***달봉은 거실 벽에 기댄 채, 제집인 양 소파에 늘어져 있는 엘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훑었다.주인도 없는 빈집에서 반나절이나 버티고 앉아 있는 꼴이 여간 눈에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진짜 주인이라도 되는 듯 이것저것 시켜 먹으며 자신을 부려 먹는 것도 불쾌했지만, 가장 참기 힘든 건 거절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어찌 됐든 엘은 자신이 모시는 펠의 몇 안 되는 ‘지인’이었으니까.띠리릭.고요한 정적을 깨고 도어락이 해제되는 기계음이 들렸다.그 소리가 채 끝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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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하지만 그녀는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차 문을 닫고 멀어지는 그 뒷모습까지도 끝내 침묵을 지켰다.가벼운 인사조차 없이 사라져 버린 그녀의 빈자리를 보며 펠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답답함에 목덜미가 뻐근해졌다.‘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윤서아.’자신의 존재가 공포였을까, 아니면 경멸이었을까.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여기에 불쑥 찾아온 엘의 존재까지 더해지자, 짜증은 분노로 치달았다.엘이 서아의 존재를 눈치채는 건 이제 시간문제다.그 녀석은 펠이 힘을 되찾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놈이었다.지금까지는 별걱정이 없었다.인간의 욕망은 대개 돈 앞에서 무릎을 꿇었고, 그 비릿한 물욕 싸움에서 펠은 단 한 번도 엘에게 밀린 적이 없었으니까.그러나 서아는 달랐다.그녀의 소원은 돈이 아니라 사랑이다.만약 엘이 그녀 앞에 나타나 대신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유혹한다면?천사의 탈을 쓰고 그녀의 그 지독한 외로움을 공략한다면?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아득한 수천 년의 세월 동안 느껴본 적 없는 격렬한 분노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들끓었다.“절대 안 뺏겨.”두 주먹을 불끈 쥔 펠의 눈동자 속에서 검은 불꽃이 일렁였다.***무슨 정신으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서아는 가방도 던져두지 못한 채 침대 위로 대자로 뻗어버렸다.천장의 형광등 불빛이 유난히 시리게 느껴졌다.머릿속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백지상태였다.어젯밤 펠과의 첫 만남부터 조금 전 차에서 내리기까지의 일들이 마치 끊어진 필름처럼 머릿속을 부유했다.“진짜 꿈인가?”서아는 홀린 듯 손을 뻗어 제 볼을 살짝 꼬집어 보았다.찌릿한 통증이 신경을 타고 선명하게 전해졌다. 꿈이 아니었다.“현실인데, 현실이 아니야.”다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찰나였다.환상처럼 펠의 웅장한 검은 날개가 천장을 가득 채우며 눈앞에 펼쳐졌다.“악!”서아가 소스라치게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러나 다시 올려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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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지긋지긋한 인생이었다.평생을 혼자라는 감옥에 갇혀 무채색의 풍경만 보고 살 줄 알았다.그런데 오늘, 그 지루한 일상이 일순간에 무너져 내렸다.서아는 눈을 감고 오늘 하루를 천천히 되짚었다.처음 본 남자의 커다란 손이 자신의 손을 감싸 쥐었을 때의 그 낯선 온기.어두운 극장 안에서 어깨를 스치며 영화를 보던 긴장감.귀동냥으로 들으며 입맛을 다셨던 그 근사한 파스타의 맛.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던 노을을 배경으로 즐겼던 드라이브와 향긋한 얼그레이 티의 향기까지.그리고 그 모든 장면의 중심에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답던 그 남자, 펠이 있었다.“하아.”서아는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멈춘 줄 알았던 심장이 다시금 제멋대로 요동치기 시작했다.그가 잡았던 손끝이 여전히 저릿한 착각이 들었고, 심장 언저리에서는 정체 모를 감정이 뜨거운 거품처럼 몽글몽글 피어올랐다.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신데렐라가 된 기분일까, 아니면 정말로 로맨스 판타지 소설 속 주인공이 된 걸까.몸이 붕 떠오르는 듯 어지러운 부양감이 서아를 덮쳤다.하지만 환상 뒤에는 언제나 서늘한 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그 거대한 검은 날개.칠흑 같은 어둠을 형상화한 듯한 그 위용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평범한 사람과 손을 잡는 것도 서툰 내가, 인간의 영혼을 거두는 타락천사와 연애라니.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전개에 서아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과연 우리가 연애라는 걸 할 수나 있을까?사랑이 무엇인지, 그 간지러운 감정이 대체 어떤 경로로 생겨나는 것인지조차 나도, 그 남자도 전혀 모르는데.사랑을 모르는 두 존재가 만나 진심 어린 사랑을 해보겠다고 무모하게 덤벼든 꼴이었다.한 명은 영혼을 지키기 위해, 또 한 명은 영혼을 갖기 위해.“결국 다 내 소원이 문제지, 뭐.”서아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며 자책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하지만 이불 속 어둠보다 더 짙게 머릿속을 맴도는 건, 무표정한 얼굴로 "예쁘다"라고 말하던 펠의 낮은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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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봉! 밥 먹자.”“아이고, 깜짝이야! 루루 님! 루루 님까지 왜 자꾸 창문으로 넘나드시는 겁니까?”식탁을 차리던 달봉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외쳤다.멀쩡한 현관문을 두고 굳이 창문으로 들어온 펠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네가 문단속을 잘하고 있는지 확인 차.”달봉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식당으로 향하는 펠의 뒤를 따라갔다.“루루 님, 확실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분명히 문단속을 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저 거실 베란다 창문으로 날아서 외출하신 건 루루 님이시라고요!”“내가 나가고 난 뒤에 바로 문단속을 했어야지. 그 사이에 엘이 들어왔으면 어쩌려고 했어?”펠이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억울함에 답답함까지 더해진 달봉이 제 가슴을 탁탁 쳐댔지만, 고집불통 상전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였다.“됐고, 밥이나 먹자.”“네, 네. 드셔야죠.”달봉이 뾰로통하게 대답하며 수저를 놓았다.한참 식사를 이어가던 중, 펠이 갑자기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달봉을 불렀다.“야, 봉.”“네?”국 한술 뜨려던 달봉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펠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고 진지했기 때문이다.“너, 사랑해봤냐?”“사랑이요?”“그래. 사랑.”달봉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며 답했다.“당연히 해봤죠! 제가 환생만 다섯 번을 했습니다. 한 생에 가볍게 60살까지만 살았다고 쳐도 도합 300년입니다, 300년! 그 긴 세월 동안 그 뜨거운 걸 안 해봤겠습니까?”“그거… 어떻게 하는 거냐?”달봉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루루 님, 설마 좋아하는 여자라도 생기신 겁니까?”“아니! 좋아하긴 무슨! 그 인간이 날 좋아하면 좋아했지, 이 내가! 내가 감히 누굴 좋아해?”펠이 예민하게 반응하며 버럭 소리를 지르자, 달봉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번졌다.당황한 펠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변명을 덧붙였다.“아, 아니라고! 소원 때문이야, 소원.”“소원이요?”“그래. 자기를 사랑해 달라는 게 계약 조건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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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오늘 서아의 일과는 오전 편의점 타임으로 시작해, 오후 치킨집 서빙으로 이어지는 강행군이었다.원래대로라면 주말 야간 PC방 아르바이트까지 총 세 개의 일을 전전해야 하지만, 평일인 오늘은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편이었다.주말에는 치킨집 알바가 따로 있어 쉬는 날이었지만, 서아는 그 비어버린 시간조차 견디지 못하고 PC방 아르바이트로 메꾸어 제 몸을 혹사시키고 있었다.오전의 편의점은 평소처럼 한산했다.유동 인구가 적은 외진 길목에 자리 잡은 탓에 다른 지점보다 훨씬 여유로웠지만, 오늘따라 서아는 그 정적이 고통스러웠다.차라리 정신없이 바빠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기를 간절히 바랐다.‘자꾸 왜 떠오르는 거야, 대체.’머릿속에는 자꾸만 펠의 잔상이 맺혔다.아침 햇살을 등지고 전봇대에 기대어 있던 모습, 거대한 검은 날개를 펼치며 앞을 막아서던 비현실적인 광경, 그리고 장난스럽게 건네던 목소리까지.서아는 잡념을 털어내려 일부러 몸을 바쁘게 움직였다.굳이 건드릴 필요 없는 음료 진열장의 줄을 자로 잰 듯 다시 맞추고, 출근하자마자 반짝이게 닦아둔 테이블을 괜히 한 번 더 박박 문질러 닦았다.할 일을 억지로 만들어내며 몸을 혹사시켰지만, 생각이라는 놈은 비웃기라도 하듯 틈만 나면 비집고 들어왔다.이미 그에게 홀린 기분이었다.사실 어제저녁, 그와의 계약에 대해 어느 정도 결론을 내렸었다.'연애는 생략해도 상관없다'라고 스스로 합의를 보았고, 펠이 인간이 아닌 초월적 존재라는 사실도 눈앞에서 확인했으니 믿기지 않아도 받아들이면 그만인 일이었다.하지만 서아는 스스로가 펠을 떠올리는 것조차 강렬하게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왜일까.그 의문에 대한 답은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았다.그저 그를 떠올리면 가슴 한구석이 일렁이며 심란해질 뿐이었다.평생을 생존에만 몰두하며 딱딱하게 굳어버린 마음의 벽 사이로, 펠이라는 존재가 묘하게 간지러운 몽글몽글한 기운을 불어넣고 있었다.평생 받아본 적 없는 누군가의 일방적인 관심과 아침 인사 때문이었을까
last update最終更新日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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