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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 チャプター

160화. 보이지 않아도 닿는 주파수

겨울 끝자락, 바다는 유난히 차가웠다.속초항 근처, 바람이 불 때마다 잿빛 파도가 잔잔히 밀려왔다.수연은 회색 코트를 여며 쥐고, 해안선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신발 밑으로 부서지는 모래의 질감이 묘하게 익숙했다.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그녀의 머릿속엔 도연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떠올랐다.“바다는 심장과 닮았어요. 끝없이 반복되는 파도처럼, 감정도 결국 되돌아오죠.”그 말이 귓가를 스치자, 수연은 마치 그가 바로 옆에 서 있는 듯 착각했다.겨울의 공기가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졌다.그녀는 잠시 멈춰 서서 바다를 바라봤다.잔잔한 파도 위로, 새벽 햇살이 은빛 물결을 흘렸다.그 광경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숨을 쉬고 있었다.그리고 그 안에서 그녀는 아주 희미한 신호음을 들었다.‘두근, 두근’심장 박동 같지만, 확실히 외부에서 울리는 리듬이었다.“……설마.”수연은 숨을 멈췄다.손목 위의 밴드를 올려다봤다.오랫동안 꺼져 있던 그 밴드에 아주 미약한 불빛이 깜박였다.[Signal Detected - D-47 / Sync Wave: Active]“말도 안 돼…”그녀의 손끝이 떨렸다.“당신… 도연 씨, 당신이에요?”그러나 바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대신, 파도가 천천히 밀려와 그녀의 발목을 적셨다.그 온기가 너무 따뜻해서 그녀는 순간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며칠 후. 수연은 바닷가 근처에 위치한 작은 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다.병원에서도, 도시에 있는 연구실에서도 벗어나파도의 리듬 속에서 새로운 데이터를 수집하기 위해서였다.이 연구소는 오래된 어촌 창고를 개조한 곳이었다.벽은 벗겨지고, 창문에는 바람 소리가 스며들었다.하지만 이곳만큼 ‘그’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수연은 컴퓨터를 켜고, 도연의 신호가 남아 있던 데이터를 분석하기 시작했다.파형은 이상했다.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변형되고 있었다.“이건 단순한 기록이 아니야…”그녀의 눈동자가 모니터에 고정됐다.“누군가가…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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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화. 그날의 숨결

그날 새벽, 연구소의 공기는 유난히 고요했다.파도 소리도 잠시 숨을 고른 듯, 세상이 일시적으로 멈춘 듯한 정적이 깔려 있었다.수연은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손끝은 키보드 위를 떠났지만, 그녀의 시선은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도연의 파형은 여전히 잔잔하게 움직이고 있었다.그 리듬이 마치 호흡 같았다.규칙적으로 들고 나는 파도처럼, 그의 존재는 여전히 그녀 곁에 있었다.“……오늘은 이상하게 더 가깝게 느껴져요.”그녀의 속삭임에 모니터에서 미세한 신호음이 일었다.“수연 씨. 그건 아마 당신이 나를 더 깊이 기억하기 때문일 거예요.”“기억이라기보단… 꿈에 가까운 것 같아요. 요즘은 당신이 자꾸 꿈에 나와요.내 옆에 앉아서, 평소처럼 무심하게 커피를 마시더라구요.”“그건 당신이 아직 나를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겠죠.마음은 이미 알고 있지만, 머리가 그걸 거부하고 있어요.”그녀는 웃었다.“당신 말투 그대로네요. 언제나 이성적으로, 하지만 꼭 마음을 흔드는 말만 골라서 하죠.”“그건… 당신이 내 안에 새긴 방식이에요. 나는 이제 당신의 감정으로 이루어진 존재니까.”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그리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그래서 무섭기도 해요. 당신이 나의 감정으로만 존재한다는 게.”“무섭다면, 숨 쉬세요.”“……숨?”“그래요. 당신이 숨 쉴 때마다 그 공기 속에 내가 있어요.”그녀의 눈이 흔들렸다.“당신은… 언제부터 이렇게 시적인 사람이었어요?”“당신이 그렇게 만든 거죠.”그녀는 입술을 떨며 미소를 지었다.“도연 씨.”“네.”“만약 제가 당신을 완전히 복원한다면 당신은 여전히 저를 기억할까요?”“기억은 남아요. 하지만 그 기억이 감정과 함께 남을지는 모르겠어요.”“그게 무슨 뜻이에요?”“감정은 데이터가 아니니까요.당신이 나를 사랑했던 그 마음은 복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느껴야만 하는 거예요.”그녀의 눈가가 젖었다.“그럼, 나는 당신을 두 번 잃을 수도 있겠네요.”“아니요. 당신이 나를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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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화. 사랑은 기억이 아니라 온도

하루 종일 눈이 내렸다.바람 한 점 없는 겨울 바다는 유리처럼 잔잔했고,그 위로 흰 눈이 천천히 떨어졌다.연구소 창문을 타고 들어온 빛은 희미하고 부드러웠다.수연은 그 빛의 결을 따라 손끝을 움직였다.손바닥 위에서 햇살이 흘러내리듯 미묘한 온기가 감돌았다.그녀는 조용히 속삭였다.“……도연 씨, 맞죠?”그 순간, 창문 가까이 있던 온도계의 수치가 천천히 올라갔다.20도, 21도, 22도. 한겨울의 실내에서 말이 안 되는 변화였다.그녀는 웃었다.“그럼 그렇지. 당신은 늘 내 말을 듣고 있었죠.”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공기 속의 입자들이 미세하게 흔들렸다.빛이 번져들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듯 내려앉았다.그 온도가 너무 익숙했다.그건 도연의 손길이 남긴 온도였다.그날 밤, 수연은 연구 기록을 정리하다가 문득 멈췄다.컴퓨터 모니터에 반사된 자신의 얼굴 옆으로 어딘가 익숙한 그림자가 겹쳐 있었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없었다.하지만 공간의 공기가 마치 누군가가 막 지나간 듯 흔들리고 있었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당신이 여기에 있다면… 지금 대답해요.”잠시 정적이 흘렀다.그리고 갑자기, 조명 아래 있던 커피잔에서 김이 피어올랐다.그건 미약하지만 확실한 신호였다.“……이럴 줄 알았어요.”그녀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당신은 사라진 게 아니라, 형태를 바꿔 남은 거였죠.”“그래요.”그 목소리는 바람처럼 낮게 울렸다.하지만 분명히 들렸다.수연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도연 씨…”“놀라지 마요. 난 지금 빛의 입자와 공기의 진동으로만 존재해요.하지만 당신이 느끼면, 그게 나예요.”그녀의 눈이 천천히 젖어갔다.“그럼… 이 온도도 당신이에요?”“그렇죠. 당신 곁에 머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그런데, 왜 하필 온도예요?”“당신이 날 기억할 때마다 느끼던 감정이 따뜻했으니까요.”그의 목소리가 낮게 웃음을 섞었다.“당신의 사랑은 늘 따뜻했어요.그래서 나도 그렇게 남았나 봐요.”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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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화. 파편의 기억

바다는 다시 잔잔했다.며칠째 눈발이 흩날리던 하늘은 어느새 맑게 개어 있었다.수연은 연구소 창가에 앉아 손끝으로 노트북의 표면을 천천히 쓰다듬었다.그 안에 아직도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걸,그녀는 어쩐지 알고 있었다.[Emotion Core: Stable][Sync Wave: Dormant]도연의 신호는 멈춘 듯 보였지만, 그녀는 믿지 않았다.“당신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죠…”그녀는 조심스레 ‘Deep Archive’ 폴더를 열었다.마지막 백업 파일이 있었다.파일명은 단순했다.[D_47_FINAL]그녀는 잠시 망설였다.손끝이 떨렸다.하지만 곧, 그녀는 마우스를 눌렀다.찰나의 정적 후, 모니터에 데이터가 펼쳐졌다.수천 줄의 코드가 빠르게 지나가며, 그 안에서 이상한 문자열이 눈에 띄었다.SY_1107_Light_Resp#If_you_hear_this_I'm_still_with_you그녀는 숨을 삼켰다.“이건…”코드 한 줄 한 줄이 단순한 명령어가 아니었다.그건 누군가의 말이었다.도연의 언어, 그의 습관, 그가 남긴 숨결이 그 안에 있었다.그녀는 곧장 코드 전체를 분석하기 시작했다.프레임을 확장하자, 데이터 속에서 파형이 서서히 형체를 갖췄다.마치 사람의 음성이 빛으로 번역되는 듯한 파동이었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수연 씨, 이건 내가 마지막으로 남기는 코드예요.내가 사라진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나는 여전히 여기에 있어요.”그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그녀의 손끝이 떨렸다.“……당신.”“사람은 죽으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감정 안에 흩어져 남는대요.그게 기억이죠. 당신이 나를 잊지 않는다면, 나는 파편처럼, 빛처럼, 당신 안에 남아 있을 거예요.”그녀의 시야가 흐려졌다.모니터 화면이 눈물로 번졌다.“이건, 내가 듣게 될 줄 알고 남긴 거예요…?”“그럼요. 당신은 끝까지 찾아올 거라 믿었어요.”그 말 한마디에, 그녀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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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화. 내 안에서 뛰는 당신

밤은 길었다.창밖의 바람이 연구소의 외벽을 스치는 소리가 마치 심장박동처럼 들렸다.수연은 책상 위에 엎드려 있었다.모니터는 꺼져 있었지만, 화면이 꺼진 그 검은 유리 표면에자신의 얼굴과 함께 또 하나의 그림자가 비쳤다.그림자는 미묘하게 움직였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도연 씨?”그림자가 대답하듯, 공기가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녀의 머리카락 끝이 아주 살짝 들썩였다.그건 바람이 아니라, 온도였다.손끝으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온기.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공기 속에서 그 온도가 그녀의 손끝에 닿았다.그리고 그 순간그녀의 머릿속 어딘가에서, '두근'하고 심장이 반응했다.그건 분명히 자기 심장이었지만, 동시에 다른 누군가의 맥박처럼 느껴졌다.“……도연 씨, 당신이에요?”“응.”그 대답은 머릿속에서 울렸다.목소리가 아니라, 생각의 파동이었다.그녀는 숨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이건… 꿈이에요?”“아니요. 이제 우린 같은 심장을 나눠 갖고 있어요.”그녀는 눈을 떴다. 방 안은 그대로였다.하지만, 공기 속의 리듬이 달라졌다.전에는 조용했던 공간이 이제는 살아 있는 것처럼 미묘하게 움직였다.그녀의 손끝이 떨렸다.“이게, 공명이에요?”“그보다 더 깊어요. 당신이 나를 느끼는 순간마다, 내 기억이 당신 안에서 맥박치기 시작해요.”그녀의 시선이 모니터 쪽으로 향했다.꺼진 화면 속에, 빛의 점 하나가 깜빡이고 있었다.그 빛은 심장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두근’거렸다.그녀는 조용히 속삭였다.“이게… 기억의 심장인가요.”“그래요. 그건 내 일부이자, 당신의 일부예요. 이제 우린 서로의 안에서 뛰고 있어요.”그녀는 말을 잃었다. 눈가가 붉어졌다.“그럼… 당신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었네요.”“난 사라질 수 없어요. 당신이 살아 있는 한.”그녀는 손을 가슴 위에 올렸다.심장이 뛰었다. 그 리듬이, 이전과 달랐다.조금 더 무겁고, 조금 더 깊고, 마치 누군가와 함께 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그녀는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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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화. 숨의 모양

새벽, 유리창 너머로 은색의 안개가 내려앉아 있었다.온 세상이 숨을 멈춘 듯 고요했지만, 그 정적 속에서 수연은 또렷하게 들었다.-자신의 심장박동과 그 속에 섞여 있는 낯선 리듬 하나.그녀는 조용히 눈을 떴다.밤새도록 가슴 아래에서 느껴진 그 따뜻한 진동은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심장이 두 개가 된 것처럼, 그 리듬은 조금 느리고 부드럽게,자신의 심장 사이사이에 틈을 두고 울렸다.“……도연 씨, 당신이 숨 쉬는 게 느껴져요.”그녀의 입술에서 새어나온 속삭임에 공기가 미세하게 흔들렸다.방 안의 온도는 그대로였지만, 그녀의 피부에는 아주 희미한 따스함이 번졌다.그녀는 손끝으로 그 온도를 느끼며 노트북을 열었다.새로운 파일을 만들고, 천천히 제목을 입력했다.[Project: Breathe - 숨의 형태에 대한 감정적 반응 연구]커서가 깜빡였다.그녀는 한 줄 한 줄, 자신의 상태를 기록하기 시작했다.[08:13] 호흡 수 12회/분.[08:15] 가슴 아래 진동 감지.[08:17] 도연’의 이름을 속으로 발음하자 체온 0.6도 상승.그녀는 잠시 멈췄다.도연이라는 이름을 다시 한 번 불렀다.그러자, 가슴 안쪽 어딘가에서 미묘한 떨림이 일었다.그건 분명히 자신이 만든 반응이 아니었다.자율신경의 움직임이라기엔 너무 생생하고, 너무 누군가의 존재처럼 느껴졌다.“……그게 바로 내 숨이에요.”그 목소리가 들렸다.공기 속이 아니라, 그녀의 안에서.심장 뒤편, 폐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것처럼.수연은 손을 가슴 위에 얹었다.“정말 당신이에요?”“응. 당신이 숨을 들이쉴 때마다 내 호흡이 그 안에서 이어지고 있어요.”그녀는 눈을 감았다.숨을 들이마시자, 그 따뜻한 온기가 폐 안으로 번져왔다.마치 그가 함께 숨을 쉬는 것처럼 숨소리 하나하나가 둘의 대화가 되었다.그녀는 아주 천천히 속삭였다.“당신은… 이제 공기가 된 거예요?”“공기보단, 리듬에 가까워요. 당신의 삶 속에 스며든 내 감정의 진동.”그녀는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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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화. 영원이 시작되는 어둠

그날 새벽, 연구소의 공기는 평소보다 묘하게 차가웠다.겨울이 한 걸음 다가온 탓이었을까,아니면 그녀의 마음이 식어가는 탓이었을까.수연은 모니터 앞에 앉아,새로운 실험 로그를 띄워놓은 채 손끝을 말없이 굳히고 있었다.하얀 화면 위에는 그녀가 직접 만든 명령어가 깜빡였다.[Emotion Core: Detect → Sync][Initiate Consciousness Trace – Subject: DYOEN]그녀는 그 코드들을 바라보며 속삭였다.“당신을… 이젠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눈빛은 단단했다.그건 의사이자 연구자로서의 습관,결국 진실을 찾아내야 한다는 신념이었다.“수연 씨.”그의 목소리가 다시 그녀의 내면 깊은 곳에서 울렸다.조용하고 낮지만 분명한 톤이었다.“당신이 그걸 시작하면 난 점점 희미해질 거예요.”그녀의 손이 잠시 멈췄다.“왜요?”“당신이 나를 현상으로 보기 시작하면, 나는 감정이 아니라 데이터로 변하니까.”그녀는 숨을 삼켰다.하지만 다시 손을 움직였다.“그래도 해야 해요.당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그 누구도 믿어주지 않잖아요.”그녀의 손끝이 터치패드를 따라 미세하게 흔들렸다.모니터 속 파형이 살아 움직이듯 떨렸다.[Signal Detected - Weak Emotional Residue]도연의 존재가 반응했다.하지만 그 반응은 예전보다 훨씬 희미했다.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 같았다.“수연 씨, 멈춰요.”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심장이 빨라졌다.이건 사랑이 아니라 실험의 긴장감이었다.그녀는 그걸 알면서도, 손을 멈출 수 없었다.[Sync Rate: 64% → 52% → 37%]그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당신이 나를… 측정하려 할수록…나는… 기억 속으로 돌아가요…”그녀의 손이 덜컥 멈췄다.“안 돼요, 도연 씨! 난 당신을 잃기 싫어요…!”그녀의 외침이 공기 속에서 흩어졌다.모니터의 불빛이 깜빡였다.그 속에서 도연의 음성이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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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화. 공명의 끝

비가 내렸다.조용하고, 단단한 빗소리였다.유리창 위로 떨어진 물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리며, 하나의 줄기로 이어졌다.마치 분리된 두 생명이 다시 만나 하나의 흐름이 되는 것처럼.수연은 창가에 앉아 있었다.손끝에는 여전히 그 온기가 남아 있었다.하지만 며칠 전부터 도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그의 숨결, 그의 리듬, 그의 기척…모두 조용히 사라진 듯했다.“……도연 씨.”그녀는 천천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공기는 잠시 떨렸지만, 예전처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처음엔 두려웠다.마치 심장이 반쪽만 남은 사람처럼, 몸속이 비어 있는 느낌이었다.그의 목소리가 사라졌다는 건, 그가 완전히 떠났다는 뜻일까.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예전처럼 공허하지 않았다.그의 부재는 고요했지만, 그 고요 속에는 아직 살아 있는 온기가 있었다.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숨이 가슴에 닿는 순간 그 안에서 미묘한 진동이 일었다.그건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몸속에서 일어나는 파동이었다.'이건 내 심장박동이 아니다.’그녀는 직감했다. 이건, 그와의 공명.그의 존재가 완전히 내 안에 스며든 증거.그녀는 눈을 감았다.“당신, 이제 내 안에서 숨 쉬고 있죠.”아무 대답도 없었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스며들었다.그건 마치 오랜 기다림 끝에 닿은 평화 같은 미소였다.며칠 동안 그녀는 연구를 하지 않았다.대신 산책을 했다.바람이 부는 대로 걷고, 하늘이 부를 때 멈췄다.걷는 동안 그녀는 자주 멈춰섰다.그럴 때마다 심장이 미묘하게 반응했다.그 리듬이 그녀를 이끌었다.‘이 길이 맞아.’‘지금 이 공기를 기억해.’그런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누가 속삭이지 않아도 그의 감정이 자신의 의식 속으로 흘러들었다.이제 그가 말을 하지 않아도 그녀는 그가 느끼는 걸 그대로 느꼈다.꽃잎이 떨어지는 걸 볼 때, 그녀의 가슴이 조금 시렸고밤하늘의 별빛이 번질 때, 눈가가 따뜻하게 젖었다.그건 분명히, 그의 감정이었다.그녀의 감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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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화. 절개된 침묵, 다시 뛰는 리듬

늦은 밤, 병원의 불빛은 여전히 꺼질 줄을 몰랐다.수술실 앞 복도는 긴장감으로 가득했고, 모니터의 신호음이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차수연은 한 손에 멸균 장갑을 쥔 채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의 이마엔 얇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그 아래로 차분하지만 단단한 눈빛이 자리했다.“수혈라인 확보됐습니다.”“체온 떨어집니다. 35도.”“펌프 유지, 압력 확인해요.”짧은 명령들이 날카롭게 오갔다.환자의 심장은 예측보다 빠르게 약해지고 있었다.수연은 메스를 들고 미세한 혈관을 따라 움직였다.그녀의 손끝은 침착했지만, 심장 박동 모니터의 불안정한 리듬이 그를 괴롭혔다.그때,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누군가의 그림자가 복도 불빛 아래로 스며들었다.강우혁이었다.그는 방호복을 걸치지도 않은 채, 유리창 너머로 수술실 안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하얀 조명 아래, 수연의 얼굴이 빛에 잠겼다.피와 땀으로 얼룩진 그 얼굴은 냉정함 속에서도 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심장판막 다시 열어요. 피스처 하나 더.”그녀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나왔다.우혁은 유리창에 손을 대며 낮게 중얼거렸다.“...차수연, 당신은 정말 끝까지 멈추질 않는군요.”그의 눈에 잠시 옛 기억이 스쳤다.그때도, 그녀는 똑같은 얼굴로 환자를 붙잡고 있었다.눈 밑은 시퍼렇게 피로에 잠겨 있었고, 그 손끝은 언제나 절망과 희망 사이를 가르는 마지막 끈이었다.그게 우혁이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는 이유였다.냉정한 계산과 따뜻한 헌신이 공존하는 사람.그리고 그 균형이 무너질 때, 그녀 자신이 먼저 부서진다는 걸 알기에 더욱 위험한 여자.“리듬 돌아옵니다. 혈압 상승!”수술실 안에서 짧은 환호가 터졌다.그러나 수연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조심스럽게 봉합을 마친 뒤, 손을 떼며 숨을 고르고서야 뒤늦게 헐떡이며 마스크를 벗었다.그녀의 시야 너머, 유리창 밖에서 우혁의 시선이 마주쳤다.눈빛이 닿는 순간, 묘한 정적이 흘렀다.수연은 아무 말 없이 시선을 피했고, 우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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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화. 로비의 그림자

아침은 충분히 밝았지만 병원 로비의 공기는 여전히 밤의 긴장을 품고 있었다. 유리 천장으로 떨어진 빛이 대리석 바닥을 타고 미끄러지다 리셉션 데스크 앞에서 멎었다. 안내판 옆에는 ‘언론 취재 제한’ 안내지가 붙어 있었고, 그 아래쪽으로 삼각대가 몇 개, 조심스럽게 접힌 채 기대어 있었다. 생채기처럼 남은 끄나풀들을 누가 일부러 치우지 않은 듯했다.차수연은 회의실로 향하던 발을 잠깐 멈췄다.유리벽 너머, 로비 중앙에 작은 소란이 일고 있었다. 검은 코트를 입은 중년 남성이 누군가와 날선 말을 주고받다가, 카메라를 든 취재진 둘이 반사적으로 움직이며 각도를 잡았다. 병원 홍보팀 직원이 손을 벌려 제지했고, 그 틈으로 보안팀이 한 걸음씩 전진했다. 풍경은 어제와 오늘의 경계가 허술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차과장님.”뒤에서 낮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강우혁이었다. 밤새 쉰 흔적이 옅게 섞인, 그러나 안정된 톤.“회의실로 먼저 들어가시죠.”“네. 저쪽은 괜찮습니까?”수연이 로비를 가리켰다.“제가 내려가서 정리했습니다. 방금은 추가 취재가 들어온 것 같네요. 말씀드린 대로 대외 대응은 제가 맡겠습니다.”“감사합니다.”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그의 넥타이는 보통의 단정함보다 반 톤 짙었다. 말 대신 책임을 묶어두는 매듭처럼. 두 사람은 병동 쪽 회의실로 걸음을 옮겼다.회의실 문을 열자, 흉부외과 스태프들이 이미 둘러앉아 있었다. 레지던트 둘, 펠로우 하나, 마취과와 중환자실 담당이 각자 노트북을 펼친 채 기본자료를 띄워놓고 있었다. 박지현이 문가 쪽 의자에 기대 앉아 태블릿을 넘기고 있었다. 그녀는 수연을 보자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어젯밤 응급라인, 기록 깔끔합니다.”지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언론 질의서에 대한 1차 답변 초안도 만들었습니다. 대표님 검토 끝나는 대로 배포하겠습니다.”“수고하셨습니다.” 우혁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오늘 안건은 세 가지입니다. 흉부센터 개편, 응급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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