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대표님, 심장이 위험합니다.: Chapter 211 - Chapter 220

256 Chapters

210화. 심장이 먼저 기억한 이름

늦은 오후의 햇살이 병원 정원 벤치 위로 길게 내려앉았다.바람은 부드럽게 불었고, 벚꽃잎 몇 장이 아직도 흩날리며 잔잔히 사람들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그 사이, 차수연은 진료복 대신 얇은 베이지색 코트를 걸치고 앉아 있었다.그녀의 시선은 멀리 벤치 맞은편, 한 남자를 향해 있었다.강우혁.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엔 미묘한 그늘이 있었다.마치, 잃어버린 무언가를 본능적으로 기억하려는 사람처럼.“요즘은 잠 잘 자요?”그녀의 물음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많이요. 이상하게도 꿈은 꾸는데, 그게 현실 같아요.낯선데 익숙하고, 아픈데 따뜻한… 그런 꿈.”그녀는 미묘하게 눈을 피했다.그의 꿈 속에는 분명 자신이 있을 터였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었다.“그럼 좋은 거네요.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는 거일 수도 있어요.”“기억이라…”그는 잠시 말끝을 흐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교수님은요. 기억보다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해요?”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감정이요. 기억은 머리에 남지만, 감정은 몸에 남아요. 손끝이나 심장 같은 데에.”그는 그 말을 곱씹듯 되뇌었다.“감정은 몸에 남는다…”그리고 이내 조용히 웃었다.“그래서일까요? 당신 손을 잡을 때마다 심장이 너무 요란하게 뛰어요.”그녀는 숨을 삼켰다.그 말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다.그의 표정엔 그때와 똑같은 진심이 서려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그건… 좋은 증상이에요.”“그럼 나, 완치에 가까워졌네요.”그가 웃자, 그녀의 마음은 아프게 쿵 내려앉았다.며칠 뒤, 우혁은 재활 일정을 마치고 병원 근처의 카페에서 수연을 기다리고 있었다.커피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유리창에 흐릿한 무늬를 남겼다.그는 한참을 창밖을 바라보다가 주머니 속에서 작은 쪽지를 꺼냈다.“내 심장은 그녀를 향해 뛴다.”그 문장을 손끝으로 만지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짧은 영상처럼 머릿속이 번쩍했고, 이름 모를 여자의
Read more

211화. 놓지 않는 이유

아침 공기가 유난히 맑았다.병원 앞 은행나무 가지에 햇살이 부딪히며 부드럽게 깨어나는 그 시간,차수연은 커피를 들고 병원 정문 앞에 서 있었다.하얀 가운 위에 걸친 얇은 카디건이 바람결에 흔들렸고,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향긋한 커피 향이 스며들었다.“오늘은 제가 늦었네요.”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그녀가 천천히 돌아보자, 강우혁이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며 다가오고 있었다.“아침 회의 때문에 일찍 출근했다더니, 결국은 커피 타임인가요?”그가 장난스럽게 묻자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커피 없으면 하루가 안 돌아가잖아요.”“그건 제가 할 말인데요.”“그러니까 비슷하다는 거죠.”그의 눈가가 살짝 휘어졌다.그 짧은 웃음 하나에 수연의 하루는 이미 반쯤 따뜻해져 있었다.그들이 나란히 걸어 병원 로비를 지날 때, 주변 스태프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머물렀다.두 사람 사이엔 아직 공식적으로 어떤 말도 없었지만,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누가 봐도 명확한 온도를 지니고 있었다.“오늘은 외래 환자가 많아요.”수연이 일정표를 확인하며 말했다.“그럼 내가 점심은 책임지죠.”“그런 약속, 병원 식당 커피로 퉁치면 안 돼요.”“이번엔 진짜예요. 제가 만든 도시락 가져왔어요.”“대표님이요?”“이젠 그냥 ‘우혁 씨’라고 불러도 되지 않나요?”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저었다.“아직은요.”“그럼 천천히. 오늘 도시락 맛있으면 그땐 ‘우혁 씨’로.”“조건이 까다롭네요.”“당신이 까다롭잖아요.”그 대화는 가벼웠지만, 그 안에 스며든 감정은 묘하게 진득했다.의사와 의사, 동료이자 오랜 기억 속의 연인.그 미묘한 경계 위를 걸으며 둘의 일상은 다시금 조심스레 이어지고 있었다.점심시간. 옥상 정원 벤치 위에 작은 도시락 두 개가 올려졌다.깔끔하게 정돈된 김밥과 달걀말이, 그리고 그가 직접 만든 듯한 약간 투박한 샐러드.“의외네요.”“뭐가요?”“이런 걸 만들 줄은 몰랐어요.”“기억은 잃어도 손이 기억하더라고요. 예전에 당신한테 도
Read more

212화. 함께 아프기로 한 맹세

병원 13층 회의실.차가운 빗방울이 유리창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그 회의실 안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강 선생님과 차 교수님 관계에 대해 여러 이야기가 오가고 있습니다.”운영이사 박정우가 입을 열었다.그의 시선은 형식적으로 중립을 가장했지만, 눈빛은 이미 의심으로 가득했다.수연은 단정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지만, 두 손은 보이지 않게 의자 밑에서 꽉 쥐어져 있었다.우혁은 그녀의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평소 같으면 침착하게 대응했을 그였지만,오늘만큼은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저희는 환자 치료에 집중했을 뿐입니다.”수연이 담담히 말했다.“그걸 사적인 감정으로 확대 해석하는 건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박정우는 느릿하게 웃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원 내에서 두 분이 함께 있는 모습이 자주 목격됩니다.병원은 작은 공간이 아닙니다. 그런 이야기는 신뢰에 영향을 줄 수 있죠.”그 말에 회의실 안 공기가 한순간 무겁게 가라앉았다.우혁은 그제야 시선을 들어, 정면을 바라봤다.“그럼 제가 책임지죠.”“네?”“모든 논란이 제 위치에서 비롯된 거라면 제가 그만두겠습니다.”순간, 회의실이 술렁였다.수연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무슨 말이에요?”“괜찮아요.”그는 짧게 대답하며 그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하지만 그 웃음엔 결의가 섞여 있었다.“강 대표님, 그건 너무”“박 이사님.”그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끊었다.“이 병원은 저 혼자 세운 게 아닙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보호할 수 있다면 그 이유만으로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박정우는 잠시 말을 잃었다.수연은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그의 손끝만 바라보고 있었다.손끝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회의가 끝난 뒤, 병원 복도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수연은 곧장 그의 사무실로 향했다.문을 열자, 그는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탁자 위엔 명패 하나, 그리고 하얀 커피잔 하나.그의 뒷모습은 이상하게 담담했다.“그만두겠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그녀의 목소리
Read more

213화. 비가 그친 자리에서

새벽 다섯 시. 도시의 소음이 아직 잠들어 있는 시간,커튼 사이로 스며든 희미한 빛이 방 안을 어루만졌다.창문 밖엔 어제 내리던 비가 완전히 그쳐 있었다.젖은 아스팔트 위로 가로등 불빛이 길게 번졌고, 그 위로 새벽 바람이 부드럽게 스쳐갔다.차수연은 천천히 눈을 떴다.옆자리엔 여전히 그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강우혁은 소파에 기대 앉은 채 잠들어 있었다.서류 몇 장이 무릎 위에 흘러내려 있었고, 커피잔엔 반쯤 식은 커피가 남아 있었다.그녀는 조심스레 다가가 그 잔을 치우며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지난 몇 달 동안 누구보다도 버티고, 견디고, 스스로를 단단히 붙잡던 남자였다.그런데 지금은 그 모든 무게가 내려앉은 듯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그녀는 무심코 손끝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이제 좀 쉬어도 돼요…”그 말이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그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움직였다.그리고 이내, 잠에서 깨어난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아침이에요?”“네. 비도 그쳤어요.”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그럼 오늘은 괜찮은 하루가 되겠네요.”그녀는 웃었다.“이유는요?”“당신이 먼저 나를 깨웠으니까.”그의 농담에 그녀의 눈가가 부드럽게 풀렸다.평범한 새벽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오래 기다려온 평화 같은 순간이었다.조용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그들은 함께 출근했다.병원으로 향하는 길,늘 붐비던 출근길이 그날따라 한결 차분했다.“이제 사람들이 우리 이야기 안 하나요?”수연이 물었다.“그럴 리가요.”그는 웃었다.“하지만 이제 신경 안 써요.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그래도 병원 안에서는 아직”“그럼 병원 밖에서 보면 되죠.”그 말에 수연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당신은 참 단순해요.”“단순한 게 아니라 명확한 거예요. 나는 당신 옆에 있고 싶고, 그게 다예요.”그 대답은 간결했지만, 그 안엔 더 이상 흔들림이 없었다.수연은 창밖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나도 하나만 명확히 할게요.”“뭔데요
Read more

214화. 이제 숨지 않아도 되는 밤

햇살이 유리창을 타고 병원 로비로 스며들었다.하얀 복도 끝, 커피머신 앞에 선 차수연은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잠시 멈춰 서 있었다.출근길부터 직원들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왔다.그 시선엔 단순한 호기심과 조심스러운 평가가 뒤섞여 있었다.며칠 전, 강우혁 전 대표가 공식적으로 사임한 뒤 차수연 교수와의 관계가 병원 내 비공식적인 화제로 떠올랐다.그녀는 그저 묵묵히 일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낯선 시선의 무게는 여전히 가볍지 않았다.“차 교수님.”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수연은 천천히 돌아봤다.하얀 셔츠 차림의 우혁이 병원 출입증을 목에 건 채 서 있었다.그의 미소는 평온했지만, 그 안에는 묘한 강단이 깃들어 있었다.“출근은 왜 병원 쪽으로 해요?”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제 여기 내 자리는 없지만, 당신 옆엔 있어야 하니까요.”그의 대답은 단순했지만, 그 안에는 확신이 있었다.“괜찮아요?”“뭐가요?”“이런 시선들.”“괜찮아요. 사람들이야 언제나 얘깃거리를 찾아요. 우린 그저 살아가면 돼요.”그의 그 한마디에 수연의 어깨가 조금 느슨해졌다.그녀는 종이컵을 들고 그에게 커피를 건넸다.“이거, 예전처럼 커피 심부름이에요.”“심부름이라니요, 명령이죠.”그가 웃었다.그 웃음은 여전히 그녀의 하루를 흔들어놓았다.그날 오후, 수술 스케줄이 빽빽했다.응급환자까지 겹치며 병원은 분주했고, 수연은 단 한순간도 쉴 틈이 없었다.“혈압 90에 유지 중입니다!”“포셉!”피 냄새가 코끝에 스며드는 그 순간조차,그녀의 눈빛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그리고 수술이 끝나고 나서야 그녀는 손목의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탈의실 거울 앞에 선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눈 밑엔 피곤이 내려앉아 있었고,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있었다.그때 문이 열렸다.“여기 있었네요.”우혁이었다.그는 조용히 걸어와 그녀 앞에 물 한 병을 내밀었다.“오늘 또 무리했죠?”“일이니까요.”“당신은 늘 그렇게 말하죠.
Read more

215화. 사랑은 회복의 다른 이름

서울의 봄은 유난히 짧았다.벚꽃은 바람에 쓸려가듯 사라지고, 그 자리를 초록빛 잎들이 대신 채웠다.그 계절의 교차점에서, 강우혁은 병원 근처의 오래된 골목길을 천천히 걸었다.그의 걸음은 망설임과 결심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고,그 흔들림이 마치 지금의 그를 그대로 비추는 듯했다.퇴원 후 한 달이 흘렀다.그는 이제 작은 개인 클리닉의 외래 자문으로 일하며 조용히 환자들을 만나고 있었다.대표님이라 불리던 시절의 권위나 무게는 없었지만, 그의 하루는 묘하게 평화로웠다.대신 그 평화 속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차수연. 그녀의 이름만 들어도 여전히 가슴이 조여왔다.그녀의 목소리, 손끝,그리고 마지막으로 병원 창가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까지 모두가 지워지지 않았다.기억은 조각나 있었지만, 감정은 여전히 선명했다.그날 오후, 우혁은 낯익은 전화를 받았다.“강 선생님, 예전 병원에서 연락 왔습니다.응급 케이스인데, 기존 시술 기록을 아는 사람이 선생님뿐이라고요.”순간, 그의 손이 멈췄다.그 병원. 그곳엔 아직 그녀가 있었다.“환자는 누구입니까?”“산모예요. 심장 질환 이력이 있는 상태에서 출산 중인데…담당이 차수연 교수랍니다.”그 이름을 듣자, 우혁의 맥박이 미세하게 뛰었다.“바로 갑니다.”그는 망설이지 않았다.병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비 내리는 창문 너머로 스치는 불빛들이 마치 오래된 기억의 파편처럼 흩어졌다.수술실 앞 복도는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간호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수술 경고등은 붉게 점등되어 있었다.그 문 앞에서, 수연은 손끝이 하얗게 질릴 만큼 수술용 장갑을 쥐고 있었다.환자는 그녀가 오랫동안 담당해온 산모였다.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너무 나빴다.심장 기능 저하, 급격한 출혈, 그리고 태아의 산소 공급이 불안정했다.“교수님, 심박수 떨어집니다!”“에피네프린 1mg 주입하세요. 혈액형 크로스매치 완료됐습니까?”“방금 확인했습니다.”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모니
Read more

216화. 빛 앞에 서는 법

새벽 네 시, 병원 옥상에는 아직 어둠이 남아 있었다.도시는 깨어나지 않았지만, 유리창 아래로 켜진 불빛 몇 개가 누군가의 밤샘과 싸움을 말해주고 있었다.차수연은 옥상 난간에 서 있었다.손에 들린 종이컵엔 미지근한 커피가 담겨 있었다.한 모금 삼키려다 멈춘 커피는, 금세 식어버렸다.오늘, 기자 간담회가 열린다.자신이 다시 세상의 중심에 서야 하는 날.그녀는 심호흡을 했다.두렵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하지만 그 감정은 분명 거기 있었다.비슷한 공기, 비슷한 시간 예전에 사고가 일어났던 바로 그 새벽의 공기였다.그때, 옥상문이 열리며 바람이 스쳤다.“여기 있을 줄 알았어요.”강우혁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고, 그 안에는 이상할 정도로 ‘평정’이 있었다.“새벽마다 사람 찾는 재주가 있네요.”“찾는 게 아니라, 그냥 감으로 와요.”그녀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그저, 도시를 바라보며 물었다.“오늘, 잘 될까요?”“진실이 이기면 잘 되는 거죠.”“진실이 늘 이기나요?”“진실은 이깁니다. 다만, 사람들은 그걸 조금 늦게 알아볼 뿐이죠.”그녀는 천천히 웃었다.“당신은 왜 이렇게 믿음이 강해요?”“믿음이 아니라, 당신이니까요.”그 말에, 잠시 바람이 멎은 것 같았다.그녀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그를 봤다.“강우혁.”“네.”“내가 흔들리면 붙잡아줘요.”“당연하죠. 이번엔, 당신 혼자가 아니니까.”오전 열 시, 병원 1층 컨퍼런스홀.언론사 로고가 새겨진 카메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플래시가 번쩍이고, 낮은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이어졌다.앞줄에는 기자들이 노트북을 펼쳐 두고 대기 중이었다.법무팀, 홍보팀, 운영이사, 그리고 차수연.강우혁은 한쪽 뒤편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더 이상 병원 소속이 아니었지만,그의 눈빛엔 누구보다 진한 소속감이 남아 있었다.“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홍보팀장이 마이크를 잡았다.짧은 인사 후, 수연이 단상으로 향했다.하얀 블라우스에 단정한 검은 정장.그녀는 종이 한 장
Read more

217화. 무너진 자리에 핀 사람

기자회견이 끝난 지 사흘째 되는 아침, 병원 로비는 여느 때보다 소란스러웠다.TV에서는 여전히 ‘차수연 교수 논란’ 자막이 흘러나오고 있었고,그 밑으로는 진실 공방이라는 문구가 번쩍였다.누군가는 그녀를 ‘환자를 살리려다 상처 입은 의사’라 불렀고,누군가는 ‘책임 회피의 달인’이라 비난했다.수연은 늘 그렇듯 정시에 병원 문을 열고 들어섰다.하얀 가운을 걸친 채 복도를 지나가자,직원들이 잠깐 시선을 피했다가 이내 아무 일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그녀는 모른 척했다.그 시선들을 다 받아내기엔 이미 너무 오래, 무너져 있었으니까.“차 교수님.”뒤에서 누군가 조심스럽게 불렀다.수간호사 윤정이었다.“오늘 외래 환자 예약이 절반이나 취소됐어요.”“괜찮아요.”“괜찮으세요?”“네. 괜찮아요.”그 대답은 단단하게 들렸지만, 윤정은 그 안의 공허를 느꼈다.진료실 문을 닫자, 그녀는 잠시 숨을 내쉬었다.모니터 위로 떠 있는 수많은 알림창 중 하나,‘감사팀 재조사 일정 - 금요일 14시.’그 문구가 눈에 밟혔다.수연은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열었다.차가운 바람이 들어와 머리칼을 흩뜨렸다.그녀는 눈을 감았다. 또 견뎌야 하는구나.그 시각, 병원 지하 회의실에서는 이사회 비공개 미팅이 진행 중이었다.“여론이 갈리고 있습니다. 지금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병원의 신뢰도는 떨어집니다.”박정우 이사가 말을 이어갔다.“차수연 교수는 잠정 휴직으로 돌리는 게 맞습니다.”그 말에, 의국 대표가 손을 들었다.“그녀는 여전히 실력 있는 외과의사입니다. 언론이 아닌 실적이 증명합니다.”“그 실적이 지금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박정우의 말투는 단호했다.“우리는 사람을 보호하는 곳이 아닙니다. 시스템을 지켜야 합니다.”회의실 문이 열리며, 느리지만 단단한 걸음소리가 들렸다.강우혁이었다.“시스템을 지키는 게 아니라, 시스템이 사람을 지켜야 하는 겁니다.”그는 문가에 서서 회의실을 훑었다.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저는 더 이상
Read more

218화. 끝나지 않은 심장

차수연은 새벽 다섯 시, 병원에 도착했다.하늘은 아직 검고, 공기는 묘하게 가벼웠다.밤새 내린 비가 유리문에 얇게 맺혀 있었고,그 위로 새벽 첫 버스의 불빛이 스쳐 지나갔다.지금쯤이라면 병원 복도엔 청소부의 빗자루 소리와수면실에서 새어 나오는 간호사들의 졸린 목소리가 섞여 있을 시간이었다.하지만 오늘은 그조차 없었다.이상하게 고요했다.수연은 출입카드를 찍고 들어갔다.복도 끝, 응급수술팀 게시판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이 시간에 웬일이에요?”강우혁이었다.그는 커피 두 잔이 담긴 컵홀더를 내밀며 말했다.“오늘도 새벽형 인간 모드인가요?”“이젠 습관이 된 것 같아요.”그녀가 웃었지만, 눈빛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이사회의 최종 결과, 오늘 나온답니다.”그의 말에 수연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알아요.”“겁나요?”“솔직히요? 네.”“그럼 잘됐네요. 겁이 난다는 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니까.”그녀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오늘은, 꼭 그런 말만 하네요.”“오늘만이 아니라 앞으로도요.”오전 9시, 감사실 조사실. 길고 하얀 책상이 양쪽으로 놓여 있고,한쪽에는 감사실 직원들과 박정우 이사가 앉아 있었다.그녀 앞엔 두꺼운 서류철이 쌓여 있었다.‘차수연 의료행위 검증 결과 보고서.’박정우가 손가락으로 서류를 톡 건드렸다.“결과가 나왔습니다.”수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차 교수의 의료 판단은 당시 상황에서 적절한 조치였으며,기록 조작의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짧은 침묵. 그 뒤를 따라 나온 한 줄의 문장.“따라서, 모든 징계 절차는 철회됩니다.”그녀는 그제야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기대하지 않으려 했지만, 막상 들으니 손끝이 떨렸다.박정우는 덧붙였다.“다만, 내부 규정상 재심위원회 검토는 남아 있습니다.그 과정에서 일부 의혹 제기자들의 신원도 확인될 겁니다.”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의혹 제기자…요?”“익명 제보가 많았거든요. 그중 일부는 내부 인원으로 추정됩니다.”그의 말
Read more

219화. 나를 위한 첫 문장

비가 그친 새벽, 병원 정문 앞엔 맑은 물웅덩이가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하얀 가운들이 바람에 살짝 흔들리고, 간호사들의 발소리가 리듬처럼 이어졌다.평범한 하루처럼 보이지만, 그날만큼은 모든 것이 조금 달랐다.차수연은 오래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도 낯설었다.하루하루를 버티던 시간이 이렇게 길었을까,이제서야 ‘살아있다’는 감각이 돌아온 듯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복도 끝에서 강우혁이 서 있었다.그는 커피 두 잔이 담긴 트레이를 들고 있었다.“아직도 그걸로 버티세요?”“이젠 중독이에요.”“그건 저도 마찬가지죠.”그녀는 커피를 받아들며 살짝 웃었다.이젠 그와의 대화가 불안하지 않았다.대화 속 침묵마저도, 어쩐지 따뜻했다.“오늘 이사회 결과 발표 날이에요.”“알아요. 이젠 피하지 않으려고요.”“만약…”“‘만약’은 금지어예요.”그녀가 끊었다.“이번엔 내가 나를 믿을 차례니까요.”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단했다.강우혁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회의실. 병원 간부들과 이사회 멤버들이 둥그렇게 앉아 있었다.책상 위엔 수많은 문서와 파일,그리고 아직 열리지 않은 한 개의 봉투가 있었다.“이사회의 결정을 발표하겠습니다.”위원장이 천천히 봉투를 뜯었다.공기가 묘하게 무거워졌다.‘차수연 교수, 복귀 승인.’그 한 문장에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단, 사건에 대한 관리 책임은 병원 측이 함께 지는 것으로 한다.”위원장의 목소리가 회의실에 울렸다.박정우 이사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그의 표정에는 미묘한 패배감과 불편한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문을 나서며, 그는 짧게 말했다.“결국, 감정이 이겼네요.”그녀는 조용히 대답했다.“감정이 아니라, 생명이 이겼어요.”그 말에 회의실 공기가 살짝 흔들렸다.누군가 숨을 내쉬는 소리, 누군가 책을 덮는 소리. 그리고 아주 짧은 정적. 그 정적 속에서 그녀의 존재가 조금씩 자리잡기 시작했다.복
Read more
PREV
1
...
2021222324
...
26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