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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이별전문가! 신나리: Chapter 121 - Chapter 130

150 Chapters

121화. 파동의 중심

아침 공기가 이상하게 맑았다.비가 그친 뒤의 공기는 늘 그렇듯, 잠깐의 평화를 가장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카페 문을 열자마자, 수경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그녀의 손엔 태블릿이 들려 있었다.“선배… 기사 나왔어요.”“벌써?”“새벽에 올렸나 봐요. 포털 메인에 떠 있어요.”나리는 앞치마를 벗지도 못한 채 태블릿을 받았다.화면 위에 굵은 제목이 박혀 있었다.‘그녀는 이별을 설계한다. - 신나리, 감정의 전문가인가, 냉정한 조작자인가.’글 아래엔 어제의 인터뷰 사진이 실려 있었다.자신이 커피를 내리고 있는 장면.손끝이 유리잔을 쥐고 있고, 표정은 의외로 부드러웠다.하지만 문장 하나가 모든 걸 바꿔놓았다.“이별은 관계의 실패가 아니라, 감정의 정리입니다.”그 밑에 덧붙은 기자의 해석.“냉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녀의 눈빛엔 단 한 방울의 죄책감도 없었다.”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나리는 한참 말을 잃었다.피부 아래로 피가 서서히 식는 느낌. 그녀가 눈을 들어 제하를 봤다.그는 이미 다른 기사를 모니터로 띄워놓고 있었다.“댓글 난리야.”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사이코패스 같은 냉정함’ ‘감정 팔이’ ‘남의 아픔으로 돈 번다’…”단어들이 칼날처럼 모니터 위를 덮고 있었다.“윤태하, 우리 인터뷰 편집했어.”나리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감정의 정리’ 뒤 문장 잘랐네.”“‘흉터가 되지 않게 돕는다’까지 말했잖아.”“그 사람은 우리가 연민으로 일한다고 쓰면, 기사가 재미없다고 생각한 거지.”수경이 손을 꽉 쥐었다.“선배, 저 이거 그냥 넘기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사람들이 오해해요. 우린 진심으로 돕는 건데, 기사만 보면… 너무 비인간적으로 보여요.”“그래서 오늘부터 우리가 인간으로 보여주면 돼.”“어떻게요?”“행동으로. 말이 아니라.”제하가 팔짱을 끼며 나리를 봤다.“그 행동이 뭔데?”“의뢰를 계속 받아. 멈추지 말고.”“지금은 쉬어야 할 때야.”“아니. 지금 멈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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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이해라는 이름의 이별 연습

아침부터 카페 유리창에 빗방울이 맺혔다.비는 오지 않았지만, 공기가 눅눅했다.사람이 말을 삼킬 때 나는 미세한 습기와 같은 냄새가 공간 안에 퍼져 있었다.“선배, 상담 요청 들어왔어요.”수경의 목소리가 낮고 조심스러웠다.나리는 커피를 내리던 손을 멈췄다.“새 의뢰인?”“네. 근데… 조금 달라요.”“달라?”“남자예요.”순간 공기가 멈췄다.커피머신의 김이 얇게 흩어졌다.“남자?”제하가 물었다.“확실해?”“네. 본인이 직접 메일 보냈어요. 이름은 ‘도현’.”“이름만으로 남자라고 단정할 순 없잖아.”“본문에 ‘남편으로서, 아내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싶다’고 적혀 있었어요.”나리는 눈을 감았다가 뜨며 숨을 고르듯 말했다.“우린 여성 의뢰만 받아.”“알아요.” 수경이 빠르게 답했다.“그래서 바로 거절 메일 쓰려는데, 그 내용이… 좀 이상해서요.”“이상하다니?”“메일 첨부파일에 ‘아내의 녹음 파일’이 있었어요.”“녹음?”“네. 근데 불법적인 건 아니고, 아내가 직접 남긴 음성이라고 했어요.‘이건 남편에게 전해달라’는 메모랑 같이.”나리는 커피잔을 내려놨다.“그럼 아내가 먼저 의뢰했을 수도 있겠네.”“그럴 가능성도 있어요.”“내용 들어봤어?”“아뇨. 들을까요?”“아니. 일단 파일 가져와.”수경이 노트북을 카운터 위에 두었다.재생 버튼을 누르자, 작은 숨소리가 이어지고, 곧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조용하고, 힘이 없었다.“도현아, 우리가 왜 이렇게 됐는지, 이제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아.근데 나, 네가 미워지기 전에 그만하고 싶어.나를 나로 만들어줬던 사람으로 남아줬으면 좋겠어.”짧은 정적. 그녀의 마지막 말이 잔향처럼 남았다.“당신도 이제, 나 없이도 괜찮았으면 좋겠어.”녹음이 끝나자, 세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카페 안 공기가 약간 눌린 듯 느껴졌다.“이건…” 제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이미 시작된 이별이네.”“응.”“남자는 그걸 끝까지 들었겠지?”“그랬겠지.”“그럼 왜 우리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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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불 꺼진 집

밤이 깊어질수록 도시는 조용했다.그런데 그 조용함이 낯설게 느껴지는 건 마음이 아직 잠들지 않아서였다.창밖의 가로등 불빛이 물결처럼 흔들렸다.나리는 노트북 화면에 떠 있는 도현의 메일을 다시 읽었다.“그녀가 떠난 이유를 알고 싶어요. 미워하지 않게, 이해하게 도와주세요.”그 짧은 문장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이별을 이해하겠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대부분은 단죄하거나, 버티거나 무너졌다.하지만 그는 이해하겠다고 했다.그 말이 나리의 마음 어딘가를 건드렸다.커피잔을 들었지만 식어 있었다.그녀는 잔을 내려놓았다.유리컵 안쪽에 남은 자국이 마치 지워지지 않는 기억 같았다.그때, 문이 열리고 제하가 들어왔다.“아직 안 갔어?”“응.”“또 생각하지.”“일이야.”“나리야, 너한테 일은 늘 생각이잖아.”그녀는 웃었다.“생각 안 하면 불안해서.”“오늘은 좀 불안해 보여.”“그런가?”“응. 도현이라는 사람, 네 눈에 누구로 보여?”“그냥, 아직 끝내지 못한 사람.”“너처럼?”그 질문에 나리는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그건 동의 같기도, 부정 같기도 했다.“오늘 밤, 도현이 집 가볼 거야.”“벌써?”“응. 아내가 남긴 흔적이 있을지도 몰라.”“나 혼자 갈게.”“안 돼.”“감정선이 흐트러질까봐?”“그것도 있고, 네가 감정선을 ‘숨긴다’는 게 더 무서워.”“괜찮아.”“아니, 이번엔 나도 같이 가.”그녀는 잠시 그의 눈을 보았다.그 눈엔 걱정보다 확신이 있었다.“그래, 같이 가자.”도현의 집은 오래된 빌라였다.계단을 오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열쇠 맡겨놨다더니, 진짜네.”제하가 낮게 말했다.“남의 집 들어가는 기분,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아.”“우린 도둑이 아니라, 증거를 찾는 사람이야.”“이별의 증거라니, 이상하지 않냐.”“이별도 사건이니까.”집 안은 생각보다 깔끔했다.거실엔 먼지가 없었고, 벽에는 결혼사진이 걸려 있었다.두 사람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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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이별의 마침표, 인간의 온도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한 번도 세지 않은 창문 위의 빗방울들이 서로 부딪치며 느리게 흘러내렸다.회색 구름 아래, 도시는 눅눅했다.그날은 유난히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누군가의 끝을 마주해야 하는 날은 늘 그랬다.나리는 오전부터 커피 대신 따뜻한 물을 마셨다.손끝의 떨림이 조금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노트북을 닫았다.책상 위엔 도현의 USB가 놓여 있었다.검은 플라스틱 표면이 묘하게 차가웠다.그 안엔 한 여자의 마지막 말이, 아직도 살아 있었다.“선배.”수경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오늘, 정말 보여드릴 거예요?”“그래야 끝나.”“근데 그분이 무너질 수도 있잖아요.”“무너지는 게 나쁜 건 아니야. 사람은 무너져야 다시 서니까.”수경이 고개를 숙였다.“그래도, 그걸 우리가 만들어낸다면요?”“우린 만들지 않아. 그냥 꺼내줄 뿐이야.”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그 안에는 오래 묵은 슬픔이 있었다.슬픔이 익으면 말투가 이렇게 부드러워진다는 걸 수경은 그제야 알았다.오후 다섯 시. 도현은 약속한 대로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우산 끝에서 물이 떨어졌고, 셔츠 소매는 젖어 있었다.“죄송합니다. 좀 늦었죠.”“괜찮아요.”나리가 고개를 들며 미소를 지었다.“오늘은 비가 시간을 늦게 데려오니까요.”그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도 그런 말 자주 했어요. 비 오면, 세상이 쉬어간다고.”“그래서 오늘이 좋네요. 쉬어가는 날엔, 마음이 말하기 좋거든요.”나리는 잔잔히 말했다.그의 손에 따뜻한 컵을 쥐여주며,“오늘은 커피보다 물이에요. 마음이 타는 날엔, 물부터 마셔야 하거든요.”그가 컵을 받으며 작게 웃었다.“고맙습니다.”그 웃음은 오래된 피로 위에 살짝 떠 있는 빛 같았다.잠시 정적이 흘렀다.제하가 천천히 USB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여기에, 아내 분의 마지막 영상이 있습니다.”도현의 손이 살짝 떨렸다.“…볼 수 있을까요.”“지금 보시겠어요?”“네.”나리는 노트북을 돌렸다.화면 속 여자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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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균열의 시작

비가 멈춘 뒤의 아침은 늘 조용해야 하는데, 오늘은 유난히 시끄러웠다.휴대폰 진동이 쉼 없이 울렸고, 포털 메인에는 또다시 ‘이별전문가’가 걸려 있었다.나리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화면을 켰다.[단독] 이별대행팀, 사망 여성 영상 조작 의혹기사 제목 아래엔 낯익은 사진 한 장. 어제 도현에게 보여준 영상의 스틸 컷이었다.화면에 흐릿하게 보이는 나리의 손과 도현의 뒷모습,그리고 그 밑에는 사망한 아내의 영상을 이용해 이별을 상업화한 팀이라는 자극적인 문장이 박혀 있었다.“이게 뭐야…”수경의 목소리가 떨렸다.“이 영상, 외부로 나간 적 없잖아요.”“도현이?”제하가 물었다.“그럴 리 없어. 그 사람은 그렇게 안 보여.”“보여지는 게 다가 아니야.”“그래도”“나리야, 지금 그게 중요해?”제하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기사 한 줄에 우리가 지난 몇 년 쌓은 신뢰가 다 무너질 수도 있어.”“무너진다고 해서 진심이 사라지진 않아.”“근데 세상은 진심보다 속도가 빠르잖아!”그 말에 공간이 멈췄다.나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은 고요했지만, 그 고요함 안에서 무언가 천천히 금이 가고 있었다.수경이 조심스레 말했다.“선배, 이번 건은 경찰에서 연락 올 수도 있어요. 기사 밑에 제보창 열렸어요.”“우린 불법 안 했어.”“그래도 조사가 들어오면 설명해야 하잖아요.”“설명하면 돼.”“그게 그렇게 간단해요?”“복잡하게 만들지 않으면 돼.”수경의 손이 떨렸다.“선배는 늘 그렇게 말하지만, 저희 일은 이제… 사람의 ‘마지막’을 건드리는 일이 됐어요.”“원래부터 그랬어.”“아뇨. 전 지금처럼 무겁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근데 요즘은, 우리가 사람의 인생을 너무 쉽게 장면으로 만들고 있는 것 같아요.”그 말에 제하가 잠깐 수경을 바라봤다.“수경아, 지금은 그 얘기할 때 아니야.”“아니요, 지금이니까 해야 해요.”그녀의 눈빛이 흔들리지 않았다.“우린 ‘이별의 품위’를 만든다고 했어요.근데 요즘 우린, 누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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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나를 용서하는 시간

비가 하루 종일 내렸다.유리창에 흐르는 물길이 얇은 실처럼 늘어져 바깥세상과 안쪽 공간을 천천히 분리시켰다.카페 안은 조용했다.머신의 예열음만 규칙적으로 들렸다.그 리듬이 마치 심장박동처럼 느껴질 만큼 고요했다.나리는 커피를 내리지 않았다.대신, 두 손에 따뜻한 머그를 감싸 쥐고 있었다.그 손이 오늘따라 조금 더 차가웠다.밤새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한 탓이었다.눈을 감으면, 휴대폰 화면 속에 떠 있던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온유의 노트북 정리하다가, 당신 이름이 적힌 파일을 봤어요.”그 한 줄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그녀는 커피를 입에 대지도 못한 채 메시지를 열었다.파일명은 단 하나였다. 신나리에게손끝이 떨렸다.마우스 커서가 느리게 움직였다.클릭하는 데 몇 초가 걸렸다.화면이 열리자, 흰 배경 위에 글자가 떴다.짧은 문단들이 이어져 있었다.온유의 글씨체는 예전 그대로였다.점 하나, 쉼표 하나까지도 낯설지 않았다.'나리야.이 파일을 보게 된다면, 난 아마 네 곁에 없겠지.이별을 직업으로 삼은 너한테,나의 끝은 어떤 장면일까 종종 상상했어.넌 늘 말했잖아.‘사람은 이별을 준비하면서 자기 자신을 배운다’고.나는 준비하지 못했어.널 놓을 준비도, 내 병을 받아들일 준비도.그래서 미안하다는 말보다, 너한테 배운 말을 돌려주고 싶어.고마웠다, 나리야.넌 내 인생의 마지막 문장이었어.'스크롤을 내리자, 그 밑에 짧은 첨부파일이 있었다.video_0425.mp4그녀는 재생을 눌렀다.화면 속에서 온유가 웃고 있었다.어딘가의 병실, 흰 커튼, 그리고 약간 쉰 목소리.“나리야. 내가 너한테 이 영상을 남긴 이유는,네가 언젠가 진짜 ‘이별’을 배우길 바라서야.”“너는 사람들의 상처를 감싸주지만, 정작 네 상처엔 손을 못 대잖아.그래서 네가 쓰는 말이 예쁘지만, 늘 차가워.”“이 영상을 본다면, 제발 멈춰. 누굴 돕는 일 말고, 너 자신한테 한 번쯤 ‘괜찮다’고 말해줘.”영상은 거기서 끊겼다.나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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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진실의 문장

아침 공기가 차가웠다.창밖의 공기는 안개와 비 사이 어딘가에 걸려 있었다.사람들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느렸고, 그 느림이 오늘 하루를 예고하는 것 같았다.나리는 카페 유리문에 걸린 ‘CLOSED’ 표지판을 뒤집었다.오늘 하루는 일을 멈춘다.멈춤이 필요한 날이었다.테이블 위엔 USB 하나와 진술서 한 장이 놓여 있었다.‘이별전문가 사건 관련 진술서 - 신나리.’그녀는 볼펜으로 마지막 줄을 썼다.“나는 누군가의 감정을 이용한 적이 없다.다만, 그 감정이 부서지지 않도록 잡아준 적은 있다.”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수경이 들어왔다.“선배, 준비 다 되셨어요?”“응.”“차는 제가 운전할게요.”“괜찮아. 나 혼자 가도 돼.”“안 돼요.”그녀의 목소리는 단단했다.“이건 선배 혼자 감당할 일이 아니에요. 우리가 팀이라면, 책임도 같이 져야죠.”그 말에 나리는 잠시 미소를 지었다.“수경, 이제 정말 ‘우리 팀’이네.”“이럴 때만요.”그녀는 웃었지만, 눈빛은 진지했다.그 눈빛엔 스스로 성장한 사람의 무게가 있었다.제하가 늦게 들어왔다.셔츠 단추를 하나 풀고, 손에 머그를 쥐고 있었다.“마시고 가. 오늘 긴 하루 될 거야.”“괜찮아.”“너, 또 괜찮대.”“진짜 괜찮아.”“진짜 괜찮은 사람은 괜찮단 말 안 한다니까.”그녀가 웃었다.“그 말 이제 그만 써.”“그럼 다른 말로 할게.”“뭔데.”“돌아와.”그 한마디가 공기 중에 길게 남았다.경찰서 앞. 기자 몇 명이 이미 서 있었다.카메라 셔터 소리가 섞여 들어왔다.수경이 조심스럽게 속삭였다.“선배, 고개 숙이지 마요.”“숙이진 않아.”“근데 떨려요.”“나도.”두 사람은 잠깐 웃었다.그 웃음이 긴장보다 강했다.안으로 들어서자, 낯선 냄새가 맞았다.서류, 잉크, 습기, 사람.이 공간엔 감정이 아닌 ‘기록’만이 존재했다.그게 더 차갑게 느껴졌다.담당 수사관은 젊었다.그의 표정엔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이별전문가 팀의 대표… 신나리 씨 맞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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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울어도 괜찮은 온도

며칠 만에 맑은 날이었다.비가 그치고 나면 언제나 세상이 깨끗해지는 줄 알았지만,그건 착각이었다. 햇살이 비춰도 마음속 구름은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카페의 문을 열자 익숙한 향이 반겨왔다.볶은 원두 냄새, 종이컵의 잔열, 그리고 약간의 먼지.그 평범함이 이렇게 반가울 줄은 몰랐다.나리는 커피머신을 닦으며 혼잣말처럼 말했다.“다시 일상으로.”제하가 카운터 너머에서 대꾸했다.“일상이 제일 어려운 거 알지.”“그래도 돌아와야지.”“돌아온다고 해서 같은 자리는 아니야.”“그래도… 같은 사람일 순 있잖아.”그녀가 웃었다. 짧지만 그 웃음 안엔 살아 있음이 담겨 있었다.그때 수경이 들어왔다.머리를 묶은 모습이 평소보다 단정했다.손에는 두꺼운 파일이 들려 있었다.“선배, 오늘 일정이에요.”“벌써?”“네. 요청 들어온 의뢰 중에 한 건, 제가 맡아볼까 해요.”나리가 눈썹을 올렸다.“혼자?”“네. 한 번쯤은 해보고 싶어요.”“어떤 건데?”“결혼식 취소 관련이에요.신부 쪽 요청이고, 사정이 좀 복잡해요.”나리는 잠시 생각했다.“수경, 네가 지금 맡기엔 조금 빠르지 않아?”“빠르다는 건, 결국 선배가 정한 기준이잖아요.”그녀의 말투는 조심스러웠지만 단단했다.“이번엔 제 기준으로 해보고 싶어요.제가 선배를 따라 배웠으니까, 제 방식으로 배운 걸 증명하고 싶어요.”제하가 중간에서 끼어들었다.“어떤 사건인데?”“신부가 갑자기 결혼을 취소했어요. 근데 문제는, 상대 남자가 아직 그 사실을 몰라요.”“몰라?”“네. 신부가 직접 말할 용기가 없대요.”“그럼 우리가 개입해야겠네.”“아니요.”수경이 고개를 저었다.“제가 직접 만나서 정리해보려고요.우리처럼 ‘대행’하는 방식 말고, 진짜 사람이 말하는 방식으로.”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잠시 커피잔을 닦던 손을 멈췄다.그녀의 시선이 수경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그럼, 네 방식대로 해봐. 근데 기억해. 사람의 감정은 ‘훈련’으로 다루는 게 아니야. 흔들리면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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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그늘의 온기

햇살이 유리창을 따라 길게 번졌다.몇 날 며칠 이어진 비가 멈추고, 세상은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카페 안은 따뜻했다. 머신에서 새어 나오는 김,그 위로 둥글게 떠오르는 향, 모든 게 평화로워 보였다.하지만 평화란, 언제나 폭풍과 폭풍 사이에 잠시 들르는 손님이었다.“선배.”수경이 조심스럽게 불렀다.“응.”“그날, 그 의뢰인한테서 연락이 왔어요.”나리는 커피를 내리던 손을 멈췄다.“뭐래.”“감사하다고요.”“그래?”“근데…”“근데?”“이별하고 나니까, 너무 공허하대요.”“당연하지.”“그럼, 우리가 도운 게 맞을까요?”“수경.”“네.”“사람은 이별을 한 뒤에야 자기 자리를 봐. 그 공허함이 자리야. 거기서 다시 시작하는 거야.”“그럼 그분이 괜찮아질까요?”“괜찮아질 거야. 근데 시간이 필요해.”“그 시간 동안, 우리는 아무것도 못 하잖아요.”“그게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지.”수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의 표정엔 다 컸다는 자신감보다,처음으로 ‘현실의 무게’를 배운 사람의 표정이 있었다.“수경.”“네.”“오늘 밤, 혼자 집에 가면 그 생각 계속 날 거야.”“이미 그래요.”“그럼 그때 커피 내리듯 생각해. 끓이고, 식히고, 기다리면 향이 남아.”“향이요?”“응. 사람의 마음도 그렇게 익는 거야.”그 말이 끝났을 때, 카페 안 공기가 묘하게 따뜻해졌다.짧은 말 한마디가, 서로의 피로를 덮어주는 담요처럼 느껴졌다.점심 무렵, 제하가 들어왔다.셔츠 소매를 걷고, 머리를 대충 말린 채였다.“어제 잠은 좀 잤냐.”“응.”“거짓말.”“너도.”“나야 늘 그렇지.”그는 커피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수경아, 너 첫 미션 잘했대.”“그건 선배가 잘 가르쳐주셔서 그래요.”“아니, 네가 버텼던 거야.”“근데요, 버티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어요.”“그럼?”“그냥, 살아내는 거 같아요.”“살아내는 것도 버티는 거야.”그의 말에 나리가 덧붙였다.“그게 결국 같은 말이야. 버틴다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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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화. 작별, 그 덜 아픈 이름

아침 공기가 유난히 차가웠다.햇살은 비쳤지만, 공기 속엔 아직 겨울의 냄새가 남아 있었다.창문을 열자, 찬 바람이 부엌으로 밀려 들어왔다.나리는 커피포트를 켜놓은 채, 핸드폰을 바라봤다.메신저 알림 하나.보낸 사람: 수경“선배, 어제 의뢰인한테 연락이 또 왔어요. 만나도 될까요?”그녀는 잠시 답장을 멈췄다.‘만나도 될까요?’라는 문장엔 수백 가지 의미가 숨어 있었다.그건 단순한 보고가 아니라, 허락을 구하는 말이었다.“직감이 불안하면 만나지 마.”보내고 나서,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듯 커피를 내렸다.커피 향이 천천히 번졌다.그러나 그 향이 다 번지기도 전에 전화벨이 울렸다.“선배…”수경의 목소리가 떨렸다.“이미 만나고 있어요.”“뭐?”“그분이… 저한테 부탁을 하셨어요. 한 번만, 대신 ‘그 사람’을 만나달라고.”“수경, 지금 어디야?”“카페 ‘벨로체’요. 강남역 근처.”“거기서 그대로 있어. 내가 갈게.”통화가 끊기자마자, 나리는 외투를 집어 들었다.강남역, 오후 세 시. 도시의 소음은 늘 비슷했다.사람들이 쏟아지고, 쏟아지듯 사라졌다.나리는 그 속을 뚫고 걸었다.그녀의 눈엔 수많은 얼굴이 보였지만, 그 어떤 얼굴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이별을 돕는 사람의 얼굴은 항상 늦게 기억된다.’그녀는 예전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오늘은 그 말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 같았다.카페 문을 열자, 가장 안쪽 창가에 수경이 앉아 있었다.앞에는 낯선 남자 한 명. 그는 말없이 컵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수경.”“선배…”남자가 고개를 들었다.“신나리 씨시죠?”“누구시죠?”“저… 민성이라고 합니다. 수경 씨한테 얘기 들었어요.그녀, 제 전 여자친구의 친구예요.”그녀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이시죠.”그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그녀가 떠난 지 두 달 됐어요. 근데 아직…저한테는 그날의 말이 남아있어요.”“어떤 말이요?”“미안해. 근데 나도 나로 살아보고 싶어. 그 말이요.”그는 잠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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