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Chapter 361 - Chapter 370

460 Chapters

제361화

이화는 들키지 않아 천만다행이라 생각하며 가볍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고개를 들어 창문 틈새로 바짝 귀를 갖다 댔다.강유영은 한숨을 폭 내쉬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예전부터 어머니께선 나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셨지. 할머니까지 돌아온 뒤로는 더욱 나를 탐탁지 않게 보시는구나. 게다가 지금 할머니는 병환에 드셔서 심기도 불편하시고.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올릴 때마다 나한테 화풀이를 하실 텐데. 단비야, 난 이제 어쩌면 좋니?"원래 온순하고 여린 성격이라, 무기력하고 애처로운 말투는 평소와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그래서 이화는 전혀 의심을 품지 않았다.이화가 생각하는 강유영은 늘 나약하고 겁이 많으며 무능한 인간이었다. 그녀는 마음속 깊이 강유영을 깔보고 있었다."소인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단비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제안했다."아씨, 차라리 꾀병을 부리시는 건 어떨까요? 아프다고 하시면 노부인께서도 굳이 처소까지 부르시진 않을 텐데요."당연히 미리 입을 맞춘 대사였다.오직 밖에서 엿듣는 이화에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그건 안 돼."강유영이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만약 할머니나 어머니가 믿지 않으시고 의원을 부르기라도 하시면 어떡하려고? 내가 꾀병을 부린다는 게 들통나면 그땐 더 미움만 받을 텐데."그 말투에는 평소의 겁 많은 성격이 고스란히 묻어났다.이화는 가소롭다는 듯 입을 삐죽였다. 저리 겁이 많아서야 매사 앞뒤를 재느라 꾀병 따위는 부릴 엄두도 못 낼 것이다."아씨, 그럼 이렇게 하시지요."하던 일을 멈춘 서유가 화장대 곁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일부러 넘어지신 다음 다리가 아프다고 하시는 겁니다. 나중에 진짜 의원이 와도 계속 아프다고 우기면, 꾀병이라고 하지는 못할 겁니다."서유는 웃음을 꾹 참으며 강유영을 바라보았다.강유영도 까만 눈동자를 굴리며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하지만 여전히 걱정스러운 어투로 대꾸헀다."멀쩡한 길에서 갑자기 넘어지는 게 말이 되니?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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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2화

동쪽 외곽의 장원.조사예가 방으로 뛰어 들어오며 다급하게 소리쳤다."어머니, 아버지께서 오고 계시대요. 임성아는 준비 되었나요?"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온 탓에 풍만한 살결이 출렁이고 있었다..임성아는 두 모녀가 모아둔 재산을 털어 고심 끝에 고른 여인이었다.이번에 진국공부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임성아에게 달렸다."벌써 오셨다고?"첩실 이씨는 그 말을 듣자마자 방 안에 있던 임성아를 서둘러 끌고 나왔다. 그러고는 그녀의 소매를 걷어 올리며 다그쳤다."어서 밭으로 나가서 내가 일러준 대로 하거라."단오가 다가오자, 첩실 이씨는 진국공이 사당에 올릴 제사 용품과 제전의 수확량을 점검하러 장원에 들를 것이라 짐작했다. 명색이 단오이니 진국공부도 큰 제사를 치를 것이다.이는 모녀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첩실 이씨는 일찌감치 이 일을 치밀하게 준비해 왔다. 나이가 든 그녀는 진국공의 눈길을 사로잡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큰돈을 들여 젊은 미모의 여인을 사들인 것이다.진국공의 취향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다. 임성아는 가냘픈 외모에 가슴이 풍만하고 허리가 가늘어 진국공의 취향에 꼭 맞았다. 그가 보고서 눈독을 들이지 않을 리 없었다.이씨에게 떠밀려 나간 임성아는 문 앞의 밭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허리를 굽혀 토란을 캐기 시작했다."어머니, 정말 될까요?"조사예는 조금 걱정스러웠다.장원에서의 생활은 너무나 고달팠다. 살갗은 까맣게 탔고, 본래도 빼어난 용모가 아니었는데 이제는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몰골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이는 전부 강유영 그 요망한 계집 때문이었다.도경진과의 혼사도 망치고, 장원으로 쫓겨나 이 고생을 겪은 걸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가 갈렸다. 본가로 돌아가기만 하면 반드시 이 수모를 몇 배로 갚아줄 작정이었다."염려 말거라."이씨는 딸의 손을 다독이며 부드럽게 말했다.두 모녀는 꽤나 영악했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끈기도 있었다.일각쯤 지났을 때, 진국공과 장원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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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3화

"나으리, 첩부인과 회포를 푸시도록,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눈치 빠른 장원 관리인은 즉시 예를 표하고 자리를 피했다."어머나, 나으리께서 오실 줄 모르고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사예야, 나와 함께 가서 찬거리라도 좀 준비하자꾸나. 성아 넌 남아서 나으리를 잘 모시거라."방에 들어서자마자 이씨는 지체 없이 조사예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진국공과 임성아 단둘만 방에 남았다."나으리, 차 드시지요...."임성아는 찻잔을 들고 수줍은 얼굴로 진국공에게 다가가 두 손으로 공손히 올렸다.진국공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그는 찻잔을 받는 척하며 임성아의 손을 덥석 쥐고는 확 끌어당겼다.쨍그랑!무방비 상태였던 임성아가 찻잔을 놓치는 바람에, 바닥으로 찻물이 쏟아지며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다."어머!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그녀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파편을 주우려 허리를 숙였다."내버려 두거라."진국공은 그녀를 품에 끌어안으며 말했다.임성아도 반항하지 않고 그가 허리띠를 풀고 침상으로 안아 올리는 대로 순순히 몸을 맡겼다. 그녀는 원래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 세상물정에 어두웠다. 부모 손에 이끌려 이씨에게 팔려 온 처지이니 기댈 곳도 없었다. 그저 이씨가 시키는 대로 따를 뿐이었다.반 시진 후, 이씨와 조사예가 채소 몇 가지를 챙겨 방으로 돌아왔다.진국공은 막 허리띠를 매며 안방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얼굴에는 꽤나 만족스러운 기색이 감돌았지만, 모녀를 마주치자 중후한 얼굴은 살짝 붉어졌다.나이도 들었고 집안의 자식들도 장성하여 혼기를 맞이했다.한씨의 견제도 심해진 터라, 그의 후원에 새로운 여인이 들어온 지는 꽤 오래전 일이었다. 평소에는 거의 조월아의 생모인 연씨의 처소에 머물곤 했다.그런데 오늘 만난 임성아는 이씨가 작정하고 그를 위해 준비한 여인이고 그의 취향에도 꼭 맞아서 충동을 자제하지 못한 것이다.대낮부터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은 체통에 맞지 않는 경솔한 행동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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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4화

"춘화는 노부인께서 보내주신 사람입니다. 정말 이대로 진행하실 생각이십니까?"풍씨 어멈이 조심스레 물었다.과거 노부인은 산으로 떠날 때, 수족처럼 부리던 춘화를 한씨의 곁에 남겨두고 갔다. 며느리의 안살림을 도와준다는 명목이었다.지금처럼 고부 사이에 골이 깊어진 상황에서 춘화는 노부인이 안방에 심어둔 첩자와 다름없었다.제비집 보양식에는 약이 들어 있었다. 연씨가 먹고 나면 머지않아 병증이 나타날 것이다. 한씨가 굳이 춘화를 시켜 심부름을 보내는 이유는, 혹여나 일이 커질 경우 춘화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되면 강유영에게 액운이 끼었다는 헛소문을 기정사실로 만드는 동시에 눈엣가시 같은 춘화마저 자연스레 제거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묘안이었다.다만, 행여나 노부인이 이 일로 노발대발하며 판을 엎어버릴까 두려울 뿐이었다."그쪽에서 내 체면을 안 봐주는데 내가 그 늙은이의 사람을 곁에 둘 이유라도 있어?"한씨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시어머니가 먼저 야박하게 나오니 자신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이제 그녀는 안살림을 갓 물려받아 이리저리 휘둘리던 과거의 새며느리가가 아니었다. 지금의 진국공부 안채는 안팎으로 모두 자신의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굳이 늙은 시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주눅 들 이유가 없었다."예, 알겠습니다."풍씨 어멈은 곧바로 문을 열어 춘화를 불렀다.춘화는 아무런 의심 없이 찬합을 받아 들고 밖으로 나섰다.한씨는 평소 처세술에 꽤나 능한 안주인이었다. 별일이 없을 때면 종종 집안의 첩들에게 값비싼 보양식이나 비단, 장신구 따위를 하사하며 관대한 안주인 행세를 했다. 그러니 오늘 같은 일도 그리 유별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연씨는 집안에서 가장 진국공의 총애를 받는 첩이었다. 아이를 낳지 못한 다른 첩들은 아예 뒷방 신세로 전락해 집안에서 거의 존재감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춘화 너 어디 가니?"마침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조사예가 춘화를 보고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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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5화

강유영은 회랑의 난간밖으로 상체를 살짝 내밀며 이화를 불렀다.해 질 녘의 붉은 노을이 가냘픈 자태에 금빛을 흩뿌려 그녀의 고운 얼굴에 평소보다 한층 단아하고 위엄 있는 기색을 더해주었다.종종걸음으로 밖으로 향하던 이화는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문밖에 좀 다녀오려던 참이었습니다. 아씨, 제게 시키실 일이라도 있습니까?"켕기는 게 있으니 소인이라 자칭하는 것마저도 잊어버렸다.바닥 돌판에는 이미 손을 써둔 터였다.강유영이 거기를 밟기만 하면, 다리가 부러지지는 않더라도 발목을 삐어 보름은 꼼짝없이 누워 지낼 것이다.지금 지난밤에 쓴 도구들을 내다 버리러 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오늘 하루 종일, 강유영 주종 세 사람은 무언가 눈치라도 챈 것처럼 번갈아 가며 그녀를 감시했다.탁자를 닦고 마당을 쓸라 하질 않나, 화초를 다듬으라 하질 않나, 도무지 혼자 있을 틈을 주지 않았다. 이참에 겨우 짬이 나서 물건을 처리하려 했건만 강유영이 또다시 발목을 잡은 것이다."이리 와보렴."강유영이 손짓했다.서유는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아씨?"이화는 감히 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이라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강유영을 대하는 태도가 한결 공손해졌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네 자수 솜씨가 제법 뛰어나다고 들었다."강유영은 자수틀을 들고 그녀에게 물었다."내게도 수놓는 법을 좀 가르쳐주겠니?"그녀의 맑고 빛나는 눈빛이 이화의 두 눈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조원철은 늘 그녀에게 윗사람은 응당 윗사람다운 자태를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흔들림 없이 당당하고 의심의 여지를 주지 않아야 아랫사람을 쥐고 흔들 수 있다고 말했다.지금 그녀는 그가 가르쳐 준 대로 행동하고 있었다.이화는 강유영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묘한 기세에 눌려 절로 고개가 숙어졌다.그녀는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자수틀을 받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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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6화

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손에 땀을 쥐었다.갑자기 걸음을 멈춘 한씨가 고개를 돌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네 할머니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강유영은 겁먹은 듯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어머니,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으니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노부인의 뜻을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저들은 그녀가 조원철을 홀렸다고 확신하고 있었다.그런데 어째서 한씨는 그 돌판 쪽으로 가서 넘어지는 시늉을 하지 않는 건지 의구심이 들었다.무언가 낌새라도 챈 걸까?이화가 꽤나 감쪽같이 손을 써두었기에, 미리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전혀 허점을 찾아낼 수 없었다."보는 눈도 이리 많은데, 기어코 내 입으로 말해야겠느냐?"한씨는 다시 걸음을 옮기며, 문제의 돌판을 훌쩍 넘어가 버렸다.강유영은 마음이 불안해져 고개를 숙인 채 잠자코 한씨의 뒤를 따랐다.어차피 그녀는 늘 이렇게 겁 많고 유약한 성정이었으니, 입을 꾹 다물고 있어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그런데 한씨가 문제의 돌판을 그냥 지나친 것이 신경이 쓰였다.정말로 뭔가 눈치라도 챈 것일까?순간, 강유영의 마음속에는 실망감과 안도감이 교차했다.그동안 공들여 세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은 실망스러웠으나, 한씨가 다치지 않았으니 더 이상 조마조마하며 마음을 졸일 필요가 없었다."네 오라비의 혼사에 대해서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한씨가 불쑥 물었다.강유영은 짐짓 놀란 척 대답했다."오라버니의 혼사야 당연히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께서 뜻을 모아 정하실 일 아닙니까. 어찌 갑자기 제게 그런 것을 물으십니까?"한씨는 이미 그녀와 조원철이 부적절한 사이라고 굳게 믿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또 이런 간보는 말을 꺼내는 걸까?"네 할머니께서 널 의심하고 계시니, 스스로 오해를 해명해야 하지 않겠느냐?"한씨의 얼굴에 온화한 기색이 떠올랐다."네 할머니께 가서 네 오라버니와 우리 외가쪽 사촌누이가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말씀드리거라.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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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7화

한씨는 극심한 고통에 바닥에 쓰러져 다리를 부여잡고 큰 소리로 신음했다.뼈가 부러지는 고통은 일반 사람이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국공부 안주인으로서의 체면이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다리를 껴안고 바닥을 나뒹굴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러니 강유영의 물음에 대답할 정신도 없었다."유영 아씨, 어서 사람을 보내 의원을 모셔오게 하십시오! 어서요!"다급해진 풍씨 어멈이 엉겁결에 강유영을 살짝 밀치며 재촉했다.강유영은 그 거친 손길에 밀려 비틀거렸다.다행히 눈치 빠른 서유가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서유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아씨, 소인을 보내지 마십시오. 저는 아씨 곁을 지키겠습니다."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일수록 강유영의 안전이 우선이었다. 만에 하나 아씨의 몸에 생채기라도 나는 날엔, 세자의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다."어머니의 시녀들도 이리 많은데, 어찌 제 사람을 보내라 하십니까?"강유영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딱 잘라 말했다.그녀는 제 사람을 보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한씨 수하에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이미 일이 벌어진 마당에 괜히 나섰다가는 꼬투리를 잡히기 십상이었다. 그저 멀찍이 떨어져 있어야 나중에 의심을 덜 살 것이다."너, 어서 가서 의원을 모셔오너라!"풍씨 어멈도 지금은 강유영과 옥신각신할 여유가 없었기에, 근처에 있던 시녀에게 호통쳤다.지목당한 시녀가 부리나케 밖으로 달려 나갔다."부인, 조금만 참으십시오. 소인들이 안으로 모시겠습니다."풍씨 어멈은 의원이 당도했을 때 한씨가 바닥에 쓰러져 뒹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체통에 어긋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시녀들을 불러 부인을 방 안으로 옮기라 명했다.강유영은 뒷걸음질을 치며 멀찌감치 자리를 비켜주었다.문득 일전에 왕연령이 낙마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그녀는 주제넘게 왕씨 집안사람들에게 부상자를 함부로 옮기지 말라고 참견했었다. 당시에는 순수한 호의로 건넨 조언이었지만, 돌아온 것은 상대의 모욕과 원망뿐이었다.그러니 이제 와서 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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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8화

조원철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 시녀를 바라보았다.강유영도 의아한 얼굴로 그쪽을 바라보았다.진국공에게 변고가 생겼다니?한씨가 집안의 첩실 중 누군가에게 손을 쓸 것이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설마 진국공에게까지 손을 뻗쳤단 말인가?그녀는 저도 모르게 조원철을 바라보았다.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있는 것을 보니, 그 역시도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다."무슨 일인데 그리 체통 없이 소리부터 지르느냐!"풍씨 어멈은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엄한 목소리로 시녀를 꾸짖었다.한씨의 상태가 걱정되어 속이 타들어 가던 참이라, 시녀가 뭐라 외치는지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이거 좀 놓고 저 아이한테 말해 보라 하거라. 나으리께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게냐?"한씨는 고통 속에서도 풍씨 어멈을 밀쳐내고 계단 위에 주저앉았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혔지만, 정신만은 유난히 또렷했다. 시녀의 말을 듣고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아픔을 불사하고 물은 것이다."나으리께서 이 부인의 처소에서 무언가를 드시고는 갑자기 극심한 복통을 호소하셨습니다. 이 부인께서 이미 사람을 보내 의원을 모시러 갔습니다...."시녀가 황급히 대답했다."어찌 이런 일들이 한꺼번에 터진단 말이냐."말을 마친 한씨는 강유영을 힐끗 쳐다보았다.연씨 쪽은 왜 잠잠한지, 어쩌다가 진국공이 탈이 났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진국공이 복통을 앓는 것이 연씨가 아픈 것보다 훨씬 설득력이 컸다.나중에 노부인이 부른 도사가 와서 입을 떼면, 강유영이 액운을 몰고 와 집안 전체에 화를 미친다는 가설이 사실이 될 것이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한씨는 조원철을 힐끗 보았다. 아직 강유영에게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았는데 벌써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지금 당장 그가 자신과 강유영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변명한다 해도 믿을 수 없었다.이번에야말로 기필코 강유영을 내쫓아 후환을 없애버릴 것이다.그 생각을 하니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라, 다리의 통증마저 잊히는 듯했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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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9화

이곳은 강유영의 처소였으니, 가장 먼저 의심의 화살이 향한 곳은 당연히 강유영이었다.조원철도 깊고 짙은 눈동자를 들어 강유영을 응시했다.강유영은 일찍이 대비해 둔 터라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애써 긴장을 늦추지 않고, 까맣고 투명한 눈동자를 굴리며 짐짓 놀란 기색을 꾸며냈다."어찌 이런 일이....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그녀는 이 일이 이화의 짓이라고 섣불리 폭로하지 않았다. 한씨가 직접 캐내게 두는 편이 훨씬 나았다.말이 많으면 꼬투리를 잡히는 법이다.괜히 입을 열었다가 오히려 한씨의 의심만 살 뿐이었다."어멈, 당장 낱낱이 조사하거라!"한씨가 분노한 목소리로 호령했다.진국공부의 안살림을 물려받은 이후, 그녀는 안주인으로서의 체통을 지키느라 이토록 크게 화를 낸 적이 드물었다.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이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뼈를 파고드는 다리의 고통만으로도 이미 짜증이 치솟는데, 자신이 이 꼴이 된 것이 누군가의 음모 때문이라는 소리를 듣자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여태껏 그녀가 남을 쥐락펴락했으면 했지, 그녀를 상대로 이런 음모를 꾸민 자는 없었다."예, 부인."풍씨 어멈은 곧바로 강유영을 향해 허리를 살짝 굽히며 말했다."유영 아씨, 결례를 좀 범해야겠습니다. 여봐라, 저기 있는 네 사람 모두...."이 요월원에는 강유영을 포함해 총 네 사람뿐이었다.조사를 하려면 당연히 강유영 일행을 모두 가두고 심문해야 마땅했다.강유영은 입을 꾹 다문 채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아직 진상이 밝혀지지도 않았는데, 풍씨 어멈은 주종 네 사람을 모두 잡아들이라 명했다. 믿는 구석이라곤 당연히 한씨의 권세였다. 그녀가 뒤를 봐줄 사람 하나 없는 처지라고 대놓고 얕보는 것이다.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무리 한씨라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잠깐."조원철이 풍씨 어멈의 말을 끊었다."세자"풍씨 어멈은 감히 그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청운."조원철의 부름을 들은 청운이 앞으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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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0화

그 순간, 조씨 노부인을 향한 한씨의 혐오감은 극에 달했다."당장 저것을 끌어내어 곤장을 쳐죽여라!"한씨가 손을 뻗어 이화를 손가락질하며 호령했다."부인,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부인을 해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어멈들에게 양팔을 붙잡힌 이화는 혼비백산하여 발버둥 쳤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았다.그렇게 요동을 치는 바람에 품속에 숨겨두었던 약병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그 안에 담겨 있던 곽풍밀지가 사방으로 튀었고, 곽향 냄새가 순식간에 마당을 가득 채웠다.이는 이화의 죄를 더욱 명백하게 입증한 셈이었다.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한씨가 그녀의 변명 따위를 들어줄 리 만무했다. 한씨는 다시금 언성을 높였다."쳐라! 아주 뼈가 으스러지도록 쳐서 숨통을 끊어놓아라!""아씨, 유영 아씨! 제발 소인을 좀 살려주십시오. 소인이 다 잘못했습니다…."이화는 질질 끌려서 강유영의 곁을 지날 때, 어떻게든 그녀의 치맛자락이라도 붙잡으려 허우적거렸다.죽음이 코앞에 닥치자 뼛속 깊이 후회가 밀려왔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강유영을 그리 무시하는 게 아니었다. 좀 더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함정을 팠어야 했다. 결국 강유영의 수에 완전히 놀아난 꼴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리 없었다.강유영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돌려버렸다.처절한 비명은 점점 멀어지더니 이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하지만 이화의 그 절망적인 눈빛만은 계속해서 그녀의 눈앞에 아른거렸다.이화가 이리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 것은 그녀가 판을 짠 결과였다. 간접적으로나마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셈이었다.하지만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한씨와 조씨 노부인이 그녀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는 마당에, 살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한발 앞서 움직여야만 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 죽어 나간 것은 이화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을 것이다."괘씸한 것."한씨는 손으로 바닥을 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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