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Chapter 371 - Chapter 380

460 Chapters

제371화

풍씨 어멈을 비롯한 시종들이 한씨를 호위하며 밖으로 나섰다.장 의원도 약상자를 메고 그 뒤를 따랐다.조원철은 시선을 돌려 강유영을 바라보며 짧게 말했다."따라오너라.""어디로 말씀입니까?"강유영은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표정을 살폈다."아버지께서 편찮으신데, 가봐야 하지 않겠느냐?"조원철이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되물었다."아, 예."강유영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고개를 숙인 채 그의 뒤를 따랐다.그녀는 조원철이 자신에게 책임을 추궁할 줄로만 알고 긴장했던 것이다.평상 위, 진국공은 안색이 검푸르게 질린 채 고통으로 정신이 혼미해져 있었다. 식은땀이 베갯잇을 흠뻑 적셨다.이를 악물었지만, 끊어질 듯한 신음 소리가 잇몸 틈새로 새어 나왔다. 그는 몸은 둥글게 웅크리고 두 손은 아랫배를 꾹 누른 채, 극심한 고통에 온몸을 떨고 있었다.이씨와 조사예 모녀는 한쪽에 서서 강 태의가 진맥하는 모습을 근심 어린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임성아는 난생처음 겪는 상황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그녀 역시 어찌 된 영문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진국공은 날이 어두워질 무렵 그녀의 방에 들었다. 그녀는 이씨가 시킨 대로 제비집 보양식을 진국공에게 올리며, 이씨가 자신에게 하사한 것을 나으리를 위해 특별히 남겨두었다고 말했다.그런데 진국공이 그것을 먹고 이 지경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어쩌면 이씨가 국공부로 돌아오기 위해 자신을 이용한 뒤, 이제 쓸모가 없어지니 하루빨리 제거하려고 덫을 놓은 것은 아닐지 의심스러웠다."중독 증세입니다."강 태의가 손을 거두며 이씨에게 다급히 외쳤다."어서 소금물을 타 오게 하세요!"소금물은 억지로 속에 든 것을 토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어서 다녀오너라!"이씨는 황급히 시녀에게 명했다.시녀가 허둥지둥 달려가더니, 이내 소금물을 한 대야 가득 떠 왔다.강 태의는 사발에 소금물을 가득 퍼담으며 이씨에게 지시했다."어서 나으리를 부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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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2화

"제비집이오."진국공이 침상 머리맡에 놓인 사발을 가리켰다.그 안에는 먹다 만 제비집이 반쯤 남아 있었다.한씨는 그것을 보자마자 흠칫 놀랐다.안 그래도 창백했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핏기가 가셨다.그 제비집은 그녀가 약을 탄 것이었다.분명 춘화를 시켜 연씨에게 보내라 명하였는데 어쩌다 이씨의 처소로 굴러들어와 진국공이 먹게 되었단 말인가?'멍청한 것, 대체 일을 어찌 처리했길래!'장 의원은 사발을 들어 살피다가 제비집을 조금 덜어내어 코끝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이어 은침을 꺼내 찔러보고는 단호히 말했다."피마자로군. 속은 비웠습니까?"강 태의는 조금 전의 있었던 상황을 상세히 설명했다.장 의원은 진국공의 맥을 짚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제때에 속을 비워서 독 기운이 오장육부까지는 스며들지 않았습니다. 나으리께서는 며칠간 되도록 심심하게 드시고, 기름진 고기류는 피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강 태의도 곁에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진국공은 어두운 표정으로 짧게 대꾸했다.그는 고개를 들고 한씨를 바라보았다.평소 한씨가 안채를 어떻게 다스리든 그는 간섭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 자신에게까지 독을 쓴 마당에 이 일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했다. 다만 두 의원이 자리하고 있으니 지금 당장 추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장 의원은 다가가 한씨의 다리뼈를 맞췄다.강 태의도 곁에서 거들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한씨의 오른쪽 다리는 단단히 고정되었다.두 의원 역시 양반가 안채의 내밀한 사정에 호기심을 갖는 건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처치를 마친 그들은 진료비를 챙겨 곧장 자리를 떴다.방 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아랫사람들을 모두 물리시오."진국공이 몸을 일으켜 침상 머리맡에 기대며 말했다.한씨가 손짓을 하자, 풍씨 어멈이 시종들을 거느리고 방을 나갔다.한씨는 나가는 어멈에게 나직이 명했다."가서 춘화를 데려오거라."강유영은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슬며시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이때 조원철의 커다란 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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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3화

한씨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태연한 기색을 유지했다.이 제비집은 춘화의 손을 거쳐 이씨와 조사예에게 넘어갔고, 종국에는 진국공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여기에 얽힌 사람도 이렇게나 많으니, 어떻게 파헤치든 자신에게까지 불똥이 튈 리는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그렇습니다."조사예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한씨는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내가 각 처소에 물건을 하사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여태껏 먹을 것에 독이 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 그런데 지금 보양식이 너희 세 사람의 손을 거쳐 나으리의 입에 들어갔고 이런 사달이 났다. 너희 셋 중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것이냐?""저희와는 무관한 일입니다…."이씨는 진국공을 살피며 그가 편을 들어주기를 바랐다.하지만 진국공은 그녀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있었다."원철아, 네가 보기엔 이 일을 어찌해야겠느냐."한씨는 조원철을 바라보며 도움을 청했다.다리가 끊어질 듯 아파 더는 실랑이를 벌일 기력이 없었다.어차피 이 일은 어떻게든 춘화가 다 뒤집어쓰게 될 것이다."넷째 네가 보기엔 어찌해야 할 것 같으냐?"조원철은 조사예를 힐끗 살피며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조사예는 뜻밖의 물음에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전… 전 잘 모르겠습니다…."평소 얄팍한 잔머리는 잘 굴렸지만, 이번 일은 섣불리 나설 만한 가벼운 사안이 아니었다. .괜히 엮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조원철을 내심 두려워하고 있던 터라, 순간적으로 어찌 대답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너는 어찌 생각하느냐?"조원철은 시선을 돌려 강유영을 바라보았다.조사예에게 먼저 물어본 뒤 강유영에게 물어봤으니, 누가 보아도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장 의원님께서 독의 정체가 피마자라 하셨습니다. 집안사람 중 누가 나가서 그것을 사 왔는지 조사해 보면 단서가 나오지 않겠습니까?"강유영은 눈을 깜박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조원철이 자신을 시험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사실 그가 묻지 않았더라도, 그녀는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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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4화

방 안의 모든 이의 시선이 조씨 노부인에게 쏠렸다.사람들은 급기야 무릎을 굽혀 예를 올렸다.강유영은 이 틈을 타 구석으로 몇걸음 더 물러섰다.그녀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는 것에 익숙했다.조씨 노부인이 행차했으니, 드디어 고부간의 기싸움이 벌어질 차례였다.두 사람 모두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니, 앞으로 전개가 어떻게 돌아갈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고개를 들어 침상에 기대어 있는 진국공을 살폈다.진국공이 버티고 있으니 일이 커지지는 않겠지만, 그가 과연 누구의 편을 들어줄지가 관건이었다.조씨 노부인은 화씨 어멈의 부축을 받으며 우뚝 서서 좌중을 둘러보았다.짙은 자줏빛에 금실을 수놓은 저고리를 입고 순금 장신구로 머리를 치장한 자태는 그야말로 귀티가 흐르고 기품이 넘쳤다. 누가 보아도 세가의 노부인다운 위엄이 넘쳤다.강유영은 화씨 어멈을 잡은 노부인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가 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필히 치미는 화를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어머니, 앉으시지요."진국공이 몸을 일으키며 자리를 권했다.조씨 노부인은 아무 말 없이 다가가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방 안의 사람들도 모두 공손히 몸을 돌려 노부인을 향해 섰다.방 안은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이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감히 입을 떼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조씨 노부인은 팔걸이에 손을 얹은 채 주위를 둘러보더니, 한씨에게 시선을 고정했다."네가 이화를 사람을 시켜 이화를 때려죽였다고 들었다."그녀는 한씨의 다친 다리를 보았고, 부상 정도와 자초지종까지 이미 낱낱이 파악했다.하지만 속으로는 한씨가 그저 미련해서 고작 그따위 일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부상이나 당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무능하긴.'무능한 데다 오만하기까지 했다. 감히 시어머니의 허락도 없이 기분대로 사람을 처단하다니, 이는 명백한 도발이었다."어머니, 고정하십시오."한씨는 고개를 숙이면서도 결코 물러설 기미는 없었다."이화가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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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5화

그 배후의 인물은 당연히 조씨 노부인이었다.노부인은 한씨가 조원철의 혼사를 쥐락펴락하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장부에서도 이렇다 할 흠을 잡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안채의 지배권을 빼앗으려 드는 것이다."무례하다!"조씨 노부인은 탁자를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한여옥, 네가 진국공부 안주인이라 뭐든 네 마음대로 하겠다는 뜻이냐?"노부인은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질러 놓고 발뺌하는 것도 모자라,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한씨의 모습에 분노가 치밀었다."당치도 않습니다."한씨는 고개를 숙였다."다만 나라에는 국법이 있고 가문에는 가문의 법도가 있는 법입니다. 춘화는 잔인한 짓을 저질러 나으리를 다치게 했습니다. 오늘 저 아이를 그냥 살려둔다면, 내일은 또 누군가 본받을 것입니다. 그리되면 집안의 기강이 무너질 겁니다. 그러면 앞으로 제가 무슨 수로 집안을 이끌겠습니까.""기강을 잡지 못하겠다면 마침 다치기도 했으니, 더는 나설 필요 없다. 창고 열쇠를 내놓거라. 이 늙은이가 아직은 정정하니 당분간은 너희를 대신해 관리해 주마."조씨 노부인은 턱을 치켜들고 한씨를 흘겨보았다.한씨가 제 무덤을 판 이상, 자신이 안채의 권리를 거둬들인다 해도 명분이 있었다.그 말에 한씨의 안색이 확 변했다.집안의 관할권은 그녀의 목숨줄이나 다름없었다. 절대 남에게 들켜서는 안 될 은밀한 일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노부인이 창고 열쇠를 쥐게 된다면, 그간 벌인 일들이 탄로 날 위험이 컸다.그녀가 미처 입을 떼기도 전에 이씨가 먼저 나섰다."노부인, 고정하십시오. 옥체가 상하실까 염려됩니다."이씨는 일찍이 때를 엿보고 있다가, 한씨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주제넘게 나서서 송구하오나, 부인께서도 이만 노여움을 푸시지요. 춘화가 큰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허나 저희 나으리께서는 늘 효를 최우선으로 여기셨고, 부인 역시 효심이 깊으십니다. 그러니 노부인의 뜻에 따라 춘화의 목숨만은 살려주고 밖으로 내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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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6화

노부인이 장부를 뒤지기 시작한 시점부터 한씨는 이미 철저한 대비를 해두었다.지금 당장 노부인이 살림을 넘겨받는다 해도 단기간에는 이렇다 할 흠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은자 또한 창고에 얼마 남겨두지 않았다. 어차피 노부인의 수중에도 따로 모아둔 재산이 적지 않을 것이다."물론이지."조씨 노부인은 턱을 치켜들며 뼈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안심하거라. 네가 안채를 맡았던 지난 몇 년간의 장부도 내가 낱낱이 훑어볼 것이니.""그럼 어머니께서 수고 좀 해주십시오."한씨는 고개를 숙이며 깍듯이 대답했다. 그러고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임성아를 흘끗 바라보며 물었다."이 아이는 나으리께서 새로 품으신 아이입니까?"보는 눈도 많은데 대놓고 그런 질문을 받자, 진국공은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나이도 적지 않은데 이런 일이 생겼으니 부끄러울 만도 했다.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경성에서는 흔히 벌어지는 일이었다.여든 먹은 노인도 열여덟 살 꽃다운 처녀를 첩으로 맞이하는 일이 파다했다."이름이 무엇이냐?"한씨가 물었다."임성아라 하옵니다."임성아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럼 어머니께서 수고스럽겠지만 조촐하게라도 식을 치러, 이 아이에게 첩실의 명분을 내려주시지요."한씨는 제법 관대하게 제안했다.이것이 이씨의 얄팍한 수작이라는 것쯤은 단번에 알아챘다. 사내란 본디 새로운 것을 탐하기 마련이니, 임성아가 이씨의 처소에 머문다면 진국공도 앞으로 이쪽으로 자주 발걸음을 할 것이다.차라리 임성아를 정식 첩실로 들여 거처를 따로 내어주는 편이 나았다. 그리되면 이씨가 임성아의 덕을 볼 일도 없을 터였다.운이 좋으면 두 사람이 서로 물어뜯고 싸우며 원수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그것도 좋겠구나."조씨 노부인도 고개를 끄덕였다.남의 눈을 피해 몰래 만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니, 정식으로 집안에 들이는 편이 깔끔했다.오직 조사예와 이씨 두 사람만 표정이 어두워졌다.이씨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한씨는 한번 앙심을 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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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7화

조씨 노부인이 이러는 것은 단순히 집안의 씀씀이를 줄이기 위함만이 아니라, 기강을 세우려는 의도도 다분했다. 오랫동안 살림에서 손을 떼고 있었으니, 위엄을 보여주지 않으면 아랫사람들이 승복하지 않을까 염려한 것이다.문밖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문 쪽을 바라보았다. 단비가 물건을 깜빡하여 되돌아온 줄 알았건만, 뜻밖에도 방 안으로 들어선 이는 조원철이었다.그는 푸른빛이 도는 둥근 깃의 도포 차림에 수려한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가 몰고 온 옅은 바람에 촛불이 가볍게 일렁였다. 벌어진 어깨와 긴 다리는 좁은 방 안에서 유난히 도드라졌다.강유영은 순간 몸을 바짝 긴장되며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번 처사가 너무 과했다고 책임을 추궁하러 온 것이 분명했다.그런데 뜻밖에도 그의 손에는 연꽃 몇 송이와 연밥이 들려 있었다.그는 곧장 화장대 앞으로 다가가, 화병에 연꽃을 꽂고는 정갈하게 모양을 정돈했다.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조원철의 손은 무척이나 곧고 정갈했다. 하얀 피부에 길게 뻗은 손가락과 마디가 선명하게 도드라져 보였다.채 피지 않은 꽃송이들은 그의 손길이 가볍게 어루만지자 꽃망울이 탐스럽게 피어나며 연노란 꽃술을 드러냈다. 이슬을 머금은 연분홍빛 꽃잎이 촛불에 비치고 푸른 연밥과 어우러지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우아함이 넘쳤다.손을 거둔 조원철은 고개를 기울여 화병을 유심히 살피더니, 그중 연밥 하나를 빼 들고 강유영에게 다가왔다.강유영은 그가 다가오자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차마 눈을 맞추지 못한 채 서책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그가 한씨에게 반격하는 것을 묵인하긴 했지만, 이렇게 크게 다치게 만들라고 허락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 죗값을 묻기 위해 찾아온 것이 틀림없었다.조원철은 강유영의 앞에 서서 걸음을 멈췄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풀이 죽어 있었다. 마치 뜨거운 뙤약볕에 시들어버린 연약한 꽃처럼 안쓰러워 보였다.강유영은 그의 커다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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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8화

"아닙니다,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이화가 했습니다."강유영은 다급히 해명했다.이화는 그녀가 넘어지는 시늉만 할 줄 알고 돌판 아래에 손을 써둔 것이었다. 한씨는 일부러 다가와 그녀를 모함하려 했으나, 이화가 만든 덫이 그토록 지독하여 제 다리가 부러질 줄은 꿈에도 몰랐을 터였다.이 모든 정황을 조원철이 모를 리 없었다."네가 한 짓도 아니고 이화 역시 죗값을 치렀거늘, 어찌하여 내게 미안하다는 것이냐?"조원철은 연자의 초록색 껍질을 조금씩 벗겨내며 되물었다.강유영은 그 말을 듣고 물기를 머금은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안개가 낀 듯 흐릿한 눈망울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어머니인 한씨의 다리가 부러졌는데도 자신을 탓하지 않겠다는 뜻인가.조원철은 뽀얗고 부드러운 연자를 반으로 쪼개어 쓴맛이 나는 심을 제거한 뒤, 그녀의 입가로 가져갔다.그녀는 얌전히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가볍게 씹으니 아삭하고 향긋한 식감과 함께 은은한 단맛이 혀끝에 맴돌았다.입을 오물거리며 천천히 씹던 그녀의 시선은 멍하니 그의 옷깃에 수놓인 구름무늬에 머물렀다.대부분의 경우, 그녀는 그의 속내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본래대로라면 그가 벼락같이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런데 화를 내기는커녕, 손수 신선한 연자를 까서 먹여주기까지 하니,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해 주는 것 같기도 했다."이번 일은 네가 아주 치밀하고 완벽하게 계획을 짰다. 참으로 잘했어."조원철이 다시 연자 한 알을 까서 그녀에게 먹여주었다.강유영은 눈을 깜빡이며 그를 응시했다.아무리 봐도 이는 포상 같았다.하지만 어머니의 다리를 부러뜨린 사람에게 상을 내리다니,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다."마음이 편치 않으냐?"조원철이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아닙니다."강유영은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이화와 춘화가 죽었기 때문이겠지."그는 그녀의 대답은 듣지 못한 것처럼 무심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그의 눈치를 살피며 기어들어 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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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9화

조원철의 짙은 눈동자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었다. 일렁이는 촛불이 비치는 눈빛 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숨겨져 있는 듯했다."적군 역시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고, 그들 중 누구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저 나와 내 부하들과 입장이 달랐을 뿐이다. 내가 그들을 베지 않으면, 그들이 나를 베고, 내 부하들을 베고, 내 부모와 형제자매를 베고, 이 나라의 백성들을 마음대로 도륙할 테지. 유영아, 그들도 잘못이 없고 나 또한 잘못이 없다. 이 모든 것은 그저 상황이 우리를 그리 만든 것뿐이다. 내 말을 알아듣겠느냐?"조원철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두 손으로 그녀의 가냘픈 어깨를 쥐었다. 느릿하지만, 단호한 타이름이었다."압니다, 제게도 잘못은 없습니다. 제가 그들을 먼저 치지 않았다면, 그들이 저를 해치고 오씨 어멈과 단비, 서유까지 모두 죽음으로 내몰았을 테죠…."강유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녀는 그의 뜻을 온전히 이해했다.그녀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곁에 있는 모든 이가 그녀로 인해 화를 입었을 것이다.조원철의 말이 맞았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더라 곁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이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나절 내내 가슴을 짓누르던 체증이 서서히 흩어졌다."명심하거라. 절대 마음 약해져서는 안 된다." 조원철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싸고 가볍게 어루만졌다. "마음이 무른 자는 오래 살아남지 못하는 법이다.""명심하겠습니다."강유영은 그의 손을 밀어냈다. 얼굴이 아까보다 더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몸을 꼼지락거렸다.이 자세는 너무 수치스러웠다. 소설에 나오는 신혼부부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과 그가 이러고 있는 것은 도무지 도리에 맞지 않았다."난 이틀 뒤에 호주로 떠날 것이다."조원철은 그녀를 품에 더 꽉 끌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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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0화

"제가요?"강유영은 까만 눈동자를 깜빡이며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농… 농담하지 마세요. 혼인도 하지 않은 후원의 여인이 어찌 먼 길을 떠난단 말씀입니까? 오라버니께서 말씀하신다 해도,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모두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그녀는 조원철이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처음에는 깜짝 놀랐으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마음이 놓였다.조원철이 그녀를 데리고 먼 길을 떠나려 한다면, 한씨와 노부인이 필사적으로 막아설 것이다.그러니 이 일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다."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조원철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대꾸했다."아씨, 드실 것을 좀 사왔습니다."이때 문밖에서 단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유영은 화들짝 놀라 조원철의 품에서 벗어나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몸을 숙여 치맛자락을 정리하며 말했다."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가보십시오.""나도 아직 저녁을 먹지 못했다."조원철은 옷자락을 정돈하며 담담히 대꾸했다.강유영은 그 말을 듣고 흠칫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남아서 식사까지 하고 가겠다는 말일까?그녀는 잠시 주저하다가 말했다.“단비가 사온 것은 모두 제가 즐겨 먹는 것들입니다. 오라버니의 입맛에 맞지 않을 거예요.”눈앞에 그가 있으면 늘 마음이 혼란러워, 뭘 해도 영 불편하기만 했다. 그래서 그저 빨리 그를 돌려보내고 싶을 뿐, 함께 식사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난 반찬을 가리지 않는다."조원철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짙은 눈빛으로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그럼 여기서 드세요."강유영은 차마 그와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를 대놓고 내쫓을 수는 없었다.두 사람은 침소를 나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조원철은 아주 자연스럽게 단비의 손에서 그릇을 넘겨받아 강유영에게 밥과 반찬을 덜어주었다.단비는 고개를 숙인 채로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단비야, 너도 연자 먹을래?"회랑 밖에서 청류가 단비를 불러세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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