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Chapter 501 - Chapter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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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1화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말거라."조원철은 허리춤에 찬 금인장을 풀었다.강유영은 그가 뭘 하려는지 몰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다가와 불쑥 손을 뻗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뒷걸음질 쳤다."왜 피하느냐."조원철이 그녀의 허리띠를 잡아당기더니, 단숨에 금인장을 매달았다."안 됩니다...."강유영은 황급히 그것을 풀려 했다.이것은 그의 금인장이었다. 그의 신분과 권력을 상징하는 물건인데, 자신이 어찌 찰 수 있단 말인가."가만있거라."조원철이 그녀의 손을 막았다.강유영은 고개를 들어 난처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맑은 눈동자에는 경악과 불안, 초조함이 가득했다.이 금인장은 그의 권력과 신분을 증명하는 유일한 신물이다. 인장이 없으면 직권을 행사할 수 없고, 도장이 찍히지 않은 문서는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다. 금인장을 잃어버리면 가볍게는 중죄요, 무겁게는 관직을 잃고 목이 달아날 수도 있다. 결코 장난으로 여길 물건이 아니었다."너는 심성이 곱고 귀한 아이이거늘, 어찌 스스로 부끄러워하느냐. 이것이 네 뒷배가 되어줄 것이니, 앞으로는 분수에 맞지 않는다거나 네가 부족하다는 말은 꺼내지 말거라."조원철은 한 걸음 다가서서 그녀의 잔머리를 정돈해 주었다. 그의 말투에는 드물게 다정함과 애틋함이 배어 있었다.강유영은 허리춤의 금인장을 내려다보며 속절없이 눈시울을 붉혔다.그저 그녀가 주눅 들고 자책하는 게 싫어서, 자신의 목숨과 앞날이 달린 금인장을 채워주다니. 금인장이 뒷배가 되어줄 거라니. 목석이 아닌 이상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하지만 그의 속마음은 대체 무엇인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어째서 매몰차게 굴다가도 이리 다정하게 대하는 걸까. 변덕스러운 그의 속을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미래가 없다는 것.그녀가 굽히고 들어가 평생 빛을 보지 못하는 외실이 되겠다고 체념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결코 그럴 생각이 없었다."왜 또 우느냐."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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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2화

강유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친숙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안면이 있는 여인들이라 해봐야 예전에 조연화와 함께 그녀를 괴롭히던 이들이었다. 굳이 인사를 나눌 필요가 없었다.조씨 노부인이 자리에 앉으면 그녀도 따라 앉을 생각이었다. 얌전히 연회를 즐기다 조용히 돌아가면 그만이었다.하지만 노부인은 사람들과 회포를 푸느라 당장 자리에 앉을 기색이 없었다. 그녀는 내심 아쉬운 듯 입술을 꾹 깨물며 옆으로 살짝 비켜섰다.다행히 연회에 참석한 여인들 모두 화려하게 치장한 터라, 그녀의 옷차림이 꽤 값비싼 것임에도 그리 눈에 띄지는 않았다.강유영은 안도하며 저도 모르게 조원철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그는 단연 눈에 띄었다. 그녀는 단번에 그를 찾아냈다.조원철은 몇몇 조정 대신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대신들이 무언가 아부하는 말을 건네는 듯했으나, 그는 서늘하고 담담한 표정으로 가볍게 고개만 끄덕일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그때 귓가에 웃음소리가 들려왔다.강유영이 무심코 고개를 돌려보니, 조연화와 한 무리의 귀녀들이 경화 공주를 에워싸고 웃고 떠드는 중이었다. 조사예도 곁에 있었지만 대화에 끼어들지는 못하고 있었다."유영 언니, 사예 언니 좀 보세요."어느새 다가온 조월아가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아무도 상대 안 해주는데 굳이 저렇게 비위를 맞추려 애쓰고 있네요.""월아 아씨, 말씀 삼가세요."강유영이 서둘러 그녀를 제지했다.이곳은 황궁이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잘못했다간 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게다가 남들이 들으면 진국공부의 자매들이 사이가 안 좋다고 비웃을 게 뻔했다. 그리되면 조월아만 화를 입을 것이다. 조씨 노부인은 가문의 명성을 무엇보다 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조월아도 말실수를 깨달았는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다시 고개를 돌리던 강유영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경화 공주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경화 공주는 속내를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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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3화

진국공부의 사정은 경화 공주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조원철이 변방에 있을 때만 해도 이 양녀는 제대로 된 옷조차 입지 못했다. 하물며 이리 화려한 옷과 장신구는 꿈도 꿀 수 없었다.보아하니, 소은경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애써 조원철에게 약을 먹여 놓았더니, 그 단물은 눈앞에 있는 진국공부의 양녀가 홀랑 채간 셈이었다.겉보기엔 그토록 단정하고 고결해 보이더니, 뒤로는 양동생과 방탕하게 놀아나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바꿔 말하면 조원철도 아예 공략하지 못할 상대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 일이다.당장 눈앞의 일부터 해결해야 했다. 감히 자신의 단물을 가로챈 강유영을 이대로 순순히 놔둘 수는 없었다.강유영은 몸을 일으키며 경계하듯 손을 뒤로 슬쩍 빼 공주의 손길을 피했다.무척 재빠른 반응이었다. 본래 남과 닿는 것을 꺼리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경화 공주에 대한 경계심이 극에 달해 있었다."내가 부축하겠다는데 내 손길이 싫어서 이러는 것이냐?"경화 공주의 말투가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강유영의 눈앞에 손을 불쑥 내밀며 차가운 눈빛으로 강유영을 노려보았다."공주 전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강유영도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대놓고 공주의 체면을 깎아내릴 수는 없었다.그녀가 손을 뻗어 경화 공주의 손끝에 살짝 대었다가 거두려는 찰나였다.예상치 못하게 경화 공주가 그 틈을 노리고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다음 순간, 우윳빛 연고가 그녀의 손등에 듬뿍 발라졌다. 끈적이는 연고에서는 기이한 향기가 풍겼다.강유영은 본능적으로 손을 빼려 손목을 비틀었다.하지만 경화 공주는 그녀의 손을 단단히 붙잡고 연고를 문질러 펴 발랐다. 그러고는 웃으며 말했다."강 낭자, 겁먹지 말거라. 이건 황궁에만 있는 설중춘신이라는 향고다. 손이나 얼굴에 바르면 살결이 무척 고와지지. 네 미모가 하도 뛰어나 마음이 동하여 특별히 조금 나누어 주는 것이다. 설마 거절하지는 않겠지?"그렇게 묻는 사이, 그녀는 이미 강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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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4화

강유영은 올 때 지나쳤던 어화원 연못이 떠올랐다.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가서 손을 씻고 와도 늦지 않을 듯했다.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녀는 경화 공주 쪽을 바라보았다.경화 공주는 손수건을 들고 여유롭게 손을 닦고 있었다.강유영과 시선이 마주친 공주의 얼굴에는 의기양양한 미소가 번졌다.조연화와 뭇 귀녀들이 공주 곁을 에워싸고 있었다.그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경화 공주의 태도로 보아 곧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길 것임을 눈치채고, 저마다 고소하다는 듯 강유영을 쳐다보았다.강유영은 눈을 내리깔고 자신의 손등을 힐끗 살폈다.아직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겉보기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하지만 더 지체할 수는 없었다.시간이 얼마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어화원 연못으로 가서 손을 씻어야 했다.경화 공주가 그녀를 막아설지도 모른다.하지만 시도조차 안 해보고 당할 수는 없었다.그녀가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고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이었다."유영아."서준이 문지방을 넘어 이쪽으로 다가왔다.그는 둥근 깃의 짙은 붉은색 장포를 입고 검은 가죽신을 신고 있었다. 느릿하게 걸음을 옮길 때마다 허리춤의 옥패가 가볍게 흔들거렸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어딘지 서늘해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옷차림 덕에 황실 특유의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뿜어져 나왔다.그는 평소처럼 그녀를 불렀다. 마치 그간의 일들은 전혀 없었던 것처럼, 약방에서 함께 일할 때처럼 친근한 어투였다."서왕 전하."강유영은 그를 보자 걸음을 멈추고 무릎을 굽혀 예를 올렸다."오랜만이구나. 이리 차려입으니 참으로 곱다."서준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머물렀다. 눈빛에는 감탄이 가득했다.그녀가 이리 화사하고 밝은 색상의 옷을 입은 것은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었다. 본래도 빼어난 미모가 옷 덕분에 한결 생기 있어 보여, 그는 차마 눈을 떼지 못했다.이때 조원철도 몸을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경화 공주는 그 모습을 보고 강유영과 서준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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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5화

수면이 일렁이며 그녀의 흐릿한 얼굴을 비추었다.문득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물에 비친 그림자 속에 다른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강유영은 온몸이 굳었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수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뒤에 선 자가 누구인지 확인할 기회를 엿보았다.하지만 미처 확인하기도 전에 등 뒤에 서 있던 인영이 불쑥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밀쳤다.강유영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몸이 물속으로 곤두박질쳤다.물에 빠지던 찰나, 고개를 돌린 시야에 들어온 얼굴은 경화 공주였다.다음 순간, 사방에서 차가운 물이 밀려와 그녀의 숨통을 조였다.수영을 모르는 그녀는 몸을 가눌 수 없었다. 마치 수면 아래 뭔가가 그녀를 수저로 끌어내리는 듯했다.비리고 차가운 연못 물이 코와 입으로 들이닥쳤다. 눈앞이 새하얘지고 의식이 바람에 날리는 등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이대로 물에 삼켜질 판이었다.그 순간, 머릿속을 스친 것은 뼈저린 후회였다.전에 조원철이 수영을 가르쳐주겠다고 했을 때, 무섭다는 핑계로 계속 미루고 있었다.나중에 배우겠다고 고집을 피웠는데, 그게 화가 될 줄이야.'이렇게 죽겠구나.'다시는 그에게 수영을 배울 기회가 없겠지.발버둥 칠 힘마저 빠져나가며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지던 찰나였다.불쑥 단단한 팔이 뻗어 나오더니 단단한 힘으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그녀는 살아야겠다는 본능에 이끌려 상대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숨을 쉬기 위해 무작정 상대를 물속으로 짓누르며 제 몸을 수면 위로 밀어 올리려 발버둥 쳤다.이성적인 사고는 마비된 지 오래였다. 오직 살아야겠다는 생존 본능뿐이었다.조원철은 발로 물을 힘껏 차며 수중에서 몸을 지탱했다.그는 사색이 되어 날뛰는 그녀의 움직임을 단단히 제압했다. 그리고 수압을 거슬러 온 힘을 다해 그녀를 위로 들어 올렸다.마침내 강유영의 고개가 수면 위로 솟구쳤다.그녀는 입을 벌리고 공기를 깊숙이 들이마셨다. 물을 먹은 탓에 기침이 터져 나왔다.조원철도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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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6화

‘정말 크구나!’진작 강유영을 물에 밀어버렸어야 했다. 그랬다면 진작 제대로 구경했을 텐데.강유영은 점차 호흡이 안정을 되찾았다.그녀는 경화 공주의 표정을 보며 눈을 끔벅거리다가 뒤돌아 조원철을 바라보았다.경화 공주가 어딘가 이상했다. 그 표정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청운, 겉옷."조원철이 미간을 찌푸렸다. 공주를 바라보는 눈빛에 노골적인 혐오감이 스쳤다.그 역시 경화 공주가 무엇을 보는지 잘 알고 있었다.청운이 재빨리 겉옷을 벗어 두 손으로 건넸다.조원철은 옷을 받아 몸에 두르며 하반신을 가렸다.경화 공주는 쯧쯧 혀를 차며 아쉬운 듯 시선을 거두었다.'사내놈이 내게 안긴다고 손해 볼 것도 없거늘. 뭘 그리 빼는 건지.'강유영은 기운을 조금 차리고 바닥을 짚으며 일어서려 했다.조원철은 그녀를 부축하면서 겉옷으로 그녀를 단단히 감싸주었다.그의 겉옷은 그녀의 몸을 빈틈없이 덮고도 남았다.경화 공주는 두 사람의 행동을 지켜보며 속으로 비웃었다.오늘 강유영을 물에 밀어넣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없다는 걸 누가 믿겠는가. 아무 사이도 아닌데 조원철이 강유영을 저리 싸고돌 리 없었다. 강유영을 물에 밀기가 무섭게 조원철이 뛰어들지 않았던가.'조원철 저놈은 뭘 그리 점잔을 빼는지. 지 양동생이랑은 자면서 나와는 못 잘 이유가 뭐람?'"공주 전하."조원철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강유영을 등 뒤로 가렸다.경화 공주가 저지른 짓을 그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당장 황제 앞으로 끌고 가 따져 물을 참이었다."누님, 여기서 무슨 재밌는 장난을 치고 계십니까."서준이 불쑥 다가왔다.그는 입꼬리를 올린 채 무심한 미소를 지으며 느릿하게 말했다. 앞으로 다가온 그는 조원철의 등 뒤에 웅크린 강유영을 훑어보았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화사하고 사랑스럽던 이가 지금은 무척이나 처량해 보였다. 머리는 흩어지고 머리카락을 타고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엉망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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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7화

경화 공주는 그를 지나쳐 가려고 등을 돌렸다.서준의 눈빛이 너무도 섬뜩했다.하지만 그녀가 채 한 발짝을 떼기도 전이었다.서준은 손을 뻗어 그녀의 옷깃을 잡더니 단숨에 위로 들어 올렸다.허공에 두 발이 뜬 경화 공주는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서준,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 당장 내려놓지 못할까!""서왕 전하,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서왕 전하, 멈추십시오!""어서 서왕 전하를 막아라!"공주를 모시던 시녀들이 혼비백산하여 몰려들어 그를 막아섰다.하지만 그들은 서준의 주변에도 다가갈 수 없었다. 그가 가볍게 팔을 휘두르자, 시녀들은 사방으로 나뒹굴었다.서준은 경화 공주를 조금 더 높이 들어 올렸다.그의 손에 잡힌 경화 공주는 마치 맹수에게 잡힌 병아리처럼 아무런 반항도 할 수 없었다.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다. 머리 장식은 이미 흐트러지고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했다.조금 전 강유영을 괴롭히며 득의양양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조원철, 넌 공명정대한 자가 아니었더냐! 내가 명색이 공주이거늘, 어찌 이런 능욕을 당하게 둔단 말이냐! 당장 날 구하지 않고 무엇을 하느냐!"경화 공주는 발버둥 치다 신발 한 짝이 벗겨졌다. 궁지에 몰린 그녀는 조원철을 향해 소리쳤다.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앞을 막아선 커다란 뒷모습을 올려다보았다.솔직히 경화 공주의 행패는 도가 지나쳤다.그녀가 서준에게 험한 꼴을 당하는 것을 보니 속이 다 시원했다.하지만 이렇게 또 서준에게 빚을 지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마냥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서준에게 빚을 진다는 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경화 공주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조원철은 늘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는 자였다.경화 공주가 저리 소리치는데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생각에 잠겨 있을 때, 불쑥 조원철의 팔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강유영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의 손에 밀려 몇 걸음 뒷걸음질 쳤다.그녀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조원철은 서준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길을 비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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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8화

서준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얼굴에는 평소처럼 실없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방금 전 경화 공주를 물에 처넣던 악귀 같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금세 평소의 능글맞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 정도는 자신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한다는 듯이 여유로웠다."이러시면, 폐하께서 가만두지 않으실 텐데요...."강유영은 눈물이 맺힌 눈동자로 그를 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잔뜩 겁에 질린 기색이었다.사실 서준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경화 공주가 그토록 행패를 부렸으니, 조원철이라면 분명 그녀를 황제 앞으로 데려가 억울함을 따져 물었을 것이다. 그는 일개 신하이기에 공주에게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전부였다.반면 서준은 신분부터가 달랐다.애초에 비교할 수 있는 선상이 아니었다. 물론 그녀는 조원철과 서준을 비교할 생각이 없었다."그래서 그게 뭐?"서준이 코웃음을 치더니 그녀를 힐끗 보았다."네 오라비더러 얼른 씻고 옷이나 갈아입혀 달라고 하거라. 풍한이라도 들기 전에."말을 마친 그는 느긋하게 돌아섰다.그저 지나가던 길에 길가에 떨어진 쓰레기를 치웠을 뿐이라는 듯, 대단히 거만하고 여유로운 발걸음이었다."전... 그냥 저택으로 돌아가겠습니다."강유영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겉옷 안쪽으로 축축하게 젖은 옷이 몸에 찰싹 달라붙어 무척이나 찝찝했다.명문가 규수들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늘 여벌 옷을 챙겨 다닌다.오늘 입궁할 때 단비도 그녀의 옷을 챙겨두었다. 하지만 여벌 옷은 궁 밖에 세워둔 마차에 있었다.어차피 마차까지 간 마당에 굳이 연회장으로 돌아올 필요는 없었다. 차라리 그대로 저택으로 돌아가는 편이 나았다."조금 뒤 폐하께서 자초지종을 물으실 거다."조원철이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무심하고 서늘한 표정이었다.강유영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럼 어쩌란 말인가? 설마 이 꼴로 폐하를 뵈러 가야 한다는 뜻일까?"세자."그때 청류가 숨을 헐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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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9화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행히 황제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강유영은 고개를 숙인 채 벽을 따라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그녀는 먼저 치맛자락을 정돈하고 눈앞의 식기를 만지작거렸다.잠시 숨을 고른 후에야 그녀는 조심스레 사방을 둘러보았다.방금 전까지 그녀를 향하던 시선들은 모두 딴곳을 보고 있었다. 아무도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그녀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상석을 바라보았다.조원철은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상석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머리카락이 그녀처럼 반쯤 젖어 있는 것 말고는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서준은 조원철보다 윗자리에 앉아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유영은 그와 시선이 마주치기 전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서준의 윗자리에 앉은 이는 아마 태자일 것이다.예전 연회에서도 본 적이 있었지만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조원철의 군량 순시 일에 태자가 수작을 부릴까 늘 걱정이었다. 태자를 보자 그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태자를 힐끗거렸다.여인들의 자리 쪽은 이미 가득 차 있고, 오직 경화 공주의 자리만 비어 있었다.강유영은 서준이 경화 공주를 물에 처넣던 광경을 떠올렸다. 그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렸다.경화 공주는 절대 이대로 넘어갈 위인이 아니었다. 또 무슨 험한 짓을 벌일지 알 수 없었다.잠시 후, 황제가 도착했다.연회 내내 강유영은 음식 맛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오직 이 자리가 빨리 끝나 황궁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경화 공주를 멀리하는 것이 화를 피하는 유일한 길이었다.하지만 도망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님을 그녀도 잘 알았다.경화 공주는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오늘 저택으로 무사히 돌아간다 해도, 머지않아 공주가 앙갚음을 하러 직접 들이닥칠 것이다.서왕에게는 꼼짝 못 해도, 진국공부의 일개 양녀쯤 짓밟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마침내 연회가 끝났다.강유영은 사람들을 따라 일어나 황제에게 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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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0화

강유영은 조원철을 따라 자신전의 높은 문지방을 넘었다.전각 안은 무척 고요했다.문가에 서 있던 어린 내관이 조원철 일행을 보고 예를 올리며 말했다."폐하께서는 안쪽에서 옷을 갈아입고 계십니다. 전하와 세자 저하께는 잠시 기다리라 하셨습니다.""알겠다."서준이 먼저 대답하고는 앞장서서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강유영은 조원철이 먼저 걷기를 기다렸다가 그의 뒤를 따랐다.자신전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빼고 전각 안을 살펴보았다.밝은 노란색 휘장이 반쯤 드리워져 있었고, 서안 위에는 상소문이 펼쳐져 있었다. 상소문의 모서리는 백옥으로 눌러두었고, 청화백자와 붓이이 옆에 놓여 있었다. 양쪽 자단목 책장에는 수많은 서책이 꽂혀 있고, 창가 아래에는 대나무 분재가 듬성듬성 놓여 있었다. 물시계가 똑딱이는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누님, 아주 편안해 보이십니다."서준의 건들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유영은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휘장 아래 앉아 있는 경화 공주가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이미 젖은 옷을 갈아입은 후였다. 금실로 수를 놓은 화려한 붉은색 짧은 저고리에 옥빛 치마를 입고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올린 머리도 단정하게 빗어 넘겨, 연못가에서 서준에게 들려 물에 처박히던 처참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그녀의 등 뒤에서는 시녀 한 명이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다.반쯤 눈을 감고 여유를 부리던 경화 공주는 서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눈빛에는 분노가 가득했다."네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오느냐?"그녀가 이를 갈며 물었다."못 올 건 또 뭡니까."서준은 코웃음을 치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강유영은 경화 공주의 태도를 보고 속이 더 타들어 갔다.황제는 방금 전 이곳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갔다.이런 내밀한 곳에서 경화 공주가 편하게 쉰다는 것은 황제가 그만큼 그녀를 아낀다는 뜻이었다.오늘 일에 대해 황제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알 수 없었다.강유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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