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Chapter 871 - Chapter 880

1202 Chapters

제871화

강유영의 마음속에 문득 호기심이 피어올랐다.‘오늘은 안 바쁘시나?’설령 한가하더라도 한씨의 곁에 오래 머물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식사를 마친 뒤에도 어째서 자리를 뜨지 않는 걸까?강유영은 까만 눈동자를 살며시 굴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고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조원철은 한씨에게 약효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그 사실을 깨닫자 강유영도 자연스레 식사 속도를 늦췄다. 젓가락으로 밥알을 조금씩 집어 천천히 입에 넣으며 한씨의 기색을 은근히 살폈다.한씨가 망신당하는 모습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지켜보고 싶었다.“원철아, 공무가 바쁘지 않니? 식사를 마쳤으면 먼저 가 보렴.”결국 먼저 참지 못한 것은 한씨였다.그녀는 이미 몸에 이상이 생겼음을 느끼고 있었다. 온몸이 불편하고 속이 까닭 없이 후끈거렸다. 마치 오장육부 깊은 곳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불길이 핏줄을 따라 사지와 온몸 구석구석으로 번지는 듯했다.숨을 내쉴 때마다 뜨거운 열기가 목구멍을 훑고 지나갔다. 한씨는 당장이라도 옷깃을 잡아 헤치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렀다.“한 시진 뒤에 입궁할 예정입니다.”조원철은 담담히 대답했을 뿐, 자리를 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그가 태연한 얼굴로 앉아 있는 모습을 본 한씨의 속은 더욱 조급해졌다. 손끝까지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 그녀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꾸미며 강유영과 진 부인에게 시선을 돌렸다.“너희 모녀는 정원에 나가 소화도 시킬 겸 이야기라도 나누는 게 어떠니?”“유영이가 아직 식사를 마치지 않았잖아요.”진 부인이 강유영 앞의 밥그릇을 바라보며 말했다.“네, 다 먹고 나가겠습니다.”한씨는 입가에 억지 미소를 걸고 강유영을 바라보았다.그러나 강유영의 눈에는 그녀의 변화를 감출 수 없었다. 희던 얼굴은 이미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관자놀이에는 어느새 잘게 땀이 맺혀 있었다. 약효가 본격적으로 돌기 시작한 것이다.강유영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밥그릇을 두 손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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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2화

“가자.”조원철이 강유영을 불렀다.강유영은 아직 구경이 끝나지 않아 아쉬웠지만, 그의 말을 거스를 용기는 없었다. 마지못해 몸을 일으켜 문밖으로 향하면서도, 문턱을 넘기 직전 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저도 이만 가 보겠습니다.”진 부인은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씨의 붉게 달아오른 얼굴과 흐트러진 숨을 보니, 미약 따위에 당한 것만은 분명했다.그녀 역시 속으로는 이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끝까지 지켜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한씨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아쉬움을 삼킨 채 순순히 작별을 고했다.“가서 문을 잠그거라.”아직 이성이 조금은 남아 있던 한씨는 세 사람이 모두 밖으로 나가는 것을 확인한 뒤, 풍씨 어멈의 팔에서 손을 거두며 힘겹게 명했다.풍씨 어멈은 서둘러 문을 닫고 빗장을 걸었다.그러나 문을 잠그기가 무섭게 뒤편에서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놀라 뒤를 돌아본 그녀의 눈에 바닥에 주저앉은 한씨의 모습이 들어왔다.한씨는 온몸을 집어삼킨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서 몸을 뒤틀고 있었다.“부인, 제가 안으로 모시겠습니다.”풍씨 어멈은 황급히 달려가 허리를 숙이고 한씨를 부축했다.“가서… 의원을 불러오너라…….”한씨는 찢어질 듯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명했다.고통은 이미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수많은 개미 떼가 온몸을 기어 다니며 살갗과 뼛속을 갉아 먹는 듯했다. 뼈마디 사이사이가 가렵고 아파 견딜 수 없었으나, 정작 어디를 긁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도망칠 곳도, 피할 곳도 없는 고통이었다. 한씨는 차라리 이 자리에서 숨이 끊어지는 편이 낫겠다 싶을 만큼 지독한 괴로움에 몸부림쳤다.풍씨 어멈은 다급히 문을 열어 밖에 있던 하인에게 의원을 서둘러 불러오라고 명했다. 그러고는 다시 돌아와 축 늘어진 한씨를 힘겹게 부축해 침실로 옮겼다.“어리석기는.”침실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경화 공주가 나른한 몸짓으로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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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3화

“원철아, 네가 왜 들어온 게냐? 지금 어미의 몰골이 이러하니 너를 만나기가 곤란하구나.”조원철이 들어서자 한씨는 흠칫 놀라며 다급히 풍씨 어멈에게 눈짓했다. 침상 휘장을 내려 자신의 모습을 가리라는 뜻이었다.그녀는 조원철에게 이토록 처참하고 흐트러진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조원철이 이미 모든 진상을 알아차린 듯하다는 사실이었다. 아직 뭐라고 둘러대야 할지조차 생각하지 못했으니, 도저히 그와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풍씨 어멈은 한씨의 심복답게 눈빛 한 번만으로도 그 뜻을 알아차렸다. 서둘러 손을 뻗어 침상 앞의 휘장을 내린 뒤, 조원철을 향해 몸을 돌려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세자를 뵙습니다.”조원철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서늘할 만큼 무심한 얼굴로 얇은 휘장 너머, 한씨가 누워 있는 곳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 눈길을 마주한 풍씨 어멈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소리 높여 꾸짖지도 않았건만, 조원철의 눈빛은 사람 하나쯤 단숨에 베어 낼 듯 서늘했다. 침실 안의 공기마저 무겁게 가라앉는 듯해 감히 숨을 크게 내쉴 수도 없었다.“어멈, 자네는 먼저 물러가 있거라.”휘장 안에서 한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무리 궁지에 몰렸다 한들 그녀는 진국공 부인이었다. 하인 앞에서까지 제 치부를 낱낱이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예, 부인.”풍씨 어멈은 다시 예를 갖춘 뒤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물러났다.문이 닫히자 침실 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바깥에서 스며든 희미한 저녁빛이 휘장 끝에 걸려 흔들렸고, 방 안에는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약 냄새가 씁쓸하게 감돌았다.한씨와 조원철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씨는 휘장 너머에 선 아들의 기척을 의식하며 바싹 긴장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은 더욱 무거워졌다.“원철아, 무슨 말을 하려고 온 게냐?”결국 침묵을 견디지 못한 한씨가 먼저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녀의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 한 가닥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남아 있었다. 어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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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4화

이 지경까지 온 이상 더는 잡아뗄 수 없었다. 이제 한씨에게 남은 방법은 모자간의 정에 기대어 호소하는 것뿐이었다.아무리 그래도 조원철은 자신의 아들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품에 안고 조금씩 키워 낸 자식이었다.처음부터 지금까지 한씨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며 가장 큰 기대를 걸었던 아이도 바로 이 장남이었다. 조원철의 성정이 냉담하기는 해도 정이 없거나 의리를 저버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이 몸을 낮춰 몇 마디 부드럽게 달래면 이번 일도 이대로 넘어가리라 믿었다.“어머니께서는 그런 말씀까지 하실 필요 없습니다.”하지만 조원철은 한씨의 눈물 어린 호소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고요한 침실 안을 울렸다.“같은 일이 또 일어난다면, 그날로 어머니와 저의 모자간 인연도 끝입니다.”말을 마친 그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문 쪽으로 향했다.“원철아!”한씨는 끝내 참지 못하고 침상 휘장을 걷어 올리며 그를 불러 세웠다.조원철의 발걸음이 멎었다. 그러나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나도 어쩔 수 없었다. 경화 공주가 나를 협박한 것이야. 나도 정말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어.”마음이 급해진 한씨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창백한 뺨을 타고 떨어진 눈물은 아직 땀에 젖은 옷깃 위로 스며들었다.“어머니께 무슨 곤란한 사정이 있으시다면 제게 말씀하십시오.”그제야 조원철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휘장이 걷힌 침상을 바라보았다.그는 한씨가 벌인 일의 일부만 알고 있을 뿐, 그 원인까지는 아직 밝혀내지 못한 상태였다.“그건 네가 알 것 없다. 원철아, 이번 한 번만 어미를 돕는다 생각하면 안 되겠니? 어차피 너는 사내이니 손해 볼 일도 없지 않으냐…….”한씨가 어찌 진실을 솔직히 털어놓을 수 있겠는가.궁지에 몰린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말의 앞뒤조차 제대로 가리지 못했다. 그러다 결국 가슴속 깊이 숨겨 두었던 속내를 고스란히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그렇다, 한씨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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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5화

“둘 다 여기 앉아서 무얼 하는 게냐? 날이 이렇게 좋은데 이불이라도 내다 볕에 널 생각은 하지 않고.”오씨 어멈이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창을 넘어 들어온 봄볕이 그녀의 어깨 위에도 따스하게 내려앉았다.“아씨께서 그저께 말리셨으니 오늘은 널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어요.”단비가 생글거리며 대답했다.“그런데 아씨, 목은 어쩌다 이렇게 되셨어요?”오씨 어멈은 강유영이 밤에 돌아온 뒤로 지금에서야 처음 얼굴을 마주한 참이었다. 그러다 그녀의 목에 남은 상처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황급히 곁으로 다가갔다.가느다란 목에 선명히 남은 상흔을 가까이서 살피던 오씨 어멈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 번졌다.“괜찮아요. 실수로 어디에 살짝 부딪친 것뿐이에요. 하나도 아프지 않아요.”강유영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손을 들어 상처를 문질렀다. 그러고는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며 오씨 어멈을 향해 웃어 보였다.오씨 어멈은 이미 나이가 많았다. 지난 일을 굳이 털어놓아 또다시 가슴 졸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태자비가 단도를 자신의 목에 겨누었던 위험한 순간은 이미 지나갔으니, 이제 와 그 일을 꺼낼 필요도 없었다.“아씨는 늘 이렇게 저를 속이시지요. 이게 어디 부딪쳐 생긴 상처로 보입니까?”오씨 어멈은 강유영의 손을 살며시 치운 뒤 상처를 꼼꼼히 들여다보았다.“약을 한 번 더 발라 드려야겠습니다.”강유영이 단비를 바라보며 눈짓하자, 단비는 곧바로 연고를 가지러 갔다.그때, 늘 경계심이 많은 서유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씨, 저는 밖에 나가 지키고 있겠습니다.”뜰에 있던 사람들까지 모두 방 안으로 들어온 탓에 바깥을 지키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누군가 다가와도 알아차리지 못할 터였다.“그래.”강유영이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서유가 밖으로 나간 뒤, 오씨 어멈은 강유영의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조심스럽게 걷어 냈다. 손끝에 연고를 묻혀 상처 위에 얇게 펴 바르며 물었다.“그런데 조금 전에 두 아이가 경화 공주에 관해 무슨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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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6화

“어멈, 걱정 마세요. 저도 잘 알고 있어요.”강유영은 웃으며 대답했다.그러나 속으로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녀라고 오씨 어멈의 말처럼 그런 일에 휘말리지 않고 조용히 지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문제는 저들이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태자비 마마를 뵙습니다. 아버님, 오라버니께도 인사드립니다.”강유영은 정청으로 들어서며 안에 있는 세 사람에게 예를 올렸다.문턱을 넘자마자 정청 한가운데 놓인 네모난 탁자 위로 갖가지 예물이 가득 쌓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금빛 무늬가 그려진 칠기함과 자단목 상자, 붉은 산호 장식… 거기에 최상급 문직 비단까지 여러 필 놓여 있었다.이것들을 태자비가 가져온 것일까?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조원철을 흘끗 바라보았다.조원철은 한쪽에 선 채 한 손을 등 뒤로 돌리고 있었다. 소나무처럼 곧고 훤칠한 자태에 눈썹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마치 아예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듯했다.그래도 강유영은 서운하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그의 냉담한 태도에 조금씩 익숙해진 모양이었다.반대편에 있던 진국공은 그녀를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평소보다 한결 온화하고 다정한 기색이었다.그 모습을 본 강유영은 탁자 위의 예물이 태자비가 가져온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진국공이 그녀에게 저토록 부드러운 낯빛을 보일 리 없었다.“강 소저, 편히 있게.”태자비는 온화한 어조로 말하며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강유영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과 표정은 어제 이곳에서 보았던 것처럼 단정하고 부드러웠다. 단도로 강유영의 목숨을 위협했던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평온한 얼굴이었다.“감사합니다, 마마.”강유영은 다시 한번 몸을 낮춰 예를 표했다.“이리 가까이 와 보시게. 목의 상처는 좀 어떤가?”태자비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상처를 살피려 했다.“이제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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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7화

태자비는 이번 일로 아무런 문책도 받지 않았기에 이곳에 올 수 있었을 것이다.그렇다면 굳이 그녀를 찾아와 놀란 마음을 달래 줄 필요도 없었다. 황제조차 더는 책임을 묻지 않으셨는데, 보잘것없는 양녀에 불과한 자신이 뭐라고 태자비가 이토록 마음을 쓴단 말인가?그렇다면 태자비가 이곳에 온 진짜 목적은 대체 무엇일까?“이미 가져온 것을 어찌 다시 들고 가겠나?”태자비는 웃으며 한층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바라보았다.“어제 내 사촌 동생을 만나 보니 어떻던가? 강 소저의 마음이 궁금하네.”너무도 노골적인 질문이었다.강유영은 뜻밖의 말에 잠시 굳었다. 입술을 살며시 다문 채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제 자신이 한 말만으로도 뜻은 충분히 전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태자비는 굳이 다시 한번 물었다. 그것도 진국공과 조원철이 모두 지켜보는 앞에서.설마 태자비가 오늘 이곳을 찾은 목적도 자신과 하세욱을 어떻게든 엮으려는 데 있는 것일까?어제 보았던 하세욱의 행태가 떠오르자 또다시 혐오감이 치밀었다. 그러나 강유영은 감정을 억누르며 얼굴에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당장은 혼인을 생각할 마음이 없었지만, 설령 평생 시집을 가지 못한다 해도 하세욱 같은 자에게만큼은 절대 시집가지 않을 터였다.“강 소저, 부끄러워할 것 없네.”태자비는 이번에는 진국공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소저만 좋다면 내가 부친께 말씀드려 두겠네. 날을 잡아 중매인을 보내면 될 일이 아닌가.”“내 사촌 동생은 국공께서도 본 적이 있으실 텐데, 국공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하세욱은 강유영의 미모에 여전히 마음을 빼앗긴 상태라 오늘도 그녀를 찾아갔다고 했다.태자비는 태자와 상의한 끝에 강유영을 하세욱에게 시집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하면 하세욱의 소원도 이루어 주고, 서준과 진국공부가 손을 잡을 가능성도 차단할 수 있었다.두 가지를 한꺼번에 얻을 수 있는데 마다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그게…….”진국공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저희 집안 딸들의 혼사는 줄곧 어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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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8화

“됐네.”태자비는 고개를 돌려 강유영을 바라보며 웃었다.강유영이 다시 만류하려던 찰나, 조원철이 불쑥 입을 열었다.“태자비 마마께서 성의를 보이신 것이니 저버릴 수는 없지. 그냥 받아 두거라.”강유영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태자비에게 예를 올렸다.“그렇다면 염치 불고하고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마.”그러나 마음속에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조원철은 어째서 자신에게 이 예물을 받으라고 한 것일까? 정말 받아도 괜찮은 걸까?“원철아, 잠시 서재로 오너라.”진국공은 조원철을 부른 뒤 하인들에게 명했다.“태자비 마마께서 가져오신 예물은 유영의 처소로 옮기거라.”조원철은 강유영을 한 번 바라보고는 진국공의 뒤를 따라갔다. 강유영도 홀로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아씨, 한번 열어 볼까요?”서유가 탁자 위에 놓인 예물과 강유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그래, 열어 보거라.”강유영이 탁자 앞으로 다가갔다.허락을 받은 서유가 먼저 금빛 문양이 새겨진 칠함을 열었다. 안에는 순금에 홍옥을 박아 만든 여의가 들어 있었다.다음으로 자단목 상자를 여니 맑고 투명한 유리잔 한 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밖에도 최상급 침향 한 상자와 양지옥 팔찌, 몸을 보하는 환약까지 있었다.하나같이 값비싼 것들뿐이었다.강유영은 예물을 살펴볼수록 근심이 깊어졌다. 평범한 물건 몇 가지라면 모를까, 태자부에서 보낸 이토록 귀한 예물을 어찌 가벼운 마음으로 받을 수 있겠는가.조원철의 거절을 듣고도 태자비는 별말 없이 물러났다. 하지만 이대로 순순히 포기할 것 같지는 않았다.그런데 조원철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에게 이 물건들을 받으라고 한 것일까?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알 수 없었다. 결국 그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어둠이 내린 지도 한참이 지났다.책을 읽던 강유영은 눈이 피로해져 막 잠자리에 들려던 참이었다. 그때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보니, 조원철이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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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9화

“태자 전하는 어젯밤 폐하께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상소문을 올린 뒤 독을 마셨다.”조원철은 화로 위에서 은근히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오늘 아침 내가 증인을 폐하 앞에 데려갔고, 서왕 전하께서도 증거를 올렸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지.”그는 거기까지 말한 뒤 잠시 입을 다물었다. 강유영이 스스로 생각해 낼 때까지 기다려 주려는 듯했다.“태자 전하께서 독을 마셨다고요? 죄가 두려워 자결하려 했던 건가요?”강유영은 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당장은 그 까닭까지 헤아릴 수 없었지만, 태자가 죽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오후에 진국공부를 찾아온 태자비가 그토록 태연할 수 없었을 테니까.“스스로 생각해 보거라.”조원철은 더 알려 줄 생각이 없는 듯 짤막하게 답했다.“그냥 말씀해 주시면 안 됩니까?”강유영은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골치 아픈 조정의 일에 굳이 머리를 쓰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무엇보다 자신이 애써 고민해 본들 조정의 일에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조원철은 대꾸 없이 데워진 죽순 훈제육 볶음을 탁자 위에 올렸다. 따뜻한 김과 함께 짭조름한 고기 향이 은은하게 번졌다. 그는 곧이어 닭고기와 산버섯을 넣어 끓인 국을 화로 위에 올렸다.강유영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마지못해 생각에 잠겼다. 화롯불이 타닥거리며 두 사람 사이로 온기를 흘려보냈다.“태자 전하가 무엇을 노렸는지부터 생각해 보거라. 어떤 결과를 바랐는지.”조원철은 화로 위의 국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무심한 투로 실마리를 던져 주었다.그 말을 듣는 순간, 강유영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태자 전하가 사사로이 군사를 움직인 것은 반역죄에 해당하잖아요. 그렇다면 독을 마신 건 죄를 피하기 위해서였던 건가요?”흩어져 있던 단서들이 하나둘 맞아 들어가자 그녀의 말이 조금씩 빨라졌다.“그래서 오라버니와 서왕 전하께서 증인과 증거를 내놓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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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0화

강유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오라버니께서 그러셨잖아요. 서로 견제하게 하려는 거라고요.”“누구를 견제한다는 것이냐?”조원철이 되물었다.“당연히 서왕 전하겠죠.”강유영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태자 전하를 폐위하면 서왕 전하를 견제할 사람이 없어지잖아요.”현재 조정에서 태자와 서왕의 세력은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어느 한쪽도 쉽사리 우위를 점하지 못할 만큼 힘이 엇비슷했다.조원철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너는 폐하께서 정말 서왕 전하를 총애한다고 생각하느냐?”“아닌가요?”강유영은 긴 속눈썹을 살랑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경왕 전하에 관해서는 들어 본 적 있느냐?”“경왕 전하요?”강유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한동안 기억을 더듬은 뒤에야 입을 열었다.“한가롭게 지내는 황자 아닙니까? 줄곧 바깥을 떠돌며 유람한다고 들었어요.”그녀는 그 황자를 직접 본 적이 없었다.다만 경왕은 각지를 유람하며 날마다 꽃과 새, 시와 술을 벗 삼아 지낸다고 들었다. 매사에 얽매이지 않고 제멋대로인 듯하면서도 속은 맑고 사리에 밝은 인물로, 상경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황자였다.조원철이 입에 올리지 않았다면 강유영도 그런 황자가 있다는 사실조차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조정의 일에 발을 들이지 않는 것 역시 그를 지키는 방법일 수 있지 않겠느냐?”조원철의 말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강유영은 눈을 깜박이며 그 뜻을 곱씹었다.설마 건정제가 경왕을 보호하고 있다는 말인가?그렇다면 건정제가 진정으로 아끼는 황자는 서왕이 아니라 경왕이라는 뜻이었다.“현재 조정에서 서왕 전하와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사람은 태자 전하뿐이다. 폐하께서 태자 전하를 폐위한다면 스스로 세력의 균형을 잡아 주는 말을 없애는 셈이지.”조원철의 낮고 평온한 목소리가 따스한 방 안에 잔잔히 울렸다.“조정과 황실 종친 사이의 균형이 무너지면 훗날 어떤 화가 닥칠지 모른다. 이것이 군주가 세력을 다스리는 방식이다. 서로 견제하게 하고,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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