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Chapter 891 - Chapter 900

1202 Chapters

제891화

“폐하와 태자 전하, 서왕 전하를 뵙습니다.”조원철은 자진전으로 들어와 두 손을 모아 예를 올렸다.말투는 느긋하고 침착했으며, 태도에도 조금의 흐트러짐이 없었다.서준은 웃음 띤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태자는 조원철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주먹을 단단히 말아 쥐었다. 얼굴에는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그를 끌어내리겠다는 확신이 가득했다.조원철이 이런 죄를 저질렀으니, 목숨을 건진다 해도 결코 무사하지는 못할 터였다.“그래.”건정제는 고개를 끄덕이고 느릿하게 물었다.“짐이 어찌하여 그대를 불렀는지 아느냐?”목소리에는 별다른 감정도, 노여움도 묻어나지 않았다.“알지 못합니다.”조원철은 눈을 내리깔고 담담하게 대답했다.“태자가 말해 보아라.”건정제가 분부했다.태자는 곧바로 몸을 돌려 조원철을 향해 추궁했다.“조 대인은 참으로 간도 크군. 감히 옥림궁에 몰래 들어가 소 미인과 밀회하다니, 그 죄를 어찌 감당하려 하느냐?”제 수하가 직접 목격한 일이었기에 태자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목소리에도 자신감이 넘쳤다.그는 조원철의 낯빛이 순식간에 변하고, 지금껏 유지하던 태연함이 산산이 무너지는 모습을 기다렸다.하지만 조원철은 마치 끝까지 태자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는 듯했다.그 말을 듣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고개만 살짝 돌려 되물었다.“태자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태자는 그 자리에 굳어 버린 채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누구든 황제의 후궁과 사통했다는 추궁을 들으면 얼굴빛이 조금쯤은 달라지기 마련이었다.더구나 이는 억울한 누명도 아니었다. 분명 직접 저지른 일인데도 조원철은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이토록 대담하면서도 침착하게 표정을 감추다니, 실로 보통내기가 아니었다.서준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태자는 애초에 조원철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황제가 차마 처분하지 못해 감싸지만 않았다면, 서용연은 진작 수없이 태자 자리에서 폐위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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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2화

“예, 그럴지도… 모릅니다.”태자는 고개를 숙인 채 맞장구쳤다. 어느새 등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이럴 줄 알았다면 어마마마와 미리 말을 맞춘 뒤에 왔어야 했다. 조원철을 고해바치기는커녕, 도리어 자신이 곤경에 빠지게 생겼다.게다가 서준이 무슨 좋은 마음이 있어 자신을 구해 준단 말인가?필시 또 무슨 수작을 꾸미고 있을 터였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황후도 나이가 들었으니 눈이 어두워질 만도 하지.”건정제의 목소리에서는 기쁨도 노여움도 읽을 수 없었다. 다만 그 말속에는 무언가 다른 뜻이 담긴 듯했다.태자는 숨을 죽인 채 감히 대꾸하지 못했다.큰 잘못을 저지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근신을 시작한 지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또다시 동궁을 몰래 빠져나왔다.아바마마께서 다시 노한다면 이번에는 몇 달 근신하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지도 몰랐다.조원철 역시 입을 열지 않았다.그는 그저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었다. 수척하면서도 반듯한 모습은 깊은 못처럼 고요하고 높은 산처럼 의연했다.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무관한 듯했다.“그렇지요. 어마마마께서는 수많은 후궁을 돌보시느라 얼마나 고단하시겠습니까. 사람 하나쯤 잘못 보실 수도 있지요.”서준은 건정제의 말을 자연스럽게 이어받더니, 웃으며 조원철을 바라보았다.“세자는 이제 나이가 적지 않네. 그런데 예전에 소 미인과 정혼했다는 것 말고는, 어느 여인과 염문이 났다는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군.”그는 아예 바둑판에서 시선을 거두고 몸을 비스듬히 돌려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조원철을 바라보았다. 눈가에 어린 웃음은 갈수록 짙어졌다.이 판은 이미 자신이 이긴 것이나 다름없었다.조원철은 고개를 들어 서준을 바라보았다. 칼날처럼 날카롭고 부서진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이 서늘한 한기를 뿜어냈다.처음에는 의문이었다. 동궁에 갇혀 근신 중인 태자가 자신이 옥림궁에 다녀온 일을 어떻게 알았을까.그러나 자진전에 들어와 서준을 본 순간, 그와 관련된 일임을 짐작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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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3화

어쨌든 서준이 바라는 것은 조원철의 곁에 다른 여인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러면 유영도 조원철의 진면목을 깨닫고 그의 곁을 떠날 터였다.그렇게 되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생기지 않겠는가?그때 강유영을 자신의 측비로 맞으면 될 일이었다.“서왕의 말에도 일리가 있구나.”건정제는 손을 들어 궁녀 하나를 아무렇게나 가리켰다.“네가 좋겠다. 이름이 무엇이냐?”지목받은 궁녀는 얼굴을 붉히며 종종걸음으로 나아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송지란입니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공손하게 대답했다.“송지란이라…….”건정제는 그 이름을 한 번 되뇌고 조원철을 바라보았다.“너도 간접적으로나마 소 미인의 덕을 보게 되었구나. 그러니 성을 바꾸어 소 미인의 성을 따르도록 하거라.”이는 조원철에게 소은경과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지 똑똑히 명심하라고 경고하는 것이었다.조원철은 눈앞의 바닥만 내려다본 채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역시 건정제의 뜻을 모르지 않았다.“데려가 깨끗이 씻기고 단장시킨 뒤, 내일 진국공부로 보내도록 하거라.”건정제가 분부를 내리며 더는 돌이킬 수 없도록 못을 박았다.어전에서 시중드는 궁녀라면 결코 평범한 여인이 아니었다. 소지란이 진국공부에 들어간 뒤 무엇을 해야 할지는 건정제가 따로 지시할 터였다.“예, 폐하.”고익은 황급히 명을 받들고 궁녀를 데리고 물러났다.서준은 조원철을 바라보다가 금세라도 웃음을 터뜨릴 듯 말했다.“세자는 어찌하여 아직도 사은하지 않는 겐가?”그동안 조원철에게 몇 번이나 당했는데, 이번에야말로 마침내 자신이 우위를 차지했다.다만 아쉬운 것은 조원철의 얼굴이 만년설처럼 늘 한결같이 차갑다는 점이었다. 화를 참지 못하고 낯빛이라도 변한다면 훨씬 재미있을 텐데.“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조원철은 허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오늘 서준이 꾸민 일은 모든 속셈을 드러내 놓고도 피할 수 없게 만든 계책이었다.이미 건정제가 의심을 품은 이상, 서준의 함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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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4화

서유는 청류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어둠 속에서 흐릿한 인영 몇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어서 가세요. 저는 원문 앞을 지키고 있을 겁니다.”서유는 청류를 밀어낸 뒤 빠른 걸음으로 요월원 입구로 향했다.다가오는 무리는 아무리 보아도 요월원을 찾아오는 길이었다. 대체 누구란 말인가?청류는 더 머물지 못하고 재빨리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어느새 사람들도 가까이 다가왔다.그들을 알아본 서유는 무릎을 굽혀 예를 올렸다.“국공 부인을 뵙습니다.”찾아온 사람은 한씨였다. 뒤로 풍씨 어멈을 비롯한 유모와 시녀들을 여럿 거느리고 있어 행렬이 제법 요란했다.“네 아씨는 어디 있느냐?”한씨는 무슨 경사라도 생긴 듯 활짝 웃으며 물었다.“아씨께서는 안에 계십니다. 소인이 들어가 아뢰겠습니다.”서유가 한씨를 힐끗 보고 대답했다.“나도 함께 들어가마.”한씨는 그대로 서유를 따라 문 안으로 들어섰다.서유는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재촉해 먼저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아씨, 국공 부인께서 오셨습니다.”“이 시간에?”침상 머리에 기대어 책을 읽던 강유영이 고개를 들었다. 맑은 눈동자에 놀란 기색이 어렸다.“무슨 일로 오셨대?”이미 해시 정각도 지났다. 한씨가 이 늦은 시각에 갑자기 찾아왔으니, 아무 일도 없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그게…….”서유는 조금 전 청류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하려 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한씨 역시 그 소식을 듣고, 일부러 아씨의 속을 긁으러 온 것이 분명했다.한씨는 이미 강유영과 세자 사이의 일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줄곧 강유영이 세자에게 일방적으로 매달리고 있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러니 세자의 곁에 새 여인이 생겼다는 말을 듣자마자 위세를 부리고 비웃으려고 찾아온 것이리라.서유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한씨가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한씨는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말했다.“유영아, 어서 일어나거라. 우리 집안에 큰 경사가 생겼다. 네가 도와주어야 할 일이 있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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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5화

서유는 말을 마치고 긴장한 눈으로 강유영의 얼굴을 살폈다.강유영은 처음에는 멍하니 굳어졌다. 이내 얼굴에서 핏기가 빠르게 가시며, 발그레하던 두 뺨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머릿속에서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온갖 생각이 뒤엉켜 아무런 판단도 할 수 없었고, 가슴마저 세게 조여 와 숨을 쉬기 어려웠다.“아씨, 괜찮으세요?”서유는 강유영의 팔을 붙들었다. 바깥방의 한씨가 들을까 염려해 목소리를 낮추고 다급히 그녀를 바라보았다.강유영은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든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조원철이 정실을 맞는 일까지 각오했던 자신이었다. 하물며 첩 하나가 생긴 것뿐이지 않은가?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했다.지금 당황해 이성을 잃는다면 한씨가 바라는 대로 되는 셈이었다.한씨의 태도를 보아하니, 분명 이 소식을 전하며 자신을 비웃으려고 찾아온 것이었다.그러니 정신을 가다듬어 한씨를 상대해야 했다. 한씨를 서둘러 돌려보낸 뒤, 앞으로 자신이 어떤 길을 택해야 할지도 생각해야 했다.“옷을 입혀 주거라.”강유영은 침상에서 내려왔다. 신발 위에 발을 디디는 순간 몸이 휘청거렸지만, 끝내 중심을 잡았다.서유가 옷 입는 것을 돕는 동안에도 머릿속에서는 그 일이 떠나지 않았다.폐하께서 조원철에게 궁녀를 내려 주셨다고?그렇다면 조원철이 원해서 들이는 여인은 아니었다. 황제가 내린 사람이니 거부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거기까지 생각한 강유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남이 내려 주었든 스스로 원했든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결국 그의 곁에는 다른 여인이 생겼다.새로운 여인이 생겼으니 조원철도 더는 자신만 바라보지 않을 터였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이제야 미련을 끊고 상경을 떠날 결심을 굳힐 수 있을 테니까.“유영아, 아직도 옷을 다 입지 못했느냐?”한씨의 재촉하는 목소리가 침실 안까지 들려왔다.강유영은 대꾸하지 않았다. 동경을 보며 머리카락을 단정히 정리한 뒤 자신의 안색을 가만히 살폈다.그녀는 손끝에 연지를 조금 묻혀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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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6화

“제게 물으시기보다는 할머니께 여쭤보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강유영은 살며시 웃으며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자신의 손끝을 바라보았다.“네 할머니께 여쭐 필요는 없다. 궁에서 온 사람이 내게 알아서 정하라고 했거든.”한씨는 제법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었다.“그렇다면 어머니께서 알아서 하십시오.”강유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한씨가 어떻게 처리하든 상관없었다. 자신과 무관한 일이니 끼어들 생각도 없었다.그래야 나중에 무슨 일이 생겨도 자신을 탓할 수 없을 터였다.“네 큰오라버니도 나이가 적지 않은데 아직 정실이 없지 않느냐?”한씨는 방 안의 가구와 장식을 천천히 둘러보았다.“오늘은 솔직히 말하마. 애초에 요월원을 이토록 정성껏 꾸민 것은 훗날 네 새언니가 들어오면 머물게 하려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네 오라버니는 정실을 맞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구나. 다행히 이번 첩실은 폐하께서 직접 내려 주신 여인이니, 신분도 없는 사람이 아니지. 그렇다면 요월원에 머물러도 괜찮지 않겠느냐?”한씨는 미소를 지은 채 강유영의 대답을 기다렸다.강유영은 새까만 눈동자를 들어 한씨를 잠시 바라보다가 문득 웃었다.“어머니, 무엇 때문에 그렇게 빙빙 돌려 말씀하십니까? 제가 요월원을 비워 그 여인에게 내주었으면 한다고 솔직히 말씀하시면 될 것을요.”알고 보니 한씨는 조원철에게 새 여인이 생겼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라 요월원까지 빼앗으러 온 것이었다.강유영은 또 무슨 대단한 일인가 했다.애초에 이곳으로 옮겨 올 때부터 요월원에 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지금이라도 나가게 되었으니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진국공부를 떠나기도 한결 수월할 터였다.“그렇게 하면 네가 너무 서운하지 않겠느냐?”한씨의 말에는 겉치레뿐인 염려가 가득했다. 그러나 부인하지 않는 것을 보니 강유영을 내보낼 생각이 분명했다.애초에 이 원자를 꾸미느라 얼마나 많은 은자와 정성을 쏟았던가?이 천한 것이 지금껏 공짜로 누렸으니 그것만으로도 과분했다.“서운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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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7화

한밤중인데도 요월원은 등불로 대낮처럼 환했다.서유는 사람들을 시켜 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상자를 든 이들은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우리도 가요.”강유영은 오씨 어멈을 부축해 밖으로 향했다.분주히 사람들을 지휘하던 한씨에게는 작별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한씨는 그녀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며, 당장이라도 갈기갈기 찢어야 분이 풀릴 사람처럼 미워했다.강유영 역시 지금은 마음이 괴로워 한씨와 겉치레로 웃으며 상대할 기분이 아니었다.한씨는 회랑 기둥 뒤에 숨어 고개를 내밀고 강유영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부인, 떠났습니다.”풍씨 어멈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람을 시켜 저 서화들과 화벽, 병풍, 그리고 내가 따로 골라 둔 물건들을 모두 본원으로 옮기게 하거라.”강유영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한씨는 기다렸다는 듯 분부를 내렸다.어렵게 찾아온 기회였다. 강유영을 요월원에서 몰아내는 것은 한씨가 바라던 일 중 하나에 불과했다.또 다른 목적은 이 원자에 있는 값나가는 물건을 모조리 제 처소로 가져가는 것이었다.한씨는 남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래도 처음 요월원을 꾸밀 때 적지 않은 은자를 직접 들인 것이 다행이었다. 이제 이 물건들을 몰래 내다 팔면 한동안은 버틸 수 있을 테니, 당장의 급한 불부터 끌 수 있었다.“부인, 이것들을 전부 옮기면 방 안이 너무 휑해질 듯합니다.”풍씨 어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아무리 그래도 폐하께서 내려 주신 분이 머물 곳인데, 이렇게까지 하시면 혹시…….”한씨가 지나치게 굴다가 폐하의 심기를 거스를까 걱정스러웠다. 그렇게 되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일이 커질 수 있었다.“창고에 가서 쓸 만한 물건을 몇 가지 골라 오거라. 어사품도 몇 점 가져다 놓으면 된다.”한씨는 이미 대책을 세워 두었다.평범한 물건이라도 이곳에 두고 쓰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게다가 어사품은 어차피 내다 팔 수도 없으니, 소지란에게 내주면 오히려 그녀를 극진히 대우하는 모양새까지 갖출 수 있었다.“부인의 처사가 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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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8화

한씨는 참으로 수완이 좋았다. 그토록 빠르게 바라던 바를 이루다니.“축하받을 일까지는 아니다. 폐하께서 원철이에게 첩으로 삼으라며 궁녀 하나를 내려 주셨거든. 당분간은 그 아이를 요월원에 머물게 하려는 것뿐이다.”한씨는 일부러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말했지만, 실은 은근히 자랑하는 것이었다.조원철과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다 해도, 그만한 아들을 두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진 부인의 부러움을 사기에는 충분했다.진 부인은 속으로 이를 갈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얼굴에는 오히려 더욱 짙은 미소를 띠었다.“정말입니까? 세자 곁에는 지금껏 여인 하나 없었잖아요.잘하면 내년에는 언니가 손주를 안아 볼지도 모르겠네요.”남의 처마 아래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법이었다. 진 부인은 한씨의 비위를 맞추려고 듣기 좋은 말만 골라 늘어놓았다.한씨의 얼굴에도 절로 미소가 번졌다.“네 말대로 되면 좋겠구나. 너는 줄곧 강유영이 너를 완전히 믿지 않는다고 했지? 이제 강유영은 구석진 소은원으로 쫓겨나 기댈 곳도 없으니, 바로 지금이 ‘친어머니’인 네가 위로해 줄 때가 아니겠느냐? 이 기회에 모녀의 정도 더욱 돈독히 하고 말이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지금 강유영은 기세가 꺾인 상태였다. 그러니 진 부인이 ‘어머니’라는 신분을 내세워 그 빈틈을 파고들 절호의 기회였다.“언니 말이 맞습니다. 지금 바로 가 볼게요.”진 부인은 손에 들고 있던 다과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서두르지 말거라. 아직 할 말이 남았다.”한씨가 손을 들어 그녀를 붙잡았다.진 부인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또 시킬 일이 있습니까?”“나도 그 아이와 드러나게든 남몰래든 몇 번 부딪쳤다. 이제는 어릴 때의 강유영이 아니야. 말로 위로하고 곁을 지켜 주는 것만으로는 진심을 얻기 어려울 게다.”한씨의 표정이 제법 심각해졌다.“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진 부인은 눈을 깜박이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낯빛이 살짝 변했다. 하지만 이내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우선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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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9화

강유영의 눈에는 붉은 실핏줄이 가득했고 얼굴은 창백했다. 누가 보아도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모습이었다.강유영과 세자 사이의 일을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오씨 어멈과 서유, 단비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그런데도 강유영은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말을 건넸다. 애써 태연한 모습을 보이니 오히려 더욱 안쓰러웠다.“방 안에 곰팡내가 너무 심해서 그런다.”강유영은 웃으며 손을 들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깨끗이 쓸고 닦은 뒤 빨래도 하고 침구도 햇볕에 말리면, 오늘 밤부터는 잘 잘 수 있을 게다.”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실제로 지난밤은 견디기 힘들 만큼 길고 괴로웠다.조원철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녀를 찾지도 않았고, 사람을 통해 말 한마디 전하지도 않았다.가슴에는 시고 떫은 감정이 가득 차올랐다. 무딘 흉기가 심장을 거듭 꿰뚫는 듯해 숨을 쉴 때마다 아팠다.하지만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진작 알고 있었다.다만 한 가지가 예상과 달랐다.그가 데려올 여인은 소은경일 것이라 생각했다.강유영은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 왔다.조원철이 소주까지 쫓아와 억지로 자신을 데려오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진작 그의 곁에서 멀리 떠났을 것이다.언젠가는 반드시 그를 떠나야 했고, 이 고비도 제힘으로 건너야 했다.이제 그의 곁에 다른 여인이 생겼으니,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 할지도 몰랐다.자신을 놓아주어서 고맙다고.대신 결정을 내려 주어서 고맙다고.그동안 자신에게 베풀어 준 모든 다정함에도 고맙다고.그러니 이제 여기서 끝내자.이제는 짐을 제대로 정리해 영원히 그를 떠나고, 경성에서도 떠나야 했다.“아씨, 소인이 세자께 가서 한번 알아보고…….”성정이 곧은 서유는 끝내 억울한 마음을 참지 못했다.그 궁녀는 폐하께서 내려 주신 사람이었다. 세자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그렇다 해도 어찌 밤새 아씨를 찾아오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평소의 세자라면 이럴 리 없었다.그동안 세자는 아무리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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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0화

강유영은 진 부인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망설였다.진 부인이 정말 자신의 친어머니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이 떠날 계획을 이 사람에게 말해야 할까?진 부인이 정말 친어머니라면 말하지 않은 것을 후회할 터였다. 반대로 친어머니를 사칭하는 사람이라면, 털어놓은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어느 쪽도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일이었다.“가엾은 것. 그동안 얼마나 많은 설움을 겪었으면 이런 곳을 좋아한다고 하겠니.”진 부인은 다시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강유영은 난감한 얼굴로 오씨 어멈에게 눈짓을 보냈다.“부인, 이제 그만 우십시오.”오씨 어멈이 다가가 달랬다.“아씨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니 어디에 머무시든 다를 것 없습니다.”“맞습니다.”단비도 곁에서 함께 위로했다.진 부인은 한동안 더 눈물을 흘린 뒤에야 울음을 그쳤다. 그러고는 다정하게 강유영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었다.강유영을 바라보는 눈에는 은은한 애틋함이 담겨 있었다. 말투는 부드러웠고,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알맞은 친근함까지 배어 있었다. 누구라도 절로 마음을 열게 만드는 태도였다.강유영도 그녀를 바라보다가 하마터면 그 다정함에 빠져들 뻔했다.진 부인이 정말 친어머니인 것만 같았다.그렇지 않다면 왜 이토록 자신을 걱정할까?왜 그토록 자애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이토록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건넬까?친어머니가 있다는 것은 이런 느낌일까?“얘도 참, 왜 그렇게 나만 빤히 쳐다보니?”진 부인은 강유영을 살짝 밀며 짐짓 나무라는 듯 웃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강유영은 자신이 실례했다는 것을 깨닫고 웃으며 해명하려 했다.바로 그때, 밖에서 갑자기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진 부인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바로 세웠다.“폭죽을 터뜨리는구나. 폐하께서 네 오라버니에게 내려 주신 여인이 도착한 모양이다.”“그런가 봅니다.”강유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고, 얼굴에도 조금의 동요가 없었다.하지만 가슴에는 날카로운 통증이 세차게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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