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Chapter 81 - Chapter 90

200 Chapters

제81화

“술(流蘇)을 빚어 달라고 부탁했었습니다.”조원철이 느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 말을 듣는 순간 강유영은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돌덩이가 내려앉는 듯했다.그녀는 금세 눈가가 젖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절로 안도의 숨이 새어 나왔고, 꾹 참아오던 눈물이 끝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대체 왜 이런 식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어쩌면 진국공부를 떠날 생각은 꿈도 꾸지 말고, 얌전히 제자리에 있으라는 경고인지도 몰랐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생 햇빛도 못 보는 내실에 갇혀 그의 곁에 붙어 살아야 한단 말인가.“술을… 빚어 달라고 했다고?”한씨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되물었다.하지만 강유영을 바라보는 눈에는 여전히 의심이 가시지 않았다.“정 그런 일이었다면 제대로 설명하면 될 것을, 왜 울고 그러느냐?”그녀는 아직도 강유영이 조원철에게 허튼 마음을 품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저는… 술을 빚을 줄 모릅니다.”강유영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그러자 풍씨 어멈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세자께서 옥장식에 달 술이 필요하셨던 모양이군요. 그런 거라면 부인께 말씀하시면 될 일을, 유영 아씨가 그런 걸 어찌 하겠습니까.”풍씨 어멈은 본래부터 강유영을 하찮게 여겼다. 겁은 많고 줏대도 없고, 늘 눈치만 살피는 꼴이 영 못마땅했다. 글공부며 산술, 다도, 꽃꽂이, 바느질까지 강유영은 어느 하나 내세울 만한 재주가 없었다.“저는 어머니께 되묻고 싶군요.”조원철은 시선을 돌려 담담한 눈빛으로 한씨를 바라보았다.“유영이는 글도 읽지 못하고 산술도 모릅니다. 다도나 꽃꽂이는 사람들 앞에 내놓기도 민망한 수준이고, 이제 보니 바느질조차 제대로 못하는군요. 지난 오 년 동안 어머니께서는 대체 이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치신 겁니까?”그는 몇 마디 말만으로 순식간에 흐름을 뒤집어 놓았다.“아… 그게… 유영이가 스스로 배우려 하지 않아서 그랬다. 유영아, 그렇지 않으냐?”아까까지만 해도 매서운 기색을 드러내던 한씨는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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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화

강유영은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더는 그 뒤를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앞으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조원철과 거리를 두어야 했다. 그래야 한씨가 실마리 하나라도 잡지 못할 터였다.“제가 곧 알아보겠습니다.”풍씨 어멈은 고개를 숙인 채 비장한 얼굴로 대답했다.“유영아, 도경진 도 대인과는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한씨가 강유영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조원철이 변방에서 돌아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눈앞의 계집애 때문에 이런저런 문제가 끝도 없이 생겨나고 있었다.한씨 눈에 강유영은 그저 집안에 불화만 불러오는 골칫덩이일 뿐이었다.차라리 혼사를 서둘러 정해 도경진에게 보내버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도 대인은… 참 좋은 분 같아요.”강유영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문득 수줍게 웃던 도경진의 준수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야말로 더없이 좋은 사람이었다.문제는 그녀 자신이었다.오라비인 조원철과의 악연도 끊어내지 못한 채 날이 갈수록 더 어지럽게 얽혀 가고 있었고, 병세가 깊어진 오씨 어멈까지 책임져야 했다.그녀는 도경진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그렇다면 내일 내가 자리를 마련해 도경진 모자를 집으로 부르마. 네 오라비도 함께 손님을 맞게 하고, 그 자리에서 도 대인의 비녀를 받아 이대로 혼사를 정해 버리는 것이 어떻겠느냐?”어차피 거절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강유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혼약을 정하려면 사주단자를 주고받고, 양가 부모님께도 인사를 드려야 하는 것 아닌가요?”그녀는 직접 혼인을 해본 적은 없지만, 남들이 혼례를 치르는 모습쯤은 보아 왔다.신물을 주고받는 것과 정혼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정혼이라면 남자 쪽에서 예물을 보내고, 여자 쪽에서도 그에 맞는 답례를 해야 했다. 그런 절차를 건너뛴다는 건 곧 여자 쪽 집안을 얕본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그런데도 한씨는 고작 밥 한 끼 함께 먹고 혼사를 정하자고 했다.대체 무슨 속셈일까.“도 대인 집안은 형편이 넉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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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화

그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은 채, 강유영이 몸부림치며 마구 때려도 끝내 손을 놓지 않았다.머리 위로 장미 꽃잎이 우수수 쏟아지자 강유영은 결국 움직임을 멈추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곱게 틀어 올린 머리 위로 연분홍 꽃잎이 내려앉았다.이 정원은 오가는 사람이 많은 곳이었기에, 그녀는 소란이 커져 사람들의 눈길을 끌까 두려웠다.게다가 더는 발버둥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조원철은 대체 어떻게 단련된 몸인지,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그녀가 아무리 때리고 물고 꼬집어도, 그는 피하지도 막지도 않은 채 그저 가만히 받아냈다.“나한테는 이렇게까지 완강하게 구는데, 아까 풍씨 어멈이 널 때리려 할 때는 왜 한 번도 저항하지 않았느냐?”조원철은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에 붙은 꽃잎을 떼어 주었다.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여전히 냉담했고, 말투에는 비웃는 듯한 기색이 짙게 밴 채였다.그의 머리 위에도 연분홍 장미 꽃잎이 내려앉아 있었다. 석양빛이 꽃잎 사이로 스며들어 그의 얼굴에 옅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고결하고 준수한 얼굴에 아랫입술의 물린 자국이 남아 있으니, 오히려 그에게 한층 인간적인 기색을 더해 주는 듯했다.강유영은 눈시울을 붉힌 채 고개를 돌렸다.풍씨 어멈은 한씨의 사람이었다. 한씨가 작정하고 자신을 벌하려 드는데, 감히 어떻게 맞서겠는가.조원철은 손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려 억지로 고개를 들게 했다.“아까 옥장식이 누구 것이라고 말하려 했느냐? 도경진?”그가 싸늘한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강유영은 시선을 피한 채 입술만 꾹 다물었다.“그자의 것이라 둘러대고 혼사를 밀어붙일 생각이었느냐?”조원철은 그녀를 담벼락으로 밀어붙이며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그런 생각은… 한 적 없어요….”강유영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그저 눈앞의 위기만 넘기고 싶었다. 한씨에게 두 사람 사이가 들통나지만 않기를 바랐을 뿐이었다.그런데 결국 내일이면 도경진과 정혼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그럼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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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화

이제는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었다.“두려워하지 말거라. 어머니 쪽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도경진과 이야기만 제대로 끝내면 된다.”조원철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예….”강유영은 얼굴을 그의 품에 묻은 채 작게 대답했다.조원철은 그런 온순한 모습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만히 맞댔다.“내가 누구냐?”강유영은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감히 그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그날 밤, 그는 그녀에게 오라버니가 아니라 제 이름을 부르라고 강요했었다.“그리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더냐?”조원철은 부드럽게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원철….”강유영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수줍게 그의 이름을 부르고는 다시 얼굴을 그의 품에 파묻었다.조원철은 두 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싸 쥔 채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칠월 말은 일 년 중 가장 더운 때였다.한씨는 이른 시간부터 진국공부 대청을 정갈하게 꾸려 두고 도경진의 모친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도경진은 문가에 서서 바깥만 내다보고 있었다.“어젯밤에 오늘 혼사를 정한다는 말을 듣고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있더군요.”도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한씨도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은 편치 않았다. 도경진이 저토록 강유영을 마음에 두고 있으니, 혼인하고 나면 얼마나 아끼고 감쌀지 불 보듯 뻔했다.그것은 결코 그녀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문가에 서 있던 도경진은 어머니의 말을 듣고 얼굴이 붉어졌다. 원래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정이었지만, 그렇다고 대청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한 채 문가에만 서 있었다.그때 강유영이 대청 쪽으로 걸어왔다. 고개를 들자 문가에 서 있는 도경진도 보여, 황급히 예를 갖추었다.“도 대인, 도 부인, 어머니.”“오셨군요.”도경진이 얼굴을 붉힌 채 낮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강유영은 눈매를 곱게 접으며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본 도경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더 붉어졌다.“유영아, 이리 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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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화

소은경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유영아, 축하한다. 네 혼사가 나와 세자보다 먼저 정해질 줄은 몰랐구나. 도 대인도 준수한 인재이시니 정말 잘 어울린다.”“감사합니다, 군주님.”강유영은 고개를 숙인 채 작게 답했다.“다들 앉거라.”한씨가 말을 이었다.소은경은 자연스럽게 조원철의 곁에 앉았다.강유영은 말없이 도경진 옆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그곳이 이제 자신의 자리였다.맞은편에 조원철이 앉아 있으니, 그녀는 감히 고개를 들 엄두도 나지 않았다.그들과는 이만한 거리가 가장 알맞았다.식사가 이어지는 내내 도경진은 수시로 그녀의 그릇에 음식을 덜어주었다.강유영은 억지로 수저를 들었지만 도무지 입맛이 돌지 않았다. 자꾸만 조원철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이제 비녀를 꽂아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도 부인이 웃으며 옥비녀를 꺼냈다.“비록 값비싼 물건은 아니나, 우리 도씨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유영이에게 주려 합니다.”그 말을 마친 도 부인은 비녀를 도경진에게 건네주었다.도경진이 비녀를 쥐고 손을 들어 올린 바로 그 순간이었다.“잠깐만요.”소은경이 불쑥 입을 열었다.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쏠렸다.소은경은 조원철을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도 대인께서는 아직 세자께 이 혼사를 어떻게 보시는지 여쭤보지 않으신 것 같은데요?”그녀는 줄곧 강유영과 조원철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른다고 의심해 왔다. 다만 확실한 증거가 없어 속만 끓이고 있을 뿐이었다.만약 조원철이 직접 강유영과 도경진의 정혼을 허락한다면, 이전의 수상한 일들은 더는 문제 삼지 않을 생각이었다.강유영은 고개를 들어 간절한 눈빛으로 조원철을 바라보았다.조원철은 술잔을 든 채 느긋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더니 싸늘하게 말했다.“잘 어울리는 한 쌍이군.”그 말에 주변에서는 웃음이 터졌고, 소은경은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강유영을 힐끗 바라보았다.강유영은 시선을 바닥으로 내린 채 씁쓸하게 웃었다.역시 그는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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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화

강유영은 다급히 몸을 일으키고는 이불을 안고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머리는 산발이 되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서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어머니께서 이미 의심을 하고 계셔서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그녀에겐 다른 방법이 없었다.한씨는 이미 그녀가 조원철에게 헛된 마음을 품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만약 도경진과의 혼사를 거절한다면 더 큰 화를 불러올 것이다.조원철은 음산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물었다.“그렇게 그자와 혼인하고 싶으냐?”살을 에이는 듯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그는 침상에 떨어진 옥비녀를 바닥에 던져버리고는 겉옷을 벗었다.그러고는 속옷만 입은 채로 침상 위로 올라와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강유영은 놀라서 구석으로 몸을 웅크렸다. 청색의 휘장이 그녀의 어깨 위에서 흔들렸다.조원철은 그녀가 안고 있는 이불을 잡아당겼다.강유영은 마지막 보호막인 양, 이불을 힘껏 붙잡았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잔머리를 축축하게 적셨다.그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그녀는 차마 그를 볼 수가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고 두려움에 말은 생각을 거치지 않고 나갔다.“오라버니는 이제 소 군주도 계신데 저는 왜 혼인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까….”게다가 그는 춘강루에 가서 기녀를 안지 않았던가.그가 원한다면 어떤 여인이든 가질 수 있었다. 왜 하필 진국공부를 떠나고 싶은 그녀를 붙잡아두고 영영 빛을 볼 수 없는 외실로 살라고 강요하는 걸까?그녀는 이런 삶을 원치 않았다.조원철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그대로 그녀의 위에 올라타고는 입술을 훔쳤다.그의 입맞춤에는 강한 분노와 소유욕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몸을 웅크리며 필사적으로 저항했다.커다란 손이 그녀의 뒷목을 붙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제압했다.강유영은 점점 숨이 막혀오며 정신이 혼미해지고 온몸에 힘이 풀렸다.이러다가는 숨 막혀서 죽을 것 같았다.품에 안고 있던 이불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뜨거운 입맞춤은 그녀의 입술에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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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화

그녀는 마침내 그가 자신을 놓아준 줄 알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그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창밖에서는 번개가 치고 소나기가 울고 있었다.차가운 비가 처마에 떨어지는 소리가 전주처럼 귓가에 울려퍼졌다.폭우 속에서 가을 나무의 잎사귀들이 바람에 흩날리며 우수수 떨어졌다.조원철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하고서 말 한마디 없었다.그는 워낙 성격이 냉랭하고 말수가 적었다.강유영은 늘 그가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오늘에야 알았다. 그녀의 눈시울은 새빨갛게 물들었고 폭풍 같은 그에게 휘말려 눈물을 흘렸다.가냘픈 손가락이 그의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며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한가닥 지푸라기라도 잡는 것처럼 매달렸다.하지만 지푸라기가 어찌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겠는가?그녀는 결국 깊은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들어가 그 안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세자,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밖에서 소은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녀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강유영은 폭풍에 휘말려 흩어졌던 이성이 순간적으로 되돌아왔다.그녀는 그의 품을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썼다.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손길은 더욱 거칠어졌다. 연약한 발목은 그의 우악스러운 손에 잡혀 빨갛게 멍이 들었다.“비켜! 세자께 꼭 드릴 말씀이 있다니까!”소은경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그녀는 무척 화가 난 모양이었다.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들어올 것 같았다.“소군주께서 오셨습니다….”강유영은 달뜬 신음을 내뱉으며 자신마저도 못 알아들을 소리를 냈다.그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린 그녀는 진이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그의 입맞춤은 거침없이 그녀의 몸을 지나갔다.소은경은 여전히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마침내 그가 동작을 멈추었다.강유영은 푹 젖은 옷을 갈아입고 난로 앞에서 가장 즐겨 먹던 우유떡을 입에 넣었다.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감쌌다.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조원철의 시뻘건 눈과 촉촉한 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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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화

소은경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까보다 더 분노한 듯했다.강유영은 당황하여 조원철을 밀치며 울먹였다.“어서 나가 보세요!”소은경의 시녀가 그들을 보았고 소식을 전해들은 소은경이 여기까지 찾아온 거였다.만약 소은경이 문을 박차고 들어온다면 진국공부의 처벌을 기다릴 것도 없이 그녀가 수치심에 죽어버렸을 것이다.조원철은 일어나서 겉옷을 걸치고는 허리띠를 매고 머리를 정돈했다.잠깐 사이에 그는 평소의 단정하고도 기품이 넘치는 진국공 세자로 돌아왔다.눈가의 붉은기를 제외하면 방금 전까지 아무 일도 없었던 듯했다.“얌전히 기다리거라.”조원철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강유영은 고개를 바짝 숙였다.조원철이 휘장을 걷고 밖으로 나갔다.휘장이 내려지자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강유영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겉옷을 찾아서 껴입었다.방 문이 열리자, 그녀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아 입을 틀어막았다.“무슨 일입니까, 군주?”조원철은 냉랭한 눈빛으로 소은경을 바라보며 차갑게 물었다.소은경은 그에게서 풍겨오는 압박감에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녀는 조용히 그를 관찰했다.여전히 단정한 모습이었고 잡념 같은 건 전혀 없어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그녀는 시녀의 말이 사실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조원철은 눈살을 찌푸렸다.“군주.”“세자.”정신을 차린 소은경은 그의 뒤쪽을 힐끗 바라보고는 괜히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세자가 보고 싶어 찾아온 거예요.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를 나눠도 될까요?”그녀는 강유영이 안에 있는지, 확인할 속셈이었다.시녀가 한 말이긴 해도 실질적인 증거도 없으니, 조원철에게 대놓고 따질 수도 없었다.“단지 시녀의 말 한마디 때문에 내게 추궁하려 찾아오신 겁니까? 그럼 앞으로도 시녀가 내가 여인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면, 그때마다 허락도 없이 쳐들어올 생각인가요?”무표정한 얼굴에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감히 거역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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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화

그녀는 저도 모르게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친동생처럼 여긴다는 그의 말이 비수가 되어 그녀의 가슴을 찔렀다.조원철이 누군가에게 오해를 해명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소은경을 그만큼 소중히 생각하기에 그런 다정도 베풀었을 것이다.특히나 첫날 밤에 그가 애타게 부르던 사람이 아닌가.강유영은 고개를 저어 잡생각을 떨쳐버리고는 조심스럽게 옷매무새를 정돈했다.침실 문은 열려 있었고 그녀는 밖에 있는 소은경이 눈치챌까 조마조마하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안에서는 두 사람의 대화가 또렷이 들렸다.“어머니께서 어제 출발하셨답니다. 사람을 보내 미리 마중을 나가고 싶은데 제게 사람 좀 붙여주실 수 있겠습니까?”소은경이 물었다.회남왕비가 경성으로 출발한 모양이었다.강유영은 문득 황제가 아직까지 조원철과 소은경에게 혼인을 하사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아마도 회남왕비가 경성에 도착하길 기다리는 모양이었다.회남왕은 황제의 충복이기도 하니 혼인을 하사하는 교지는 당연히 소은경의 부모가 있는 자리에서 내려야 정중하게 보일 터였다.“바깥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왕비께는 내가 사람을 보낼 테니 군주는 안심하고 기다리십시오.”조원철이 담담히 말했다.강유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얼마나 소은경의 안위가 걱정되었으면 저런 말을 할까.“예. 반달 후에는 어머니를 볼 수 있겠네요.”소은경은 상쾌한 목소리로 답했다.강유영은 재빨리 허리띠를 묶었다.그 뒤로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주의해서 듣지 않았다.평범한 정인들처럼 일상적인 얘기들이었다.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갑갑한 가슴을 진정시켰다.옷을 다 입은 그녀는 신발을 신고 살금살금 침상을 내렸다. 그러다 다리에 힘이 빠져 그대로 침상에 주저앉고 말았다.다행히 이불이 두텁게 깔려 있어 소리는 나지 않았다.강유영은 잠시 앉아서 숨을 고른 뒤, 머리카락을 정돈했다.문득 도경진이 꽂아준 옥비녀가 생각났다.값어치를 떠나서 도씨 가문의 조상님 때부터 내려오는 물건이라 했으니 절대 망가뜨릴 수 없었다.그녀는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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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화

“아닙니다.”소은경은 연신 고개를 저었다.그녀는 직접 조원철의 침실에 들어가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하면 조원철과 다시 관계를 회복하기 쉽지 않을 것을 알았다.청운이 기회를 틈타 강유영에게 어서 가라고 재촉했다.강유영은 치맛자락을 들고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그녀는 옥청원 대문을 나와 한참을 더 걸은 후에야 걸음을 늦췄다.땀에 흠뻑 젖어 온몸이 불쾌하고 찝찝했다.손바닥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시선을 내리자, 엄지손가락 위에 빨갛게 남은 이빨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신음이 새어나갈까 그녀가 직접 깨문 자국이었다. 살갗이 벗겨지고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상처를 닦은 후, 급히 요월원으로 걸음을 옮겼다.“아씨, 점심은 진작에 끝나지 않았나요? 왜 이제야 오세요?”단비가 다가오며 물었다.“정원에서 산책 좀 하고 왔어.”강유영은 차마 단비에게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혼사는 정해졌나요? 도 대인께서 주신 비녀는요?”단비가 또 물었다.“귀중한 물건이라 따로 보관했어.”강유영은 그녀가 계속 캐물을까봐 슬쩍 말을 돌렸다.“목욕물을 좀 준비해 주렴. 씻고 좀 쉬어야겠어.”얼굴은 여전히 화끈거리고 온몸이 끈적여서 불편했다.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그녀는 욕조 변두리에 몸을 기대고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몸을 관찰했다.첫날밤처럼 몸 곳곳에 선명한 자국이 남았다.끝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애무가 더 은밀하고 수치스러웠다.그녀는 자신의 가는 종아리가 그의 어깨에 걸쳐지던 광경이 떠올랐다.첫날보다는 엄청 숙련된 모습이었다.불현듯 그녀는 그가 춘강루에 가서 월연을 불렀던 것이 떠올랐다.강유영의 안색이 점점 하얗게 질렸다.예전의 그의 손길은 거칠고 서툴렀다.그날 저녁 그녀가 서재에서 울며 거절할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너무 아파서 그가 옷깃에 손만 닿아도 두려웠다.그런데 갑자기 여유가 생기고 많이 숙련된 모습이었다.‘월연에게서 배운 걸 나한테 써먹었구나.’커다란 눈물방울이 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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