جميع فصول : الفصل -الفصل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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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1화

남연은 자신이 바깥에서 본 것을 곧이곧대로 털어놓았다."아무래도 폐하께서 하사하신 사람이니, 진국공부에서도 중히 여길 수밖에 없지."진 부인이 강유영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그녀는 한씨가 말한 강유영과 조원철의 추문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었다. 강유영의 안색에 별다른 동요가 없는 것을 보니, 대개 한씨의 억측일 것이라 여겼다.하지만 한씨가 조원철 곁에 다른 여인이 생겼다는 말을 자주 꺼내라 일렀으니, 일단은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이런 이야기라도 꺼내지 않고 멀뚱히 입을 다물고 있으면 오히려 어색하기만 했다."그렇지요." 강유영은 가볍게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하사하신 분이니 다른 이들보다 훨씬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하지요."그녀는 겉으론 평온하게 웃고 있었지만 소매 아래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깊게 파고들었지만 아픔조차 느끼지 못했다. 가슴을 짓이기는 듯한 고통이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조원철은 밤새 저택에 돌아오지 않았다.오직 그 여인과 함께 오기 위함이었다.온 집안이 이토록 소란스럽게 환대하니, 비록 첩실이라 해도 훗날 가볍게 여겨지진 않을 것이다.잘된 일이었다.그녀는 조원철의 마음속에서 자신이 소은경만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다른 여인들과는 조금 다를 것이라 여겼다.하지만 황제가 하사한 여인을 이토록 극진히 대하는 것을 보니, 소은경을 제외하면 그에겐 어떤 여인이든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강유영은 고개를 숙인 채 씁쓸하게 웃었다.그가 어떤 사내인지 잘 알면서도, 내내 헛된 미련을 품어온 자신이 우스웠다.이제야 완전히 정신이 들었다."밖에서 뭘 하든, 우린 저잣거리나 한 바퀴 돌고 오자꾸나. 네게 물건도 좀 사주고 싶고."진 부인이 강유영을 잡아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괜찮습니다. 여기도 있을 건 다 있습니다."강유영은 담담히 사양했다.당장 필요한 물건도 없거니와, 방 안에 있는 짐만 전부 챙겨 떠나기도 버거웠다."아씨, 다녀오십시오. 저잣거리 구경도 하고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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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2화

한씨는 강유영을 요월원에서 내쫓으며 이 처소를 소지란에게 내어준다고 말했기에 괜한 꼬투리를 잡히고 싶지 않았다.소지란에게 한 말에도 속내가 있었다. 당장은 소지란을 이곳에 머물게 하더라도, 훗날 조원철이 정실을 들이면 당연히 처소를 내어놓아야 한다는 뜻을 은연중에 내비친 것이다.소지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렸다."부족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거라. 사람을 시켜 사다 주마." 한씨가 덧붙였다. "참, 오후에 중개인을 부를 터이니 쓸 만한 시녀를 몇 명 고르도록 해라."그저 겉치레로 해본 소리였다.소지란은 올 때부터 이미 한 무리의 하인들을 대동하고 왔으니, 굳이 국공부에서 사람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아니나 다를까, 소지란이 고개를 저었다."출궁할 때 폐하께서 이미 여덟 명이나 하사하셨으니 일손은 충분합니다. 국공 부인께서 굳이 마음 쓰실 것 없습니다.""그러면 다행이구나. 행여 일손이 부족해지면 내게 말하거라. 자, 들어가서 둘러보자꾸나."한씨는 소지란을 이끌고 방 안으로 향했다."국공 부인, 세자께 따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소지란이 나직이 입을 뗐다."그래, 그리 하거라."한씨는 순간 무안한 얼굴로 어색하게 말했다."두 사람 오붓하게 이야기를 나누거라. 난 이만 가보마."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울화가 치밀었다.소지란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순종적이고 만만한 인물이 아닌 듯했다.일개 역승의 딸 주제에, 황궁에서 며칠 시중 좀 들었다고 이리 방자하게 굴다니 어이가 없었다.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다 조원철이 알아서 상대할 일이었다."세자, 안으로 드시지요."소지란은 조원철에게 가볍게 예를 갖추며 안으로 권했다.조원철은 아무런 대꾸 없이 무심하게 그녀를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섰다.방 안을 훑어보던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불과 하루 전만 해도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고작 하룻밤 저택을 비운 사이, 요월원의 주인이 바뀌어버렸다.강유영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너희들은 그만 물러가거라."등 뒤에서 소지란이 하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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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3화

요월원을 나선 조원철의 곁으로 청류가 다가왔다."세자.""그 아이는 어디로 갔느냐."조원철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그의 뒤에 있던 청운도 청류를 바라보았다."소인이 알아보니, 유영 아씨께서는 소은원으로 거처를 옮기셨습니다. 아씨께서 자청하신 일이라 합니다."청류가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조원철은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더니, 이내 걸음을 옮겼다.청류는 당황하여 황급히 덧붙였다."세자, 아씨께서는 지금 처소에 계시지 않습니다. 진 부인을 따라 저잣거리로 나가셨는데……."말을 하던 그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조원철이 향하는 곳은 소은원이 아니라 대청 쪽이었다.세자가 밤새 돌아오지 않은 사이, 아씨는 다시 초라한 곳으로 쫓겨났다. 그런데도 세자는 아씨를 찾아가 볼 생각조차 없는 것일까.청류는 속으로 강유영을 동정하며 청운을 쳐다보았다.청운은 머뭇거리다가 앞서가는 조원철을 향해 물었다."세자, 소인이 가서 아씨께 언질이라도 드릴까요."그는 주군의 처지가 난처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아씨가 오해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그럴 것 없다."조원철은 차갑게 대꾸하며 더욱 걸음을 재촉했다."세자께선 어찌 저러십니까."청류가 참지 못하고 툴툴거렸다."말 한마디 안 해주시면 아씨께서 뭐라 생각하시겠습니까.""아씨야 모르신다 쳐도 너까지 왜 이리 눈치가 없느냐."청운이 그를 흘겨보았다."소지란이 시녀 여덟 명이나 달고 들어왔다는 건, 이 저택에 주군을 감시하는 눈이 아홉 쌍이나 더 생겼다는 뜻이다. 그들 뒤에는 각기 다른 주인이 버티고 있고, 황궁에 만만한 자가 어디 있느냐. 세자께서 자칫 실수라도 하면 그 불똥이 고스란히 아씨께 튈 텐데, 그 이치를 정녕 모른단 말이냐.""형님 말이 맞습니다. 제가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군요."청류가 머리를 긁적였다."하지만 아씨는 이대로 오해하게 내버려 두실 겁니까?""기다려야지."청운이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주군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청류 역시 한숨을 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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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4화

서유는 아씨 홀로 거리에 남겨두는 것이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감로 다루가 바로 저기 있지 않느냐."강유영은 다루의 간판을 가리키며 말했다."지금 바로 들어갈 테니 걱정 마라. 날 주시하는 사람도 없으니 어서 다녀오거라."그녀는 손에 든 물건으로 서유를 가볍게 떠밀었다."소인은 다루 입구까지 가서 아씨께서 들어가시는 것을 보고 하 낭자를 모셔 오겠습니다."서유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아씨의 뜻을 꺾을 수 없어 한발 물러섰다."알겠다."강유영도 서유의 호의를 알기에 고개를 끄덕였다.*반 시진 후, 하 낭자가 잰걸음으로 별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강 소저, 저를 찾으셨습니까?"그녀는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어 한쪽에 두고는 웃으며 말을 건넸다."예."강유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미소를 지으며 상대를 바라보았다."또 낭자께 수고를 끼쳤습니다. 어서 앉으시지요.""별말씀을요."하 낭자는 맞은편으로 다가가 의자를 빼고 앉았다."저야 원래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팔자지요. 마침 성 밖에서 일보고 돌아오던 참이었습니다."오랜만에 만난 강유영은 예전보다 훨씬 기품이 넘쳐 보였다. 다만 안색이 다소 초췌하고 눈이 붉게 충혈된 것이 밤잠을 설친 듯했다."아직 점심 전이시지요? 요기할 것을 좀 가져오라 했습니다. 차린 건 없지만 드시지요."강유영은 눈웃음을 지으며 음식을 권했다.본래는 차와 다과 몇 접시만 주문할 생각이었다.하지만 정오가 가까워져 점심을 먹어야 할 시간이었다. 거리의 주루에서 음식을 배달해 주기에, 아예 점심상을 내오라 한 것이다."고맙게 잘 먹겠습니다."하 낭자는 성격이 시원시원하여 지체 없이 수저를 들었다.두 사람은 마주 앉아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강 소저는 아직 적당한 혼처를 찾지 못하셨습니까?"하 낭자가 물었다.강유영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마 제 짝은 영영 찾지 못할 듯합니다……."낳아준 부모가 참으로 골치 아픈 난제를 남긴 것이었다."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인연이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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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5화

"그렇군요……. 그럼 번거로우시겠지만, 우선 은자 만 냥만 꺼내주십시오."강유영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골치 아픈 일이었다. 지금 그녀의 처지에선 그저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돌아가는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은표가 준비되면 사람을 시켜 국공부로 보내드릴까요?"하 낭자가 웃으며 물었다."예." 강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이 일은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아 주십시오.""그 점은 마음 놓으십시오."하 낭자가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강유영은 그 미소에 마음을 놓았다.하 낭자는 늘 믿음직한 사람이었다. 수중에 남은 은자로 우선 떠날 채비를 하고, 만 냥이 들어오면 지체 없이 오씨 어멈 일행을 데리고 멀리 떠날 것이다.*하 낭자와 헤어진 뒤에도 강유영은 서둘러 국공부로 돌아가지 않았다.소은원으로 돌아가 혼자 조용히 있으면 또 생각해서는 안 될 사람을 떠올릴까 두려웠다. 차라리 밖에서 시간을 더 보내는 편이 나았다."아씨, 어디로 가실 겁니까?"서유가 뒤따르며 물었다.강유영은 길 앞을 막막하게 바라보았다.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장 의원을 뵈러 가자꾸나."한참 만에 그녀가 입을 뗐다.경성을 떠나고 나면 장 의원을 언제 다시 뵐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다. 시간이 날 때 찾아뵙는 것이 도리였다."예." 서유는 기운이 빠진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일깨워주었다. "가시는 길에 뭐라도 좀 사 갈까요?"아씨는 남을 찾아뵐 때 빈손으로 가는 법이 없었다. 속이 상해 그 사실을 깜빡 잊으신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물론이지."강유영은 고개를 돌려 웃어 보였다.서유도 이제 제법 꼼꼼해져서 단비만큼이나 세심하게 굴었다.*"유영아!"이때, 골목에서 불쑥 튀어나온 서준이 그녀를 향해 양팔을 벌렸다."얼마나 찾았는지 아느냐."강유영은 갑작스러운 등장에 화들짝 놀라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흘겼다."깜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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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6화

무척이나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날개를 활짝 편 공작새 같았다.강유영은 아예 입을 다물고 그를 무시했다.진지한 구석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고, 내뱉는 말도 하나같이 실없었다.상대해 봐야 입만 아플 뿐이었다."말 좀 해보거라, 유영아. 어서 말 좀 해보라니까……."서준은 그녀가 대꾸하지 않자 끊임없이 재촉하며 졸졸 뒤를 따라왔다."전 그 여인을 본 적 없습니다."강유영은 어쩔 수 없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아무리 떨쳐내려 해도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귓가에서 떠들어대니,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소지란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말 몰랐다.하지만 궁녀로 들어가 황제를 지척에서 모셨다면, 용모가 꽤 반반할 터였다.용모뿐만이 아니었다. 건정제를 제대로 모셨다면 최소한 눈치 빠르고 영악한 여인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황제의 곁에서 그리 오래 살아남을 수 없었을 테니까."오늘 아침 그 여인이 저택에 들어설 때 진국공부에서 폭죽을 요란하게 터뜨리며 환영했다던데, 넌 구경도 안 갔느냐?"서준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그는 강유영이 조원철의 새 첩실의 용모에 무척 신경을 쓸 줄 알았다.그런데 이토록 무관심할 줄이야. 이는 강유영의 마음속에 조원철이 아예 없어서 그 여인이 어찌 생겼든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닐까?"전 시끄러운 건 질색입니다."강유영은 고개를 저으며 나직이 대꾸했다.빈말이 아니었다.그녀는 조용한 것을 좋아했고, 떠들썩한 분위기를 즐기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정월 대보름에 연등을 구경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대개는 후미진 구석에 홀로 머무는 것을 선호했다.본래 구경거리라면 질색하는 성정인데, 조원철과 관련된 소란이라면 더더욱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나는 그 여인을 본 적이 있다." 서준이 턱을 매만지며 여우 같은 눈을 반짝였다. "인물이 그저 그렇더구나. 너한테는 발끝도 못 미치지."강유영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누가 전하의 말을 믿는답니까."그녀는 서준의 헛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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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7화

"내 짐작건대, 지금쯤 조원철도 퍽 난감할 게다. 네게 진심을 증명하고 싶다면 그 여인에게 가지 말아야 마땅하지. 허나 가지 않으면 아바마마께서 언짢아하실 터. 십중팔구 일단 그곳에 들렀다가, 나중에 네게 변명하려 들 게다……."서준은 눈동자를 굴리며 다시 입을 뗐다.이참에 강유영에게 조원철의 실체를 똑똑히 알려주고 싶었다.조원철은 군자가 아니었다. 강유영을 차지하기 위해 온갖 치졸한 수단을 동원했던 음흉하고 교활한 사내였다.어렵게 얻어낸 기회이니 반드시 잡아야 했다."그분은 제 오라버니입니다. 헛소리 마십시오."강유영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작고 하얀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내 말이 심했구나."서준이 제 입을 가볍게 쳤다."한 번만 더 그분 이야기를 꺼내면, 다신 따라오지 마십시오."강유영이 매몰차게 돌아서며 깊은숨을 내쉬었다.어차피 떼어낼 수 없다면, 듣기 싫은 이름이라도 꺼내지 못하게 막아야 했다."알았다. 다신 입에 올리지 않으마."서준이 순순히 꼬리를 내리고 곁에 바짝 붙었다."어떠냐. 나처럼 훌륭한 사내도 드물지. 그 넓은 왕부에 첩실 하나 들이지 않았으니 얼마나 조용하고 평화롭겠느냐."조원철의 흉을 보았으니, 이제 자신이 얼마나 나은 사내인지 은근슬쩍 내세울 차례였다.강유영은 돌연 걸음을 멈추고 길가를 바라보았다."왜 그러느냐."서준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저것이 먹고 싶습니다. 가서 사다 주세요."강유영이 손을 들어 가리켰다.저만치 앵두 정과를 파는 노점이 보였다.당연히 먹고 싶어 한 말이 아니었다. 그저 서준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한 핑계였다."그래, 당장 사 오마. 여기서 기다리거라."서준은 환하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강유영이 자신에게 심부름을 시키다니, 드디어 마음을 열고 기회를 주려는 것일까?그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딴 데로 도망치지 말거라. 어딜 가든 다 찾아낼 테니까."강유영은 내심 그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도망칠 요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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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8화

강유영은 앵두 정과를 씹으면서도 저도 모르게 조원철을 떠올렸다.그는 늦게 귀가할 때면 수없이 여러 번 앵두 정과나 다른 주전부리를 사다 주곤 했다. 황궁 연회에 참석했을 때도 진귀한 과일을 소매춤에 몰래 숨겨와 그녀에게 건네주었다.문득 여지 여섯 알을 가져다주었던 일이 떠올랐다.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궁 안의 마마들조차 한 사람당 고작 네 알씩 배분받은 귀한 과일이었다.그녀는 그 귀한 여지 여섯 알을 단숨에 다 먹어 치웠었다.앞으로 그는 소지란에게도 그렇게 온갖 것들을 가져다줄 것이다."유영아, 넌 내가 늘 농담만 한다고 생각하느냐."서준이 문득 능글맞은 태도를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아닙니까?"강유영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퉁명스럽게 되물었다.그녀는 다시 앵두 정과 한 알을 집어 입에 넣고 꾹 깨물었다. 서준에게는 그 사람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하게 막아놓고, 정작 본인이 먼저 조원철을 떠올리고 마는 꼴이 한심했다."당연히 아니지." 서준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진지하게 묻건대, 조원철 그놈이 대체 어디가 좋으냐? 얼음처럼 차갑고,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넬 줄 모르는 놈 아니냐. 나를 보거라. 인물도 훤칠하고 입담도 좋은 데다, 한 여인만 바라보는 지조까지 갖추지 않았느냐. 정말 날 진지하게 생각해 볼 마음이 없느냐?"그는 제 자랑을 늘어놓기 전에 으레 조원철부터 깎아내렸다.강유영은 그 말을 듣고 그를 올려다보더니 픽 웃음을 터뜨렸다."왜 웃는 게냐?"서준이 영문을 몰라 물었다.자신은 이토록 진지한데 그녀가 웃어버리니 당혹스러웠다."한 여인만 바라본다는 걸 어찌 증명하시겠습니까?"강유영은 경성 천지에서 평생 지조를 지키는 사내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그저 그녀의 식견이 짧은 탓일 수도 있었다."그러니 내게 기회를 주면 증명해 보이마."서준은 자연스레 속마음을 털어놓았다."농담은 그만하십시오." 강유영은 정색하며 선을 그었다. "저는 당분간 누구와도 혼인할 생각이 없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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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9화

어둠이 짙게 깔렸다. 요월원 회랑 아래 매달린 희미한 등불이 미풍에 가볍게 흔들렸다.조원철은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세자께 인사 올립니다."월백색 비단 치마를 차려입은 가녀린 자태의 소지란이 무릎을 굽혀 예를 갖추었다.조원철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고는 그녀를 지나쳐 침소로 걸음을 옮겼다.소지란이 고개를 돌려 그의 손에 들린 서책을 보았다.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걸음을 떼어 뒤를 따랐다.침소 안에는 희미한 양각등 두 개만 켜져 있었다.조원철은 곧장 탁자로 다가가 놋쇠 촛대 위의 초에 하나씩 불을 밝혔다."세자, 이런 궂은일은 소녀가 하겠습니다……."소지란은 황급히 다가가 손을 뻗어 대신하려 했다. 자신은 아랫사람이니 이런 일을 하는 것이 마땅한 본분이었다.조원철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손의 움직임에만 시선을 고정했다.촛대의 초가 모두 켜지자, 침소 안이 대낮처럼 환해지며 구석구석 또렷하게 드러났다.소지란은 입술을 깨물며 다소 어색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녀는 건정제 곁에서 시중을 들었기에 조원철을 뵐 일이 적지 않았다. 진국공부 세자가 평소 행실이 반듯하고 사람을 대할 때 얼음처럼 차갑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오늘도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새 첩실에 대한 호기심조차 전혀 내비치지 않는 것을 보니, 과연 소문대로였다.조원철은 탁자 앞에 앉아 손에 든 서책을 펼쳤다. 그는 시선을 내리깔고 책을 읽으며 곁에 아무도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소지란은 그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눈앞의 사내는 평상복 차림으로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촛불이 윤곽이 뚜렷한 옆얼굴을 비추었고, 길게 내리깐 속눈썹이 칠흑 같은 눈동자를 가렸다. 타인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서늘한 기운만 뿜어낼 뿐, 일말의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평소 궁에서 보던 조원철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그녀는 바로 상황을 파악했다.조원철이 이 시각에 이곳을 찾은 것은 새로 들인 첩실과 정을 나누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저 황명을 받드는 흉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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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0화

"세자, 이대로 가실 겁니까?"소지란이 물었다.조원철은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되물었다."아직 할 말이 남았느냐?""세자께서도 아시다시피, 소녀는 황궁에서 왔으며 출궁할 때 폐하의 어명이 있으셨습니다." 소지란은 고개를 숙이고 나직이 말했다. "오늘은 제가 진국공부에 온 첫날밤입니다. 세자께서 그저 앉아만 계시다가 촛불조차 끄지 않고 가버리신다면, 훗날 폐하께서 물으실 때 소녀는 무어라 답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게다가 이 처소에는 궁에서 데려온 여덟 명의 시녀들도 있습니다."그녀는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뜻을 명확히 전달했다.자신이 건정제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고, 주변의 하인들 역시 각기 주인을 따로 두고 모종의 목적을 품고 왔음을 넌지시 일깨운 것이다.만약 조원철이 이대로 방을 나선다면 꽤나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터였다.조원철은 그 자리에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부디 조금만 인내하시어 침상에서 쉬시지요. 소녀는 평상에 기대어 눈을 붙이면 그만입니다."소지란이 상대를 배려하며 나긋하게 권했다."내가 평상에서 자겠다."조원철은 몸을 돌려 평상으로 다가가 앉았다."세자처럼 귀하신 분이 어찌……."소지란이 황급히 만류했다.그녀는 제 신분을 잘 알았다. 어찌 조원철을 평상에 재우고 자신이 침상을 차지한단 말인가."잔말 말고 불이나 끄거라."조원철은 평상에 비스듬히 기댄 채 눈을 감고 명했다."그럼 소녀가 이불이라도 내오겠습니다……."소지란이 장롱 문을 열려 했다."필요 없다."조원철은 차갑게 거절했다.소지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더는 말없이 다가가 촛불을 껐다.침소 안이 어둠에 잠겼다.그녀는 더듬거리며 침상으로 다가가 겉옷도 벗지 않은 채 그대로 누웠다.*"불이 꺼졌습니다!"고개를 뻗어 침소의 불이 꺼진 것을 본 청류가 참지 못하고 청운의 팔을 툭툭 쳤다.청류는 세자가 이리 쉽게 굴복할 줄은 몰랐다. 황제가 하사한 사람이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해도, 굳이 손을 댈 필요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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