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Chapter 911 - Chapter 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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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1화

청운의 짐작대로 주군은 그런 섣부른 사내가 아니었다.다만 강유영 쪽에는 아직 아무런 귀띔도 들어가지 않았으니, 분명 단단히 오해하고 있을 터였다."내려놓거라."조원철이 명했다."예."청운은 더운물을 내려놓고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벽에 기대어 있던 청류는 그가 나오자 콧방귀를 뀌며 발뒤꿈치로 벽을 툭툭 찼다.청운이야 뼛속까지 주군 편이니 주군을 감싼다 쳐도, 청류는 홀로 밤을 지새울 강유영이 못내 안쓰러웠다."이제 마음 놓아도 된다."청운이 곁으로 다가와 뜬금없는 소리를 툭 던졌다."마음을 놓다니요?"청류가 무언가 눈치를 채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세자께선 침상에 오르지 않으셨다. 의복도 단정히 입고 계시고. 그저 저들 보라고 꾸민 연막이야."청운이 목소리를 낮추며 안쪽을 향해 턱을 까딱였다."저도 그럴 줄 알았습니다. 세자께서 그럴 분이 아니시죠."청류가 그제야 헤벌쭉 웃으며 제 일처럼 기뻐했다.방금 전까지 세자를 오해했던 것이다. 주군이 가장 아끼고 마음에 두는 분은 역시 유영 아씨뿐이었다."아까는 딴소리를 하더니."청운은 그를 힐끗 흘겨보았다.*기나긴 밤이 지나고, 창밖의 하늘이 어스름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기둥에 기대어 졸고 있던 두 시녀가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자세를 바로잡았다.조원철은 문지방을 넘어서며 고개를 돌려 소지란을 보았다.소지란은 얇은 속적삼 차림으로 다가와 그의 옷자락을 반듯하게 펴주며 물었다."세자, 점심때는 식사하러 들르시겠습니까?""낮에 상황을 봐서."조원철이 짧게 대꾸했다."공무도 중요하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마십시오."소지란은 세심하고 다정하게 당부했다."음."조원철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덧붙였다."고맙다."소지란이 눈을 내리깔며 미소와 함께 가볍게 예를 갖추었다.*"세자."뜰 입구에서 청운과 청류가 예를 표했다.조원철은 두 사람을 지나쳐 요월원을 나섰다. 대문을 나서고도 한참을 더 걸어간 뒤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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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2화

청류는 오히려 기뻤다. 주군이 진작 아씨를 찾아갔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짙은 어둠이 국공부 한구석에 자리한 소은원에 내려앉았다.마치 모두에게 잊힌 듯, 숨이 막힐 만큼 캄캄한 밤이었다.강유영은 침상에 반듯이 누워 있었다.몸에 덮은 이불은 오씨 어멈이 깨끗이 빨아 볕에 말려둔 덕에 푹신하고 포근했다. 은은한 향까지 배어 한결 따뜻했다.하지만 그녀의 손발은 아무리 이불을 여며도 얼음장처럼 차갑기만 했다.그녀는 뜬눈으로 소박한 무늬가 수놓인 침상 휘장만 멍하니 올려다보았다.지금쯤 조원철은 요월원에서 소지란과 첫날밤을 보내고 있을 터였다.낮에 서준은 소지란의 이목구비가 반듯하다고 했다.분명 눈치도 빠르고 영악한 데다 인상도 고운 여인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황제의 눈에 들어 어전 시중을 들었겠는가. 그처럼 영특하고 고결한 여인이니 필시 남다른 구석이 있을 터였다.조원철은 그녀를 어찌 대할까. 황제가 친히 내린 사람이니 각별히 여길 것이 분명했다.그녀를 대할 때처럼 무례하게 굴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강유영이 거부해도 번번이 억지로 안았고, 며칠씩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할 만큼 괴롭히곤 했다.지금 요월원의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붉은 촛불이 밝게 타오르고, 포근한 침상에서 온기를 나누며 그는 소지란의 손을 밪고 입을 맞추고 부드럽게 그녀를 취할 것이다.'분명 날 대할 때보다 훨씬 다정하고 부드러울 테지.'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눈시울이 붉어지며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가슴을 파고들었다.강유영은 몸을 뒤척이며 이불을 끌어올려 얼굴을 푹 덮었다. 더는 잡념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진작 결심한 일이었다. 낮에 하 낭자와 만나 은자 문제도 매듭지었다. 곧 이곳을 떠나면 조원철과는 영영 남남이 될 터였다. 이제 와서 그런 것들을 신경 쓴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모두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수없이 마음을 다잡았건만 머리와 마음이 따로 놀았다. 찰나의 틈만 생기면 어김없이 조원철이 떠올랐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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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3화

혹시 어제 서준과 만난 일을 알아챈 것일까.그러고 보면 그는 늘 그런 식이었다. 자신은 다른 여인을 품으면서 그녀에게는 일말의 딴마음도 허락하지 않았다.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문 열어라."조원철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강유영은 황급히 눈가를 훔치고는 벽 쪽으로 돌아누워 눈을 질끈 감았다.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마주치고 싶지 않고, 말은 더더욱 섞고 싶지 않았다.애써 발소리를 죽인 걸음이 침상 곁으로 다가오더니 이내 휘장을 걷어내는 기척이 느껴졌다.등을 돌리고 누웠음에도 등 뒤에서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강유영은 숨소리를 고르며 최대한 깊이 잠든 척했다.침상 곁의 사내는 뭘 보는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또다시 왈칵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곁에 새 여인을 두었으니 이제 그녀는 필요 없을 텐데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 가증스럽게 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의 손이 어깨에 내려앉았다. 얇은 속적삼 너머로 전해지는 손바닥의 온기가 맨살에 닿은 듯 뜨거웠다.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눈치챘겠지?'그는 예민한 사내이니 자는 척한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을 것이다.조원철은 조심스레 그녀의 상체를 돌려 눕히고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러더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애틋한 입맞춤을 남겼다.강유영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보드라운 깃털이 스치고 지나간 듯 가슴이 시큰거리고 저릿했다. 그를 마주하면 모질게 대하리라 굳게 다짐했건만, 입맞춤 한 번에 이틀 밤을 꼬박 새우며 쌓아온 분노와 서러움이 눈 녹듯 허물어지고 가슴속에는 그저 뻐근함과 떨림만이 남았다.그녀는 눈물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참았다."오래 머물 수 없다. 나중에 다 설명하마."말을 마친 그가 손을 거두었다.강유영은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촉촉이 젖은 긴 속눈썹만이 미세하게 떨릴 뿐이었다.이마에는 아직 다정한 온기가 남아 있었지만, 그녀는 이미 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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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4화

"너무 기름집니다. 그냥 맑은 죽이나 좀 먹겠습니다."도경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며칠째 어머니가 갖가지 귀한 약재를 넣어 끓인 고깃국을 내오시는 통에 속이 느글거려 도무지 넘어가지 않았다."그게 무슨 소리냐. 상처가 아물려면 부실하게 먹어서는 안 돼……."도 부인은 물러서지 않았다.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부인, 문 좀 열어주세요."도 부인은 저도 모르게 도경진과 시선을 교환했다."사예가 왔구나."도 부인이 입을 열었다."어머니 선에서 적당히 돌려보내 주세요."도경진도 조사예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미간을 더 깊게 찌푸렸다.그는 조사예에게 마음이 눈곱만치도 없었다. 자꾸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으니 오히려 반감만 더 커질 뿐이었다."알았다, 다녀오마."도 부인은 대답하고는 밖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사예 아씨 오셨는가. 이건 또 뭔가?"그녀는 문 앞에 선 조사예를 보자마자 만면에 웃음을 띠며 그녀의 손에 들린 찬합에 시선을 고정했다.비록 조사예를 며느리로 들일 생각은 없었지만, 굳이 미움을 사예 득 될 것도 없었다. 적당히 관계를 유지해 두면 이모저모 쓸모가 있었다. 예컨대 저 찬합 안에도 필시 귀한 약재가 들어있을 터였다."산삼 비둘기 탕이에요."조사예는 웃으며 안으로 들어서더니 손에 든 찬합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쑥스러운 듯 손가락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의원이 말하길, 이 탕은 원기를 보충하고 상처를 아물게 하는 데다 기혈을 돕는 데 그만이라더군요. 제 생모께서 애지중지하시던 귀한 산삼을 꺼내어 화로에 밤새 고았으니, 부인께서 도 나리께 따뜻할 때 드시라 전해주세요."그녀는 두 손을 다소곳이 모아 쥐었다. 통통한 얼굴에 수줍은 미소를 띤 품이 제법 순박하고 진실해 보였으며, 도경진을 향한 애정이 뚝뚝 묻어났다."아이고, 참으로 정성이 지극하구려. 그나저나 우리 경진이가 통 사람 호의를 몰라주니 원……."도 부인은 그렇게 말하며 슬쩍 방문 쪽으로 턱을 까딱였다.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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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5화

도경진은 그릇을 받아 들고 숟가락으로 가볍게 저었다.그는 조사예가 가져온 비둘기 탕을 먹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저 강유영이 어찌 되었는지 묻고 싶을 뿐이었다."아까 사예 아씨가 진국공 부인께서 강유영을 요월원에서 쫓아냈다고 했는데, 무슨 연유요?"도 부인이 자리에 앉으며 조사예를 향해 물었다.강유영은 제법 고고한 척하며 고집을 부리는 구석이 있었다. 고작 양녀 주제에 제 아들의 첩으로 들어오는 것조차 거부하지 않았던가.그녀는 강유영이 곤욕을 치르는 꼴이 퍽 고소했다. 이참에 제 분수를 똑똑히 깨달았으면 했다."부인께선 모르시겠지만, 며칠 새 저희 저택에 일이 참 많았어요."조사예는 도경진을 힐끗 보았다.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자 황급히 말을 이었다."폐하께서 큰오라버니에게 궁녀를 하사하셨거든요. 어머니 말씀이, 요월원은 저택에서 가장 좋은 처소이니 본래 미래의 새언니가 머물 곳이라 하셨어요. 폐하께서 내리신 분이니 신분이 귀한 데다, 지금 큰오라버니에겐 정실이 없으니 그 궁녀가 지내는 게 맞다며 강유영을 내보낸 거예요."그녀는 말을 마치고 다시 도경진의 눈치를 살폈다.사실 도경진 앞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온마음으로 그를 연모하는데, 그는 자신을 통해 강유영의 소식만 캐려 하니 속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강유영 이야기를 꺼내야만 도경진이 자신을 쳐다보고 말이라도 몇 마디 섞어주었기 때문이다."그래서 진국공 부인께서 강유영을 그 처소에서 쫓아냈다는 거로군?"도 부인이 단박에 이해한 듯 제 아들을 보며 말했다."내 말했지 않느냐. 양녀 신세가 다 그렇지, 제대로 대접이나 받겠니."참으로 잘된 일이었다. 고고한 척 굴더니 꼴이 좋았다."유영 아씨는 어디로 거처를 옮겼습니까?"도경진은 여전히 탕에 입도 대지 않은 채 조사예를 보며 부드럽게 물었다.그가 조사예에게 각별히 다정해서가 아니었다. 본래 성정이 온화하여 화를 낼 때조차 무섭지 않은 사내였다. 하물며 이리 일상적인 대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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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6화

조사예는 그가 이렇게 다치고도 온통 강유영만 생각하는 것을 보자 울컥 화가 치밀고 속이 상했다.'강유영이 대체 어디가 좋아서 저리 애달파하는 걸까.'그저 소은원으로 거처를 옮겼을 뿐,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것도 아닌데 저리 안달복달하는 모습을 보니 기가 막혔다.그가 다쳐 누워 있는 동안 곁에서 가장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사람이 누구인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강유영은 고작 한 번 다녀갔을 뿐이다. 그마저도 그녀가 수를 써서 억지로 데려온 것이었다.반면 그녀는 매일같이 찾아와 온갖 귀한 보양식을 끓여 바쳤건만, 그는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았다.참으로 억울하고 야속한 노릇이었다."고집부리지 말거라. 상처도 다 낫지 않았는데 어딜 가려 하느냐."도 부인이 도경진을 다시 침상으로 밀어 눕히며 엄하게 꾸짖었다."그저 거처를 옮겼을 뿐 별일 없을 게다. 정 유영이를 만나고 싶거든 몸부터 성히 낫고 가거라."도경진은 아직 몸에 기력이 없어 속절없이 침상에 걸터앉으며 미간을 잔뜩 구겼다."일단 탕부터 마셔라."도 부인이 그릇을 다시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입맛이 없습니다."도경진이 그릇을 내려놓으려 했다.이른 아침부터 기름진 고깃국을 먹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무엇보다 조사예가 끓여 온 것이라 더 싫었다.조사예가 헛된 희망을 품게 놔둘 수는 없었으니, 그녀가 가져온 음식은 더더욱 입에 댈 수 없었다."사예 아씨가 밤새 끓인 정성이지 않느냐. 너희도 서로 얼굴 아는 사이인데 이리 무안을 주면 쓰나."도 부인이 억지로 그릇을 받쳐 들며 좋은 말로 타일렀다.산삼 비둘기 탕은 좀처럼 맛보기 힘든 귀한 보양식이었다. 그 비싼 산삼을 대가 없이 끓여다 주었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도경진은 욱신거리는 상처에 강유영 걱정까지 겹쳐 속이 타들어 가는 탓에 평소의 온화하고 바른 태도를 잃고 말았다."사예 아씨, 이 비둘기 탕은 먹지 않을 테니 도로 가져가십시오."도경진이 손에 든 그릇을 머리맡 탁자 위에 거칠게 내려놓는 바람에 툭 하고 둔탁한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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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7화

도 부인은 오로지 강유영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반반한 얼굴 말고는 대체 뭐가 좋다고 아들이 저렇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분명 무슨 수작을 부려 아들을 단단히 홀려놓은 것이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말만 듣고도 이리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안달하며, 애꿎은 조사예에게 모진 소리까지 해대지 않는가.조사예는 진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얼굴을 감싼 채 밖으로 뛰쳐나갔다."사예 아씨……."도 부인이 손을 뻗긴 했으나 진심으로 붙잡지는 않았다. 그녀는 이내 도경진을 흘겨보며 타박했다."네가 뭘 저질렀는지 좀 보거라…….""어머니는 그만 나가주세요. 혼자 있고 싶습니다."도경진은 이불을 끌어당기며 자리에 누웠다."어휴, 녀석도 참……."도 부인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머리맡의 그릇과 탁자 위의 찬합을 몽땅 챙겨 들고 나갔다.아들이 먹지 않겠다니 자신이라도 먹을 참이었다. 이렇게 귀한 것을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이틀 밤을 꼬박 뜬눈으로 지새운 강유영은 이미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조원철이 다녀간 뒤, 그녀는 얼굴을 감싸 쥐고 한참을 소리 없이 울다가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점심때가 다 된 참이었다.침상에서 내려와 청동 거울 앞으로 다가가 얼굴을 비춰보았다. 눈물자국은 없었지만, 눈 밑이 퍼렇게 죽어 있어 무척이나 초췌해 보였다.그녀는 일부러 혈색이 돌아 보이도록 양볼을 문지르고는 입을 열어 불렀다."단비야.""아씨, 일어나셨어요?"대답과 함께 방으로 들어온 단비가 기겁하며 소리쳤다."어찌 맨발로 서 계십니까?"맨발로 거울 앞에 서 있는 강유영을 본 단비는 깜짝 놀라 서둘러 침상 밑의 비단신을 가져다 직접 신겨주었다.강유영은 묵묵히 신발을 신었다."아씨, 점심은 뭘 드시겠습니까? 제가 작은 화로에 만들어 올리겠습니다."오씨 어멈도 단비를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그녀는 강유영의 초췌하고 핼쑥한 얼굴을 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이틀 새 진이 다 빠져 반쪽이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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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8화

만둣국은 강유영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하지만 오늘은 도무지 예전의 맛이 나지 않았다. 모래를 씹는 것처럼 입안이 서걱거렸다.그래도 그녀는 숟가락을 놓지 않고 연거푸 만둣국을 떠먹었다.잘 자고, 잘 먹고, 제 한 몸 튼튼히 건사해야 했다.건강한 몸이 없으면 어찌 오씨 어멈 일행을 데리고 경성을 떠나 멀리 도망칠 수 있겠는가."아씨, 체하십니다. 천천히 드셔요."오씨 어멈은 그 모습이 못내 걱정되어 손을 뻗어 강유영의 소매를 붙잡았다.처음엔 아무것도 먹지 않을까 봐 걱정했는데, 지금처럼 억지로 욱여넣는 모습을 보니 도리어 덜컥 겁이 났다. 필시 마음에 응어리가 져서 저러는 것이니 몸이 상할 게 뻔했다."어멈이 끓인 만둣국이 너무 맛있어서 나도 모르게 서둘렀나 봐요."강유영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눈웃음을 지으며 변명했다."아씨."오씨 어멈은 소매를 쥔 손을 놓지 않은 채 목소리를 낮추었다."세자께서는 어찌 됐든 아씨의 오라버니이십니다. 차라리 잘된 일이지요."어멈도 아씨의 마음고생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세상 이치가 그런 것을 어찌하겠는가.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 해도 족보에는 엄연히 남매로 올라가 있으니 누구도 바꿀 수 없는 노릇이었다.이렇게 관계를 끊어내야 아씨도 새 삶을 살 수 있었다.그렇지 않고 계속 얽혀 지낸다면 혼인조차 할 수 없을 텐데, 언제 끝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씨의 남은 인생을 생각하면 이편이 훨씬 나았다."어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강유영은 숟가락을 그릇에 내려놓고 미소를 지었다."전 오히려 기쁜걸요. 전에는 그 사람이 절 못 가게 막았지만, 이제 곁에 다른 여인이 생겼으니 떠나도 막지 않을 거예요."어차피 떠날 계획은 조만간 오씨 어멈에게 털어놓아야 할 일이었다.이제 준비도 얼추 끝났고 물건을 사들이는 일만 남았으니 지금이 적기였다. 미리 말해두면 오씨 어멈 일행도 채비를 거들 수 있을 터였다."경성을 떠나실 작정이십니까?"오씨 어멈은 깜짝 놀랐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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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9화

아니, 강유영은 조사예처럼 이성을 잃고 날뛰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화를 내는 대신 불쾌한 기색으로 상대를 쏘아보았다.얇은 소복 차림에 손바닥만 한 얼굴은 병색이 완연하여 창백했지만,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그 모습이 가련하리만치 아름다웠다. 누추한 방안에 서 있음에도 전혀 초라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기품이 흘렀다."지금 밥이 목안으로 넘어가!"조사예는 탁자 위의 만둣국을 보자 두 눈이 붉게 달아올라 달려들었다.조사예는 체격이 크고 건장하여 오씨 어멈이 미처 막아설 틈이 없었다. 그녀는 만둣국이 놓인 작은 탁자를 강유영을 향해 엎어버렸다.강유영은 급히 뒷걸음질을 쳐 피했다.탁자가 바닥에 나뒹굴었고, 그릇이 깨지며 만두와 국물이 사방으로 튀었다.'바로 저 여우 같은 얼굴로 도경진의 마음을 홀린 게 분명해!'저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으면, 저 천한 것도 더 이상 도경진의 마음을 흔들지 못할 것이다.어차피 강유영은 소은원으로 쫓겨난 신세였다. 큰오라버니에게는 이미 첩실이 생겼으니 강유영의 생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터였고, 그녀를 위해 나서줄 리도 만무했다.조사예의 눈에 지금의 강유영은, 아무도 뒤를 봐주지 않아 맘껏 짓밟아도 되던 예전의 만만한 처지로 돌아간 존재였다.그래서 도경진에게서 받은 분노와 수모를 고스란히 안고 돌아와, 강유영에게 화풀이를 하러 온 것이다.조사예는 다시 한번 악담을 퍼부으며 강유영을 향해 달려들었다."서유, 서유야!"오씨 어멈이 필사적으로 강유영을 막아서며 다급히 소리쳤다.때마침 소란을 듣고 방으로 뛰어 들어온 서유가 그 광경을 보았다. 서유는 재빨리 달려들어 조사예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조사예가 아무리 덩치가 크고 힘이 세다 한들, 무예를 익힌 서유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사예 아씨, 미친 짓을 하려거든 아씨 처소에 가서 하실 것이지 어딜 감히 우리 아씨 앞에서 행패입니까!"서유가 손에 힘을 주어 잡아채자, 조사예는 속절없이 뒤로 몇 걸음이나 질끌려갔다."천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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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0화

조사예에게 말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강유영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그가 그녀를 마음에 품어줄까?그럴 리 없었다.도경진은 온화하고 기품 있는 수려한 인재였다. 그는 평범한 외모에 심성마저 비뚤어진 조사예를 마음에 둘 리 없었다. 눈부시게 고결한 세자 조원철이 보잘것없는 양녀인 그녀를 마음에 둘 리 없는 것처럼 말이다.결국 같은 이치였다.그녀가 한 말은 뼈저린 진심이었고, 조사예를 조롱할 의도는 추호도 없었다.자신이나 조사예나 모두 헛된 꿈에서 깨어나야 했다."너만 아니었어도 그분은 진작 날 정실로 맞으셨을 거다!"조사예는 그 말을 듣자 더욱 분기탱천하여 길길이 날뛰며 다시 달려들려 했다."애초에 우리는 혼약까지 한 사이였어! 너만 아니었다면……."그녀가 아는 사실은 오직 하나, 도경진이 강유영을 마음에 품는 바람에 자신과의 혼약을 깨버렸다는 것뿐이었다.이 모든 것이 강유영 때문이었다!그런데 강유영이 이따위로 남 말 하듯 도경진이 자신을 마음에 둘 리 없다는 소리를 지껄이다니. 그 말은 조사예의 역린을 건드리고 말았다."끌어내."강유영은 피곤함과 체념이 가득한 얼굴로 가볍게 손을 저으며 나직하게 명했다.조사예는 어차피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위인이 아니었다."당장 꺼지십시오!"서유가 조사예를 뜰 밖으로 거칠게 밀쳐냈다."이 천한 것, 일개 시녀 주제에 감히 내게 이따위로 굴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어디 두고 보자!"조사예는 비틀거리며 물러서더니, 거친 숨을 몰아쉬며 독기 어린 얼굴로 서유에게 삿대질을 했다."예, 얼마든지 기다리지요. 아씨의 생모이신 첩부인 이씨께서 별장에서 무슨 추잡한 짓을 벌였는지 제가 모를 줄 아십니까?"서유는 팔짱을 낀 채 턱을 치켜들고 그녀를 깔아보았다."주제 파악이나 똑바로 하시지요. 그 얼굴에 그 몸매로 도 대인의 짝이 되길 바라십니까? 다음 생에나 노려보시지요."애초에 이씨는 얌전한 사람이 아니었다. 별장에 쫓겨가서도 제 한 몸 편히 지내보겠다고 온갖 몹쓸 짓을 벌였다.서유는 아씨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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