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우리는 STJ커플입니다만?: Chapter 71 - Chapter 80

87 Chapters

71화. 복구 프로젝트

오전 8시.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휴대폰이 가벼운 진동을 내뱉었다. 희수는 눈을 뜨자마자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화면을 확인했다. 이제는 일종의 '기상 로그'가 되어버린 재원의 메시지였다.[재원]- 기상.- 아침은 사과랑 요거트. - 오늘 본사 정식 발령 통보 받았어. 이제 아파트 짐 정리 시작하려고.희수는 이불 속에서 사과 반쪽이 덩그러니 놓인 재원의 사진을 확대해 보았다. 구도는 엉망이고 초점은 사과 뒤의 냉장고 문에 맞춰져 있었지만, 그 ‘인간미’ 넘치는 사진이 희수를 피식 웃게 만들었다. ‘누가 TJ 아니랄까 봐, 보고 하나는 확실하네.’희수는 답장 대신 화면을 끄고 몸을 일으켰다. 창밖으로는 봄날의 햇살이 가득했다. 봄의 끝자락이라지만 이제는 서늘함보다 나른한 온기가 더 짙게 배어 있었다. 희수는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며 재원의 아파트를 떠올렸다. 희수의 빌라에서 골목 몇 개를 지나 큰길 하나만 건너면 닿는 거리. 도보로 10분, 뛰어가면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그 지근거리에 재원의 베이스캠프가 있었다.한 달 전, 이별하던 날 그 거리는 천 리 길보다 멀게 느껴졌었다.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마주칠까 두려워 길을 돌아가던 시간들.재원의 빈 자리를 느끼며, 향하던 그의 아파트.하지만 이제 그 거리는 재원의 '일일 보고'를 타고 희수의 생활권 안으로 무섭게 좁혀지고 있었다.오후 2시. 가게 안은 미용을 마친 강아지들의 털 날림과 샴푸 향기로 가득했다. 희수가 강아지의 털을 정리하며 한숨을 돌릴 때, 가게 문에 달린 종소리가 딸랑이며 울렸다.“어서 오세… 어?”입구에 서 있는 건 재원이었다. 그는 한 손에 커다란 종이박스를 들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희수가 평소 즐겨 마시는 브랜드의 카페 라떼가 들려 있었다. 재원은 짐짓 무심한 표정으로 박스를 카운터 위에 올려두었다.“집 정리하다가 나왔어. 버리긴 아깝고, 너한테 필요할 것 같아서.”희수는 의아한 표정으로 박스 안을 살폈다. 그 안에는 재원이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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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틀린 그림 찾기

퇴근길, 희수의 집 앞 가로등 밑에는 여전히 검은색 세단이 서늘한 광택을 내며 서 있었다. 차에서 내린 재원은 평소처럼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가 내민 작은 종이 상자 위로 내려앉은 시선만은 평소보다 조금 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나왔네?”재원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희수는 걸음을 멈추고 팔짱을 낀 채 그를 응시했다. 그는 '미안하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대신 잘못된 걸 바로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그 성미대로, 행동으로 그 공백을 메우려 들 뿐이었다. “그건 뭐야? 또 뭘 나한테 버릴려고.”희수의 가시 돋친 농담에도 재원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상자를 희수의 가슴팍 쪽으로 툭, 밀어 넣듯 건넸다. “작년 이맘때, 네가 잃어 버렸다고 했던 거..”상자 안에는 희수가 연애 초기에 잃어버렸다고 한참을 찾았던 작은 키링이 들어 있었다. 희수는 황당한 표정으로 재원을 보았다.“재원 씨. 이걸 1년 동안 자기 차에 두고 이제 주는 거야? 장난치는 거아?”희수의 쏘아붙임에도 재원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하지만 희수는 알 수 있었다. 재원이 넥타이를 괜히 한 번 고쳐 매는 그 짧은 손길이, 그가 나름대로 이 '민망함'을 견디고 있다는 신호라는 걸. 재원은 타인의 감정에 기민한 편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희수 앞에서 자신이 저지른 시간적 태만이 얼마나 비논리적으로 보일지는 알고 있는 듯했다.“세차하다 발견했어. 그냥 뒀다가 잃어버릴까 봐 가져온 것뿐이야.”재원의 말투는 여전히 무뚝뚝하고 딱딱했다. 제 버릇 개 못준다고, 조금 편해지니 원래대로 돌아가는 듯 했다.절대로 미안해서 찾아왔다는 말은 죽어도 안 하겠다는 완강한 고집이 느껴졌다. 하지만 상자 안에는 키링만 있는 게 아니었다. 희수가 예전에 “이거 맛있는데 요즘은 잘 안 보이네”라며 지나가듯 말했던, 수입 젤리 몇 봉지가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이 젤리는 뭐야? 이것도 세차하다가 시트 밑에서 나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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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곰탱이의 현타

희수를 집 앞까지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 재원은 핸들을 잡은 채 연신 헛기침을 내뱉었다. 차 안에는 여전히 희수가 남기고 간 은은한 향기가 떠다니고 있었다. 그 향기 때문인지, 아니면 방금 전 편의점에서 들이킨 컵라면 국물 때문인지 가슴팍이 자꾸만 간지러웠다. [진짜 웃겨. 너 사실 마음 약해진 거 아니야?] “...약해지긴 누가.” 재원은 아무도 없는 차 안에서 혼잣말을 내뱉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백미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입꼬리는 이미 제 의지를 배신하고 느슨하게 풀려 있었고, 눈가에는 묘한 생기가 돌았다. 평소의 그 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아주 비효율적이고 나사 풀린 표정이었다.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운 재원은 한참 동안 내리지 못하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그는 '연락'이란 그저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이라고 믿었다. 용건 없는 메시지는 시간 낭비였고, 감정 섞인 안부는 업무 흐름을 방해하는 노이즈일 뿐이었다. 그랬던 그가 무슨 짓을 했는가. 기상 보고부터 시작해 본사의 날씨 중계, 심지어는 아무 구도 없이 찍은 사과 사진까지 전송했다. 재원은 등받이에 머리를 툭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래서 내가 곰탱인가...’ 희수의 그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했다. 평생을 엘리트 코스만 밟으며 날카롭고 예민하다는 소리만 듣던 인생에 갑자기 나타난 '곰탱이'라는 별명.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더 기가 막힌 건 그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희수가 자신을 그렇게 정의해준 것이 일종의 '입국 허가'처럼 느껴져 내심 안도하기까지 했다. “미쳤나 봐, 진짜.” 재원은 스스로가 한심해 헛웃음을 터뜨리며 차에서 내렸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서늘한 공기가 평소보다 유난히 쓸쓸하게 다가왔다. 이 넓은 아파트에서 희수와 보냈던 시간은 사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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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루틴의 몰락

봄의 끝자락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장대비가 쏟아지는 아침이었다. 희수는 눅눅한 습기를 머금은 공기를 뚫고 가게 문을 열었을 때부터 예감했다.오늘 하루가 유난히 길고 고될 것임을.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오전부터 대형견 미용 예약이 줄을 이었고, 평소 얌전하던 강아지들마저 빗소리에 예민해졌는지 내내 칭얼거렸다. 희수는 젖은 털의 비린내와 사투를 벌이며 쉬지 않고 가위질을 했다. 손목은 시큰거렸고, 서 있는 다리는 부어올라 카디건 아래로 느껴지는 압박 스타킹의 존재감이 어느 때보다 묵직하게 다가왔다.하지만 희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육체적인 피로가 아니었다. ‘하... 진짜 방해돼.’희수는 소독약을 뿌리며 주머니 속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을 애써 무시했다. 재원은 아침부터 부지런히 자신의 일상을 중계하고 있었다. [본사 회의 끝][점심은 샌드위치로 때웠어][서울 비 많이 오네. 가게 앞은?]희수는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이 ‘용건 없는 보고’들을 업무 중간중간 확인하고 있었다. 가위질을 멈추고 휴대폰 화면을 힐끗거리는 자신의 모습은, 희수가 가장 경계하던 ‘감정에 휘둘리는 전문가’의 모습이었다. 희수의 자괴감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미용실을 운영하며 그녀가 가장 공들여 세운 것은 자신만의 철저한 '방어 루틴'이었다. 퇴근 1시간 전에는 무조건 기구를 소독하고,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오늘의 감정을 정돈하는 시간. 그 시간이야말로 희수가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고 온전한 '나'로 돌아가는 의식이었다.그런데 재원이 돌아온 이후, 그 견고했던 성벽에 금이 가고 있었다. 재원이 보낸 사과 사진 한 장에 웃음을 터뜨리고, 그가 젤리를 사 왔다는 사실에 마음이 풀려버린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희수는 지독한 패배감을 느꼈다. 그것은 재원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스스로의 통제권을 너무나 쉽게 내어주고 있는 자신에 대한 실망이었다.오후 7시. 보라색 간판 불을 끌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을 때, 딸랑이는 종소리와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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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로그아웃 불가

차창을 때리는 빗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려왔다. 시선이 맞닿은 채 멈춰버린 찰나의 시간. 희수는 재원의 눈동자 속에서 흔들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평소라면 차갑고 이성적인 빛을 띠던 재원의 눈이, 지금은 갈 곳을 잃은 채 일렁이고 있었다. 숨결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재원의 시선이 희수의 눈동자를 지나 입술 근처에 잠시 머물렀다. 희수는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이건 예상에 없던 일인데.’분명 피곤해서 기대고 싶었을 뿐인데, 지금 이 공기는 단순한 ‘피로 해소’의 영역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재원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그의 울대뼈가 크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여 희수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 결정적인 순간, 희수의 배에서 아주 우렁차고 정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꼬르륵.”정적이 박살 났다. 재원의 고개가 멈췄고, 희수는 그대로 재원의 어깨에 다시 얼굴을 파묻어버렸다. 수치심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루틴이 무너진 것도 모자라, 이 분위기에 배꼽시계라니. “...배고파?”재원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잔뜩 섞여 있었다. 그는 조금 전의 그 팽팽했던 긴장감을 어디로 보냈는지, 희수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헝클어뜨렸다. “아니, 아니거든? 아까 미용하면서 공기를 많이 마셔서 그래!”“공기를 마시면 배에서 소리가 아니라 트림이 나야 하는 거 아냐? 역시 넌 이과가 아니야.”재원은 차 시트를 다시 세웠다. 희수는 빨개진 얼굴을 가리려 애쓰며 창밖을 보았다. 비는 그칠 기미가 없었고, 희수의 허기는 이제 숨길 수 없는 통증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들어가서 자라니까, 결국 밥까지 먹여야겠네. 우리 집으로 가게.”“뭐? 자기네 집을 왜 가! 내 집 바로 앞인데!”“우리 집에 너 좋아하는 그 브랜드 냉동 곰탕 남은 거 있어. 너희 집엔 먹을 거 하나도 없잖아. 뻔하지.”재원은 희수의 대답도 듣지 않고 다시 시동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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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새로운 루틴의 시작

“내일 아침엔 사과 사진 찍지 마. 그냥 얼굴 보여줘. 가게로 와.”희수의 폭탄선언에 재원은 들고 있던 물컵을 놓칠 뻔했다. 평소라면 ‘오전 8시 방문의 효율성’을 따졌을 그였지만, 지금은 뇌 회로가 완전히 타버린 듯 멍하니 희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재원이 컥컥거리며 사레들린 물을 삼키는 동안, 희수는 세상에서 가장 뻔뻔하고 예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루틴이 망가진 자리에는, 이전보다 훨씬 더 지독하고 달콤한 새로운 추억이 쌓여가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시계는 어느덧 밤 11시를 향하고 있었다. 창밖의 빗줄기는 기세를 꺾지 않은 채 유리창을 거세게 두드리고 있었고, 배를 채운 희수에게는 참기 힘든 노곤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재원의 어깨에 기댔던 그 온기가 다시금 그리워지는 시간이었다. 희수는 빈 그릇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짐짓 쿨한 척 몸을 일으켰다. “...잘 먹었어. 이제 진짜 가야겠다. 내일 아침에 늦지 말고 와, 자기야.”희수가 현관으로 향하려던 그 찰나, 설거지통에 그릇을 넣던 재원의 뒷모습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는 수도꼭지를 잠그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아주 낮고 뻣뻣한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이 비에 어딜 가. 자고 가.”“......어?”희수는 신발장에 손을 뻗으려다 말고 로봇처럼 멈춰 섰다. ISTJ인 그가 내뱉은 말 중 가장 비논리적이고, 동시에 가장 용감한 제안이었다. 희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재원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였지만, 그의 귀 끝은 이미 잘 익은 사과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자기, 나 가지마? 유혹이야?”희수의 짖궂은 질문에 재원이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시선은 여전히 허공을 헤매고 있었지만, 입술은 단호하게 달싹였다.“유혹이 아니라... 이 강수량에 도보 이동은 감기 걸러.. 그리고 내일 아침에 같이 출근하는 게 동선상으로도 훨씬 효율적이야.”“출근? 재원 씨 내일 회사 안 가?”재원은 헛구역질 같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주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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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역습

아침 햇살이 암막 커튼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희수의 눈꺼풀 위로 쏟아졌다. 희수는 기분 좋은 노곤함에 몸을 뒤척이다가, 코끝을 스치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향기에 번쩍 눈을 떴다. 이곳은 자신의 자취방이 아니라 재원의 아파트였다. 어젯밤의 그 뜨거웠던 입맞춤과 재원의 품에서 잠들었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자기?”잠결에 내뱉은 희수의 목소리는 몽롱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옆자리를 확인한 순간, 희수의 심장은 다른 의미로 멈춰버렸다. 재원이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그는 이미 씻고 나온 듯 보송보송한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그의 손에 들린 물건이었다. 그것은 재원의 폰이 아니라, 희수의 핑크색 폰이었다. 더 최악인 것은 화면 속에 띄워진 내용이었다. 재원의 시선은 희수가 어젯밤 잠들기 직전, 반쯤 풀린 정신으로 정성스럽게 업데이트했던 [🐶웬수] 폴더의 마지막 문구에 고정되어 있었다. [웬수가 아니라... 그냥 내 사랑임.]“...자기, 너 지금 뭐 해!”비명이 터져 나왔다. 희수는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재원의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채려 했다. 하지만 재원은 긴 팔을 이용해 가볍게 희수를 따돌리며, 무표정한 얼굴로 화면의 텍스트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재원의 목소리는 평소 본사 회의에서 실적을 발표할 때처럼 지극히 낮고 건조해서, 그 수치심은 배가 되었다.“1번. 융통성 없는 곰탱이. 5번. 사회성 결여된 AI. 12번. 눈치 없는 고집불통. 17번. 셔츠 걷어붙이고 요리하는 건 형법으로 처벌해야 함.”“아아악! 그만해! 죽을래 진짜!”희수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쓰고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재원의 낭독회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제 희수가 가장 숨기고 싶었던 대목에 도달했다.“20번. 곰탱이인 줄 알았는데 사자였음. 심박수 데이터 측정 포기. ...웬수가 아니라, 그냥 내 사랑임.”재원의 목소리가 마지막 문장에서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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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고장 난 AI 스피커

재원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갈 길을 잃고 떨렸다. 본사 출근 첫 주, 그것도 월요일 아침에 어머니가 건 페이스타임이라니. 이미 깔끔하게 씻고 머리까지 정돈한 재원의 모습은 누가 봐도 출근 준비를 마친 완벽한 형색이었다. 그 '완벽함'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자, 자기야! 일단 받아야 하는 거 아냐? 계속 울리는데?”“안 돼. 내 뒤로 보이는 거실 벽지가 회사 사무실일 리가 없잖아.”“그럼 거절해!”“어머니는 내가 전화를 거절하면 사고가 난 줄 알고 응급실부터 전화하실 분이야. 내 루틴상 전화를 안 받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재원의 논리 회로가 과부하로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벨소리가 끊기기 직전, 재원은 결단을 내린 듯 희수를 화장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거기 있어. 절대로 소리 내지 마.”“잇 자기야! 읍!”재원은 희수의 입을 막고 문을 닫은 뒤, 급하게 하얀 대리석 벽면 앞으로 달려갔다. 그나마 가장 오피스 건물 내벽과 비슷해 보이는 위치였다. 재원은 최대한 목소리를 가다듬고 ‘수락’ 버튼을 눌렀다. 화면 너머로 인자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매의 어머니가 나타났다. - “아들! 역시 우리 아들, 벌써 출근해서 업무 준비 중이니? 옷 차림 보니까 든든하네.”어머니의 오해는 정교했다. 재원이 씻고 나와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깨끗한 티셔츠 차림이 화면상으로는 캐주얼 데이를 맞이한 직장인의 모습처럼 보였던 것이다.“...네, 어머니. 보시다시피 아주 잘 적응 중입니다. 지금 막 회의 들어가기 직전이라 짧게 통화해야 할 것 같습니다.”재원은 식은땀을 흘리며 카메라 각도를 고정했다. 하지만 문제는 내부가 아니라 외부, 즉 화장실 안에서 터졌다. “자기아! 수건 없어! 아까 자기가 다 썼어?”희수의 목소리가 화장실 문틈을 타고 거실을 울렸다. 재원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어머니의 미간이 좁아졌다. - “아들, 방금 무슨 소리니? 사무실에 여직원이 벌써 그렇게 친하게 지내? 수건을 찾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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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희수의 즐거운 수난

차 안의 정적은 생각보다 길었다. 희수는 대시보드 위에 놓인 재원의 휴대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들, 다음 주에 같이 집에 오는 건 어떠니?] 라는 문구는 이미 화면에서 사라졌지만, 그 잔상은 재원의 얼굴에 고스란히 박혀 있었다. 재원의 시선은 정면을 향해 있었지만, 초점은 이미 안드로메다 어디쯤을 헤매는 듯했다. 핸들을 쥔 마디 굵은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희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그 뻣뻣하게 굳은 옆얼굴을 훑었다. 서울 본사 복귀라는 거창한 미션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 않던 남자가, 어머니의 '동행' 제안 한 줄에 이토록 처참하게 무너지는 꼴이라니. 희수에게는 그 어떤 로맨틱 코미디 영화보다 흥미진진한 구경거리였다. “...자기야, 넋 나갔어?” 희수의 목소리에 재원이 흠칫 놀라며 눈을 깜빡였다. 그는 대답 대신 마른세수를 크게 한 번 하고는, 마치 중대한 결단을 내린 장수처럼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준비해야겠어.” 재원의 말투는 비장하다 못해 비극적이기까지 했다. 희수는 조수석에 몸을 비스듬히 눕힌 채,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고 ‘생존 시뮬레이션’에 돌입한 이 곰탱이를 즐겁게 관찰했다. 차가 출발했지만, 재원은 평소답지 않게 신호등의 노란불에도 과하게 움찔거렸다. 어머니의 메시지 한 줄이 그의 정교한 루틴을 통째로 뒤흔들어 놓은 게 분명했다. 오전의 ‘보라색 꼬리’ 미용실 안에서도 재원의 소리 없는 사투는 계속되었다. 분홍색 앞치마를 두르고 빗자루를 든 그의 뒷모습은 여전히 꼿꼿했지만, 희수의 눈에는 그 너머의 당혹감이 훤히 보였다. 재원은 바닥을 쓸다가도 문득 멈춰 서서 허공을 응시했다. 분명 머릿속으로는 어머니께 드릴 첫 마디를 고르고, 또 고치고 있을 터였다. ‘자기, 너 지금 빗자루질하는 게 아니라 어머니랑 면접 보고 있지?’ 희수는 별이의 털을 다듬으며 거울을 통해 재원을 훔쳐보았다. 재원의 손길은 기계처럼 정확했지만, 가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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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미련 곰탱이

재원의 비장했던 기세는 초코의 거대한 꼬리질 한 번에 처참히 무너졌다. 테이블 위에 올라앉은 초코는 재원에게 친근함을 표시하듯 묵직한 앞발을 툭 내밀었고, 재원은 마치 폭탄이라도 피하듯 슬리커 빗을 쥔 손을 바르르 떨며 뒤로 물러났다.“희수야, 얘는 내가 알던 강아지의 범주를 벗어난 것 같아. 무게감이 거의 송아지 수준인데?”“자기야, 엄살 좀 부리지 마. 덩치만 컸지 얼마나 순한데. 자, 결 따라 부드럽게 빗겨줘 봐.”희수는 배를 잡고 웃으며 재원의 손을 초코의 엉킨 털 위로 이끌었다. 재원은 꿀꺽 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가느다란 슬리커를 갖다 댔다. 사각, 사각. 엉킨 털이 풀리는 소리와 함께 뽀얀 털 가루가 공중으로 흩날렸다.그때였다. 재원의 콧망울이 실룩거리기 시작한 것은.“에에엣취! 에취! 에취!”연달아 터지는 재채기 소리가 고요한 미용실 안을 울렸다. 재원은 당황한 듯 고개를 돌려 팔꿈치에 코를 묻었지만, 한 번 터진 재채기는 멈출 줄을 몰랐다. 희수는 가위질을 멈추고 재원의 얼굴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재원의 눈가가 발갛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평소 단정하게 빗어 넘겼던 앞머리는 재채기의 반동으로 헝클어져 이마를 덮었고, 콧등에는 발그레한 기운이 돌았다.“자기야, 너 설마 털 알레르기 있어? 아까 아침엔 괜찮았잖아!”“...에취! 아냐, 아침에는 털이 이렇게... 에취! 날리지 않았을 뿐이야. 괜찮아.”재원은 빨개진 눈을 비비며 다시 슬리커를 고쳐 잡았다. 희수는 기가 찼다. 저 고집불통. 지금 누가 봐도 괜찮지 않은 상태면서, 연차까지 내고 조수를 자처한 체면이 있는지 절대 빗을 놓지 않았다. 희수는 서랍을 뒤져 비상용으로 두었던 알레르기 약을 꺼내 물과 함께 재원에게 내밀었다.“이거 먹어. 그러다 쓰러지겠다. 눈 좀 봐, 완전 토끼 됐어.”“...안 먹어. 약 먹으면 졸음이 와서 작업에 지장이 생겨. 다음 주에 또 연차 내서 너 도와주려면,오늘 완벽하게 익혀둬야 해.”"또 연차 낸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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