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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STJ커플입니다만? のすべてのチャプター: チャプター 41 - チャプター 50

87 チャプター

41화. 부재의 소음

집 안의 공기는 차갑고 무거웠다. 희수는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안, 침대 끝에 걸터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재원의 차 시트 위에서 그의 소매를 붙잡고 있었다. 코끝을 스치던 그의 스킨 향, 핸들을 쥐고 있던 단단한 손등, 그리고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던 가로등 불빛들. 그 모든 감각이 아직 피부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데, 정작 그 감각의 주인은 이제 내 곁에 없다."이게 왜 이렇게 됐지?"희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머릿속으로 오늘의 대화들을 수천 번 되감기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가 그 골목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아니, 애초에 그 파스타 집에 가자고 하지 않았다면? 아니면, 어제 그 배부르다는 톡을 보내지 않았다면?후회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이상하게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 속이 텅 빈 것처럼 고요했다. 현실감이 없었다. 내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일어났다'는 재원의 무미건조한 톡이 올 것만 같고, 주말이면 다시 그의 집에서 제육 덮밥을 볶고 있을 것만 같은 착각. 하지만 마음 한켠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진짜 끝이야, 희수야. 너도 봤잖아. 그 남자의 눈빛.'잠을 자려 누웠지만, 천장 위로 재원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떠다녔다. - 네가 다가오는 게 공포스러워.- 맞다. 부담스러웠다.- 이제는 그냥 스트레스다. 안 본다.그 말들이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희수의 심장에 하나씩 박혔다. 1년 동안 '사랑'이라고 믿으며 쌓아 올린 공든 탑이, 사실은 재원에게 '질식할 것 같은 압박'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겨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재원이 기상 톡을 보내던 시간인 오전 7시 30분. 희수는 휴대폰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1분, 2분, 5분... 정적만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평소 같으면 진동 한 번에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했을 텐데, 이제 그 진동은 영영 울리지 않을 신호가 되었다. "정말... 끝이구나."몸과 마음이 납덩이를 매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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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생존의 본능

휴대폰 알림창에 발신인 '재원💕'이 뜨지 않은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희수는 오늘도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처리'하고 있었다. 눈을 뜨면 기계적으로 세수를 하고, 가게 문을 열고, 손님을 받는다. 하지만 영혼은 어딘가 다른 곳에 가 있는 듯 붕 뜬 기분이었다. 일이 없을 때면 희수는 중독자처럼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검은 화면 속에 비친 자신의 초췌한 얼굴을 마주하다가도, 아주 작은 진동 소리만 들리면 심장이 발끝까지 '쿵' 떨어지는 느낌으로 다급하게 액정을 확인했다. [민지: 나 곧 도착! 10분 전!]재원이 아니었다. 희수는 휴대폰을 식탁 위에 엎어두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대가 무너진 자리에 지독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제야 비로소 가게 내부의 꼴이 눈에 들어왔다. 가게 구석에는 며칠 동안 치우지 못한 강아지 털들이 먼지뭉치처럼 수북하게 쌓여 굴러다니고 있었다. 세탁기를 돌릴 생각조차 들지 않아 빨래통 가득 쌓인 수건들은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듯 널브러져 있었다. 평소라면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깔끔을 떨었을 희수였지만, 지금은 그것들을 바라보면서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치워야 한다는 이성은 남아 있었지만, 몸을 움직일 동력이 완전히 꺼져버린 상태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가게 문 위의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딸랑.여느 때라면 벌떡 일어나 민지를 반갑게 맞이했겠지만, 오늘 희수의 몸은 천근만근 늪에 빠진 것 같았다. 의자에서 겨우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버거워 엉거주춤한 자세로 민지를 바라보았다."야. 너 꼴이 그게 뭐냐? 뭐 좀 먹었어? 잠은?"민지는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희수의 안색부터 살피며 미간을 찌푸렸다. 희수는 대답하는 것조차 귀찮은 듯 연신 고개를 저었다. 목소리를 내면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기도 했고, 사실 정말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내가 네 먹성을 아는데. 자, 내가 가져온 거 보면 입을 열게 될 것이다. 후훗!"민지는 가방에서 비닐봉지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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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로그아웃의 해방감

희수가 차 문을 닫고 내렸다. 조심히 들어가라는 그 마지막 인사가 닫힌 문틈 사이로 흩어졌다. 재원은 백미러를 보지 않았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확인하며 미안해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는 차 문이 잠기는 '철컥' 소리와 함께 비로소 폐부 깊숙이 공기를 들이마셨다. 살 것 같았다. 핸들을 잡은 손등의 긴장이 풀리며 기분 좋은 나른함이 밀려왔다. 차 안을 가득 채웠던 희수의 향수 냄새, 끈적하게 달라붙던 눈물 섞인 애원,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해석해달라며 던져대던 그 수많은 질문들. 그 모든 소음이 차단된 공간은 이제야 완벽한 정적을 되찾았다. 재원은 엑셀을 밟아 대로변으로 나갔다. 옆자리가 비어 있다는 사실이 결핍이 아닌 '확장'으로 느껴졌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자유. 희수가 앉아 있을 때면 늘 그녀의 표정에 레이더를 세워야 했던 피곤한 연산 과정이 종료되자, 재원의 뇌는 비로소 휴식 모드로 진입했다. '평범한 연애를 하고 싶었다고?'재원은 신호 대기 중에 희수가 마지막으로 뱉었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녀에게 평범함은 끊임없는 확인과 밀착이었겠지만, 재원에게 그것은 감정적 과부하일 뿐이었다. 재원은 희수의 담담했던 마지막 말들을 떠올리면서도 슬픔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 '담담함' 덕분에 이별의 과정이 예상보다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는 안도감이 먼저였다. "...... 다행이네."재원은 나직이 읊조렸다. 희수가 끝까지 매달리며 울고불고했다면, 재원은 그녀를 떼어내기 위해 더 모진 말을 골라내야 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끝까지 매달렸다면 못이기는 척 받아주고는또다시 희수의 감옥으로 끌려들어갔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녀는 제 발로 차에서 내렸고, 재원은 그 덕분에 '나쁜 놈'이라는 죄책감의 할당량을 조금 덜어낼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해 도어락 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집안은 차갑고 고요했다. 재원은 불을 켜지 않은 채 가방을 내려놓았다. 어제 희수가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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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온전한 몰입

대구 지사에서의 첫날은 예상보다 훨씬 소란스럽고 활기찼다. 현장은 거칠었지만 명확했고, 사람들은 투박했지만 군더더기가 없었다. 재원은 도면과 씨름하며 보낸 하루가 낯설면서도 만족스러웠다. "재원씨, 오늘 환영식은 거절 못 하네. 대구 막창 맛을 봐야 진짜 내려온 거지!" 현장 소장의 호탕한 권유에 재원은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이었다면 벌써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희수의 눈치를 보고 있었을 시간이었다. '오늘 회식이라 좀 늦어', '누구랑 먹어?', '적당히 마셔' 같은 문답을 주고받느라 술자리에서도 늘 반쯤은 영혼이 빠져나간 상태였을 터였다. 그녀에게 자리이동 할때마다 보고하던 일. 집에 도착해서도 옷을 벗기 전에 그녀에게 보내던 안부들. 하지만 지금, 재원의 휴대폰은 재킷 안주머니 깊숙한 곳에서 조용히 잠자고 있었다. 시끌벅적한 막창집 안은 연기와 사람들의 함성으로 가득했다. 재원은 달구어진 불판 위에 놓인 막창을 응시했다. 노릇노릇하게 익어가는 소리와 왁자지껄한 대화 소리. 그 평범한 소음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선명하게 귀에 박혔다. "재원씨, 술 한잔 받게! 대구 지사 온 걸 환영하네." 재원은 소장이 건네는 술잔을 두 손으로 받았다. 차가운 소주가 목구멍을 타고 시원하게 넘어갔다. 곁눈질로 시계를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술자리가 이렇게나 가벼운 것이었나. 재원은 비로소 앞에 앉은 사람들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는 대화에 온전히 집중했다. 공사 일정의 차질, 자재 수급의 문제, 현장 인부들의 에피소드들. 누군가 말을 할 때마다 재원은 적절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중간에 휴대폰을 확인하느라 대화의 흐름을 놓칠 일도, 화장실에 가는 척하며 희수의 서운함을 달래주는 전화를 걸 필요도 없었다. 간혹 재킷 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확인은 했다. 그는 이것은 그냥 단순한 오래된 습관일거라 생각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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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비어있는 창문

"네, 손님! 다음 주 화요일 2시 예약 가능하세요. 그때 뵐게요!"희수는 전화를 끊으며 입가에 걸려 있던 비즈니스용 미소를 거두었다. 손님이 나간 가게 안은 다시 지독한 정적에 휩싸였다. 헤어진 지 일주일. 희수는 미친 사람처럼 몸을 움직였다. 아침 일찍 가게 문을 열고, 평소라면 미뤄뒀을 구석진 곳의 먼지를 털어내고, 예약 손님들 사이사이에 끼어드는 당일 미용까지 모두 받아냈다. 몸을 혹사해야만 했다.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몰아붙이지 않으면, 그 틈을 타 재원의 목소리가 파고들었기 때문이다.끼니는 진작에 거른 지 오래였다. 배고픔이라는 원초적인 감각조차 마비된 것 같았다. 물 한 모금으로 버티는 하루가 이어졌지만, 겉보기에 희수는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차고 친절한 미용사였다. 하지만 손에 든 가위 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릴 때마다 희수는 자신의 속이 얼마나 텅 비어버렸는지 절감했다.밤이 되어 돌아온 집은 거대한 관 같았다. 어두운 방안에 홀로 누우면, 벽 너머에서 재원의 낮은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자꾸만 고개를 돌렸다. [집 도착][쉴게.]1년동안 기계처럼 희수의 폰에 떠있는 그 짧은 메세지들이보고 싶었다.'그냥 와... 니가 했던 모진 말들 그냥 흘려버릴게.''아무것도 묻지 않을게. 그냥 오기만 해.'휴대폰은 늘 손이 닿는 곳에 두었다. 1분마다 켜지는 화면, 아무런 알림도 없는 잠금화면을 확인하며 희수는 온 신경이 곤두선 채 멍하니 시계만 쳐다보았다.'대구... 지금쯤 저녁 먹을 시간인데.'닿을 수 없는 거리라는 사실이, 이제는 물리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남남이라는 현실이 희수를 질식하게 했다. 결국 희수는 참지 못하고 대충 겉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무작정 걷다 보니 발길은 습관처럼 재원의 아파트 단지 앞을 향했다. 그의 차가 항상 서 있던 주차 구역. 그가 방안에서 도면을 보거나 책을 읽던 아파트 4층의 창문. 희수는 고개를 들어 그곳을 바라보았다. 불빛 하나 없는 창문은 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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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0과 1 사이의 진동

[저녁 맛있게 먹어.]전송 버튼을 누른 손가락 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화면 속의 노란 말풍선은 희수의 손을 떠나 200km 밖 대구로 날아갔다. 보내고 나면 시원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지독한 갈증이 밀려왔다. '보내지 말걸.'후회는 늘 1초 늦게 도착했다. 희수는 휴대폰을 침대 멀리 던져버리고는 이불 속에 몸을 구부렸다. 답장이 오지 않는다면? 혹은 '그만 좀 해'라는 차가운 말이 돌아온다면?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차라리 그에게서 '우린 이미 끝난 사이야.' 라는 마지막 확인이라도 받고 싶었다.하지만 그 비참함 속에서도 묘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1년 동안 재원의 끼니를 챙기고, 그의 저녁을 궁금해하던 자신의 역할에 마침표가 아닌 '쉼표' 하나를 찍은 기분. 희수는 억지로 눈을 감았다. ***(재원 시점)대구의 저녁은 서울보다 조용했다. 재원은 자신의 낙원에서 배달을 시켜 혼자 숟가락을 놀리고 있었다. TV 소리와 뚝배기 끓는 소리뿐인 공간. 누구의 시선도, 누구의 말소리도 섞이지 않은 이 완벽한 정적이 재원은 만족스러웠다.그때, 식탁 위에 놓인 휴대폰 진동이 짧게 울렸다. [희수: 저녁 맛있게 먹어.]재원의 숟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헤어지고 처음 온 연락. 재원은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왜?'질문이 아니었다. '어디야?', '뭐 해?' 같은 추궁도 아니었다. 그저 재원이 늘 이 시간에 저녁을 먹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보낼 수 있는, 지독하게 일상적인 안부. 배달음식이 차려진 식탁 위에 희수의 재잘 거림이 얹어졌다.'하... '재원은 휴대폰을 엎어두려다 멈칫했다. 희수다운 메시지였다. 그녀는 늘 이런 식으로 재원의 성벽 아래에 꽃 한 송이를 두고 가곤 했다. 예전 같았으면 '응, 너도'라고 짧게 답했겠지만, 지금의 재원에게 이 문장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었다. '다시 시작하자는 건가?''아니면 그냥 미련인가.'재원의 이성은 차갑게 작동했다. 여기서 답장을 보낸다면, 희수는 다시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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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빛의 침묵

대구의 밤은 서울보다 깊고 조용했다. 회식 자리는 이미 1차를 지나 2차로 이어지고 있었다. 평소의 재원이라면 벌써 '집 정리'를 핑계로 자리를 떴을 시간이었다. 좁고 안전한 자신의 성벽 안으로 숨어 들어가 차가운 정적을 즐기는 것이 그의 가장 큰 휴식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재원은 이상하게도 일찍 일어날 수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재원씨, 오늘 기운 넘치네! 한 잔 더 할 건가?" "네. 오늘은 제가 한 턱 내겠습니다. 근처에 늦게까지 하는 곳으로 가시죠." 평소라면 절대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을 제안이었다. 동료들은 의외라는 듯 환호하며 재원을 이끌었다. 재원은 그 소란스러운 무리 틈에 섞여 일부러 더 크게 웃고, 더 많은 말을 쏟아냈다. 술기운이 오를수록 목소리는 높아졌지만, 머릿속은 지독할 정도로 맑았다. 사람들 사이의 온기, 왁자지껄한 소음들. 그것들이 방패가 되어 자신을 지켜주고 있는 기분이었다. 결국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재원은 숙소로 돌아왔다. 술기운 때문인지 발걸음이 무거웠다. 도어락을 누르고 문을 연 순간, 차가운 공기가 재원을 맞이했다. 아늑한 자신만의 세계로 돌아오면, 극도로 평온한 자신을 마주 할 것이다. 오로지 혼자만의 아지트니까. 평소의 재원은 이 어둠을 사랑했다. 간접등 하나만 켜놓거나, 텔레비전 화면에서 새어 나오는 푸르스름한 불빛에 의지해 소파에 앉아 있는 시간을 가장 아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어둠이 참을 수 없이 싫었다. 잠시 자신만의 쇼파에 앉아 티비를 켰다.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며 예능을 봐도 이전처럼 편하지 않았다.'왜지? 나 지금 이 시간이 좋은거 맞는데...'재원은 거실의 메인 등부터 주방, 복도, 심지어 화장실 불까지 죄다 켜버렸다. 갑자기 쏟아지는 백색광에 눈이 멀 것 같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집 안의 모든 구석이 낱낱이 파헤쳐질 정도로 밝아야만 했다. 그래야만 이 지독한 적막 속에 숨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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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자존심이라는 이름의 감옥

대구 지사에서의 일상은 기계처럼 정확하게 굴러갔다. 오전 7시 기상, 8시 현장 도착, 12시 점심, 그리고 오후 내내 이어지는 도면 검토와 회의. 퇴근 후엔 가벼운 운동이나 동료들과의 짧은 술자리, 그리고 밤 12시 취침. 재원이 그토록 갈망하던 ‘방해받지 않는 완벽한 루틴’이었다. 손은 도면을 그리고 있었고, 머리는 예산을 계산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데이터처럼 명확했고, 시스템은 오류 없이 가동되고 있었다.그런데 이상했다. 어느 순간부터 가슴 한가운데가 뻐근하게 조여왔다. 흉부를 커다란 바위가 짓누르고 있는 것 같은 답답함이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셔도 폐부 깊숙이 산소가 닿지 않는 기분. 재원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창문을 열었지만,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은 가실 줄을 몰랐다.“재원씨, 어디 아파? 안색이 별로인데.”현장 소장의 물음에 재원은 억지로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 잠을 좀 설치나 봅니다.”재원은 이 현상을 분석하려 들었다. 과로인가? 아니면 낯선 대구의 환경 때문인가? 하지만 병원 검진 결과는 정상일 게 뻔했다. 실체도 없고 원인도 모르는 막연한 불안이 재원의 일상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도면을 보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갑자기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에 손을 멈췄다. 마치 중요한 무언가를 아주 크게 잃어버렸거나,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약속을 어긴 사람처럼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희수 때문인가.’재원은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간 그 생각을 즉시 폐기했다. 희수가 없어서 홀가분하다고 결론 내린 지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녀의 연락이 오지 않아서, 그녀의 서운함을 달래주지 않아도 되어서 완벽한 평화를 얻었다고 확신했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그 평화가 이토록 숨 가쁜 적막으로 변해버린 것일까.퇴근 후 돌아온 숙소의 밤은 잔인할 정도로 고요했다. 에어컨 실외기 돌아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방 안을 긁어댔다. 재원은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 꺼진 휴대폰 액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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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부재의 역습

지인의 결혼식이었다. 평소라면 주말 왕복 8시간의 운전이 끔찍하게 싫었겠지만, 이번엔 달랐다. 재원은 오히려 이 서울행이 반가웠다. 대구에서의 그 숨 막히는 답답함과 원인 모를 불안이, 단지 낯선 환경 탓인지 아니면 정말 희수의 부재 때문인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서울에 가면 괜찮아지겠지.’하지만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거는 순간부터 재원의 기대는 어긋났다. 평소라면 벌써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을 시간이었다. [자기야, 결혼식 끝나고 나랑 카페 가자!][나 거기 가보고 싶어. 정장 입은 거 사진 찍어줘!]끊임없이 이어지던 희수의 재잘거림. 재원은 그때마다 “끝나고 봐서”, “귀찮게 왜 그래”라며 건조하게 답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 재원의 휴대폰은 조용하다 못해 서늘했다. 재원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운전대를 잡았다. 완벽한 휴식,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자유로운 기분. 그것이 재원이 그토록 원하던 이별의 선물이어야 했다. 하지만 희수의 그림자는 독하게도 그를 따라다녔다. 조수석에 놓인 그녀의 전용 쿠션, 대시보드에 붙어있는 작은 방향제. 눈에 닿는 모든 것이 희수의 흔적이었다. “왜 자꾸 따라다녀... 짜증 나게.”재원은 떨쳐내려 애썼다. 사람이니까 당연한거지.남자도 헤어지면 아픈거야.음악을 크게 틀고 속도를 높였지만, 그럴수록 가슴 속의 갈증은 더 깊어졌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결혼식도, 운전도, 숨 쉬는 것조차 의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재원은 ISTJ답게 꾸역꾸역 그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 식장은 화려했고 사람들로 북적였다. 재원은 지인들과 영혼 없는 안부를 주고받으며 식장 앞에 서 있었다. 그때였다. “어머, 민지야! 저기 봐. 여기 생화 장식 너무 예쁘다.”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수만 번도 더 들었던, 잊을 수 없는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희수가 있었다. 민지의 팔짱을 끼고 환하게 웃으며 걸어오는 그녀를 본 순간, 재원은 숨 쉬는 법을 잊었다. 희수의 그림자가 아니라 희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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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반대편의 온도

희수는 미용대 정리를 마치고 습관적으로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올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고됐던 가위질의 결과물을 업로드한 지 불과 몇 분 뒤, 익숙하지 않은 아이콘에 빨간 점이 찍혔다. 광고 아니면 스팸이겠거니 하며 연 DM 창에는 뜻밖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희수야, 너 맞지? 한참 찾았어.]대학 시절, 잠깐의 설렘을 공유했던 과 선배 진우였다. 졸업 후 소식이 끊겼던 그는 희수의 애견 미용 계정을 우연히 발견했다며 반가움을 쏟아냈다. 평소라면 적당히 대꾸하고 말았겠지만, 지금 희수의 곁에는 재원이 없었다. 텅 빈 퇴근길을 채워주던 목소리도, 주말의 공허함을 메워주던 약속도 사라진 자리. 희수는 홀린 듯 자신의 번호를 남겼다. 연락이 닿은 진우는 예전보다 훨씬 능숙하고 여유로운 어른이 되어 있었다. 희수가 가게를 운영한다는 말에 그는 제 일처럼 기뻐하며 다정하게 물었다."남자친구는? 여전히 인기 많겠지?"희수는 잠시 멈칫했다. '헤어졌다'는 명확한 단어를 내뱉는 순간, 재원과의 연결고리가 완전히 끊어질 것 같아 두려웠던 것일까. 그녀는 대답 대신 화제를 돌렸다."오픈한 지는 좀 됐는데, 저 축하 화분 하나 사주세요."그 말에 진우는 기다렸다는 듯 밥 한 번 먹자며 몰아붙였다. 뭐 먹고 싶냐는 질문에 희수는 홧김에 "소고기 사주세요"라고 답했다. 기왕 먹는 거, 재원과 함께일 땐 그의 눈치를 보느라 마음껏 시키지 못했던 비싼 음식이라도 먹고 싶다는 오기였다. 뭐가 그리 급했는지 진우는 바로 다음 날 희수의 가게로 찾아왔다. 희수는 일부러 거울을 보지 않았다.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도, 잘 보이고 싶은 의지도 없었다. 무릎이 늘어난 작업복 바지에 머리는 대충 질끈 묶었고, 화장은 번진 채였다. 하지만 진우는 그런 희수를 보고도 환하게 웃으며 문을 열었다.식당에 도착하자마자 시작된 식사는 재원과의 시간과는 180도 달랐다. 재원과 있을 때 희수는 늘 '서포터'였다. 고기가 타지 않게 뒤집는 건 희수였고, 재원의 접시에 소금을 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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