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우리는 STJ커플입니다만?: Chapter 61 - Chapter 70

87 Chapters

61화. 등대의 정비

희수는 가장 먼저 신발장을 정리했다. 재원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샀던 굽 높은 하이힐과 예쁜 샌들들을 뒤로 밀어 넣었다. 비록 집에서의 일상 데이트가 주였어서 많이 신을 일은 없었지만, 그 자리에 새로 들어온 것은 아무런 장식도 없는 깨끗한 흰색 운동화였다. 무채색의 견고함. 그것은 희수가 자신에게 부여한 새로운 질서였다. ‘J’인 희수에게 이별의 고통은 감정의 소모보다 루틴의 파괴에서 먼저 왔다. 재원의 연락을 기다리느라 엉망이 된 수면 시간, 그에 맞춰 들쑥날쑥해진 식사. 희수는 그 무질서가 자신을 갉아먹게 두지 않기로 했다. 월요일 새벽 6시. 희수는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떴다. 새로 산 운동복을 챙겨 입고, 빳빳한 흰색 운동화를 챙겨 넣었다. 거울 속의 자신은 평소보다 조금 초췌했지만, 질서 있는 차림새가 마음을 다잡아주었다. “할 수 있어. 아니, 해야만 해.” 스스로에게 내뱉는 말은 예전처럼 재원의 기분을 살피는 다정한 어조가 아니었다. 헬스장으로 향하는 공기는 차가웠지만, 발끝에 닿는 운동화의 탄탄한 감각은 희수가 다시 자신의 삶을 딛고 서 있음을 실감하게 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러닝머신 위에서 희수는 정면만을 응시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마다 재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희수야, 너는 아무리 봐도 감정적이야. 이성적으로 상황을 봐.] [나한테 네 계획을 강요하지마. 각자 루틴이 있는거야.] 재원이 던졌던 파편 같은 말들이 머릿속을 스칠 때마다 희수는 오히려 속도를 올렸다. “감정적이라고? 아니, 이제는 아니야.” 발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규칙적인 진동만이 유일한 현실이었다. 가게 운영도 이전과는 달라졌다. 희수는 단순히 예약 손님을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기술을 체계화하기 시작했다. 미용이 끝난 강아지들의 사진을 각도별로 촬영하고, 사용한 가위의 종류와 샴푸의 특성을 꼼꼼히 기록했다. “희수야, 이 포메라니안은 털 결이 왼쪽으로 쏠리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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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불청객

딸랑—. 가게 문에 달린 작은 종소리가 정적을 깼다. 재원이 예상한 ‘가장 여유롭고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그는 문을 열며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치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듯한 여유를 장착한 채로. 하지만 문을 연 순간, 재원의 발걸음이 찰나의 순간 멈칫했다. 가게 내부는 재원이 “너무 과하다.”며 고개를 젓던 보라색 소품들이 곳곳에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재원의 취향이 철저히 배제된, 오로지 ‘희수의 영지’처럼 보였다. 카운터 안쪽에서 희수는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었다. 재원은 짐짓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 왔어.” 일주일간의 침묵을 깨는 첫마디치고는 지나치게 평온했다. 재원은 희수가 고개를 번쩍 들고, 당황하거나 울먹이며 반겨줄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희수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사각사각, 종이 위를 구르는 볼펜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희수야.” 재원이 조금 더 힘을 주어 불렀다. 그제야 희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재원은 희수의 눈에 고인 눈물을 기대하며 시선을 맞췄다. 하지만 희수의 눈은 너무나 맑고 건조했다. “어, 왔어?” 희수의 대답은 너무나 평범했다. 화가 난 것도, 반가운 것도 아닌, 마치 어제 본 사람을 다시 본 듯한 덤덤함. 재원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멍해졌다. “...어, 왔어? 지금 그게 다야?” “응. 근데 자기야, 지금 예약 손님 강아지 올 시간이라 내가 좀 바쁘거든. 거기 잠깐 앉아 있을래?” 희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재원은 그대로 문가에 서서 굳어버렸다. 분명 희수가 먼저 [자기 옆에 있을래]라고 메시지를 보냈으니, 당연히 답장 없는 일주일 동안 피를 말리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희수가 올리는 SNS활동은 철저히 자신에게 보이려 한 행동이라 생각 했었다. “너... 내가 일주일 동안 답장 안 해서 화난 거야?” 재원이 참지 못하고 카운터로 다가갔다. 목소리에 당혹감이 섞여 나왔다. “아니, 화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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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궤도를 이탈 한 행성

딸랑—. 종소리가 들린 순간, 묘한 감각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이별 후 한달, 그리고 일주일간 잊고 지냈던, 아니, 일상에서 깨끗하게 분리해냈다고 믿었던 그 익숙한 무게감이 공기를 타고 전해졌다. 지금 고개를 들면, 정성껏 쌓아 올린 오늘의 루틴이 엉킬 것 같았다. 희수는 쥐고 있던 볼펜을 놓지 않은 채 장부의 다음 칸을 메웠다. 오전 11시 45분. 계획대로라면 지금은 미용 전 체크리스트를 끝내야 하는 시간이다. “나 왔어.” 낮게 깔리는 그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일주일 전 그녀가 메세지를 보냈을 때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면, 오늘 이 순간은 희수가 그의 목에 매달렸을텐데, 지금은 그저 잘 짜인 악보 위에 떨어진 잉크 한 방울처럼 이질적이었다. “희수야.” 한 번 더 들려오는 부름에 희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재원을 마주한 순간, 멈춰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잊고 있었던 그의 향수 냄새,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방식, 그녀를 빤히 응시하는 그 집요한 시선. 분명 그녀는 자신의 삶을 잘 살고 있었는데, 그를 보는 것만으로 세포 하나하나가 그를 기억해내며 술렁거렸다. 억지로 참는 게 아니었다. 그저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던 감정의 앙금이 그의 등장과 함께 다시 부유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어, 왔어?” 최대한 평온하게 대답했다. 재원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어, 왔어? 지금 그게 다야?” 재원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훑다 멈췄다.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집요하게. 그는 아마 희수가 울며 반기거나, 혹은 화를 내며 따질 거라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희수는 지금 화를 내기에도 너무 바빴다. 뭉치가 올 시간이었고, 내가 정한 오늘의 스케줄은 아직 한참 남았다. “응. 근데 자기야, 지금 예약 손님 강아지 올 시간이라 내가 좀 바쁘거든. 거기 잠깐 앉아 있을래?”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다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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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흉터의 기록

희수의 손가락 끝에서 붉은 피가 테이블 위로 툭떨어졌다. 그 선명한 빨간색이 하얀 테이블을 적시는 순간, 재원의 머릿속에서 퓨즈가 나간 듯 강렬한 기시감이 몰려왔다.기억은 비겁하게도 가장 후회되는 순간만을 골라 눈앞에 펼쳐놓는다. 마트 앞에서 그녀를 외면했던 그날뿐만이 아니었다. 돌이켜보니 재원의 연애는 희수의 상처를 ‘시위’나 ‘부담’으로 치부하며 고개를 돌렸던 비겁한 순간들의 연속이었다.밤늦게 날아온 희수의 상처 사진에 ‘조심 좀 하지’라는 건조한 답장만 남기고 잠들었던 밤. 데이트 중 가벼운 찰과상을 입은 희수의 손을 보며 ‘덜렁거리는 게 네 특기냐’며 핀잔을 줬던 오후. 그때마다 재원은 생각했다. 희수가 자신에게 더 많은 관심을 얻기 위해, 더 깊은 확신을 구걸하기 위해 상처를 과장하고 있다고. 그 오만한 확신이 지금, 스스로 피를 닦아내는 희수의 무심한 손길 앞에서 산산조각 났다.“기다려!”재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게를 뛰쳐나갔다. 약국으로 달리는 내내 숨이 가빠온 것은 비단 달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과거, 퇴근길. 동앗줄이라도 잡듯 제 팔에 매달려 상처를 보여주던 희수를 뿌리쳤던 자신의 손이 너무나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때의 희수는 자신의 평온한 퇴근 길에 난입한 침입자,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앗! 자기야. 나 손에 피...피.. 약국... 어?""하... 가라... 뒤에 동료들 온다..."자신의 사생활이 노출 되는 게 싫었던 탓에, 아니, 자신의 체면이 중요했던 그때는 희수와의 마주침을[사람들이 너에 대해 말하는 게 싫어]라며, 그것이 널 보호하는 내 사랑이라 달래주었었다.‘그때의 너는 정말 아팠던 건데. 나는 왜 그걸 연기라고 믿고 싶어 했을까.’약국에서 날카로운 가위에 베였을 때 필요한 모든 것을 쓸어 담았다. 소독약, 연고, 가장 비싼 밴드들. 비닐봉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야 약을 사 들고 달려가는 자신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그때는 손 한 번 잡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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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무너진 자존심

재원이 가게를 나가는 종소리가 들린 뒤에, 희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뭉치의 털을 정리 했다. 등 뒤로 느껴지는 시선. 유리창 너머, 가게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는 재원의 그림자가 바닥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희수는 아주 잠깐 멈칫했다. 쓸쓸해 보였다. 희수가 사랑했던 재원은 늘 빳빳하게 다려진 셔츠처럼 당당한 사람이었다. 자존감이 높다 못해 오만했고, 그 확신에 찬 태도가 희수를 외롭게 만들지언정 한편으로는 그를 의지하게 했던 힘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유리창 너머에서 커피 심부름을 가기 위해 머뭇거리는 남자의 뒷모습에선 예전의 날카로운 카리스마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내가 매달려서 그를 붙잡았다면, 예전처럼 울면서 가지 말라고 했다면... 그의 어깨가 조금은 펴져서 오지 않았을까.’ 잠시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니지.” 희수는 고개를 저었다. 저건 쓸쓸함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선택한 결과였다. 희수가 세 번의 메세지를 보내는 동안 침묵으로 무시해 왔던 그였다. 그녀가 자신만의 유예기간을 두고, 철저하게 자기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 그가 짊어지고 있는 저 초라한 무게감은 희수가 준 상처가 아니라, 본인이 부린 오만이 남긴 부산물일 뿐이었다. ‘나는 최선을 다했어. 그래서 지금 헤어진 적 없는 사람처럼 대해주고 있잖아.’ 희수는 스스로를 설득하며 합리화했다. 화를 내거나 문전박대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자기’라고 불렀고, 커피를 사다 달라는 일상적인 심부름도 시켰다. 만약 여기서 더 마음을 써줬다면 재원은 다시 그 비겁한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자신이 주도권을 잡고 희수를 통제하며, 아주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자존심이 다시 고개를 들지도 모를 터였다. 희수는 수도꼭지를 틀어 물줄기를 쏟아냈다. 쏟아지는 물소리에 섞여 불필요한 감정의 잔상들이 씻겨 내려가길 바랐다. 정성껏 뭉치를 씻기며, 자신 안에 남아있는 작은 연민을 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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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보라색 성벽

드라이기의 요란한 소음이 미용실 내부를 가득 채웠다. 희수는 뭉치의 젖은 털을 정성스럽게 빗어 넘기며, 거울 너머의 거실을 힐끗 살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표면에는 송골송골 물방울이 맺혀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재원은 그 컵을 손에 쥐지도 못한 채, 마치 전시관의 관람객처럼 희수의 가게를 눈으로 훑고 있었다. 희수는 그 시선의 궤적을 하나하나 데이터로 치환했다. 재원의 시선이 가장 먼저 머문 곳은 벽면에 정갈하게 붙은 ‘반려견 미용 포트폴리오’였다. 거기엔 희수가 지난 한 달간, 특히 그와 연락이 닿지 않던 그 시간 동안 공들여 완성한 결과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비포 앤 애프터가 확실한 강아지들의 사진 아래에는 희수의 단정한 글씨로 미용 팁과 스타일링 포인트가 적혀 있었다. 재원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아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희수가 처음 이 가게를 열겠다고 했을 때, 그가 던졌던 무심한 조언들을. [희수야, 너무 네 취향만 고집하지 마. 보라색 소품 같은 거, 대중적이지 않잖아.] [사업은 감성으로 하는 게 아니야. 그냥 남들 하는 대로 깔끔하게 해.] 하지만 지금 재원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의 ‘효율적인 조언’이 얼마나 틀렸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보라색 포인트 벽지는 조명 아래서 우아하게 빛났고, 그가 ‘대중적이지 않다’고 치부했던 소품들은 이제 이 가게만의 독보적인 브랜드가 되어 있었다. 재원은 깨닫고 있었다. 자신이 ‘확신’을 얻기 위해 갓길에 차를 세워두고 계산기를 두드리는 동안, 희수는 타인의 피드백 없이도 완벽한 자기만의 왕국을 건설했다는 사실을. 그 왕국 안에는 재원이 끼어들 틈 따위는 단 1cm도 존재하지 않았다. 희수는 드라이기 바람의 온도를 조절하며 속으로 분석을 이어갔다. ‘내가 그를 평소처럼 대하는게 더 자극인가?.’ 그는 늘 희수의 세상에서 태양이고 싶어 했다. 희수의 고민은 늘 그의 조언을 거쳐야 해결되었고, 희수의 기쁨은 그의 승인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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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예의라는 이름

“나… 그렇게까지 너한테 없는 사람 됐냐.”재원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늘 확신에 차서 상대를 휘두르던 그 목소리가 힘없이 꺾여 바닥을 굴렀다. 희수는 쥐고 있던 커피 컵을 카운터 위에 내려놓았다. 손끝에 남은 차가운 냉기가 심장까지 전달되는 기분이었지만, 희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재원을 마주 보았다. 불과 1미터, 재원의 거친 숨소리가 희수의 뺨에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재원의 동공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고 있었고, 굳게 다문 턱근육은 그가 얼마나 간신히 이 비참한 질문을 뱉어냈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희수는 이 상황을 하나의 ‘장면’으로 해체하기 시작했다. 과거의 희수였다면 이 젖은 목소리에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아니야, 자기야.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라며 그의 품에 파고들어 한달 간의 원망을 눈물로 씻어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희수의 뇌는 냉정하게 재원의 상태를 진단하고 있었다. ‘주도권 상실에 따른 분리 불안. 자신의 존재감이 부정당하자 감성적인 호소로 체제를 복구하려는 전형적인 회피형.'희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드라이기 소음보다 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럼 자기는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랐어?”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재원의 눈이 크게 떠졌다. 희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내가 자기 붙잡고 왜 이제 왔냐고 울기라도 할까? 아니면 한달 동안 사람 피 말리게 한 거 화라도 낼까? 자기가 원하는 게 그런 ‘반응’이야?”“희수야, 나는 네가 화라도 내길 바랐어. 차라리 욕을 하든가, 뺨을 때리든가! 그런데 너는 지금… 마치 내가 여기 없는 사람인 것처럼 굴잖아.”재원의 항변에 희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기가 착각하는 게 하나 있는데.”희수는 재원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내가 화를 낸다는 건, 아직 내 일상에 자기 자리가 남아있다는 뜻이야. 내 감정 에너지를 써서 자기를 응징할 만큼, 자기가 나한테 에너지가 된다는 뜻이라고.”희수는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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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가장 실용적인 안식처

재원은 시동을 끄고 차 안의 어둠 속에 몸을 묻었다. 조수석 가방 안에는 전해주지 못한 약봉투가 들어 있었다. 약국에서 가장 비싼 연고와 흉터 패치를 고르며 그는 잠시나마 익숙한 안도감을 느꼈었다. 희수가 불편함을 겪을 때, 가장 확실하고 실용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 그것이 재원이 아는 사랑의 유일한 정의였으니까.재원의 시선이 핸들 옆 거치대에 꽂힌 휴대폰으로 향했다. 과거의 그는 스스로를 꽤 괜찮은 남자라고 믿었다. 희수가 청소하기 힘들다며 한숨을 내쉬면 다음 날 최고급 사양의 로봇청소기를 결제해 보냈고, 서서 일하느라 다리가 부었다는 말엔 직접 검색해 알아낸 의료용 마사지기를 안겼다. 희수가 다리를 다쳐 꼼짝 못 할 때는 멀리까지 차를 몰아 유명한 맛집의 꼬리곰탕을 포장해 오기도 했다. ‘나도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다정했었는데.’재원은 비겁하게 그 기억들을 하나하나 꺼내 위로했다. 하지만 이내 뼈아픈 자각이 밀려왔다. 그는 희수에게 ‘물건’을 주었지만, 정작 희수가 원했던 ‘시간’은 늘 유보했었다. 희수가 다친 다리로 그가 사 온 꼬리곰탕을 먹는 동안에도 그는 휴대폰으로 업무 메일을 확인했고, 로봇청소기가 돌아가는 소음 속에서 희수가 건네는 사소한 일상의 대화들은 ‘나중에’라는 짧은 말로 잘라내기 일쑤였다.기억의 파편들이 하나둘 떠올라 재원을 괴롭혔다. 언젠가 희수가 제 품에 파고들며 했던, 당시에는 시시하다고 생각했던 말이 이명의 잔상처럼 귓가를 맴돌았다.[자기야, 내 목표는 자기가 만났던 과거 여자들보다 자기 곁에 더 오래 머무는 거야. 자기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공기처럼 아주 오래.]그때 재원은 코웃음을 쳤었다. [할 수 있으면 해보든가.]라며 으시댔지만, 이제야 알았다. 그것은 희수가 줄 수 있는 가장 지독하고 헌신적인 사랑의 고백이었다는 것을. 그녀는 재원의 삶에 화려하게 군림하는 대신, 그가 불편함 없이 숨 쉴 수 있는 ‘공기’가 되어주려 했었다. 재원은 핸들에 이마를 기댄 채, 희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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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웬수]->[🙏웬수]

봄의 끝자락, 창틈으로 스며드는 새벽바람이 제법 서늘했다. 완전히 가시지 않은 냉기에 몸을 웅크리던 희수는 머리맡에서 울리는 짧은 진동에 눈을 떴다. 화면을 밝힌 것은 어김없이 재원의 이름이었다.[재원]- 기상.- 잘 잤어?- 나 다시 서울 발령 신청하러 대구 지사 다녀올게.희수는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올린 채 액정 속 문장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과거 재원의 연락은 늘 건조한 '상태 보고'에 불과했다. [기상][출근 준비][사무실 도착]마치 정해진 시간에 작동하는 기계적인 로그 기록 같았던 그의 문자들 사이에서, 희수는 늘 행간의 온기를 찾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오늘 도착한 메시지에는 낯선 데이터들이 섞여 있었다. ‘잘 잤어?’라는 안부와 ‘서울 발령 신청’이라는 구체적인 목적지. 희수는 알림창으로 내용을 확인한 뒤 조용히 휴대폰을 엎어놓았다. 1을 없애는 순간, 이 낯선 데이터가 희수의 정돈된 루틴에 오류를 일으킬 것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희수는 천천히 일어나 방 안을 둘러보았다. 한 달 전 재원의 흔적을 깨끗이 포맷한 이후, 희수의 곁은 늘 정갈한 공백 상태였다. 희수는 재원을 위해 이 자리를 비워둔 게 아니었다. 그저 누구도 함부로 앉히지 않기 위해, 자신만의 궤도를 지키기 위해 비워둔 것뿐이었다. 설령 그게 재원이라 할지라도, 아직은 그를 다시 이 자리에 앉힐 만큼의 신뢰 데이터가 쌓이지 않았다.오전 10시. 가게 앞 보라색 간판에 불을 켤 때 다시 진동이 울렸다.[재원]- 대구 도착.- 날씨가 좀 쌀쌀하네. 서울은 어때?- 얇게 입지 말고, 겉옷 꼭 챙겨서 출근해.희수는 유리문에 비친 자신의 얇은 카디건을 보며 피식 웃음이 났다. ‘MBTI가 전형적인 TJ(사고형)인 남자가 갑자기 F(감성형) 흉내를 내려니 과부하가 걸린 모양이네.’희수는 전문가적 시선으로 재원의 노력을 해체했다. 그는 지금 자신의 효율적인 소통 방식이 희수에게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가장 비효율적이라고 믿었던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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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틈

희수는 가슴팍까지 카디건을 여미며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익숙한 검은색 세단이 가로등 아래 웅크린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아침 일찍 서울에서 대구 본사까지 내려가 발령 신청을 마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희수의 퇴근길을 기다리고 있었을 재원이다. ‘피곤할 텐데, 진짜 무식하게 저러네.’희수는 마음 한구석이 홧홧해지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재원은 희수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운전석 문을 열고 내렸다. 평소 같으면 빳빳하게 각이 잡혀 있어야 할 셔츠는 군데군데 주름이 가 있었고, 넥타이는 살짝 느슨해진 상태였다. 그 흐트러진 모습이 희수의 눈엔 생경한 데이터로 읽혔다. 늘 완벽함을 연기하며 상대를 압도하던 남자의 균열. “나왔어? 늦었네.”재원이 먼저 말을 건넸다. 목소리는 잠겨 있었지만, 희수를 바라보는 눈빛만은 기이할 정도로 맑았다. 희수는 그의 얼굴을 빤히 관찰했다. 하루 종일 장거리 운전을 한 남자의 피로도가 눈가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지만, 그는 마치 대단한 선물을 들고 온 아이처럼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전 운전도 했고, 커피도 잘 마셨고, 밥도 꼬박꼬박 챙겨 먹었어. 아까 사진 보냈는데, 봤어?”재원의 말에 희수는 대답 대신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올랐다. 차 안은 재원의 향수 냄새와 약간의 커피 향, 그리고 따뜻한 온기가 섞여 묘한 안도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희수는 벨트를 매며 힐끗 재원의 옆얼굴을 살폈다. 재원은 시동을 걸기 전, 잠시 희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예전 같으면 바로 엑셀을 밟으며 다음 행선지를 통보했겠지만, 지금 그는 희수의 호흡에 자신의 속도를 맞추려 애쓰고 있었다. ‘이 인간, 진짜 작정했나 봐.’희수는 휴대폰을 꺼내 [🙏웬수] 폴더를 떠올렸다. 오늘 하루 종일 쏟아졌던 재원의 일방적인 보고들. 기상부터 점심 메뉴, 본사 로비의 풍경까지. 그는 마치 희수가 곁에 있는 것처럼 시시콜콜한 일상을 나열했다. 그건 재원이 평생 유지해온 ‘효율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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