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결혼 끝, 후회는 사절입니다: Chapter 41 - Chapter 50

100 Chapters

제41화

하늘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규나를 바라봤다.“보아하니 안색이 꽤 좋아 보이네. 일은 잘 풀렸어?”경울시에서 고씨 가문은 강씨 가문, 한씨 가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최상위 재벌가다. 원래부터 정보가 빠르기로 유명한 집안이기도 했다. 규나와 진후 사이에 얽힌 지난 일들 역시 이 바닥에서는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다들 어렴풋이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하늘이 그 사정을 대강 짐작하고 있는 것도 당연했다.이제 와 규나가 돌아왔다면, 아쉬운 쪽은 결국 진후와 결혼한 그 여자일 터였다.다만 하늘의 연민은 딱 거기까지였다.하늘은 원래 누군가를 도덕으로 재단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늘에게 중요한 건 언제나 결과였다.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그 안에서 무슨 수를 썼는지는 본질이 아니었다.그 말을 듣자 뺨에 옅은 홍조가 번진 규나는 애매하게 웃으며 말을 흐렸다.“그런 말 하지 마. 뭐, 대체로는 잘되고 있어.”주문을 마친 뒤 직원이 문을 닫고 나가자, 하늘은 잔을 가볍게 흔들었다.“그런데 규나야, 날 부른 게 그냥 옛날 얘기나 하자고 그런 건 아니지?”규나는 손끝으로 잔의 테두리를 천천히 문질렀다. 잠깐 말을 고르는 기색이 스쳤다.“언니, 지난번에 언니가 전국미술콩쿠르 참가한다고 했던 거 기억나?”하늘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왜, 너도 관심 있어?”“나는 아니고. 우리 오빠랑 진후 오빠가...”규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요즘 심씨 가문 쪽 움직임을 좀 보고 있거든. 그런데 이번 전국미술콩쿠르에 심씨 가문이 최대 후원사라고 해서.”“심씨 가문?”하늘이 살짝 코웃음을 쳤다.“너희 쪽 목표가 심씨 가문이야?”하늘은 잔을 내려놓으며 덧붙였다.“심정재는 아무나 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알아.”규나는 맑은 눈으로 하늘을 바라봤다.“그래서 더 언니가 생각났지.”하늘은 규나를 두어 초 바라보다가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사람은 참 잘 찾네. 나야 뭐, 심정재랑 아예 모르는 사이는 아니지. 예전에 해외에 있을 때 몇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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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화

하늘은 원래부터 규나를 곱게 보지 않았다. 예전의 규나는 제멋대로에다 성질까지 드센 데다가, 제대로 하는 것도 없으면서 강빈의 비호만 믿고 버티는 아이였다. 학교에서도 늘 진후가 규나 편에 서서 감쌌다. 하늘은 그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한진후 정도로 머리 좋은 애가... 어쩌다 이런 일에만 엮이면 저렇게까지 앞뒤를 못 가리게 되는 거지?’그런데 오늘 보니 규나는 자세를 한껏 낮추고 있었고, 성질도 예전보다 많이 죽은 듯했다.하늘은 명단을 쓱 넘겨 보면서 몇몇 사람들을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평가했다.“얘는 별로야. 빽으로 들어온 애거든. 아버지가 학교에 몇십억 원을 후원했다더라.”“얘는 그럭저럭 괜찮아. 그래도 나보단 한참 모자라지. 노력은 하는데, 타고난 감각이 부족해.”듣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던 규나는, 문득 핸드폰 화면 오른쪽 아래에 적힌 이름 하나를 가리켰다.“어? 그럼 얘는 어때?”주예였다.하늘의 손이 멈췄다. 하늘은 눈길을 돌려 규나를 바라봤다. 목소리에는 방금 전과 다른 결이 묻어났다.“임주예를 알아?”조금 전 규나가 그 이름을 짚은 게 그냥 툭 던진 말 같지는 않았다. 미리 생각해 두고 말을 꺼낸 듯한 느낌에 더 가까웠다.규나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웃었다.“안 친해. 그냥 실력 있다는 얘기를 좀 들었거든.”규나는 알고 있었다. ‘딱 건드렸네.’ 이 한마디면 하늘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지점을 정확히 찌를 수 있다는 걸.하늘은 원래 승부욕이 독했다. 이기기만 할 수 있다면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그동안 하늘이 남몰래 쓴 방법이 얼마나 많은지 규나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교환학생 자리, 학생대표, 장학금... 하늘은 늘 누군가를 밟고 위로 올라갔다.그래서 하늘은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만한 상대에게 유난히 민감했다. 규나가 주예의 실력을 한 번만 짚어 줘도, 하늘은 뒤에서 반드시 주예를 다시 살펴볼 것이다. 그 뒤에 어떻게든 손을 써서, 그 상대를 미리 제거하려고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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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화

붓끝에 남아 있던 마지막 물감 기운까지 완전히 씻어 낸 뒤, 주예는 손목에 힘을 줘 물방울을 털어 냈다. 그러고 나서 흐트러진 붓털을 하나하나 가지런히 정리한 뒤 붓걸이에 올려서 말렸다. 그 일까지 다 끝낸 다음에야 주예는 수건으로 손을 천천히 닦았고, 뒤이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그때 방종수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문이 열리자 작업실 안으로 바람이 훅 들어왔다.“접수했어?” 종수가 물었다.“네.” 주예가 고개를 끄덕였다.“어느 작품 낼 건데?”“「Lonely Me(외로운 나)」요.”종수는 그 말을 듣자 바로 알아들었다는 듯 시선을 눌러 두었다.“그 그림 좋지.”「Lonely Me(외로운 나)」는 주예가 16살 때 그린 작품이었다.그 시절, 주예의 ‘정재 오빠’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주예의 세상에서 발을 뺐다.주예는 미친 사람처럼 정재에게 전화를 걸었고, 메시지도 몇 번이고 보냈다. 그래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주예는 오랫동안 정재를 기다렸다. 아주 오래. 희망이 조금씩 사그라드는 걸 알면서도 마냥 기다렸다.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니야?’ 주예는 진심으로 걱정했다. 정말로 정재에게 무슨 사고라도 난 줄 알았다. 그러다 어느 날, 오래도록 잠잠하던 대화창이 갑자기 한 번 흔들렸다.주예는 다급하게 화면을 눌렀다. 곧 짧은 문장이 떠올랐다. 정재가 늘 쓰던, 차갑고 단정한 말투였다.[더 이상 연락하지 마.][우리 원래 아무 사이도 아니었어.]곧이어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사진 속 정재는 주예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화려한 연회장에 서 있었다. 정재는 고급스러운 검은 예복을 입고 있었고, 곁에는 은빛 롱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자가 함께 서 있었다. 그는 몸을 살짝 기울인 채 그 여자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자의 오른쪽 눈 밑에 찍힌 눈물점은 그 여자에게 짙은 화사함을 더해 주고 있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선 모습이 너무도 잘 어울려서 주예의 눈을 아프게 했다.그 사진을 마주했을 때, 주예는 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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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화

“로즈 이름으로 계속 내보낼 생각이에요.” 주예가 말했다.아직은 주예가 로즈라는 사실을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한씨 가문의 힘은 막강했다. 주예에게는 가면이 몇 개 더 필요했다. ‘언젠가는 쓸 데가 생기겠지.’ 주예는 그렇게 생각했다.무엇보다 지난번 갤러리에서 이미 확인한 바가 있었다. 규나와 진후는 로즈의 그림을 유난히 중요하게 보고 있었다. 그것도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뭔가 사업상의 기회와 얽혀 있는 듯했다. 주예는 자기 그림이 왜 사업상 기회와 연결되는지까지는 굳이 파고들 마음이 없었다. 그녀가 신경 쓰는 건 하나뿐이었다. 그 두 사람에게서 앞으로도 이득을 계속 뽑아낼 수 있느냐, 그게 더 중요했다.주예는 가끔 그날 밤 갤러리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감탄하는 척하면서 로즈의 그림을 분석하던 규나의 모습과 그 그림에 신경을 곤두세우던 진후의 태도. 그걸 떠올릴 때마다 우습기도 했고, 속이 시원해지기도 했다.이제는 기대까지 하게 됐다. 언젠가 규나와 진후가 로즈가 바로 주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때 두 사람의 얼굴에 어떤 표정이 떠오를지.다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주예는 이번 ‘게임’을 조금 더 길게 끌고 싶었다. 즉, 규나와 진후가 조금 더 많은 대가를 치르게 해야, 그제야 재미가 생길 터였다.“그래, 알겠어.” 종수는 주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강 알아챈 듯했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나한테 말해.”첫 번째 라운드의 방식은 단순했다.초청받은 모든 참가자는 각자 대표작 한 점을 제출해야 했다. 형식에는 제한이 없었다. 심사위원단은 기술, 창의성, 감정, 완성도, 이 네 가지를 기준으로 각각 점수를 매기고, 상위 백 명의 창작자만이 2라운드에 올라갈 수 있다.작품은 먼저 온라인 시스템을 통해 고화질 전자 파일로 제출해야 했다. 통과하게 되면, 작가 본인이 직접 작품 실물을 들고 지정 장소로 가서 확인 절차를 거쳐야 했다.주예는 마감일 전날 밤, 「Lone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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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화

다음 날, 고씨 가문의 저택.저택은 전통 정원 양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기암괴석으로 꾸민 가산 사이로 물이 잔잔하게 흘러갔다. 복도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손님을 맞는 응접실이 나왔다.고홍근은 묵직한 원목 의자의 주인 자리에 반듯하게 앉아 있었다. 수염과 머리카락은 이미 희어졌는데도 혈색도 좋았고, 두 눈에는 날 선 기운이 깊숙이 가라앉아 있었다. 고홍근의 시선은 도해산을 한 번 스치듯 훑더니 곧장 주예에게 닿았다. 고홍근은 주예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살피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도 선생.”고홍근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다만 그 안에는 가볍지 않은 불쾌함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혹시 절 놀리시려는 겁니까? 도 선생께서 말한 최고 수준의 고미술 복원가가 이 아가씨라는 말입니까? 이렇게 어린 아가씨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지난번에 왔던 그 젊은 친구만도 못해 보이는데요. 실력은 썩 만족스럽지 않았어도, 적어도 제 기준에는 겨우 맞출 정도는 됐습니다.”고홍근이 말한 젊은 친구는 당연히 종수였다.“제 「가을의 벗」은 대대로 종가에 전해 내려온 유물입니다. 여느 서화와는 격이 다릅니다.”“이번 보존 처리는 우리 고씨 문중에도 각별한 일입니다. 그런데 저 아가씨를 곁에 두시겠다고요? 도구 하나 변변히 못 챙길 테고, 안료 배합은 엄두도 못 낼 겁니다.”도해산이 웃으며 말했다.“회장님께서 오해하셨습니다. 오늘 제가 임주예 양을 데리고 온 건 옆에서 도구나 건네라고 데리고 온 게 아닙니다.”그 말을 듣자 고홍근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래도 도해산이 그렇게 경솔한 사람은 아니지.’ 고홍근은 속으로 그렇게 여겼다. 아마도 옆에서 보면서 배우게 하려고 데려온 줄 알았다. 하지만, 아직 마음을 놓기도 전에, 도해산이 뒤이어 덧붙였다.“이번 보수는 임주예 양이 전부 다 맡을 겁니다.”“콜록, 콜록...”고홍근은 그대로 사레가 들렸다.도해산이 급히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한 번만 믿어 보십시오. 회장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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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화

고홍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는 주예를 향한 만족감이 엿보였다.주예가 고른 자리는 꽤 영리했다. 우선 그곳은 그림의 중심부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어서, 설사 복원을 망치더라도 작품 전체에 미치는 타격이 크지 않았다. 게다가 그 부분은 손상 원인 자체가 한 가지로 단정되지 않을 만큼 복합적이었다. 만약 저 부분을 제대로 살려낸다면, 그것만으로도 고홍근이 주예의 실력을 인정하기에 충분했다.고홍근 역시 그 안에 숨은 뜻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영악하기만 한 게 아니라, 손재주도 따라주는 모양이군.’ 고홍근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더 말을 보태지 않고 몸을 돌린 주예는, 이미 한쪽에 마련되어 있던 작업대로 걸어갔다. 시약을 배합하고, 붓을 적시면서 색을 맞췄다. 삼십 분이 지나자 준비는 모두 끝났다.살며시 눈을 감은 주예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다시 눈을 뜬 주예의 시선은 오롯이 그림 위에 머물렀다. 주변이 어떻게 돌아가든 이제 주예에게 남은 것은 눈앞의 그림뿐인 듯했다.주예는 먼저 가장 작은 세필을 집어 들고, 방금 조제한 시약을 붓끝에 소량 묻혔다. 그러고는 손목을 곧게 세운 채 붓끝을 아래로 향하게 해, 손상 부위를 조금씩 아주 조심스럽게 풀어냈다. 훼손된 면적이 워낙 작았기에, 이 과정에서 주예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아주 정확하게 작업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손상 위에 손상을 더하는 꼴이 되고 만다.이 동작은 붓질 몇 번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수십 차례를 반복해야 했다. 손목 힘도 버텨야 했고, 끈기도 필요했다. 그런데도 주예의 손끝은 내내 흔들림이 없었다.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는데도 주예는 그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주예가 팽팽하게 집중하자,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에게까지 그 기운이 번졌다. 사람들은 어느새 움직임을 늦추었고, 작업실은 점점 숨소리마저 조심스러워질 만큼 고요해졌다. 누구 하나 주예를 건드려 이 복원 작업을 흐트러지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곰팡이 얼룩을 걷어낸 뒤, 주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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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화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주예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졌다.“회장님께서 믿고 맡겨 주신 만큼,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그 뒤로 꼬박 일주일 동안, 주예는 거의 고씨 저택에서 지내다시피 했다. 꼭 필요한 식사와 잠깐의 휴식을 빼면, 남는 시간은 전부 「가을의 벗」에 쏟아부었다.작업하는 내내 정신적으로 많이 피로했다. 그런데도 주예는 그 과정 속에 깊이 잠길수록 오히려 마음이 잔잔해지는 걸 느꼈다. 마지막 붓질까지 끝나고 그림 전체가 비로소 한 폭으로 완전히 이어졌을 때, 주예는 가만히 숨을 내쉬며 비로소 홀가분한 웃음을 지었다.주예도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이 그림을 복원하는 동안은 유난히 모든 게 순조롭게 풀렸다. 마치 어딘가에서 ‘넌 꼭 해낼 수 있어’ 하고 조용히 일러주는 듯했다. 이를테면 맨 처음 손댔던 그 파손 부위만 해도 그랬다. 그 부분의 먹빛은, 어머니가 살아 계실 적 주예에게 수없이 조색을 익히게 했던 바로 그 계열의 색이었다.고홍근이 직접 최종 확인에 나섰다.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그림을 눈앞에 두고, 고홍근은 벅차오르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연신 감탄사를 쏟아냈다.“좋아, 아주 좋아. 이야, 이건 정말 잘 살렸어.”고홍근은 곧장 사람을 불러 연회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주예에게 제대로 감사의 뜻을 전하겠다는 의지가 분명했다.연회에 참석하는 날, 주예는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코트를 걸쳤다. 안에는 연한 달빛 원피스를 받쳐 입었다. 긴 머리는 느슨하게 틀어 올리고, 소박한 나무 비녀 하나만 꽂았다.주예가 집사의 안내를 받아 고씨 가문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을 때, 안쪽에서는 이미 사람들 웃음소리와 말소리가 오가고 있었다.상석에는 안색이 한껏 밝아진 고홍근이 앉아 있었다.그리고 고홍근의 왼편 손님 자리에는 먹빛 정장을 입은 남자가 자리하고 있었다.심정재였다.주예의 발걸음이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곧 표정을 가지런히 다잡은 주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앞으로 나아갔다.“회장님.”가볍게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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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화

P국으로 돌아가는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살얼음판이었다. 한 번은 바로 정재의 허리 뒤에다 총구를 들이밀기도 했다.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정재는 이동할 때마다 신분을 바꿨고, 핸드폰도 수도 없이 갈아치웠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허술한 틈이 없어야 했다. ‘여기서 한 번만 삐끗해도 끝이야.’ 정재는 내내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으며 버텼다.정재가 끝내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던 건 전부 고씨 가문의 힘 덕분이었다. 그 은혜를 정재는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이번 귀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심씨 가문이 경울시 시장에 제대로 발을 들이려면, 이 지역 명문가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했다. 여러 조건을 따져 본 끝에 정재가 손을 내민 곳은 결국 고씨 가문이었다.고홍근에게도 이번 협력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씨 가문은 오랜 저력도 있고 그동안 쌓아 온 명망도 있었다. 그런데 정작 뒤를 이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고홍근의 두 아들, 고기준과 고기성은 하나같이 기대를 걸기 어려웠다. 고기준은 들뜬 성격이라 중심을 못 잡았고, 아내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고씨 가문 재산을 조금이라도 더 챙기는 데만 마음이 쏠려 있었다. 반면 고기성은 사람이 지나치게 무던했다. 심성이 나쁜 건 아니었지만, 큰일을 맡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하나뿐인 딸 고경란은 달랐다. 재주도 있고 기개도 있었다. 고홍근이 보기에 고경란은 자식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하지만 예전에 한 차례 정략결혼 문제로 고씨 가문과 등을 돌린 뒤 끝내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고경란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손주들 쪽으로 눈을 돌려 봐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손자 고우빈은 어리석고 심보까지 못돼 먹었다. 식견도 짧아서 크게 키울 만한 그릇이 되지 못했다.손녀 고하늘은 그래도 머리는 돌아가는 편이었다. 다만 속이 좁고, 일을 밀어붙이는 방식이 지나치게 과격했다. 욕심도 너무 쉽게 겉으로 드러냈고 큰 판을 읽는 힘이 부족했다.고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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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화

“그래?”고홍근이 말을 이었다.“그럼 임 선생 부모도 딸을 키우느라 마음을 많이 쏟았겠구나?”주예는 아주 잠깐 말을 멈췄다.“부모님은... 두 분 다 돌아가셨어요.”주예가 조용히 답했다.말투는 담담했다. 그런데 그 말을 꺼내는 동안, 주예의 눈가에는 얇은 물기가 어린 듯했다.주예 자신도 오늘 왜 이토록 마음이 느슨해지는지 알 수 없었다. 고홍근에게서 풍기는 자상한 기운 때문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맞은편에 앉은 정재 때문일지도 몰랐다. 한때 주예와 정재는 가족이나 다름없이 가까웠다.그런 분위기 속에서 주예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에 친 경계를 조금 내려놓고 있었다. ‘이상하네. 이런 얘기를 이렇게 쉽게 꺼낼 사람은 아닌데.’정재도 그 말을 듣고는 조용해졌다.정재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이웃으로 지내던 그 몇 해 동안, 주예의 부모가 정재를 얼마나 따뜻하게 챙겨 줬는지를.20년 전, 정재가 처음 경울시에 왔을 때 일이었다. 공교롭게도 정재는 주예의 옆집에 살게 됐다.그해 정재는 열 살이었고, 주예는 다섯 살이었다.초반 몇 년 동안 정재는 독의 후유증 때문에 몸이 늘 좋지 않았다. 기침이 오래 갔고, 밤이면 기침하다가 잠에서 깨는 일이 잦았다. 그때 주예의 부모는 정재를 위해 약이 되는 음식을 손수 챙겼다. 하루 세 끼를 한 번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정재가 가장 마음을 닫고 있을 때도, 주예의 부모는 정재를 남처럼 여기지 않았다. 마치 자기 집 아이를 돌보듯 정재를 보살폈다.주예 역시 햇살 같은 아이였다.주예는 날마다 웃으며 정재의 집 문을 두드렸다. 약 제때 먹으라고 잔소리를 했고, 햇볕을 쬐어야 한다며 정재의 손을 잡아 끌었다. 별것 아닌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늘어놓다가, 자기가 제일 아끼는 빨간 꽃무늬 누비이불까지 안겨주며 따뜻하게 덮으라고 신신당부하곤 했다.심씨 가문은 늘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더구나 정재는 다음 총수로 지목된 몸이었다. 그만큼 온갖 시선과 견제를 한몸에 받아야 했다. 그런 곳에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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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화

후회해도 돌이킬 수는 없었다. 그래도 고경란에게는 딸이 하나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딸도 고경란 못지않게 반듯하고 뛰어났다. 고경란은 딸을 참 잘 키워 냈다.다만 주예가 친딸이 아니라 입양한 딸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고홍근은 흐뭇함을 느끼면서도 마음 한쪽이 서늘하게 비어 있는 듯한 아쉬움도 함께 삼켜야 했다.고홍근은 천천히 술잔을 들어 올린 뒤 주예를 바라보았다. 시선은 무겁고도 복잡했다.정재는 느긋한 손놀림으로 게 껍데기를 발라 내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틈틈이 주예를 한 번 보고, 필요 이상으로 마음을 쓰는 듯한 고홍근 쪽으로도 시선을 흘렸다. ‘회장님이 생각보다 더 깊이 보고 계시네.’ 정재는 속으로 조용히 가늠했다.그때 고홍근이 호탕하게 웃으며 더 이상 그 이야기를 붙들지 않고 회화 쪽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정재는 손질을 마친 게살을 접시째 중앙으로 밀어 놓았다.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자리였다. 누가 손을 뻗어도 쉽게 집을 수 있게 딱 맞춰 놓은 위치였다.주예는 반찬을 집으려다 손끝이 잠깐 멈췄다.어릴 적부터 주예는 게를 좋아했다. 다만 게를 발라 먹느라 손이 지저분해지는 게 싫다고 질색하곤 했다. 그러면 정재는 아무렇지 않게 껍질을 다 손질해 주고, 먹기 좋게 정리해서 주예 앞에 놓아 두었다.사실 주예가 좋아하는 음식들 가운데는 손이 많이 가는 게 적지 않았다. 밤도 그랬고 생선이나 새우, 게도 마찬가지였다. 용과를 먹을 때도 검은 씨가 유난히 도드라지는 부분은 싫다고 했다. 손에 물 한 번 제대로 안 묻히고 자란 정재지만 이상하리만치 그런 건 늘 먼저 챙겨 주곤 했다.정재가 떠난 뒤로 주예는 다시는 그런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주예는 접시에 담긴 게살을 결국 한 번도 먹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그 접시를 지나쳐 푸성귀를 집었다.고홍근은 저 두 사람의 지난 시간을 알지 못했다. 고홍근의 눈에는 정재가 묵묵히 한 가지 음식을 저토록 세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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