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결혼 끝, 후회는 사절입니다: Chapter 31 - Chapter 40

100 Chapters

제31화

“당신이 그냥 억지를 부리는 거잖아. 나중에 망신당해도, 나는 수습해주지 않을 거야.”주예는 그 말에도 그저 가볍게 웃어 보였다.“걱정 안 해도 돼.”‘애초에 당신이 내 일을 수습해 준 적이 있었나?’“그럼 내가 지금 바로 가서 그 작품을 포장하라고 할게.”주예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등을 보인 채 몇 걸음 옮겼을 때,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10억... 제법 깊게 들어간 한 방이었지.’한쪽으로 비켜선 주예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큐레이터와 진행 절차를 다시 확인했고, 경매 쪽 조정 사항도 빠짐없이 전달했다. 그렇게 할 일을 마치고 다시 돌아왔을 때, 이미 전문가다운 단정한 미소가 다시 걸려 있었다.주예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이후 진행은 전담 직원이 두 분에게 따로 맞춰 드릴 예정이야. 천천히 둘러보시고, 나도 이만 실례할게.”주예가 돌아서서 떠나려던 때였다.“주예야.”진후가 불쑥 주예를 불렀다.주예가 뒤를 돌아봤다.“언제 집에 들어와?”진후의 말투는 지나치게 자연스러웠다. 마치 오늘 저녁은 뭘 먹을지 묻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았다.주예는 그 태도가 우스워서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진후는 정말로 주예가 그저 ‘심심풀이로 일하러 나온’ 정도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두고 봐야지.”주예는 건성으로 답했다.그런데도 진후는 바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깔끔한 원피스가 주예의 늘씬한 몸매를 잘 드러내고 있었고, 주예에게서는 빈틈없는 유능함이 배어 나왔다.진후는 그제야 처음으로 아주 미세한 불안을 느꼈다. 주예가 이혼 이야기를 꺼낸 뒤로도, 진후는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진후에게 그건 그저 여자가 감정이 상해 한바탕 성질을 부리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조금 달래고 맞춰 주면, 결국은 지나갈 거라고 여겨 왔다.하지만 주예는 이미 진후의 그 자기중심적인 관심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락에 질릴 대로 질려 있었다. 마치 주예가 진후를 떠나는 건 분수를 모르는 짓인 것처럼. 마치 주예의 인생은 원래부터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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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화

박효주의 표정이 완전히 굳어졌다.“전화를 안 받아? 한씨 집안을 우습게 보는 거네.”진후는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가슴 한쪽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짜증이 스멀스멀 치밀어 올랐다.“일단 할머니부터 뵐게요. 주예 일 끝나면, 제가 꼭 데리고 오겠습니다.”진후는 틀림없다는듯이 말했지만, 정작 확신은 부족했다.진후의 할머니 권수영은 이번에 유난히 크게 앓았다.처음에는 흔한 감기 정도로 여겨졌다. 그런데 한겨울이라 찬 기운이 쉽게 가시지 않았고, 상태는 나아질 듯하다가도 다시 악화되었다. 열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연세가 있는 데다 워낙 기력이 약한 탓에, 밤이 되자 권수영은 헛소리까지 하기 시작했다.이미 의사가 다녀갔고,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곧바로 사람을 부르라고 몇 번이나 당부한 상태였다.진후는 결국 물을 수밖에 없었다.“어쩌다가 이렇게까지 심해지신 거예요? 전에는 할머니가 편찮으셔도 이 정도는 아니었잖아요.”박효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한 기색이 스친 목소리였다.“예전에는 편찮으실 틈이나 있었니? 주예가 있을 때는 네 할머니가 조금만 머리가 아프다, 몸이 으슬거린다 해도 전부 주예가 미리 손을 썼어.”박효주는 하나하나 짚기 시작했다.“평소에도 며칠에 한 번씩 보양 음식을 챙겨 드렸고, 네 할머니가 재채기만 해도 곧장 상태에 맞게 한약을 달였어. 그러니 네 할머니가 크게 앓을 틈이 없었지.”“딱 한 번, 좀 심하게 넘어간 적이 있었어. 그때가 그해 처음 신종 독감이 돌던 때였지.”“그때도 주예는 한숨도 안 자고 곁을 지켰어. 그렇게 버티면서 조금씩 좋아졌고.”박효주는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네 할머니뿐이겠니? 나도 몇 년 사이에 주예 덕을 꽤 봤다. 몸이 훨씬 나아졌어.”진후는 옆에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뭔가 목구멍을 틀어막은 듯 답답했다.‘주예가 그렇게까지 했다고?’진후는 그동안 그런 일들을 전부 사소한 집안일 로 여겼다. 누구든 시키면 할 수 있는 일이고, 오히려 전문 가사도우미가 맡으면 더 잘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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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화

처음에는 주예도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너무 피곤한데, 본가에 가는 횟수를 조금만 줄이면 안 되겠냐고. 특히 어떤 날은 권수영의 곁에 굳이 누가 밤새 붙어 있을 필요가 없을 때도 있었다.그때 진후가 뭐라고 했던가!“여보, 엄마랑 할머니가 당신을 부르는 건, 그만큼 가깝게 생각해서야.”“당신도 어머니랑 할머니를 잘 챙겨 드려야, 나도 밖에서 마음 놓고 일하지.”“...”그 말이 떠오르자, 진후는 자신도 모르게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줬다.진후가 집에 돌아왔다. 집 안에는 가사도우미가 오가고 있었지만, 이상하리만치 썰렁했다. 사람의 온기가 통째로 빠져나간 집 같았다.진후는 테이블을 닦고 있던 여주댁 쪽으로 몸을 돌렸다.“주예... 어젯밤에도 안 들어왔어요?”여주댁은 손을 멈추고 사실대로 답했다.“대표님, 사모님께서는 며칠째 들어오지 않으셨습니다.”진후는 더 묻지 않고 몸을 돌렸다. 곧장 안방으로 향하는 진후의 걸음이 빨라졌다.스위치를 누르자 방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안방은 늘 그렇듯 단정하게 정돈돼 있었다. 진후는 방 안을 대강 훑어봤다. 겉으로 보기에는 빠진 물건이 없는 듯했다. 다만 침대만은 달랐다. 며칠째 아무도 눕지 않은 것처럼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었다.‘그냥 심통 부리는 거겠지. 며칠 지나면 제 발로 돌아올 거야.’진후는 그렇게 생각했다.“안방 화장대 서랍을 열어 보라고 했지.”진후는 주예가 남긴 말을 떠올리며 화장대 맨 아래칸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은 거의 비어 있었고, 구석에 벨벳 상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진후는 상자를 집어 들고 천천히 열었다.결혼반지가 검은 벨벳 안감 위에 고요히 놓여 있었다.진후는 한동안 말 없이 반지만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소리 없이 웃었다.‘주예도 이제는 별걸 다 할 줄 알게 된 모양이네.’‘결혼반지까지 꺼내서 내 마음을 흔들고, 관심을 끌려 들다니.’진후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수는 분명 진후 마음을 건드렸다. 조금 전에 감정이 살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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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화

주예는 순회전시 일을 마치고 나서야 진후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할머니 편찮으셔. 본가로 와.]문자를 읽는 내내 주예는 입술만 굳게 다물고 있었다. 너무도 당당한 말투는 부탁이라기보다 지시처럼 생각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주예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짐부터 챙겼을 것이다. 걱정이 앞서서 곧장 본가로 달려가 권수영 곁을 지켰을 게 뻔했다.할머니.주예에게 그 호칭은 늘 복잡한 울림으로 남아 있었다.혼인신고를 마치고 처음 권수영을 찾아갔던 날도 또렷하게 기억났다. 주예는 잔뜩 긴장한 채 허리를 곧게 세우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상석에 앉은 권수영은 주예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너무 말랐구나. 이렇게 말라서야 복이 있어 보이질 않아.”주예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가득 맺혀 있었지만, 그래도 얌전히 대답했다.“네.”그 뒤로 주예는 많은 걸 익혔다. 새벽같이 일어나는 법도 배웠고, 보양 음식을 만드는 법도 익혔다. 차를 우리고, 권수영이 입에 대지 않는 음식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외웠다. 그런데 아무리 애를 써도 권수영의 태도는 늘 비슷했다. 대놓고 모질게 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주예를 마음에 들어 한 적도 없었다.주예는 어느 날 밤의 일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권수영이 한밤중에 몸이 불편하다고 하자, 주예는 급히 본가로 달려가 권수영의 침대 옆에서 밤새 지켰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권수영은 주예를 한 번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밤새 있었구나. 그 정도면 그래도 철은 좀 들었네.”핸드폰이 다시 한번 짧게 울렸다.진후의 두 번째 메시지였다.[할머니가 깨어나신 뒤로 계속 널 찾으셔.]곧이어 세 번째 메시지도 도착했다.[아무리 심통이 나 있어도 할머니는 한 번 뵈러 와야 하는 거 아냐? 할머니가 당신한테 못해 주신 게 있어?]주예는 그 문장을 읽고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나한테 잘해 줬다고?’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권수영이 주예를 따로 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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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화

[당신은 원래 분별을 잘 하는 사람이잖아. 당연히 뭐가 먼저인지 알 거라고 믿어. 그렇지?]진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마치 주예가 물러설 자리를 마련해 주는 사람처럼 여유 있게 말을 건넸다.주예는 소리 없이 웃었다.진후에게 주예의 인생은 늘 ‘조금 뒤로 미뤄도 되는 것’이었다. 어떤 일도, 어떤 사람도, 결국은 주예보다 우선시되었다.“한진후.”주예가 또렷하게 진후의 이름을 불렀다.“아직도 내가 당신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전화기 너머가 잠깐 조용해졌다.“당신은 내가 그냥 철이 없고, 세상 물정도 몰라서 이혼하겠다는 말을 꺼낸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당신이 일 정리해 놓고 몇 마디 달래기만 하면, 나는 얌전히 다시 돌아갈 거라고. 지난 3년 내내, 당신은 줄곧 그렇게 생각해 왔잖아.”진후는 반사적으로 받아쳤다.[난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야.]“상관없어.”주예가 진후의 말을 잘라 냈다.“나는 안 돌아가. 당신이 끝까지 내가 철없다고 생각하고 싶으면, 그냥 그렇게 생각해.” “그래도 난 더 이상은 당신 같은 사람들한테 보기 좋게 보이려고 이런 일들을 계속하진 않겠어.”주예는 그 말을 끝으로 바로 전화를 끊었다....통화를 하고 난 뒤에도 지후는 계속 뭔가를 곱씹고 있었다.“오빠, 내 말 듣고 있어?”규나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지난 일을 떠올리는 표정에는 즐거운 기색이 어렸다.“그때 우리 놀러 갔을 때 기억나? 내가 굳이 원시림 쪽으로 들어가 보겠다고 우겨서, 탐험하겠다고 혼자 신났었잖아.” “그러다 길도 잃었고, 핸드폰도 안 터졌지. 그런데도 난 하나도 안 무서웠어.”규나는 가볍게 콧소리를 냈다. 그 기억을 꺼내는 일 자체가 달콤하다는 듯한 태도였다.“왜냐하면, 오빠가 꼭 날 찾아낼 거라는 걸 알고 있었거든. 오빠가 비 맞으면서 두 시간 넘게 날 찾았잖아. 신발도 다 젖은 채, 나를 없고서 산길도 한참 내려왔고.”“그때 나는 오히려 오빠한테 유난 떤다고 짜증까지 냈어. 그런데 오빠는 나한테 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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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화

‘이혼? 제1회 조정기일?’규나는 눈을 내리깔고 문자 내용을 다시 훑었다.진후는 규나에게 이 일에 대해 단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며칠 동안 진후가 주예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말투는 늘 아무 일도 아닌 듯 담담했다. 적어도 이혼 절차를 밟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그렇다면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주예 쪽에서 먼저 이혼을 꺼낸 것이다.‘미친 거 아냐?’규나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한씨 가문의 지위나 진후의 조건을 생각해도, 주예가 먼저 이혼을 요구할 자격이 있다고는 도무지 느껴지지 않았다. ‘물러나는 척하면서 되레 주도권을 쥐려는 계산일까?’‘아니면 정말로 더는 결혼 생활을 이어 갈 생각이 없는 걸까?’규나는 선뜻 답을 내릴 수 없었다.하지만 상관없었다.금세 감정을 가라앉힌 규나의 눈동자에는 희미한 비웃음이 스쳤다. 주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무슨 속셈을 품고 있든, 규나가 해야 할 일까지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규나는 손가락을 들어 화면을 가볍게 옆으로 밀었다.알림은 바로 지워졌다.규나는 화면을 잠그고 휴대전화를 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내려놓았다. 손끝 하나 흐트러짐 없는 움직임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그러고는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고서 자신의 아랫배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표정은 부드러웠지만, 마음속은 이미 단단하게 굳어져 있었다.듣기로는 조정 기일에 어느 한쪽이 나오지 않으면, 법원은 출석한 쪽의 입장을 조금 더 무겁게 보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렇다면 진후가 빠지고 이혼을 먼저 청구한 주예만 나간다면, 판사의 무게추는 주예 쪽으로 기울 수도 있었다.그렇게 되면.이혼은 생각보다 빨리 끝날지도 몰랐다.규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주예는 작업실에 들어서자마자 휴대전화 진동을 느꼈다.장연 변호사에게서 온 메시지였다.[제1회 조정기일 통지서가 송달됐습니다. 기일은 다음 주 수요일 오전 9시로 지정됐습니다. 진행이 빠른 편이라 상대방도 이미 통지를 받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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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총 3차에 걸쳐서 진행이 돼.”도해산은 서류를 주예 쪽으로 밀어놓으며 말했다.“세부 진행 방식이랑 심사위원 명단은 전부 자료 안에 있으니까, 네가 직접 보고 파악해.”도해산은 거기에 한마디를 더 얹었다.“괜히 쫄지 마. 너는 내가 손수 키운 제자야. 실력은 이미 증명됐어.”도해산은 고개를 기울이며 주예를 흘겨봤다.“3위 안에도 못 들 거면, 나가서 내 제자라고 떠들고 다니지 마.”“네!”힘주어 고개를 끄덕이면서, 주예의 눈빛은 또렷하게 빛났다.그날 밤, 주예는 SNS에 게시물 하나를 올렸다.문구는 짧았다.[새로운 여정, 새로운 시작.]사진에는 금박이 들어간 본선 진출 명단이 담겨 있었다.물론 진후는 공개 범위에서 제외했다.그런데도 그 게시물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누군가에 의해 캡처됐고, 곧 규나의 휴대전화로 넘어갔다. 메시지 아래에는 심드렁한 농담까지 덧붙어 있었다.[네 라이벌, 생각보다 잘 지내는 것 같은데?]규나는 화면을 내려다본 채 손가락을 서서히 움켜쥐었다.‘이번 미술콩쿠르 최대 후원사가 심씨 가문이었지.’규나의 기억이 맞다면 그랬다.심씨 가문은 경울시에 즐비한 재벌가들조차 쉽게 올려다보지 못하는 존재였다. 말 그대로 최상위 재벌. 상류층 안에서도 정점에 있는 집안이었다.심씨 가문의 뿌리는 해외 P국에 있었다. 재계를 장악한 세월만 해도 거의 백 년에 가까웠고, 손을 뻗지 않은 업종을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로 사업 영역이 넓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본가와 방계까지 세를 불려 왔고, 지금은 혈연으로 엮인 사람만 해도 천 명이 훌쩍 넘는다고 했다. 그런데도 심씨 가문에서 실제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심씨 가문의 총수.현 심씨 가문 총수인 심정재는 지난 몇 년 동안 거침없는 방식으로 가문의 사업 규모를 두 배 가까이 넓혀 놓았다. 최근에는 무게중심을 서서히 국내로 옮기고 있었고, 그 첫 거점이 바로 경울시였다.심정재라는 이름은 상류층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했다. 그런데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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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해신그룹?”정재의 목소리에는 별다른 기복이 없었다.“예.”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연락을 넣은 사람은 한진후 대표입니다.”진석은 곧바로 한마디를 덧붙였다.“그러니까... 임주예 씨 남편 되는 사람입니다.”정재가 눈을 들었다. 가볍게 진석을 한 번 쳐다봤을 뿐인데, 진석은 등 뒤가 괜히 팽팽해지는 기분이 들었다.“한진후면 한진후지.”정재가 담담하게 말했다.“내가 누구 남편이냐고 물었어?”진석은 입을 다물었다.“답을 따로 할까요?”진석이 조심스레 물었다.“그럴 필요 없어.”정재는 파일을 덮으며 늘 그렇듯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공적인 건 절차대로 처리하고, 사적인 건 받지 마.”“알겠습니다.”진석은 바로 대답했다.“그런데...”진석은 또 한 번 망설이다가 말을 멈췄다.“또 뭐?”정재의 미간에 옅은 짜증이 스쳤다.“말을 할 거면 똑바로 해. 뜸 들이지 말고.”“이번 초대장에 로즈 신작을 함께 감상하자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진석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로즈입니다.”‘회장님이 그렇게 아끼는 임주예 씨 때문에 내가 이러고 있지.’‘아니면 뭐 하러 이렇게 눈치 보고 있겠어?’진석은 속으로만 식은땀을 삼켰다.“아직도 모르는 모양이네. 로즈가 주예라는 걸.”정재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나지막하게 웃는 소리가 흘러나왔지만, 그 웃음은 전혀 따뜻하지 않았다.“눈앞에 진짜 금덩이가 있는데도 붙잡을 줄은 모르고, 물 위에 비친 허상이나 좇고 있네.”정재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너는 어때 보여? 저 인간, 우스울 만큼 어리석은 거 아니야?”“그렇습니다.”진석은 고개를 더 낮췄다.“일단 묵혀 둬. 답장 보낼 필요 없어.”서재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정재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택 정원에 핀 장미가 유난히 화사하게 보였다....밤.진후의 집무실에는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책상 위에는 진후가 10억 원을 주고 낙찰 받은 그림이 놓여 있었다.“벌써 세 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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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화

강빈은 자신의 여동생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 눈길에는 아끼는 마음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이런저런 일을 겪고, 이제는 곧 아이 엄마가 될 사람이라 그런지, 규나가 정말 많이 달라진 것 같았다.‘이제야 좀 철이 든 건가.’강빈은 그렇게 생각했다.“규나야, 호텔 생활도 이제 지겹지? 그만하고 집으로 들어와.”강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시간은 어느새 제1회 조정기일이 다가와 있었다.겨울 아침은 원래 밝아지는 때가 늦었다. 주예가 법원에 도착했을 때도 하늘은 이제 막 어둠이 걷히는 중이었다.주예는 복도의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외투는 무릎 위에 얹어 두었고, 손에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이 들려 있었다. 손끝을 덥히려는 듯 조용히 컵을 감싸 쥐고 있었다.서류를 덮은 장연이 시간을 확인했다.“9시 정각입니다. 절차상 지금쯤은 상대방도 도착해 있어야 합니다.”주예는 고개를 끄덕였다.“조금만 더 기다려 보죠.”조정실 문은 열려 있었다. 가끔 고개를 들어 복도를 한 번씩 바라보던 판사는, 다시 시선을 내리고 뭔가를 적어 내려갔다.10분이 지났다.30분이 지났다.복도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예와 장연, 단 두 사람뿐이었다.장연이 조용히 말했다.“상대방이 출석하지 않으면, 제1회 조정기일은 사실상 성립되지 않은 걸로 보시면 됩니다.”“네.”주예는 짧게 답했다.“알고 있어요.”주예의 목소리는 이상할 만큼 차분했다. 3년 동안 이어진 결혼을 끝내러 나온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담담했다.그 뒤로도 거의 한 시간이 더 흘렀다.마침내 판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한진후 씨는 출석하지 않았고, 사전 연락도 없었습니다. 조금 전 저희 쪽에서 직접 연락을 시도해 봤지만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제1회 조정기일은 조정 불성립으로 기록하겠습니다.”판사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법원 시스템에서 양측에 안내 문자도 발송될 겁니다.”장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저희는 제2회 조정기일을 신청하겠습니다.”“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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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그 며칠 동안 규나는 임신 초기 증상이 본격적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몸 상태도 좋지 않았고, 감정 기복도 심했다. 진후는 거의 그쪽에 붙어 지냈다. 일까지 그쪽으로 옮겨서 볼 정도였다.그 생각이 미치자, 진후는 더 망설이지 않았다. 차 키를 움켜쥔 채 곧장 밖으로 나갔다.규나가 머무는 호텔 객실은 조명이 부드럽게 내려앉아 있었다. 규나는 소파에 기대 앉아 잡지를 넘기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진후가 들어오자, 규나의 눈이 반짝 빛났다.“오빠? 웬일이야? 갑자기?”하지만 진후는 평소처럼 다정하게 안부를 묻지 않고 곧장 본론을 꺼냈다.“법원 조정기일 통지, 네가 봤지?”규나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 아주 짧은 사이였다. 이내 규나는 눈을 내리깔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무슨 통지?”진후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규나만 가만히 바라봤다.진후는 규나를 잘 알고 있었다. 오랫동안 자신의 손에 쥐고 아껴 온 사람이었다. 규나가 미간만 살짝 찌푸려도 어디가 불편한지 눈치챌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지금 규나의 표정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도 진후는 한눈에 알아봤다.몇 초 뒤, 규나는 더는 버티지 못하겠다는 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봤어.”규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가는 살짝 붉어져 있었지만, 울지는 않았다.“난 그냥 오빠가 그걸 안 봤으면 했어. 주예 언니는 너무 오빠 기분을 생각 안 하잖아.” “법원까지 가다니. 그건 오빠를 뭘로 보는 거고, 한씨 가문을 뭘로 보는 거야?”규나는 억울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게다가 그런 문자를 보고 오빠가 더 힘들어할까 봐 그랬어.”진후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그래도 네가 대신 결정하면 안 됐어.”규나는 곧바로 조용히 사과했다.“미안해.”규나는 몸을 조금 더 가까이 기울이면서 말투는 더없이 조심스러웠다.“난 그냥... 오빠를 너무 좋아해서 그랬어.”진후는 규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규나는 그대로 진후 품에 몸을 기대었다.“오빠는 이혼하고 싶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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