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끝, 후회는 사절입니다의 모든 챕터: 챕터 61 - 챕터 70

100 챕터

제61화

“젊은 사람들한테는 기회를 좀 더 줘야 한다고 봅니다. 문제가 생겼다고 곧바로 이혼부터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게다가 이런 가정 내 갈등이 공적인 사법부 자원을 지나치게 많이 쓰는 방향으로 가는 것도 저희로서는 바라지 않습니다.”판사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입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실질적인 이혼 유책 사유가 없다면...”판사가 입을 열었다.“저는 이걸 부부 사이 문제로 보는 쪽에 더 가깝습니다.”판사도 나름대로 많은 부부들을 봐 왔다. 요즘 젊은 여성들 가운데는 마음에 조금만 걸리는 일이 생겨도 곧장 이혼부터 입에 올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여겼다. ‘이 정도로 조정실까지 오는 부부가 한둘이던가?’‘이런 건 달래고 말리면 다시 붙는 경우도 많아.’ 판사가 지금까지 중재한 부부만 해도 적지 않았다.그 시점에서 이미 흐름은 거의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장연이 몇 차례 반박했지만, 번번이 가로막혔다.“상대방의 혼인 중 부정행위를 계속 주장하신다면, 그에 상응하는 직접적인 증거를 더 가져 오셔야 합니다.” “아니면 아이와 관련해 친자 관계를 입증할 수 있는 DNA 자료라도 제출하셔야 하고요.”끝내 판사가 결론을 내렸다.“이번 조정 결과는 이혼 불성립입니다.”장연의 표정이 바로 굳어졌다.이런 상황을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유난히 속이 답답했다.반면 주예는 의외로 담담했다. 결과가 나오자, 오히려 주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주예는 장연을 탓할 생각이 없었다. 한씨 가문 정도 되는 집안이라면 데려올 수 있는 변호사 역시 평범할 리 없었다. 주예는 상대 쪽에서 선물 내역과 계좌이체 기록을 하나씩 꺼내 놓는 걸 보며 속이 울렁거렸다.‘저런 것도 책임을 다한 거라고 말할 수 있나?’주예의 머릿속에 몇몇 장면들이 차례로 스쳤다.주예에게는 귀를 뚫지 않았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건넸던 귀걸이.비 오는 밤, 주예를 길에 남겨 두고 돌아선 뒤 미안하다는 뜻으로 보냈던 택시비.그런 것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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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화

주예는 성아가 자기 일 때문에 더는 위험을 떠안게 하고 싶지 않았다. 성아는 이미 주예를 위해 할 수 있는 만큼, 실은 그 이상을 해주고 있었다.주예가 성아를 말리는 걸 보자마자, 진후는 기다렸다는 듯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여보, 이제 그만 나하고 집에 가자.”방금 조정에서 한발 유리한 쪽으로 기운 탓인지, 진후의 기분은 제법 괜찮아 보였다. 말투에는 주예가 너무도 익숙하게 알아보는, 자신의 뜻이 곧 정답이라고 믿는 독선이 묻어 있었다.“규나가 아이만 낳으면, 그쪽은 내가 알아서 정리할게. 그러니까 그 다음에는 우리도 다시 제대로 살아 보면 되잖아.”진후는 잠시 말을 끊었다. 마치 이 정도면 엄청난 양보라도 한 것처럼 굴었다.“내가 그동안 당신을 좀 소홀히 대한 건 인정해. 그래도 한씨 가문 안주인 자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 거였어. 그건 안 바뀌어.”“당신이 그런 걸 신경 쓰는 것도 알아. 내가 전에 당신한테 말을 안 한 건, 규나가 괜한 말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고.”진후는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그러니까 이 일은 여기서 끝난 걸로 하자. 그리고 규나 아이 문제는 당신이 좀 입을 다물고 있어 줘.”주예는 진후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이 상황이 너무 어처구니없어서 헛웃음조차 나올 것 같았다. 주예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당신은 그렇게 확신해?”주예의 목소리는 차분했다.“당신이 말하는 그 강규나가 정말 아무 불만 없이 가만히 있을 거라고?”진후는 거의 망설이지 않았다.“규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걔는 상황을 파악할 줄 알고, 분수도 아는 사람이야. 오히려 그동안 계속 나한테 당신한테 가 보라고 했어.”그 말이 떨어지자 주예는 문득 웃었다.아주 짧고 가벼운 웃음이었다.주예는 눈앞에 선 남자를 보며 처음으로 아주 분명하게 느꼈다. 진후는 이제 낯선 사람에 가까웠다.일에서는 분명 뛰어났다. 계산도 빨랐고, 판단도 망설임이 없었다. 어디에 손을 대야 이익이 생기고 무엇을 먼저 잡아야 하는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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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화

짐을 정리하려던 참이었다.그때 핸드폰이 느닷없이 울렸다.성아였다.전화를 받자마자 성아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나와서 쇼핑하자! 너 요즘 너무 무리하잖아. 이러다 진짜 사람 잡겠어!]주예는 성아의 말을 듣는 동안, 하루 종일 팽팽하게 긴장해 있던 신경이 툭 풀리는 걸 느꼈다.입가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좋아.”백화점 안은 밝고 서늘한 조명으로 가득했다.명품 매장은 사람도 많지 않아 복도가 널찍했고, 오가는 발소리마저 또렷하게 들렸다.성아는 주예의 팔을 잡아 끌고 의류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입은 그 와중에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너 요즘 진짜 일에 미쳤어. 이러다가 너 도 닦으러 산에 들어가는 거 아닌가 싶다.”성아는 말을 내뱉으면서도 통 크게 손을 휙 저었다.“나 이번에 보너스 받았거든. 가자, 가서 옷 좀 보자. 우리 커플룩 맞추자. 오늘은 내가 쏜다!”그러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아는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주예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었다.성아의 걸음이 뚝 멈추더니, 표정이 차갑게 굳어지는 게 먼저 보였다.주예는 성아가 보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규나.규나 혼자였다.헐렁한 아이보리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배는 이미 살짝 불러 있었다.걸을 때마다 규나는 한 손으로 배를 감싸듯 받치고 있었다.부드럽고도 위태로운 모습이었다.규나는 이쪽저쪽을 둘러보면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그때 규나가 주예를 발견했다.규나의 입술 끝이 천천히 휘어졌다.“어머.”규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목소리에는 묘한 뉘앙스가 실려 있었다.“주예 언니, 참 우연이네요.”늘 일부러 약한 척 내보이던 여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규나한테서는 밀어붙이는 기세와 건방진 태도만이 또렷하게 드러났다.그게 진짜 규나의 모습이었다.주예의 발걸음이 잠시 멎었다.‘피해서 지나가자.’본능처럼 그런 생각이 스쳤다.하지만 주예가 몸을 틀기도 전에 규나가 한 걸음 옆으로 움직였다.딱 알맞게 길을 막아서는 자리였다.“요즘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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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화

“네가 뭔데 감히 나를 쳐?”규나가 거의 비명을 내지르듯 소리쳤다.“우리 오빠도 나 안 때렸어!”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규나가 그대로 달려들었다.동작은 빠르고 거칠었다.뱃속에 아이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사람처럼, 규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성아와 뒤엉켜 들었다.매장 안은 단숨에 아수라장이 됐다.주예가 곧바로 앞으로 나섰다.목소리에는 다급함이 그대로 묻어났다.“성아야, 강규나 건드리지 마! 강규나 임신했어!”주예가 막아서는 손길에는 분명한 조심스러움이 배어 있었다.규나의 배를 스치지 않으려는 듯, 주예는 일부러 손을 비껴서 뻗고 몸도 조심스럽게 움직였다.그 조심스러움을 규나는 놓치지 않았다.규나의 시선이 재빨리 사방을 훑었다.곧 규나의 눈이 멀지 않은 곳의 대리석 테이블 모서리에 멈췄다.아주 짧은 시간이었다.곧바로 규나의 몸이 뒤로 크게 흔들렸다.마치 누군가에게 밀려 중심을 잃은 사람처럼.“아악!!!”날카로운 비명이 터졌다.규나는 균형을 잃은 채 뒤로 넘어가는 듯 보였다.그런데 쓰러지는 와중에 몸이 기막히게 한쪽으로 틀어지면서, 그대로 주예의 손목을 세게 들이받았다.주예는 규나가 넘어지는 걸 보자, 반사적으로 규나를 받으려고 했다.‘안 받아 주면 위험해.’생각은 그 하나뿐이었다.하지만 규나의 몸이 그대로 쓰러지면서 주예의 오른손을 꼼짝 못하게 짓눌렀다.주예의 손목 뒤쪽이 대리석 테이블 모서리에 세차게 부딪혔다.퍽!둔탁한 소리가 울렸다.주예는 누군가 망치로 손목을 후려친 듯한 고통을 느꼈다.뼈를 파고드는 통증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서, 손끝의 감각이 바로 흐려졌다.팔 전체가 떨려 왔다.주예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오른손을 봤다.오른손은 이미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그 사이 규나는 바닥에 웅크린 채 몸을 말고 있었다.규나의 안색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곧바로 눈물도 쏟아졌다.“너무 아파... 배가... 배가 아파...”현장은 완전히 뒤집혔다.놀란 직원이 비명을 삼키듯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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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화

구급차가 멀어질 때까지도 성아는 잇따라 터진 일들에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린 성아의 시선이 주예에게 닿았다.성아가 흠칫 숨을 들이셨다.“주예야... 네 손!”성아는 다급하게 주예를 부축했다.목소리도 잔뜩 굳어 있었다.“가자. 우리 병원으로 가자.”주예와 성아는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으로 향했다.택시가 출발하자마자 성아는 더는 참지 못했다.다급함과 분노가 한꺼번에 뒤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미쳤어? 왜 강규나를 받으려고 했어? 그런 독한 년이 넘어지면 넘어지는 거지, 차라리 유산이라도 했어야지!”주예는 좌석에 기대어 있었다.이마에는 식은땀이 가득 맺혀 있었고, 오른손은 자꾸 저릿하게 감각이 흐려졌다.주예는 몇 번이나 거칠게 숨을 내쉬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강규나한테 진짜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 둘 다 엮여.”성아가 멈칫했다.주예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아까 규나 쪽으로 몸을 던지던 때, 주예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만 떠올라 있었다.‘성아까지 끌려 들어가면 안 돼.’하지만 그 말을 꺼내면 성아는 더 괴로워할 게 뻔했다.주예는 한 박자 늦게 덧붙였다.“게다가 나는... 아이한테까지 그럴 생각은 없어.”...병원 안은 사람들로 붐볐다.의사는 주예의 손을 살펴본 뒤, 미간을 깊게 좁혔다.“상태가 꽤 안 좋습니다. 금이 갔을 가능성도 있고, 골절까지 의심돼요. 우선 엑스레이부터 찍으셔야 합니다.”주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수납을 마친 주예는 영상의학과로 향하려고 했다.그런데 복도 모퉁이를 도는 길에 진후와 마주쳤다.산부인과 쪽에서 온 듯한 진후의 표정은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여기까지 따라와 놓고도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밀어?”말이 떨어지자마자 진후가 손을 뻗었다.진후의 손이 주예의 오른쪽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예고도 없이 통증이 터졌다.주예의 눈앞이 아찔하게 흐려졌다.신음소리가 새어 나오면서, 주예의 몸은 그대로 휘청거렸다.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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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화

영상이 재생됐을 때, 카메라의 각도는 좋지 않았다.주예와 성아, 규나가 서로 뒤엉켜 있어서 세세한 움직임은 선명하게 잡히지 않았다.그래도 다행인 점은 있었다.규나가 넘어지던 때, CCTV에는 주예가 먼저 손을 뻗어 규나를 받으려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그 한 장면만으로도 충분했다.적어도 주예가 일부러 해를 가하려 했던 게 아니라, 오히려 규나를 도우려 했다는 사실은 입증할 수 있었다.규나의 안색이 확 달라졌다.규나는 이내 말을 바꿨다. 배를 감싸 쥔 채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저... 저는 진짜 누가 저를 밀었다고 느꼈어요. 그때 너무 정신이 없어서 어쩌면 다른 여자가 민 걸 수도 있어요.” “지금 배가 너무 아파요. 아이가 잘못될까 봐 너무 무서워요.”규나가 말한 다른 여자라는 건 당연히 성아를 뜻했다.주예는 규나가 핑계를 더 늘어놓을 틈을 주지 않았다.“아이한테 진짜 문제가 있으면 그건 따로 사건 접수해서 조사하면 돼. 고의 상해로 가도 되고.”주예의 목소리는 차갑고 또렷했다.“하지만 검사 결과 아이가 멀쩡하면, 그건 무고야.”주예는 경찰을 바라보며 태도에는 흔들림이 없었다.“마침 경찰도 여기 계시니까, 이번 기회에 다 분명하게 정리하는 게 좋겠어. 애매하게 넘어가는 건 나는 절대 못 받아들여.”경찰은 주예를 힐끗 본 뒤,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규나의 기색을 다시 훑었다.이내 사람들의 관계가 적힌 기록까지 내려다본 경찰의 마음속에는 대강의 판단이 서기 시작했다.“무고는 책임이 따릅니다.”경찰이 짧게 경고했다.그 뒤 경찰은 의사를 찾아가 사실관계를 확인했다.결론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태아 상태는 양호했다.규나의 몸에도 부딪힌 흔적이나 외상은 따로 없었다.진후는 그 자리에 선 채로 상황이 뒤집히는 흐름을 지켜봤다.진후의 표정은 조금씩 굳어 갔다.‘설마... 아까 그 넘어진 게 규나가 일부러 그런 거였어?’그 생각이 떠오르자, 진후는 곧바로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그럴 리 없어.’진후는 믿을 수 없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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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화

말을 하는 동안에도 규나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당장 정신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로운 모습이었다.끝내 진후가 한숨 섞인 기색으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돈 좀 보내 줄게. 그걸로 보상하면 안 돼? 집도 한 채 더 해 줄 테니까, 사과는 빼면 안 될까?”주예는 입금 알림에 찍힌 아홉 자리 숫자를 확인했다.‘이 정도면 됐어.’주예는 더 끌지 않았다.“그래. 그것도 괜찮겠네.”일은 그렇게 마무리됐다.병원 밖으로 나섰을 때, 밤바람이 차갑게 스며들었다.주예의 오른손에는 깁스를 하고 있었지만, 이상하리만큼 정신은 또렷했다.오히려 전보다 더 맑아진 기분마저 들었다.성아가 주예를 보며 물었다.“왜 진짜로 강규나를 고소 안 했어?”주예는 담담하게 답했다.“고소해도 꼭 성립된다는 보장은 없어. CCTV만으로는 애매해. 잘해야 쌍방 폭행으로 끝날 수도 있어.” “나는 그냥 겁만 주려고 한 거야. 근데 강규나가 그렇게까지 겁먹을 줄은 몰랐지.”성아는 주예를 꼭 끌어안았다.목소리에는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짙게 묻어 있었다.“이번엔 내가 너까지 끌어들여서 괜히 고생만 시켰네.”주예는 성아의 어깨에 잠깐 기대었다.‘고생이야 했지.’‘그래도 성아 때문은 아니야.’...한편 규나는 진후의 품에 기대어 있었다.고개는 푹 숙인 채였고, 눈가도 붉게 젖어 있었다.입은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규나는 자신이 졌다고 느꼈다. 일이 이렇게까지 커진 바람에 진후 앞에서 쌓아 온 자신의 이미지도 흔들렸고, 주예에게 공연히 집 한 채까지 안겨준 꼴이 됐다.주예에게 보낸 몇억 원쯤이야 진후 같은 집안에서는 큰돈도 아니었다.그래도 진후가 자기 때문에 주예에게 저자세로 보상 얘기를 꺼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규나는 속이 뒤틀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왠지 가슴이 뜨거워졌다.‘결국 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했어.’돈도 많고 잘생긴 데다가, 자기한테 깊이 빠져 있는 남자.자기를 위해 이만큼까지 해 주는 남자였다.하지만 축 처진 속눈썹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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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화

진후는 예쁜이와 모래놀이를 했다.예쁜이와 함께 연못의 물고기에게 먹이를 줬고, 그네도 밀어줬다.진후는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누군가와 함께하는 일, 누군가에게 필요하다는 감각이 어떤 건지.그렇게 둘은 꼬박 이 년을 함께 보냈다.그러다 어느 날, 예쁜이가 갑자기 사라졌다.겁이 난 진후가 부모에게 달려가 물었다.부모는 옆집 강 씨 부부 가족이 이미 이사를 갔다고 말했다.그날 밤, 진후는 태어나 처음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침대 위를 몇 번이고 뒤척이는 내내, 머릿속에는 늘 웃으면서 자기를 향해 ‘잘생긴 오빠’라고 부르던 어린 여자아이뿐이었다.진후와 예쁜이 사이에는 좋은 기억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한 번은 진후가 몰래 예쁜이를 데리고 자전거를 탔다.그건 진후가 처음으로 괜한 객기를 부린 일이었다.결국 코너를 돌다가 속도를 제대로 잡지 못했고, 예쁜이의 발이 바퀴 사이에 말려 들어갔다.단숨에 피가 배어 나왔다.진후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혼날까 봐 무서웠다.어른들이 알게 될까 봐도 무서웠다.앞으로는 예쁜이를 다시 데리고 나와 놀 수 없게 될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진후는 쪼그려 앉아 예쁜이의 신발을 다시 신겨 줬다.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있잖아, 조금 있다가 누가 와도 절대 울면 안 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해야 해. 들키면 나 이제 너 데리고 못 나와.”그때 예쁜이는 아주 작았다.많이 아팠다.아파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눈에는 눈물이 가득 맺혀 있었다.그래도 예쁜이는 입술을 꾹 깨문 채 참아 냈다.예쁜이는 진후를 올려다보며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정말로 예쁜이는 울지 않았다.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나중에 가사도우미가 결국 예쁜이의 발에 난 상처를 발견했다.다행히 뼈까지 다친 건 아니었다.대신 발바닥에는 흉터가 남았다.그 흉터를 진후는 평생 잊지 못했다.예쁜이도 그 비밀을 평생 지켰다.예쁜이는 끝내 진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어릴 적 의리는 평생 마음속에 남는 법이다.진후가 예쁜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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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화

“앉아. 내가 좀 볼게.”진후의 말투는 부드러웠다.“겸사겸사 병원 슬리퍼로 갈아 신겨 줄게.”진후는 몸을 낮춰 쪼그려 앉았다.규나의 신발을 직접 벗겨 주었다.드러난 발은 하얗고 작았다.군더더기 하나 없이 깨끗했고, 어떤 작은 흔적도 없었다.흉터는 없었다.규나는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발목을 쥐고 있는 진후를 내려다봤다.규나의 얼굴에는 수줍은 기색이 살짝 번졌다.규나가 수줍은 듯이 말했다.“이러지 마. 사람들 있잖아.”진후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진후는 아무렇지도 않게 규나의 신발을 다시 신겨 줬다.손길도 자연스러워서, 그 안에 어떤 미세한 흔들림이 숨어 있는지 겉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그 뒤 진후가 아무 뜻 없이 꺼낸 말처럼 툭 던졌다.“사실 흉터가 남아도 아주 큰일은 아니지. 요즘은 기술이 좋아서 흉터 복원하면 거의 티도 안 난다더라.” “다만 과정이 꽤 아프다고 들었어. 나는 네가 그런 고생은 안 했으면 해.”규나는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말투는 가벼웠다.“그래도 원래 피부가 제일 좋지. 나는 흉터 수술 같은 건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 앞으로도 그럴 일이 없었으면 좋겠고.”규나의 마음속에는 은근한 만족감이 솟아났다.‘역시 진후 오빠는 나한테 흔들려.’‘오늘은 더 그래. 아까 내가 쓰러질 뻔한 거 보고 놀랐겠지.’하지만 규나가 볼 수 없는 쪽에서 진후의 눈빛은 서서히 식어 가고 있었다.진후는 아무렇지 않은 말투를 유지한 채 다른 뜻을 숨겨 둔 질문을 꺼냈다.“규나야, 우리 어릴 때 집이 꽤 가까웠잖아. 내가 기억하기로는, 네가 제일 좋아하던 백합도 우리 두 집 빌라 사이에 심어져 있었는데.”규나는 어릴 때 백합을 좋아한 적이 없었다.빌라 단지 사이에 백합이 심어져 있던 적도 없었다.규나의 기색이 잠깐 굳어졌지만 거의 곧바로 반응했다.표정은 금세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으로 바뀌었다.정말 기억을 더듬는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했다.“기억이 안 나.”규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목소리에는 어쩔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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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화

“그쪽 좀 확인해 줘. 20년 전쯤에 우리 집 옆에 있던 집들, 그때 누가 살았는지. 특히 거기 어린애가 같이 살았던 적이 있는지도.”같은 날 밤이었다.아무 예고도 없이 새로운 실시간 검색어가 순위 맨 위로 치고 올라왔다.[해신그룹 후계자 한진후 대표, 의문의 여성과 또다시 밀회]뒤이어 비슷한 제목들이 줄줄이 순위권을 점령했다.[해신그룹 후계자 외도 의혹... 내연녀가 이미 출산까지?][재벌가 비밀 드러나나... 본처는 조용히 참고, 내연녀는 당당히 자리 차지][한진후 대표 부부, 사실상 끝난 결혼 생활?]첨부된 사진은 흐릿했다.그런데도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구석이 있었다.병실 앞에 선 남녀의 실루엣.고개를 맞댄 채 이야기를 나누는 옆모습.서로 기댄 채 안고 있는 듯한 자세.의도적으로 동그라미까지 쳐 둔 불룩한 배.사실과 억측이 뒤엉켜 있었지만, 제목은 하나같이 더 자극적이었다.누리꾼들은 순식간에 몰려들었다.구경하는 사람, 편을 가르는 사람, 제멋대로 이야기를 지어내는 사람, 음모론을 꺼내 드는 사람까지.열기는 가파르게 치솟았다.거기에 누군가는 한 달 전 묻혀 버렸던 기사까지 다시 끌어왔다.[해신그룹 후계자 한진후 대표, 심야 공항 포착... 백합 한아름 안고 의문의 여성 마중]사진은 그날 밤 몰래 찍힌 영상 캡처였다.공항의 조명은 흐릿하게 내려앉아 있었고, 남자의 옆모습은 차갑고 날카로웠다.여자의 모습은 흐릿해서 분간하기 어려웠다.원래 이런 식의 애매한 재벌가 소문쯤은 누리꾼들도 이제 놀라워하지 않았다.그런데 예전 기사가 다시 소환되어 지금 사진과 나란히 놓이자, 분위기가 달라졌다.‘이건 그냥 지나갈 일이 아닌데?’그런 반응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여기에 이른바 ‘관계자 제보’까지 덧붙었다.시간, 장소, 인물 관계를 조목조목 늘어놓은 내용이었다.마치 바로 옆에서 전부 지켜본 사람처럼 적혀 있었다.댓글창은 그대로 뒤집혔다.[이거 전에 돌던 그 ‘첫사랑’ 아니야?][재벌가는 진짜 별일이 다 있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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