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결혼 끝, 후회는 사절입니다: Chapter 51 - Chapter 60

100 Chapters

제51화

화면이 켜졌다.「Lonely Me」였다.고홍근의 시선이 화면 위에 멎었다.처음에는 그저 가볍게 훑어보는 눈길이었지만 그 여유는 오래가지 않았다.고홍근은 상체를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손에 들고 있던 찻잔도 옆으로 내려놓으면서 눈빛이 서서히 깊어졌다.식탁 위로 짧은 정적이 내려앉았다.잠시 시간이 흐른 뒤, 고홍근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좋구나.”곧이어 고홍근이 고개를 들어 주예를 바라봤다. 아까보다 눈이 훨씬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좋은 그림이야.”고홍근은 화면 한쪽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말투에는 드물게 무게가 실려 있었다.“여기 명암이 아주 유연하게 움직이는구나. 이런 처리는 시간이 쌓여야 나오는 법인데, 네 나이에서 나올 만한 솜씨가 아니야.”고홍근은 감탄을 덧붙였다.“참 무섭다니까. 젊은 사람이 이 정도면.”주예는 그저 조용히 답했다.“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주예는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이 그림이 칠 년 전에 그린 작품이라는 사실을. 그때의 주예는 지금보다 손끝이 아직 조금 덜 여물어 있었다.고홍근은 맞은편에 앉은 정재에게 핸드폰을 돌리며 웃었다.“정재야, 너도 한번 봐라.”핸드폰 화면에 시선이 닿자, 정재는 잠시 숨을 들이마실 수밖에 없었다.그 그림에 밴 고독은 정재가 오래전부터 애써 덮어 둔 한 시절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가슴 안쪽이 뭔가에 부딪힌 듯 가볍게 울렸다. 정재는 차마 오래 들여다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한마디만 남겼다.“잘 그렸네.”‘이 그림을 아직도 가지고 있었구나.’정재는 속으로만 그렇게 중얼거렸다.고홍근은 주예를 향해 더 칭찬을 건넸다. 이어서 더 길게 말을 잇지 않고 웃으면서 사람들을 챙겼다.“자, 일단 밥부터 먹자. 이 국은 오랫동안 푹 고아서 내온 건데, 딱 먹기 좋게 잘 나왔어. 임 선생도 많이 먹어.”식사가 끝나자 고홍근은 피곤한 기색을 보였다. 고홍근은 먼저 방으로 들어가 쉬겠다며 자리를 떴고, 정재에게 주예를 바래다주라고 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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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화

그 말이 제대로 정재의 가슴을 찔렀다.정재는 불쑥 손을 뻗어 주예의 손목을 붙잡았다. 주예의 피부는 차가웠지만, 정재의 손바닥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바짝 좁혀졌다. 주예는 정재의 눈 안에 흔들리는 감정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그 아래에 깔린, 더 깊고 복잡한 뭔가도 어렴풋이 읽을 수 있었다. 숨결도 가까워졌다. 서로의 체온이 밴 호흡이 뒤섞이면서 흐트러졌다.“그 사람이 너한테 그렇게 굴어도 넌 다 받아주잖아.”정재가 고개를 숙였다. 남자의 숨이 주예의 귓바퀴를 스치듯 닿았다.“나는 고작 한마디 했을 뿐인데, 넌 그걸 7년이나 붙들고 있었어. 임주예, 그 사람을 그렇게까지 좋아해?”주예의 몸이 움찔 떨렸다. 손목을 빼내려고 했지만, 정재의 손은 더 단단히 조여 왔다.정재에게서 풍기는 서늘한 기운이 주예를 감쌌다. 밤바람까지 뒤엉키자 주예의 속은 더욱 어지러워졌다.지금 주예의 머릿속에는 눈앞의 정재와 손목에 남은 뜨거운 감각밖에 없었다.다시 마주한 뒤로 이렇게 가까이서 정재의 얼굴을 들여다본 건 처음이었다.7년 전,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있던 얼굴과는 달랐다. 지금의 정재에게는 성숙한 남자만이 풍기는 압박감이 서려 있었다.그런데도 정재의 얼굴은 여전히 치명적일 정도로 사기 캐릭터였다.주예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20년 전, 처음 정재를 봤을 때도 결국 이 얼굴에 홀려 버렸다는 걸. 정재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잘생긴 오빠’라고 부르던 날들이 있었다.주예는 고개를 돌렸다. 심장이 멋대로 뛰고 있었지만, 목소리만큼은 차분한 척 가까스로 평정을 유지했다.“심 회장, 지금 많이 취한 모양이네.”그 말을 입 밖에 내뱉자마자 주예는 속으로 자신을 세게 나무랐다. ‘미쳤나 봐? 오늘 마신 건 차였어!’ 술기운을 핑계로 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정재는 그 말이 이상하다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정재의 엄지가 주예의 턱선을 천천히 쓸었다. 손길에는 밀어붙이는 강한 힘이 실려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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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화

엄소연은 심사위원석 반대편에 앉아 있었다. 표정은 고요했다. 마치 이 모든 일과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하지만 이틀 전, 하늘이 먼저 소연에게 연락해 왔다.처음에 소연은 하늘이 심사를 좀 잘 봐 달라는 뜻으로 연락한 줄 알았다. 그런 부탁은 소연에게 낯설지 않았다.소연이 바닥에서부터 여기까지 올라와 이 심사위원 자리에 앉기까지, 작품만으로 버텨 온 것은 아니었다. 사람을 읽을 줄도 알았고, 인맥을 쌓는 법도 알았다. 규정이 허용하는 아슬아슬한 경계 안에서 자기에게 필요한 자원을 어떻게 바꿔 가져와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그런데 하늘은 애초에 그럴 필요가 없는 쪽이었다. 하늘은 이 바닥에서 이미 이름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고, 재능도 있었다. 게다가 고씨 가문 사람이라는 배경까지 갖고 있었다. 굳이 누가 손을 써 주지 않아도 충분히 올라갈 수 있는 위치였다. 그래서 하늘이 먼저 연락해 온 일은 소연에게도 뜻밖이었다.그러다 하늘이 진짜 용건을 꺼냈다.하늘이 원하는 건 점수를 봐주는 일이 아니었다.하늘은 한 사람을 떨어뜨리고 싶어 했다.“그건 좀 어렵습니다.”그때 소연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심사위원이 여섯 분이에요. 작품이 정말 좋으면 제가 혼자 점수를 낮게 줘도 너무 티가 나고요. 애초에 여섯 명이 같이 보는 구조라, 저 혼자 최종 결과를 바꿀 수도 없어요.”그러자 하늘은 그저 가볍게 웃었다.[그럼 심사위원들이 애초에 그 사람 실력을 알아볼 수 없게 되면요?]그 말에 소연은 곧바로 하늘의 뜻을 알아들었다.‘아, 이런 식으로 가겠다는 거구나.’그 뒤로 소연은 원래 첨부돼 있던 파일을 몰래 바꿨다. 지금 심사장 스크린에 떠 있는, 저 흐릿하게 뭉개진 파일로 갈아 끼운 것이다.“참가자는 제출 파일의 화질까지 책임져야 합니다.”심사위원장 장준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기본적인 제출 상태조차 확인하지 못했다면, 그건 대회를 그만큼 가볍게 봤다는 뜻이기도 해요. 그런 태도라면 통과시키기 어렵습니다.”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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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화

주예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화면이 흐리다고?’말이 안 됐다.주예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림 파일을 업로드한 뒤, 혹시라도 화질에 문제가 있을까 싶어 제출본 전체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때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게다가 그때 올렸던 모든 파일은 지금도 주예의 컴퓨터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문제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확인만 해 보면 바로 알 수 있는 일이었다.[저한테 생각이 있어요.]주예가 답장을 보냈다.[무슨 수가 있겠어. 보통 이런 건 명단까지 발표되면 다시 뒤집히는 일 거의 없어.]종수의 다급함이 문자 너머로도 그대로 전해졌다.[선배님 마음 급하신 건 아는데, 일단 조금만 진정해 보세요.][제가 해볼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어요. 먼저 그쪽부터 확인해 볼게요.]주예는 곧장 컴퓨터를 켰다. 화면에서 폴더 하나를 열자, 대회 제출 당시 화면을 녹화해 둔 영상이 나왔다. 흔적을 남겨 두는 건 주예가 고서화 복원 일을 하며 몸에 익힌 습관이었다. 이번 대회 제출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주예는 녹화 영상과 관련 파일을 처음부터 다시 확인했다. 어디를 봐도 이상한 부분은 없었다. 그림 파일을 직접 열어 보자, 눈앞에 나타난 건 선명한 원본 이미지였다. 화면 위에 퍼진 잿빛 안개까지 또렷하게 보일 정도였다.주예는 다시 미술콩쿠르 조직위원회 앞으로 메일을 작성했다.관련 증빙 자료도 빠짐없이 첨부했다.같은 시각, 미술콩쿠르 조직위원회 소속 기술 담당자 민수는 일상적인 데이터 백업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때 메일 알림이 새로 떴다. 발신인은 임주예였다.제목에 적힌 ‘시스템 기술 재검토 요청’이라는 문구를 보는 순간, 민수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바로 세웠다. 이 정도 규모의 대회에서는 시스템 기술이 모든 절차의 바탕이었다. 그런 만큼 기술 관련 문제는 가장 민감한 사안이기도 했다.민수는 곧장 메일을 열었다. 본문부터 첨부 파일까지 하나하나 꼼꼼히 확인해 내려갔다. 끝까지 다 읽고 나자, 민수는 서서히 미간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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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화

김민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몇 초쯤 지난 후, 김민이 뭔가를 떠올린 사람처럼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생각났습니다! 그때 저는 제 자리에 없었습니다.”“왜 자리에 없었는데?”장준이 곧바로 되물었다.“소연 작가님이 커피를 좀 사다 달라고 하셔서요.”김민이 다급하게 설명했다.“제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잖아요. 거절하기도 애매해서 바로 아래로 내려갔습니다.”소연 작가님이라면 한 사람뿐이다.바로 엄소연이었다.장준의 눈매가 단단해졌다.“증거는 있어?”“있습니다! 있어요!”김민은 허둥지둥 핸드폰을 꺼냈다.“이거 보시면 됩니다. 결제한 주문 내역이에요. 시간도 찍혀 있습니다. 3시 10분입니다.”그제야 장준은 김민의 말을 어느 정도 믿을 수 있게 됐다.그때 옆에 있던 민수가 뭔가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그런데 김민 씨, 자리를 비우기 전에 화면 잠금은 했습니까? 계정 로그아웃은 했나요?”그 말을 듣는 즉시 김민의 안색이 더 하얗게 질렸다.김민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자, 잘 기억은 안 납니다. 아마 안 했을 겁니다.”김민은 원래 덤벙대는 편이었다. 화면 잠금 같은 건 사소한 일이라고 넘기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런 사소함 때문에 이런 일이 터졌다는 생각이 들자 속이 뒤집혔다. ‘왜 그때 그냥 로그아웃을 안 했지. 왜 그런 걸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까...’ 김민은 당장이라도 울고 싶을 만큼 후회스러웠다.그 무렵.소연은 지방에서 열리는 한 예술 포럼에 참석 중이었다.쉬는 시간이 되자 소연은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 앞에 섰다. 소연은 차분한 표정으로 립스틱을 다시 발랐다.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이 진동했다.발신 표시를 확인하는 그때, 소연의 가슴 한쪽이 서늘하게 조여 들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고개를 들었다.전화를 받자마자 장준 쪽에서 용건을 꺼냈다.[작가님 안녕하세요. 전국미술콩쿠르 조직위원회입니다. 저희 쪽에서 내부 운영 인턴 한 명이 특정 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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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화

조직위원회는 긴급회의를 열고 주예의 작품에 대한 심사를 다시 진행했다.이번에는 선명한 원본 파일을 기준으로 한 재심이었다.화면이 뜨자, 동시에 심사석은 다시 조용해졌다.“세상에...”누군가 숨을 삼키듯 말했다.“이건... 정말 대단하네요.”그림 전체에는 탁하고 어두운 색조가 넓게 깔려 있었다. 보는 사람을 짓누르는 듯한 답답함이 정면으로 밀려왔고, 화면에 밴 감정은 짙고 선명했다. 그냥 우울한 그림이라고 넘길 수 없는 힘이 있었다.화면 왼쪽 위에는 붉은색이 아주 살짝 얹혀 있었다. 튀지 않으면서도 묘하게 시선을 붙드는 색이었다. 그 윤곽은 사람의 형체 같기도 했고, 꺼지지 않는 불꽃 같기도 했다. 거기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는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읽을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정적이 잠시 동안 더 이어졌다.이윽고 한 심사위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기술이 아주 탄탄합니다. 감정 표현도 정확하고, 자기만의 화풍도 분명하네요.”다른 심사위원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구도도 좋고 완성도도 높습니다. 이 신인은 분명히 가능성이 있어요. 저는 아주 크다고 봅니다.”곧 다른 쪽에서도 말이 나왔다.“저 붉은색 점이 그림을 살렸네요. 저게 없었으면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겁니다.”짧게 의견을 주고받은 뒤, 결론은 거의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통과에 동의합니다.”“저도 동의합니다.”“...”재심이 끝난 뒤, 공식 홈페이지에는 곧바로 수정된 명단이 올라왔다. 새로 추가된 진출자가 왜 생겼는지에 대한 설명도 함께 공지됐다. 규정을 어긴 인턴 김민에 대한 징계 내용 역시 같이 공개됐다.첫 번째 명단이 발표된 뒤부터 하늘은 계속 그 결과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늘은 먼저 명단을 자기 계정으로 옮겨 올리며, 은근하게 자신이 통과했다는 걸 내비쳤다. 그런 뒤 자기 게시물 아래에 달리는 반응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언니 너무 예뻐요.][재능도 있고 비주얼도 있다는 말은, 딱 이런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이네요.][분위기가 진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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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화

통화가 끝났다.명단이 수정됐다는 사실은 곧바로 온라인에서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왔다.[한 번 발표한 진출자 명단을 또 바꾼다고?][이 임주예라는 사람 누구임?][조직위가 이렇게까지 예외를 둘 정도면 배경이 보통은 아닌 듯.][...]징계 결과를 눈여겨본 사람들도 있었다.[또 인턴만 뒤집어쓰는 거냐? 인턴이 뭘 그렇게 대단한 걸 했다고.][...]여론의 화살은 빠르게 주예 쪽으로 향했다. 주예가 뒷문으로 올라간 것 아니냐는 말들이 이어졌다. 거기에는 누군가 의도적으로 불씨를 키운 흔적도 분명히 섞여 있었다.논란이 가장 뜨겁게 달아올랐을 때, 전국미술콩쿠르 공식 계정에서 곧바로 이미지 한 장을 올렸다.주예의 출품작, 「Lonely Me」였다.고화질 원본 이미지였다.그 그림이 올라오자 댓글창은 잠시 숨을 죽인 듯 조용해졌다.곧이어 반응은 눈에 띄게 바뀌었다.[미알못이긴 한데... 이건 진짜 좀 대단해 보이는데?][저요 저요, 미대생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제 교수님보다 더 잘 그린 것 같아요. 방금 쓴 댓글 취소합니다. 고수님께 사과드릴게요.][이 정도로 그리는데 굳이 뒷문을 쓸 이유가 있나?][...]하늘은 그 그림을 보는 내내 마치 정면에서 얼굴을 강타당한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림의 구도도 탄탄했고, 기교도 부족함이 없었다. 감정도 정확하게 살아 있었다. 실은 그런 정도로는 표현이 부족했고,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강렬했다. 저건 잔머리 굴린다고 나올 수 있는 그림이 아니었다.하늘은 화면을 가만히 노려봤다. 심장이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하늘은 애써 숨을 고르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내가 시간을 충분히 들이기만 하면, 저 정도를 아예 못 그릴 것도 없어.’하늘은 곧 다른 쪽으로 생각을 틀었다. ‘임주예가 누군가의 손을 빌렸을 수도 있어.’ 어차피 아직은 1차 예선 단계였다. 이쯤에서 슬쩍 넘어가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더구나 2차부터는 카메라가 켜진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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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화

진후가 아는 주예는 화실 같은 곳에서 일하긴 했지만, 지난번 순회 전시에서 마주쳤을 때만 해도 분명 행정이나 외부 응대 같은 일을 맡고 있었다.진후가 아는 주예의 손에는 늘 탕이나 향이 들려 있었다. 진후는 한 번도 주예가 붓을 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그러니 더더욱 저런 무대 위에 서 있을 리가 없었다.그래서 진후는 금세 화면을 넘겨 버렸다. 마음 한구석에 꺼림칙한 느낌이 남았지만 그저 우연이라고 치부했다.진후는 문득 깨달았다.그러고 보니 주예를 본 지도 꽤 오래됐다는 사실을. 자신이 주예와 제대로 말을 나눈 지도 한참 전이었다.진후는 무심코 주예와의 대화창을 열었다.맨 위에 떠 있는 마지막 메시지는 아직도 일주일 전 그대로였다.[할머니 편찮으셔. 본가로 와.]그 아래로는 아무 답도 없었다.진후는 그 메시지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그제서야 뒤늦게 실감이 났다.주예가 자기 삶에서 이렇게 오래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는 걸.“이모님, 요즘 주예 본 적 있으세요?”여주댁은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조심스럽게 답했다.“사모님께서 얼마 전에 한 번 들르신 것 같기는 합니다.”“들렀다고요?”진후의 목소리에 반가움이 묻어났다.“언제요?”“며칠 전입니다.”여주댁은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뭘 좀 가지러 오신 것 같았고요. 오래 안 계시고 금방 나가셨습니다.”주예는 실제로 한 번 집에 들른 적이 있었다.이사하느라 경황이 없던 때라 예전에 쓰던 오래된 USB 하나를 두고 갔었다. 그 안에는 초창기 복원 기록들이 저장돼 있었다.그날 여주댁이 걱정스러운 마음에 조심스레 물었다.“사모님, 이제 여기서는 안 사시는 겁니까?”현관에 서 있던 주예는 아주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저한테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않으셔도 돼요. 그동안 챙겨 주셔서 감사했고요.”그 말을 남긴 채 주예는 그대로 돌아섰다.여주댁은 그때도 차마 더 묻지 못했다. 다만 그 말이 어쩐지 심상치 않게 들려서 마음에 걸렸을 뿐이었다.그 기억을 떠올린 여주댁은 잠깐 망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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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화

[조정기일에 계속 나오지 않으면, 법원 절차에 따라 처리됩니다.]거의 같은 시각, 주예에게도 똑같은 안내가 도착했다.결국 진후는 해신그룹 법무팀 총괄 변호사인 조현에게 연락했다.두 사람이 마주 앉자마자, 진후는 첫마디부터 못을 박았다.“이 일은 절대 밖으로 새면 안 돼.”조현은 원래부터 입이 무겁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 말을 듣자, 조현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목소리도 신중해졌다.“알겠습니다.”해신그룹 후계자의 혼인 문제였다. 조현으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함부로 떠들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건 변호사로서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윤리이기도 했다.진후는 곧 한마디를 더 얹었다.“우리 어머니랑 할머니한테도 당분간은 숨겨.”조현은 아주 잠깐 머뭇거렸다.“그... 알겠습니다, 대표님.”이어서 진후는 주예가 내밀었던 이혼합의서를 조현에게 전달했다.조현은 서류를 빠르게 넘겼다.재산분할 조항, 이혼 유책 사유에 대한 정리, 증거 목록.조현의 시선이 몇몇 핵심 조항 위를 정확히 훑고 지나갔다.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조현은 서류를 덮은 뒤 진후를 바라봤다.“대표님, 사모님이 준비하신 이 서류는 상당히 치밀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도 오래전부터 준비해 오신 것 같습니다.” “특히 일부 증거는 외부에 드러난 적이 없는 자료들입니다.”진후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조현은 분위기를 살피고는 곧 화제를 돌렸다.“대표님의 가장 중요한 요구가 무엇인지 먼저 확인하겠습니다.”“난 이혼하면 안 돼.”진후는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조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다만 시간을 조금 주셔야 합니다. 우선 상대 측 변호사와 접촉해서 전체 구도를 확인해 보겠습니다.”반나절 정도 지난 뒤, 조현은 다시 진후 앞에 나타났다.이번에는 손에 정리된 자료 묶음이 한가득 들려 있었다.“대략적인 상황은 파악했습니다.”조현의 말투는 전보다 훨씬 더 조심스러워져 있었다.“지금 확보된 내용만 놓고 보면, 이번 조정은 저희 쪽에 상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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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화

“대표님 쪽에서 추가로 말씀해 주실 수 있는 내용이 더 있을까요? 혹시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은 사실이 있다면, 그게 변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진후는 한동안 더 침묵했다.침묵이 길게 이어졌다가 마침내 진후가 입을 열었다.“있어.”...제2차 조정기일은 예정대로 다가왔다.조정 당일.이번에는 성아가 끝까지 주예와 함께 가겠다고 고집했다. 진후 역시 드물게 늦지 않고 제 시간에 모습을 드러냈다.법원 복도의 조명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두 사람이 마주치자, 주변에는 왠지 팽팽한 긴장이 덧씌워졌다.진후의 시선이 주예에게 잠시 머무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당신이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면 아직 안 늦었어. 당신이 이혼 신청만 취하하면, 난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할 수 있어.”그 말투는 마치 자신이 한 번쯤 봐주는 사람처럼 여유를 부렸다.“여기까지 했으면 됐잖아. 돌아가서 차분히 얘기하면 돼. 꼭 여기까지 올 필요는 없었어.”성아는 옆에서 그 말을 듣다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성아는 진후를 위아래로 한번 훑어보더니, 대놓고 비꼬듯 말했다.“오늘은 또 왜 이래? 별일 다 보겠네. 한 대표가 웬일로 제시간에 다 오고.”성아의 시선이 진후의 뒤편을 스치더니 입꼬리가 비틀리듯 올라갔다.“게다가 내연녀도 안 데리고 왔네.”진후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그래도 진후는 더 받아치지 않았다. 굳이 말씨름할 필요가 없다는 듯 시선을 거두고 몸을 돌려 조정실 쪽으로 걸어갔다.조정이 시작됐다.장연은 처음부터 몰아붙였다.영상 자료, 정리된 시간표, 핵심 문서들까지.장연은 준비해 온 내용을 하나씩 꺼내 놓으며, 조정실 분위기를 단숨에 주예 쪽으로 끌고 갔다.주예 역시 자신이 왜 이혼을 원하는지, 또 이혼합의서에 담긴 재산 분배가 왜 타당한지 차근차근 설명했다.중년의 남성 판사는 말을 듣는 내내 몇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제출하신 내용이 사실이라면.”판사가 진후를 바라보며 말했다.“혼인관계가 상당히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로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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