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끝, 후회는 사절입니다의 모든 챕터: 챕터 71 - 챕터 80

100 챕터

제71화

잠시 말이 없던 진후가 결국 입을 열었다.“아이는 제 아이가 아닙니다.”규나가 ‘예쁜이’가 아니라면, 진후가 더 이상 규나를 대신 감싸 줄 이유도 없었다.전화기 너머가 갑자기 뚝 조용해졌다.잠시 뒤, 박효주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아까보다 더 다급해져 있었다.[아이가 네 아이가 아니면, 그 여자는 대체 누구야? 너는 또 왜 그 여자를 병원까지 데려다 준 거고?]진후의 목젖이 천천히 움직였다.“그 여자는... 강규나입니다.”전화기 너머는 다시 침묵에 잠겼다.그 침묵 안에는 여러 감정이 뒤엉켜 있었다.놀람도 있었고, 아쉬움도 있었다.쉽게 이름 붙이기 힘든 답답함도 스며 있었다.진후와 규나 사이에 예전에 일이 있었다는 건 다들 알고 있었다.두 집안이 가까웠던 시절, 어른들 사이에서는 얘기가 오가기도 했다.정말 혼인으로 이어져도 나쁘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다만 세상일은 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한참 뒤, 박효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목소리에는 피로와 실망이 더 짙게 묻어났다.[진후야, 엄마가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너 아직도 규나한테 마음이 남아 있니? 그 애는 이미 임신까지 했고, 그 아이도 네 아이가 아니야.][너는 이미 결혼한 몸이고. 그런데도 네가 그렇게까지 나서서 챙겨? 자기 아내는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면서.]박효주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대체 일이 왜 이렇게 된 거니?]권수영의 단호한 목소리가 바로 그 말을 끊었다.[그렇다면 오히려 더 쉬워졌구나. 여론부터 바로 눌러 버리면 돼.]권수영의 말투는 빠르지 않았다.그런데도 정리는 정확했다.이미 머릿속에 대응책을 세워 둔 사람의 태도였다.[지금 가서 아이가 네 아이가 아니라고 해명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 사람들은 안 믿는다.][괜히 더 수상하다고만 여기겠지. 없는 해명도 억지로 붙이는구나 싶어서 말이 더 커질 거다. 더구나 이런 일은 확실한 증거 없이는 먹히지도 않아.]잠시 말을 멈췄던 권수영이 다시 말을 이었다.[공항 사진도 말이 되게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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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화

주예가 자리에 앉자마자, 박효주의 시선이 곧장 주예의 오른손으로 향했다.“손은...”박효주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그건 또 어떻게 된 거니?”주예는 의자를 당겨 앉은 뒤 담담하게 답했다.“다쳤습니다. 실수로요.”주예는 그 이상은 설명하지 않았다.박효주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아랫사람을 타이르듯 하면서 다정한 척하는 웃음까지 곁들였다.“요즘 어떻게 지내니? 진후랑 좀 틀어진 거야?”주예는 대답하지 않았다.박효주는 그런 침묵쯤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부부 사이에 말다툼 한 번 없는 집이 어디 있니?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하잖아.”“식구끼리 무슨 안 좋은 감정을 밤을 넘겨서까지 끌고 가겠어. 엄마 말 들어. 진후한테 서운한 거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중간에서 바로잡아 줄게.”주예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시선은 조용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사모님, 오늘 저를 부르신 이유가 정확히 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그 말이 떨어지자 박효주는 잠깐 흠칫했다.눈앞의 주예는 박효주가 기억하던 며느리와는 조금 달라 보였다.늘 참고 물러서던 사람이라기보다, 자기 입장을 분명히 세우는 쪽에 가까웠다.박효주는 금세 표정을 정리했다.곧 한 번 더 한숨을 쉬며 목소리를 한층 부드럽게 낮췄다.“우리가 남도 아니고 한식구인데, 괜히 돌려 말할 것까진 없겠지.”박효주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켠 뒤, 주예 쪽으로 밀어 놓았다.“인터넷에 올라온 그 실시간 검색어, 너도 봤을 거 아니니? 지금 바깥이 저렇게 시끄러우면, 한씨 가문 입장에서는 타격이 클 수밖에 없어.”박효주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먼저 자기 아들 잘못을 인정하는 척 입을 열었다.“이번 일은 진후가 잘못한 게 맞아. 나도 이미 그 아이한테 단단히 말해 뒀어. 그리고 진후도 분명히 말했어. 그 아이는 자기 아이가 아니라고.”주예는 그 말을 다 듣고도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그래서요?”주예는 담백하게 반문했다.“그게 저랑 무슨 상관입니까?”박효주의 말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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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화

잠시 걸음을 옮기던 주예는 문득 떠오른 게 있는 듯 몸을 돌렸다.주예는 박효주를 향해 조용히 한마디를 덧붙였다.“아, 그리고 사모님.”주예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시간은 돈입니다. 오래 끌수록 한씨 가문 쪽 손해만 더 커지실 겁니다.”그 말을 끝으로 주예는 더 머무르지 않았다.곧장 몸을 돌려 카페 밖으로 걸어 나갔다.박효주는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표정은 금방이라도 폭우라도 쏟아져 내릴 듯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다음 날 오후, 주예는 박효주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네 조건은 받아들이겠다. 대신 이혼합의서 서명은 해신그룹 인수 합병이 끝난 뒤에 가능해.][그리고 이 일은 일단 진후한테 말하지 마.]주예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먼저 서명해 주시면, 그 다음에 제가 해명하겠습니다.]주예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이제 주예에게 말뿐인 약속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믿을 수 있는 건 서명이 들어간 문서뿐이었다.박효주는 핸드폰을 쥔 채 거실을 계속 오갔고 표정도 계속 바뀌었다.주예가 둔 수가 하나같이 박효주의 급한 곳만 골라 찌르고 있었다.‘정말 사람을 끝까지 몰아붙이네.’하지만 지금 퍼지고 있는 여론은... 하루만 더 늦어져도 한씨 가문 입장에선 그대로 피눈물을 흘리는 일이었다.박효주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결국 결심을 굳혔다.박효주는 먼저 조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이전에 진후와 주예 사이에서 이혼 이야기가 어디까지 오갔는지, 그 시작부터 흐름까지 전부 확인했다.이어서 앞으로 처리해야 할 일도 조현에게 하나하나 지시했다.속도를 내야 한다는 말도 여러 번 강조했다.절대 중간에 틀어지면 안 된다고 못을 박듯이 말했다.통화를 마친 박효주는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그 뒤 진후에게 전화를 걸었다.신호음이 두 번 정도 울리더니 곧바로 연결됐다.“진후야.”박효주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듯한 말투로 말했다.“오늘 저녁에 본가로 한 번 들어와.”전화기 너머에서 잠깐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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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화

“네.”걸음을 멈췄던 진후는 짧게 대답한 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곧바로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그 말투는 너무도 담담해서, 별것 아닌 이야기를 듣고 지나가는 사람처럼 느껴졌다.복도 조명이 진후의 옆모습을 비췄다.그런데 진후의 표정은 자기도 모르게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주예는 역시 주예였다.늘 상대를 헤아릴 줄 알았고, 끝까지 큰 틀을 먼저 보는 사람이었다.‘주예는 정말 그대로네.’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오른손은 지금 좀 괜찮아졌을까?’서재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박효주는 마치 온몸의 힘이 한꺼번에 빠져나간 사람처럼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박효주는 고개를 숙여, 이미 서명이 끝난 이혼합의서를 바라봤다.가슴 안쪽이 저려오면서, 불안한 감정도 함께 치솟았다.박효주는 자기 아들을 알고 있었다.진후는 이미 여러 해 전부터 한씨 가문의 일을 단계적으로 넘겨받았고, 한번 결정을 내리면 쉽게 물러서는 성격이 아니었다.그런 진후가 자기 어머니가 자신을 속여서 이혼합의서에 서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박효주는 차마 끝까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그날 밤, 박효주는 이혼합의서에 서명된 페이지를 사진으로 찍어 주예에게 보냈다.[이미 서명은 끝났어. 원본은 해신그룹 인수 합병이 마무리된 뒤에 줄 거야. 이게 내 마지노 선이야.]...주예는 화면 속 익숙한 서명을 가만히 바라봤다.곧 주예의 입술 끝이 천천히 올라갔다.‘됐다.’주예는 핸드폰을 탁자 위에 뒤집어 놓았다.표정은 전에 없이 가벼웠다.어젯밤 병원에서는 사건이 크게 벌어졌다.경찰까지 왔으니, 기사 한 줄 없이 지나갈 가능성은 애초에 거의 없었다.예전의 주예였다면, 진후부터 떠올렸을 게 분명했다.진후에게 불리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이런 문제는 처음부터 조용하게 처리했을 것이다.하지만 어젯밤은 달랐다.어젯밤 진후의 시선도 마음도, 전부 규나에게 가 있었다.주예 역시 더 이상 진후의 그런 부분까지 챙겨 줄 이유가 없었다.무엇보다도 주예는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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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화

주예는 화장을 지우면서도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이혼합의서에 사인을 받았어.”성아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몸을 벌떡 세우면서 바로 앉았다.[사인을 받았다고? 진짜?]“응.”주예의 말투는 가벼웠다.“재산분할도 꽤 많이 받았어.”성아는 잠시 할말을 잃었다가 이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그래, 알겠다.]성아의 얼굴에는 괴로운 표정과 체념한 기색이 한꺼번에 떠올라 있었다.[돈 생각해서 참는다. 이 정도 역겨운 건 참아 줄게.]조금 뒤, 성아의 말투가 금세 얄미워졌다.[부자 친구야, 나도 꼭 먹여 살려라.][...]영상이 올라간 뒤, 여론은 빠르게 식기 시작했다.댓글창 분위기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결국 해프닝이었던 거네? 다들 그만해라. 괜히 남의 부부 일에 끼어들지 말고.][이분이 한 대표 사모님이라고? 너무 예쁜데? 재벌가 사모님 소리 들을 만하다. 비주얼 장난 아니네.][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다 거짓말이면 한 사모님은 진짜 대단한 거지. 이걸 다 참고 있었다는 거잖아.][...]소동은 일단 잠잠해졌다....한편, 정재는 통유리창 앞에 서 있었다.그는 별다른 생각도 없는 사람처럼 그 해명 영상을 쭉 보고 나서는 살짝 비웃었다.곧바로 핸드폰을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지루하다는 듯한 태도였다.그런데 채 2초도 지나지 않아서 정재는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이번에는 영상을 다시 눌렀다.한 번.또 한 번.진석은 옆에 서서 정재가 재생바를 자꾸만 뒤로 끌어당기는 모습을 지켜봤다.눈꺼풀이 괜히 파르르 떨리면서 속으로는 저절로 말이 튀어 나왔다.‘누가 알겠어?’‘심씨 가문 총수라는 사람이 뒤에서는 저러고 있을 줄...’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뻔했다.그 ‘보물 같은 여동생’ 때문이 분명했다.영상이 세 번째 재생되던 도중, 정재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주예 오른손이 이상한데...”진석이 멍하니 되물었다.“네?”“못 봤어? 오른손이 거의 안 움직이잖아. 컵을 드는 동작도 일부러 티 안 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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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화

주예가 영상을 다 찍고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는, 밤이 이미 한참 깊어진 뒤였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주예는 봉투를 든 채 밖으로 나왔다. 봉투 안에는 생활용품 몇 가지와 방금 사 온 간편식이 들어 있었다.주예의 오른손 깁스는 다시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해명 영상을 찍기 위해 한 번 급히 깁스를 풀었다가 다시 붙인 탓에, 상처 부위가 은근하게 욱신거렸다.몸에는 어색할 정도로 미열이 오르기 시작했고, 주예의 안색은 창백했다. 진통제 약효가 막 떨어진 참이었다. 상처에는 염증까지 조금 생겼고, 몸 전체가 떨리면서 무겁게 가라앉았다.낮에 찍은 영상은 주예 혼자 촬영했다.주예는 진후를 보고 싶지 않았다. 박효주가 사람을 붙여 도와주겠다고 한 제안도 사양했다. 카메라 밖에서까지 한씨 가문과 더 얽히고 싶지 않았다.이제는 서 있는 것조차 버거웠다.쓸 수 있는 손은 왼손 하나뿐이었다. 원래도 중심을 잡기 어려운 상태였는데, 집 앞까지 와서 비밀번호를 누르려고 할 때 시야가 갑자기 흔들렸다. 발이 한쪽으로 비껴 나가면서, 주예의 몸이 앞으로 휘청거렸다.마침 옆집 문이 열리더니, 얼른 손을 뻗어서 주예의 등을 받쳤다. 주예의 몸이 쓰러지지 않도록 단단히 붙들어 주었다.“왜 볼 때마다 제대로 서 있지를 못해?”고개를 들어 눈앞의 얼굴을 확인한 주예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정재였다.“왜 볼 때마다 좋은 일이 하나도 없는 거야?”주예는 겨우 몸을 추슬렀다. 이마는 땀에 젖어 있었고 호흡도 아직 고르지 않았다. 그래도 정재를 보자마자 바로 받아쳤다.정재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재회한 뒤로 주예는 늘 담담한 얼굴이었다. 단단히 몸을 감싸 쥔 채, 정재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굴었다.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말끝에는 잔뜩 가시가 서 있었고, 감정도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 저런 흐트러진 반응은 주예가 정말 가까운 사람 앞에서만 내보이던 것이었다.그 사실을 알아차리자 정재는 이상하게도 즐거워졌다.정재는 입꼬리를 가볍게 올렸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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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화

말이 끝나자마자, 정재는 주예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그대로 주예를 안아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돌려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뭐야?’품에 안긴 주예의 몸은 힘이 빠질 대로 빠져 있었다. 믿기지 않을 만큼 물렀다.정재가 고개를 숙였을 때, 손끝이 무심코 주예의 목 옆을 스쳤다.비정상적으로 뜨거운 게 역시 열이 오르고 있었다.정재의 미간이 잔뜩 일그러졌다.정재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주예의 오른손이 저 정도로 다쳤는데, 영상에서는 티도 거의 나지 않았다. 그렇게 빨리 나았을 리가 없었다.정재가 문을 발끝으로 밀어 열었다.주예는 반사적으로 정재의 옷깃을 움켜쥐었다.7년 만에 다시 정재의 품에 안겼다.이번에는 정재의 체온도, 몸에 밴 서늘한 향기도 또렷하게 느껴졌다.주예는 정재의 품에 안긴 채 눈도 뜨지 못했다. 어깨가 가늘게 떨리면서 목 안쪽이 뭔가에 막힌 듯 답답했다.주예는 아픈 건 참을 수 있었다. 남이 못되게 구는 것도 견딜 수 있었다. 진후든 규나든 이제는 정말 아무렇지 않다고 여길 수 있었다.주예는 누구 앞에서든 모든 일을 말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그런데 정재 앞에서만은 한 번도 제대로 내려놓은 적이 없었다.주예는 정재를 향한 감정을 그저 있는 힘껏 눌러 두고 있었을 뿐이었다.그녀는 한때 그렇게 믿기도 했다. 생각하지 않으면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오래된 상처도 건드리지 않으면 아프지 않은 것처럼.그런데 정재가 자꾸만 나타났다.눈가가 뜨거워졌지만 주예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숨소리조차 점점 가늘어졌다.정재는 주예가 떨고 있다는 걸 느꼈다. 가슴팍에 닿은 열이 오른 숨결도 그대로 전해졌다.잠깐 말이 끊겼다가 정재가 문득 웃었다.“눈은 왜 감고 있어. 내가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주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미친놈.’그런 생각이 들자, 애써 붙들고 있던 서러움이 허무할 만큼 흩어졌다.정재는 주예를 소파에 내려놓고 돌아서서 구급함을 찾았다.진석은 원래도 일 처리가 지나치게 빠른 편이었다.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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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화

정재는 주예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시선이 잠깐 머물렀다.아무 예고도 없이 머릿속에 한마디가 떠올랐다.‘되게 얌전하네. 볼을 한번 꼬집고 싶은데.’정재는 곧바로 시선을 거두고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태연하게 행동했다.물을 마시고 약까지 먹자, 약효가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주예의 정신도 조금씩 돌아왔다.주예는 컵을 감싸 쥔 채, 무심코 실내를 한 바퀴 둘러봤다.집 안 곳곳에는 드러내지 않은 사치가 배어 있었다.소파 옆에 아무렇지 않게 놓인 작은 장식품만 해도, 주예가 예전에 한 경매 카탈로그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낙찰가는 마지막에 억 단위까지 올라간 걸로 기억했다.발 밑에 깔린 캐시미어 러그는 밟아도 소리도 거의 나지 않았다. 너무 부드러워서 발이 살짝 잠기는 기분까지 들었다.이 집의 인테리어와 가구, 소품 값은 아마 이 집 자체를 산 돈보다 더 많이 들었을지도 몰랐다.역시 정재다웠다.어릴 때부터 늘 그랬다.주예의 집 옆에 살면서 평소에는 지나칠 만큼 조용했고 눈에 띄지 않았다.그런데 조금만 신경 써서 들여다보면 알 수 있었다. 정재가 마시는 차는 그램당 가격을 따지면 수백만 원이 우습게 넘었다. 정재가 쓰는 물건들도 겉보기에는 수수했지만, 전부 이름 있는 장인의 손을 거친 것들이었다.그 시절의 주예는 그런 걸 몰랐다가 나중에야 하나씩 알게 됐다.컵의 물을 내려다보던 주예의 손끝에 힘이 조금 들어갔다.‘왜 또 옛날 생각을 하지?’주예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지금과 맞지 않는 감정을 털어 내려는 것처럼. 주예는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목소리를 낮췄다.“이제 갈게.”말이 끝나기 전에, 정재가 이미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너 아직 저녁도 안 먹었잖아. 앉아 있어.”“가서 먹으면 돼.”주예가 입술을 삐죽였다.“한 손으로 밥할 수는 있고?”“라면 있어.”주예도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약 먹고 좀 살 만해졌다고 또 나랑 말싸움할 힘은 생겼네.”정재가 살짝 코웃음을 쳤다.“앉아 있으랬지. 두 번 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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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화

주예는 온몸이 굳어졌다.자기가 잠들었다는 사실도 믿기 어려웠는데, 하필 정재 집에서 눈을 뜨다니.주예는 속으로 스스로를 거세게 나무랐다.‘진짜 한심하다.’몸을 조금 움직였는데, 몸에 닿는 감촉이 어딘가 이상했다.주예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가, 그대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브래지어가 사라져 있었다.주예는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귓불까지 붉게 달아오르면서 금방이라도 열이 번질 것 같았다.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지면서 온갖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설마...’정재는 원래 선을 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릴 적에 함께 먹고 자며 지냈을 때도 정재는 주예의 속옷 같은 건 한 번도 손댄 적이 없었다.주예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힌 뒤, 이불을 걷고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왔다.방 안은 고요했다. 정재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주예는 침대 옆에 선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뺨에 오른 열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어젯밤 기억은 군데군데 비어 있었고, 몸 상태가 몹시 좋지 않았다는 것만 또렷했다.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들면서 숨도 편하게 쉬지 못했다. 그래서 손이 저절로 단추 쪽으로 올라갔던 것 같다. 그 다음 어렴풋이 남은 건 물과 약, 그리고 익숙한 정재의 서늘한 향뿐이었다.그 뒤는 텅 비어 있었다.주예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아직도 작은 기대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혹시 내가 직접 벗은 걸 수도 있잖아.’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민망했지만, 주예는 원래 가슴이 큰 편이었다. 평소에도 답답하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그래서 집에 돌아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브래지어를 푸는 일이었다.어젯밤에는 열에 들떠 정신이 없었다. 이곳을 자기 집으로 착각한 채, 무심코 후크를 풀어 버렸다고 해도 아주 말이 안 되는 일은 아니었다.정재에게 물어보고 싶었다.그런데 바로 휴대폰을 꺼냈다가 주예는 멈칫했다. 이미 오래전에 정재를 삭제해 버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주예는 말없이 눈을 감고 엉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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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화

‘혹시 그동안 쏟아 부었던 노력이 이제야 보답을 받기 시작한 걸까?’7년 전, 하늘은 처음 정재를 봤다.그때 심명산의 병세는 위중했고, 심씨 가문 안에서는 권력 다툼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원한을 품은 자들은 끝까지 추적한 끝에 경울시에서 이름을 감추고 살던 정재의 행방을 찾아냈다.그 뒤 고씨 가문이 개입했다. 고씨 가문은 드러나지 않게 정재를 보호했고 결국 P국으로 빼냈다.그때가 하늘이 처음으로 정말 가까운 거리에서 정재를 본 때였다. 겨우 스무 살을 조금 넘긴 나이였는데도, 정재는 또래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차분했고 강한 데다가 여유로웠다. 도망치는 도중이면서도 정재에게서는 약간의 동요도 읽을 수가 없었다.하늘은 그 한 번의 만남으로 바로 알아봤다.정재가 바로 하늘이 원하는 남자라는 걸.그 뒤로 하늘은 자신의 목표를 더없이 분명하게 정리했다.고씨 가문에서 정재의 목숨을 구해 준 은혜를... 할아버지가 정략결혼의 카드로 쓰려 한다는 사실도 하늘은 알고 있었다. 손주들 중에서는 하늘이야말로 그 혼인에 가장 적합한 상대였다.하지만 하늘은 누군가의 계산에 따라 움직이는 도구로만 남을 생각이 없었다. 하늘이 원하는 건 단순한 혼인이 아니었고, 정재의 마음까지 가지고 싶었다.그래서 하늘은 한 걸음씩 자신을 끌어올렸다.먼저 예술계에서 확실한 성과를 만들어서 자기 실력을 증명해야 했다. 그걸 발판으로 삼으면, 언젠가 할아버지가 고씨 가문을 하늘에게 맡길 거라고 하늘은 확신했다.그 다음으로는 정재와의 관계를 끈기 있게 다듬었다. 하늘은 의도적으로 정재와 늘 가까운 듯하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정재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하늘은 다른 여자들과 다르다고. 그녀는 독립적이고, 냉정하며,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먼저 매달리는 여자가 아니라고. 정재가 그런 여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걸 하늘은 잘 알고 있었다.그와 동시에 하늘은 오랜 시간 동안 잠재적인 위협도 하나씩 정리해 왔다. 아주 작은 불씨 하나라도 남겨 두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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