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끝, 후회는 사절입니다의 모든 챕터: 챕터 81 - 챕터 90

100 챕터

제81화

조사 결과에 따르면, 그 무렵 강빈 부모의 집에는 규나 또래의 여자아이가 실제로 함께 살고 있었다. 그 아이는 규나의 사촌동생이었다.강빈 부모에게 사고가 난 뒤, 그 아이는 곧 친부모가 데려갔다. 그 뒤로는 강씨 가문과 왕래도 거의 없었다.시기상으로도 정확히 맞아떨어졌다.진후는 사람을 붙여 더 깊이 파고들게 했다. 확인해야 할 건 단 하나였다. 그 사촌동생의 발바닥에 흉터가 있는지. 혹은 흉터 제거 수술을 받은 적이 있는지.진후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강빈과 자연스럽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규나를 바라봤다. 조명이 규나의 머리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으면서 화려하고도 태연한 모습이었다. 마치 모두의 손바닥 위에서 보호받고 있는 사람 같았다.‘흉터가 없다면, 답은 하나야.’‘예쁜이가 진짜 규나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여자는 가짜라는 뜻이야.’그날 밤, 규나가 자신의 예쁜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부터 진후의 마음속에는 실망만 남아 있지 않았다. 오랫동안 속아 왔다는 분노도 함께 들끓고 있었다.규나는 수년 동안 진후를 속였다. 원래 자기 것이 아니었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그 탓에 진후는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했고, 진짜 예쁜이를 찾아낼 기회까지 놓쳤다.진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띠릭-진후는 고개를 내려 문자를 확인했다.[한 대표님, 확인을 요청하신 그 사람은 발을 다친 적이 없습니다. 부모님께도 확인했는데, 흉터 제거 수술도 받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진후의 손끝이 흔들렸다. 찻잔을 놓칠 뻔했다.다시 규나를 바라보는 진후의 눈빛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예쁜이가 규나라면, 지금 내 앞에 있는 저 여자는 누구지?’‘강빈 형님은 알고 계신 건가?’‘저 여자는 대체 언제부터 예쁜이를 대신하고 있었던 거야.’...전국미술콩쿠르 제2라운드가 모두의 시선이 쏠린 가운데 막을 올렸다.방식은 단체전이었다. 제1라운드를 통과한 101명의 참가자는 열 개 팀으로 나뉘어 경연을 치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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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화

“알아요! 심사위원들이 특별 합격시킨 101번째 참가자, 임주예 씨 맞죠?”유서라의 눈이 반짝였다.“저 임주예 씨 그림 봤어요. 정말 대단하시더라고요.”유서라의 목소리가 조금 큰 편이라, 주변에 있던 참가자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쏠렸다.임주예라는 이름 자체가 널리 알려진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번 전국미술콩쿠르를 유심히 챙겨본 참가자들에게는 이미 꽤 강한 인상을 남긴 상태였다. 애초에 결과가 나온 뒤 심사위원단의 판단을 다시 움직이게 만들고, 전례 없이 추가 합격자 자리를 더 열게 만든 사람이 흔할 리 없었다.다만 그렇다 해도 원래라면 관심이 이 정도까지 쏠리지는 않았을 터였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실력 없는 참가자는 없었다. 그 중에는 어린 나이에 이미 이름을 알린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런 걸 생각하면, 주예에게 쏠리는 흥미가 이렇게까지 클 이유는 없었다.정작 사람들 시선을 끈 건, 오늘 주예의 차림이었다.다른 참가자들은 저마다 잔뜩 힘을 준 차림으로 나타났다. 자신만의 ‘예술가다운 감각’을 보여 주려는 듯, 옷차림에도 신경을 잔뜩 쓴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주예는 너무도 평범한 후드티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더 눈길을 끈 건 오른손이었다. 주예의 오른손에는 아직도 깁스를 하고 있었고, 팔은 삼각건으로 고정되어 있었다.뼈와 근육을 다치면 백 일은 간다는 말이 있다. 하필 이런 시기에 저 정도 부상을 입었으니, 제2라운드는 사실상 힘들겠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주예를 처음 본 이들이 가장 먼저 떠올린 반응도 대체로 그랬다.주예가 1차 예선에서 아무리 인상적인 결과를 보여 줬다고 해도, 손을 다친 이상 이번 라운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참가자가 한 팀에 들어오면, 팀에 큰 보탬이 되기 어렵다고 보는 시선도 있었다. 반대로 다른 계산을 굴리는 참가자도 있었다. ‘저 사람이 팀 안에서 최하위 카드가 되어 주면, 내가 떨어질 가능성은 조금 줄어들겠지.’ 주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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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화

그 말이 나오자, 주변 사람들의 표정은 제각각으로 갈렸다.누군가는 하늘이 일부러 저러는 거라고 여겼다. 다친 약자를 팀으로 끌어안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 스스로를 남을 챙기는 사람으로 보이게 하려는 계산이라고 생각했다. 반대로 누군가는 주예가 재수 좋게 기회를 잡았다며 못마땅해했다.하늘의 오른쪽 눈 아래 있는 눈물점을 보는 순간, 바로 그때 주예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한 장면이 있었다.그 사진.7년 전, 정재가 더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을 때 보내 왔던 그 사진. 사진 속 여자에게도 눈물점이 있었다.주예는 잠시 말 없이 하늘을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물었다.“누구세요?”그 한마디에 장내는 일제히 동작을 멈추었다.곧이어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떤 사람들은 주예가 일부러 모르는 척하면서 관심을 끌려는 줄 알았다. 젊은 세대 가운데 예술 하는 사람치고 고하늘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냐는 반응이었다.그런데 주예는 정말 몰랐다.주예는 한씨 가문에서 보낸 3년 동안 예술계 소식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실상 3년 내내 바깥 세상과 단절된 채 지낸 셈이었다.하늘의 미소가 잠깐 굳어졌지만 그래도 금세 다시 표정을 정리했다. 하늘은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처럼 여유 있게 웃었다.“제가 소개를 안 드렸네요. 고하늘이라고 합니다.”하늘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제 작업 스타일은 클래식한 쪽에 조금 더 가까워요. 임주예 씨가 제 팀에 들어오신다면, 오른손을 많이 쓰지 않아도 되는 비교적 쉬운 역할 위주로 맡기겠습니다.”겉으로 들으면 배려 같았다.하지만 그런 식으로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말투로 말을 꺼낸 이상 속뜻은 뻔했다.‘당신은 손 때문에 사실상 전력에서 제외됐으니까 적당히 자리만 채우면 된다는 얘기네.’주예가 대답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겨 있자, 하늘 옆에 서 있던 여자 하나가 먼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하늘 언니, 굳이 왜 저 사람을 받아요? 저 사람은 그냥 팀에 짐만 되는 거잖아요.”“맞아, 맞아.”곁에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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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화

남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뭔가 하나씩은 애매해 보이는 멤버들이었다.주예와 서라도 그 안에 들어 있었다.결국 남고 남은 사람들끼리 반강제로 한 팀이 됐고, 다들 차례대로 자기소개를 시작했다.“김승구라고 합니다. 저는 벽화 작업을 주로 합니다.”“유서라라고 합니다. 저는 유화가 가장 자신 있어요.”“저는 동양화 세밀채색이 강해요.”“저는 소묘가 주특기예요.”“저는 풍경화요.”“저는 인체 드로잉이요.”“주소민입니다. 저는 현대미술을 합니다.”소민은 거기까지 듣고 나자 벌써 열정이 반쯤 식어 버렸다.이 팀은 소민만 빼고 전부 회화 쪽이었다. 다른 재주는 아예 없었다. 그 사실이 머릿속에 정리되자, 소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설마 이렇게까지 한쪽으로 쏠릴 줄은 몰랐는데.’방금 전, 소민은 하늘의 팀에 들어가는 데 실패했다. 그래서 곧바로 계산을 굴렸다. 소민은 자기 실력이 겨우 중위권 정도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다른 강자들이 몰린 팀에 들어가면, 소민은 그 안에서 묻힐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다음 라운드 진출권은 소민의 몫이 아닐 가능성이 컸다.그래서 소민은 일부러 주예 팀을 골랐다.소민 눈에 이 팀은 전부 경쟁력이 떨어지는 사람들로 보였다. 이 정도 구성이라면 소민의 실력만으로도 개인 점수는 상위권에 올려놓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팀만 꼴찌를 피할 수 있다면, 팀장인 소민은 무조건 올라갈 수 있다고 계산했다.그런데 소민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게 있었다.한 팀 안에 자기 말고는 전부 그림만 그리는 사람뿐이라는 점이었다. 제2라운드는 최종 결과물로 승부를 봐야 했다. 다른 팀에는 조각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목조 작업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떻게 따져 봐도 소민이 속한 이 팀보다 선택지가 넓었다.팀 구성이 끝난 뒤에는 팀장도 정해야 했다.팀장은 결정권이 더 많고 자신을 드러낼 기회도 그만큼 많았다. 게다가 팀 결과가 좋으면, 팀장에게는 높은 가산점이 붙을 가능성도 컸다. 그래서 어느 팀이든 팀장을 정하는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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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화

“근데 다들 잘하는 게 다르잖아요. 그림 한 점은 보통 한 사람이 중심을 잡고 그려야 완성도가 나오는데, 이렇게 이것저것 섞으면 나중에 정체불명의 결과물이 되는 거 아닌가요?”“맞아요. 벽화도 그렇잖아요. 큰 설계는 보통 한 사람이 맡고, 나머지는 보조만 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저도 그렇게 생각해요...”“...”이야기가 점점 옆길로 새기 시작하자, 소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소민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억지로 흐름을 끊었다.“다들 잠깐만요. 지금은 각자 뭘 잘하는지 얘기할 때가 아니라, 이 주제를 어떻게 해석할지를 논의해야 해요. 다른 의견 있으신 분 계세요?”그 뒤로도 띄엄띄엄 몇 가지 생각이 더 나왔다.“팀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소민이 어느 의견에도 만족하지 않는 눈치가 보이자, 누군가 아예 화살을 소민 쪽으로 돌렸다.소민은 바로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전문가다운 태도를 갖춘 채 입을 열었다.“저는 ‘허무’를 시각적 착시로 표현할 수 있다고 봐요. 예를 들면 반투명한 설치물을 활용하고, 빛의 굴절을 이용하는 거죠.”“관객이 한쪽 각도에서 보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다른 각도에서 보면 저희가 전달하려는 예술적 메시지가 드러나는 방식으로요.”소민의 말이 끝나자, 주변은 조용해졌다.소민의 해석 자체가 틀린 건 아니었다. 접근 방향도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너무 어렵다는 점이었다. 그 정도 규모의 설치 작업은 정교한 계산이 필요했고, 디테일을 다듬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들었다. 열흘 안에 끝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 팀은 오늘 처음 묶인 사람들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함께 작업해 본 적이 없는 조합이었다.소민이 저런 방향을 꺼낸 데에는 나름의 계산도 있었다. 조금 어려운 길을 택해야 마지막에 고득점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본 것이다. 소민은 이전에도 비슷한 주제를 다뤄 본 적이 있었다. 설령 팀 전체 성적이 기대에 못 미쳐도, 심사위원들이 소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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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화

“심 회장처럼 막무가내로 남의 집에 들어오는 사람도 없거든.”비웃듯이 씩 웃은 정재는 더는 말씨름을 이어 가지 않고 돌아서서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밥 거의 다 됐어. 먹을 준비해.”주예는 잠시 할말을 잃었다.“나 밥 먹이려고 온 거야?”정재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돌아봤다.“왜?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여?”정재의 시선이 깁스를 한 주예의 오른손으로 내려갔다.“한 손으로 버티면서 알아서 죽으려고 했어?”“배달 시켜서 먹으면 돼.”주예는 지지 않겠다는 듯이 곧바로 대답했다.“배달은 시킬 수 있지. 그럼 씻는 건? 화장실 가는 건?”정재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눈에는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아니면 다친 뒤로 계속 안 씻고 있었나?”주예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정재는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얼굴은 왜 빨개져? 걱정하지 마. 너한테서 좀 쉰내가 나도 난 신경 안 써.”정재가 느긋하게 덧붙였다.“어릴 때 너 2주나 안 씻고 버티던 꼴도 이미 봤거든.”주예의 얼굴은 더 붉어졌다.어릴 적 주예는 수두를 앓은 적이 있었다. 그때 의사는 절대 물에 닿으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주예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정재는 입으로는 더럽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손길은 한결같이 세심했다. 떼를 쓰는 주예를 달래려고 장갑이랑 마스크까지 챙겨주고 주예를 품에 안아 주기도 했다.하지만 그때는 어린애였지만 지금은 아니다.주예는 더 따지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런 문제로 정재와 실랑이를 하는 것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주예는 입을 다물었다.정재가 차린 건 아주 단출한 식사였다. 맑은 국물에 말아 낸 잔치국수 한 그릇. 아무리 정재라도, 그런 남자한테 엄청난 요리 실력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주예는 무표정한 얼굴로 끝까지 다 먹었다. 식사 내내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정재는 주예를 너무 잘 알았다. 주예가 눈을 살짝 가늘게 뜨고 국수를 넘기는 걸 보자, 이 식사를 꽤 만족스럽게 즐기고 있다는 걸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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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화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주예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고개를 돌리면서 정재의 시선을 피했다.그때 정재의 잘생긴 얼굴이 눈앞에 가까워졌다. 정재는 비어 있는 한 손으로 주예의 턱을 붙잡고, 돌린 얼굴을 다시 자기 쪽으로 돌려 세웠다.정재가 그대로 입을 맞췄다.주예는 완전히 굳어 버린 채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이 키스가 어떤 느낌인지 헤아릴 틈도 없었다. 정재의 서늘한 입술도, 입안으로 마구 밀려드는 남자의 향기도 제대로 느껴 보지 못했다.1분쯤 지난 뒤에야 정재가 천천히 물러났다.정재는 주예를 바라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제야 주예의 정신이 제자리로 돌아왔다.‘방금 뭐였지?’‘왜 나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지?’주예는 마른침을 삼키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몸을 일으켰다.곧바로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고, 바닥에 떨어진 정재의 핸드폰도 주워 들었다. 화면에 떠 있는 QR코드를 곧바로 찍었다.“추가했어.”주예는 핸드폰을 정재에게 내밀었다. 시선이 자꾸만 흔들리면서, 결국 정재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정재는 고개를 조금 숙이면서 주예의 표정을 살폈다. 입가에는 웃는 듯 마는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정재는 이번 식사가 꽤 마음에 들었다. 친구도 다시 추가되었고, 문밖으로 쫓겨나지도 않았으니까.정재는 새로 추가된 계정을 내려다봤다. 프로필 사진은 연꽃이었고, 닉네임은 ‘평범하며 진실한 나’였다.정재가 살짝 혀를 찼다.‘겉으로는 담담한 척하더니, 속은 더 복잡해졌네.’“번호 바꿨어?”정재는 미간을 살짝 좁히며, 자연스럽게 다른 대화창 하나를 열었다.정재가 7년 내내 상단에 고정해 둔 대화창이었다.대화는 7년 전, 정재가 경울시를 떠난 시점에서 멈춰 있었다. 프로필 사진은 작은 청개구리였다. 주예가 한창 소녀 시절에 내내 써 오던 사진이었다.그때 정재는 주예를 지키기 위해, ‘더는 연락하지 마’라는 메시지를 남긴 채 억지로 연락을 끊어야 했다. 그 뒤 P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집안의 위험 요소를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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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화

“일단 좀 자. 내일은 내가 사람 붙여서 미술콩쿠르 현장까지 데려다 줄게.”정재는 주예의 일정까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꿰고 있었다.“응.”주예는 당장이라도 핑계를 하나 만들어서 도망치고 싶었다. 정재와 더는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사태는 이미 주예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버렸다. 머릿속은 엉망으로 얽혀 있었고, 이제 정재를 어떤 태도로 마주해야 할지도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그 키스는 대체 무슨 뜻일까?’주예는 그 생각을 더 밀고 들어가지 못했다. 주예는 이미 알아 버렸다. 이 세상에 영원한 피난처 같은 건 없고, 결국은 뭐든 자기 힘으로 버텨야 한다는 걸.주예가 방으로 들어가는 걸 본 정재는 방금까지 남아 있던 미소를 바로 지웠다. 정재는 핸드폰을 꺼내 진석에게 전화를 걸었다.“이 계정 좀 확인해 봐. 7년 전에 누가 썼는지, 정확히 알아내.”...다음 날.잠에서 깬 주예는 온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밤새 그림을 붙잡고 있었을 때보다도 더 피곤했다.어젯밤 안방으로 돌아간 뒤, 주예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몸은 지칠 대로 지쳤는데 머릿속만 쉬지 않고 돌아갔다. 한 가지 떠오른 생각이 가라앉기도 전에, 또 다른 생각이 불쑥 튀어나왔다. 갈피도 잡지 못하고 마구 생각이 뻗어 나가던 끝에, 주예는 예상대로 꿈까지 꾸고 말았다.꿈속의 주예는 아직 앳된 티가 남은 소녀였고, 정재 옆에 바싹 붙어서 앉아 있었다.주예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정재는 곁에서 두꺼운 원서를 넘기고 있었다. 주예가 고개를 돌려 정재에게 물었다.“오빠, 내가 뭘 그리는 것 같아?”정재가 몸을 조금 기울였다.“너무 멀어서 안 보여.”주예는 익숙한 서늘한 기운과 함께 정재가 자기 쪽으로 가까이 오는 걸 봤다. 그걸 본 주예는 참지 못하고 먼저 정재에게 입을 맞췄다.거기서 주예는 화들짝 잠에서 깼다.정재가 어젯밤 언제 집을 나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적어도 주예가 잠들기 전까지는 거실 쪽에서 새어 들어오는 불빛이 희미하게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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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화

“잠깐만요, 팀장님. 저는 여기부터가 이해가 안 되는데요. 빛이 여기로 들어가면 어떻게 시각적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거죠?”승구가 가장 먼저 손을 들고 물었다.“맞아요, 맞아요. 이거 왠지 물리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어떡해요, 저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는 물리 쪽은 손도 안 댔는데요.”하나둘 이어지는 팀원들의 반응에 소민의 이마가 꿈틀했다. 끌고 가기 힘든 팀원들이라는 생각이 들자, 말투에도 짜증이 조금씩 묻어나기 시작했다.“물리를 잘 모르시면 굳이 억지로 이해하려고 하실 필요 없어요. 그냥 제가 말씀드리는 대로만 해 주시면 됩니다.”그 말 속에 스며 있는 우월감 때문에, 몇몇 팀원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주예는 소민 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이면서 도면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꽤 흥미롭다는 듯 눈길을 멈추더니, 이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전체 방향은 맞아요. 그런데 여기 이 부분은 틀렸어요.”주예의 손끝이 도면 한쪽을 가리켰다.“여기에서 쓴 재료가 복합 패널이죠. 이 재료는 자연광 아래에서는 분명히 다른 시각 효과를 만들 수 있어요.”“그런데 마지막 발표는 밀폐된 스튜디오 안에서 진행되잖아요. 그때는 자연광이 아니라 인공 조명을 써야 하고요.”“그러면 이 재료로는 저희가 원하는 결과가 안 나와요.”소민은 곧바로 받아쳤다.“주예 씨가 그걸 어떻게 아세요? 이건 인터넷 자료에서도 이미 검증된 방식이에요.”소민은 어젯밤 내내 자료를 뒤져 가며 찾아본 내용이었다. 그래서 더 쉽게 물러설 수 없었다.‘아는 척하는 거겠지.’하지만 고서화 복원에서 가장 중요한 수업 가운데 하나는 색을 판별하는 일이었다. 복원가는 색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또 광원이 바뀌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아주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어야 했다.주예는 다른 팀원들까지 도면 쪽으로 슬금슬금 몰려드는 걸 봤다. 그러자 주예는 더 말로 설명하지 않고, 왼손으로 연필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빛이 어디에서 들어오고, 재료를 통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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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화

소민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내 카메라가 정면으로 잡히는 자리로 걸어가, 일부러 지친 기색을 드러낸 채 렌즈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저는 이번 기회를 통해, 예술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보여 드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현실은... 아무래도 기대만큼 따라와 주지 않네요.”“저희 팀원분들은 비교적 전통적인 표현 방식에 익숙한 편이라서, 이런 현대적인 예술 언어를 이해하는 데에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소민은 말을 끊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팀장인 제가 할 수 있는 건, 결국 작품이 끝까지 완성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겠죠.”겉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하고 있었지만, 소민의 마음은 아침처럼 초조하지 않았다. 바로 조금 전, 하늘이 소민에게 홀로그램 장치를 건네줬다. 소민 재능이 아깝다며, 2라운드에서 멈추게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만약 마지막까지 팀이 제대로 된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더라도, 소민에게는 그 홀로그램 투영 장치가 있었다. 그것만 잘 활용해도 심사위원과 관객의 눈길을 끌 수 있었다. 개인 점수만 충분히 높게 받으면 됐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소민이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거기까지 생각한 소민 눈에 복잡한 기색이 스쳤다.‘고하늘... 왜 나를 도와주는 거지.’마음속에 걸리는 부분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곧 그 불안은 다음 라운드에 올라가고 싶다는 욕심에 눌려 사라졌다. 소민은 이미 그 장치를 직접 확인해 봤다.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은 없었다.그렇게 여러 생각이 오갔지만, 카메라 앞에서는 끝까지 연기해야 했다.소민은 승구 쪽으로 걸어갔다. 두 팔을 가슴 앞에 교차한 채 승구 옆에 서더니, 미간을 살짝 모으고는 몇 가지 잘못된 점을 지적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죄다 전문용어였다.승구는 고개를 들고 소민을 멍하니 바라봤다.“방금 말씀하신 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데요.”승구는 불안한 손으로 손바닥을 문질렀다.“죄송한데, 한 번만 더 쉽게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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