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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인성 파탄자

Autor: 그림자운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04-05 00:17:34
“……알겠습니다.”

세레인은 옷장 문을 닫고 손을 닦았다. 거울을 슬쩍 보며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표정도 평소처럼 얌전하게 만들었다.

세레인은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가 황궁의 긴 복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말아 올린 머리 위로 얇은 천을 눌러 쓰며 속으로 생각했다.

최대한 마주치지 말자 제발. 그냥 시키는 거만 하고 조용히 빠져나가자.

“왔군.”

카르안은 집무실이 아닌 접견실에 있었다.

창 쪽은 햇살이 흘렀고 붉은색 융단 위로 금장 장식이 새겨진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는 서류 대신 찻잔을 들고 앉아 있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정말 태가 남다른 모습이었다.

“앉아.”

세레인은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앉으라는 말은 있었지만 앉을 만한 의자가 없었다.

의자가 없는 곳에서 앉으라는 건 바닥에 무릎 꿇고 앉으라는 얘기겠지. 그래, 앉으라니까 앉아 드려야지.

오늘은 뭐 ‘표정이 마음에 안 든다.’ 하면서 발로 밟기라도 하실려나.

카르안은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제한된 시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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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종은 끝나지 않는다   60화. 시녀의 수상한 서랍장

    저 인간은 정말 한다면 하는 미친 놈이다. 이 시녀 숙소 복도 한복판에서 제 진짜 이름인 '세레인'을 죄수 이름 부르듯 외쳐댈 게 뻔했다. 결국 세레인은 울며 겨자 먹기로 잠금장치를 풀었다.딸깍.문을 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거대한 인영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세레인은 반사적으로 문을 꽉 눌러 닫고 잠갔다. 마찰음이 유독 선명하게 방 안을 울렸다.카르안은 제 집안 안방이라도 되는 양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세레인의 방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와 침대에 유유히 걸터앉았다. 우월하게 긴 다리를 가볍게 꼬며 그가 세레인을 올려다보았다.“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치더니. 숨바꼭질치고는 너무 싱겁게 끝난 거 아닌가, 세레인.”유려한 목소리가 세레인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세레인은 문고리를 눌러닫고 재차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폐하. 여기는 시녀 숙소입니다. 시녀들 시선이 보이지 않으셨습니까? 제 입장도 좀 생각해주셔야죠.”"나한테 원피스 잘 어울릴 것 같다고 부추길 때는 언제고?”“그건, 그땐 폐하가 세 살배기 공자님이셨으니까 그렇죠. 지금은 제 머리보다 한참 더 위에 계시잖아요.”억울한 듯 입을 삐죽이는 세레인의 모습에 카르안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카르안이 시선을 내려 세레인의 손목을 빤히 쳐다보았다. 마차 안에서 제 송곳니로 살짝 긁어내렸던 그 자리가 아직 미세하게 붉었다. 카르안이 침대 시트를 툭툭 치며 말했다.“이리 와.”“......안됩니다. 거리가 좁아지면 위험하다는 건 동네 꼬마들도 압니다.”“셋을 세기 전에 오는 게 네 신상에 좋을 텐데. 셋, 둘…….”'하나'가 나오기 직전, 세레인은 마지못해 쭈구리처럼 허리를 숙이고 다가와 침대에서 세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카르안은 그 꼴이 우스운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내 세레인의 눈가를 가만히 응시하던 그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카르안이 상체를 슬쩍 일으키며 세레인과 눈을 맞췄다. 다정한 듯하지만, 숨길 수 없는 위압감이 풍겼다.“너 얼굴이 안 좋은데. 혹시 누구 만났어?

  • 복종은 끝나지 않는다   59화. 폐하, 여긴 금남구역인데요?

    냄새? 오염? 내가 무슨 역병이라도 된다는 거야? 카르안이 했던 말보다 더 잔인하게 가슴을 후벼파는 말이었다. "오브리엔 공작가요?" 숙소로 돌아온 세레인은 동료 시녀 에나의 방 문을 조심스레 닫았다. 속이 상해서 도저히 맨정신으로 혼자 있을 수가 없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세레인의 물음에 에나가 토끼처럼 눈을 뜨며 목소리를 낮췄다. "리나, 설마 디켄 공작님이랑 마주친 거예요? 아니면 레이나 영애? 세상에 표정 보니까 보통 일이 아니었나 보네." 에나는 세레인의 곁으로 다가와 걱정스러운 듯 어깨를 다독였다. 그녀는 지방 남작가의 영애라 권력의 중심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사교계의 거물들에 대한 정보는 잘 알고 있었다. "조심해야 해. 오브리엔 공작가는 권세가 강한 귀족 가문 중 하나예요. 디켄 공작님은 무역국장인데 상무회 의장직을 노리고 있다는 말도 나오고요. 오브리엔가는 제국으로 들어오는 어지간한 사치품 유통권을 다 쥐고 있어요. 그 밑에서 자란 레이나 영애는 오죽하겠어요? 아 그리고 오라버니인 자렐도 세력 키우고 있다고 하고요." 세레인은 아까 온실에서 들었던 비천한 냄새라는 말을 떠올리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종류의 멸시였다. 고작 두어 번 짧게 마주쳤을 뿐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하지?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마치 본인은 태생부터 고결한 존재고, 나는 존재 자체로 세상을 더럽히는 오물인 양 치부하던 그 눈빛. 내가 왜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지? 하녀 출신이라서? 아니면 폐하의 옆자리에 내가 있었다는 이유로? 억울했지만 무력감이 더 컸다. 에나의 말대로 그 여자는 제국의 정점에 선 공작가 영애였고, 자신은 이름조차 가짜인 도망자일 뿐이니까. 그래. 싸우던 뭘 하던 누가 내 편을 들어주겠냐? 게다가 나는 정말 혼자인데. “에나, 저 사람들은 원래 그래요? 사람을 사람으로 안 보는?” “나 같은 남작가 출신도 저들 눈엔 평민보다 아주 조금 나은 정도일걸요.

  • 복종은 끝나지 않는다   58화. 비천한 냄새

    황궁의 성문이 멀리서 보이기 시작할 무렵, 마차 안에 몽글몽글한 공기가 일렁였다. 세레인의 무릎 위에서 숨을 내뱉던 카르안이 돌연 묵직한 무게감으로 변하며 그녀의 하체를 압박했다.“……아!”세레인은 숨을 들이켰다. 카르안은 긴 다리를 무릎 세워 구부린 채, 세레인의 허벅지를 베개 삼아 누워 있었다. 카르안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어린 황제의 조막만한 손을 잡고, 레이스 셔츠가 잘 어울린다며 깔깔대던 기억이 비현실적인 꿈처럼 멀어졌다.하지만 그는 일어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세레인의 허벅지 안 쪽으로 더 깊숙이 고개를 묻었다.“저……폐하, 이제 그만 일어나셔야…….”세레인이 당황해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자, 카르안이 느릿하게 눈을 떴다. 붉은 눈동자에는 입을 맞췄던 때와 같은 열기가 여전히 일렁이고 있었다.“왜 아까는 그렇게 꼭 껴안고 다니더니, 갑자기 멀어지네.”그는 세레인의 허벅지 위로 제 뺨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나른하게 읊조렸다. 아이의 모습일 때 보여주던 그 다정한 온기를 요구하는 듯한 눈빛이었다.세레인은 당황해 시선을 피하며 더듬거렸다.“…그건, 그때는 폐하께서 작으셔서 제 품에 쏙 들어오셨으니까요.”“작다고?”카르안이 피식 웃으며 우월하게 긴 다리를 쭉 뻗어보였다.“지금은 저보다 한참 크시죠.… 그런데 폐하, 키가 정확히 몇이세요?”“글쎄, 최근엔 안 재봤는데. 191이었나.”“191이요…?”세레인이 입을 벌리고 놀라자 카르안은 그 모습이 즐거운 듯 입매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제 입술 근처로 끌어당겼다.“앞으로도 아까처럼 해. 알겠지?”그는 세레인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척하며 날카로운 송곳니로 여린 살갗을 살짝 긁어 내렸다. 세레인이 숨을 들이켜자 카르안이 만족스러운 듯 입매를 비틀었다.마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카르안은 자연스럽게 세레인을 에스코트하며 내렸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근위대와 경호들이 절도 있게 길을 텄다.입구에는 최측근인 시릴 베르탄과 행정부 소속

  • 복종은 끝나지 않는다   57화. 나를 지키는 시녀

    “세레인, 내가 아무리 작아졌어도 참는 데 한계가 있어.”동그란 뺨을 실룩거리며 내뱉는 경고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세레인은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제국의 정점에 선 오만한 황제가 어린아이의 형상을 하고 제 옷차림에 투정을 부리다니. 그가 정말로 황자였을 시절을 상상해보면 절대 불가능했을 이 상황이 꿈만 같아 즐거움이 배가되었다.결국 타협 끝에 카르안은 세레인이 고른 화려하고 귀여운 레이스 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나왔다. 그 모습은 가게 안의 모든 사람을 홀리기에 충분했다. 겹겹이 쌓인 하얀 레이스와 날카로운듯한 커다란 눈매가 대비를 이루며 천사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마차에 돌아온 카르안은 문이 닫히고 세레인의 무릎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작디작은 손으로 세레인의 말랑한 볼을 콱 움켜잡았다.“아, 폐…… 공자님. 아푸요!”카르안은 타오르는 듯한 눈빛으로 세레인을 쏘아보았다.“너, 누가 여자 옷 가져오래?”“잘 어울리실 것 같아서 그랬죠……. 아! 아야야!”반대쪽 볼까지 사정없이 잡아당겨지자 세레인이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카르안은 그제야 움켜쥐었던 세레인의 볼을 놓아주었다. 그는 자신의 목선부터 어깨까지 겹겹이 쌓인 화려한 레이스를 신경질적으로 툭 쳤다. 그의 시선이 가슴팍에 달린 하트 브로치에 머물렀다.“하…….”카르안이 깊은 한숨을 내쉬자, 세레인은 웃으며 슬쩍 브로치를 빼서 더 잘 보이는 중심부로 고쳐 달아주었다.“공자님, 마음에 드세요? 전 너무 마음에 드는데! 진짜 잘 어울리세요!”세레인이 헤실헤실 웃으며 묻자,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카르안의 눈빛이 깊어졌다. “마음에 드냐고?" 그는 브로치를 만지던 세레인의 손목을 덥석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니. 난 네 눈에 내가 어린 영애 따위로 보인다는 게 불쾌해.”카르안은 세레인의 상의를 잡아당겨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세레인이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뜨기도 전, 입술 위로 짧게 입을 맞췄다.카르안은 입술을 뗀 채, 굳어버

  • 복종은 끝나지 않는다   56화. 핑크색 요정이 된 황제

    세레인은 침대 옆자리를 톡톡 두드리는 카르안의 작은 손가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세 살배기 아이의 형상을 한 황제. 너무나 무해하고 순수하게 보이지만, 분명 그 얼굴 너머에는 저를 욕망하고 무너뜨렸던 황제가 투영되는 것만 같았다.“그....... 카인 공자님, 여기는 침대가 많이 넓지 않은 걸요. 주무시기 불편하시면 어떡해요.”“좁으면 더 가까이 오면 되지 않나. 여기서 자.”웅얼거리는 발음 탓에 투정에 가까웠으나, 그 눈빛만큼은 서늘했다. 결국 세레인은 못 이기는 척 신발을 벗고 조심스럽게 침대 한쪽에 몸을 뉘었다. 그녀가 눕자마자 카르안은 기다렸다는 듯 세레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포동포동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그는 세레인의 어깨에 보드라운 뺨을 부비며 자리를 잡았다.정말…… 인형 같아.세레인은 홀린 듯 카르안의 보드라운 흑발을 손가락으로 살살 쓸어 넘겼다. 낮에 마주했던 그 잔혹한 폭군과는 도저히 매치되지 않는 포근함이었다. 그녀는 어릴 적 칼데론에서 유모가 자신을 재워주며 불러주던 나지막한 자장가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고향의 정취가 섞인 단조로운 멜로디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세레인의 품에 안긴 카르안은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떴다. 그녀의 다정한 콧노래와 규칙적인 심장 박동이 작은 귓가를 울렸다. 세레인은 정말로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제 품에 안긴 자가 제국을 피로 물들인 황제라는 사실도 잊은 채, 그저 지켜줘야 할 가련한 아이로 여기며 애정 어린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그래, 마음껏 보살피고 정을 줘, 세레인. 네가 이 작은 몸을 소중히 여기면 여길수록, 나를 더 떠나지 못할테지.카르안은 세레인의 옷을 작은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마법을 풀고 그녀를 탐하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지금 이 연약한 척하는 인형 놀이는 더 큰 쾌락을 위한 투식(投資)에 불과했다. 그녀가 저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고 무방비해질 때까지.“……세레인, 노래 멈추지 마.”카르안은 잠에 취한 듯 가느

  • 복종은 끝나지 않는다   55화. 아기 폭군

    세레인은 제 팔에 실린 묵직하고도 말랑한 카르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오만한 눈빛으로 저를 집무실 책상 위에 앉히고 몰아붙이던 제국의 폭군이 세 살배기 꼬마로 변한 걸로도 모자라, 이제는 외출을 하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폐하, 정말 이 모습으로 나가시겠다고요?”“응. 수행관들에게는 적당히 둘러댈테니, 네가 함께 가면 된다.”카르안 아니, 이제는 작은 황자님의 형상을 한 그가 제 가슴팍에 뺨을 부비며 읊조렸다. 아기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담긴 명령의 무게는 여전했다. 카르안은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세레인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대고 속삭였다.“나가면 세레인 네가 내 보호자야. 네가 그토록 탐내던 천사 같은 아이를 돌보는 시녀가 되어야 할 거다.”세레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 미치도록 귀여운 생명체가 사실은 제 입술을 집요하게 탐하던 남자라는 사실이 머릿속에서 충돌했다. 하지만 품 안에서 느껴지는 포근한 아기 살냄새와 보드라운 흑발의 감촉에 세레인은 결국 아무런 문장이 새겨지지 않은 마차에 몸을 싣고 황궁을 벗어났다.마차 안에서 카르안은 세레인의 무릎을 독차지하고 앉아 창밖을 응시했다. 평소라면 황금 마차 안에서 내려다보았을 풍경들이었으나, 지금은 모든 것이 새롭고 생경했다.“세레인, 사람들이 자꾸 나를 쳐다보는데.”“당연하죠, 폐하. 아니, 카인... 공자님. 이렇게 예쁜 아이가 마차 창가에 붙어 있는데 누가 안 보겠어요?”세레인이 장난스럽게 그의 보드라운 뺨을 살짝 꼬집었다. 카르안은 불쾌한 듯 미간을 조금 찌푸렸지만, 세레인의 손가락을 작은 손으로 꽉 맞잡았다.수도 브리스의 중심가는 수로를 따라 늘어선 마법 조명으로 축제처럼 화려했다. 마차가 광장 앞에 멈춰 섰다. 마차 문이 열리자마자 쏟아지는 수도의 소음과 화려한 가로등 불빛 아래로, 세레인은 아기 공자님, 카인을 소중하게 안아 들고 내렸다.가판대를 정리하던 상인들과 산책 중이던 귀족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그들에게 쏠렸다. 세레인은 혹여나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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