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랑의 유효기간이 만료되었습니다!: Chapter 61 - Chapter 70

85 Chapters

61화

조심조심 틈새를 벌려 상자 날개를 펼치자, 노릇노릇하게 구워져 단내를 풍기는 애플파이가 모습을 드러냈다.예리는 뜻밖의 내용물에 가만히 눈을 치켜떴다가 가볍게 흘겼다.시선을 돌리자, 종이가방 표면에 박힌 작은 로고가 예리의 눈에 들어왔다.지난주 점심시간, 은영이 한참 동안 자랑을 늘어놓았던 유명한 디저트 카페의 로고였다.바삭한 식감부터 입안에 퍼지는 달콤함까지 워낙 생생하게 읊어대기에, 예리 역시 나중에 한번 먹어보고 싶다며 맞장구를 쳤었다.그걸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예리의 입술 틈으로 피식, 짧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지나가듯 뱉은 사소한 말까지 다 주워 담았으면서, 정작 제 앞에서는 인연에 대한 믿음이 없다고 서늘하게 날을 세우다니.“정말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건지….”파이 상자를 닫는 예리의 손끝이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 공예품을 다루듯 조심스러웠다.박 회장과 이복형제들에게 평생을 고립된 채 감정을 지워내며 살아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그게 상처받기 싫어 부리는 서툰 방어기제인 줄도 모르고, 낮에는 그 말에 진심으로 서운할 뻔했다.…잠시만. 서운?“아니, 이건 아니지. 나예리.”자신이 뱉은 단어에 소스라치게 놀란 예리가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런 감정을 느낄 상대가 아니었다.박 회장의 의뢰를 성공시키는 데 필요한 목표물. 그게 전부였다.그래, 이건 오기였다.그의 호감을 얻어 덫에 빠뜨리기 위해 그동안 들인 공이 얼마인데, 제대로 걸려들기는커녕 믿음이 없다는 소리로 밀어내다니.예리가 파이 상자를 냉장고에 넣고 문을 쾅 닫았다.그가 정 그렇게 믿음 타령을 하며 벽을 친다면, 원하는 대로 그 잘난 신뢰를 질리도록 안겨줄 생각이었다.“아주 질려서, 제 발로 먼저 도망치고 싶어질 때까지 옆에 딱 붙어 있어 줄 테니까. 두고 봐, 유은호.”예리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은호가 풍경을 바라보는 척, 창에 비친 예리의 옆모습을 훔쳐봤다.예리의 이마에서부터 콧날로 매끄럽게 떨어지는 라인을 좇던 은호의 눈매가 짓눌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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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그는 제 가슴을 툭툭 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래서 그날도 일부러 공연 끝나고 2차는 택시 타고 멀리 간 거였습니다. 근처에서 먹으면 또 핸들 잡으려고 할까 봐. 아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근처에서 마시고 차나 좀 미리 빼둘 걸 그랬어.”탁.소진이 머그잔을 내려놓자, 남자의 툴툴거림이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남자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큼, 하여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니까요? 제 운전 경력만 까놓고 말해서 20년이 넘습니다, 20년이! 그런 내가 기어를 N에다 두고 사이드브레이크도 안 채웠다? 제 사전에 그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에요.”“그날, 오후 4시쯤 마지막으로 차량 문을 연 건 확실합니까?”“예, 그 시간에 연 건 맞아요. 그때 마침 차 좀 빼달라고 전화가 왔었거든요.”똑.소진이 들고 있던 볼펜 머리를 누르며 테이블 위로 상체를 바짝 들이밀었다. 매서운 기세에 남자의 어깨가 주눅 든 듯 안으로 움츠러들었다.“누가요?”남자가 슬그머니 침을 삼키며 소진의 시선을 피했다.그는 슬쩍 눈치를 보다가 이내 저보다 어려 보이는 은호 쪽으로 상체를 틀며 눈썹을 느끼하게 들어 올렸다.“아휴, 그날 진짜 마가 꼈던 건지…. 친구들이랑 딱 한 잔… 아니, 오랜만에 한강 나와서 옆자리 여자분들이랑 합석하게 됐거든요. 사장님, 남자니까 딱 아시잖아요. 그런 날은 분위기 타서 술이 잘 들어가는 거.”그 얄팍한 공감 요청에 예리의 시선이 은호에게로 향했다. 찰나, 예리와 눈이 마주친 은호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세차게 손을 내저었다.“전, 전 잘 모릅니다.”은호를 한 번 흘긴 남자는 쓴 입맛을 다시며 그날의 기억을 다시 뱉어냈다.“근데 결국 그 여자분들이랑은 잘 안됐어요. 그래서 속상해서 몇 잔 더 축이고 해먹에 누워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더라고요. 딱 받으니까 여자였어요.”남자가 손으로 전화기 모양을 만들어 귀에 댔다. 그러고는 턱을 치켜들며 간드러진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야! 너 차 똑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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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다리를 덜덜 떨던 남자가 테이블 위의 담뱃갑을 슥 집어 들었다.“그럼, 저는 담배 한 대만 피우고 오겠습니다.”“잠시만요.”테이블 밖으로 막 목을 빼려던 남자가 멈춰 섰다.노골적으로 미간을 구기며 예리를 돌아보는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했다.“그 스태프라고 했던 사람에 대해 조금만 더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예리의 정중한 요청에도 남자는 다리 한쪽을 거만하게 뻗어 대며 까딱거렸다.“아니, 나도 담배가 급해서 그러니까, 우선 한 대 피우고 와서….”“크흠.”낮게 가라앉은 헛기침 소리와 함께, 은호가 한쪽 눈썹을 슬쩍 올렸다.순간 남자의 어깨가 사정없이 움츠러들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의자에 도로 털썩 주저앉았다.그는 슬금슬금 은호의 눈치를 살피며,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거, 거기가 주차 금지 구역이라고 합디다만? 차 댈 때는 그런 표지판 하나 없었단 말입니다.”남자가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억울하다는 듯 목대에 파르르 핏대를 세우는 꼴이 제법 가관이었다.“그래서 내가 그랬죠. 술을 마셔서 지금 당장은 운전대를 못 잡는다! 그랬더니 이번엔 또 언제까지 여기 세워둘 거냐고 꼬치꼬치 묻는 거 아닙니까.”"그래서 뭐라고 답하셨는데요?”“공연 보고 2차까지 갈 거라 내일 아침까지 계속 박아둘 건데 안 되냐고 따졌죠! 그랬더니 뭐라는 줄 아십니까? 갑자기 목소리를 싹 바꾸더니 차 안 빼도 된대요. 그러고는 전화를 툭 끊어 버리더라고요? 하여간 요새 젊은 놈들은 가정 교육을 어떻게 받았는지 원….”남자가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며 거친 욕설을 중얼거렸다.그의 짓눌린 입술과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번갈아 쫓던 소진이 나직하게 물었다.“그 사람, 남자였습니까?”“아니요, 여자였는데요. 목소리가 반질반질하니 딱 대학생 같던데.”‘여자라면….’소진의 뇌리에 지난 회의 때 보았던 CCTV 영상이 스쳤다.귀밑을 겨우 스치던 단발머리.160cm 초반의 왜소한 체구.민수와 해진이 들어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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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심장이 쿵 떨어지는 착각과 함께, 예리가 은호의 가슴을 힘껏 밀쳐냈다.미처 대비하지 못하고 앉아 있던 은호가 손에 냅킨을 쥔 채 어정쩡하게 뒤로 밀려났다.“담배 하나 피우려다 골로 가겠네, 진짜. 아휴, 땀 좀 봐.”매캐한 담배 향과 함께 다가온 남자가 모자를 거칠게 벗어 던졌다. 땀에 젖은 머리를 탈탈 털던 그의 시선이 은호의 손에 들린 냅킨에 꽂혔다.휙.남자가 거침없이 냅킨을 낚아챘다.쓰고 있던 안경까지 벗어 던지며 얼굴을 벅벅 문지르는 손길이 거칠었다.“야, 여기 사장님 센스 끝내주네! 나 땀 흘릴 줄 알고 미리 준비해 주신 겁니까?”원래의 색을 잃고 누렇게 젖어 든 냅킨이 남자의 손안에서 둥글게 구겨졌다.뭉친 쓰레기를 쟁반 위로 툭 던진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그런데 팀장님 볼이 왜 이렇게 빨개요? 실내가 좀 덥나?”화들짝 놀란 예리가 슬그머니 제 손등을 뺨에 대보았다. 화끈거리는 열기가 손등으로 고스란히 배어 나왔다.“아, 여기는 냉방을 안 하나? 왜 이렇게 덥지….”예리가 손부채질을 요란하게 해대자, 남자가 천장의 에어컨을 올려다보았다. 날개가 얌전히 열린 채 시원한 바람을 뿜어내는 것을 확인한 그가 손가락으로 에어컨을 가리켰다.“이미 틀어져 있는데요?”“큼! 사장님, 에어컨 좀 더 세게 틀어주세요!”예리가 남자의 말을 뚝 자르며 카운터를 향해 빽 소리쳤다.남자는 황당하다는 듯 예리를 바라보다가 이내 은호에게 의문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하지만 은호는 한 치의 미동도 없는 덤덤한 낯으로 묵묵히 어깨를 한 번 으쓱일 뿐이었다.그때, 테이블 앞으로 소진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팀장님.”나직한 부름에 요란하던 예리의 부채질이 뚝 멈췄다.예리가 뒤를 돌자, 소진이 턱끝으로 남자를 슬쩍 가리켰다. 은밀한 눈짓에 담긴 의미를 단박에 읽어낸 예리가 남자를 향해 상체를 틀었다.“오늘 이렇게 시간 내어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확인하고 싶었던 부분은 전부 해결됐네요.”남자의 입꼬리가 귀에 걸릴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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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하지만 얼마 뒤, 통화를 끝내고 돌아온 소진의 표정은 잔뜩 그늘져 있었다.“팀장님. 유진이라는 이름의 아르바이트생은 명단에 없다고 합니다.”마우스를 움직이던 예리의 손이 뚝 멈췄다. 그녀가 모니터 너머로 소진을 올려다보았다. 눈동자에 서늘한 침묵이 감돌았다.“없다고요?”낮게 가라앉은 예리의 목소리에 소진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네. 그런데 ‘유빈’이라는 비슷한 이름은 하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급한 대로 그 사람 연락처라도 좀 알려달라고 사정해 봤는데….”소진이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눈치를 살폈다. 예리의 미간이 좁혀질 때마다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개인정보라 절대로 알려줄 수 없다고 딱 자르더라고요….”소진의 목소리가 모기만하게 기어들어 갔다.예리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어쩔 수 없죠. 요즘 같은 시기에 관공서에서 개인정보를 쉽게 내줄 리가 없으니까.”예리는 짧은 한숨과 함께 모니터에 띄워진 사진 속 인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흐릿한 실루엣이 꼭 안개 속에 몸을 숨긴 도마뱀 같았다.꼬리를 잡았다 싶으면 가차 없이 잘라내고 안개 너머로 도망쳐 버리는 영리한 도망자.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워진 공기에 모두 예리의 눈치만 살피던 그때, 가람의 툴툴거림이 적막을 깼다.“아따, 그나저나 그 유진인가 유빈인가는 도대체 어디서 만났을까잉? 노민수 이놈의 자식, 지금까지 동선이 집 헬스장 회사. 집 헬스장 회사만 기계처럼 반복이던디.”“그러게…. 해진 님 말로도 결혼하고 지금까지 집에 늦게 들어오거나 외박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던데.”혜린이 볼펜 뒤에 달린 인형으로 제 입술을 초조하게 톡톡 쳤다. 옆에 있던 승호가 넌지시 손가락으로 턱을 괴며 눈을 가늘게 떴다.“팀장님 지시대로 노민수랑 오지연이 다니는 회사 회원들 위주로 싹 알아봤거든? 근데 노민수 그 자식, 회사에서 다른 여직원들이랑 사적으로 말 섞는 걸 본 사람이 없다네. 철벽남 코스프레 아주 제대로 했더라고.”옆에 있던 은영이 노트북 화면을 팀원들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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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성별을 빼고는 이름도, 심지어 얼굴도 모르는 그 여자를 어떻게 찾으려는 건지. 이건 거의 서울에서 김서방 찾는 꼴이였다.은호의 입술 사이로 무거운 한숨이 새어 나오려던 찰나였다.“기다리시느라 배고프셨죠.”소진이 운전석 문을 열고 차 안으로 들어왔다.“이것 좀 드시면서 하세요.”소진은 편의점 로고가 새겨진 비닐봉지를 콘솔박스 위로 올려놓았다. 바스락거리며 봉지 안을 뒤적거리던 그녀가 내용물 하나씩 꺼내 들었다.“원래 잠복할 땐 화장실 갈까 봐 물도 안 마신대요. 그런데 우리가 형사도 아니고…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굶으면서 하긴 억울하잖아요.”소금빵과 생수를 쥔 소진이 몸을 돌려 뒷좌석의 은호에게 팔을 뻗었다.“이건 이사님 드세요.”“아… 감사합니다.”은호가 커다란 손으로 어색하게 빵과 생수를 받아 들자, 소진이 생긋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이사님, 단 거 별로 안 좋아하신다면서요? 팀장님이 알려주셔서 제일 슴슴해 보이는 걸로 골라 왔어요.”은호의 시선이 손에 들린 소금빵으로 툭 떨어졌다.제 취향을 기억하고 있었다.소금빵 봉지를 쥔 은호의 커다란 손끝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밀려드는 간지러운 감정을 숨기려 묵묵히 창밖을 응시하는 예리의 옆모습을 슬쩍 훔쳐보자, 끝내 참지 못한 입꼬리가 슬그머니 호를 그리며 올라갔다.“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은호는 정작 빵은 옆자리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대신 그는 생수 뚜껑을 따서 바짝 타들어 가던 목을 축일 뿐이었다.“팀장님, 팀장님도 이것 좀 드시고 하세요.”소진이 이번엔 예리에게 봉지를 건넸지만, 그녀는 미동조차 없었다.짧게 숨을 내쉰 소진이 초콜릿 코팅이 된 빵 봉지 입구를 찌익 뜯었다. 달콤한 향이 좁은 차 안으로 금세 확 퍼져 나갔다.“팀장님.”소진은 예리의 얼굴 앞으로 바짝 빵을 들이밀었다. 그제야 예리의 고개가 로봇처럼 스르륵 돌아갔다.“아….”코앞까지 다가온 빵을 멍하니 바라보던 예리가 홀린 듯 소진의 손에서 그것을 받아들었다.“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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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하얗다 못해 창백한 낯빛에는 옅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예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가 입고 있는 야구점퍼 형태의 겉옷으로 향했다. 가슴팍에 선명하게 새겨진 인근 명문대의 로고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유빈은 매장 안을 무심하게 한 번 훑고는 곧장 카운터로 향했다. 카운터 옆 직원 전용 문을 익숙하게 밀고 들어간 유빈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언니, 많이 기다리셨죠. 죄송해요. 빨리 옷 갈아입고 나올게요.”“아니야, 괜찮아. 천천히 해!”꾸벅 인사를 건넨 유빈이 스태프 룸으로 들어가자, 그제야 알바생이 예리에게 시선을 돌렸다.“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죠? 어떤 걸로 드릴까요?”예리는 주문하는 대신 카운터 쪽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방금 온 분도 여기서 일하시는 분인가 봐요?”“네. 저랑 교대하는 친구인데 오늘 개인 사정이 있어서 조금 늦었네요.”“되게 친해 보여요. 대타도 서로 해주고.”“아, 학교 동아리 후배거든요.”뜻밖의 수확이었다.‘잘만하면 오늘 도마뱀 꼬리도 잡을 수 있겠어.’예리가 메뉴판을 두드리던 손끝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유빈 씨는 전공이….”“언니, 얼른 퇴근하세요. 약속 있으시다면서요. 저분들 주문은 제가 받을게요.”어느새 반소매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유빈이 스태프룸 문을 열고 걸어 나왔다.유빈이 카운터 가까이 다가오자, 알바생이 예리에게 양해를 구하듯 가볍게 목례하더니 앞치마를 벗었다.“그나저나 아까 말한 일은 잘 해결됐어? 뭐 큰일은 아니지…?”순간, 유빈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다 멎었다.“아, 심각한 거 아니었어요. 전부 해결해서 괜찮아요.”“그럼, 다행이고. 나 그럼 퇴근 준비할게.”유빈의 어깨를 툭툭 토닥인 알바생이 스태프 룸 안으로 사라졌다.문이 닫히기 무섭게 카운터 주변으로 묘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 서늘한 공기 속에서, 포스기 앞에 선 유빈이 감정 없는 눈으로 예리를 바라보았다.“주문하시겠어요?”예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화면을 터치하려 올라온 유빈의 오른 손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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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은호의 시선에 예리의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이 남자.정말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었다.'저 눈빛….'예리의 눈이 가늘어졌다.분명 자신을 떠보는 중이었다.하지만 여기서 말릴 예리가 아니었다.예리는 마른침을 한 번 삼킨 뒤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아까 대화할 때 노민수 이야기를 살짝 흘렸더니 눈에 띄게 당황하더라고요. 이사님은 못 보셨나 봐요?”예리가 은근슬쩍 곁눈질로 그의 반응을 살폈다.하지만 은호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이 예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거짓말이라도 찾아내겠다는 사람처럼.“CCTV에서 봤던 인상착의랑 목격자들인 말했던 나이대와도 맞아떨어지고요. 물론, 정확한 건 직접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요.”예리의 구구절절한 변명을 하나하나 저울질하듯 은호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큼, 큼!”예리는 슬쩍 옆에 있는 소진을 향해 눈짓했다.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숨 막히는 기류를 눈치챈 소진이 황급히 끼어들었다.“예,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지금까지 봤던 후보 중에서는 노민수랑 접점이 제일 많잖아요. 충분히 의심해 볼 만하죠, 그럼요.”말끝을 흐린 소진이 은호의 눈치를 살피며 침을 꼴깍 삼켰다.이윽고, 정적을 깨고 은호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떨어졌다.“팀장님 말대로, 확인할 필요는 있겠네요.”그가 순순히 시선을 거두자, 예리는 그제야 멈췄던 숨을 내쉬었다.‘저 눈치 빠른 인간 빨리 집에 보내야 해. 그래야 속 편하게 움직이지….’예리는 팔짱을 낀 채 뒷좌석 바닥을 내려다보는 은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저, 그래서 말인데요. 이사님."은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피곤하실 텐데 이만 퇴근하시죠. 전 비서님께는 제가 대신 연락해 두겠습니다.""아니요. 저도 남아서 확인하겠습니다."예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내일 스케줄도 있으시잖아요. 편하게 들어가세요, 좀."하지만 예리는 곧 입을 다물었다.은호가 절대 움직일 생각 없다는 듯 싱긋 웃어 보였기 때문이다.“… 마음대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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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카페 안을 채우던 손님들이 하나둘 자리를 떴다.어느새 창가에 남아 있던 마지막 손님까지 문을 나서자, 카페의 메인 조명이 툭 꺼졌다.잠시 뒤.통유리 문이 열리며 유빈이 밖으로 나왔다.그녀는 익숙한 손길로 보안 장치를 설정한 뒤 인도로 걸어 나갔다.망설임 없는 걸음으로 도로변에 선 그녀가 슥 손을 들었다.끼이익.때맞춰 택시 한 대가 매끄럽게 멈춰 섰다. 유빈은 곧장 뒷문을 열고 올라탔다."강 비서님."예리가 재빨리 안전벨트를 당겨 맸다."저 택시 따라가 주세요.""네!"소진이 곧바로 가속 페달을 깊게 밟았다. 묵직하게 가르릉거리는 엔진음과 함께 차체가 급하게 튀어 나갔다.택시는 한동안 네온사인이 화려하게 쏟아지는 도심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다가 외곽으로 들어섰다.적막 속을 달리던 택시가 마침내 어느 오피스 상가 구역 한복판에 멈춰 섰다.소진 역시 거리를 둔 채 어두컴컴한 모퉁이 그늘 뒤로 차를 세웠다.주변을 둘러본 소진이 낮게 헛웃음을 흘렸다.“와….”간판 불이 모조리 꺼진 빌딩 숲은 거대한 무덤처럼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거리에는 이따금 깜빡이는 가로등 불빛만 드문드문 바닥에 떨어져 내릴 뿐이었다.“직장인들 퇴근 시간 지나면 유령도시라더니, 괜히 소름 돋는데요?”소진이 팔뚝을 가볍게 문질렀다.“그러게요.”예리는 택시 문이 열리는 걸 눈으로 좇으며 낮게 읊조렸다."남들 눈 피하기엔 딱 좋겠네요.”택시에서 내린 유빈은 덩그러니 길가에 서 있었다.그때 멀리서 두 줄기의 헤드라이트가 어둠을 가르며 다가왔다.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그쪽으로 향했다.의문의 차량은 유빈의 맞은편에 부드럽게 멈춰 섰다.스르륵.운전석 창문이 천천히 내려갔다.창문 너머로 불쑥 뻗어 나온 팔 하나가 유빈을 향해 짧게 손짓했다.그 순간.가로등 조명 아래 스치듯 실루엣이 드러났다.노민수였다.유빈 역시 그를 알아본 모양이었다.주변을 한번 훑어본 그녀가 재빨리 길을 건넜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조수석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자, 소진이 황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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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유빈은 흔들리는 눈동자를 애써 감추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딸깍.예리가 녹음기의 재생 버튼을 다시 눌렀다. 테이블 위를 울리던 통화 녹음이 뚝 끊겼다.두 사람 사이로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행사 관계자에게 확인해 봤어요. 그날 차량 통제 지시는 없었다고 하더라고요.”"…….”“노민수가 시킨 거. 맞죠?”유빈의 시선이 컵 손잡이로 미끄러졌다.“지, 지금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는데요. 계속 이상한 소리 하실 거면 저 갈게요.”유빈이 옆에 내려놓았던 연두색 에코백을 대충 어깨에 메고 자리에서 다급하게 일어났다.“아 참! 본인 나오는 영상도 있는데, 그것도 보고 갈래요?”유빈의 등 뒤로 예리의 의미심장한 말이 꽂혔다. 그 순간 바닥만 노려보던 유빈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저 여자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자리를 떠나봤자 내일도 모레도 끈질기게 쫓아올 게 뻔했다.유빈은 하는 수 없이 가방끈을 꽉 움켜쥔 채 목을 확 틀었다. 그러고는 의자 위로 가방을 내팽개치듯 도로 주저앉았다.“그래서요?”유빈의 눈동자엔 일말의 죄책감도 없었다. 그녀는 되레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예리를 쏘아보았다.“차량 통제하라는 말은 없었지만, 거기 원래 주차 금지 구역이에요. 그래서 옮기라 한 거고요. 그게 왜요? 안전 요원으로서 일을 한 건데 그것도 죄가 되나요?”기껏 자리로 돌아와서 하는 짓이 노민수 감싸기였다. 예리의 입에서 커다란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유빈 씨. 사랑 그거 얼마나 갈 것 같아요?”“뭐라고요?”예리가 유빈의 손목을 힐끔 쳐다보았다.“노민수를 향한 그 마음. 기껏해야 두 달이에요.”“너가 뭘, 뭘 안다고 함부로 말해!”유빈의 주먹이 테이블 위를 세게 내리쳤다. 덕분에 테이블 위에 있던 컵들이 가볍게 진동했다.하지만 예리는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도 주지 않았다.“유빈 씨, 마닐라 못 가요.”예리가 다시 녹음기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녹음기에서는 노민수의 목소리와 함께 애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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