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조심 틈새를 벌려 상자 날개를 펼치자, 노릇노릇하게 구워져 단내를 풍기는 애플파이가 모습을 드러냈다.예리는 뜻밖의 내용물에 가만히 눈을 치켜떴다가 가볍게 흘겼다.시선을 돌리자, 종이가방 표면에 박힌 작은 로고가 예리의 눈에 들어왔다.지난주 점심시간, 은영이 한참 동안 자랑을 늘어놓았던 유명한 디저트 카페의 로고였다.바삭한 식감부터 입안에 퍼지는 달콤함까지 워낙 생생하게 읊어대기에, 예리 역시 나중에 한번 먹어보고 싶다며 맞장구를 쳤었다.그걸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예리의 입술 틈으로 피식, 짧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지나가듯 뱉은 사소한 말까지 다 주워 담았으면서, 정작 제 앞에서는 인연에 대한 믿음이 없다고 서늘하게 날을 세우다니.“정말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건지….”파이 상자를 닫는 예리의 손끝이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 공예품을 다루듯 조심스러웠다.박 회장과 이복형제들에게 평생을 고립된 채 감정을 지워내며 살아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그게 상처받기 싫어 부리는 서툰 방어기제인 줄도 모르고, 낮에는 그 말에 진심으로 서운할 뻔했다.…잠시만. 서운?“아니, 이건 아니지. 나예리.”자신이 뱉은 단어에 소스라치게 놀란 예리가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런 감정을 느낄 상대가 아니었다.박 회장의 의뢰를 성공시키는 데 필요한 목표물. 그게 전부였다.그래, 이건 오기였다.그의 호감을 얻어 덫에 빠뜨리기 위해 그동안 들인 공이 얼마인데, 제대로 걸려들기는커녕 믿음이 없다는 소리로 밀어내다니.예리가 파이 상자를 냉장고에 넣고 문을 쾅 닫았다.그가 정 그렇게 믿음 타령을 하며 벽을 친다면, 원하는 대로 그 잘난 신뢰를 질리도록 안겨줄 생각이었다.“아주 질려서, 제 발로 먼저 도망치고 싶어질 때까지 옆에 딱 붙어 있어 줄 테니까. 두고 봐, 유은호.”예리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은호가 풍경을 바라보는 척, 창에 비친 예리의 옆모습을 훔쳐봤다.예리의 이마에서부터 콧날로 매끄럽게 떨어지는 라인을 좇던 은호의 눈매가 짓눌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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