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랑의 유효기간이 만료되었습니다!: Chapter 31 - Chapter 40

54 Chapters

31화

“죄, 죄송해요!”얼굴이 확 달아오른 예리가 화들짝 놀라며 은호에게서 멀어졌다. 예리가 어쩔 줄 몰라 하자 소진이 너스레를 떨며 뒤로 물러났다."자세한 설명은 우리 나 팀장님께 들으시면 됩니다. 팀장님, 이사님께 잘 설명해 드려요!"소진이 사라진 자리, 은호의 시선이 예리에게 머물렀다.예리는 언제 눌러썼는지 모를 모자챙을 더 깊숙이 당기며 고개를 푹 숙였다.은호의 시선을 피하며 그저 그의 운동화 끝만 뚫어지게 응시하던 예리가 겨우 입을 열었다."오늘 하루 저희 인연의 일일 커플 매니저가 되어주시면 돼요. 상담은 저희가 전담할 거니까 옆에서 보조만 해주시면 돼서 크게 어려운 건 없으실 거예요.""네, 알겠습니다. 오늘 제가 와서 방해만 될까 걱정했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니 다행이네요.""그럼, 설문지 보면서 자세히 설명해 드릴게요. 설문지가…."예리가 설문지를 찾으려 부스 구석에 쌓인 상자들을 뒤적였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뭉치째 담겨 있던 설문지 박스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어머! 죄송해요 팀장님. 제가 다른 서류랑 착각했나 봐요. 아까 회사 차에 두고 내린 것 같은데, 제가 얼른 가서 가져올게요!"혜린이 당황한 기색으로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아니에요! 제가 다녀올게요."혜린이 채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예리가 먼저 부스 밖 주차장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어? 팀장님, 제가 가도 되는데….”거의 도망치듯 멀어지는 예리의 뒷모습을 보며 혜린이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그 사이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던 은호가 지체 없이 몸을 틀었다.“저도 같이 다녀오겠습니다. 보조 역할이라면서요.”팀원들이 미처 말릴 새도 없었다. 은호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예리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순식간에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가람이 눈을 가늘게 떴다.“있냐. 오늘 팀장님, 좀 이상하지 않냐? 안 쓰던 모자까지 찾아 쓰고 말여. 이사님 대하는 게 꼭 죄지은 사람처럼 어색하단 말이지. 두 사람 그날 저녁 같이 묵었다더니….”가람의 눈매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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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다들 전단지 돌리러 나갔어요. 저쪽에서 캐리커처 이벤트로 사람들을 싹 쓸어 가잖아요. 우리 애들도 가만있을 수 없어서 풍선이라도 들고 나갔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소진이 답답하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저건… 명백한 반칙이지.”예리가 이를 악물고 낮게 읊조렸다. 당장이라도 매치 랩 부스로 쳐들어갈 기세로 몸을 틀자 소진이 다급하게 예리의 팔을 붙잡아 세웠다."팀장님, 참으세요! 오늘 같은 날 싸움이라도 나면 우리만 손해예요. 지금 시청 직원들이 돌아다니면서 다 체크하고 있다고요."소진의 말에 예리가 주위를 살피자 정말로 명찰을 목에 건 담당자 몇몇이 부스 주변을 돌며 상황을 기록하고 있었다.예리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 거칠게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하여튼 매치 랩, 저런 야비한 쪽으로는 머리가 참 잘도 돌아가.”쓰고 있던 모자를 휙 벗어 던진 예리가 헝클어진 머리를 거칠게 뒤로 쓸어 넘겼다.모자 속에 갇혀 있던 머리카락이 찰나의 움직임에 따라 부드럽게 흩어졌다.그 모습을 잠시 넋 놓고 바라보던 은호는 테이블 아래에 설문지 박스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예리의 옆으로 의자를 조심스럽게 끌어당겨 앉았다."어쨌든 팀장님, 유 이사님께 오늘 할 일 좀 설명해 주고 계세요. 저는 우리 애들 상황 좀 보고 올게요."소진이 서둘러 부스 밖으로 사라지자 부스 안에는 순식간에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주위의 소음이 멀어지고 두 사람의 숨소리만 가깝게 들리는 기분이었다.“매치 랩이라는 곳과 사이가 그리 좋지 않나 봅니다?”은호가 정적을 깨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리는 대답 대신 은호가 내려놓은 박스에서 설문지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네, 좋다고는 할 수 없죠. 아무래도 업계 1, 2위를 다투는 사이니까요.”단순한 설명이었지만, 은호는 예리의 짧은 대답 속에 그 이상의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음을 직감했다.예리가 설문지를 펼치며 말을 이었다.“이사님, 어려운 건 아니라 한 번 들으시면 금방 따라 하실 거예요. 고객님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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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한 중년 남성이 산발이 된 승호의 머리칼을 차마 눈 뜨고 못 보겠다는 듯 안쓰러운 표정으로 전단지를 내밀었다."와, 아까 헤드스핀 죽이던데! 그런데 총각 머리는 괜찮아? 어디 안 까졌나 몰라."남성은 자신의 매끄러운 머리통을 조심스레 쓸어내리며 진심으로 승호의 두피 안위를 걱정했다.“하하! 이 정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죠. 자, 귀한 걸음 하셨는데 이쪽으로 앉으시겠어요?”승호가 능청스럽게 남성을 자리에 앉히자 옆에서 부채질하던 혜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시선을 부스 밖으로 던졌다.“그나저나 우리 잘생긴 선우 씨는 안 더우려나.”은영도 그 말에 동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서 선우가 여전히 묵묵하게 전단지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그때 마침 고개를 돌린 선우가 자신을 바라보는 은영을 발견하고는 활짝 웃으며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은영이 입을 헤벌쭉 벌린 채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해상은 얼굴만 보고 채용하는 건가? 미남의 축복이 끝도 없네."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지유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저게 잘생긴 얼굴인가요?"은영이 기함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네에? 지유 씨, 고개를 돌려서 승호 선배 얼굴 한번 보고요. 그다음에 다시 선우 씨 얼굴을 봐 보세요. 어때요, 이제 좀 감이 오죠?"지유가 미간을 찌푸리며 두 사람을 진지하게 비교하기 시작했다. 분명 같은 공간에 있건만 한 명은 처절한 삶의 다큐멘터리를, 다른 한 명은 싱그러운 청춘 영화를 찍고 있었다.한참을 번갈아 살피던 지유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음… 확실히 두 분, 결이 다른 매력이 있긴 하네요."“결이 다른 게 아니라 세계관이 다른 거겠죠!”은영의 팩트 폭격에 팀원들 사이에서 참았던 폭소가 터져 나왔다.“야, 나도 머리만 만지면 꽤 괜찮거든?!”승호가 억울한 듯 까치집이 된 제 머리를 헤집었다.그 유쾌한 소란 속에서도 예리는 눈에 불을 켜고 오직 은호의 손목만을 집요하게 쫓고 있었다.답답함을 참지 못한 예리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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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은호의 손길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끼어든 불청객의 목소리에 예리의 미간이 단번에 좁아졌다.옆 부스에서 어슬렁어슬렁 걸어온 광수였다.그를 확인한 예리는 다리를 꼬아 앉으며 한쪽 입꼬리만 비틀어 올렸다.“우리 장 팀장님이야말로 캐리커처에 미남계까지 동원하시는 걸 보면, 이번에 아주 이를 악무셨던데요?”광수가 예리의 앞에 멈춰 서서 비죽거리며 손을 내밀었다.“나 팀장, 오랜만이지?”예리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광수의 손을 마주 잡았다.“장 팀장님도 오랜만이네요.”두 사람의 손에 동시에 힘이 들어갔다. 악수라기보다는 서로의 기를 꺾으려는 힘겨루기에 가까웠다.마주 보는 두 사람의 눈 사이로 날카로운 스파크가 튀었다.예리가 먼저 미련 없이 손을 놓아주자 광수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저릿한 제 손을 급히 등 뒤로 숨겼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손가락 마디마디가 욱신거렸지만 억지로 입을 열었다."요새 많이 힘들긴 한가 봐? 하긴, 우리 새로운 매칭 프로그램이 워낙 기가 막혀야지. 구식처럼 사람이 일일이 매달리지 않아도 AI가 딱딱 골라주니까. 결과도 빠르고 정확하고. 안 그래?"광수의 노골적인 비아냥에도 예리는 오히려 안타깝다는 듯 눈썹을 늘어뜨렸다.“에휴, 우리 장 팀장님이야말로 걱정돼서 어떡하지?”예리가 이번에는 입꼬리를 매끄럽게 끌어올리며 덧붙였다.“곧 잘리시겠던데.”“뭐, 뭐?”예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진심으로 염려하는 척 연기를 보탰다."AI가 그렇게 척척 다 해준다는데, 월급만 축내는 장 팀장님을 그 피도 눈물도 없는 임 대표님이 계속 데리고 있을까 싶어서요. 저라면 진작 정리했을 텐데.""뭐? 지금 말 다 했어, 나 팀장!"광수가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얼굴로 예리 쪽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은호가 본능적으로 앞을 가로막으려던 찰나, 예리가 한발 먼저 차갑게 쐐기를 박았다.그녀는 팔짱을 낀 채 광수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한 글자씩 힘주어 뱉었다.“그러니까, 남의 회사 걱정할 시간에 본인 밥그릇이나 잘 챙기시라고요.”예리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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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소진은 더는 선을 넘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듯 서늘한 눈으로 은호를 직시했다."유 이사님도 이 이상은 묻지 마시죠. 딱히 이사님 매칭에 필요한 이야기도 아니잖습니까?"“…….”그 말이 은호의 가슴에 정확하게 박혔다.맞았다. 예리와 자신은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일 뿐이었다. 걱정할 자격도, 물어볼 자격도 없는 사이였다.은호는 그대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이 일렁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은호는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를 삼키며 예리가 사라진 텅 빈 입구를 응시했다.한편, 부스를 빠져나온 예리는 무작정 앞을 향해 걸었다.신경 쓰지 않아야만 했다.하지만 광수의 입에서 그 이름이 튀어나온 순간부터 예리의 이성은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머릿속에선 해묵은 기억들이 비명처럼 쏟아졌다.짐을 싸서 집을 나가던 미영의 뒷모습,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서늘한 눈을 하던 미영. 그리고…."미영아! 너 진짜 왜 이래. 너… 나를 사랑한다 했던 건 진심이긴 했니? 어떻게, 어떻게 네가 예리한테까지!"미영을 붙잡고 울부짖던 형식의 처절한 음성이 환청처럼 귓가를 파고들었다.그와 함께 형식의 손목에 흐릿하게 남겨져 있던 잔혹한 흔적이 눈앞을 가로질렀다.끼이익—.‘그만. 제발, 그만.’기괴한 기계 마찰음은 멈추지 않고 형식의 울음소리와 뒤섞여 예리를 난도질했다. 예리는 순간 밀려오는 극심한 어지러움에 손에 들고 있던 컵을 놓쳐버렸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쏟아진 얼음과 커피가 사방으로 튀었다.깨질 듯한 머리를 감싸 쥔 채 예리는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듯 위태롭게 비틀거렸다.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며 다리에 힘이 풀리던 그 찰나, 누군가 뒤에서 예리의 어깨를 단단히 붙들어 주었다."저기요! 정신 좀 차려보세요. 괜찮으세요?"걱정이 가득 담긴 다정한 목소리가 예리의 귓가를 두드렸다.예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어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보다 체구가 조금 작은 여자가 예리의 안색을 살피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해진은 어깨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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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어, 그러게. 왜 이렇게 익숙하지?”해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때 민수가 손가락을 탁 튕기며 외쳤다.“생각났다! 아까 여기서 전단지 나눠주던 분들 있잖아. 그 쌍꺼풀 진한 남자분이 춤을 어찌나 열심히 추시던지.”“아! 그분들이랑 같이 오셨구나.”예리는 굳이 묻지 않아도 그 ‘남자분’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 것 같았다.“그… 승호 씨라고 했던가? 그분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너무 열정적으로 일하시길래, 저희가 옆에서 전단지 돌리는 걸 좀 도와드렸거든요."'우리 승호 씨, 정말 열일 했구나…!'예리가 나중에 돌아가면 칭찬을 듬뿍 해줘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민수가 주머니에서 구겨진 전단지 한 장을 꺼내 보였다."돌아가시면서 꼭 들러서 상담 한번 받으라고 신신당부하시더라고요."해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런데 저희는 이미 결혼한 사이라, 결정사에 딱히 여쭤볼 게 없을 것 같아서 안 가고 있었거든요."그 말에 예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생긋 미소 지었다."저희가 사실 VIP 고객분들께만 이벤트성으로 커플 케미 분석을 해드리기도 하거든요. 이게 생각보다 꽤 정확한데, 온 김에 한번 보세요. 오늘 저랑 저희 회사를 두 번이나 도와주셨는데, 그냥 보내드리면 제가 너무 죄송해서요.""커플 케미 분석이요? 그런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해진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민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민수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며 해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한번 봐볼까? 사실 저희는 첫 만남부터 서로를 운명이라고 확신했거든요. 그래서 타로니 사주니 하는 것부터 커플 상담 같은 건 볼 생각조차 안 했어요."운명이라는 단어가 민수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 순간, 예리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두 사람의 손목을 향했다.‘…어?’한 명씩 차례대로 훑어 내리던 예리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흔들렸다.사고가 정지된 듯 굳어 있는 예리의 옆에서 민수는 여전히 다정한 손길로 해진을 설득하고 있었다.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린 해진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귀 뒤로 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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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승호가 민수를 보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민수 형님! 언제 오시나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민수가 호탕하게 웃으며 승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아까 승호 씨가 힘들어 보이길래 몰래 에너지바 하나 챙겨드렸거든요. 그랬더니 그때부터 형님으로 불러주시더라고요. 그렇지, 우리 동생?""아휴, 그럼요. 맛있는 거 주는 분은 무조건 형님이죠. 그런 의미로 우리 이사님도 형님이라…."승호가 은호를 향해 기대를 담은 시선과 함께 손가락 하트를 그려 보였다. 하지만 예리가 테이블 쪽으로 몸을 숙여 은호의 앞을 가로막는 바람에 그 장난기는 금세 무색해졌다.예리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그건 안 돼요.”나중에 따로 보자는 의미가 담긴 매서운 눈짓에 승호가 황급히 손을 내리며 고개를 숙였다.승호를 뒤로 물린 예리가 나란히 앉은 부부에게 설문지 두 장을 밀어 놓았다.“그럼 분석에 앞서서, 설문지부터 작성해 주시겠어요?”해진이 설문지를 훑으며 문항이 생각보다 많다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민수가 해진의 어깨 쪽으로 몸을 바짝 붙여 앉았다.“해진아, 이것 봐. 상대에 대한 애착도 같은 것도 물어본다. 우리한테 딱인데?”머리를 맞댄 채 소곤거리는 두 사람 사이로 해진의 웃음소리가 간간이 섞여 들었다. 부스 안은 순식간에 그들만의 세계로 변했다.은호는 그 풍경이 보기 좋다는 듯 옅은 미소를 띠었지만, 옆에 앉은 예리는 달랐다.예리는 테이블 아래에서 제 허벅지를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그녀의 눈은 부부의 얼굴이 아닌 테이블 위에서 움직이는 민수의 손목을 주시했다.펜을 쥔 민수의 오른 손목 안쪽, 불거진 핏줄을 따라 선명한 선홍빛 문양이 각인되어 있었다.하지만 그 문양은 죽은 듯이 가라앉아 어떤 빛도 내지 않았다.그럼 결론은 하나였다.‘저 문양, 해진 씨 게 아니야.’예리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저희 다 작성했어요, 예리 씨.”해진이 설문지를 내밀었다. 예리는 문항을 훑은 뒤 옆에 앉은 은영에게 종이를 넘겼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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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왜 그래, 민수 씨…. 지연 씨한테 무슨 사정이라도 있어?"갑자기 돌변한 남편의 태도에 해진이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민수는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린 것을 의식했는지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이내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를 꾸며냈다."갑자기 소개받으라고 하면 지연이가 당황할 수도 있잖아. 예의가 아니지.""그러긴 한데, 이사님 같은 분이면 지연 씨도 분명 좋아할 것 같아서….""지연 씨. 요새 만나는 사람 있다고 했던 것 같아.""아, 그랬어? 그러면 진작 말을 하지. 이사님, 죄송해요. 소개는 없었던 일로 해야겠네요."소개팅이 무산되자 은호는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몰래 내뱉었다.“아닙니다. 괜찮습니다.”은호가 어색하게 대답을 마무리할 때쯤 테이블 위에 엎어두었던 민수의 휴대폰에서 짧고 강한 진동이 울렸다. 민수가 황급히 손을 뻗어 화면을 확인했다.그 잽싼 움직임에 해진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아까부터 누구야? 오전부터 계속 휴대폰만 들여다보는 것 같은데.""아, 회사 후배. 이번 프로젝트 때문에 주말인데도 출근했거든. 급하게 확인해야 할 게 있다고 계속 연락이 오네."민수는 휴대폰 화면을 가리듯 끄며 주머니 속으로 급히 밀어 넣었다."그래? 주말까지 다들 고생이네. 그 덕에 우리 여보가 제일 고생이고."해진이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민수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아, 입이 좀 마르네. 나 잠시 물 좀 사 올게. 예리 씨, 저 다녀와도 괜찮죠?"민수의 물음에 예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가 부스 밖으로 몸을 틀려던 찰나 옆에 앉아 있던 해진이 다급하게 민수의 손목을 낚아챘다."여보, 같이 가. 아니면 내가 다녀올게! 당신 요새 혼자 다니면 안 되잖아, 응?"해진의 목소리에는 단순한 배려를 넘어선 절박함이 묻어 있었다. 민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손을 차갑게 떼어냈다.갑작스러운 실랑이에 부스 안의 시선이 다시 두 사람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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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지연 씨는 갑자기 왜요?”해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보통 데이트하는 자리에 남이 잘 끼어들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지연 씨라는 분은 오늘 만나기로 하셨다길래 궁금해서요.”예리의 차분한 설명에 해진이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아, 보통은 그렇죠. 그런데 지연 씨는 거의 여동생이나 다름없어요. 남편이랑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거든요. 부모님끼리도 각별하시고요. 저도 결혼 전부터 자주 봤던 터라 편해요.”“그렇구나. 그럼 남편분은 어떻게 만나셨어요?”“대학교 때 동아리에서 만났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사귀다 결혼했죠.”이어지는 2년 전 결혼할 때까지 권태기 한 번 없었다는 해진의 자랑에 팀원들의 부러움 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해진은 애틋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저는 남편 없으면 안 돼요. 민수 씨를 만나고 나서야 제 비워진 반쪽이 채워진 느낌이거든요. 이제는 그 사람 없는 삶은 상상조차 안 가요.”은호는 해진의 얼굴에 머문 그 충만한 표정을 가만히 응시했다.비워진 반이 채워진다는 건 대체 어떤 느낌일까. 자신도 언젠가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은호가 잡다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부스 안으로 승호와 민수가 들어왔다.“저희 왔습니다!”해진이 그들 뒤로 따라 들어오는 여자를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지연 씨!”반갑게 지연을 껴안는 해진을 보며 승호가 상황을 설명했다. 물을 사러 가는 길에 입구에서 우연히 만났다는 것이었다.해진과 인사를 마친 지연이 부스 안 사람들을 향해 생긋 웃었다.화려한 이목구비에 살짝 올라간 눈매가 묘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타입이었다. 그녀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길 때마다 은은한 향수 냄새가 좁은 부스 안으로 번졌다.지연이 콧소리가 섞인 살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 오지연이라고 합니다. 민수 오빠랑 해진 언니랑은 워낙 각별한 사이라, 제가 또 눈치 없이 데이트에 끼어버렸네요.”지연은 해진과 민수 사이를 자연스럽게 파고들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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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예리가 몇 시간 동안 테이블 쪽으로 꼿꼿하게 숙이고 있던 상체를 등받이 너머로 힘껏 젖혔다.팽팽하게 당겨진 척추 마디마디가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뻐근한 어깨를 가볍게 주무르던 예리의 시선이 좁은 부스 안에서 함께 열기를 뿜어냈던 팀원들에게 머물렀다."모두 휴일까지 나와서 고생 많았어요. 끝까지 프로답게 잘해줘서 고마워요, 다들.""와! 진짜 해방이다!"혜린이 감격에 겨운 듯 양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허공에 휘저었다. 옆에 있던 가람은 깊은 곡소리를 내뱉으며 욱신거리는 허리를 두드렸다."아이고, 허리야…. 종일 엉덩이 딱 붙이고 앉아 있었더만 뼈마디가 다 쑤시네. 그나저나 저짝 팀보다는 사람이 많았어야 할 텐디, 결과가 어쩔랑가 모르겄네."인연 팀의 서류 뭉치를 한데 모으던 선우가 가람을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늘 제가 틈틈이 확인했는데, 매치 랩보다는 저희 부스를 찾은 인원이 훨씬 많았던 것 같습니다.""정말요? 오예! 살았다!"선우의 확신에 찬 한마디에 가람과 혜린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부둥켜안고 아이처럼 몸을 흔들며 기쁨을 만끽했다."두 분도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예리가 선우와 지유에게 부드러운 눈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제 곁을 묵묵히 지키고 있던 은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부스에 설치된 백색 조명 아래, 예리의 서늘했던 눈매에 비로소 미미한 온기가 어렸다."유 이사님도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나 팀장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은호의 낮은 목소리가 예리의 귓가에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그 소리가 채 흩어지기도 전, 은영이 힘없이 모아둔 서류 더미 위로 픽 쓰러졌다.고개만 겨우 돌린 은영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은 채 퀭하게 파여 있었다. 텅 빈 뱃속에서는 눈치 없는 꼬르륵 소리가 정적을 찢고 흘러나왔다."배가… 배가 너무 고파서 손가락 까딱할 기운도 없어요."은영이 납작해진 배를 움켜쥐며 앓는 소리를 내자 은호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는 테이블 위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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