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랑의 유효기간이 만료되었습니다!: Chapter 1 - Chapter 10

11 Chapters

1화

“하아, 하아….”오른팔을 타고 뜨거운 액체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수빈은 깊게 팬 상처를 움켜쥔 채 신음 섞인 숨을 몰아쉬었다.고통으로 미간이 일그러졌으나, 두찬을 응시하는 눈빛만큼은 서늘할 정도로 생생했다.“야, 곽두찬! 이제 그만 끝내자!”먼저 죽음을 입에 올리는 당돌함에 두찬의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기괴하게 씰룩였다.그는 수빈의 심장을 향해 총구를 고정했다.“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어, 오 형사. 아니… 오수빈.”눈앞의 총구에도 수빈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오히려 가소롭다는 듯 남자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철컥, 안전장치를 푼 손가락이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탕-!그때였다.“흑….”침 삼키는 소리조차 들릴 만큼 무거운 정적 속에서, 이질적인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예리는 지끈거리는 두통에 눈을 질끈 감으며 미간을 짚었다.“흑……, 흐윽.”참다못한 예리가 무심하게 고개를 돌려 옆자리 남자를 째려봤다.극이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부터 옆자리 남자는 넓은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맙소사, 요새도 이런 신파극에 우는 사람이 있어?’축축하게 젖어 형체를 잃은 휴지로 연신 눈가를 찍어내던 은호가 다급하게 주머니를 뒤졌다. 하지만 이미 다 써버렸는지 빈손만 허무하게 휘저을 뿐이었다.예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가방에서 정갈하게 접힌 손수건을 꺼내 옆으로 툭 건넸다.갑작스럽게 시야에 들어온 손수건에 은호의 울음이 멎었다.은호가 붉어진 눈시울로 고개를 돌렸으나, 예리는 여전히 시선을 무대에 고정한 채 무심하게 팔만 뻗고 있을 뿐이었다.은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손수건을 받아 갔다. 손끝이 아주 잠깐 스쳤지만, 예리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정면만을 바라봤다.“…감사합니다.”은호의 속삭이는 듯한 작은 대답과 동시에 닫혀 있던 무대의 막이 다시 서서히 올라갔다.총알이 관통한 듯 무대 위 남자 배우의 가슴과 입가에서는 붉은 선혈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주원아, 김주원!”수빈의 절규 섞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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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예리가 무슨 볼일이냐는 듯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자 은호가 허둥지둥 손수건을 내밀었다.“이거, 손수건… 감사합니다. 덕분에 정말 잘 썼습니다!”은호의 커다란 손바닥 위에 놓인 손수건을 힐끔 내려다본 예리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행이네요.”말을 마친 예리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그러자 은호가 반걸음 앞으로 나서며 다시 그녀를 불러세웠다.“저…! 손수건은 제가 세탁해서 돌려드리겠습니다. 연락처라도 알려주시면….”예리는 걸음을 멈추고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를 바라보는 무심한 눈매에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그냥 가지든 버리든 마음대로 하세요.”“저, 그래도…!”예리는 은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시선을 뒤로한 채 공연장 밖으로 나가버렸다.홀로 남겨진 은호는 손바닥 위에 남겨진 손수건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짙은 남색과 주황색이 세련되게 배색된 실크 위로 기하학적인 패턴이 수놓아져 있었다.손끝에 닿는 손수건의 매끄러운 감촉이 묘하게 간지러웠다. 하지만, 이상하게 놓고 싶지 않았다.***극장 로비를 가로질러 주은의 대기실로 향하던 예리는 조금 전 남자의 모습이 떠올라 결국 실소를 터뜨렸다.“고맙긴. 시끄러우니까 입 좀 틀어막으라고 준 건데.”뭐, 그 덩치 큰 울보에게 의도가 제대로 전달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말이다.예리는 대기실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네! 들어오세요!”안에서 들려오는 경쾌한 대답에 예리가 문을 열었다.“나예리!”어느새 무대 의상을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주은이 화장대 앞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예리에게 달려오더니 다짜고짜 포옹부터 퍼부었다.예리는 주은의 요란한 환영이 부담스러운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굳이 그녀를 밀어내지는 않았다.예리를 실컷 껴안고 나서야 팔을 푼 주은이 대기실 한편에 놓인 커다란 꽃바구니를 가리키며 웃어 보였다.“오늘도 네가 준 꽃이 제일 큰 거 알아?”바구니에는 노란 프리지어가 탐스럽게 담겨 있었다.“그래?”예리는 무심하게 대꾸하면서도 시선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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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주은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그거 말고는 더 들은 게 없는 거 같은데…."예리는 말없이 제 접시 위의 음식을 뒤적였다.연예계는 물론 스포츠, 정치계까지 발이 넓은 주은조차 이 정도라면 유은호라는 남자를 파악하는 건 생각보다 더 까다로운 과제가 될 것 같았다.“아트센터 행사 말고는 외부 활동도 아예 없는 것 같던데. 친구도 없고, 모임도 안 하는 것 같고… 아! 유은호 아는 사람, 딱 한 명 있다!”주은의 실낱같은 말에 젓가락을 내려놓은 예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누구?”순간 주은이 대답 대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너 예전에 나, 장 의원 아들이랑 사귀던 거 기억나?”“기억 안 날 수가 없지. 그렇게 사귀지 말래도 난리를 치더니 결국엔 걔한테 들려줄 욕 리스트 만들었다면서 보여주던 게 누군데."쾅, 주은은 그때 일이 생각나 테이블을 내리쳤다.“걔는 더 먹어도 싸! 아무튼, 그 자식이 예전에 슬쩍 말한 적이 있거든. 유은호, 걔 완전 로맨스 드라마 덕후라고.”“로맨스 드라마… 덕후? 그거 확실한 정보야?”“그 자식 친구 중에 유은호랑 뉴욕에서 같이 유학한 애가 있나 봐. 인성 더러운 놈이 남 궁금한 건 또 못 참아서, 그 친구를 달달 볶아서 이것저것 캐물었나 보더라고.”“그래서?”예리가 찰나의 틈도 참지 못하고 주은을 재촉했다.“하루는 유은호 집에 놀러 갔는데, 세상에. 방이 온통 드라마 포스터랑 블루레이로 가득하더래.”주은이 흥분을 가라앉히듯 잠깐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너 블루레이 알지? 드라마 끝나면 팬들이 소장용으로 만드는 거. 하여튼 그거랑 대본집까지 아주 전시장 수준이었다나 봐.”예리가 턱을 괴며 눈을 가늘게 떴다.“그런 거 웬만큼 좋아하는 사람 아니면 안 사거든. 게다가 제일 중요한 건 죄다 로맨스물뿐이었대.”“로맨스 드라마라... 일이 길어지겠는데….”예리가 막막함에 낮게 읊조렸다.말이 없어진 예리를 가만히 살피던 주은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아참, 너 오전에 결혼식은 잘 다녀왔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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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웨딩홀이 일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혜영의 부모가 경악한 얼굴로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이게 무슨…!”하객들은 이 상황을 놓칠세라 앞다투어 스마트폰을 꺼내 촬영하기 시작했다.“뭐, 뭐라고요…?”혜영이 귀를 의심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여자는 대답 대신 가방에서 사진 뭉치를 꺼내 혜영의 가슴팍으로 사납게 내던졌다.사진들이 파르르 흩날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한 장, 한 장 주워 확인하던 혜영이 비명을 막으려는 듯 급히 입을 틀어쥐며 주저앉았다.“이, 이게….”하지만 사시나무 떨듯 잘게 떨리는 손끝까지는 감추지 못했다.“나 박현진 애 임신했다고! 이 인간, 나랑 사귀면서 너랑 바람피운 거야!”여자가 식장이 떠나가라 결정타를 날렸다.객석 곳곳에서 탄식과 야유가 터져 나왔다. 웅성거림은 순식간에 비난 섞인 고성으로 변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혜영은 눈물이 가득 맺혀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조금 전까지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던 현진에게 매달렸다.“현진 씨, 아니지? 제발 아니라고 말해줘….”“혜영아, 내가 다 설명할게. 그게, 그러니까!”다급하게 어깨를 붙잡는 현진의 손길이 닿는 순간, 위태롭게 휘청이던 혜영은 결국 정신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졌다.“혜영아!”혜영의 부모가 허둥지둥 버진로드 위로 뛰어올랐다.영숙은 쓰러진 딸을 품에 안고 통곡했고, 목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태준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현진을 향해 달려들었다.“너, 네 이놈! 감히 내 딸한테 이런 짓을 해?”이번엔 현진의 부모가 앞을 가로막으며 태준의 팔을 붙잡았다.“사돈어른, 일단 진정하세요! 남들 보는 데서 이게 무슨 추태입니까!”“진정? 지금 진정하게 생겼냐고!”눈이 뒤집힌 태준이 그대로 현진의 멱살을 움켜쥐고 이마를 사정없이 들이받았다.빡-!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현진이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졌다.“아이씨, 이게 얼마짜리 코인데…! 어? 손에 이거 뭐야… 피? 나 지금 코피 나?”코를 부여잡은 현진이 태준을 향해 악을 썼다.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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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그래서? 너는 그 여자가 신랑 전 애인인 줄 어떻게 알았어?”이야기에 몰입하느라 젓가락질 한 번 못 한 주은이 물었다.“화장실에서 나란히 서서 손을 씻는데, 그 여자 손목에 문양이 보이더라고. 묘하게 예감이 이상해서 따라 나갔지.”예리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무심하게 덧붙였다.“그런데 신랑을 몰래 지켜보더라. 죽일 듯이 노려보는 눈빛에 문양까지 반짝이는데, 전 애인 말고는 설명이 안 되지.”“와, 세상에 그런 일이 다 있냐.”“내가 항상 말하잖아. 사랑, 그거 별로 특별한 감정 아니라고. 오늘 네 배역도 솔직히 이해 안 돼. 사랑하는 남자가 죽었으면, 슬퍼할 시간에 남긴 재산이나 확인해야지. 안 그래?”예리의 진담 반농담 반의 섞인 말에 주은이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그런데, 나만 이해 안 됐나 봐. 나 빼고 다 울더라. 특히 옆에 앉았던 남자는… 에휴, 됐다. 네 팬인 거 같으니까 그냥 넘길래.”“다른 사람들 반응이 지극히 정상인 거랍니다, 나예리 팀장님.”주은이 이마를 짚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오랜 친구이긴 했지만, 사랑에 한해서만큼은 두 사람 사이에 공감대라곤 전혀 없었다.주은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리는 여전히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사랑이 끝나는 날부터 눈에 들어오는데, 그걸 어떻게 덥석 믿니?”"그래도, 세상 어딘가엔 영원한 사랑을 가진 사람이 존재할 수도 있는 거잖아.”주은의 귀여운 반박에 예리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내가 지금까지 본 손목이 몇 개인 줄 알아? 단 한 번도 없었어. 내 사무실 찾아오는 사람들 봐. 다들 사랑 찾으러 왔다면서, 막상 리스트 내밀면 상대 등급부터 따져. 사랑이 그렇게 대단한 감정이라면서.”“그건... 현실적인 조건도 중요하니까….”“난 그런 모순을 매일 밥 먹듯이 보고 사는데, 하루아침에 사랑의 힘 같은 게 믿어지겠어?”자신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주은에게 예리가 충고하듯 덧붙였다.“그러니까 너도 그만 사랑 타령하고, 돈이나 모아. 사랑은 변해도 돈은 안 변하니까.”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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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그러니 은호 너라도 가야 하지 않겠니? 엄마는, 우리 착한 아들이 절대 날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아.”해미가 쥐고 있던 은호의 손에 힘을 주었다. 부드러운 손길과 달리, 눈빛은 서늘할 만큼 강압적이었다.해미가 자신을 '아들'이라 불러줄 때마다, 그는 매번 무너졌다. 그녀가 목적이 있을 때만 어머니 행세를 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은호에게는 그 가식적인 온기조차 절실했다.그녀와 두 형조차 자신을 외면한다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라는 공포. 은호는 이번에도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착한 아들의 가면을 쓰기로 했다.“네, 어머니. 그럼 한번 만나 볼게요.”“잘 생각했어. 올해 결혼한 유력 가문 자제들 반 이상은 인연에서 진행했다더구나. 나 팀장, 실력 하나는 독보적이니 걱정 말렴.”해미는 얼마 전, 예리와의 만남을 떠올리며 나긋하게 말을 이었다.“내가 너는 특별히 더 신경 써달라고 직접 당부해 뒀어. 내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네 매칭은 아주 공들여 준비할 거야.”“네, 감사합니다.”은호는 막막한 속을 숨긴 채 강박적으로 미소를 지었다.“올해는 은호 덕분에 나도 혼주복 좀 입어볼 수 있으려나?”해미가 혼자 즐거운 듯 우아하면서도 기괴한 웃음을 터뜨렸다. 주방 안을 가득 채우는 해미의 서늘한 웃음소리 사이로,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만이 식탁 위를 위태롭게 채웠다.누구 하나 은호의 기분을 헤아려주는 이는 없었다. 도현은 여전히 은호를 없는 취급 했고, 동현은 은호를 얄밉게 쏘아볼 뿐이었다.은호는 입안의 음식물이 모래알처럼 느껴졌지만, 해미의 만족스러운 미소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기계적으로 턱을 움직였다.***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은호가 답답한 듯 뒷좌석 창문을 내렸다.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니 울렁거리던 속이 조금은 진정되는 기분이었다.백미러로 은호의 안색을 살피던 선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사님, 근처 약국에서 약이라도 사다 드릴까요?”한강 너머 화려한 불빛을 내뿜는 빌딩 숲을 응시하던 은호가 선우에게 시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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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예리는 점심조차 1층 카페의 샌드위치로 대충 때운 채, 해성 관련 자료를 훑는 데 여념이 없었다.해상 그룹.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 IT와 통신, 금융을 넘어 이커머스까지 국민의 일상을 장악한 그들은 거대한 블랙홀이라 불릴 만큼 압도적인 영향력 가졌다. ‘해상이 무너지는 날엔 대한민국 전 국민이 무너진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 정도였다.그런 박 회장의 직접 움직이는 것도 이례적이지만, 의뢰 대상이 유은호라는 점이 예리를 더 깊은 생각에 잠기게 했다.마흔에 가까운 두 아들에게 직접 생선 살을 발라주는 사진이 화제가 될 만큼, 첫째와 둘째를 향한 박 회장의 애정은 유별났다. 그런 그녀가 발 벗고 나선 상대가 금지옥엽 두 아들이 아닌, 배다른 자식으로 알려진 막내 유은호라니.자식의 결혼조차 철저히 계산된 비즈니스로 이용할 박해미였다. 이득이 없는 곳엔 눈길조차 주지 않는 그녀가 유은호의 결혼을 주도한다는 사실은, 이번 방문이 결코 순수한 의도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유도현도 유동현도 아니고, 왜 하필 유은호지?’그때 태블릿 화면 속, 19년 전 기사 하나가 예리의 눈에 들어왔다.[[단독]’아르케 리서치’ 박해미 대표, 해상 유상만 회장과 11일 백년가약]이혼 후 두 아들을 홀로 키우던 박해미와 은호의 부친인 유상만 회장이 재혼했다는 소식이었다. 당시 정·재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해상 그룹의 새로운 안주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자선 행사에서 만나 약속이라도 한 듯 빠르게 가까워진 두 사람은 혼인 신고 후 세 아들과 함께 매체에 자주 얼굴을 비췄다. 대중의 부러움을 사는 화목한 재벌가 가족의 표본이 되었지만, 그 행복은 그리 얼마 가지 못했다.예리는 화면을 위로 쓸어 넘겼다. 2년 뒤, 유 회장의 갑작스러운 부고를 알리는 대대적인 보도들이 줄을 이었다. 예리는 그 중 뉴스 영상 하나를 재생했다.-해상 그룹 유상만 회장이 어젯밤 교통사고로 별세했습니다. 유 회장은 가족과의 여행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직접 운전대를 잡았던 것으로 확인됐습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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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멀리서 찍힌 사진이라 형체는 흐릿했으나 낮은 화질을 뚫고 뚜렷한 이목구비가 배어 나왔다.‘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은데….’찰나의 기시감이 스쳤으나 예리는 곧장 의심을 지워냈다. 최근 자료조차 1년 전인 사람을 마주했을 리 없었다.언뜻 보기에도 수려한 외모, 좋은 학벌과 집안 게다가 선대 회장의 친아들이라는 상징성까지. 결혼 시장에서 그의 가치는 측정 불가였다.결정사 문을 두드리기도 전 내로라하는 가문들이 그를 사위로 삼으려 일찌감치 줄을 섰을 터였다.그중에서 고르면 되지 굳이 왜.예리는 습관적으로 턱을 괴고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 톡 두드렸다. 시선은 여전히 화면 속 흐릿한 유은호에게 고정된 채였다.시계 초침이 몇 바퀴를 돌고 나서야 짧은 노크 소리가 정적을 깼다.“팀장님, 박해미 회장님 곧 도착하신답니다.”데스크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몸을 바로 세운 예리가 흩어진 자료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요?”예리를 바라보는 소진의 눈빛에는 은근한 걱정이 서려 있었다.“해상 관련 자료는 충분히 확인하셨어요? 워낙 만만한 분이 아니시라… 걱정이 돼서요.”예리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태블릿을 껐다.“지금 자료로는 턱없이 부족하네요. 특히 유은호 이사에 대한 건 백지상태나 다름없고요.”예리는 서류를 가지런히 모아 서랍에 넣었다. 그러곤 살짝 미소 지어 보였다.“그래도 지금부터 정신 똑바로 차려야죠. 박해미 회장이 무슨 패를 들고 왔든 휘둘리지 않으려면.”표정은 차갑게 가라앉았으나 눈동자만큼은 흔들림이 없었다.***소진의 안내를 받은 박해미가 예리의 사무실로 들어섰다.짙은 초록빛 슈트를 차려입은 그녀는 등장만으로 공간의 공기를 뒤바꿔 놓았다.예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걸어갔다.다가오는 예리를 향한 해미의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떨어졌다.예리는 그 날카로운 안광에 목덜미의 솜털이 쭈뼛 섰으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숙이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고개를 숙였다.“처음 뵙겠습니다, 박해미 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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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최악의 짝이라는 게, 정확히 무슨 말씀인지….”박 회장이 테이블 너머 예리를 향해 상체를 깊숙이 숙였다. 그리곤 낮게 깔린 목소리로 은밀하게 속삭였다.“말 그대로예요. 나도 다른 고객들처럼 아들의 결혼 상대를 찾으러 인연에 온 게 맞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최악인 상대를 찾으러 왔다는 거?”잘못 들은 게 아닐까. 예리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지구상 최악의 결혼 상대를 골라달라는 의뢰는 커플 매니저 일을 시작한 이래 처음이었다.“저희 인연의 설립 취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의뢰라 당혹스럽습니다. 실례지만 굳이 이런 일을 맡기시는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그 순간 해미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숨이 넘어갈 듯 고개를 뒤로 젖히며 박장대소하는 그 기괴한 광경에 예리는 말문이 막혔다.한참을 끅끅대며 웃던 해미가 간신히 숨을 골랐다. 그녀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가볍게 훔치더니, 굳어버린 예리를 빤히 바라보았다.“그동안 나 같은 의뢰인은 없었나 봐요? 하기야 보통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길 바랄 테니까. 나 역시 그래요. 내 자식들은 누구보다 행복해야지.”말을 마친 해미가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를 지워냈다. 대신 입술 끝을 비릿하게 끌어 올렸다.“그런데 유은호는, 내 아들이 아니잖아?”아무리 친자식이 아니라지만 수십 년을 한 집에서 지내온 사이였다.그 긴 세월을 단 한 문장으로 부정하다니….일말의 애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심한 태도에 예리의 등 뒤로 얇은 소름이 돋았다.“나 팀장 아까 내가 은호의 지분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고 했죠?”예리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나는 해상의 차기 리더 자리를 우리 도현이와 동현이에게 물려주기 위해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어요. 그리고 최근에 그 모든 준비를 끝냈고.”순간 해미의 눈에 서슬 퍼런 살기가 돌았다.“그런데 해결 못 한 결정적인 문제가 딱 하나 있네?”해미가 짜증스러운 기억을 떨쳐내려는 듯 거칠게 다리를 바꿔 꼬았다.“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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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유은호 걔가 도통 반응을 안 하더라고. 어설픈 연기는 귀신같이 알아채는 건지, 아니면 눈이 지나치게 높은 건지. 그렇지, 문 비서?”해미가 이마를 짚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곁에 있던 서준이 말을 거들었다.“심지어 섭외한 배우들이 유 이사님께 역으로 빠져드는 바람에 작전이 틀어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미간을 짓누르며 화를 삭이던 해미가 돌연 고개를 치켜들었다. 번뜩이는 눈동자에는 독기 어린 기대가 서려 있었다.“그래서 나 팀장을 찾아온 거예요. 업계 성혼율 1위. 한 번 맺은 인연은 파혼조차 없다는 그 전설적인 실력.”해미의 시선이 예리에게 못 박혔다.“대한민국에서 짝을 제일 잘 찾아준다는 전문가니까, 우리가 원하는 조건을 갖춘 사람도 기가 막히게 골라내지 않겠어?”예리는 내심 눈을 가늘게 떴다.그녀가 이런 꺼림칙한 의뢰를 맡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게다가 서슬 퍼런 경영권 싸움에 끼어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법이었다.무엇보다 예리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순간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늪에 발을 들이게 될 것이라고.예리가 정중한 거절의 말을 고르려 입술을 떼던 찰나였다.해미가 그 기색을 귀신같이 채가며 거부할 수 없는 패를 던졌다.“물론 우리도 맨입으로 부탁하는 건 아니에요. 나 팀장도 뭔가 얻는 게 있어야 움직일 거 아니야. 비즈니스라는 게 다 그런 거니까.”해미가 고개를 돌려 가볍게 손짓했다.대기하던 서준이 태블릿을 해미의 손 위에 올렸다. 그녀는 건네받은 태블릿을 여유롭게 테이블 중앙으로 밀어 놓았다.“요새 인연이 많이 힘들겠어요. 매치 랩인가 하는 곳에 고객을 꽤 뺏겼더라고.”예리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화면에는 인연에서 이탈해 경쟁사로 옮겨간 회원 수와 급락하는 시장 점유율 그래프가 띄워져 있었다.예리가 가장 감추고 싶어 하는 약점을 기막히게 꿰뚫는 박해미다운 방식이었다.‘매치 랩(Match Lab)’은 거대 IT 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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